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할아버지 류경이 64세이던 해인 1274년 류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백구(伯丘), 호는 담암거사(湛菴居士)이고 처음 이름은 류인화(柳仁和)이다. 시조 류차달로부터 11세손이며,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 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判版圖司事)에 이르렀고, 장경(章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류돈의 손자들 세대에 이르러 조선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여말선초에 활동한 류만수의 직계 후손들은 좌상공파, 류원현의 직계 후손들은 검한성공파, 류정현의 직계 후손들은 정숙공파로 나뉘어진다.
류돈은 형제, 매부들과 함께 문화 류씨 가정보 천자장(天字張)에 등재되어 있고, 류돈의 여러 아들과 사위들 및 이들의 후손들(류돈의 현손 항렬에 이르기까지)이 우자장(雨字張)에서 생자장(生字張)에 걸쳐서 등재되어 있다.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 남양 홍씨의 고종사촌오빠인 류돈은 기전체 역사책인 고려사 열전에 할아버지 류경, 아버지 류승, 손자 류만수와 함께 입전(入傳)되어 있다. 그리고 류돈이 1349년(충정왕 1년) 세상을 떠난 후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勅授 將仕郎 匡靖大夫 檢校都僉議?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안진(安震 ; ?-1360)이 작성한 묘지명에 류돈의 생애에 대해 기록되어 전한다.
2. 생애
류돈은 1286년 음서 - 문음(門蔭)을 통해 13세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임명되고, 1292년 권지 도병마녹사(權知都兵馬錄事)에 이어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300년 9월에 지공거(知貢擧) 전승(全昇 ; ?-1302 ; 충선왕의 개혁 정치를 보필한 문신)과 동지공거(同知貢擧) 정윤의(鄭允宜 ; ?-1307)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했다.11세기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홍문공(弘文公) 정배걸의 7대손인 정윤의의 사위가 성주 이씨 이조년이다. 이조년의 여러 손자들 - 인(仁)자 돌림 형제들로 고려 후기 정계를 풍미한, 충정왕 묘정 배향 공신 이인복, 우왕 대의 권신 이인임, 이방원을 과거에 급제시킨 좌주 이인민(이직의 아버지), 하륜의 장인 이인미, 태조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아버지인 이인립 등이 있다.
과거에 급제한 류돈은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에 오르고 경상도 지방의 염세(鹽稅)를 감독하기 위해 복주(福州 ; 안동)에 다녀왔으며 이후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선부의랑(選部議郎)-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 左副代言)-성균좨주(成均祭酒)-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언부전서(讞部典書) 등을 역임하며 대언(代言)을 겸했다 또한 경상도 상주 및 경기도 광주의 수령을 거쳐 종부(宗簿), 전의(典儀) 시(寺)의 판사(判事)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겨 풍속을 교화했다.
지밀직사사 판전교시사(知密直司事 判典校寺事)-밀직사 상호군(密直使 上護軍)에 이어 1337년 경상도 합포 진관(鎭管)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시령군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始寧君 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으로 은퇴, 치사한 후 1349년 5월 무신일에 와병하여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월 경신일에 왕경 개성부(王京 開城府) 송림현(松林縣) 동쪽의, 남양 홍씨(류돈의 어머니 ; 홍진의 딸이자 홍규의 누이) 묘소에 장례를 지냈다.
3. 가족 관계
* 부인 승화군부인(承化郡夫人) 김씨(金氏) ; 동지밀직사사 판도판서(同知密直司事 版圖判書) 김중전(金仲全)의 딸(하단 류돈의 딸, 아들들 기록 순서는, 딸 아들 통틀어 출생순으로 기록된(아들 먼저 기록이 아님) 가정보 내용에 따름)
- 첫째 딸 ; 군부정랑(軍簿正郎) 최계진과 혼인
- 둘째 딸 ; 응양군호군(鷹揚軍護軍) 설봉(薛鳳 ; 순창 설씨 설봉의 선대는 설신(薛愼 ; ?-1251 /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刑部尙書 翰林學士丞旨) → 설공검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설지충(김원명, 김속명의 외할아버지) → 설봉)과 혼인 / 설봉의 매부 광산 김씨 김인연(金仁沇)의 아들들이 김원명, 김속명 형제이다.
