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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威化島回軍 제2차 요동정벌(第二次遼東征伐)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388년 (창왕 원년) 5월 22일[1] ~ 6월 3일 (음력) | |
장소 | 고려 서북면 의주 위화도 (現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상단리[북한1]) | |
고려 개경 인근과 만월대 (現 경기도 개성시 수창동[북한2]) | ||
원인 | 최영과 이성계의 요동정벌에 대한 의견 대립 이성계의 회군 요청에 대한 최영의 거부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공요군 (반란군) 승 | 고려 왕실 (진압군)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이성계 (우군도통사) 조민수 (좌군도통사) | 지휘관 우왕 (고려 국왕) 최영 (팔도도통사[겸임]) |
가담자 박위 배극렴 변안열 유만수 정지 심덕부 남은 지용기 이지란 이원계 조인옥 이화 | 가담자 안소 정승가 | |
병력 | 공요군: 50,000명[5] | 고려군: 5,000명~8,000여 명 (추정)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공요군의 회군 성공 | |
영향 | 최영 및 대명 강경파 숙청 우왕 폐위 및 고려 멸망 가속화[6] 이성계의 정권 장악, 신진사대부 대두 조선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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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민수가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서 최영에게 쫓기는데, 태조(太祖)가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선죽교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그 먼지는 하늘을 뒤덮었으며, 그 북 치는 소리는 온 땅을 뒤흔들었다. 최영의 휘하 장수 안소(安沼)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산에 웅거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났으며, 형세가 다한 것을 본 최영은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고려사절요》
《고려사절요》
고려 말기인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한 이성계와 조민수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훗날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과 철령위(鐵嶺衛)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고려에서,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있었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 등의 무신들은 서경에서 국경 지대 압록강의 섬인 위화도까지 19일에 걸쳐 북상했다. 그러나 이내 그대로 군대를 돌려 9일만에 회군(回軍)해 개경의 수도 방위군과 최영을 제압하고 조정을 장악했다.[7] 고려 제32대 우왕 14년인 1388년 음력 5월 22일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무진년 회군이라고도 불린다.[8] 또한 제31대 공민왕 때 추진한 제1차 요동정벌에 이은 두번째 요동 침공 작전이라는 점에서 제2차 요동정벌이라고도 불린다.
왕명을 어기고 군 총지휘관이 독단으로 주력군을 움직인 사실상의 쿠데타로, 이성계에 의한 역성혁명의 시발점이었다. 이후 회군의 수장이었던 이성계는 무인 세력인 신흥무인세력 그리고 조준, 남은, 남재,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아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여 직접 국왕에 오르게 된다. 구한말 호머 헐버트는 한국사를 연구한 자신의 저서[9]에서 이 사건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2. 배경
2.1. 고려의 혼란과 명나라의 대두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태조 홍무제 주원장 |
무신정권(武臣政權)의 대두와 몽골제국과의 대몽항쟁 이후 고려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고려 말기는 중국의 원명교체기와 일본의 남북조시대로 인한 지속적인 외세의 침략과 권문세족들의 사치 및 무능 때문에 혼돈의 카오스였다. 여러 폐단이 쌓이고 있었던 상황에서 공민왕이 개혁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벌였으나 본인이 시해당하면서 이는 실패로 끝났고,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 몽골의 잔당인 북원과 여진족(女眞)의 반란군 등이 사방에서 준동하는 대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혼란은 정도전, 남은 등 과격한 급진개혁파를 출현하게 했으며,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 황산대첩(荒山大捷) 등의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힘과 입지를 키운 이성계, 조민수 등의 신진 무장 세력을 탄생시켰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 제국의 위세가 바닥까지 떨어지면서 결국 원(元)제국이 멸망했고, 이런 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살린 주원장이 파양호 대전(鄱陽湖大戰)에서 승리하여 남경을 중심으로 명나라를 건국하고,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 등의 명장들에게 명령하여 북벌을 감행, 원나라 세력을 모조리 중국 북방으로 내쫓아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급격한 원명교체기의 대혼란은 당대 고려의 정치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2.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적 접촉과 요동의 정세
명나라의 홍무제 주원장과 고려의 접촉은 공민왕 무렵에 처음 시작되었다. 1368년 주원장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라는 인물을 보내[10] 고려에 자신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다음해 사신이 도착하자 공민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융숭하게 대접했고, 명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여 명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에 편입되었다. 고려의 편입에 대해 당초의 홍무제는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건국 초기 북원(北元)을 주시하고 상대해야 했던 명나라의 홍무제에게, 고려의 외교적 가치는 상당한 편이었다. 고려와 명나라가 관계를 맺은지 불과 3년 뒤인 1372년만 해도, 북원의 코케테무르(擴廓帖木兒)가 서달의 수만 대군을 격파할 정도로 당시의 북원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11] 비록 명나라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으로 북원의 세력은 많이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요동 등지에는 잘라이르 나하추(納哈出) 등이 횡행하고 다니는 판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고려는 명과 북원의 이러한 대립 상황을 인지하고 양쪽을 외교적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12] 고려는 명나라의 조공-책봉 관계에 편입되고 친명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북원의 세력과도 완전히 손을 끊지 않았기에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북원과 고려의 외교적 결합을 막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요양행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원 세력은 원나라의 유익(劉益)이 명나라에 항복한 이후, 급속하게 요동의 나하추 세력을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하추의 세력은 사서에 고 일컫어질 정도였는데, 그 절정기에는 한때 200,000 명 가까이 되기도 했다. 나하추는 이 세력을 이용해 명나라의 요동 진출을 막고 있었다.
나하추는 아직 세력이 절정에 오르기 전인 1362년 전 쌍성총관인 조소생(趙小生) 등의 회유로 고려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하추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에게 연거푸 패배했다, 이성계의 이 승리는 원나라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의 동북면 영토를 원나라 침략의 위협에서 확고하게 탈출하게 만들었고, 고려의 영토임을 각인시킨 승리라고 평가된다.[14]
이성계에게 패배한 이후 나하추는 고려에 대한 공격 의사를 포기하고, 평화 관계를 유지하며 오히려 긴밀한 연결을 취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하추의 세력은 북원의 본거지에 대해 주력하고 있었던 명나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는데, 1372년 11월 나하추는 요동의 명군 전초 기지인 우가장(牛家庄)을 공격해 창고를 불태워 양식 10만여 석을 없애고, 명군을 무려 5,000명이나 몰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가장은 명나라 초기 요동 해운의 마지막 종착지로서 요동 최고의 군량 보급 창고가 있었던 장소였다. 따라서 나하추의 우가장 전투 승리는 명나라의 요동 보급로를 차단하고, 요동에서 장기적인 포석을 다지려는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지만 강남 전투의 패전으로 보아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실제로 명군이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니까 금방 항복했다.
1372년 1월 서달이 당한 대패와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우가장 전투의 승리는 북원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나하추는 1374년 11월의 요양(遼陽) 공격, 1375년 12월의 대규모 공세 등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명나라의 적절한 대처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나하추 쪽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자 나하추는 고려와의 외교적 연대에 주목했다.
2.3.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 변화
이 무렵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인 편이었으나, 공민왕 말기로 갈수록 점점 틈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제32대 우왕 시기에 정점을 찍었는데, 명나라 사신이었던 채빈(蔡斌)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1374년 공민왕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홍무제는 강한 경계심을 보였다. 당시 고려의 실력자였던 이인임(李仁任)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도록 했고, 그 주범인 김의(金義) 등은 북원으로 달아났다. 이인임을 비롯한 고려 지도층의 인식은 다음의 언급을 통해 나타난다.자고로 나라의 임금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 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입니다. 황제가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공이 필시 모면하지 못할 터이니, 원나라와 화친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려사》 <이인임 열전>
《고려사》 <이인임 열전>
비교적 친명 정책을 표방하던 공민왕의 시해, 명나라 사신 채빈 살해 등은 홍무제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후 명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강경 정책으로 나아가게 된다. 명나라는 고려의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이 될 정도로 막대한 조공[15]을 요구하며 외교적 압박을 가했는데, 일반적으로 조공의 수량은 호부(戶部)에서 요구하면 예부(禮部)가 제시를 하는 것이었지만, 이때 고려에 대한 조공 수량의 책정은 홍무제가 예부에 명령하여 일방적으로 책정한 것으로서 당시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수치였다.
그런데 막상 홍무제의 우려대로 북원과 고려의 관계가 가까워지자(혹은 가까워지는 듯 보이자)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375년의 군사적 시도가 실패한 이후 나하추는 고려와의 연합 작전을 통한 전세 회복을 꿈꾸며 지속적으로 고려와의 연락을 시도했다. 당시 몽골의 북원, 요동의 나하추, 한반도의 고려가 서로 가진 사신 왕래는 다음과 같다.
시기 | 파견 세력 | 비고 |
1375년 1월 | 나하추 | 우왕 계승의 사유를 물어옴 |
1375년 5월 | 북원 | 북원 사신을 강계(江界)에서 대접 |
1376년 2월 | 고려(李原實) | 나하추 방문 |
1376년 5월 | 북원(吳抄兒志) | 우왕이 융숭히 대접함 |
1376년 10월 | 북원(부케테무르) | 코케테무르의 회유문 전달 |
나하추(九住) | 문천식(文天式)을 돌려보냄 | |
고려(孫彦) | 북원에 우왕 책봉 요청서를 보냄 | |
고려(黃淑卿) | 나하추의 구주 예방에 답례, 우왕 책봉 승인 | |
1376년 12월 | 나하추 | 은과 양을 선물함 |
1377년 1월 | ||
1377년 2월 | 북원(보라디) | 우왕 책봉 명령서, 술과 해동청을 선물함 |
나하추(문카라부카) | - | |
북원(豆亇達) | 북원의 연호 '선광'(宣光) 사용 | |
1377년 3월 | 고려(李子松) | 우왕 책봉에 대한 답례 |
고려(문천식) | 나하추, 옹주(翁主) 문카라부카, 두마대 등에게 녹봉포(祿俸布) 제공 | |
1377년 7월 | 북원(체릭테무르) | 고려에게 정료위(定遼衛) 공격을 요청함 |
1377년 9월 | 북원 | 재차 정료위 공격 요청 |
고려(문천식) | 기후, 말과 풀 등의 부족으로 출사할 수 없음을 통보 | |
1377년 11월 | 고려(황숙경) | 동지 명절 축하 |
1377년 12월 | 나하추 | 양 160두와 모우(毛牛) 3두 선물 |
1378년 7월 | 북원 | 천원제 테구스테무르의 즉위를 알림 |
1379년 6월 | 연호를 '천원'(天元)으로 개칭했음을 알림 | |
나하추(문카라부카) | 우왕은 나하추와의 특별한 우의를 표시하고, 저포와 마포 각 150필을 선물함 | |
1379년 12월 | 나하추 | 매와 양을 선물함 |
1380년 1월 |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 | 북원의 조서를 가지고 옴 |
1380년 2월 | 북원(시례문·대도려) | 우왕을 태위(太尉)에 임명 |
1383년 1월 | 나가추(문카라부카) | 우호 재개 요청 |
출처 |
이렇게 되자 명나라는 강경 정책에서 다시 유화책을 쓰기 시작한다. 아직 북원의 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고려와 몽골 세력의 연대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고, 만일 나하추나 북원을 공격하려 한다고 해도 고려가 방해가 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1377년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던 고려인 358명 등을 풀어주며 명 태조는 고려에 손을 내밀었다. 이후에도 공물의 증액에 관한 대립은 있었으나, 1380년 8월 고려 조정의 요구가 일부 수용되어 이것도 부분적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렇게 공민왕 사후 틈이 벌어졌던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겨우 접점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몽골 세력이 괴멸(壞滅)한 것이다.
