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6:40:46

이색(고려)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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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삼은(高麗三隱)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는 경우도 있다.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색
李穡
<nopad> 파일:이색 초상.jpg이색 영정 (?년, ? 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출생 1328년 6월 25일[1]
(음력 충숙왕 15년 5월 9일)
사망 1396년 6월 20일[2] (향년 67세)
(음력 태조 5년 5월 7일)
국적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봉호 한산부원군(益陽府院君)고려
한산백(韓山伯)조선
시호 문정(文靖)조선
본관 한산 이씨[3]
영숙(穎叔)
목은(牧隱)
가족 아버지 이곡
어머니 함창 김씨
배우자 안동 권씨
장남 이종덕(李種德)
차남 이종학(李種學)
삼남 이종선(李種先)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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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인.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4]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5]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2. 생애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이곡이 복주(지금의 안동)에 부임하여 사록참군사(事錄參軍事) 벼슬을 할 때, 영해 지역 토호였던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사(進士) 김택(金澤)의 딸과 혼인하여 외가가 있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출생했다. 고려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처음 성리학을 배워서 연구하였고 이후 원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쳐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전시[6]에서는 2등[7]으로 합격했다.[8] 앞서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 최승우 등도 당나라에서 급제했다고 하지만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한 것이므로 다소 격이 떨어지는데 비해 이색의 전시 2등은 그야말로 클라스가 다른 어마무시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원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을 이유로 귀국했다. 고려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이 무신정권기의 잔재였던 정방의 폐지.

공민왕 때 토지 제도 개혁, 불교 억제 등의 상소를 올렸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것에 가담했다. 이후 창왕 폐위 때 이성계 일파에게 관리들의 토지를 빼앗아 분배하자는 토지 개혁에 반대한다는[9][10] 이유로 밀려 귀양을 갔다가 공양왕 때 정몽주가 정권을 잡자 부원군의 자리를 받아 '한산부원군'이라 불린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찬성하지 않았기에 이성계로 인해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도전은 스승이기도 한 이색에게 냉혹한 태도를 보였고, 자연도(지금의 영종도)로 유배보내려 했다. 담당 관리가 자연도가 무인도임을 들어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라고 하며 암살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으로 장흥으로 유배를 갔고, 후일 사면되어 한산백이 되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암살 음모를 저지하고 이색에게 각종 특전과 재물을 내리거나 잔치를 베풀어 최대한 예우하려 했으나 이색은 고려에 지조를 지키려 했고,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성계는 이색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색을 군신이 아닌 친구의 예로 대우하며 불러서 접대했을 때는 떠나가는 이색을 직접 배웅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직접 방문했는데도 "나를 개국 당시 불렀다면 예우를 차려서 자리가 빛났을 텐데, 왜 말 장수 따위에게 일을 시켰습니까?"[11]같은 폭언을 내뱉어 다혈질인 남은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남은의 형인 남재는 넌지시 그의 아들 이종선에게 "공이 광언(狂言)을 내뱉어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화를 입을 것이다"라면서 피신을 권하고 자중할 것을 권했다.

결국 다음 해인 1396년 6월 17일 피서를 가겠다며 여강(驪江,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의 신륵사로 떠나던 중 배 위에서 급사했는데, 이를 두고 정도전의 독살로 추측하는 시각이 있지만 확실한건 아니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죽고 사는 이치를 내 의심하지 않는다.
死生之理, 吾無疑矣.

3. 평가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12]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13]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의 재능)가 없다." 하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듯하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았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승려인 혜근(나옹선사)의 비문과 인각사 무무당기[14]를 써주는 등[15] 불교와 친하게 지내곤 해서 이후 성리학자들에게 내내 까였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16] 조선이 숭유억불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 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했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였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17]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물론 이름만으로 천 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 일단 사후 [age(1396-06-20)]년 동안 이름 남기기는 성공했다.

