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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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
<rowcolor=#670000,#fedc89> 6권 | 7·8·9권 | 10권 | ||||
정종靖宗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 15·16·17·18·19·20권 | 21권 |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 25·26·27권 | 28·29·30·31·32권 | ||||
고종 | 원종 | 충렬왕 | ||||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 36권 | 37권 |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 133·134·135·136·137권열전 | 45·46권 |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
[ 표(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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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 ||||||
<rowcolor=#670000,#fedc89> 110권 | 111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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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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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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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 |||||
122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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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폐행1(嬖幸一)」 | ||||||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 ||||||
124권 「폐행2(嬖幸二)」 | ||||||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 ||||||
125권 「간신1(姦臣一)」 | ||||||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 ||||||
126권 「간신2(姦臣二)」 | ||||||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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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 131권 「반역5(叛逆五)」 | |||||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 |||||
132권 「반역6(叛逆六)」 | ||||||
신돈 | ||||||
133·134·135·136·137권 | ||||||
신우(우왕) (신창(창왕)) |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강조 康兆 | |
출생 | 미상 |
사망 | 1011년 1월 7일[1] (음력 1010년, 현종 1년 11월 24일) |
본관 | 신천 강씨 |
경력 | 중추사(中樞使)[2] - 우상시(右常侍)[3]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4] 중대사(中臺使)[5] 이부상서(吏部尙書) - 참지정사(叅知政事)[6] |
[clearfix]
1. 개요
고려 초기의 문관이자 권신. 고려 왕실 반정[7]의 시초 격인 강조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목종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으나, 되려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직접 출정했고, 초반에는 선전하다가 통주 전투에서 패배했다.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해 전장 한복판에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2.1. 출신
강조의 본관과 세계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씨가 토성으로 나와 있는 곳이 주로 황해도 서해안 일대의 군현들이다. 따라서 강조의 본관은 신천(信川)·영강(永康)일 가능성이 높다.[8]다만 영강 강씨의 시조 강증(康拯, 1049년 ~ 1120년)은 강조 사후의 인물이므로 강조는 신천 강씨의 인물으로 해석해야 한다. 신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조는 신천 강씨의 인물로 나온다. 부를 '태주'로 하는 1-1쪽(고려시대 인물)을 보면 조(兆)를 확인할 수 있다. #
2.2. 강조의 정변
자세한 내용은 강조의 정변 문서 참고하십시오.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북방 군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아챈 목종은 강조를 빨리 내려오게 해 자신을 호위하게 한다. 하지만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합천에서 갓 도착한 17세의 대량원군을 즉위시킨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讓國公)[9]으로 끌어내린 뒤 고향 충주로 내려가고자 하던 그를 부하들인 김광보와 안패를 보내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시해한다. 이후 천추태후를 황주로 유배시키고 친족을 섬으로 유배, 김치양과 그의 6살 아들, 목종에게 빌붙어 전횡을 일삼던 유행간 등을 죄다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내면서 천추태후 - 김치양 세력과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강조는 이어서 2월에 중대사(中臺使),[10] 3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11] 및 참지정사(參知政事)[12]로 승진해 요직을 차지한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강조가 목종이 시해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개경 근교까지 휘하 군을 이끌고 진군하였는데 목종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하자 이미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와 버렸는데 반역으로 몰릴까 두려워 폐위시켰다는 설과 강조가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추문이 많은 목종에게 불만을 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폐위했다는 설이 있다.[13]
2.3. 통주 전투
고려 행영 군단 | |||||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 |||||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 | |||||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 |||||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 |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 | ||||
판관(判官) | |||||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 | 시어사(侍御史) 윤징고(尹徵古) |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 | |||
수제관(修製官) | |||||
우습유(右拾遺) 승이인 |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 | ||||
(중략) | |||||
통군사(統軍使) | |||||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 | |||||
(중략) | |||||
휘하 장병 | |||||
300,000명 |
그런데 문제는 북적(北狄) 거란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요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주를 시해한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의군천병(義軍天兵)[14]이란 이름을 붙인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물론 요성종이 진짜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다. 요성종은 모후의 사망 이후에 황제 단독으로 친정을 하여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조정과 군부에 보여주고 1차 여요전쟁 이후에 고려가 통제력을 갖고 개척한 강동 6주를 빼앗거나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기존에는 송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든든히 하려는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는 설이 정설처럼 여겨졌지만 이미 양국은 전연의 맹을 맺어 평화를 이뤘고 서로가 상대방을 완전히 끝장낼 수 없음을 인식한 상태였다. 역사적 기록에서도 요성종은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고 퇴각할 때에도 현종의 입조를 약속받고 퇴각했다. 이후에도 송나라로부터는 세폐를 받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는 침공하는 모습을 보면 대송 전쟁 때문에 고려를 침공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성종의 침공을 알게 된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15] 직위를 받아 군권을 위임받고 직접 출진한다. 사료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강조가 이미 실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도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권의 위임 과정도 조정의 결재는 요식 행위이고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2차 여요전쟁 때 고려는 3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16][17] 강조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사령관으로서 직접 출전했는데 출전이 불가피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이때 강조는 전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음에도 권력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당장 중신 중 1명이자 목종으로부터 현종의 호송 임무를 명 받았던 최항이 정변을 일으켜 군왕을 끌어내린 강조를 보고 "고금에 이러한 일이 있었느냐?"