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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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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
高麗史
파일:external/www.ecumenian.com/13649_24333_4159.gif
시기 15세기 조선
권 수 137권 75책
분량 918년 ~ 1392년 (474년)
고려태조 원년 ~ 공양왕 4년

1. 개요2. 편찬 과정3. 구성
3.1.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3.2. <고려세계>(高麗世系)3.3. <수사관>(修史官)3.4.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3.5. 목록 상3.6. 목록 하3.7. <세가>(世家) 46권3.8. <지>(志) 39권3.9. <연표>(年表) 2권3.10. <열전>(列傳) 50권3.11. <단군편>?
4. 역사5. 분량과 가치6. 한국어 번역7.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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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고려사.jpg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사서(史書). 드물게 사용되기는 하나 줄여서 《여사(麗史)》라고도 한다.

완질본으로는 현재 보물 제2115-4호로 지정되어[1]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서 보유한 판본이 있다. 이 외에서 연세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아직 국보보물로 지정되진 않았다가 2020년 12월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으며(관련기사), 2021년 2월 17일에 보물 제2114-1호, 제2114-2호,[2] 보물 제2115-1호~제2115-4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2115-1호와 2115-2호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제2115-3호는 연세대학교 소장본, 제2115-4호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본이다.

건국 후 조선 왕조는 태조 대부터 동양 유교적 왕조의 전례대로 전(前)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했는데, 이것이 《고려사》로서 제5대 문종 원년에 와서야 완성하였다.

2. 편찬 과정

《고려사》의 편찬 기간은 60여 년이며 그만큼 많은 곡절을 가지고 완성된 역사서이다.

맨 처음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고려사》의 편찬 명령을 받은 것은 우시중 조준, 시랑찬성사 정도전, 예문관학사 정총이었다. 명령을 받은 이듬해인 1395년 정월, 정도전과 정총이 편년체로 《고려국사》 37권을 완성하였다. 이전 왕조의 역사가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로 기술되었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대기 방식으로 서술된 편년체 역사서는 필수적으로 방대한 사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이전 왕조의 사료를 모아 분류하고 또 그 편찬 방향을 심의하는 사국(史局)을 열어 토론을 거친 연후에 만드는 것이 옳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고려국사》의 편찬기간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첫번째 고려 역사 편찬의 결과물은 그 편찬을 명한 조선 건국의 주인공인 태조를 위시한 전주 이씨 왕실과 신진사대부 세력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책이 되었고, 무인정사를 통해 정도전을 제거한 제3대 태종 이방원은 즉위 이후 《고려국사》의 대대적인 개정 작업을 명한다.

태종 시절 《고려국사》의 개수는 영의정 하륜이 맡았다. 하륜은 지춘추관사 한상경, 동지춘추관사 변계량과 함께 《고려국사》를 3분하여 각기 집에서 개수작업에 착수하기로 하나, 그해 겨울 하륜이 사망하며 개수가 중단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당시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다시 예문관 대제학 유관, 참찬 변계량에게 《고려국사》를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유관은 고려시대의 여러 용어를 당시 사용했던 그대로 싣자고 주장했고, 변계량은 유교적인 대의명분에 맞게 정정하고 고쳐 쓰자고 주장하여 책임자인 두 사관이 대립하였다.

고려시대 왕들의 묘호는 종(宗)이었고, 왕이 자신을 부르는 말은 짐(朕)이라 했으며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자는 태자라 불렀다. 변계량은 이걸 모두 조선의 입지에 맞게 바꿔부르자고 했다. 반면 유관은 그냥 있었던 그대로 직서하자고 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상태에서 교정이 잘 이뤄졌을 리가 없다.

