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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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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
高麗史
파일:external/www.ecumenian.com/13649_24333_4159.gif
시기 15세기 조선
권 수 137권 75책
분량 918년 ~ 1392년 (474년)
고려 태조 원년 ~ 공양왕 4년

1. 개요2. 편찬 과정3. 구성
3.1.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3.2. 고려세계(高麗世系)3.3. 수사관(修史官)3.4.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3.5. 세가(世家) 46권3.6. 지(志) 39권3.7. 연표(年表) 2권3.8. 열전(列傳) 50권3.9. 단군편?
4. 분량과 가치5. 현대어 번역6.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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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고려사.jpg

고려시대를 다룬 조선사서(史書)로, 드물게 사용되기는 하나 줄여서《여사》(麗史)라고도 한다.

완질본으로는, 현재 보물 제2115-4호로 지정되어[1]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판본이 있다. 이 외에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아직 국보보물로 지정되진 않았다가 2020년 12월 보물로 지정되어, 예고되었으며(관련기사), 2021년 2월 17일에 보물 제2114-1호, 제2114-2호,[2] 보물 제2115-1호~제2115-4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2115-1호와 2115-2호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제2115-3호는 연세대학교 소장본, 제2115-4호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본이다.

1392년에 건국된 이후 조선 왕조는 태조 대부터 동아시아 유교적 왕조의 전례대로 전(前) 왕조의 정사(正史)를 편찬했는데, 이것이《고려사》로서 제5대 문종 원년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2. 편찬 과정

《고려사》의 편찬 기간은 자그마치 60여 년이었으며, 그만큼 많은 곡절을 가지고 완성된 역사서이다.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는 시랑찬성사 정도전, 예문관학사 정총에게 고려시대의 역사 편찬을 명령했다. 이듬해인 1395년 정월, 정도전이 《고려실록》,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고려국사》(高麗國史)와《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을 편찬했고, 정종이《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하여 편년체 역사서인 《고려국사》 37권을 완성시켰다. 이 때의 작업들은 역사가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기보단 고려 말기에 찬술된 역사서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종의 자료집 편찬에 가까웠다. 또한 이전 왕조의 역사가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로 기술되었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대기 방식으로 서술된 편년체 역사서는 필수적으로 방대한 사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이전 왕조의 사료를 모아 분류하고, 또 그 편찬 방향을 심의하는 사국(史局)을 열어 토론을 거친 연후에 만드는 것이 옳은 방법이었다. 그러나《고려국사》의 편찬기간은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첫 번째 고려 역사 편찬의 결과물은 그 편찬을 명령한 조선 건국의 주인공인 태조 이성계를 위시한 전주 이씨 왕실과 신진사대부 세력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책이 되었고, 1398년에 일어난 무인정사를 통해 정도전을 제거한 제3대 태종 이방원은 즉위 이후《고려국사》의 대대적인 개정 작업을 명령했다.

태종 시절,《고려국사》에 정도전 계파의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1414년~1416년, 영의정 하륜이 개수 작업에 돌입했다. 하륜은 지춘추관사 한상경, 동지춘추관사 변계량과 함께《고려국사》를 3분하여 각자의 집에서 개수작업에 착수하기로 했으나, 1416년 겨울 하륜이 사망하면서 개수가 중단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년), 당시 상왕으로 있었던 태종은 다시 예문관 대제학 유관(柳觀)과 참찬 변계량에게《고려국사》를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유관은 고려시대의 여러 용어를 당시 사용했던 그대로 싣자는 주장을 했고, 변계량은 유교적인 대의명분에 맞게 정정하자고 주장하여 책임자인 두 사관이 대립했다. 고려시대 왕들의 묘호는 종(宗)이었고, 왕이 자신을 부르는 말은 짐(朕)이라 했으며,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자는 태자라 불렀다. 변계량은 이걸 모두 조선의 입지에 맞게 바꿔부르자고 했다. 반면 유관은 그냥 있었던 그대로 직서하자고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싸우는 상태에서 교정이 잘 이뤄졌을 리가 없었다.

