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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 ||
주요인물 정도전 이성계 · 이인임 · 최영 · 정몽주 · 이방원 | ||
주요 인물 주변 인물 | ||
<colbgcolor=#676767><colcolor=white> 정도전 측근 | 최씨 부인 · 득보아범 · 남은 · 윤소종 | |
이성계 측근 | 신덕왕후 · 이방우 · 이방과 · 이방석 | |
이지란 · 무학대사 · 배극렴 · 조준 · 권근 | ||
이방원 측근 | 하륜 · 원경왕후 · 조영규 · 이숙번 | |
고려 지배층 | ||
고려 왕실 | 우왕 · 정비 안씨 · 공양왕 | |
권문세가 | 임견미 · 염흥방 · 박가 | |
신진사대부 | 이색 · 박상충 · 이숭인 | |
군부 | 변안열 · 조민수 | |
기타 | ||
인물 | 양지 |
[1]
1. 개요
드라마 정도전의 등장인물. 담당한 배우는 박지일.[2]2. 작중 행적
정도전과는 약간 어색한 사이로 묘사된다. 정도전은 스승에게 인정받지도 못했고 동문 사형제들과도 서먹서먹하여 일방적으로 거리감을 느꼈고, 이색은 그런 정도전의 속내까지 읽고 품어줄 만큼 다정다감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자만할까봐 칭찬 한 번 맘 놓고 해주지 않은 엄한 스승이었던 듯하다. 정도전의 주도로 북원과의 화친 정책을 거꾸러트리고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관철시키자 '그간 자만할까봐 쉽게 칭찬해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잘 했다'고 칭찬해주었다. 후일 이색과의 관계가 파경에 이르렀을 때 정도전은 이 때를 생각하면서 잠시 울적해 했다. 그만큼 정도전에게 의미있는 말이었던 것.5회에서는 대쪽같으면서도 현실을 제대로 읽는 모습을 보여주며 유림의 대사조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다. 정도전의 항명을 계기로 이색 문하의 사대부들 다수가 성균관에서 농성하려 했는데, 최영이 성균관을 침탈하고 사대부들을 싹 쓸어버리려는 것이 이인임의 차도살인임을 간파하고 정몽주에게 호통을 쳤다. 이색 입장에서는 애써 키운 제자들이 한방에 싹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도전을 버리고 나머지 제자를 구한 셈이다. 이인임 역시 '이색을 생각하지 못했다'며 사대부들을 한방에 날려버릴 기회를 잃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정도전에게 정이 아주 없지 않은 듯 곡기도 끊고 대성전에 정좌한 채 버팅기는 정도전의 뒤통수를 안타깝고 미안한 듯 쳐다보았다. 박상충과는 스승-제자 이면서 매부-처남 관계. 8회에서는 박상충을 살리고 정몽주를 엮으려는걸 막아보기 위해 직접 이인임을 찾아가서 대화도 나눠봤지만, 그게 무색하게 이인임의 술수에 가택연금신세가 되고 말았다.
12화에서는 정치에 어두운 이성계가 이색을 찾아가 정치적 식견을 배우기 시작하는 모습이 나왔다.
15화에서는 오랜만에 찾아온 정도전을 반기고, 최영에게 소개장을 써달라는 부탁을 들어준다. 그 후로는 내내 정국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인임의 기세가 등등하기에 정작 뭘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1화에서 간만에 나와 이인임을 엄히 처벌해줄 것을 이성계에게 부탁한다. 22화에서는 조정을 무인들이 장악했으니 신진사대부에 우호적인 이성계와 손을 잡을 궁리를 하다 마침 이인임의 사면을 반대하는데 힘을 보태달라는 이성계의 부탁을 받고 신진사대부들을 동원하여 간언을 올린다. 23화에선 이인임 일파의 몰락으로 도당이 개편되면서 관직에 나선다. 학문적 업적에 비해 관료로서의 재능은 별로였다는 기록을 반영한 탓인지 관직 제의를 받고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25화에서는 건원칭제를 준비하라는 우왕과 최영의 지시에 성균관 대사성인 정도전에게 부탁해 사대부들을 모아 회합을 연다. 26화에서는 공요군이 회군을 윤허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정몽주와 함께 우왕이 머무는 서경으로 가 회군을 윤허해 달라고 탄원하지만 분노한 최영에 의해 숙위병들에게 끌려나가 짧게 옥살이까지 한다.