4. 여담

  • 같이 문과에 급제한 박상충의 처남이기도 하다.[18]
  • 1388년 문하시중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19] 주원장이 원나라에서 과거까지 급제한 이색에게 중국어를 해보라고 했으나 주원장이 이색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였다고[20] 실록에 기록되었다. 이색은 원나라북경어로 말했으나 주원장이 남방 출신이어서[21] 이색의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주원장은 이색이 구사하는 중국어를 두고 "그대의 중국말 하는 것은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고 웃었고 이색은 돌아와서 "나는 황제가 반드시 이 일을 물어볼 줄 알고 이것저것 준비해 갔는데 황제는 정작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만 물어보더라." 하면서 주원장을 두고 "마음에 줏대가 없다(心無所主)"라고 깠다.[22]

    하지만 서로 발음이 너무 달라서 소통이 안 될 정도였다면, 이색 또한 주원장의 질문을 못 알아듣고 통역을 통했어야 정상인데, 기록대로라면 이색은 주원장의 질문을 통역 없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주원장도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음에도 일부러 이색과 진지한 대화를 피하고자 일부러 말씨를 조롱하고 못 알아들은 척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말로 말씨 때문에 못 알아들었더라도, 주원장이 이색과 진지하게 대화할 뜻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통역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명 조정에 원나라식 말씨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딱히 통역을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주원장은 이색과 진지한 대화를 회피하고자, 일부러 이색의 중국어를 조롱하며 면박을 주었다고 보아야 자연스럽다. 당사자 이색 또한 주원장이 진짜로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대화를 회피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분개하였다.
  • 당태종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 맞았다는 이야기를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림관에서 지은 정관음(貞觀音)이라는 시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인 줄 알았으나 어찌 검은 꽃이 흰 깃에 질 줄 알았으랴(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花落白羽)"라고 쓴 것이 그것.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목은 선생이 당대에 좀 배운 사람인데 근거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라고 하면서 《동사강목》에 실었지만...
  •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23] 하지만 사육신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지함이다. 그리고 이지함의 조카인 선조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가 이색의 7대손이다.
  • 이색의 또 다른 손자인 이맹균 (1371~ 1440)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훗날의 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죽였다고 하며 시체마저도 길가에 내다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바로 세종대왕이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이런 짓은 심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직시키고 이씨와 이맹균을 귀양보냈다. 그나마 황해도 우봉헌으로 귀양간 이맹균은 몇 달도 안 돼 병으로 다 죽어갔고 세종은 어차피 이젠 죽을 거 귀양을 풀어줬으나 이맹균은 한양으로 오던 도중 개성에서 숨졌다. 이씨는 남편 장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귀양을 풀어줬지만 이후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 훗날 19세기 초엽 먼 후손[24] 중 한 명이 길주로 유배를 가서 1807년 9월부터 11월까지 총 약 2개월간 유배지 생활을 기록한 북정일기를 작성하는데, 이 서적은 19세기 초엽 조선 시대의 사회상과 유배인의 생활을 담아낸 기록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영종도의 옛 이름인 '자연도'를 제목으로 한 시를 썼다. 영종 씨사이드파크 캠핑장 부근 방죽에 이 시가 설치되어 있으나 관리 부실로 글자가 떨어져 나간 게 몇 개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은 영종도에 이색을 유배보내어 몰래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모의했었던 적이 있다.
  • 정도전은 당시 동문이었던 이숭인 등의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위해 그들의 장형을 집행할 때 황거정과 손흥종[25] 등의 수하들을 시켜 몽둥이를 엉덩이가 아닌 등골에 내리쳐 집행하는 방법으로 살해했다. 이색의 아들인 이종학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려 했는데 형 집행 현장에서 이색의 문하생인 김여지가 판관이 되어 이를 막았다.[26] 결국 아예 유배처에 갇혀 있던 이종학에게 암살자 손흥종을 보내 한밤중에 몰래 목졸라 죽였으나, 이것이 후일 조정에서 재수사되어 신원되었다. 이색의 영향력이 강한 것도 있고 당시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려는 신원 작업을 위해 수하들에게 죄를 씌우려는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탄핵 운동이 활발하게 일었다. 심지어 남은의 형인 남재도 암살 음모를 알면서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되었을 정도.
  • 권근, 하륜 등이 이색의 비문과 행장에 기술하면서 "당시(공양왕 시기)의 권력자(用事者)가 공을 꺼려서 장단으로 귀양보냈다"와 같은 기술을 했다가 이것이 당시의 실권자이던 태조 이성계를 가리킨 것이 아니냐는 대역죄, 필화 사건으로 비화된 적이 있다. 태종은 권력자란 조준과 정도전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는 입장을 밝혔다. 당황한 하륜이 이에 반박하는 사죄문을 길게 써서 몇 장이나 올리니까 귀찮다고 무시하는가 하면, 대간에서 "공양왕 시기에는 조준이 권력을 잡은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 이성계를 말한 것이 맞다" "전하께서도 이색의 행장을 보고 분노해 찢어버리고 검열하지 않으셨느냐"등의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할 말이 없어져서 "어허, 내가 병이 발작해 들어주기가 어려우니 물러가라" 같은 어이없는 소리까지 하며 이를 무시했다.
  • 유교의 종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어서 이 점이 두고두고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거꾸로 불자였던 이성계는 불교를 믿는 것이 유학자들인 신하들에게 공격받을 때마다 어색하게 "유학의 종주인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그럼 니가 이색보다 잘났냐?" 같은 꼰대식 반박을 시전했다.