이에 세종이《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조선 측의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하여 1419년 9월 유관과 변계량이 다시 한번 개수했다. 이후 1423년 유관과 윤회(尹淮)가 고려의 왕실 용어나 참칭(僭稱)의 개서[3]에 대해, 고려가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直敍)하여 제3차 개수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세종 6년(1424년)이 되고 나서 유관과 윤회가 어떻게든《수교고려사》를 완성시켰다. 유관은 직서를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용어 표기를 고려식 그대로 했다. 세종이 변계량의 명분론을 비판하고, 유관의 견해를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수교고려사》는 무척 짧은 기간에 편찬된 《고려국사》를 기본으로 했기에,《고려국사》의 한계들을 그대로 답습했다.《고려국사》는 37권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었던 반면,《고려사》최종본은 137권이다.[4] 또한 정도전 등 당시 편찬자들의 입장을 지나치게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반영했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수교고려사》가《고려국사》의 수정본인 한, 근본적인 문제는 크게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이에 세종 13년(1431년) 정월, 왕은《수교고려사》를 또 다시 개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전의 개편이 용어의 직서문제 관철 위주로 돌아갔다면, 이번에는 내용 보충과 아울러 고려 역사의 체제 문제가 부각되었다. 중국 정사의 예에 따라 기전체로 하자는 주장과, 기전체는 동일한 내용이 <본기>, <열전> 및 <지> 등에 중복으로 나오는 단점이 있으니 그냥 편년체로 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최종적으로는 편년체로 하되, 더 많은 기록을 보충해보자는 결론이 되어 다시 개편이 시작되었다.

그후 1438년~1442년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가 4번째로 개수하여, 세종 24년(1442년) 《고려사 전문》이 완성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때 소략한 내용과 고려시대에 개칭된 용어를 보충했다. 그러나《고려사 전문》은 인쇄까지 된 상태에서 문제가 터져, 반포가 중지되었다. 편찬 책임자인 권제가 그의 조상인 권수평 등의 전기를 조작했다가 딱 걸려버리는 스캔들이 터진 것이었다. 또한 다른 편찬 책임자들에게도 문책이 뒤따랐는데, 자료 조작도 조작이지만《고려사 전문》의 개편 과정에서 조선 왕조의 건국 무용담과 활약상이 보다 강조되기를 바랬던 왕실의 기대에 책 내용이 하나도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역사 편찬은 이 사건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446년 세종이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 명령하면서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체제 기획이 최종적으로 변경되었다. 세종의 생전에 일단 완성은 되었으나 세종은 기존 판본들이 조선의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나치게 고려를 깎아내렸다고 판단한 후, 여러 신하들에게 돌려가면서 새로 편찬하도록 했다. 결국 세종은《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했다.

작업은 제5대 문종 대로 이어져 문종 원년(1451년)에야 겨우 현존하는《고려사》137권 최종본이 만들어졌다.《고려국사》,《수교고려사》,《고려사 전문》을 거쳐 최종적으로 기전체로 편찬된《고려사》가 완성되었으며, 최종 《고려사》에는 태조 이성계에 관한 기록도 많이 수록되었다. 하지만 이 최종본을 세종이 마음에 들어했을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문종 대에 완성된 최종본도 세종이 살아있었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개수를 명령했을 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그만큼 생전의 세종이 신경을 각별히 쓴 책이《고려사》였다.

《고려사》의 편찬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것은 조선 왕조의 건국을 신진사대부 중심으로 서술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통치 가문인 전주 이씨 왕실 위주로 서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고려사》가 완성될 때까지 무려 60여 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매우 복잡했음을 말해주며, 또한 조선 초기 이씨의 왕권과 신진사대부 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고려사》는 직서주의 원칙을 채택하여 자칫 사라질 뻔했던 고려시대의 왕실 내 여러 용어들을 후대까지 있는 그대로 전했고, 태조 이성계의 활약상도 상세히 반영하는 한편, 유교적인 성격도 강하게 띄었다. 한편 불교 관계 기록은 매우 소홀하다. 예를 들어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열전>에는 <고승전>이 없다.

3.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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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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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기전체 구성으로, 고려가 이전 세 왕조의 정사에 대해 쓴《삼국사기》와 체제가 같다. 그래서 구성도 비슷하다. 하지만 삼국을 각자 황제국 사서의 격인 <본기>로 서술한《삼국사기》와는 다르게《고려사》는 제후국의 체제를 따라서 구성했다.