2.4. 나하추의 투항
▲나하추의 세력지였던 금산(金山)의 위치 |
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우부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에게 보병과 기병 200,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리오[16]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명사》(明史) <풍승전>
《명사》(明史) <풍승전>
1387년, 잘라이르 나하추는 결국 명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1375년 이후 악화된 전황으로 몽골의 주요 장수들은 속속 명나라에 투항했고, 고려와의 연계도 명나라의 외교적 노력 때문에 여의치 않자 나하추는 외로운 형세가 되었다. 그리고 본인도 금산 전투에서 패배해 가진 병력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무제는 풍승(馮勝)을 대장으로 삼아 무려 200,000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여 나하추의 세력지인 금산을 압박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이렇게 막대한 군사적 위협을 받자 나하추는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여기에 더해 명군이 회유 작전 역시 병행하자 나하추는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는 요동 지역을 평정할 수 있었다.
나하추의 투항은 요동 지역 뿐만 아니라 전 몽골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북원의 천원제 테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 정권은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나하추가 투항함으로써 요동 지역 접근이 차단되었고, 그렇게 된 이상 북원 정권은 일개 초원의 유목민 정권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몽골측 투항자는 굴비를 엮듯 줄줄 딸려오기 시작하여 나하추가 투항한 이후에는 20만 호, 천원제의 패배 이후에는 최대 60만 호에 달하였다.
골칫거리였던 요동의 나하추 세력이 붕괴되면서 명나라는 큰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 북원과 고려의 연대를 고려하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데, 나하추의 항복으로부터 1년여 뒤, 위화도 회군의 불과 얼마 전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가 초원으로 진군하여 북원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0,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창졸간(倉卒間)에 그 앞에 이르자, (그들이)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명사》(明史) <남옥전>
(중략) 창졸간(倉卒間)에 그 앞에 이르자, (그들이)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명사》(明史) <남옥전>
1388년 3월, 150,000명에 달하는 명나라 대군은 북원의 수도 카라코룸을 급습하여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남옥은 포로만 무려 80,000명 가까이에 이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시점에서 북원 정권은 완전히 멸망했다. 달아난 천원제 테구스테무르는 예수데르(也速迭兒)라는 인물에게 살해되었는데, 예수데르는 과거 원 세조 쿠빌라이 칸과의 툴루이 내전에서 패배한 아리크부카의 후예로서 긴 시간이 흘러 쿠빌라이 칸의 후예에게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이후 조리그투 칸 예수데르는 소위 타타르(Tatar, 달단)라고 불리는 정권을 세워 나중에는 서몽골의 오이라트와 더불어 명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당장은 남옥에게 당한 대패 때문에 본인들 수습도 어려운 판국이었다.
여하간 나하추를 항복시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북원을 괴멸시키려 했을 정도니, 당시 명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행보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판이었다. 더 이상 고려가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기에 다시 강경책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나하추의 투항 이후 명나라의 공격이 직접적으로 가능해졌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2.5.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는 1387년 12월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말도록 함으로써 고려 조정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사실 이미 1387년 무렵부터 고려의 지도층은 명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요동에서 어떤 사람이 고려로 도망쳐 와,
'명나라의 황제가 장차 처녀와 수재(秀才) 및 환관 각 1,000명과 소와 말 각 1,000마리를 요구할 것이다.'
라고 도당(都堂)에 제보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도당에서 우려하자, 최영은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명나라를 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즉 제2차 요동 정벌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철령위 요구가 일어나기 전에도, 최영 등은 명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피력하며 극도의 반명 기조를 보였다.이러한 상황속에서 다음해인 1388년, 최영은 이성계의 협력을 바탕으로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제거했고(무진피화), 이 과정에서 우왕과 긴밀히 연결된 최영의 권력도 한층 강화되었다.[17] 따라서 공공연히 명나라 공격을 말했던 최영의 의도는 고려의 국가 정책에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반명 기조가 한층 올라왔던 상황에서, 같은 해 2월에 앞서 명나라에 건너갔던 외교관 설장수(偰長壽)가 돌아와 명나라 황제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는 고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000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 태세와 전함 건조 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18]·심양(瀋陽)[19]·신주(信州)[20] 등지의 군민(軍民)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고려사》 우왕 14년 #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 태세와 전함 건조 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18]·심양(瀋陽)[19]·신주(信州)[20] 등지의 군민(軍民)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고려사》 우왕 14년 #
이 당시 명나라의 요구 조건을 간략하게 살펴 보자면,
- ① 고려에서 보낸 말은 모두 약소하여 쓸모가 없다는 점
- ② 고려에서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명나라를 정탐하고 회유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 ③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에 속한 땅이었으니, 이것을 모두 요동에 포함시켜 명나라의 땅으로 해야 한다는 점
바로 이 세 가지가 요구 조건이었는데, 게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사항의 경우에는 늘쌍있는 험악한 분위기의 대립과 트집이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으나, 세 번째인 철령위 요구가 문제였다.
▲ 철령위 위치 |
대체 왜 홍무제는 이 시점에서 철령위 설치, 즉 국가 간의 가장 민감한 영토에 대한 분쟁을 초래했을까? 앞서 말한대로 홍무제는 북원과 고려 간의 연결 가능성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고, 나하추를 굴복시킨 후에는 고려가 다시는 몽골의 잔여 세력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하고, 고려가 여진 세력을 포섭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홍무제의 핵심은 사실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북원 세력의 차단이었다는 것이다.[21] 이를 뒷받침하듯 위화도 회군 이후로 명나라는 두 번 다시 철령위에 대한 언급을 꺼내지 않는다. 즉 명나라가 철령위 이야기를 꺼낸 목적이 철령위 문제를 통해 일부러 고려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여기서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반명파와 온건한 반응을 보이는 친명파를 구분해내려고 했던 것인데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반명파가 제거됨으로서 굳이 고려를 더 자극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홍무제가 고려의 땅이 탐나서 그런 요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홍무제는 여러 차례 고려에 대한 군사 원정의 무익함에 대해서 말한 바가 있었다. 오히려 위화도 회군당시 반란군을 제거하고 동맹인 고려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서 아예 원처럼 정복시킬 명분마처 충분했지만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22]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농경민족인 한족이 중원을 통일하면 정복 전쟁보다는 수성을 위한 전쟁이었고,[23] 이민족이 중원을 통일하면 정복 전쟁을 주로 일으켰다. 홍무제도 그 선상에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영토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당면한 문제인 북원 세력의 절멸보다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고심하고 있을 때, 몽골에서는 남옥이 이끄는 15만 군대가 북원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목적이 고려의 영토이던, 북원 세력에 대한 통제이던 간에 영토를 둘러싼 분쟁은 고려 조정에 있어 큰 화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3. 고려의 반응
3.1. 최영의 요동 공격 의지
최영의 표준영정 |
이와 동시에 최영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명나라의 정료위(定遼衛)를 칠 것인지, 아니면 화친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당시 모든 재상들은 화친쪽에 찬성했고, 이에 밀직사사(密直司使) 조림(趙琳)이 명나라 조정으로 출발했지만 요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최영은 다시 한번 재상들을 불러 모아 철령 이북을 할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고, 재상들은 그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었다.
이미 명나라 공격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요동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의 핵심이 되어, 인척 관계를 맺은 우왕과 더불어 요동 원정을 논의했다. 우왕은 요동 공격에 대한 자문을 최영에게 구했고, 최영은 이에 대해 찬성했다. 즉 요동 공격이라는 정책의 핵심은 바로 최영이었다.
이 때문에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직접 최영의 집에 찾아가 요동 공격을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최영은 이자송을 곤장으로 두들겨 패서 유배를 보낸 다음에 곧 죽여버렸다. 요동 공격에 대한 최영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때 때마침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명나라가 병사 1,000여명을 이끌고 와서 철령위를 세우려고 한다."
는 보고를 올렸고, 동강(東江)에서 돌아오고 있었던 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내 말을 안 들으니까 이렇게 되었잖아!"
하고 울면서 통탄했다. 이후로 우왕은 명백하게 명나라를 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마침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命)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하였으나, 이미 명나라를 적으로 여기던 우왕은 병을 핑계로 아예 왕득명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우왕 대신 판삼사사(判三司事)였던 이색(李穡)이 왕득명을 만나 잘 달래었으나, 왕득명은 "철령위 요구는 황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심지어 최영은 여기서 한술 더 떠, 왕득명의 일로 고려에 왔던 명나라의 요동 병사 21명을 살해하고, 다섯 사람만 남겨 구금함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적대 의지를 불태웠다. 고려 8도에서는 요동 정벌에 필요한 병사들이 징발되었고, 우왕은 황해도 부근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병력의 징발과 요동 공격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
3.2. 이성계의 <사불가론>
태조 이성계 |
사냥을 핑계로 이동하며 요동 공격 준비에 착수하던 우왕은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인 봉주(鳳州)에 도착했을 무렵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우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최영하고만 단 둘이서 논의하곤 했었으나, 이번 요동 정벌은 예외적으로 처음, 이성계에게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인만큼 이성계가 고려 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양을 치는데 힘을 써주라는 우왕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기서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24]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25]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26]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27]
《고려사》 우왕 14년 4월 1일(음) #
《고려사》 우왕 14년 4월 1일(음) #
그러나 우왕의 요동 정벌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보이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기정 사실로 여기는 대신 전략상의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즉 정 공격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기는 좋지 않으니 좀 더 적절한 때를 노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 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28] 지금은 군사 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고려사》 우왕 14년 4월 미상(음) #
《고려사》 우왕 14년 4월 미상(음) #
즉 여름철에 무리하게 행군할 것이 아닌 좀 더 기다려서 가을철에 행군하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왕은 이성계를 채근하면서
"경은 이자송의 꼴을 못 보았는가?"(卿不見李子松耶?)
고 협박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렇게 반박했다.이자송이 죽긴 했으나 후대에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살아 있긴 해도 이미 전략상 큰 실책을 범했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고려사》 우왕 14년 4월 미상(음) #
《고려사》 우왕 14년 4월 미상(음) #
계속해서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우왕은 전혀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이성계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물러나면서
"이제 참화가 시작되었다."
고 했다.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이성계의 발언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사대주의 발언으로 오인받아 비판받기도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을 벌이기엔 신생 강대국 명나라의 국력에 비해 부정부패와 잦은 전란으로 고려의 국력이 약하니 이길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의 선제 공격은 무모하다는 상식적인 말일 뿐이었다. 세계사적으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기는 경우도 있으니 시도도 해보지 않는 것은 너무 지레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예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역사에 남는 것이다. 실패해도 언제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국운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할 순 없는 노릇이다.
또한 사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놓고 본다 해도 이 발언은 척준경 등이 인종(제17대)에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라며 건의하고, 인종이 이를 받아들여 자신을 신하(臣)로 칭하며, 금나라와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었을 때 있었던 말로 이성계가 처음 한 말은 아니었다. 특히 '선왕의 법도'라는 부분을 보면 전부터 이런 사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척준경이 대여진 전쟁에서 용맹을 자랑했던 무장 출신이었음을 봤을 때, 피비린내나는 전장에서 전쟁에 대한 환멸을 느껴 그랬을 수도 있다.