5. 대중매체

역성혁명은 물론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에도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탓에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들 중 조선 건국 주축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들에서는 뛰어난 지식인이면서도 주인공 측과 대립하는 반동인물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유종으로서 남긴 명성은 워낙 뛰어난지라 이색의 업적과 신념, 그리고 비극적인 인생사를 입체적으로 그리는 작품들도 많은 편.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이색은 이성계의 앞에서도 '송헌'이라고 부르며 칭신하지 않았는데 소식을 전해듣고 가장 분노한 것은 정안군 이방원.[27] 이방원은 궁궐과 자신과의 연락을 맡고 있던 우왕의 후궁인 칠점선에게 명하여 이성계가 이색에게 하사하는 술에 독극물을 넣을 것을 지시하고 여주 강 배 위에서 술을 마신 이색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며 근처 신륵사 방 안으로 옮겨지지만 의원의 진맥도 받지 못하고 유언도 못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방원의 악업이 두드러지는데 오죽하면 고려 왕족들을 모두 물에 빠뜨려 수장시킨 것도 이방원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묘사된다. 이방원의 사적인 부하 이숙번, 송거신[28], 목인해[29], 마천목 등이 관원인 조영규와 합세하여 배 안에 구멍을 뚫는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남일우가 연기했다. 조선 건국 이전에는 이성계에게 정치적 경륜과 조언을 해줬던 기억이 있던 만큼 대업의 의의를 편을 들이고자 정몽주보다도 먼저 이성계가 설득하러 간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당시 정몽주와 더불어 이성계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말선초의 기록이 가장 세세한 드라마인 만큼 이색이 겪는 고난도 다른 드라마들과 다르게 세밀히 묘사된다.[30] 그럼에도 고려에 충성하며[31]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를 가리켜 '송헌'(이성계의 호)이라 부르며 조롱하지만 관대한 이성계는 절개를 높이사 처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전답을 내린다. 산천을 유람하던 중 이성계가 보낸 어주상을 받게 되는데 제자들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말리는걸 무시하고 술을 마시며 먼저 간 이숭인정몽주를 회상하다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다.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분노하여 도승지에게 "소줏간을 맡고 있는 자를 불러오라" 이르지만 그가 "소줏간의 어주를 몰래 훔쳐마신 게 과하여 길가에서 얼어죽었다"고 하니 책상을 내리치며 물러가게 하였다. 정도전이 "사건을 더이상 캐지 말고 덮자"는걸 보면 정도전이 은밀히 손을 쓴 듯하다. 본래 이색의 죽음은 한양 천도 이후의 시점이었는데 한양 천도 이전의 시점으로 잘못 묘사하였다.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전인택이 연기했다. 유림이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세워진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는 등의 유림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자 개혁에 동참하지만 신돈과 공민왕이 대립하기 시작하니 신돈과 거리를 두며 방관하기만 한다.
  • 2012년 SBS 드라마 <신의>에서는 배우 김형종이 연기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남명렬이 연기했다.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우왕에 대한 처분을 의논하다가 이방원이 우왕을 제거할 걸 건의하자 정몽주는 이를 반대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나 이색은 정몽주를 찾아가 이방원의 의견이 옳다고 이야기하며 이방원을 두둔한다.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한산 부원군에 임명되어 나타나는데 공양왕 즉위의 1등 공신인 이성계가 하대받았다는 것에 발끈한 이성계의 측근들이 왕에게 불만을 표출하자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일갈한다. 하지만 이후 이방원이 공양왕을 은근히 압박하자 겁에 질린 공양왕이 파직과 유배를 명하며 유배지로 끌려가게 된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과 태조, 정종실록에서 등장한다. 개국 편 2장 첫 파트에서 작가가 이색을 소개하는걸로 첫 등장한다. 위화도 회군 이후 조민수와 함께 후계 자리를 정하는데 이때 이색이 순리대로 해야하는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더니 “선왕장자를 세우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조민수도 “아! 공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이 둘은 대비마마의 힘을 빌려서 창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명나라에 창왕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창왕을 모시고 명나라로 가려했는데 이때 대비마마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인 정안군과 명나라에 간다. 이후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더니 1390년 (공양왕 1년)에 윤이 이초의 옥사가 터지면서 이숭인과 함께 유배지에 있었다가 국문을 받고 옥에 갇힌다. 그러나 공양왕이 이성계 일당을 설득해서 이들을 석방한다. 태조, 정종실록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이색은 태조의 배려로 유배지에서 풀려나는데 이때 제자들을 떠올리면서 이방원에게 죽은 정몽주, 곤장맞고 죽은 이숭인과 자신의 장남인 이종학을 떠올리면서 슬퍼한다. 또 태조가 이색을 불러 관직을 내려주려하자 “망국의 대부는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 법 입니다.”라고 말하고[32] 다시 낙향하는데 1396년 (태조 5년) 결국 신륵사로 가던도중 객사하면서 등장종료.