회군 이후 29화에서는 어린 창왕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근비의 호소에 흔들리더니 자신에게 찾아온 조민수와 힘을 합쳐 창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일로 정도전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정도전은 이색과 말싸움을 하게 된다. 30화에서는 창왕 앞에서는 이인임의 복귀를 반대하면서도 정작 정도전 앞에서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 이인임의 복귀를 찬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색은 최영의 요동정벌론이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같은, 유자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나자 차라리 이인임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리고 정도전이 이인임 복귀 반대 여론을 모으기 위해 추진하던 사대부 회합을 이색이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자, 정도전은 크게 반발하며 "이인임 같은 밥버러지의 역성을 드는 분을 어찌 스승이라 하겠소이까!"라는 폭언으로 일갈하여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그렇지만 정도전도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상당히 놀란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만큼 이색의 존재가 사대부들에게 있어 크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31화에서는 조민수가 귀양간 이후 문하시중에 올라 조정의 으뜸이 되지만, 이미 실세는 이성계라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리고 조준이 계민수전을 기반으로 한 과격한 토지개혁안을 내놓자 이는 나라를 뒤집는 짓이라며 반대한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준의 편을 들기에 이색의 반대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이후 이성계가 독단적으로 양전사업을 진행하자, 조준의 뒤에 정도전이 있음을 알던 이색은 정몽주를 통해 정도전을 불러 대면한다. 정도전과 대면하자마자 "겨우 안정을 되찾은 나라를 다시 혼돈으로 몰아갈 셈이냐", "개혁은 이상만으로 추진해서는 아니 된다"며 조준의 상소를 물릴 것을 권고하지만, 정도전은 되려 대들며 못 하겠다고 하자 둘의 언성이 올라간다.[3] 끝내는 정도전이 이색이 권문세족 출신임을 들추어 내며 이색의 땅조차 몰수하겠다는 등의 폭언을 하고 자리를 뜰려고 하자, 이색은 정도전을 꾸짖으며 정치란 부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라고 설교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되려 스승님께서는 지키십시오! 소생은 부술 것입니다! 권문세가로서, 스승님께서 소유하신 전국의 수많은 농장들과 함께 말입니다!라며 스승마저도 권문세가이자 지주로 간주해 부숴버릴 것이라는 패륜을 저질러 이색은 끝내 정도전을 파문한다.[4] 이 언쟁에서 고려 지배층의 입장에서 고려를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색의 말도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미 고려를 포기하고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가 대변하고 지지를 얻으려는 존재 역시 고려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지배층이 아니라 수탈당하는 피지배층 백성이다. 이런 제자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이유는 아무리 삐뚤어 졌다고 해도 유학자인 제자놈이 설마 자신의 가르침과 평생의 배움을 저버렸을 리는 없다고 믿어서일 가능성도 있는데(정도전 스스로가 자신을 '유자이면서 역성을 꿈꾸는 괴물'이라고 평했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색의 행동들은 난세의 정국에서 결국 반동주의에 그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근본적인 한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5]
그리고 명나라에서 우왕의 폐위에 관련된 의문을 담은 문서를 보내자, 이를 해명하기 위한 사신을 보내야 한다며 문하시중인 자신이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원하는데, 여기에 덤으로 수문하시중 이성계를 함께 명으로 보내줄 것을 주청한다. 당시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살얼음판이라 한 번 갔다가는 어찌될지 모를 상황이기에, 사실상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정도전, 조준 등의 뒷배인 이성계를 몰아내려는 동귀어진스러운 속셈이었다. 실제 역사상으로는 창왕을 데리고 가려했으나, 어린 왕이 그 먼길을 갈수없다는 태후의 반대에 이성계를 대신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이 행동을 이해하려면 이색이 원간섭기에 정체성을 두고 성장한 구세대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색이 보고 자란 충자 돌림 왕들의 시대는 중국의 말 한마디에 왕이 갈아치워졌다가 다시 돌아오던 시대다. 극중 정몽주는 일국의 집정대신을 보내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내정간섭을 불러올수 있기에 설사 그 대신이 이인임일지라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요즘 기준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개혁적인 발언이다.
32화에서 이성계 대신 그 아들 이방원을 데려가라는 정도전의 제안에[6] 계민수전을 포기하면 동의해주겠다고 하지만, 정도전이 포기할 수는 없으나 이색 일행이 사행을 다녀올 동안 그와 관련된 정치적 논의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허락한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한 밭당 한명의 소유주만 가능하게 하는 1전1주제[7]를 제안하여 조준의 계민수전과 표결에 붙이고 다수결에 의해 1전1주제가 통과되었다.