결국 세종 6년(1424)이 되고 나서 유관과 윤회가 어떻게든 《수교고려사》를 완성하였다. 유관은 직서를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용어 표기를 고려식 그대로 하였다. 세종대왕이 변계량의 명분론을 비판하고, 유관의 견해를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교고려사》는 무척 짧은 기간에 편찬된 《고려국사》를 기본으로 하여, 여전히 《고려국사》의 한계들을 그대로 답습했다. 《고려국사》는 37권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인 반면 《고려사》 최종본은 139권이다. 또한 정도전 등 당시 편찬자들의 입장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반영했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수교고려사》가 《고려국사》의 수정본인 한 근본적인 문제는 크게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이에 세종 13년(1431) 정월, 왕은 《수교고려사》를 또 다시 개수하도록 명하였다. 이전의 개편이 용어의 직서문제 관철 위주로 돌아갔다면, 이번에는 내용 보충과 아울러 고려 역사의 체제 문제가 부각되었다. 중국 정사의 예에 따라 기전체로 하자는 주장과, 기전체는 동일한 내용이 <본기>, <열전> 및 <지> 등에 중복으로 나오는 단점이 있으니 그냥 편년체로 하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최종적으로는 편년체로 하되 더 많은 기록을 보충해보자는 결론이 되어 다시 개편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권제, 안지 등이 편찬 책임을 맡아 추진된 이 개편 작업은 세종 24년(1442) 《고려사 전문》이 완성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고려사 전문》은 인쇄까지 된 상태에서 문제가 터져 반포가 중지되었다. 편찬 책임자인 권제가 그의 조상인 권수평 등의 전기를 조작했다가 딱 걸려버리는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고려 역사 편찬은 이 사건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또한 다른 편찬 책임자들에게도 문책이 뒤따랐는데 자료 조작도 조작이지만 《고려사 전문》개편 과정에서 조선 왕조의 건국 무용담과 활약상이 보다 강조되기를 바랐던 왕실의 기대에 책 내용이 하나도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답답해진 세종은 고려 역사의 편찬에도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고려사 전문》의 반포가 중지된 직후부터 《용비어천가》 편찬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용비어천가》 125수의 시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내용인데 특히 태조 이성계의 활약상과 인간적 매력을 열심히 기록했다. 《용비어천가》 완성 직후 또 다시 기존 책임자들을 갈아치우고 《고려사 전문》을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한다.

작업은 제5대 문종대로 이어져 문종 원년에야 현존하는 《고려사》 139권이 만들어졌다. 《고려국사》, 《수교고려사》, 《고려사 전문》을 거쳐 최종적으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가 완성되었으며 최종 《고려사》에는 태조 이성계에 관한 기록도 많이 수록되었다.

《고려사》의 편찬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것은 조선 왕조의 건국을 신진사대부 중심으로 서술할 것인가, 새로운 전주 이씨 왕실 위주로 서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고려사》가 완성될 때까지 무려 60여 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매우 복잡했음을 말해주며, 또한 조선 초기 이씨의 왕권과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고려사》는 직서주의 원칙을 채택하여 자칫 사라져버릴 뻔했던 고려시대의 왕실 내 여러 용어들을 후대까지 있는 그대로 전하였고, 태조 이성계의 활약상도 상세히 반영하는 한편 유교적인 성격도 강하게 띄었다. 한편 불교 관계 기록은 매우 소홀하다. 예를 들어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열전>에는 <고승전>이 없다.

3. 구성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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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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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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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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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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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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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기전체 구성이다. 고려가 이전 세 왕조의 정사에 대해 쓴 《삼국사기》와 체제가 같다. 그래서 구성도 비슷하다. 하지만 삼국을 각자 황제국 사서의 격인 <본기>로 서술한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고려사》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라서 구성하였다.