- 첫째 아들 류총(柳總) ; 밀직사좌부대언 판사복시사(密直司左副代言 判司僕寺事)
- 며느리 ;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 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朝列大夫太子左贊善推誠同德協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醴泉府院君領藝文館事) 문탄공(文坦公) 권한공(權漢功 ; ?-1349)의 셋째 딸
권한공은 류총의 고모부인 권부(權溥)와 8촌 간이다. 권부의 선대(先代)는 권중시(權仲時) → 권수평(權守平 ; ?-1250) → 권위(權韙) → 권단(權㫜) → 권부로 이어지며 권한공의 선대는 권중시 → 권수홍(權守洪) → 권자여(權子輿) → 권척(權𩑠) → 권한공으로 이어진다. 권한공의 아들 권중달의 딸이 이색과 혼인했다.
류총의 동서(同壻)들(권한공의 다른 사위들)은 경주 이씨 이수득(이제현의 조카, 이성림의 아버지), 파주 염씨 정승 염제신, 함양 박씨 박경(박충좌의 아들, 윤소종의 장인), 송영무, 한계충, 신천 강씨 강순룡 등이다.
이색이 지은 '고려국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신도비(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및 안동 권씨 성화보에 의하면, 이수득이 세상을 떠난 후에 부인 권씨가 염제신과 재혼했다. 염제신에게도 부인 권씨는 둘째 부인이다.(성화보에 후부(後夫)로 기록됨)
즉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 배정(裴挺)의 딸 완산군부인(完山君夫人) 배씨(裴氏)는 자녀를 두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에 염제신이 혼인한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아들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推忠輔理功臣重大匡瑞城君藝文館大提學) 염국보(廉國寶), 충근 익대 섭리찬화공신 전광정 대부문하평리 겸 성균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상호군(忠勤翊戴燮理贊化功臣前匡靖大夫門下評理兼成均大司成藝文館大提學上護軍) 염흥방(廉興邦),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사 우문관제학 지제교 충 춘추관수찬관 지전리내시 다방사(正順大夫密直司知申事兼判典儀寺事右文館提學知制敎充春秋館修撰官 知典理內侍茶房事) 염정수(廉廷秀) 3형제를 두었다.
염제신-권씨 부인 사이의 딸들은,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 홍징(洪徵 ; 홍규의 증손자, 연산군 시기의 인물 홍길동의 할아버지),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 제학(奉翊大夫判內府寺事進賢冠提學) 임헌(任獻 ; 류총의 증조할아버지인 류경의 좌주(座主) 임경숙의 동생 임경겸의 증손자), 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사 상호군(推誠佐理功臣奉翊大夫密直使上護軍) 정희계(鄭熙啓), 중정대부 삼사우윤(中正大夫三司右尹) 이송(李悚 ; 이천의 아버지) 및 공민왕과 혼인했다((신비 염씨)
1388년 무진피화의 결과 염국보, 염흥방의 이부형(異父兄 ; 아버지가 다른 형) 이성림, 염흥방, 염정수, 홍징, 임헌, 이송, 임견미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염흥방은 어느날 이성림과 함께 성묘를 갔다가 돌아오는데 따르는 기마행렬(騶騎)이 길을 메웠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권세가의 종이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박탈하는 내용의 광대놀음판을 벌이자 이성림은 부끄러워하였으나 염흥방은 그냥 재미나게 구경할 뿐 자신을 풍자함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興邦嘗與異父兄李成林, 上冢而還, 騶騎滿路. 有人爲優戱, 極勢家奴隷, 剝民收租之狀, 成林忸怩, 興邦樂觀, 不之覺也)
'류경휘(柳景輝)가 부인과 함께 병이 들더니 동시에 세상을 떠나 오늘 도성 남쪽에 똑같이 묻혔다(柳景輝與室俱病。同時亡。今日同葬城南)'
함께 살다가 함께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좋은 인연일세 / 同生同死是良因
성남에 함께 묻힐 적에 친족이 다들 모였어라 / 同葬城南會族親
목숨은 하늘에 달렸으니 자위해야 하겠지만 / 有命在天應自慰