또한 이 발언은 전략, 전술적 입장에서 크게 틀리다고 볼 법한 부분은 없다. 단어 그대로, 큰 땅덩어리에 병력도 훨씬 더 많은 국가를 작고 병력도 적은 나라가 먼저 나서서 경솔히 침공해 그 영토 깊숙히 들어가게 된다면, 당연히 포위섬멸을 당할 위험성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며, 이렇게 잘못해서 원정군이 전멸했을 경우 비어있는 본국은 빈집털이를 당할일밖에 안남는다. 이는 당장 고구려, 발해, 고려도 몇번 당해봤던 위기상황이다. 당시 명나라는 신생국인데다가 고려가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되찾은 철령 이북 땅을 멋대로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이성계가 명을 '큰 나라' 라고 말한 것은 사대의 의미가 아니라 국력이 우리보다 더 크다는 것[29]을 의미할 뿐, 사대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가 명백하게 명나라에게 사대를 할 의사가 있었으면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바로 명나라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홍무제와 툭하면 외교적 신경전을 벌였고[30] 이 때문에 명나라와의 관계는 조선 태종 이방원 치세때 명나라에서 성조 영락제 주체가 즉위하고 나서야 사대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불가론> 이후에 이성계는 우왕의 요구에 동의했으며, 대신 공격의 시점을 가을로 물리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은 이성계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내놓은 타협책이었으며, 당시 말한 전략상의 이유도 큰 허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성계는 실제로 요동을 공격해서 잠시나마 점령했던 제1차 요동정벌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시 고려에서 가장 경험 있는 인물의 주장이었다.
요동성을 점령한다고 해도, 군량이 떨어지고 더 진격하지 못하면 별 소득도 없다.
는 언급은 제1차 요동 정벌 당시의 전황을 그대로 말한 사례로써,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묵살됨에 따라 이성계는 자신이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전략상의 이유가 아닌 이성계라는 인물의 세력으로 보아도, 요동 정벌이 현실화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이 이성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조상 대에 원나라에서 천호장으로 일하다가 고려에 귀부한 이성계는 그래서인지 왜구와 홍건적, 나하추와의 싸움에서 눈부신 무공을 세우면서 싸웠고, 그렇게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문은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 공훈을 올렸다. 친명 정책을 표방하는 유생들이 이성계와 접촉했던 이유도 입장상 철저한 반원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성계의 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31] 그런 이성계에게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라고 하는 것은 입장상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비록 임견미 등을 척살하며 부각되긴 했더라도 본래 정계에 기반이 약했던 이성계로서는 가별초(家別抄)로 유명한 자신의 최강 사병 세력과, 동북면에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32]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사병들이 소진되고, 혹시 명나라의 역습이 현실화된다면 가장 먼저 짓밟힐 곳도 이성계의 군사적 & 경제적 기반으로 당시 사실상 '이성계의 영지'나 다름없었던 동북면이었으니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반대 주장이 순전히 이성계의 개인적인 이익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요구한 철령위는 바로 이성계의 근거지인 동북면이었다. 이성계 역시 자신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우왕의 요구에 동의하며 그 대신 내놓은 타협책마저도 '얻어 맞아 죽은 이자송' 의 이름까지 나오며 무시되자 이성계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이성계의 의지도 무시되었을 만큼 당시 우왕과 최영은 제2차 요동 공격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며 일전에 처리한 임견미, 염흥방의 가산을 털어서 쓰고, 전국의 승려들마저 징발하여 승군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이제 요동 공격은 피할 수 없는 일로 보였다.
3.2.1. <사불가론>에 대한 최영의 반론
최영은 이성계의 <사불가론>에 맞서 3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고 한다.1. 명나라가 대국이긴 하지만 북원과의 전쟁으로 요동 방비는 허술하다.
1. 요동을 공격하면 가을에도 경작이 가능하기에 군량 확보가 가능하다.
1. 장마철이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으며, 명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에 싸우는 걸 더 싫어한다.
+ 왜구는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중, 대다수는 오늘날까지 요동 정벌의 가능성을 논할 때, 그리고 <사불가론>의 당위성을 논할 때 많이 사용되는 근거들이다. 책에 따라서는 3가지 혹은 4가지를 최영이 이성계에게 말했다고 나온다. 일단 <국방일보>나 이런 기사에서나 이런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걸 보면 아예 순수 창작은 아닌 듯하나, 《고려사》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부분을 찾기 어렵다. 아직 번역이 안 된 부분이 남아서 그런건지, 최영의 저 주장들이 후세에 덧붙여진 이야기인지 명확하게 확인이 필요하다.1. 요동을 공격하면 가을에도 경작이 가능하기에 군량 확보가 가능하다.
1. 장마철이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으며, 명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에 싸우는 걸 더 싫어한다.
+ 왜구는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최영의 논박은 이성계의 논리를 반박하기엔 부족해보인다. 1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넘어간다고 쳐도[33] 2의 경우는 1이 아닐 시에는 요동 점령이 오래 걸릴 수 있고[34] 3의 경우엔 조건 자체가 같다는 부분은 맞을지 몰라도 명나라 군대가 장마철에 싸우는 걸 더 싫어한다는 근거는 미약하다. 북방 출신 병사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나, 명군의 주력은 강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습한 기후에는 고려인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았다. 여기에 왜구가 정규군이 아니므로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건 당시 상황에서는 일부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35]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고려를 수십 년간 초토화시키면서 수도 개경 근처까지 진격한 이들이 바로 왜구 세력들이었다. 게다가 사불가론으로 논쟁이 벌어질 당시에도 왜구가 연이은 패배로 인해 기가 좀 죽긴 했어도 위협은 여전했다. 왜구의 날뜀이 진정된 건 조선이 건국되고도 근 30년이 더 지난 뒤인 세종 대부터였다. 물론 백성의 위해는 감안하지 않고 단지 나라의 존망에 위협이 되느냐로 따지면 단지 주의만 해야 할 수준이라는 항변도 가능하겠지만, 요동 공격에 고려 전군을 몰아넣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4. 요동 정벌은 가능하였나?
홍건적의 침입때만 해도, 200,000명이나 되는 홍건적 대군에[36] 국경이 털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었었다. 심지어 바로 직전에 수십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략만 보아도 고려는 국가 멸망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매우 컸었다. 당대의 이런 상황들을 보면 당시 고려의 국력에 대해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또한 당시 명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과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한 명장들이었고,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의 능력이나 전공을 감안하면 굴복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사실 《명사》를 보면 당시는, 만주족 같은 이민족들이 자기들도 뭔가 해보겠다고 사방에서 반란 일으키고 난리였던 명나라 말기와 비교해서 상황 자체는 딱히 훨씬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에 원정까지 가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인물들의 개인적인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군사적 능력과 지식을 감안할 때 원나라가 이들의 세력을 상당히 격파하는 데 성공했었더라도 끝장을 내지 못했다면 한 고조 유방이나 모택동처럼 두고두고 후환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 점은 고려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성계의 주장에 따르면 고려 군대의 사기도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좀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관구검처럼 빅엿을 먹일 수도 있는 명나라 장군들을 상대로 보급 문제도 좋지 않은데 사기마저 떨어지는 군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사기가 낮은 군인들은 용인전투나 북송 시절 북송군 2,000명이 금군 호위무사 17명에게 발린 사례[37]처럼 진짜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을 자주 보여주는데, 만약 타지에서의 전쟁이 자기들 생각보다 힘들거나 자신에게 별 이익도 없는데 따르기 싫다는 생각이라도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을 것이다.
당시 명군은 중원 통일을 위해 원나라와 이민족들은 물론 같은 홍건적 즉 동계홍건군 출신 주원장과 서계홍건군 출신 진우량이 맞붙은 파양호 대전 같은 패권다툼을 벌이며 성장한 정예병들이었다. 나관중이 지은 중국 고전의 명작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의 모티브[38]가 되기도 한 파양호 대전은 홍건적 출신 장수들이, 홍건적 출신 병사들로 서로 전쟁을 치렀는데, 이들은 고려로 쳐들어온 홍건적과 같은 출신으로, 고려를 침공했던 홍건적은 원나라 황제의 옥새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당장 명나라의 남옥마저도 북원군이 주둔한 후룬베이얼에 150,000명의 병력으로 쳐들어가 전쟁을 벌이며 원나라 황제 옥새를 손에 넣었다. 중원을 잃었을지언정 본거지에서 세력 자체는 가지고 있었던 북원의 명맥을 끊어놓지 않으면 명나라 입장에서는 원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후환의 싹을 마저 조지기 위해 주원장은 북원 정벌을 명했고, 그래서 명군이 대규모로 쳐들어가 북원을 조진 것이다. 즉 원나라 정규군과의 전쟁과 홍건군 내전을 겪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주민족의 정예병들이 초원 지대로 쳐들어가 유목민족의 대규모 기병을 복날 개 잡듯 두들겨팼단 소리다. 고려군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20만 대군을 막아내고, 왜구의 침입도 막아냈지만 어디까지나 막아냈다일 뿐이고 그나마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을 뿐더러, 고려군이 이렇게 전투 경험을 쌓는 동안 명군도 상술했듯 고려군 전 병력의 몇 배에 달하는 대병력이 공격과 방어 모든 부분에 걸쳐 전투 경험을 쌓았으며, 따라서 대규모 회전이나 화력전 등의 경험에서 고려군은 명군보다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고려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마련한 40,000명의 공요군이 명나라를 침공했다가 요동 벌판에서 모두 산화해버린다면 고려의 국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지구상에 고려가 남아있을지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약 20년 후 베이징에서 2,000km 넘게 떨어져 있는 호 왕조 베트남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편, 당시 요동 지방은 명나라가 영유권을 주장만 하는 지역이었을 뿐 실제로는 기원후부터 약 1,000년간 고구려와 발해 등 한민족 계열이 지배하고, 이후 약 500년간 거란과 금나라, 원나라 등의 북방 민족이 지배했던 땅이어서 한족 계열 중원 제국들은 당시 시점으로 명나라 이전에는 요동 지역을 역사상 차지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은 1387년 정로대장군 풍승(馮勝)[39]의 지휘 아래 좌부장군 부우덕,[40] 우부장군 남옥[41]의 20만 대군을 요동으로 출병시켜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을 점령하고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결국 경계심이 많고 괴팍한 성격의 의심병 환자였던 주원장의 명나라가 정말로 자신들이 피흘려서 어렵게 점유한 요동을 무력으로 공격한 고려에게 관대하게 허허 웃으면서 전쟁없이 그대로 묵인하고, 고려의 요동 점령을 봐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42]
물론 이것 외에도 이성계가 마련한 타협안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성계의 말대로 가을에 진군시 군량 수급에는 문제가 없겠으나, 이후 찾아올 요동의 혹독한 겨울을 과연 버텼을까라는 것이 의문점이다. 물론, 그냥 경고성 공격으로 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겠지만 문제는 의심병 환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경계심이 많았던 주원장의 명나라가 그러한 경고성 공격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 줄지가 문제이다. 어쨌든 이 타협안마저 안된다면 그냥 요동정벌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도 이성계의 처음 주장은 요동정벌이 불가하다는 것이었으나, 우왕과 최영의 결심을 꺾을길이 없자 어쩔수 없이 차선책이라도 낸것이니, 차선책이 완벽할리 없는게 당연하다. 완벽하다면 최선책이 되지 차선책이 될 이유가 없었다.