3.1.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고려사》를 완성한 학자들이 임금에게 완성 사실을 알리는 전문(箋文)이다. 《삼국사기》 또한 <진삼국사기표>가 있다. 표문은 천자에게 바치는 문서 양식이다. 《삼국사기》가 표문(表文)인 것은 고려 국왕이 국내에선 천자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正憲大夫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等, 誠惶誠恐, 稽首稽首, 上言。 竊聞, 新柯視舊柯以爲則, 後車鑑前車而是懲。
盖已往之興亡, 實將來之勸戒, 玆紬編簡, 敢瀆冕旒。 惟王氏之肇興, 自泰封以崛起, 降羅滅濟, 合三韓而爲一家, 舍遼事唐, 尊中國而保東土。 爰革煩苛之政, 式恢宏遠之規, 光廟臨軒策士, 而儒風稍興, 成宗建祧立社, 而治具悉備。
宣讓失御, 運祚幾傾, 顯濟中興之功, 宗祏再定, 文闡大平之治, 民物咸熙。 迨後嗣之昏迷, 有權臣之顓恣, 擁兵而窺神器, 一啓於仁廟之時, 犯順而倒大阿, 馴致於毅宗之日。
由是, 巨姦迭煽, 而置君如碁奕, 强敵交侵, 而刈民若草菅, 順孝定大亂於危疑, 僅保祖宗之業。 忠烈昵群嬖於遊宴, 卒構父子之嫌, 且自忠肅以來, 至于恭愍之世, 變故屢作, 衰微益深, 根本更蹙於僞朝, 歷數竟歸於眞主。
我太祖康獻大王, 勇智天錫, 德業日新, 布聖武而亨屯艱, 克綏黎庶, 握貞符而乘乾御, 肇造邦家, 顧麗社雖已丘墟, 其史策不可蕪沒, 命史氏而秉筆, 倣通鑑之編年。 及太宗之繼承, 委輔臣以讎校, 作者非一, 書竟未成。 世宗莊憲大王, 遹追先猷, 載宣文化, 謂修史, 要須該備, 復開局, 再令編摩。 尙紀次之非精, 且脫漏者亦夥, 况編年有異於紀傳表志, 而敍事未悉其本末始終, 更命庸愚, 俾任纂述。 凡例皆法於遷 史, 大義悉稟於聖裁。 避本紀爲世家, 所以示名分之重, 降僞辛於列傳, 所以嚴僭竊之誅。
忠佞邪正之彙分, 制度文爲之類聚, 統紀不紊, 年代可稽。 事跡務盡其詳明, 闕謬期就於補正。 嗟玉署鈆槧之未訖, 而鼎湖弓劒之忽遺, 臣麟趾等, 誠惶誠恐, 稽首稽首。 恭惟主上殿下, 誕紹宏圖, 增光洪烈, 惟精惟一, 聖學極於高明, 丕顯丕承, 至孝彰于繼述。 念前史之未就, 令微臣以責成, 臣麟趾等, 俱以譾才, 叨承隆寄, 採稗官之雜錄, 發秘府之故藏, 祗竭三載之勞, 勒成一代之史。
稽遺跡於前代, 僅能存筆削之公, 揭明鑑於後人, 期不沒善惡之實。 所撰高麗史, 世家四十六卷, 志三十九卷, 表二卷, 傳五十卷, 目錄二卷, 通計一百三十九卷。 謹具草成帙, 隨箋以聞。 無任激切屛營之至, 臣麟趾等, 誠惶誠恐, 稽首稽首, 謹言。 景泰二年八月二十五日, 正憲大夫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等, 上箋。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 겸 성균 대사성 신 정인지 등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듣건대 새 도끼 자루를 다듬을 때에는 헌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으며 뒷 수레는 앞 수레의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교훈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대개 지난 시기의 흥망은 장래의 교훈이 되기 때문에 이 역사서를 편찬하여 올리는 바입니다.

고려 왕씨는 태봉국에서 일어나 신라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삼한을 통일한 후 요나라에 반대하고 당나라를 섬기며 중국을 존중하여 동방을 보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번거롭고 가혹했던 정치를 개혁하고 원대한 규모를 수립하였습니다. 광종(光宗) 때 과거 제도를 시작함으로써 유교의 학풍이 점차 일어났으며, 성종(成宗) 때에 조(祧)와 사(社)를 세움으로써 정치 기구가 완전히 정비되었습니다. 목종(穆宗) 때에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국운이 거의 위태롭게 되었다가 현종(顯宗) 때에 중흥의 공을 이루어 국가가 다시 바로잡혔습니다. 문종(文宗)은 태평을 누리도록 정치를 잘 하여 문물제도가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대 왕들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권력 있는 신하가 전횡을 하고 병권을 잡아 왕위를 엿보게까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인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결국 의종(毅宗) 때에는 왕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때부터 흉악한 간신이 번갈아 일어나서 왕을 폐위시키거나 즉위시키기를 바둑판 바꿔 놓듯이 마음대로 했으며, 강한 외적들이 번갈아 침입하여 백성을 죽이기를 지푸라기 베듯이 하였습니다.