33화에서 정도전 일파의 보복으로 이숭인, 권근, 하륜이 옥에 갇히자 이에 분노하여 사직서를 낸다. 의도는 제자들을 방면하라는 압박이었으나, 김저의 이성계 암살이 실패하고 이를 기회로 반이성계 세력이 제거당하면서 이색도 관직을 버린다.
34화에서는 공양왕이 다시 요직으로 진출시켜 대이성계용 카드로 쓰려 했지만, 35화에서 정도전이 반 협박조로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관직을 반려할 것을 권한다. 이에 '너를 제자로 들인 것이 유일한 과오'라고 맞받아치며 관직을 반려하지 않고 계속 이성계와 대적할 것을 선포한다. 하지만 이런 당당했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윤소종에게 가짜 왕씨인 창왕을 옹립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당해 변명도 못하고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유배를 가게 된다. 사실 창왕 옹립에 한몫한 이색을 불러들인 것부터가 공양왕 내지 정몽주의 실책이라 할 수 있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폐가입진의 논리를 세워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이성계의 대항마로 쓰고자 했지만 결론적으로 자신이 앞세운 폐가입진의 논리에 오히려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앞서 위화도 회군 때 우왕을 폐위시킨 뒤 정몽주를 비롯한 이성계 일파는 다음 국왕으로 정창군 왕요를 내세웠는데, 이색이 이성계의 야심을 경계하여 우왕의 아들 왕창을 내세워 그로 하여금 보위를 물려받게 했다. 그런데 폐가입진의 논리에 따르면 이색이 진짜 왕씨 대신 신돈의 후손인 신창(왕창)을 옹립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반대파(이성계당)에게 공격받기 딱 좋은 구실이다. 탄핵 명분이 너무 확실해서 이색 본인도 뭐라 변명하지 못한 채 끌려갔으며 정몽주조차 스승인 이색과 사형들이 처참하게 고문받는 꼴을 추국장 밖에 무릎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기만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36화에서 정몽주에게 유백순을 뒤에서 조종한 거냐고 묻고 정몽주가 대답하지 않자 더 이상 묻지 않지만 군자는 더러운 곳에서도 고결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우려한다. 앞서 이성계를 명으로 보내 제거하려 했을 때에는 음모와 술수를 배격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냐고 물어오던 정몽주에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더러우면 발을 씻으라 하였다. 너는 지금의 난국을 공명정대함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군왕의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라의 실권이 무장 한명의 손에 들어가 있느니라. 더욱이 정도전과 조준같은 얼치기 유자들이 전제 개혁이란 미명하에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지 않느냐."라며 답한 바 있듯이 가르침도 상황에 따라 달리 써야함을 역설했던 그지만, 가장 아끼던 제자가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모습에 서글프고 염려되는 마음은 어쩔수 없었던 모양.
37회에서는 귀양가는 정도전의 모습을 제자들과 함께 지켜보며, 그를 따르는 사대부들이 정도전의 함거에 돌을 던진다. 정도전이 함거 안에서 이색을 보고 목례를 하지만 이를 노기 띤 얼굴로 외면해 버린다.
40화에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권근에게 듣게 되자 보러 가야겠다며 걷다 이내 넘어지면서 함께 대성통곡을 한다. 이 장면에서 함께 운 시청자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박지일의 연기에 대해 극찬의 향연이었다. 정몽주의 잔당들이 제거되면서 이색 역시 귀양을 가게 되었다.
41화에선 등장은 안 했지만 조선 반대 세력의 구심점으로 표현되며, 그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정도전에 의해 제자와 아들이 장살 당하게 된다.
45화에서 권근이 출사를 허가해달라면서 찾아오자 고려의 문하시중으로서 망국을 막지 못했으니 스승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 죽었던 제자들을 그리워하면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한다.
