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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삼국유사》 중 기이 제 2편에서 인용된 가야, 정확히는 금관가야에 관한 사서다. 신라 중~말기 기록인 개황력 등을 참고해서 집필했다고 추정한다. 고려 초 11세기 중후반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썼다고 알려졌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문헌이다.2. 설명
文廟朝 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문종 때인 대강(大康) 연간[1]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2][3]이 지은 것이다. 지금 간략히 하여 그것을 싣는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각주
《삼국유사》 에서 인용된 가야의 사서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락국기에 있는 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오고, 그 후대의 왕은 이름과 재위시기만 옮겨놓은 다음 생략하는 식으로 처리해버려서 사실상 실전되었다.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문종 때인 대강(大康) 연간[1]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2][3]이 지은 것이다. 지금 간략히 하여 그것을 싣는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각주
내용이 손실된 것도 문제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따져도 역사로서 사실(史實) 정확성이 확실히 담보되진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일연이 요약해서 실은 내용이 가락국기에서 전하는 수로왕과 허황옥의 설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인지, 혹은 신이하고 불교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일연이 취사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책 원문이 전하지 않으므로 책을 편찬한 배경이나 가락국기가 인용한 문헌 등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
그래서인지 실제 백제삼서, 일본세기를 인용해 제작된 일본서기나 기록이 아닌 고고학으로 보는 가야의 모습과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가뜩이나 남은 게 없는 가야의 역사인지라, 가야의 초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다. 그나마 《삼국사기》보다는 가야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다.
3. 내용
나무위키에 등재된 가야의 왕사에서 금관국 왕사의 기록들과 수로왕과 허황옥에 대한 설화 정도가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가락국기의 거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4]가야 신화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 설화와는 달리 수로왕의 탄생, 가락국 건국, 허왕후와 결혼, 사후의 제사 의식 등을 두고 완전한 서사를 서술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것이 오랜 기간 전승되며 윤색되고 가필되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가령 황금알 6개에서 여섯 가야의 임금이 각각 나왔는데 그 중심에 금관가야의 김수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두고, 후대의 시각이 반영되었다는 근거로 들기도 한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도래를 청동기 사회에 도래한 철기인들로 이해하는 의견도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김수로(金首露)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김수로는 철을 장악한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허황옥(許黃玉)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허황옥은 옥이나 유리 구슬 등을 교역했던 집단을 상징했던 인물로 본다.
3.1. 수로왕 신화
서기 42년, 촌장(干) 9명이 있는 곳 근처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사람들이 가보았더니, 하늘에서 왕을 내려줄 테니 구지가를 부르며 춤추라는 말이 들렸다. 이에 사람들이 노래하며 춤을 추니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내려왔고, 열어보니 안에 알 6개가 있었다.다음 날 아침에 이 알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했는데,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에 이르렀다. 알에서 태어난 여섯 명은 각각 여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5], 그 중 하나가 대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이다. 가야의 영토는 동으로는 황산강[6], 서남쪽은 창해[7]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 남쪽은 나라의 끝에 이르렀다.
3.2. 허황옥 신화
서기 48년, 수로왕이 신하를 시켜 망산도라는 섬에 가 기다리게 하였더니,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오고 있었다. 임금이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왕비가 임금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이때 왕비가 조용히 말하였다."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말씀하시기를 꿈에서 하늘의 명령이 있어 당신과 결혼하러 왔습니다."
임금과 왕비가 결혼한 뒤 수로왕이 관제를 중국식으로 고쳐 정비했다. 이로써 나라가 잘 다스려졌고, 왕후는 곰의 꿈을 꾸고 사내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거등왕이다. 서기 189년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157세였다.
4. 관련 항목
[1] 1075~84년, 가락국 멸망 후 약 500여 년 후[2] '문인이었던 금관지주사'가 썼다는 말이냐, 아니면 '금관지주사에 속한 어느 문인'이 썼다는 말이냐 하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은 후자.[3] 이 문인의 정체도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숭선전신도비문(崇善殿神道碑文)』에 따르면 고려 문종대에 지금주사(知金州事)를 지냈던 김양일(金良鎰)이 수로왕릉을 보수하러 왔고, 그와 관련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김양일이 지은 것이 아니냐 설이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4] 수로왕 설화와 허황옥 설화가 절반 정도, 수로왕과 허황옥에 대한 신라와 고려에서의 제사 기록이 25% 정도, 역대 금관국의 왕사가 25% 정도, 그리고 기타 내용이 5% 정도를 차지한다. 사실상 수로왕에 관련된 내용만 7할 이상인 셈. 이 때문에 가락국기의 형식이 일반 역사서와는 다르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5] 현대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믿지 않고, 여섯 가야가 생긴 후대의 시각이 신화에 반영되었다고 본다.[6] 낙동강의 하류로 본다.[7] 창해는 보통 동해에 비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