일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세의 승리에는 다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주변 환경이 유리하게 돌아가거나, 지도자가 천재적인 지휘관이라던가, 이것도 아니면 휘하 병사의 정예 수준이 남다른 유리함 정도는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처럼 통일 왕조인 당나라가 마음 먹고 대규모 원정을 진행했는데 수성도 아니고 야전에서 수차례 막힌 적이 있다. 상대는 당시 그렇게까지 강하다고 보긴 애매했던 토번이었다. 이때 토번이 전성기 당군을 막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휘관인 가르친링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르친링이 지휘하지 않는 토번군은 당군과 맞붙을 때마다 연전연패했다. 훗날 토번군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지만 이건 당나라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상황이라서 가르친링은 토번의 장수는 물론이고, 동맹군인 돌궐마저 패배할 때 혼자서 당나라의 대군을 격파해 버렸다. 토번의 주력군과 동맹군이 모두 패배한 직후에 소라한산 전투라는 걸출한 위업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가르친링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칭기즈 칸 테무진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본인도 뛰어난 마당에 휘하에 제베, 무칼리를 포함해 뛰어난 무장들과 아들들이 있었고, 뛰어난 기마병들이며 칭기즈 칸의 명령하나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실제 금나라와의 전투 당시 불길속에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100,0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43] 거기에 상대인 금나라, 서하, 호라즘 등은 실패한 국정으로 국력이 약화되거나, 몽골군을 막기엔 빈약한 지휘관들의 문제, 내분으로 인해 알아서 자동문 수준으로 무너졌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었고, 칭기즈 칸 사후에 벌어졌던 헝가리 원정은 1차 때도 매우 고전했지만 나중에 노가이가 110,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침공했을 때는 중장기병을 앞세운 30,000명으로 가볍게 몽골군을 짓밟으며 승리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례를 예로 들자면 이소스 전투 이전까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정복은 그냥 맨땅에 헤딩한 게 아니라 그라니코스 전투에서의 한타 싸움에 승리한 이후 이 지역의 친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그라니코스 전투의 승리 역시 애초에 페르시아군의 전력이 마케도니아에 비해 열세인 상황에서 마케도니아와 동포 의식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그리스인 용병대의 활용을 주저한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반대로 고려는 이미 제1차 요동원정에서 이원경 같이 회유 가능한 고려계 유민들은 다 끌어모았고, 제2차 요동원정 시기가 되면 딱히 기대할만한 친고려 세력이랄 것도 없었으며, 이소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결정적 국면마다 오판으로 결전을 말아먹은 다리우스 3세와 달리 명군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명성을 떨친 명장들이 즐비했다. 군사력면에서도 마케도니아군은 헤타이로이로 대표되는 강력한 장창 중기병과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전력을 보유하여, 숫자만 많지 절반 이상이 농민 징집병인 페르시아군에 대해 군사력의 비대칭을 유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요동전에서는 오히려 고려가 농민 징집병으로 숫자만 간신히 채운 전형적인 약군으로 명군의 기병대에 짓밟힐 걱정부터 해야 했다.
직접 비교할만한 사례인 후금군이 명군을 상대로 요동을 방어한 사르후 전투와도 비교하자면, 여진족들은 그곳에서 살아오던 민족인 만큼 요동의 지리를 손바닥 안에서 꿰고 있었으며,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기마 민족의 군대인 만큼 기동력도 고려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성계는 분명 명장이지만,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출전한 전쟁은 위화도 회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비록 이성계 본인의 명장으로서의 명성으로 고려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휘하 병력인 '공요군'부터가 그 숫자가 터무니 없이 적었다. 비록 가별초로 대표되는 정예 사병집단을 거느렸다고는 하나 그 규모는 많아봐야 3,000명 정도로 40,000명의 공요군 내에서 채 1할도 차지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명나라와 싸워야 하는 공요군 전체의 숫자가 겨우 40,000명에 불과했다. 가령 당나라와 전쟁을 한 가르친링의 대비천 전투의 사례를 보면 이때 가르친링이 당군을 격파할 때 동원한 군세가 무려 400,000명에 달했다. 이에 비하면 공요군은 상당히 적은 병력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주원장 휘하의 장수들 역시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뿐이었다. 물론 군사적인 부문에 욕심이 많았던 주원장이 이성계를 한때 사돈감으로 생각할만큼 이성계가 뛰어났긴 했지만 이들이 이성계에 비해 모자란다고 보기는 힘들다. 더욱이 주원장의 장수들은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전장에서 군공을 쌓았고, 대부분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병력들을 다뤄본 적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도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주원장과 생사를 함께 하던 휘하 장수들은 대부분 주원장과 같은 홍건적[44] 출신이다. 홍건적 20만 대군에 맞선 고려군 선봉장 이성계의 무공도 인상적이고 높이 살만하나 전쟁은 이성계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고 고려 병력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긴 했지만 수가 40,000명에 불과했다. 홍건적의 난 당시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간신히 고려군 숫자 200,000명을 채웠지만, 이 수는 말 그대로 고려에서 유생들에 노비들까지 움직일 수 있는 남성들은 다 징집하여 구성한 병력들이었다. 당시 만 26세의 이성계가 가별초를 이끌고 선봉장으로서 전공을 세웠으나 총지휘관은 정세운이었다.[45]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하다는 이성계의 주장도 객관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농번기에 수 많은 장정들을 군대로 끌고 갈 경우, 당연하지만 안 그래도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으로 초토화된 고려 내부의 식량 사정이 더 악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기후 또한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시기였다. 여름에는 온갖 질병과 함께 음식도 쉽게 상하며, 습할 경우 활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특히 장거리 원정 공격이면 보급이 중요한데 병졸들과 군량이 장마철에 비를 맞으면서 오랫동안 행군하면 질병이 크게 돌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당시 요동은 무주공산도 아니었고[46] 어찌저찌해서 요동을 결국 점령해서 버틴다고 해도 계속 버티려면 겨울 동안 보급이 꾸준히 받쳐줘야 하는데 당대 고려가 그러한 보급을 위생적이고 안정적으로 계속 감당해줄 수 있을지 부터가 지극히 의문인 상황이었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에도 요동성은 막상 이성계가 직접 함락시켰지만 군량미가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물러났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이미 요동성을 함락시켰던 경험이 있는 이성계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요동정벌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이러한 수성의 어려움과 당대 태조 주원장과 명군의 성향을 생각해봤을때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고도 주원장의 분노를 사지않고 명군과의 지루한 싸움에서 마지막까지 싸워 이길 가능성은 처음부터 굉장히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명나라는 팽창정책을 진행 중인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파양호 전투로 한족(홍건적)의 서열 정리를 끝내어 내환의 요소는 상당 부분 사라진 상황이었다. 위화도 회군 시점에선 숙적 북원 또한 상당히 박살난 상태였고, 명나라는 주변 정리를 얼추 끝낸 뒤라 요동성 쪽으로 군사력 집중이 충분히 가능했고, 더해서 강남과 화북의 어마어마한 생산력까지 함께 움켜쥐고 있었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조차 중국을 상대할 때 화북과 강남이 각기 다른 왕조(금과 남송)로 나뉘어 있었던 행운이 뒤를 받쳐줬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47] 다만 원나라를 계승한 북원은 멸망시켰지만, 칸국들이 건재해서 계속 명나라를 괴롭혔다.
심지어 고려가 가진 병력의 질이 좋았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군사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고려는 사실상 국왕의 권위에 의존한 토호들의 사병들이 정규군 역할을 하면서 군대를 꾸렸다. 고려군은 앞서 예시로 든 가르친링의 토번군과 비교해도 상태가 더 안 좋았다는 것이다. 토번군의 경우, 그저 당나라군이 더 강했을 뿐이지만 고려군은 이성계가 회군 직전에 군량이 부족하여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최영은 요동을 점령하면 군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막연하게 대답했다. 또 당시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 일파는 한반도로 도주한 세력이었다. 다만 이 홍건적 일파가 동계홍건군 중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중로군이었고, 이들 동계홍건군은 훗날 명나라 건국의 주체 세력이 된다. 그리고 왜구가 대규모 공세를 펼치고, 다량의 전함을 운용했다고 하지만 중세 일본 함선의 특성상 많아봐야 수만 명이며, 최대로 잡아도 20,000명 ~ 30,000명 내외의 침공이다. 이것조차 제대로 못 막아내서 개경이 함락되고 남해안이 쑥대밭이 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이런 성적표를 받았다는 것은 전쟁, 특히 중세 시대 전쟁의 경우 일반적으로 방어자가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려군의 전투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만약 북원을 치러 간 명나라의 15만 병력이 북원을 부순 후에 고려의 공격을 그냥 경고성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짜 침략 시도로 판단하여 고려로 전면 진공했다면 이를 고려가 막는다는건 객관적으로 봤을때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48] 무엇보다 요동정벌 이후 상대해야할 명나라의 군사력이 고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 어마무시한 수준이었다. 현지인들의 민심이 고려쪽으로 확실히 돌아서려면 명군을 몇 차례는 격파해야 했을 테고, 50,000명에 불과한 고려군으로 그 몇 배가 넘는 명나라 정예군과 야전에서 정면 대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결국 이성계는 정면 충돌을 피할 공산이 큰데 명군이 요동 수복이 아닌 전격전으로 치중할 경우 고려로 들이닥칠 것이고, 요동과는 별개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명군이 한반도에 그대로 진주해서 주둔했을 가능성도 크다. 사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에 원정까지 가서 대도시(카라코룸, 상도 등)들을 잿더미로 만들고도 물자가 남아돌아 베트남과 티베트에도 교전을 거는 한편 고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구가 하도 설쳐서 홍건적에게도 개경을 포함한 중요 도시들이 함락될 정도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성계는 바로 보급부터 걱정할 정도로 물자가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심지어 명나라는 결국 만주 지방에 대한 공세[49]에도 성공해서 요동 주변 여진족들을 상당수 복속시키게 된다. 더구나 몽골 세력은 적어도 군사력면에서는 고려보다 약체로 단언하기 힘들었으며 외형적인 전력으로는 만주족이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할 때보다 강했던 적이 많다. 또 군사적인 중요성을 가진 고려군의 화기[50] 역시 이 때까지는 압도적으로 우수하다고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당시 명군과 교전했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때 병종에 있어서 특별히 고려군만의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외 상대적인 비교를 하기 위해 무장의 질이나 병력의 규모, 보급 능력 등을 살펴봐도 딱히 고려군만의 우월성이 보이지는 않는다.[51][52]
참고로 명군과 교전한 몽골의 북원과 베트남의 호 왕조 등은 패배했고 엄청난 피해[53]를 입었으며 넘치는 보급으로 화포를 사용해 도시를 초토화시키던 당시 명군을 생각하면 고려, 조선도 이기든 지든 많은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성계 역시 명장이니 매우 잘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명군을 공격한 대표적인 명장인 누르하치 역시 명군의 무장 상태들을 고려하여 명군이 약체화되어가고 있을 때 움직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명장이라고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누르하치는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좋은 관리가 부임하여 명군의 무장과 보급이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 같으면 황제의 삽질로 해고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긴장 상태에 있었던 이성계와 이방원 역시 간간이 정탐을 해서 나온 결론이다. 물론 구체적인 방안으로 명나라와 긴장 상태가 높아지던 국가들에 명군의 병력 대부분이 묶이는 순간을 노리면 어떻게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교통과 통신 수준으로는 그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며 설사 잡을 수 있었어도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상황이 이미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구체적으로 볼 때 명나라가 고려의 요동 공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대몽골•여진 정책을 고려와 명나라 양국이 어떻게 수립하는지, 그 외에 명나라가 서방이나 남방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얼마나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여길지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적인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국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원, 베트남, 티베트 등과 적대하면서도 요동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보내기까지 한 마당에 명군과의 충돌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고려가 요동을 공격해 점령한다면 명나라의 주적에 바로 고려가 포함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팽창주의적 성향을 가진 명나라가 사방에 배치한 군사력을 고려에 모두 투사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고려의 사정은 명나라의 예상보다도 좋지 못했다. 고려가 여요전쟁이나 윤관의 여진 정벌 때처럼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더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여말선초의 막장을 겪은 고려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세는 50,000명 남짓이었다. 명 태조가 밑에 서술된 병력을 투입한다면, 고려가 비록 명군의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단기간에 어떻게 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러면 "장기적으로 가면 되지 않나?"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보급도 좋지 않고, 거기에 고려 내부에도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으며, 명나라가 팽창주의를 천명해 사방에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려 역시 얼마 전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왜구가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 중국사나 일본사를 보면 일본의 세력 역시 상인들을 통한 정보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주력군이 명군과 교전하느라 묶이는 신세가 된다면, 왜구의 횡포가 더욱 심해질 수 있었다.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였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000~6,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나라는 요동 지역에 150,000명의 군사력과 최소 400,000명이 넘는 인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나하추 항복 직전과 고려의 2차 요동 원정과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무렵에는 13위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일단 65,000명 이상의 병력을 요동 방면에 투입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 정도만 해도 고려의 공요군과 맞먹는 수치이다. 그래도 쪽수는 비슷하니 공요군이 어찌어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한 숨 돌린 공요군에게 달려들 것은 북원을 치러 갔던 남옥의 대군 150,000명이었다. 물론 북원과의 전쟁에서 소모되었을 것이 자명하지만, 공요군 역시 요동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해야 한다.