46화에서 이성계의 부름을 받았으나 망국의 신하라는 이유로 상복을 입고 입궐하였다. 이성계를 대면하자마자 예를 갖추라는 남은과 조준의 지시에 "임금이 아니 보이는데 누구에게 예를 표한단 말이오이까?"라는 패기 넘치는 말을 하더니,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하자는 이성계의 말에 "내 명색이 대 고려국의 문하시중을 하였던 사람인데 이런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으란 말씀이오?"라고 반문하더니 용상을 쳐다보면서 "음, 저기 저 의자가 좋겠구면. 이보시오, 이성계 대감. 내 저기 좀 앉아도 되겠소이까?"라며 이성계를 도발한다. 용상은 오직 왕만이 앉을 수 있으며, 대리청정 등으로 왕의 업무를 대행하는 사람일지라도 용상 옆에 서거나 다른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엄청난 폭탄 발언인 셈. 이 때 보여준 어그로 키핑 능력은 정도전과 윤소종의 어그로 끄는 능력이 스승님께 배운 것이다 싶을 정도. 옆에서 지켜보던 남은, 조준 등은 격노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를 물리치고 앉아도 좋다는 대답을 한다. 그러자 이색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아는 사람이 출세를 하였다기에
돌아가는 도중, 충신으로서 역적의 칼에 죽고 싶었건만 하늘은 그마저 허락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면서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졸하였다는 사실과 그의 일대기가 나레이션으로 나오고 저 유명한 매화시조를 읊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며 쓸쓸하게 퇴장했다.
이성계를 만나고 얼마 후, 목은 이색이 예순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색은 고려 말 경학의 대가로 손꼽혔던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나라 과거에서 장원과 차석을 차지한 그는 고려로 돌아와 공민왕의 개혁을 도왔다. 성균관을 중건하고 성리학의 보급과 발전에 힘썼는데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하륜, 권근, 길재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 맞서 기울어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실패하였다. 망해가는 나라의 최고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비통하고 막막한 심정이 회고가라는 이름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성계는 이색을 한산백에 봉하고 출세를 종용하였지만,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은거하다 최후를 맞이하였다. 저서로 목은 시고와 목은 문고가 남아있다. 본관은 한산, 시호는 문정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성계는 이색을 한산백에 봉하고 출세를 종용하였지만,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은거하다 최후를 맞이하였다. 저서로 목은 시고와 목은 문고가 남아있다. 본관은 한산, 시호는 문정이다.
곱게 퇴장한 덕분에 정도전의 "(이색을) 섬으로 귀양보냄은 중간에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다."라는 희대의 패드립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런 대목이 나오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조선 개국 후 남아 있는 왕씨들을 숙청하는 과정이 그렇듯이 말이다. 여하튼 작중 다른 죽음들에 비하면 상당히 우아하고 슬프게 연출된지라 46화 최고의 명장면이라는 반응들이 나왔다. 회상 씬도 단순히 과거 장면 편집만으로 채운 것은 아니었고.
3. 캐릭터 묘사
드라마에 묘사된 이색의 캐릭터는 정도전 갤러리 등지에서 그닥 좋은 평은 못 듣는 편인데, 원조 씹선비라고 엄청나게 욕을 들어먹고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실제 이색은 답없는 수구파가 아니다. 작중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지배층에 불리한 토지개혁안을 내놓기도 하는 등 무조건 구습을 옹호하지는 않았다.이인임과 대립하던 시절에는 사대부들의 스승으로 이인임의 독수에서 제자들을 어떻게든 지키려 동분서주했고, 왕따신세였던 정도전을 방통에 비유하며 제자들 중 정몽주와 더불어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사대부 공동의 적인 이인임과 최영이 사라지고 정도전이 역성의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면서 그와 정적이 된다.
위화도 회군과 우왕 폐위를 일삼은 이성계를 경계하여 또 다른 권문세족인 조민수와 결탁하고, 힘겹게 몰아낸 이인임까지 복귀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그 이인임 일파 때문에 고려 사직이 기울었음에도 이성계보다는 차라리 경륜이 있는 이인임이 있을 때가 나았다고 하는데, 요는 전형적인 반동주의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는 당연히 대스승인 이색에게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온건파인 정몽주조차 그런 스승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몽주도 고려 사직을 지키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생각이 스승인 이색과도 판이하게 달랐다. 다만, 이성계의 위험성을 일찍이 예견한 것은 고려를 지키려는 입장에서 볼 때 타당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그 정몽주도 이성계-정도전의 목표가 역성혁명임을 일찍 알아차리지는 못했고, 본격적으로 확신을 굳힌 시점은 이색이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한 시점 이후다.