애달프다 집에 계신 늙은 모친은 어찌할꼬 / 可憐堂上老夫人
- 손자 ; 류만수 ; 류만수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좌상공파(左相公派)로 이어짐 - 류만수는 연산군 시기 영의정 류순의 고조부이자, 선조 임금 시기 삼정승을 지낸 류전(1531-1589)의 6대 조부
- 손자 며느리 ; 첨의상의(僉議商議) 삼사우사(三司右使) 남양군(南陽君) 홍주(?-1342 ; 홍규의 손자, 정승 홍언박의 형, 홍징의 아버지)의 딸
- 둘째 아들 류진(柳鎭 ; 처음 이름은 柳丘) ; 삼사부사(三司副使) 문화군(文化君)
- 며느리 ; 춘천 박씨(春川 朴氏) 판사복시사, 선수 서경등처 만호부부만호 중현대부 사복정(宣授 西京等處 萬戶府副萬戶 中顯大夫 司僕正) 박거실(判司僕寺事 朴居實)과, 평원군부인 원씨(平原郡夫人 元氏 ; 1288-1334) 사이의 딸인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 朴氏)
박거실은 찬성사 박항(贊成事 朴恒 ; 1227-1281)의 손자이며, 박광정(朴光挺 ; 처음 이름은 박원굉(朴元宏) ;고려서경등처 수수군부만호 겸 광정대부 평양부윤(高麗西京等處 水手軍副萬戶 兼 匡靖大夫 平壤府尹)에 이름)의 맏아들이다. 박거실의 부인 평원군부인 원씨의 묘지명이 전한다. 평원군부인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관(元瓘 ; 1247-1316)의 두 번째 딸이다.
평원군부인의 사위는 중정원장사(中政院長史) 심양 홍의손(瀋陽 洪義孫), 흥위위낭장(興威衛郞將) 김지경(金之庚), 종실(宗室) 중대광(重大匡) 낙랑군(樂浪君) 왕수(王琇), 이제현, 류진 등이다.
이제현의 경우는 박씨 부인이 둘째 부인이다(첫째 부인 안동 권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혼인) 이제현-박씨 부인의 아들은 봉익대부 개성윤(奉翊大夫 開城尹) 이창로(李彰路)이며 딸은 정순대부 판전농시사(正順大夫 判典農寺事) 박동생(朴東生),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 송무(宋懋)의 부인이고 세번째 딸은 공민왕 비 혜비 이씨이다. - 손녀 사위들 ; 광정대부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각대제학 상호군(匡靖大夫 政堂文學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閣大提學 上護軍) 이보림(李寶林 ; 이제현의 손자), 청주 경씨 경진(慶臻 ; 경복흥의 차남), 광산 탁씨 탁복해(卓福海) //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외할아버지인 홍여방(洪汝方 ; 1381-1438)의 아버지 첨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홍길민(洪吉旼 ; 1353-1407)이 경진의 사위임
- 손자 ; 류원현(柳元顯 ; 처음 이름은 柳元茂) / 파평군 윤해(坡平君 尹侅(1307-1376)의 묘지명에, 지여흥군사(知驪興郡事) 류원무(柳元茂)로 기록되어 있음 // 류원현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로 이어짐
- 손자 ; 류운검(柳云儉)
- 손자 ; 류정현 ; 류정현의 직계 후손들의 가계는 정숙공파(貞肅公派)로 이어짐 / 류정현의 아들 류의(柳顗)와 류장(柳暲 ; ?-1426)은 모두 조선 태조 시기에 과거에 급제함
- 손자 며느리 ; 원(元) 정동행성(征東行省) 유학제거(儒學提擧) 연저수종일등공신(燕邸隨從一等功臣) 충진의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 첨의평리 서원군(僉議評理 西原君) 정오(鄭䫨 ; ?-1359)
한편 이원계의 둘째 딸이 변중량과 혼인하였다가, 류정현과 재혼함 - 손자 ; 류정무(柳廷懋)
- 셋째 딸 ; 전법총랑(典法摠郎) 이몽정(李蒙正)과 혼인
- 넷째 딸 ; 전객시승(典客寺丞) 김인관(金仁琯)과 혼인 / 김인관은 1347년 10월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 ; 허공의 아들 허관의 장남, 류총의 사위인 허진의 큰아버지)과 이곡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함
- 다섯째 딸 ; 내부시승(內府寺丞) 박린(朴僯)과 혼인 / 박린은 밀성군(密城君) 박윤문(朴允文 ; 1298-1372)의 장남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 金台鉉(1261-1330)의 외손자이다. 김태현, 김태현의 부인 왕씨, 박윤문의 부인 광산 김씨 등 일가족들의 묘지명이 전한다.