그 후 원종(元宗)이 큰 난을 평정하여 겨우 왕조의 운명을 위기로부터 보존했는데 충렬왕(忠烈王)은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들만 가까이하고 연회와 놀이를 일삼다가 결국 부자간에 불화가 일어나기까지 되었습니다. 또 충숙왕(忠肅王)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까지 변고가 여러 번 일어나서 나라가 점점 더 쇠약해졌으며, 국가의 근본은 다시 신우⋅신창 때에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운명은 진정한 임금에게 돌아오니,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용맹과 지혜는 하늘이 주었으며 그의 공적과 사업은 나날이 새로워 신성한 무력으로 전란을 평정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왕위에 올라 국가를 창건했습니다. 태조 대왕께서는 고려왕조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그 역사를 인멸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사관(史官)들에게 고려 역사를 편찬케 하고, 그 체제는 『통감(通鑑)』의 편년체를 모방하도록 했습니다. 그 후 태종 대왕이 이를 계승하여 대신들에게 수정 사업을 맡겼으나 필자들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책은 결국 완성되지 못하였습니다.

세종(世宗) 장헌대왕(莊憲大王)은 조상의 뜻을 계승하여 문화 사업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데 반드시 모든 서술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다시 역사 편집국을 설치하여 이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그 전의 서술들은 연대와 순서가 정확하지 못하고 누락된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편년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紀), 전(傳), 표(表), 지(志)의 서술법과 달라 사실의 서술이 그 시종 본말을 알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다시 어리석은 저에게 편찬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이 역사를 편찬하면서 범례는 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준하고, 기본 방향들은 다 직접 왕에게 물어서 결정했습니다. 본기(本紀)라는 이름을 피하고 세가(世家)라고 한 것은 대의명분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신우와 신창을 세가에 넣지 않고 열전으로 내린 것은 그들이 참람하게 왕위를 도둑질한 사실을 엄히 논죄하려는 것입니다. 충신과 간신, 부정한 자와 공정한 사람들은 다 열전을 달리하여 서술했으며, 제도 문물은 각각 그 종류에 따라 분류해 놓았습니다. 왕들의 계통은 문란하지 않게 하였으며 사건들의 연대를 참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적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상세하고 명확하게 하고, 누락된 것과 잘못된 것은 반드시 보충하고 바로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책을 완성하여 활자로 출판하기 전에 왕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신 정인지 등은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나라의 원대한 계책을 이어 받으시어 선대 임금들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순수하게 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시어 성학(聖學)은 고명(高明)을 극치에 이르셨고, 문무를 크게 나타내시어 지극한 효성은 조상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계십니다. 전대의 일이 아직 성취하지 못함을 생각하시어 변변찮은 저에게 이를 책임지고 이루도록 하시니, 신 등이 다 같이 천박한 재질로서 중대한 부탁을 받아 민간의 풍문과 소문을 수집하던 말단 관원의 잡록(雜錄)을 채택하기도 하고, 관부의 옛 장서들을 들추어서 3년간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고려의 일대 역사를 완성하였습니다. 전대(前代)의 남긴 사적을 참고하고, 필법에는 공정을 기하여 역사의 밝은 거울을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며 선악의 사실들을 영원히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편찬한 『고려사』는 세가 46권, 지 39권, 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모두 139권입니다. 삼가 초고 한 질을 완성하여 전문과 함께 올립니다. 지극히 간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신 정인지 등은 황송히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경태(景泰) 2년(1451, 문종 원년) 8월 25일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 겸 성균 대사성 신 정인지 등 올림.