특히 이색의 행동은 정몽주와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정몽주는 요동 정벌부터 우왕 폐위에 이르기까지 유자의 신념에 어긋나는 사건을 겪고 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권문세가마저 포용하는 화합의 정치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정몽주는 비록 지금은 혼란스럽지만 이를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것을 선언한 것이다. 반면 이색은 회군을 포함한 온갖 불상사, 혼란상을 버티고 못하고 차라리 과거가 더 나았다며 회피해버렸다. 둘 다 여말삼은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성리학자이고 동일한 사건을 겪었지만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달랐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몽주보다 기성세대인 이색의 한계를 보여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본인의 정치적 역량의 한계가 이색을 이인임과 같은 강력한 적대자로 등장하지 못하게 막았다. 전술적인 차원에선 이인임이 정도전을 미끼로 신진사대부를 일망타진하려는 책략을 꿰뚫어보거나, 자신과 이성계가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책략을 내어 일시적으로 이성계 일파를 저지하는 등의 능력을 보이는 등, 부족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큰 판'을 짜는 대국적,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다는 것. 작중에서 이색은 이인임 시대에는 이인임의 우왕 옹립, 원나라와의 재수교, 최영과의 공존 등의 전략에 맞설 반대전략을 내지 못했고, 조민수와의 창왕 옹립은 이인임의 전략에 편승했을 뿐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이색의 전략적 한계로 인해 이색은 정도전의 전제개혁을 통한 역성혁명이라는 대전략에 완벽히 농락당하며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단순히 전략이나 정치적 능력 이외에 행보를 살펴보면 지식은 많은 것은 확실하나, 현실감각이 없고 지나치게 시야가 좁다. 일례로 드라마에서 사전폐지의 대안으로 내세운 정책이 '일전일주제'[8]를 주장했고, 이성계의 명나라 입조라던가 이인임의 복귀를 좌시하는 등 얼핏 보면 당시 상황상 이치에 맞는 것 같아도 살펴보면 드라마에서는 실제 민생이나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는 일은 제대로 한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 정도전이 복귀하기 이전에도 정도전이 사대부들과 성균관에서 농성하는 걸 저지한 것 말고는 이룬 일이 이렇다 할 만한게 없다.[9]
정도전은 역성혁명의 준비작업으로 전략적으로 전제개혁, 그 중에서도 절대 고려와 고려의 주류가 받아들일 수 없는 계민수전이라는 강경한 제안을 제시한다. 이것은 역성혁명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를 대신해 뚜렷한 적과 전선을 만들어, 고려를 극복해야 한다는 역성혁명파를 결집시키고 잠재적 적대세력을 솎아낼 수 있으며, 이 논의가 공론화되면 민심은 전제개혁파에 쏠리고, 개혁이 지지부진할수록 고려와 반대세력은 민심을 극도로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강력한 판짜기였다. 하지만 이색은 계민수전을 고려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보았지만, 자신들을 민심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전략을 꿰뚫어보지는 못하고 극렬한 반대와 전술적인 방해만으로 저항한다. 이는 정도전의 전략에 완전히 놀아난 것으로, 이런 이색의 저항을 통해 정도전은 손쉽게 역성혁명파로 전환될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이색으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을 민심으로부터 고립시킨다. 게다가 어차피 이성계의 군사력과 권력이 압도적인 이상, 민심에서조차 고립된 반대파들을 정략적으로 제거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결국 이색은 사임이라는 소극적인 저항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조차 정략적으로 파직되고 체포되고 유배된 자신의 제자이자 세력들을 구할 수 없을 만큼 정치적으로 몰락하기에 이른다.
오직 정몽주만이 이런 이색과 선을 긋고,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중립적 입장을 고수했기에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반대 세력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도전의 전제개혁&역성혁명 대전략을 폐가입진이라는 초강수 전략으로 일시적으로 저지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몽주 개인의 불충임과 동시에 이색의 정치적 입지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이색은 가짜 왕을 세운 역적으로 전락하며 명분에 치명적인 흠집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전개에 이를 때까지도 이색은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고, 그 결과 윤소종, 정도전 등이 "정몽주를 공격할 수 없으니 이색'이나' 공격하자"고 할 정도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어차피 이색은 군사력도, 권세도 없이 유종의 권위만 있었던 인물이므로 전제개혁 반대로 민심을 잃고, 폐가입진으로 명분조차 잃은 이색은 적대자들에게 있어 온건파의 약한 고리가 되어 수시로 노려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종이기에 보수파들은 이색을 지키기 위해 불리한 싸움에 끌려나올 수밖에 없는 미끼이자 인질이 되어버린 것. 결국 이색은 살아있음에도 정치적으론 그냥 시체가 되어 고군분투하는 제자이자 우군 정몽주를 도와주기는커녕 짐덩이가 되어 지켜보는 이상의 일은 할 수 없게 된다. 그나마 유종으로서의 입김은 상당히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개국 초 과거에 참여한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걸 보면.