며 대놓고 일갈할 정도였다. 당시 명백한 권력자였음에도 면전에서 대놓고 비판을 들을 정도로 초기부터 권력 기반과 입지가 불안정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거란이 자신의 집권을 명분으로 침공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반대 세력에게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게다가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 거란의 침략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 병력 지휘를 맡겨서 출전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인사도 전혀 없었다. 빈약한 인력풀로 그런 능력과 위치를 가진 인사부터가 없었다.[18] 결국 본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전해야 했던 것.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진에서 양규가 지휘하던 고려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하천을 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棋.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강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군영을 세워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을 차지하였는데 강조가 그 중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군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차로 진을 쳤다가 거란의 군병이 들어오면 검차가 합공하여 꺾거나 쓰러뜨리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항상 이겼다는 뜻)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였다. 강조는 점차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강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군영을 세워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을 차지하였는데 강조가 그 중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군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차로 진을 쳤다가 거란의 군병이 들어오면 검차가 합공하여 꺾거나 쓰러뜨리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항상 이겼다는 뜻)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였다. 강조는 점차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자 강조는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방심하기 시작했다. 한편 거란군은 대군이 한 번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전략을 바꿔 소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나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봉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파견해 삼수 쪽 진영을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으로 나온다. 허나 강조는 처음 삼수 쪽 진영, 즉 자신이 있는 진영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믿지 않았다. 아니면 소수만 잠시 들어온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많이 들어오게 해라."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많이 들어오게 해라."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19]인데, 거란군의 최고 정예인 이들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였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 · 김계부(金繼夫) · 이원(李元) · 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고려사절요》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고려사절요》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적이 이미 안까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보고를 또 받자 그제서야 사태가 여간 심각해진 게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다. 다른 두 진영이 협공하기 전에 본인의 진영이 먼저 붕괴되자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에서는 이때 목종의 혼령이 강조 앞에 나타나 "이제 네 놈은 결코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호통을 치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한다.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 볼 때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강조의 방심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일부 평가에서는 "전술적 부분보다는 병사들의 숙련도가 강조의 지시에 대해 그만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혹은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한군데 뭉쳐 기동력이 제한되어버리면 그냥 앞줄의 병사 때문에 안 쪽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해버려 뭉치가 되어버리기 십상인데 이런 점을 이용해 강조는 "거란군은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군이라 이를 제한시켜 버리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란이 그것을 무시할 정도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줬다는 것. 실제 거란이 기동력을 살려 소수 정예군만으로 휘젓는다면 정예 '우피실군'이 많은 손상을 입기는 하겠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회복하니 전 같은 몰아죽이기 전략은 안 통했을 것이다. 결국 거란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썼고, 강조는 이 점을 놓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지휘하던 30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파되면서 순수 전사자만 무려 3만 명이나 발생했으며, 그 외 이현운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덤으로 사로잡혔고,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2.4. 장렬한 최후
고려 강조를 묶어가는 거란 우피실군을 그린 상상화.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의 그림이다. |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후 포로로 잡힌 강조는 결국 거란 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요나라군에게 죽임을 당한다."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후세인들이야 고려가 거짓말처럼 승리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강조 입장에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라는 나라의 사활을 자기 손으로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만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과 죄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오랫동안 자신의 부하로 활약한 이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했다. "난 고려 사람이다, 어찌 너(汝)의 신하가 되겠느냐?"[20]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했다.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했다. "난 고려 사람이다, 어찌 너(汝)의 신하가 되겠느냐?"[20]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했다.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3. 평가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심은 없었다.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강)조가 건덕전(乾德殿)[21]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강)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22]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강)조가 건덕전(乾德殿)[21]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강)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22]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이후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선위 받기에는 시기상조이거나 명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단 "나는 절대로 왕이 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새로운 분을 왕으로 모시려 할 뿐이다."라고 허울 뿐인 충성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이후 강조의 행적을 보았을 때 권력욕 자체는 있었어도 역심은 없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무리해서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얼굴마담 하나 세워놓고 본인이 권신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강조가 실권을 잡고 뭘 해보기도 전에 거란군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된 탓에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게 가설의 영역이 되어 버렸긴 하다.