6. 둘러보기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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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세가(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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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rowcolor=#670000,#fedc89>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열전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표(表) ]
86·87권 「연표(年表)」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태조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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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rowcolor=#670000,#fedc89>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rowcolor=#670000,#fedc89>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rowcolor=#670000,#fedc89>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rowcolor=#670000,#fedc89>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121권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
123권 「폐행1(嬖幸一)」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2(嬖幸二)」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1(姦臣一)」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2(姦臣二)」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wiki style="margin: -16px -11px"<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128권 「반역2(叛逆二)」 129권 「반역3(叛逆三)」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131권 「반역5(叛逆五)」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6(叛逆六)」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



[1] 율리우스력 6월 17일[2] 율리우스력 6월 12일[3] 시조 이윤경 7세손.(족보)[4] 사람에 따라 길재를 빼고 도은 이숭인을 포함시키기도 한다.[5]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 훗날 일부 관학파 출신들이 변절하여 수양대군을 도와 공신이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훈구파다.[6] 최종 시험.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침.[7] 이색은 전시에서 1등의 성적을 얻었으나 이색은 원나라인이 아닌 외국인인 까닭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 1등 합격자는 우계지(牛繼志)이다.[8] 당시 원나라의 과거 시험은 이후 명청대처럼 정기적으로(식년시:3년마다 실시, 그외 특별 시험이 종종 있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불규칙적으로 드문드문 시행했고 선발 인원 또한 극소수였다.[9]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필 이색의 집안은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토지 소유량이 많은 편인지라 토지 개혁을 진행했다가는 빼앗길 토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10]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은 겹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권문세족 중에서도 성리학을 배우고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올라 개혁에 찬성하면 신진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권문세족들도 음서뿐만 아니라 과거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조준도 권문세가 출신.[11] 배극렴이 옥새를 바친 장본인이기에, 이는 이성계의 즉위를 거칠게 비난하며 비웃은 것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이색의 졸기.[12] 이진, 권부, 백이정, 우탁, 이조년, 신천 등 안향의 대표적인 여섯 제자이다. 이들을 계승한 이제현은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사위, 백이정의 제자이고, 이색의 좌주이자 스승이다. 6군자 중 이조년은 이인임의 조부이다.[13] 다만 이것은 제자를 칭찬하는 말로 이 말을 정몽주보다 학문이 뛰어나지 못 했다고 곧이 곧대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물론 정몽주의 학문적 완성도는 이색보다 못 하지는 않았다.[14] 이색의 문집인『목은집』「인각사 무무당기(麟角寺 無無堂記)」 中: "(상략)...불교의 화복인과(禍福因果)의 설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가 있다...(중략)...