설령 이것도 저 멀리 후룬베이얼에서 달려 올 명군의 피로를 이용한[54][55] 각개 격파라든지 어찌저찌 이겼다고 가정하자. 고려 5만 대 명나라 15만이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성계가 잡아먹은 병력은 북원을 멸망시킨 남옥의 15만 대군이다. 남옥의 15만 대군은 사실상 명나라의 최정예 주력군이다. 이런 강군이 박살난다는 것은 이성계가 이끄는 공요군이 북원군 이상으로 위험한 군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 된다. 이러면 주원장이 적당히 물러날 리가 없으며 명나라와의 전면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고려는 5만 병력을 다 썼지만 명나라는 아직 동원할 군대가 남아 있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강역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요동은 거란, 여진 등 유목민족이 활약하던 지역이며, 주요 침략 루트였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선 대대로 골칫거리인 지역이었다.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공이야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도, 명군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문제나 당나라 태종마저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도 골칫거리를 미리 제거하자는 의도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지도를 보면 요동 지역만은 수도에 버금가는 대도시 혹은 행정 구역을 만들어놓았다. 요나라도 발해를 정복한 이후, 이곳을 중요시했고 만주에서 중원으로 사실상 이주하다시피 한 금나라도 요동 지역을 실질적인 영토로 통치했으며 이후 청나라도 요동 지역만은 중요시했다. 심지어 먼 훗날 일본 제국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을 얻자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걸 원하지 않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하여 일본이 요동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또 대표적인 친원 국가로 알려지고 왕실에도 몽골 황실의 피가 흐르는 고려의 대외적 인상, 우왕 책봉 당시 보여준 북원과 고려의 관계 등을 생각해 보면 북원이 막 몰락한 시점에서 벌어진 고려의 요동 공격을 주원장이 그냥 단순한 경고로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이며 고려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주원장이 요동 공격을 '경고성 공격'으로 치부하고 적당히 물러나 주는 것이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주원장이 앞서 말한 여러 상황 때문에 '고려가 원나라 세력의 구심점이 되려는 것 아닌가? 계승권을 주장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후자로 판단될 경우 고려의 기선 제압을 위해 침공했을 가능성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여몽전쟁 급까지는 안 될지 몰라도 병자호란 수준은 충분히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문제였으며, 모든 것이 주원장과 명나라 수뇌부의 판단에 걸렸는데, 거기에 고려를 걸고 내기를 하기에는 판돈이 너무 컸다.
5. 최영의 요동 공격 의지에 대한 이유와 목표
창작물의 묘사 및 대중들의 인식은 '요동 공격 = 요동 정복'이지만, 최영이 어떤 의도로 요동 공격을 시도하였는지에 대해선 기록이 없다. 때문에 최영의 의도 및 공격의 목적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론이 분분하다.5.1. 친원파 구세력과 친명파 신세력의 대립
고려 말 권문세족 집단은 원의 간섭기에 세력이 확장된 세력으로 공민왕의 숙청과 반원정책 이후로도 여전히 세력이 강성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중앙 정계의 기득권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이 살아있었고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와 같은 친명 신흥세력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된 요동-만주의 복잡한 상황과 명 태조의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코케 테무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명군을 격파하며 버티는 북원의 저력은 고려 지배층으로 하여금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이 과정에서 이인임을 비롯한 기존 세력은 북원과의 관계를 중시했고, 최영은 위에서의 명나라와의 마찰이나 성향과 친분 교류상 이인임과 같이 친원 정책에 찬성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이 두 세대 간에 동북아 판도에 대한 지향점의 차이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1310년대에 출생한 이인임이나 최영의 경우 그 조부 세대가 경험했던 남송 멸망 이전 시기 동북아 다자외교에 대해 직접 증언을 들었을 마지막 세대이고, 그러한 다자주의에 대한 관념적인 지향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반면 바로 그 아들 내지 손자 세대인 정도전이나 조준 등 1340~50년대생들의 입장에서 동북아 다자외교란 이미 먼 과거에 박제되어버린 유물에 불과했으므로, 원-명간의 전면적인 패권 교체는 막을 수 없는 만큼 이에 맞추어 고려왕조를 내내 괴롭혀 온 과다군비 체제를 청산하고 국내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만한 동인이 있었다.
여기서 이성계는 한반도 동북 지방 뿐 아니라 멀게는 간도-연해주 일대의 여진족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북원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성계의 기반의 존립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이 지역의 여진족 등을 통해 동북방 지역의 정세를 정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코케테무르가 죽으면 미래가 없는 북원이 불리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1388년은 남옥이 1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원의 숨통을 끊는 원정을 하던 상황이었다. 고려의 제2차 요동정벌도 이러한 외교적•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더 진군하지 않고 머문 것은 기상 문제와 보급 문제도 있겠지만 남옥의 원정 결과를 확인하고 움직이기 위한 것도 가능성이 높다.
5.2. 최영의 권력 강화와 이성계 제거론
앞서 보았듯 요동 공격에 있어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우왕과 최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우왕을 설득한 사람이 최영이었다. 즉 제2차 요동정벌은 최영의 의지로 이루어진 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영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을 원한 일에 대해 묘한 시각이 있는데, 제2차 요동정벌은 기본적으로 최영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즉 평화를 통해 명나라와 철령위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는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던 친이성계 일파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는 최영에게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으며[56] 최영은 요동 공격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57] 심지어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2차 요동 공격 자체가 최영 중심의 정국 구축에 최대 걸림돌인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절호의 수단 이라는 시각도 있다.[58]
실제로 앞서 보았듯 2차 요동 공격이 현실화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사람은 이성계였다. 또한 조민수 휘하의 좌군은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계림, 안동이라는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군사를 모집했던 반면, 이성계 휘하의 우군은 안주도, 동북면, 강원도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이는 비교적 적은 지역에서 군사를 많이 징발한 것으로, 이 군대가 몰살당한다면 이성계의 막강한 사병 집단은 끝장나게 된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를 죽이려고 명나라를 쳤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강한 주장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우선 《고려사절요》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묘사되는 최영과 이성계는 오히려 친분이 돈독한 편이었다. 최영이 비록 중간 중간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태조에게 대항한 적수로 규정된 조선시대에도 이런 기록이 작성되었다면 실제로 이성계와 최영은 꽤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런 우정도 권력앞에서 사라져 실제로 최영이 이성계를 죽이려고 했다손 쳐도 뒤에 살펴보게 되듯이 본래 요동 원정군을 지휘할 장수는 최영이었다. 따라서 순전히 이성계를 죽이려고 요동 공격을 시도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긴 하다.[59] 다만 고려 원정군은 사실상 토호들의 가병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최영이 갔다고 해도 명령이 통했을지는 의문이다. 가별초가 이성계의 명령을 들을지 최영의 명령을 들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우군의 징집 대상이었던 북방 지역은 고려 ~ 조선 시기 내내 정예병을 배출하는 산실이었고, 반면 좌군의 징집 대상이었던 지금의 경기와 3남 지방은 농업 생산과 세수의 핵심 지역이었다. 따라서 남부 지방의 생산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징집을 줄이고 정예병이 많이 배출되는 북방 지역의 징집을 상대적으로 늘린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큰 문제가 없는 정책이었다.[60]
그러나 이성계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원정을 벌였다는 것은 무리수라고 해도 최영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요동 원정 과정에서 우왕은 오직 최영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으며, 최영 역시 수차례 우왕과 담판식으로 요동 원정을 논의하며 정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요동 원정에 반대하던 이자송이 처참하게 죽었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최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만약 요동 정벌군이 요동 공격에 성공했다면, 이성계는 백성들로부터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건 물론이거니와 요동 방어를 위해 요동을 지배할테니 최영의 권력을 강화한다는 전제조건 자체가 틀어진다.[61] 반대로 요동 정벌군이 실패한다면 이성계는 제거할 수 있겠지만, 명나라와 강화를 해야할텐데 명나라는 강화 조건으로 전쟁을 주도한 최영의 신변을 넘길 것을 요구하거나 더 나아가 우왕의 퇴위를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이성계가 전쟁에서 지면 권력 강화 이전에 최영 본인의 목숨조차 위험해진다. 요동 정벌을 계획할 때의 최영은 우왕의 장인 어른이자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신하였는데 이성계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이렇게 위험한 도박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이성계의 몸은 이성계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 신진사대부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성계가 제거되면 새로운 나라는 고사하고, 신진사대부들도 함께 도륙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한다면 명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필수인데, 그런 명나라에게 칼을 들이대면 역성혁명을 성공해도 국제관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니 베트남의 호 왕조처럼 무위로 돌아가고, 요동 정벌을 실패하면 말할 것도 없으니 이겨도 져도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우왕 측과 이성계 측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두고, 우왕 측이 먼저 승부수를 던진 게 요동 정벌이라고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각이다.
5.3. 찍고 돌아오자
제2차 요동원정의 전략적 성공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 때 종종 나오는 주장으로 당시 최영의 목적은 불가능해 보이는 요동의 영구적인 점령이 아닌,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시위로서 한 번 찔러보고 온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위세가 점점 강력해지고 있었기에 요동의 점령은 불가능하지만 찍고 돌아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이를 통해 철령위 요구를 하는 명나라에 군사적 경고를 한다는 이야기이다.실제 제1차 요동원정의 사례가 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단순 시도도 아닌 이미 한 번 성공했고 부족과 보완점까지 배워왔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군사 전략상으로 본다면 이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다. 혹은 제2차 요동정벌이 영구적인 점령을 목적으로 했다고 해도, 전황을 고려해본다면 이와 같이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건 상황을 '전투의 승패'로만 따진다면 이는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딱히 이러한 전략적 구상에 대한 언급이 사서에는 없다.
5.4. 그냥 공격
딱히 별다른 의도 없이,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분개한 최영과 우왕 등이 순전히 이에 대한 반격으로 군사적 원정을 시도하고, 딱히 기습적으로 공격하고 돌아온다는 식의 구상도 없이[62] 요동의 점령을 원했다는 아주 일반적인 시각이다. 딱히 무슨 말이 나올 것도 없을 정도로 아주 스탠다드한 시각이다.[63]6. 전개
6.1. 2차 요동 원정군의 진군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어찌어찌 마침내 요동 원정군은 준비가 되었다. 고려 전역에서 준비된 군대의 병력은 38,830명이었으며, 이 군대를 지원하는 병력이 11,634명으로 도합 50,000여 명 가량이 되어 출정할 무렵 호왈 '10여만 명'이라고 일컬었다. 여기에 동원된 말은 총 21,682필이었다.군대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승진된 최영이었으며,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는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는 이성계였다. 당시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崔瑩) | ||||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 조민수(曹敏修) |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 이성계(李成桂) | |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 심덕부(沈德符) | <colbgcolor=#cccccc,#1f2023> |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 정지(鄭地) |
부원수(副元帥) | 이무(李茂) | 상원수(上元帥) | 지용기(池湧奇) | |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 | 왕안덕(王安德) | 부원수(副元帥) | 황보림(皇甫琳) | |
부원수(副元帥) | 이승원(李承源) |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 | 이빈(李彬) | |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 박위(朴葳) |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 | 구성로(具成老) | |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 | 최운해(崔雲海) | 조전원수(助戰元帥) | 윤호(尹虎) | |
계림원수(鷄林元帥) | 경의(慶儀) |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 이원계(李元桂) | |
안동원수(安東元帥) | 최단(崔鄲) | 배극렴(裴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 | ||
조전원수(助戰元帥) | 최공철(崔公哲) | 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 | ||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 조희고(趙希古) | 경보(慶補)·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 | ||
안경(安慶)·왕빈(王賓) | ||||
총 병력 50,473명, 군마 21,682필 |
이 부대는 서경(평양)에서 출발하여 진군하게 되었는데, 군대가 준비되기까지 우왕 역시 서경에 머무르며 징발을 독려하고 있었다. 마침내 군대가 출발할 무렵이 되자 최영이 우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라 행군에만 한 달을 끌게 된다면 군사 작전이 성공할 수 없으니 제가 가서 행군을 독려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의지하던 최영이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우왕은 불안에 빠져 최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우왕은 "그대가 떠나면 어떻게 정치를 의논하는가?"