외치 부분에서는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닌 최고 권세가가 직접 최전선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점만큼은 분명 호평받을 만하다. 물론 상기되어 있듯 일단 명분론적으로는 거란의 침공 자체가 자신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강조가 출전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이상하기는 하다.[23] 또한 자신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강조 자신이 직접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24][25]
그래도 포로로 잡힌 뒤 요 성종의 회유를 받아들여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고, 특히 살이 찢겨나가는 극형을 받으면서까지도 스스로를 "나는 뼛속까지 고려인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것을 보면 강조는 고려 왕가에 대한 충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고려인이란 정체성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간신들처럼 단순히 권력만을 탐하는 것이라면 그냥 요 성종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였을테니. 심지어 정벌의 명분이 반역을 저지른 강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로잡자 황제 본인이 직접 나서서 투항을 권유한 데다가, 강조 본인의 참패로 고려의 전쟁 수행 능력이 박살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개를 부르짖은 만큼 이 부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내치 부분에서 강조는 집권 이후 본인이 선전한 대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천추태후와 김치양과 그 휘하 일당들을 전부 보내버렸다. 문제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목종마저 폐위 후 시해해버리고 현종을 옹립해 졸지에 권신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 가 거란의 침입으로 본인과 휘하 세력이 전부 쓸려 나가면서 순식간에 정적들이 사라져버린 현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건 어찌 보면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기도 한 것이, 당장 강조의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현종은 왕권 강화고 나발이고 나라 멸망 직전의 사태를 맞이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의 나주시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고, 피난 와중에도 사실상 반란군이나 다름없던 지방 호족들에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현종이 《고려사》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군이라 이후 전란을 수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건 불행 중 다행이다. 덕분에 강조도 의도한 건 아닐 텐데 얼굴마담 현종이 알고 보니 능력자라고 재평가받는 측면도 더러 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임금을 시해하고 권신이 된 점이 못마땅했는지 《고려사》의 <반역 열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26] 사실 함부로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위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해한 것이 가장 임팩트가 컸지만, 목종에게 멋대로 시호, 묘호, 능호를 올린 것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군주의 시호와 묘호, 능호를 정할 때는 먼저 신하들과 논의한 후 現 왕이 최종 결정을 하는데, 강조는 신하들과의 논의와 왕의 재가도 무시한 채 멋대로 올려버렸다. 이렇게 올려진 시호와 묘호, 능호는 후에 현종에 의해 수정된다.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조를 위인으로 대우해 줄 수 없었고, 고려사에서 죽을 때 비로소 목종의 혼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식의 서술을 추가했다.
한편으로 현종과 강조의 관계에 있어 짐작해 볼 기사가 있는데, "현종 2년 8월에 강조의 일당들을 유배 보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때 강조의 일당으로 지목된 5명[27] 중 3명이 정변 당시 강조의 부하였거나 강조의 편에 섰던 이들로, 탁사정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붙었고,[28] 최창과 위종정은 강조의 부하들로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들이다. 물론 대부분은 잘 나갔지만, 저 5명을 강조의 일당이라고 엮어 부른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강조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대에 실제로 강조에 대한 평가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강조를 대놓고 반역자로 규정했다면[29] 그 가족들도 연좌제로 처벌을 받았을 텐데 정작 강조의 가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어서 이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없다.