나는 도대선사 서공(諝公)이 불도를 열심히 믿었기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날로 알려지고, 선행을 부지런히 하였기에 일이 쉽게 풀린 것이라 생각한다...(하략)..." 이는 정몽주와 대조되는 부분인데, 정몽주는「김초가 불교를 훼손한 죄를 사면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서 "...(상략)...신들의 생각으로는 불교를 배척함은 유학자의 떳떳한 도리이므로 예전부터 임금이 따로 두고 논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전하의 관대하신 아량은 하찮고 엉뚱한 자는 용서하실 만한 것이니, 삼가 너그러운 은혜를 베푸시어 한결같이 다 용서하시고 백성에게 믿음을 보이시길 바라나이다."라고 하며 강한 숭유억불의 의지를 드러냈다.[15] 목은집 권49(목은문고 권14)[16]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준 대가로 불교계에서 윤필료(붓을 닦은 값)를 주었는데, 사실상 돈 줄 명분이다. 이색이 너무 많이 준다고 거부하자 그 돈으로 암자 5개를 짓는 등 어마어마하게 후원해준다.[17] 정도전에게 죽었다.[18] 이색과 박상충은 고려 문과 1위, 2위로 급제하였다.[19] 당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을 소위 인질 격으로 동행하여 명나라에 함께 데려갔다. 원래는 자신이 창왕과 함께 직접 명에 입조해 왕위계승을 인정받을 생각이었는데 태후의 반대로 창왕이 가지 못하자 자신이 떠나 있을 때 이성계가 난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자고 했으나 이성계는 그 대신 자신의 아들 이방원과 함께 가라고 달랬다. 이방원은 장남 방우나 차남 방과처럼 전주 이씨 가문의 후계자급 인물은 아니었지만 가문 내 유일한 과거 급제자로서 이성계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었기에 이색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없는 사이 선양을 받거나 찬탈을 하지는 않겠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20] 주원장은 인사 치레조로 "원나라에서 한림을 했다니 한어(중국어) 좀 하겠네?"라고 말을 건넸는데 이색은 "친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주원장은 못 알아듣고 옆에 있던 예부 관리가 통역을 해 주고서야 알아 들었다.[21] 당시엔 수도도 난징이었다. 주원장이 죽고 아들끼리 싸운 끝에 연왕이 이겨서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으로 옮겨간 것.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방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지금도 강남 지역의 광동어는 북경어에 기반을 둔 표준 중국어와 같이 대화를 붙여 보면 거의 외국어 수준으로 소통이 안 된다. 예컨대 하나 일(ㄧ, 1)의 발음은 표준중국어로는 이(yī)지만 광동어론 얏(yat1)이다.[22] 당시 이색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막기 위해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신탁통치 감국(監國)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국가 중대사를 논하려 했는데 말장난이나 하고 왔으니 이색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했던 것.[23] 훈구와 사림은 현대인들 생각처럼 딱 나뉘는 정당 같은 게 아니다. 고려 말의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도 마찬가지.[24] 이름이 유실되었는데, 한산 이씨로, 이색의 먼 후손이라는 것만 기록되어 있다.[25] 이 둘은 정도전 전용 킬러로 활약했으며 특히 손흥종은 왕씨 학살 등, 개국 과정에서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태종 시기에 서인으로 강등되고 가산이 적몰되어 알거지가 되었다. 대간에서는 몇 번이나 이들을 처형할 것을 주청했으나 집행되지 않았다.[26] 이종학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여러 칭찬을 받고 사법살인을 당한 점이 참작되어 기려지는 인물이지만, 유학의 종주이면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색의 아들로 다년간 과거시험을 주관해 문생들을 등용했기에 이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고 한다. 결국 이종학은 후일 정도전에 의해 죽긴 하지만 김여지 덕분에 사후 명예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실제 현장에서 사법살인을 막은 문생 김여지가 후일 재수사 당시 이종학의 암살에 대해 증언하면서 이성계의 뜻과 배치되는 살인행위임을 주장했기 때문.[27] 당시에 있었던 중신들을 불러 호통치기까지 했다.[28] 역사적으로 이방원의 부인 여흥 민씨와 친척 간/여흥 민씨의 어머니가 여산 송씨.[29] 2차 왕자의 난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실명하는 것으로 묘사.[30] 작중에서 유배를 갔다와서 자신의 가족들과 제자들이 죽고 자신의 몸 또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된다.[31] 같이 고문을 받던 이숭인 등의 인물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에 명나라에서 전해진 유언비어를 확실하게 퍼뜨리자라고 말하자 명나라를 빌어 이성계를 처단하면, 고려 역시 더한 고통에 휩쓸리며 그런 것을 원하지 않기에 그 고통을 견디겠다고 말한다.[32] 죽어도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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