4. 류돈 묘지명
연대 충정왕 1년(1349)유 장경공(柳 章景公) 묘지명〈題額〉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 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判版圖司事)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한 유공(柳公) 묘지명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勅授 將仕郎 匡靖大夫 檢校都僉議叅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공의 이름은 돈(墩)이고, 자는 백구(伯丘)이며, 성은 류씨(柳氏)인데, 첫 이름은 인화(仁和)이다. 문화현(文化縣) 사람이다. 그 선조인 차달(車達)은 태조(太祖) 대의 공신이다. (차달이)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 그 현(縣)을 지나가는데 큰 호랑이가 으르렁대며 길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병이 들었음을 알고,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목구멍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뽑아내었는데 바로 은비녀였다. 호랑이는 껑충 뛰어 오르며 사라졌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이 와서 말하였다. "나는 구월산(九月山)의 주인이오. 어제 저녁부터 목이 아파 고생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도움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9대에 평장사(平章事)가 나게 하여 주겠소."
공은 13세에 문음으로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에 임명되고, 19세에 권지도병마녹사(權知都兵馬錄事)가 되었다.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로 옮겨서 국론(國論)을 맡았는데 공평하고 바르며 속이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일컬었다. 경자년(충렬 26, 1300)에 과거에 오르고,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으로 옮겼다가 경상도(慶尙道)의 염세(鹽稅)를 감독하러 나갔다. 복주(福州)에 들어가니 안렴사(按廉使)가 먼저 관(館)에 있으면서 공을 맞았는데 예를 갖추지 않으므로, 공은 노하여 별관(別館)으로 돌아갔다. 안렴사의 영리(營吏)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네 사또의 관직이 얼마나 높기에 무례함이 이와 같은가. 무릇 선비가 누이를 팔지 않고 높은 관직을 얻었다면 어찌 (예절에) 모자람이 있을 것인가"라고 하고, 그 영리를 수십 대 매질(笞)하였다. 대개 그 안렴사의 누이가 총애를 얻어 갑자기 4품에 올랐으므로, 이를 듣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세 차례 옮겨서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고, 일곱 차례 옮겨서 선부의랑(選部議郎)에 이르렀다. 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 左副代言)과 성균제주(成均祭酒)에 제수되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와 언부전서((讞部典書)로 옮겼는데 모두 대언(代言)을 겸하였다. 마침내 통헌(通憲)을 더하고, 상주(尙州)의 목(牧)으로 나갔다. 주에는 옛부터 대나무가 없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고을 사람들에게 속(俗)된 것이 많은데 어찌 대나무가 없습니까."라고 하여 옮겨 심으니, 읍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그 이로움의 덕을 보았다.
또한 광주(廣州)의 수령이 되었는데 관사가 좁고 누추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주는 8목(牧)의 으뜸이므로 마땅히 위엄을 크게 보여야 할 것이오. 이 관사는 단지 병란으로 불탄 뒤에 임시로 지은 것이니 거의 옛 터가 아닐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땅을 여러 자 파 보니 섬돌과 주춧돌이 완연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공의 밝은 식견에 탄복하여, 전생에 (그가) 이 곳에 부임하였다고 하였다.