4. 기타
- 고려사 최초의 쿠데타 성공자이던 강조의 죽음은 이후 후대 쿠데타 세력에게 교훈을 줬는지 후대의 최씨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본인들이 직접 싸우지 않고 도망쳐 수비만 하면서 몸보신에만 신경썼다. 당연히 그 와중에 국토는 짓밟히고, 죽어나간 건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도 묘하게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일대 회전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고 패배로 왕이 피난까지 갈 정도로 나라가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는 점이 비슷하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고, 신립은 선조의 사돈이라 당시 왕과 밀접한 관계인 인물들이라는 점도 겹친다.[30] 신립과 비교했을 때 강조는 기록상으로는 통주 전투를 뺀 특별한 전적이 보이지 않지만[31] 신립은 임진왜란 이전 니탕개의 난에서 활약한 조선 수위급 용장이었다. 그렇지만 본인들의 마지막 전투인 통주 전투와 충주 탄금대 전투를 비교하면 강조는 초반에는 선전했지만, 신립은 일본과 명나라한테 모두 놀림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졸전을 펼쳤다.[32] 그래도 최후는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참히 생을 마감했으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다만 반론도 있는데, 신립도 사실은 탄금대 전투에서 초반엔 상당히 선전했으며, 어차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이겼다고 해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군에게 협동당해서 참패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령 사수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대다수 병력이 농민 징집병이라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매복기습작전 수행 능력에 차질이 있으며, 도주의 우려가 컸고, 기병의 기동성을 살리기도 어려웠으며, 당시 조령에는 요새시설조차도 전무했다. 그리고 고니시군과 가토군, 구로다 군이 모두 한꺼번에 북상중이었기에 한양북상저지는 현실적으로 불가하며, 아마 더 끔찍하게 패전했을 것이다. 임용한 교수의 탄금대 전투에 대한 분석 영상 링크들. 링크 1, 링크 2, 링크 3, 링크 4, 링크 5, 링크 6.
- 600년 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과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북방의 방비를 담당한 장수들이었으며,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다는 점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 다른 공신들에 밀려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고, 이괄의 난 때는 초기 승승장구에 자만했는지 전략을 잘못 짜서 실패하고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에 비하면 강조는 자신이 거사를 안 하면 꼼짝없이 왕위가 김치양의 아들에게 넘어가 왕씨의 사직이 끊길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정변의 명분이 충분했으며, 애초에 목종의 명으로 개경 진격을 준비한 것이었다.
- 이괄이 국왕으로 세운 흥안군은 강조가 국왕으로 세운 현종보다 능력과 평판이 좋지 않다. 오죽하면 일반 백성들조차 이괄이 흥안군을 국왕으로 세웠으니 오래 가지 못하겠다는 발언까지 하였을 정도다. 실제로 이괄이 패한 이후 흥안군도 국왕이 된지 단 3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 본래 임금의 충신이었고 최전방 방위 총책임을 맡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으나 임금이 죽었다는 헛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제국 시대 인물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비슷한 모습이다.
- 강조는 형 강억(億)이 있다. 즉 부모[33]가 이름을 억, 조로 지은 것.
5. 대중매체
5.1. 만화
- 웅진출판사에서 펴낸 역사 만화인 『한국의 역사』에서는 거란 황제의 항복 제의를 거부하고, 항복해서 부하가 되겠다는 이현운의 얼굴을 "이런, 쓸개빠진 놈!"이라고 욕하면서 걷어차 버린 뒤 "내가 임금을 죽인 게 네놈들에게 나라를 바치려고 그런 줄 알았느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했다. 어느 강감찬 위인전에서는 요 성종에게 고개를 쳐들고 "난 비록 왕을 배신했어도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네놈에게 머리 숙여 굴하지 않을 테니 정 굴하게 하려면 내 목을 벤 다음에 목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거라."라고 일갈하는 대사를 넣기도 했다. 1990년대 어느 출판사 버전에서는 요 성종을 비웃으며 고문을 받음에도 크게 일갈하고 웃으며 숨을 거뒀다는 창작을 넣기도 했는데 마냥 조작이라고 보기에는 실제 역사와도 큰 맥락이 일치하기는 한다.
5.2. 다큐멘터리
- 2019년 방영한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1부에서 배우 문종영이 연기했다. 출정 전 현종을 썩소지으며 쳐다보는 등 권신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죽음도 통주 전투에서 첫 승리에 방심했다가 결국 패해 죽었다는 것만 수급이 걸린 모습과 함께 보여주고 나름 장렬했던 최후는 생략당했다. 1부는 양규가 사실상 주연이다.
