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5:28:19

개황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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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집필4. 개황력의 해설서?5. 기록

1. 개요

開皇曆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인용된 가야, 정확히는 금관가야에 관한 사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야계 사서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책[1]이며 지금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인용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하지 않는다. 개황록(開皇錄)과 동일한 책으로 추정된다.

2. 설명

개황력의 내용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부분으로 미뤄봐서 금관국의 역사를 신라시대에 살던 후손들의 입장을 반영해 쓴 것으로 보이며, '황실을 열었다'는 개황의 의미처럼 조상들을 매우 높이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화성이 짙은 내용으로 가득한 가락국기에 인용됐단 점에서 개황력의 내용도 설화적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삼국유사보다 앞서 김부식삼국사기를 쓸 때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설화적 성격이 김부식의 유교적 관점에서 터무니없기(괴력난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3. 집필

남아 있는 기록이 책 제목과 내용 두세 줄이 전부이기 때문에 집필자가 누구인지, 집필 시기는 언제인지에 관해 말이 많다. 가락국의 멸망(532년)부터 개황력이 인용된 가락국기의 집필 시기(1075년 경) 사이의 언젠가 집필된 것만 확실하고, 그 외는 알 길이 전혀 없다. 이에 여러 설이 나왔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6세기 중반 진흥왕대 설
    진흥왕이 황룡사[2]를 지을 즈음, 신라의 '자존의식'이 높았을 당시, 가락국을 정벌한 다음 가락국 사람들에게 신라국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국사를 편찬하며 동시에 개황력을 편찬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 의견에 의하면 가락국은 신라에게 자진하여 투항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락국을 우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추가적으로 가야 통합에 대한 명분도 삼을 수 있었다. (유우창)
    그러나 가락국의 후예가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시기는 이보다 후대인 김유신이나 문명왕후가 있던 시점이므로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남재우)
  • 서기 581~600년 설
    중국 수나라 고조연호 중 개황이 있는데, 이 무렵인 서기 581년 ~ 600년에 쓰여졌다는 설. 이 해석대로면 금관가야 멸망과 신라 편입 이후 신라 진평왕 시대쯤에 각 나라의 역사서가 쓰여지던 시점에 함께 쓴 책이라는 것이다. (미시나 쇼에이, 조인성 등)
    주보돈은 6세기 후반이라면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있을 시절인데 중국과 아무 상관없는 가야사를 서술한 책에서 수나라 연호를 굳이 이 책 이름으로 사용할 이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 7세기 중후반 설
    제목의 개황(開皇)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황국을 열었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경우이다. 이는 금관가야황제국으로 높여 썼다는 말인데, 신라 사회에서 왕가도 아닌 김해 김씨들이 자기들 옛날 선조 얘기에 저런 거창한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금관국 후손들의 위상이 가장 높아진 시점, 즉 김유신이 전쟁영웅에 오른 시점부터 삼국통일의 열기가 아직 가시기 전인 7세기 중후반에 쓰였다는 해석이다. (주보돈, 백승충 등)
    이에 여러 근거가 있는데, 가령 허왕후의 '왕후'라는 표현이 신라 중대에 자주 사용되던 것으로 보아 문무왕 즈음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김태식), 가야계 후손이 정치적으로 절정에 달했고 금관소경을 설치하기도 한 문무왕 전후 시기라는 주장(남재우), 문무왕이 본인의 외가를 높이기 위해 수로왕을 신라의 종묘에 합사시킨 적이 있는데, 이 즈음 편찬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선석열)
    그러나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서 인용한 김유신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김수로가)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직계'라는 내용이 있어서, 신라 중대 즈음부터 소호금천씨 출자설이 대두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 비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적었는데, 여기서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유우창)
  • 8세기 후반 혜공왕대 설
    삼국유사에 의하면 779년(혜공왕 15년) 김유신 묘에서 일어난 회오리 바람이 미추왕릉으로 들어간 후, 능 속에서 김유신과 미추왕의 대화가 들렸다. 김유신이 '신은 일평생 신라를 위해 싸웠는데, 지난 경술년(770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었다[3]'고 읍소하자 미추왕이 '나와 공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어떡하겠냐, 전처럼 다시 힘써달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신라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며 무열왕계가 단절되고 김유신의 가문이 김흠돌의 난 등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었는데, 이 내용이 설화적으로 실려 있는 것이다. 이에 가문의 후손들이 본인들의 가문의 복권과 정통성 주장을 위해 집필했다는 설이며, 김유신행록이 이와 같은 이유로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영식 등)
  • 나말여초(10세기 전후) 설
    신라의 통제력이 무너진 나말여초(후삼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 신김씨 후손들이 과거의 왕손임을 강조하려 썼다는 의견이다. '개황(황제국을 열다)'과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후삼국시대 ~ 고려 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정중환 등)

4. 개황력의 해설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양산문화원에서 2008년 발행한 '취서사지'라는 책의 부록에, 개황력의 해설서가 수록되어 있다. 양산문화원이 취서사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1960년대까지 전라도에 개황력의 사본이 있었다는 정보를 확인해 입수하려 했지만 이미 실전된 뒤였고, 밀양에 거주하는 김 모 씨가 해당 사본의 해설서만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 하지만 교차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실 여부는 불명이므로, 이런 것도 있다 정도로만 참고하는 것이 좋다. 단편적인 예시로, 이 해설서에 의하면 개황력은 서기 201년에 집필되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개황력을 인용하며 가야의 멸망 기록(532년 혹은 562년)을 얘기하고 있다. (참고로 이 해설서에 의하면, 제목의 開皇은 김수로왕의 연호이다. 원년은 CE42년.)

5. 기록

다음의 두 문장이 개황력에 대해 남아 있는 내용 전부이다. 그나마도 책의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가야사와 관련된 문헌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開皇暦云 “姓金氏, 盖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厼.”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가락국기 거등왕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開皇録云, “梁中大通四年壬子降于新羅.”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가락국기 구해왕


[1] 정확한 집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아래의 '집필' 문단 참고.[2] 노란 용은 대개 황제를 상징한다.[3] 혜공왕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 당한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