《고려사》 <세가>부터 <종실열전>까지가 목록 상이다. <종실열전> 이하는 모두 목록 하에 포함된다.

3.1.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고려사》를 완성한 학자들이 임금에게 완성 사실을 알리는 전문(箋文)이다. 《삼국사기》 또한 <진삼국사기표>가 있다. 표문은 천자에게 바치는 문서 양식이다. 《삼국사기》가 표문(表文)인 것은 고려 국왕이 국내에선 천자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3.2. 고려세계(高麗世系)

고려 태조 왕건 이전의 족보를 기록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탓에 의종 대 편찬된 《편년통록》, 충렬왕 대 편찬된 《편년강목》, 《강목》에 덧붙혀진 이제현의 <논평> 이 세 가지를 모두 모아 두고 이를 평가했다.

3.3. 수사관(修史官)

《고려사》 제작에 참여한 신하들을 기록했다.

3.4.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고려사》를 기록(찬수)할 때 정한 기준으로 왜 <본기>라 안하고 <세가>라 했는지, 왜 고려의 '참람한' 왕실 예법을 격하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는지, <열전> 중 충신, 반역자를 나눈 기준은 뭔지 등을 설명했다.

3.5. 세가(世家) 46권

제후국의 예로써 국왕의 기록을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로 수록.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 참람한 것이었다.

3.6. 지(志) 39권

고려의 문물에 대해 설명했다. 총 12지로 이루어졌다.
  • <천문지>, <역지>, <오행지>: 자연의 변화와 자연재해를 다룬다. 해와 달, 별의 움직임, 계절 변화, 가뭄, 홍수 등에 대한 기록이다.
  • <지리지>: 지리를 다룬다.
  • <예지>: 의례를 다룬다.
  • <악지>: 음악을 다룬다.
  • <여복지>: 관리의 복식을 다룬다.
  • <선거지>: 관리의 선발을 다룬다.
  • <백관지>: 관청과 관직을 다룬다.
  • <식화지>: 경제를 다룬다. 토지나 세금 등에 대한 기록이다.
  • <병지>: 군사를 다룬다.
  • <형법지>: 법과 형벌을 다룬다.

3.7. 연표(年表) 2권

말 그대로 연표이다. 주요 사건을 발생 년도에 따라 간략히 정리했다.

3.8. 열전(列傳) 50권

본시 《한서》에서 정립된 <열전>의 순서에 의하면 <후비전>, <종실전> 다음에는 창업자와 자웅을 겨룬 <군웅 열전>이 나와야 한다. 가령 《명사》의 경우 <후비전>, <제왕전>, <공주전>이 <열전>의 첫머리를 이루고 있고, 그에 이어서 한때 태조 주원장의 주군이었던 곽자흥과 그 라이벌인 진우량, 장사성, 원나라 측 장수인 코케테무르 등의 <열전>이 제시된 다음 서달, 탕화, 송렴과 같은 명나라의 개국공신들의 <열전>이 나온다. 때문에 《고려사》에도 궁예, 견훤의 <열전>이 수록되고, 그다음에 창업공신의 <열전>이 나와야 하지만 궁예, 견훤의 <열전>은 《삼국사기》에서 다룬 관계로 《고려사》에서는 생략되었다.

한편 우왕창왕조선 건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에 따라 신돈의 자손으로 취급되어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 뒤에 수록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우창비왕설'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우왕이 왕위를 부정하게 찬탈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공민왕에 의해 아들로 인정되고,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를 계승하였던 만큼 <반역 열전>에 수록한 것은 부당하였다는 반성이 나오기는 했으나, 《고려사》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사서이므로 편찬 당시 조선의 공식 입장이 반영되었다. 무신정권의 집권자들 중 경대승만 유일하게 반역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 역시 편찬자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이렇게 총 137권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 《고려사절요》인데, 때때로 《고려사》에 없지만 《고려사절요》에는 있는 기사도 있기에 서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3.9. 단군편?