5.3. 드라마
5.3.1. 강감찬
1973년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배우 남성우가 연기했다. 거란의 1차 침공 때 양규 및 강감찬과 함께 강화론에 반대하였다. 후에 정변을 일으키고 거란의 침공 당시 삼수채에서 2만이 넘는 거란군을 물리쳤으며 거란의 결사대에 생포되어 귀순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희가 강조의 야심을 경계하였다고 한다.5.3.2. 천추태후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최재성[34]이 연기했다. 처음 등장할때 발해 유민으로 설정되었으며 이때문에 같은 발해 출신의 왕족인 대도수와도 점차 친분을 쌓는 모습을 보인다. 전형적인 우직한 맹장으로 나오며, 작중 등장 인물들 중에서 무력이 혼자 궤를 달리한다.[35] 혼자서 어지간한 무장 2~3명을 거뜬히 제압하며[36] 거란 최고의 맹장이라는 야율분노까지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무력으로 치면 양규와 함께 투톱이며 세계관 최강자이다. [37] [38] 또한 작중에서는 고려 제일의 명장으로 통한다. 국방부장관인 병부상서와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의 대장군을 겸하고 있다. [39] 거란 승상 한덕양의 명으로 쳐들어온 거란군을 막아내고 김치양또한 전장에서 강조를 당해낼 자는 드물다며 매우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40] [41] 또한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왔을때도 강감찬 등이 고려군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은 강조밖에 없다며 그가 있다면 거란군을 능히 막아낼 것이라는 신뢰를 보이기도 한다. 극초반 부터 등장하는데 발해 유민들을 고려군이 가두어 놓고 있자 감옥 울타리를 뛰어넘어 봉을 휘두르며 고려군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이 난동으로 인해 화난 고려이 발해유민들을 전부 끌고와 참수하려 하는데 이때 백성으로 위장하고 있던 황보수가 이를 막아섰고 지켜보던 강조는 그녀를 존경하게 된다. 이때문에 천추태후(채시라 분)에게 명복궁때부터 천향비와 함깨 거둬진 후 몰래 짝사랑하는 설정도 붙었는데 은근히 순정남으로 천추태후와 가까워지는 김치양(김석훈 분)을 점점 싫어했다. 이후 명복궁에서 황보수를 끝까지 지켜내겠다며 충성을 맹세하고 이후 제1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명복궁 군사 100과 함께 거란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유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땟목을 타며 강을 건너던 중 거란군 군영이 가까워지자 물속으로 잠수하여 숨어들어 거란군의 타초곡기를 기습하여 군량과 다리를 불태우고 이를 통해 거란군의 행군이 늦어져 중군사 서희와 강감찬이 거란군을 대비할 시간을 벌어준다. 이후 안융진에서 대도수를 만나 같은 발해인으로써 유대감을 느끼기도 하고 야율적가 이끄는 거란의 별동대가 공격해오자 김훈,최질,유방,대도수와 함께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안융진에서 수성전을 펼치며 성문이 뚫려 몰려들어오는 거란군을 향해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 잠시 막아내는 모습도 보여준다. 참고로 이때 안융진의 성주가 이현운으로 나오며 유방,김훈,최질 같은 장수들이 이때 모두 안융진의 낭장과 별장으로 있었다. 이때 함께 싸운 정으로 유방과 김훈, 최질등은 강조를 따르게 된다. 이후 천추태후를 찾으려고 행방불명 된 때 수색도 하고 요나라로 떠나는 사신단의 호위도 했으며 거란 황궁에서 천추태후를 구하기 위해 동생 강신과 힘께 거란군을 죽이며 무쌍을 선보인다. 거란과 고려의 무사들이 1대1 대결을 벌이는데 밀리고 있던 고려측이 강조가 승리하며 다시 동점이 되고 천추태후가 요 성종과 활쏘기 대결에서 승리하며 고려의 포로들을 구출하게 된다. 이때 보여준 무력이 거란 장군들이나 성종에게 깊이 각인되었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강조의 용력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42] 고려에 돌아와서는 시위부의 장군으로 임명받지만 숭덕공주(천추태후) 가 난을 일으키다[43] 실패하자 중랑장으로 강등되게 된다.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일로 유배를 간 사이 아들인 목종을 맡을 정도로 의리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목종이 즉위하고 천추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며 권력을 잡자 강조는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이 된다. 