사실 국사 교과서 등지에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으로는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이 딱딱 구분되지는 않았다. 이색은 이인임과 정치적으로 대립은 할지언정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구세대의 인물로, 신진 사대부가 척결대상으로 보던 불교계나 권신 이인임과도 두루뭉술하게 잘 지냈다. 세종은 이색을 가리켜 '목은 이색은 학문은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낮으며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라고 평하였다. 드라마에서 이색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게 어느 정도는 기록에 기반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성계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을 느끼거나, 정도전과 완전히 결별하기 전부터 정도전의 행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걸 보면 정치적 능력은 부족함에도 안목은 제법 있는 듯 싶지만, 행보와 결과를 보면 결국 지식만 많을 뿐 실용성은 없던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거진 그렇지만 인생이 상당히 불행한 인물이다. 총애하던 제자들은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옛 제자는 이색의 모든 걸 빼앗고 그가 지키려 한 고려를 갈아엎어 버린 걸로도 모자라 이색의 제자와 아들들을 끔찍하게 죽여버렸다. 최후엔 이성계 손에 죽으려 했으나 그 의지마저도 부정당했다. 그나마 이색 휘하에서 조선까지 잘 먹고 잘 산 인물은 하륜, 그리고 권근 정도가 되겠는데 하륜은 워낙 승차의 달인이라 제자의 느낌도 나지가 않고(...), 권근은 자신의 최애제자를 죽인 이방원에게 중요하게 쓰인다는 게 아이러니 하다.[10]
캐릭터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배우 박지일은 눈 옆의 혈관이 터질 듯한 연기력으로 찬양받았다. 마지막 도발 장면에서도 저게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정말로 정신이 나간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수준. 이인임과 최영이 퇴장하고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와 완전히 척을 지기 전 시점에서 뜻밖의 중간 보스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1] 정도전에게 '이인임같은 밥버러지의 역성을 드는 분을 어찌 스승이라 하겠소이까!'라는 폭언을 듣는 장면이다.[2] 악당이나 간신 역할 등으로 자주 나왔던 박지일이 배역을 맡아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대조영(드라마)에서 대중상의 친우 부지광 역을 맡긴 했지만.[3] 이색의 능력이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이 언성을 높이는 언행들 중에서도 드러나는데, 조준의 배후인 정도전을 인식하고 정도전의 계책들을 일부 눈치챘지만, 안타깝게도 나라를 뒤엎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이색의 한계상 다 알아챌 수가 없었다.[4] 당시에는 언쟁을 하다 보니 격해져서 그냥 순순히 받아들였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파문을 당해도 견디고 가야할 부분이었지만, 다툼이 끝나게 된 이후에는 이색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5]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았던 만큼 반동적인 사상을 제외한 부분들은 눈치챈 모습을 보였다.[6] 이 때 사제지간에 절연했다고 정도전은 이색을 대감이라 부르고, 이색은 정도전에게 존댓말을 쓴다.[7] 해석 그대로 한 토지당 한 명의 주인을 가지도록 하는 것. 당시 토지제도의 폐단의 중점인 권문세족들의 토지강탈과 겸병 그리고 하나의 땅을 여러 지주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수탈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격한 조사를 실시하여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자는 것이다. 신돈이 시행했던 전민변정도감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 시기쯤 되면 자작농은 거의 전멸한 상황이라 1전1주제를 행한다 한들 수확량의 반을 떼어가는 살인적인 소작료는 변치 않을 것이라 개혁안으로는 매우 미흡한 방법이기는 하다. 이 고질적인 문제는 무려 600여 년이 지나 광복 후 농지개혁법을 통해 비로소 해결된다.[8] 밭 하나에 주인도 하나만 지정하는 것으로, 소작농이 여러 주인에게 소작세를 뜯기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나라에서 정한 소작세를 주인 1명이 정당하게 걷어간다는 조건 하에서 보면 문제없이지만 생각해보면 주인이 하나든 열이든 소작세 자체는 주인이 걷어가고 그 주인이 제대로 걷어갈 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의미가 없는 정책이다.[9] 이는 이색이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았기 때문에 국정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 점을 고려하더라도, 극 후반기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당시에 실책들이 많은지라...[10] 물론 권근은 이색의 허락 하에 출사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