3.2. <고려세계>(高麗世系)

고려 태조 왕건 이전의 족보를 기록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탓에 의종 대 편찬된 《편년통록》, 충렬왕 대 편찬된 《편년강목》, 《강목》에 덧붙혀진 이제현의 <논평> 이 세 가지를 모두 모아 두고 이를 평가했다.

3.3. <수사관>(修史官)

《고려사》 제작에 참여한 신하들을 기록했다.

3.4.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고려사》를 기록(찬수)할 때 정한 기준으로 왜 <본기>라 안하고 <세가>라 했는지, 왜 고려의 '참람한' 왕실 예법을 격하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는지, <열전> 중 충신, 반역자를 나눈 기준은 뭔지 등을 설명했다.

3.5. 목록 상

《고려사》 <세가>부터 <종실 열전>까지가 목록 상이다.

3.6. 목록 하

<종실 열전> 이하는 모두 목록 하에 포함된다.

3.7. <세가>(世家) 46권

제후국의 예로써 국왕의 기록을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로 수록.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참람한 것이었다.

3.8. <지>(志) 39권

3.9. <연표>(年表) 2권

3.10. <열전>(列傳) 50권

본시 《한서》에서 정립된 <열전>의 순서에 의하면 <후비전>, <종실전> 다음에는 창업자와 자웅을 겨룬 <군웅 열전>이 나와야 한다. 가령 《명사》의 경우 <후비전>, <제왕전>, <공주전>이 <열전>의 첫머리를 이루고 있고, 그에 이어서 한때 태조 주원장의 주군이었던 곽자흥과 그 라이벌인 진우량, 장사성, 원나라 측 장수인 코케테무르 등의 <열전>이 제시된 다음 서달, 탕화, 송렴과 같은 명나라의 개국공신들의 <열전>이 나온다. 때문에 《고려사》에도 궁예, 견훤의 <열전>이 수록되고, 그다음에 창업공신의 <열전>이 나와야 하지만 궁예, 견훤의 <열전>은 《삼국사기》에서 다룬 관계로 《고려사》에서는 생략되었다.

한편 우왕창왕조선 건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에 따라 신돈의 자손으로 취급되어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수록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우창비왕설'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우왕이 왕위를 부정하게 찬탈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공민왕에 의해 아들로 인정되고,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를 계승하였던 만큼 <반역 열전>에 수록한 것은 부당하였다는 반성이 나오기는 했으나, 《고려사》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사서이므로 편찬 당시 조선의 공식 입장이 반영되었다.

이렇게 총 139권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 《고려사절요》인데, 때때로 《고려사》에 없지만 《고려사절요》에는 있는 기사도 있기에 서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3.11. <단군편>?

2014년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에서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고려사》 <단군편>의 존재를 찾아내었다. 현전하는 《고려사》 판본에는 <단군편>이 없는데, 현 《고려사》는 문종대 완성한것이므로, 그 이전 본에서는 <단군편>이 있었을 수 있다.
《승정원 일기》 영조편 영조 44년(1768) 5월 22일(흐리고 비가 내림)원문
(....)上曰, "儒臣持高麗史初卷入侍。"出榻敎 副校理李秉鼎·李命勳進伏, 上曰, "上番讀帝王目錄。"秉鼎讀訖。上曰, "下番讀檀君篇。"命勳讀之, 上曰, "檀君之父, 古語有檀翁云然否?" 秉鼎曰, "此是好事者之說也。"必壽曰, "檀君似是氣化之物也。"秉鼎曰, "檀君, 旣是我東初立之君長", 而承旨奏語, "似涉如何?" 請推考。"上笑曰, "過去之說, 勿推, 可也。"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유신은 《고려사》 초권을 들고 입시하라." 하고 탑교(搨敎)[3]를 내리셨다.

부교리 이병정과 이명훈이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상번사관이 <제왕목록>(帝王目錄)을 읽으라."

(상번)병정이 읽기를 마치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하번(명훈)은 <단군편>(檀君篇)을 읽으라."