참고로 유방과 김훈, 최질은 안융진에서 함께 싸운 정과 숭덕공주의 난때도 함께 했었고 강조가 개령군(목종)을 맡을때도 함께 하였기 때문에 안융진 전사들로 묶이며 시위부 장군을 맡다가 모두 고속으로 승진하여 각각 6위군영의 수장 자리를 하나씩 맡게 된다. 이후 천추태후가 요나라에서 시집와있던 공주를 죽이게 되었고 더하여 칭제를 하자 이때문에 분노한 소태후와 담판을 위해 내원성(압록강 넘어 거란 땅에 있다.) 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 고려와 거란이 각각 50명씩 뽑아 소규모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강조와 대도수, 양구와 김숙흥등이 출전했고 양규의 주도하에 만들어지던 검차를 적극 활용하여 거란 기마병을 봉쇄하며 승리하게 된다. 이를 본 소태후와 한덕양이 더욱 고려를 경계하게 된 것은 덤. 이 승리로 인해 고려는 황제국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거란 성종과 천추태후은 서로의 손가락을 상처내 피를 따라 나눠마신 뒤 형제의 연을 맺게 된다.[44] 이후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더 가까워지고 천추태후를 못 잊다가 나중에 그를 짝사랑하던 천향비(홍인영 분)와 결혼하는데 천향비가 김치양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결국 살해당하자 안 그래도 미워했던 김치양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편정에서 대놓고 김치양에게 주먹을 날리고 이 사건으로 북방으로 떠난 후에 김치양의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왕궁으로 돌아와 김치양 일당을 쳐부수는데 이때 강조의 정변 부분은 역사 왜곡이 많이 곁들여져 있다.[45] 역사 기록에서는 거란 성종에게 잡혀갈 때 모포말이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고 하지만,여기선 제2차 여요전쟁 통주 전투 마지막에 패배하고 포로가 된 후 자신을 회유하려는 성종을 암살하려다가 그렇게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이때 이현운과 안패를 시켜 강조를 회유하려 힘쓰는데 네놈들같은 100명보다 짐에게는 강조 하나가 더 필요하다며 강조를 얻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삼국지에서 조조가 관우를 얻으려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그렇게 거란군과 100 vs 1 대결을 벌이는데, 이 100명이 일반병이 아니라 가려뽑은 최정예병이다. 거기다 당시 강조는 통주 전투에서 입은 부상과 더불어 고문을 받아서 컨디션도 완전 바닥인 상태인데도 100명을 상대로 전멸시키며 승리했다. 하지만 이후 난입한 거란의 장군 5명의 합공을 받아 죽게 되는데, 5명의 합공 때도 이미 떨어질 대로 뚝 떨어진 체력과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명을 상대로 힘싸움으로 오히려 이기는 괴력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이라면 사극에 등장하는 주연인데도 불구, 검이 아니라 창을 썼다는 것. 마지막 사망하기 전 강조의 회상 장면에 천향비와의 결혼 생활이 없어서 "강조는 결국 천향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냐?"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46] 고려 최강의 대장군답게 창을 땅에 꽃고 일어서려는 자세로 눈을 뜨고 사망한다. 거란 성종은 이를 보며 참으로 아까운 자를 잃었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이후 뒤늦게 찾아온 천추태후가 강조의 시신을 보며 끌어안고 그제서야 강조는 천추태후의 품으로 쓰러진다. 이때 천추태후가 자신과 함께 거란을 물리치고 발해땅을 밟아봐야 하지 않았냐며 통곡하는 연기가 압권. 천추별곡이 배경음악으로 함께 나오며 명장면을 만들어낸다. 이후 황보수[47] 와 그 부하들이 강조의 시신을 태우며 화장시켜준다. 참고로 강조의 죽음이 나온 76화 엔딩에서는 다른 방영분과 달리 천추태후의 bgm중 하나인 마음꽃이 흘러나오며 강조가 거란군을 휩쓰는 장면이 지나간다. 황보수는 같은 발해 출신으로 등장한 유충정에게 강조의 시신 수습을 해달라 부탁하지만 유충정은 노의 낭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따로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이후 거란으로 거짓 투항하여 이현운과 안패를 독살하며 강조의 복수를 마치고 강조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도 함께 죽는다. 그 후에는 강조의 유골을 김종현과 천추태후가 강에 뿌려주는 모습으로 등장은 정말로 끝.