라며 최영을 만류했고, 정 가겠다면 자신 역시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는 사이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는데, 최영은 자신이 서경에 남아서 일선의 군대를 감독할 터이니, 우왕은 개경으로 내려가라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하지만 우왕은 이런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선왕(공민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그대와 함께 있지 않겠는가?"
공민왕이 시해될 당시 최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牧胡─亂)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 있었는데, 우왕은 그 이야기를 하며 최영을 만류한 것이다. 사실상 고려의 군사력 전부를 북쪽에 투입한 상태에서 최영의 보호가 없다면 우왕은 위험했고, 또 원정군을 장악한듯 보이는 최영을 완전히 풀어두기에도 우왕은 불안했을 터이니 최영과 바싹 붙어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였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요동 정벌을 앞장서서 주창한 최영은 원정군에 합류하지 않고, 오히려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가 원정군을 지휘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이미 이때부터 위화도 회군의 불씨가 뿌려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 무렵 이성(泥城)[64]에서 온 어떤 정체불명의 사람이 근래에 요동을 다녀왔다면서, 요동의 병사들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다 나갔다는 말을 전하자 최영이 기뻐했다. 또 최영은 북원과 연락하여 서로 협공하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 그 무렵 북원은 남옥의 승리 이후 거의 패망하여 고비 사막으로 쫓겨나 근근히 버티고 있던 참이었다.
6.2. 명나라의 반응
당시 명나라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
《고려사》 우왕 14년 6월 #
제2차 요동 공격이 진행될 무렵, 명나라의 반응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홍무제가 고려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황제가 전쟁을 위해서 종묘에서 재계를 한다면 꽤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명사》 <태조 본기> 등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이는 조선시대 사가들이 위화도 회군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집어넣은 서술로 보인다.
그러나 명나라는 1388년 4월에 도착한 고려 사신이 철령위에 대한 주장을 하자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우기는 한편, 8월경 위화도 회군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자 무슨 술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미심쩍은 눈으로 동정을 살피는 데 주력했다. 고려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하다.
6.3. 시작되는 왜구의 공세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피해 상황 |
왜구가 세 도(道)를 침략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州)·군(郡)의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워도 장수와 수령 가운데 막아낼 자가 없었다.
《고려사》 <정지전>
《고려사》 <정지전>
고려의 군사력이 서경에 집중되고 북방으로 진군하는 사이, 이성계가 제기했던 문제 중 하나였던 왜구의 출몰은 현실이 되었다. 우왕 시기 수도 개경을 수차례 위협하고 수천, 수만의 군대로 고려 전역을 초토화시키던 왜구의 대공세는 진포 해전 및 황산 대첩의 대승리와 관음포 해전에서 정지(鄭地)가 거둔 승리로 점점 약해지고 있었으나, 명나라 동남 해안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그 세력은 건재했다. 황산 대첩 이후 왜구의 침략이 덜했던 것은 고려군에게 왜구가 대패하면서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므로, 고려 군대의 공백은 다시 왜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우왕 또한 뻔히 예상되는 '북쪽으로 신경을 쏟는 사이 벌어질 왜구의 침공' 을 모르지는 않았다. 우왕은 주력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는 와중에도 왜구에 대한 대비책을 꽤 세워놓은 편이었다. 경기도의 군사를 추려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서 왜구를 막게 하는 한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광보(李光甫)로 하여금 왜구에 대비토록 했다. 또한 요동 정벌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노예건 뭐건 모조리 징발하여 왜구와의 싸움을 막기 위해 내보냈다. 당시 우왕은 왜구에 대해 지속적으로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요동원정 이후에 초래될 군사적 공백을 막으려고 한다고 해도, 요동 원정군에 전력이 투입되는 한 왜구의 준동을 막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우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왜구는 고려 각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1388년 4월 21일, 왜구는 초도(椒島)[65]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수도 개경의 군사력은 공백 상태였고, 국왕마저 서경에 있었기에 봉화가 계속해서 울리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어 5월 13일에는 80척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왜구가 진포에 상륙하여 주변 지역을 초토화했다. 이에 우왕은 왜구를 막기 위하여 다섯 명의 원수[66]를 파견하는 한편, 전라도와 양광도에서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징발하여 왜구를 막으려 했으나 왜구는 양광도의 40여개 군을 무인지대를 밞듯 활보했다.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적을 막으려고 하지만 병력이 취약해 방법이 없다.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이성계나 최영 외에 왜구 내에서 명성이 혁혁한 고려 장수는 관음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정지였는데, 그 정지조차 요동 공격에 동원되었기에 왜구를 막을 장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왕은 분명히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2차 요동원정이 지속되는 한 이는 모두 미봉책에 불과했다.[67] 이런 왜구들은 위화도 회군 이후, 정지와 이희가 전장에 투입된 이후에야 소탕되었다.
그리고 우왕이 왜구에게 골머리를 썩고 있는 사이, 북쪽에서는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6.4. 원정군의 회군
최영의 부재속에 군대를 이끌고 나선 이성계와 조민수 등은 압록강을 건너가 1388년 음력 5월 7일, 위화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성계, 조민수 등은 우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물이 불어나 군대가 오도가도 못할 지경에서 수백명이 익사했으며, 군량미도 떨어져가 요동까지 가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현명하게 잘 사는 길은 큰 나라를 잘 섬기는 것인데다, 아직 명나라에 보낸 외교 사진 박의중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군대를 일으킨 것은 현명하지 못하니 어서 회군을 시켜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성계로서도 이미 보급 부족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요동을, 또다시 보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진격하려니 회의감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대신 환관 김완(金完)을 '과섭찰리사'(過涉察理使)로 임명해 원수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며 출진을 독려하게 했다. 종종 환관을 감찰사로 임명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성계, 조민수를 감시하기 위한 최영과 우왕의 판단이었을 수 있다.[68] 그러나 이성계, 조민수는 환관 김완을 되레 억류하고, 다시 한 번 아사자가 많고 군대가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최영과 우왕은 다시 이를 거절했다.
조정의 사람을 억류하고 회군을 요구한 시점에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반란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군대라고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니 원정군 내부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졌고, 그런 상황에서 이성계가 군대를 버리고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달아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고려 원정군의 절반은 이성계의 동북면 군벌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성계가 비록 고려에 공을 세워온 인물이지만 당시 그는 중앙 정계 인물이 아니라 외부인으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그와 휘하 장병들이 동북면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은 2가지 이유에서 원정군 진영을 혼란스럽게 했다. 첫번째로, 외지인 출신인 이성계가 고려에 환멸을 느껴서 동북면에서 독자 군벌세력으로 남거나 명나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이성계가 이탈하고 남은 조민수 휘하의 고려군만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는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소문은 조민수 휘하의 고려군이 심적으로 이성계와 함께하도록 몰리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 소문은 다분히 의도된 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여하튼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령관 중 한 사람이 이탈하려 든다는 소문이 돌자 군대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으며, 혼자 어쩔 줄을 모르던 조민수는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자신이 이탈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뒤 장수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고려사》 우왕 14년 5월 #
《고려사》 우왕 14년 5월 #
이에 장수들이 동의함으로써, 원정군의 회군이 결정되었다.
원정군의 회군에 대한 의견으로는 장맛비에 기인한 우발적인 일이었다는 일반적인 견해[69]와 철저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라는 의견[70] 등이 있다. 이후 전황을 보면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본거지인 동북면에서 여진족을 포함한 병사들이 이성계를 지원하기 위해 1,000여명이나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회군의 속도를 고려해보면 회군을 하며 동북면에 소식을 알리고, 소식을 들은 동북면의 군사들이 달려왔다기 보다는 회군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동북면의 군사들이 이동한 것이니, 양쪽에서 협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1차 회군 요청이 이루어진 직후, 우왕이 왜구를 막기 위해 남은 군대를 이동시켰는데, 회군 요청을 통해 정보를 얻은 이성계가 2차로 회군 요청을 하는 동시에 군대를 진격시켰다는 것이 이 주장의 일부이다.
설사 회군 자체는 위화도에서 결정된 일이라고 해도, 그전부터 이성계의 세력이 회군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성계는 이미 요동 공격 이전부터 노골적으로 이를 반대하고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면 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불온한 감정을 가졌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고, 이런 점은 최영 또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영은 요동 공격에 나선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삼을 계획이 있었는데, 위화도 회군이 너무나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기에 이를 실행하진 못했다. 최영이 장수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야 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꼈다면 군대는 출발 직전부터 불만에 가득 차 있었을 수 있고, 위화도에서 어려운 상황을 당하자 염두에 두고 있던 회군 계획이 빠른 속도로 실행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71]
준비된 계략이었던 우발적이었건 회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의 사기를 잃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만들며 바람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려사》의 <남은 열전>에 따르면, 당시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까지 갔던 남은과 조인옥(趙仁沃)이 회군하자는 의견을 내어 필요한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72][73]
이성계 측에서 만든 상소와 사료에서는 "아사자, 탈영자, 병자가 속출해 전투 수행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전력이 저하되었으니 철군을 허락해달라"고 했다지만, 이후 회군 과정에서 보이는 매우 신속한 행군 속도와 그 후의 개경 공성전에서 보여준 공요군의 높은 전투력[74]을 보건대 이는 이성계 측이 매우 과장해 엄살을 피운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만약 공요군이 진짜로 사기와 규율이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었다면 열흘 넘게 강행군을 하는 것은 분명 무리고, 그러한 강행군을 하고 와서 개경을 간단히 함락시키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 즉, 회군 직전의 공요군은 실제로는 멀쩡한 전투력과 사기를 가진 상태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던 최영이 자기가 편성해준 보급량과 그 정도 보급을 받고 아직 한 번의 교전도 하지 않은 군대의 상태가 어떨지 몰랐을 리가 없었기에,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이는 핑계로 회군을 요청하는 이성계에게 더욱 분노했을 것이다.
6.5. 파죽지세의 진격과 개경 전투의 시작
요동원정군의 회군 루트 |
일단 회군이 결정되자, 원정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다. 군대가 1일 30리를 간다해도 12km인데, 당시 원정군의 회군 루트에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등이 있어 도하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더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원정군의 총 숫자는 50,000명으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숫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400km를 10일만에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다. 내키지 않은 채로 북상하던 원정군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 데 20일이 걸렸음을 고려하면, 회군 당시에는 두 배 먼 거리를 오히려 절반의 시일만에 남하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속도라고 한다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진격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서에 묘사된 사냥을 하면서 천천히 갔다는 언급은 과장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이렇게 하여 5월 22일 출발한 군대는 6월 1일 수도 개경 근처에 도착했는데, 본격적인 싸움은 6월 3일에 벌어졌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비록 기록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6월 1일 당시 도착한 부대는 경기병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발대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선발대 도착 불과 이틀 뒤에 주력군이 도착하여 전투를 치렀다는 점에서 볼 때 후발대의 속도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기록에서는 회군 당시 고려 백성들이 회군 병사들에게 술 등을 나누어 주며 환호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서술은 보통 과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회군의 속도를 고려하면 이동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이나 반발을 받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75]
후발대의 도착에 앞서, 6월 1일에 도착한 선발대는 위화도에서 억류했던 환관 김완 편으로 조정에 글을 전했다.