2014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고려사》 <단군편>의 존재를 찾아냈다. 현전하는 《고려사》 판본에는 <단군편>이 없는데, 현 《고려사》는 문종 대에 완성한 것이므로, 그 이전 본에서는 <단군편>이 있었을 수 있다.
《승정원 일기》 영조편 영조 44년(1768년) 5월 22일(흐리고 비가 내림)원문
(....)上曰, "儒臣持高麗史初卷入侍。"出榻敎 副校理李秉鼎·李命勳進伏, 上曰, "上番讀帝王目錄。"秉鼎讀訖。上曰, "下番讀檀君篇。"命勳讀之, 上曰, "檀君之父, 古語有檀翁云然否?" 秉鼎曰, "此是好事者之說也。"必壽曰, "檀君似是氣化之物也。"秉鼎曰, "檀君, 旣是我東初立之君長", 而承旨奏語, "似涉如何?" 請推考。"上笑曰, "過去之說, 勿推, 可也。"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유신은 《고려사》 초권을 들고 입시하라." 하고 탑교(搨敎)[5]를 내리셨다.

부교리 이병정과 이명훈이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상번사관이 <제왕목록>(帝王目錄)을 읽으라."

(상번)병정이 읽기를 마치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하번(명훈)은 <단군편>(檀君篇)을 읽으라."

명훈이 읽으니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단군의 아버지는 옛말에 단옹(檀翁)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인가 아닌가?"

병정이 아뢰었다.
"이러한 말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좌승지) 필수가 아뢰었다.
"단군은 마치 기화지물(氣化之物)과 같습니다."

병정이 아뢰었다.
"단군은 우리 동방국의 최초의 임금이 되신 분입니다."

승지가 아뢰었다.
"관계되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좀 더 연구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나간 이야기니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음이 좋겠다." (하셨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고려사》는 조선 입장에서 고려를 통해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식이 담긴 책인데 단군은 그 목적과 벗어나 있어서 실제로 있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있었다면 이전 판본에는 어떤 이에 의해 첨부되었으나 최종본에서는 목적에 벗어난 편목이어서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4. 분량과 가치

조선왕조실록》과 견주면 빈약해 보일지 모르나 《고려사》도 상당히 방대하고 상세한 편에 속하는 사서다. 그래서 너무 내용이 많다고,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를 따로 편찬했다.

다만《고려사》가 고려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은 사실이지만,《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편찬된 자료라는 한계점이 있다. 때문에《고려사》를 연구할 때는《고려도경》 같은 당대의 기록이나,《고려사절요》, 중국 사서 등의 다른 역사서를 통해 교차검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료 이외에도 금석문, 남아있는 고려의 서적, 조선시대에 고려의 풍습을 다룬 책인《용재총화》,《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 같은 책을 참고해야 한다. 이런 조선시대 책에서도 고려시대의 야사나 지리, 풍습 등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개성을 다룬 <지리지> 같은 경우 개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유풍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많이 참조하는 듯하다.

그러나《고려사》는 철저하게 원 사료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즉 원전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여말선초의 정국에 대한 편찬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원 사료의 일부가 취사선택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찬술자가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용을 보충하지 않았음은 누구나 인정한다. 특히 조선 초기 역사가의 사론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점도 이 책이 사실을 충실하게 모은 자료집으로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고려사절요》도 그렇지만 제2대 혜종부터 제7대 목종까지의 사료가 많이 부실한 편이다. 고려의 기틀을 세운 제6대 성종이 그나마 낫지만...이는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개경 함락으로 사초와 공문서같은 사료를 많이 날려먹은 탓에서 기인한다. 대체적으로 고려 초기의 경우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이제현의《역옹패설》 등을 인용했고, 중기는 이제현의 논평 및 김부식이 쓴《예종실록》과《인종실록》을 그들의 여러 시와 함께 종합했다.

2015년에 영국에서 《고려사》필사본 전질 풀셋트가 하나 발견되었다.관련 기사 중국 청나라의 금석문 학자들이 조선 사신들에게 매달려 얻은 후, 죽어라 연구하던 것이었다고 한다. 8상자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만 108일이 걸렸다고 한다.