5.3.3. 고려 거란 전쟁
자세한 내용은 강조(고려 거란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2023년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배우 이원종이 연기했다.
6.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1월 1일[2] 중추원의 장관. 목종 대 부서명이 중추원이었을 때의 직명이다.[3] 내사문하성의 정3품 낭사 벼슬.[4] 이 직위는 후에 양규가 이어 받는다.[5] 목종을 시해하고 다음 왕 현종에게서 받은 직위. 중대사 = 중추사이지만 강조가 중추원을 자기 입맛대로 마개조했으므로 그 입지는 천지차이다.[6] 목종을 시해하고 다음 왕 현종에게서 받은 직위.[7] 김훈·최질의 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정변, 위화도 회군 등[8]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9] 나라를 양보해준 공작.[10] 고려 중대성의 장관. 중대성은 중추원의 바뀐 부서명이다. 강조가 직접 바꾼 것으로, 중추원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부서명부터 직렬까지 모조리 바꿔버렸다.[11] 고려 상서성 이부의 장관. 이부는 인사를 담당한 부서이다.[12] 고려 중서문하성 소속의 3번째로 높은 관직. 강조는 이부상서로 조정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최고 정부 기관의 요직을 차지해 정권 장악에 성공한다.[13]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전자와 후자의 가설을 둘 다 반영해 스토리를 만들었다.[14] 뜻은 의로운 군대이자 하늘의 병사.[15] 임시로 편성된 대 거란 군단의 최고 사령관급 직위이다.[16]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는 주현군과 비(非) 전투 병력을 합쳐 40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대로 30만조차 과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일부 있다.[17] 고려는 10만 단위 대군을 자주 동원해서 보는 이들을 상당히 놀라게 만든다. 참고로 정유재란 때 전선에 투입된 조선 육군은 3만, 명나라군은 11만이었다. 사실 봉건제 국가가 중앙 집권 국가보다 군사력이 더 강한 것이 보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모든 병권을 중앙에서 꽉 쥐고 있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지방 호족들이 데리고 있던 사병들을 긁어모으면 수가 더 많아지기 때문. 조선은 정유재란 시기 3만의 군대를 유지했지만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회담으로 시작된 휴전 기간 동안 10만에서 15만이 넘는 대군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대치 상태가 길어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경제 복구를 위해 일부 병력인 3만을 남기고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아무래도 명나라라는 강대국에게 군사적 안전 보장을 받은 조선과 달리 패권 전쟁이 이어지던 고려 시대에는 자위력을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18] 양규와 김숙흥은 당시에 원스타급 장군이고 지채문은 중랑장이어서 당시에는 총사령관을 맡길 정도로 계급이 높지 않았다. 강감찬, 김종현, 강민첨 등은 3차 여요전쟁 때까지는 갑옷조차도 입어 본 적도 없은 인물들이다.[19] 거란 황제의 친위 부대로 편제상 병력은 총 6만이다. 이 부대는 훗날 귀주 대첩 때 강감찬에게 패하여 거의 전멸했다.[20] 고려사 원문에서는 강조가 거란 성종을 여(汝)라고 부르고 있다. 너 여 자는 친구 같은 허물없는 사이에만 쓰이는 2인칭이다. 최소한의 존칭도 붙이지 않은 것은 외국의 군주로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에 가깝다.[21] 태조가 지은 본궐의 정전. 이후 현종 대에 제 2정전으로 밀려난다.[22] 만세는 황제에게만 외치는 것이다. 즉, 군사들은 강조가 다음 왕이 될 것이라 여겨 (혹은 그 정도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여겨) 그에게 만세를 외친 것이고 강조는 왕이 될 생각이 없었기에 놀란 것이다.[23] 다만 이보다 더 옛날인 고당 전쟁 당시 당태종이 내세운 명분이 멋대로 자기 임금을 시해해버린 연개소문의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이때 연개소문은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다.[24] 강조가 정변을 일으키기 전까지 수년간, 고려는 목종과 천추태후의 정권이었다. 