현릉(玄陵)(공민왕)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동안에는 천자가 무력으로 우리를 억누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영이 총재(冢宰)가 되자 조종(祖宗) 이래로 큰 나라를 섬기던 뜻을 망각한 채 먼저 대군을 일으켜 상국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한여름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니 온 나라의 농사가 결딴나고 왜놈들은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내륙 깊이까지 침입해 약탈을 저지르며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고 우리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게다가 한양 천도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필시 나라가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1일 #
《고려사》 우왕 14년 6월 1일 #
이렇게 글을 전달한 선발대는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는지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6월 2일 우왕은 병사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을 보내 다음과 같은 글을 전했다.
명령에 따라 출정했으면서 진군하라는 지시를 위반한 데다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려하니 또한 이는 인륜을 어기는 짓이다. 이러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부족한 이 몸 때문이긴 하나 군신(君臣) 간의 대의는 진실로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원칙이니 글 읽기를 즐기는 경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는가? 그대들이 최영을 지목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최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경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수고한 것 또한 경들이 잘 아는 사실이다. 이 교서를 받아보는 즉시 쓸데없는 망상을 버리고 개과천선하여 끝까지 함께 부귀를 보존할 것을 생각하라.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일 #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일 #
한편 우왕은 여기에 더해 외교관인 설장수를 보내 다시 한 번 회유를 시도했으나, 군사들은 도성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며 굳게 버티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동북면에서 여진족들이 포함된 병사 1,000여 명이 도착하여 원정군의 세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위화도 회군이 벌어질 당시 고려의 주력은 모두 원정군에 속했으며, 그나마 남은 병사조차 왜구를 막기 위해 파견이 된 상태였다. 원정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군하자 우왕과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이동해 모병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창고를 털어도 별다른 전력은 모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계는 요동 방면에 원수들의 군사력이 집중되었을 때 회군을 단행했으며, 조민수 등은 이에 협력했고 설사 불만이 있는 원수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원수들이 대세에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최영과 우왕은 병력의 부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위화도에 병력이 집중된 상태에서도 왜구 토벌에 5원수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시점에서도 우왕과 최영이 컨트롤할 수 있는 병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우왕과 최영이 별도로 다룰 수 있었던 병력은 추정이 어렵지만 모두 합하면 8,000여 명이 되지 않을까 추정되는데,[76] 앞서 말했듯 대부분이 왜구 토벌을 위하여 나가 있던 상태였기에 그 8,000명을 모두 모을 수도 없었다.
만일 우왕과 최영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모든 병력을 소환하고, 또한 징병을 통하여 어떻게든 10,000명 이상으로 병력을 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전투 병력이 30,000명을 넘는다고 하나 공격측과 방어측의 상황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싸울 수는 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우왕과 최영이었다. 회군을 감행한 원정군은 요동 공략의 난점이라는 명분은 있었으나, 엄연히 왕명을 거역한 입장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왕은 실제로 원정군에 대하여 회유 작전 또한 시도하고 있었기에, 싸움이 생각만큼 쉽게 끝나지 않고 길어진다면 원정군은 분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무시무시한 속도의 회군은 그런 변수를 모두 없애버리고 말았다. 이성계급 장수가 하루에 군사가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하지 못할 리가 없고, 시일이 길어지면 결국 불리해지는 건 이성계 쪽이니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회군하여 최영과 우왕이 대비할 시간 자체를 막아 버린다는 의도도 추측된다. 왕명을 통한 회유를 씹은 이유도 그렇고.
마침내 6월 3일, 500여년 고려 왕조의 존망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6.6. 개경 공방전
▲ 고려군의 갑옷이었던 경번갑 |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지를 구축한 다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유만수(柳曼殊)를 숭인문으로 들여보내고, 좌군을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여보냈으나 최영이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7일 #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7일 #
원정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개경 동쪽의 숭인문 밖, 좌군은 개경 서쪽의 선의문 밖에 주둔했다. 좌•우군은 이 나성(羅城)을 돌파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최영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좌•우군의 첫 번째 공세를 막아냈다. 당시 원정군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회군했기 때문에, 공성전에 필요한 장비를 전혀 챙겨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의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의 높이는 27척, 두께는 12척이라고 했는데 이는 높이 8.1미터, 두께 3.6미터에 해당한다. 별다른 장비없이 함락시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우군에 속한 유만수(柳曼殊)의 패배에 대해 이성계가 유만수가 나가기 전부터
저 놈 눈은 큰데 광채가 없고 담력도 없으니 패배할 것이 뻔하겠다.
라고 말했다는데, 이성계같은 명장이 쿠데타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질 것이 뻔한 장수를 일부러 내보냈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는 데 이건 유만수의 가문을 봐야한다. 유만수는 고려 초기부터 유력 문벌이었던 문화 류씨이자 김준, 임연과 힘을 합쳐 최씨 정권을 끝장낸 무신정권기 문신 권력자 류경의 후손이며 아버지 유총도 우부대언을 역임한 고관 출신으로 아주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세족'이었다. 회군을 달성한 이상 국지적인 반격 정도로 패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뒷수습과 최영이 축출된 이후의 정국에 대응이 관건이었는데 개경의 세족들 앞에 동류인 유만수를 세워 향후 급진적인 지배세력 교체나 정치 보복은 없을 것이란 메시지를 던져준 것이다. 실제로 회군 직후에 숙청된 인사들은 최영과 소수의 측근 뿐이었으며 그외 고관들은 그대로 지위를 유지했다.
후술할 이성계의 기만전술까지 감안하면 유만수의 기량을 파악하고 있는 이성계는 정치적 메시지를 위해 그를 앞장 세우되 패퇴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채 대비책을 세웠으며 상기의 발언은 부하들 앞에서 여유있는 모습을 연출해 혹시 모를 동요를 막는 발언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유만수의 패배 이후 이성계는 아예 말의 안장까지 풀고 쉬면서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느긋하게 쉬는 모습을 연출했는데, 이후 기록을 보면 난데없이 개경 동쪽 숭인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적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이성계는 좌군과 협공했다고 되어있고 이후 좌군을 이끄는 조민수가 좀 더 안쪽으로 전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개경 서쪽의 선의문을 맡았던 좌군은 성 내 진입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유만수의 패배 이후 조바심을 내며 더 달려드는 대신 오히려 공격의 고삐를 늦춤으로써 숭인문의 병력이 더 급한 선의문 방면으로 빠지게 되었고, 이를 노린 이성계가 방어가 허약해진 숭인문을 더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좌군을 이끌고 선의문을 돌파했던 조민수는 영의서교(永義署橋)까지 나아갔으나, 여기서부터 최영에게 다시 밀리게 되었다. 영의서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조민수가 서쪽 선의문을 통해 진입했던 점으로 볼때 선의문과 남산 사이에 있었던 교각으로 보인다. 당시 개경의 수비군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징발하여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하는 바리케이드를 만든 참이었다. 따라서 조민수의 병력으로도 최영의 부대를 쉽게 깨뜨리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민수는 검은 색의 큰 깃발,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있었다. 최영의 군대는 흑대기를 든 조민수의 부대를 쫓아내는 분전을 했는데 바로 그 순간, 이성계의 군대가 나타났다. 이성계의 군대는 쫓겨가는 조민수의 흑대기 대신에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나니 그 위엄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개경 전투 요도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이상훈 |
당시 남산은 최영의 휘하인 안소(安沼)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나,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자 두려워한 나머지 속절없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성계는 이로 인하여 남산을 점령했는데, 개경 도성 내의 공간은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동•서 경계선이 이루어졌기에 남산은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이 남산이 원정군에 점령되면서 사실상 개경 전투도 승패가 결정되었다.
최영은 패배를 직감하고 물러났는데, 이 시점에서는 최영에게 당하던 조민수의 부대도 물러나는 최영의 부대에게 역공을 취했을 것이다. 최영은 궁궐의 화원(花園)에서 자신의 딸 그리고 사위인 우왕과 함께 있었고, 이성계의 군대는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했다. 이어 이성계는 암방사(巖房寺)로 올라가 병사들에게 '대라'(大螺)[77]를 불게 했다. 수백 겹으로 포위한 병사들이 대라를 불며 최영이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성계의 군대만이 대라를 불었기에 대라 소리만 듣고도 개경 사람들은 이성계의 군대가 온 줄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내 담장이 무너지자, 최영은 자신의 손을 잡고 우는 우왕에게 두 차례 절을 하고 곽충보(郭忠輔)를 따라 밖으로 나가 이성계를 보았다. 이성계는 최영을 보자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7일 #
《고려사》 우왕 14년 6월 27일 #
숨은 뜻을 해석하면, '최영 당신에 대한 직접적인 원한이나 분노는 없으나, 내 야심과 목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에 가깝다.
최영은 탄식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후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때 이색은 이성계를 만났고,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이색과 대화를 나눈 이성계는 군사를 전문(殿門)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개경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7. 결과와 영향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지금의 경기 고양시)에 유배된 후 합포와 충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개경으로 압송되어 순군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공료죄(요동을 공격한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마침내 왕권이 완전히 상실된 것을 실감한 우왕은 최후의 발악으로 환관들을 무장시킨 뒤 백주대낮에 이성계의 집에 쳐들어갔으나 역관광을 당해 폐위되고 말았다. 이후 모든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잠시 동안 허수아비 왕으로 어린 창왕(제33대)을 앉혔다가 공양왕(제34대)으로 갈아치운 뒤,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역성혁명이 성공해 5백 년 고려 왕조가 멸망했고, 새로운 5백 년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었다.이성계 이전에도 무신들이 고려의 권력을 쥐고 뒤흔든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성계는 이전까지의 무신들과는 다르게 명망과 신흥 유신들의 지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모두 결합한 초유의 군벌이었다. 그 후 위화도 회군에서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조민수의 도전과 정몽주(鄭夢周)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으나 자신의 실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대부들(조준, 남은, 남재, 정도전 등)의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이 모든 도전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기에 필요한 명분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었다.
또한, 명나라가 흥하고 북원이 망해가는 역사적인 전환기에서 나올 뻔한 고려의 마지막 북진 정책인 제2차 요동정벌이 엮여 있어, 한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자 흥미진진한 논쟁 거리(만약 요동 정벌을 그대로 강행했다면?)로 회자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요동 정벌을 무산시키면서 권력을 차지하여 새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는 훗날 자신이 국왕으로 재위했던 때에 정도전과 함께 다시 요동 정벌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반란으로 권력을 잃고 말았다. 한국사에서 요동 정벌은 '독이 든 성배'였던 셈이다.
8. 전투 경과
1388년- 5월 22일(을미일)
- 제 2차 요동 원정군 위화도에서 회군 시작
- 5월 24일(정유일)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인 성주(成州)에 있던 우왕이 서북면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의 보고로 원정군의 회군 사실 확인. 훗날의 정종 이방과가 성주를 떠나 이성계를 향해 이동함
- 5월 25일(무술일)
- 우왕과 최영, 남하 시작
- 5월 26일(기해일)
- 우왕과 최영, 밤중에 서경 도착
- 5월 28일(신축일)
- 우왕, 개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원정군이 지척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름길로 이동하기 시작.
- 5월 29일(임인일)
- 우왕, 아침 무렵 50여명의 측근들과 함께 개경 도착, 최영 전투 준비 시작.