명훈이 읽으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단군의 아버지는 옛말에 단옹(檀翁)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인가 아닌가?"

병정이 아뢰었다.
"이러한 말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좌승지) 필수가 아뢰었다.
"단군은 마치 기화지물(氣化之物)과 같습니다."

병정이 아뢰었다.
"단군은 우리 동방국의 최초의 임금이 되신 분입니다."

승지가 아뢰었다.
"관계되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좀 더 연구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나간 이야기니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음이 좋겠다." (하셨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고려사》는 조선 입장에서 고려를 통해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식이 담긴 책인데 단군은 그 목적과 벗어나 있어서 실제로 있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있었다면 이전 판본에는 어떤 이에 의해 첨부되었으나 최종본에서는 목적에 벗어난 편목이어서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4. 역사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고 이에 정도전이 《고려실록》,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 《고려국사》(高麗國史)와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을 편찬하였고, 정총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했다. 이 때의 작업들은 역사가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기보단 고려 말 찬술된 역사서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종의 자료집 편찬에 가까웠다.

하지만 조선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태종 이방원이 올바르게 개수를 명하여 1414년~1416년에 하륜이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세종이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조선 측의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하였고, 이에 1419년 9월에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이 다시 한번 개수하였다. 이후 1423년 유관과 윤회(尹淮)가 고려의 왕실 용어나 참칭(僭稱)의 개서[4]에 대하여 고려가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直敍)하도록 하여 제3차 개수 작업을 거쳤다.

그 후 1438년~1442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가 4번째로 개수하여 《고려사 전문》(高麗史全文)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소략한 내용과 고려시대 개칭된 용어를 보충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교정 과정에서 아직 역사기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1446년 세종은 또다시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 명했다. 1451년(문종 원년) 8월에 완성되었다.

조선 세종 때 일단 완성은 되었으나, 세종은 기존 판본들이 조선왕조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고 판단, 여러 신하들에게 돌려가며 새로 편찬하게 했다. 결국 세종 사후인 문종 대가 되어서야 겨우 최종본이 나올 수 있었다. 최종본을 세종이 마음에 들어했을지는 미지수. 일각에서는 문종 대에 완성된 최종본도 세종이 살아있었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개수를 명했을 거란 농담도 있다. 그만큼 세종이 신경을 각별히 쓴 책이다.

5. 분량과 가치

조선왕조실록》과 견주면 빈약해 보일지 모르나 《고려사》도 상당히 방대하고 상세한 편에 속하는 사서다. 그래서 너무 내용이 많다고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를 따로 편찬했다.

다만 《고려사》가 고려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대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한계점이 있다. 때문에 《고려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려도경》 같은 당대의 기록이나, 《고려사절요》, 중국 사서 등의 다른 역사서를 통해 교차검증을 하는 게 중요하다. 사료 이외에도 금석문, 남아있는 고려의 서적, 조선시대에 고려의 풍습을 다룬 책인 《용재총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을 참고해야 한다. 이런 조선시대 책에서도 고려시대의 야사나 지리, 풍습 등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개성을 다룬 <지리지> 같은 경우, 개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유풍이 많이 남았었기에 많이 참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려사》는 철저하게 원 사료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즉 원전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 《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편찬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원 사료의 일부가 취사선택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찬술자가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용을 보충하지 않았음은 누구나 인정한다. 특히 조선 초기 역사가의 사론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점도 이 책이 사실을 충실하게 모은 자료집으로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고려사절요》도 그렇지만 제2대 혜종부터 제7대 목종까지 사료가 많이 부실한 편이다. 고려의 기틀을 세운 제6대 성종이 그나마 낫지만...이는 여요전쟁 당시 개경 함락으로 사초와 공문서같은 사료를 많이 날려먹은 탓에서 기인한다. 대체적으로 고려초의 경우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을 인용했고, 중기는 이제현의 논평 및 김부식이 쓴 《예종실록》과 《인종실록》을 그들의 여러 시와 함께 종합했다.