자연히 그들에게 줄을 데려고 많은 시도를 한 지방의 호족들, 그리고 그들 라인을 타 실제로 성주, 장군의 관직을 가지게 된 인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1009년, 강조의 정변부터 1010년, 거란 침공이 있기까지 1년은, 지방은 커녕 개경의 중앙정권도 휘어 잡기 촉박한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성 단위로 군 통제권을 줘 버린다면, 권력에서 밀려날 파벌들이, 강조 정권의 타도를 조건으로 거란에 항복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강조 입장에서는 군사들을 한 곳에 모아 자신이 직접 통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전쟁에다가 정치적인 변수를 넣어, 가장 좋은 전략인 공성전을 택하지 않고 시원하게 말아먹은 것이었다.[25] 비슷한 사례로 최영이 고려군 대부분을 이성계에게 주고, 정작 본인은 개경에 남아 있는 바람에 위화도 회군을 막지 못했다.[26] 물론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의 관점이다.[27] 박승(朴昇) · 최창(崔昌) · 위종정(魏從政) · 강은(康隱) · 탁사정(卓思政) 등[28] 탁사정은 2차 침입 당시 서경성 전투 패배에 큰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이 전투의 패배 역시 그의 실각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29] 다만 대놓고 반역자로 규정해버리면 현종 역시 반역자에 의해 옹립된 군주가 되어 정통성이 크게 훼손되기에 강조와의 관계와 별개로 현종이 택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30] 신립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의 장인이다. 특히 신성군은 선조가 내심 후계자 후보로 염두에 두었을 정도로 상당히 총애한 아들이다.[31] 이는 조선에 비하여 고려가 아무래도 훨씬 더 옛날이라 기록이 상대적으로 빈약함을 감안하여야 한다. 명색이 군권으로 실권을 쥔 강조가 그 군권을 쥐기 위한 전공이 없었을 리가 없다. 단지 기록이 빈약할 뿐일 것이다.[32]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대한 빈약한 지식과 어두웠던 세상물정에 한 몫 했다. 실제 <징비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부하들이 다들 지키자고 했으나 신립이 우격다짐으로 지키지 않은 곳을 통과했을 때 복병이 있나 싶어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하며, 명나라군 역시 "이런 곳도 안 지키고 뭐를 했단 말인가?!"라는 식으로 혀를 찼다고 한다.[33] 신천 강씨 족보상으로 강조와 강억의 아버지로 형부상서를 지낸 강태주(泰周)라는 인물이 있다.[34]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왕요 역,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마루오까 경부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 역,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이밀 역,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계백 역.[35] 양규와 김숙흥과 가상으로 동생으로 나오는 강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36] 대련에서 사일라와 사가문을 동시에 때려눕히기도 하고 탁사정과 최사위 등 2명이 정면으로 칼을 휘둘렀을 때 창으로 받아내서 2명을 벽까지 밀어버린다.[37] 굳이 따지자면 강조와 양규의 나이차가 있기 때문에 전성기 기준으로는 양규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 최강자였다.[38] 작중에서 야율분노는 강조와 2번을 싸웠는데 두번 모두 패배하였으며 2번째에서는 강조에게 사망하였다.*[39] 그중에서도 6위보다 높은 2군중 더 서열이 높은 응양군의 대장군(작중에서는 상장군보다 대장군의 서열이 더 높게 나온다.) 을 맡고 있다.[40] 이때 김치양은 강조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옥새를 이용해 황명으로 강조를 잡아들일 계획을 세운다.[41] 실제로 강조가 서경에서 군대를 이끌고 오자마자 김치양의 난이 진압되었다.[42] 사가문의 처가 되는 소태후의 호위무사 독연이 강조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고 반해 한동안 쫓아다니기도 하였다.[43] 이때도 과물같은 무력을 선보이는데 성종이 반란을 사전에 알아채고 군사들을 매복시켜 놓았지만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혼자 다 쳐내거나( 유방같은 장수들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병사들은 죽었다.) 시위군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인다.[44] 이때문에 이후 능글능글해진 거란 성종이 천추태후를 보며 누님이라고 놀리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45] 예를 들면 강조의 정변 이후에 대량원군이 새 황제로 즉위하기 전 "태후 마마가 섭정해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웠다.[46] 물론 강조 입장에서 당시 천향비는 이미 고인이었고, 천추태후는 멀쩡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마음이 더 갔을 수도 있다.[47] 작중에서 천추태후의 이름이 황보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