다만 아무래도 조선시대 이전의 사료가 빈약한 한국사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보면 생각보다 양이 그렇게 많지 않다. 고려의 역사 474년를 다룬《고려사》의 분량이 약 150만자인데, 후한 왕조 200년의 역사를 다루는《후한서[6]는 230만자, 후한 말~삼국시대 100여년의 역사를 다루는《삼국지[7]는 100만자,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 160여년의 역사를 다루는《진서》는 188만자라, 고려시대로부터 약간 적은 기간의 1,000년전 역사를 다루는 중국 사서들의 분량을 더해서 비교했을 때도《고려사》의 양이 1/3 이하로 확연하게 적다. 고려와 동시기를 봐도 송나라 300여년의 역사와 몽골 제국원나라의 160여년 역사를 다루는《송사》와 《원사》는 각각 약 200만 자와 130만 6천 자 수준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의《요사》나《금사》, 고려 초기와 시대가 겹치는《구오대사》,《신오대사》를 굳이 더하지 않더라도《고려사》가 확연히 열세다.[8] 이 때문에 한국의 고려사 연구자들은 사료의 부족함을 두고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

5. 현대어 번역

파일:국역 고려사.jpg
동아대학교에서 펴낸 《국역 고려사》. 사진 출처

북한에서는 1962년에서 1966년에 걸쳐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세가> 4책, <지>·<표>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번역서를 내놓았다. 이를 '아름출판사'와 '신서원'에서 《북역 고려사》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한국에서는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소가 1960년 《고려사》 번역을 시작해 1965년에서 1973년에 걸쳐 《역주 고려사》(譯註高麗史)라는 제목으로, <색인> 1책을 포함하여 총 11책으로 펴냈다. 아래의 번역도 그렇고 이 책의 번역에 동아대학교가 주도적인 것은 국내에 남아있는 여러 판본들 중 완질본 중에서는 동아대학교 소장 판본이 상태가 제일 좋기 때문이다.

한편 2000년대에 들어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고려사》역주사업단에서 《고려사》를 재번역했다. 동아대는 2001년 9월부터 재번역 사업을 시작해 2006년 11월에 <열전>(列傳) 9책, 2008년 8월에 <세가>(世家) 12책, 2010년 2월에 <지>(志) 7책을 간행하고, 2011년 10월 <색인> 2책을 간행함으로써 총 30책으로 《국역 고려사》 번역을 완성했다. 이 번역본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아래 항목 참고.

6. 열람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네이버 국역 고려사 - 한국어 번역, 한문 원문 및 원서 스캔 이미지

《고려사》는 고려시대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2012년까진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DB에서는 원문을 무료로 볼 수 있었지만 국역이 안되어 있었고, KRpia에서는 기관 회원에게 국역본을 공개하긴 했는데, 유료였다. 뭐 KRpia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교나 지역도서관 회원이라면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절차만 거치면 집에서도 원격접속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2012년 12월 26일 부터 네이버에서 《삼국사기》 등과 마찬가지로 국역 《고려사》 서비스를 실시했다. 언제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문과 번역본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의 링크를 참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에서 나온 《국역 고려사》를 바탕으로 서비스되고 있다. 간행사, 관련 페이지

201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고려사》 번역본이 올라왔다.

중국어 위키문헌에도 《고려사》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1]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04호에서 보물 제2115-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2] 제2114-1호와 2114-2호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다.[3] 고려의 외왕내제적인 요소와 용어들을 제후국의 법도에 맞게 고쳐 서술했다.[4] 나중에 편찬된 축약본인《고려사절요》의 분량이 35권이다. 그러다 보니《고려사절요》는 단순히《고려사》의 축약본이 아니라 기전체 전환 이전 편년체 기획을 이어 받은 판본에 가깝게 인식된다.[5] 임금이 의정을 불러서 친히 전하는 왕명.[6] 장회태자의 주+사마표의 지 포함[7] 배송지의 주 포함[8] 한국사에서 중국의 기록과 어느정도 견줄수 있게 되는건 조선시대 이후로, 대륙의 정사인 24사 전부를 다 합쳐서 3999권, 3996만 6383자인데, 《조선왕조실록》은 4964만 6667자로 24사 전부를 합친 양보다 더 많다. 심지어《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으로 1600년도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고, 여기서도 일부 내용이 사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 있는 분량만 무려 2억 5천만 자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