2015년에 영국에서 《고려사》 필사본 전질 풀셋트가 하나 발견되었다.관련 기사 중국 청나라의 금석문 학자들이 조선 사신들에게 매달려 얻은 후 죽어라 연구하던 것이었다고. 8상자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만 108일이 걸렸다고 한다.

다만 아무래도 조선시대 이전 사료가 빈약한 한국사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보면 생각보다는 양이 그렇게 많지 않다. 고려사 474년를 다룬 고려사의 분량이 약 150만자인데, 2백년의 역사를 다루는 《후한서》(장회태자 주+사마표 지 포함)은 230만자, 백여년의 역사를 다루는 《삼국지》(배주 포함)는 100만자, 160여년의 역사를 다루는 《진서》는 188만자라 고려시대로부터 약간 적은 기간의 천년전 역사를 다루는 중국사서들의 분량을 더해서 비교했을때도 고려사의 양이 1/3 이하로 확연히 적다. 고려와 동시기를 봐도 각각 3백여년과 160여년의 역사를 다루는 《송사》와 《원사》는 각각 약 200만 자와 130만 6천 자 수준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의 《요사》나 《금사》, 고려 초기와 시대가 겹치는 《구오대사》, 《신오대사》를 굳이 더하지 않더라도 고려사가 확연히 열세이다.[5] 이 때문에 한국의 고려사 연구자들은 사료의 부족함을 두고 아쉬워 하는 경우가 많다.

6. 한국어 번역

파일:국역 고려사.jpg
동아대학교에서 펴낸 《국역 고려사》. 사진 출처

북한에서는 1962년에서 1966년에 걸쳐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세가> 4책, <지>·<표>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번역서를 내놓았다. 이를 '아름출판사'와 '신서원'에서 《북역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한국에서는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소가 1960년 《고려사》 번역을 시작해 1965년에서 1973년에 걸쳐 《역주 고려사》(譯註高麗史)라는 제목으로, <색인> 1책을 포함하여 총 11책으로 펴냈다. 아래의 번역도 그렇고 이 책의 번역에 동아대학교가 주도적인 것은 국내에 남아있는 여러 판본들 중 완질본 중에서는 동아대학교 소장 판본이 상태가 제일 좋기 때문.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고려사》역주사업단에서 《고려사》를 재번역했다. 동아대는 2001년 9월부터 재번역 사업을 시작해 2006년 11월에 <열전>(列傳) 9책, 2008년 8월에 <세가>(世家) 12책, 2010년 2월에 <지>(志) 7책을 간행하고, 2011년 10월 <색인> 2책을 간행함으로써 총 30책으로 《국역 고려사》 번역을 완성했다. 이 번역본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아래 항목 참고.

7. 열람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네이버 국역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고려사》는 고려시대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2012년까진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는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지만 국역이 안돼 있었고, KRpia에서는 기관 회원에게 국역본을 공개하긴 했는데 유료였다. 뭐 KRpia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교나 지역도서관 회원이라면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절차만 거치면 집에서도 원격접속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2012년 12월 26일 부터 네이버에서 《삼국사기》 등과 마찬가지로 국역 《고려사》 서비스를 실시했다. 언제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문과 번역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의 링크를 참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에서 나온 《국역 고려사》를 바탕으로 서비스되고 있다. 간행사, 관련 페이지

201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고려사》 번역본이 올라왔다.

중국어 위키문헌에도 《고려사》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1]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04호에서 보물 제2115-4호로 승격 지정[2] 제2114-1호와 2114-2호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3] 임금이 의정을 불러서 친히 전하는 왕명.[4] 고려의 외왕내제적 요소와 용어들을 제후국의 법도에 맞게 고쳐 서술했다.[5] 한국사에서 중국의 기록과 어느정도 견줄수 있게 되는건 조선시대 이후로, 대륙 24사 전부를 다 합쳐서 3999권, 3996만 6383자인데 《조선왕조실록》은 4964만 6667자로 24사 전부 합친 양보다 더 많다. 심지어 《승정원일기》는 1600년도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는데도 2억 5천만 자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