주의 서쪽에 큰 길이 있는데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대개 이 길이 기(氣)를 패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만일 그러하다면 어찌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북쪽으로 길을 옮겨 내게 하니, 그 뒤로는 과연 번창하였다. 다시 언부(讞部)와 종부(宗簿) 전의(典儀) 두 시(寺)의 판사(判事)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는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밝게 드러내어 풍속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지밀직사사 판전교시사(知密直司事 判典校寺事)가 되고 밀직사 상호군(密直使 上護軍)이 더해졌다. 후지원(后至元) 정축년(충숙 복위 6, 1337)에 합포(合浦 ; 경상남도 마산시(馬山市)와 창원시(昌原市) 일대에 있던 고려시대의 진(鎭))를 다스리러 나갔는데 전의 원수가 노래하는 기생을 둔 것을 보고 "아녀자가 군중(軍中)에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오" 라고 하여 모두 물리치게 하였다. 잔치를 못 열게 하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연마하니 군(軍)의 기강(大體)를 바로 얻게 되었다. 그 부(府)에서는 해마다 공물로 말린 사슴 1,000 마리를 바쳤는데, 공은 "무릇 에워싸며 사냥하면서 어찌 사슴만 잡고 나머지 짐승들은 놓아주겠소. 이러한 일은 우리 임금께서 어진 마음으로 살생을 싫어하는 덕(好生之德)에 어긋나는 것이오"라고 하여, 그 피해를 글로 써서 보고하니, 임금이 그 공물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도록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지고, 이윽고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스스로 호를 담암거사(湛菴居士)라 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심성을 기른 것이 10년 남짓 되었다 지정(至正) 기축년(충정 1, 1349) 5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셨다. 하루 전에 아들 총(總)을 불러 말하기를 "내일 나는 떠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이 지나자 거듭 "닭이 울었느냐"고 물었다. 이미 하늘이 밝아오자 "돌아가리로다. 돌아가리로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끝내고는 운명하니, 나이 76세이다. 광주(廣州)의 백성들이 와서 조문하고 부의를 바쳤다. 6월 경신일에 송림현(松林縣) 동쪽의 어머니 묘소에 묻으니, 곧 공이 미리 점쳐 놓은 곳이다.
증조부 택(澤)은 상서우복야 한림학사(尙書右僕射 翰林學士)이고, 조부 경(璥)은 도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都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아버지 승(陞)은 지도첨의사 상장군(知都僉議事 上將軍)으로 시호는 정신(貞愼)이고, 어머니 홍씨(洪氏)는 지추밀원사 한림학사(知樞密院事 翰林學士) 진(縉)의 딸이다. 공의 부인은 김씨(金氏)인데 동지밀직사사 판도판서(同知密直司事 版圖判書)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중전(仲全)의 딸로 승화군(承化郡)에 봉해졌다.
자녀로 7명을 낳았다. (큰)아들 총(總)은 밀직사좌부대언 판사복시사(密直司左副代言 判司僕寺事)이고, 다음 진(鎭)은 삼사부사(三司副使)이다. (큰)딸은 군부정랑(軍簿正郎) 최계진(崔季眞)과 혼인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다음은 응양군호군(鷹揚軍護軍) 설봉(薛鳳), 다음은 전법총랑(典法摠郎) 이몽정(李蒙正), 다음은 전객시승(典客寺丞) 김인관(金仁琯)에게, 다음은 내부시승(內府寺丞) 박린(朴僯)과 혼인했다. 내외 손자는 모두 40여 명이 있다.
공은 성품이 검소하고 신중하였으며, 음식을 먹되 맛을 찾지 않았고 옷을 입되 화려하게 하지 않았다. 처음 벼슬하여 재상에 이르기까지 권세 있는 이의 집에 나아가지 않았다. 처음 삼현(三峴)의 왼쪽 기슭에 살게 되었을 때, 밤중에 아득한 가운데 푸른 옷을 입은 서너 명이 뜰 가운데서 춤을 추면서 말하였다. "이제야 참 주인을 만났도다"
안채(閨門)가 엄숙하고 교목(喬木)이 울창하여 오래된 집안의 풍모와 기상이 있었으나, 아쉽도다. 벼슬이 지극히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여 품고 있는 능한 재주를 나라를 위하여 베풀지 못하였도다.
명(銘)하여 이른다.
말은 부드럽고도 간결하며 행실은 검소하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스스로를 닦아서 관직에 나가고 미쁨을 따라서 공평하고 청렴하도다.
들어와서는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들을 가르치되 올바름으로 하였으며
나가서는 나라를 밝게 하고 임금을 섬기되 공경으로 하도다.
두 고을에 수령으로 가니 베풀어진 인정(仁政)은 떠난 뒤에도 그리워하게 하고
합포(合浦)에서 푸른 깃발을 나부끼니 어진 덕은 들판의 새끼사슴에게까지 미치도다.
높은 명망으로 세상을 다스렸으니 지위는 낮아도 덕은 기려질 것이며
자손도 이미 많으니 나머지 복록도 끝이 없으리로다.
지금의 임금〈忠定王〉이 즉위하여 장경공(章景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승봉랑 내부시승(承奉郎 內府寺丞) 박린(朴僯)이 돌에 쓰다(書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