- 6월 1일(계묘일)[79]
- 원정군, 개경 외곽에서 진지 구축 시작.
- 6월 2일(갑진일)
- 우왕, 진평중과 설장수를 통해 회유 작전 시도, 원정군 진지 구축을 계속함, 동북면 지방의 별도 군사들 1천여 명 도착, 최영이 개경의 거리에 바리케이드 설치 시작
- 6월 3일(기사일)
- 개경 공성전 발발, 개경 함락.
9.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위화도 회군/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10. 기타
- 위화도 회군과 유사하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023년 6월 24일 러시아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본진인 러시아로 역공격을 취한 적이 있다. 기사. 아무래도 한국사에서 전쟁 중 군대를 돌려 수도를 친 사건으로는 이 사건이 가장 유명하고 배경[80]과 과정[81]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위화도 회군이 이때 소소한 화제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이 점은 트위터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밖에도 혼노지의 변, 루비콘 강 건너기나 호루스 헤러시같은 드립도 있었지만 프리고진이 막판에 가서 꼬리를 말고 지리멸렬한 협상 끝에 사실상 항복하면서 촌극으로 끝났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프리고진은 이성계가 X으로 보이느냐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해당 반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바그너 그룹 반란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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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회군을 개시한 일자.[북한1] 북한 행정구역 기준 평안북도 신의주시 상단리[북한2] 북한 행정구역 기준 개성시 송악동[겸임] 문하시중.[5] 이것도 말이 50,000명이지 행군 및 강 도하 중 사망, 탈영, 실종된 병사들을 제외하면 40,000여명에 불과했다.[6] 우왕이 폐위된 것은 위화도 회군 이후인 1388년 음력 6월 미상일에 환관 80여 명을 대동하여 이성계와 조민수, 변안열의 사저를 급습한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7]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서경에서 위화도로 갈 때는 하루 10km씩 진군(19일 소요)했지만, 최영이 재빠르게 군대를 모아서 항거할 것을 우려하여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회군할 때는 무려 하루 40km씩 행군(9일 소요)했다. 참고로 위화도-평양과 위화도-개경의 거리 차이는 2배 정도 난다. 즉, 정벌에 나설 때보다 4배나 빠른 속도로 돌아와서 최영을 물리친 셈이었다. 참고[8] 이성계 등 회군 주도자들은 훗날 제34대 공양왕 때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으로 책봉되었다[9] 국내 번역명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10] 설사의 형인 설손(偰遜)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에 귀화했었는데, 이를 감안한 인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설손의 장남이 훗날 대명 외교전문가로 활약하는 설장수였다.[11] 대략적인 내용.[12]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김경록[13] 《명사》(明史) 권 129, '納哈出將士妻子十余萬屯松花河'[14] <1362년 이성계와 납합출의 전투>, 강수정.[15] 해마다 말 1,000여 필, 금 100근, 은 10,000냥, 우량마 100필, 포목 10,000필 등[16] 먼저 항복했던 나하추의 옛 부관.[17] <고려 우왕 대(1374년 ~ 1388년) 정치 세력의 연구>, 강지원[18] 지금의 중국 지린성과 랴오닝성 동남부 지역[19]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20] 지금의 중국 장시성 상라오시[21]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박원호[22]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박원호[23] 한족 통일 왕조가 일으킨 한반도 정복전쟁은 전한과 고조선의 전쟁, 신나라, 후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와의 전쟁이었다. 그 두 전쟁도 쉽게 이기지 못해 수나라는 망했고 당나라 역사상 최고의 황제 이세민도 여러차례 가로막혔다. 나당 전쟁 이후 당나라는 중간의 발해 존재 덕에 한반도를 넘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해에 대한 정복전쟁을 벌이지도 않았다.[24] 以小逆大其不可(이소역대기불가).[25] 夏月發兵其不可(하월발병기불가).[26] 擧國遠征倭乘其虛(거국원정왜승기허).[27] 時方暑雨弩弓解膠大軍疾疫(시방서우노궁해교대군질역).[28] 가을은 수확기. 즉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가을로, 이 때 미곡이 풍부해지며 비례하여 군량이 가장 풍족해진다. 반대로 농번기인 여름에는 장정들을 동원해 병사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한 해의 농사를 망치는 지름길이었으며 가을에 비해서는 보리 등의 구황작물을 제외하면 미곡이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또 가을에는 날도 선선해지므로 더위에 탈진할 일은 줄어들게 되며, 따라서 최대 효율로 행군하여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된다. 반대로 푹푹 찌는 여름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앞의 4불가론에서도 '농사'와 '기후'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물론 이성계는 정 공격하겠다면 하며 자기 입장에서의 차선책을 내놓은 것이었으나...[29] 당시 명나라는 신생국인데다가, 주원장과 함께 홍건적 시절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수들이 잔뜩 있었기에 군사들의 기강도 어마무시했다. 홍무 연간 명나라는 10만~2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수도 남경에서 수천km나 떨어진 몽골 초원 지대에 수차례 투사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30] 대표적으로 건국 초기 조선의 실세였던 정도전이 노골적으로 반 명나라 스탠스를 취하자 홍무제는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당장 압송해오라고 지시하였지만 이성계는 이에 굴복하거나 조아리기는 커녕 배 째라며 뻗댔다. 결국 빡친 정도전이 제3차 요동 정벌 이야기까지 꺼내는 지경에 이르렀고, 홍무제 또한 저러다 쟤네 진짜 쳐들어오는거 아니냐며 잔뜩 날을 세울 정도로 조선과 명나라는 살벌한 상황까지 치달았었다.[31] <고려 우왕 대 이성계와 정몽주 • 정도전의 정치적 결합>, 김당택[32]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이형우[33]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실제 가능성은 매우 낮다. 명나라가 북방지역에서 별 다른 군사활동을 하지 않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하추고 북원이고 철저히 정리한 후에 본격적으로 고려에게 대놓고 땅내놓으라고 난리친 것인데 그 정도의 군사적 대비를 안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 시기의 명나라보다 몇배는 상태가 안좋았던 원나라의 동녕부에 대한 공세도 식량 창고 하나 태워먹자마자 실패로 끝났다.[34] 설령 점령에 성공한다 해도 전쟁은 경작지를 개박살내기 딱 좋은 짓거리다. 역사적으로 점령지에서 경작물을 추수해 보급을 충당한 사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사실 경작이라는 단어가 그럴 듯해서 넘어가는 것이지 이거 약탈로 보급한다는 소리다.[35] 왜구 따로 정규군 따로가 아니고 왜구가 편성되면 곧 정규군이었다. 오히려 징발된 농민들 같은 일반인들에 비해 살상을 일삼는 왜구는 그 잔학성으로 악명이 높았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계기들 중에 하나가 왜구 소탕을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또한 여말의 일본은 남북조 시대로서 두 가문의 천황이 양립해 대립하여 중앙이 몹시 어수선해서 변방의 왜구가 제대로 통제되지도 않았다.[36] 《고려사》 기록에는 200,000명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닐 것이다. 고려로 넘어온 홍건적들은 거의 망한 상태라 만만한 고려로 도망쳐온 것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대군을 끌고 왔다면 넘어오기도 전에 상당한 숫자가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나라를 세운 군웅은 대부분 다 홍건적 출신인데다, 홍건적이 보급 문제를 우려해 속도전으로 수도 개경까지 접수했고 고려군이 이들로부터 원나라 황제 옥새까지 회수했는데 그 상징성을 감안하면 이들을 마냥 도적떼로 볼 수만도 없다. 고려에 처들어온 홍건적들은 홍건적 동계홍건군 중에서 세력이 가장 강했던 중로군으로 고려에서 거의 전멸당했지만 이들 동계홍건군은 훗날 명나라 건국의 주체 세력이기도 했다. 명나라에서도 이 군대가 고려에서 대패당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지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이때 고려로 쳐들어온 군대의 주원수, 즉 성은 '주씨'이고 직책은 원수인 인물이 이후 전혀 기록이 없는데, 주원수가 명 태조 주원장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이때 주원장은 동계홍건군 강회군 소속이었기에 그럴 가능성은 낮다.[37]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북송과 금 양국간의 전쟁 및 평화교섭을 기록한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정사의 기록이다.[38] 중국 학자들은 나관중이 실제 주원장 휘하 군인으로 파양호 대전에 참전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39] 송국공(宋國公) 풍승. 명(明)왕조 1등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6명의 공작(公爵)들 중 한 명이었다. 주원장은 태자가 급사하자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풍승이 위협이 된다고 느꼈는지 훗날 주원장에게 처형당했다.[40] 남옥과 함께 주원장이 총애하던 장수였으며, 며느리가 주원장이 가장 아끼던 딸 수춘(壽春)공주였다. 남옥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필과 함께 출로를 모색했다는 고변이 주원장에게 들어갔다. 어느 날 주원장이 부우덕에게 그의 두 아들을 데려오라 했으니, 누군가 이르기를 이는 두 아들을 죽여서 데려오라는 뜻이라고 했다. 부우덕은 피가 떨어지는 두 아들의 목을 가지고 주원장에게 갔다. 그리고 주원장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자결했다.[41] 주원장은 남옥을 일컬어 "나의 중경(仲卿)이며, 약사(藥師)다"고 할만큼 주원장이 아끼던 명장이었다. 중경(仲卿)은 전한 무제때의 명장 위청, 약사(藥師)는 당나라 태종때의 명장 이정을 말한다. 1388년 남옥은 총사령관으로서 15만 대군을 이끌고 북원 정벌에 나섰다. 부이르 호수에서 북원 군대를 대파하고, 마침내 쿠빌라이계 북원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훗날 주원장에게 처형당했는데, '남옥지옥'(藍玉之獄)으로 불리는 이 대옥사로 인해 남옥과 연루되어 처형당한 자가 무려 20,000명이었다.[42] 다만 명나라도 완전히 강력한 상태는 아니었다. 명나라도 사실상 왜구와의 전쟁 상태였다. 고려 말기 진포해전으로 시작해서 황산대첩으로 마무리하며 왜구의 주력은 밀어냈으나 명나라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주원장은 최측근인 탕화까지 보내서 대비책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고, 명나라 전기 내내 왜구들에게 털렸다. 명나라는 재정상태가 좋은 강남 지방이 왜구들에게 계속 털리면서 국고에 부담이 갔고, 중국 동남 해안은 사실상 통제불능 상태였다. 영락제 시절 명나라가 왜구를 대파했다며 자랑스럽게 기록했을 때, 왜선이 31척이었고, 왜구들 수는 2,000명이었다. 왜선 500여 척을 침몰시키고, 그 500여 척에서 육지로 상륙한 왜구들과 내륙에 있던 왜구들까지 합한 왜구들을 몰살시킨 진포해전과 황산대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은 16세기 임진왜란때까지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을 겪지 않은 반면, 명나라는 훗날 단지 53명에 불과한 왜구들이 국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제2수도인 남경까지 공격하여 4,000~5,000명의 사상자를 내는 일까지 발생했다.[43] 그뿐만 아니라 그 병력들 대부분이 기병이었다.[44] 홍건적으로도 불리지만 홍건군으로도 불린다. 도적떼로 폄하돼서 그렇지 엄연히 명나라를 건국한 세력이자 주원장의 친위세력으로서 주원장과 함께 생사를 넘나든 장수들은 대부분 이들이었다.[45] 사실 고려 말기에 진짜 능력있는 인재진들이 가장 많았을 때가 제31대 공민왕 때였다. 정세운, 김득배, 이방실, 안우 등을 비롯해 최영, 이성계가 있었고, 이인임마저 이때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신으로 타락하기 이전이라 인재진들의 다양함과 수는 우왕 때보다 단연 많았다. 물론 그런 공민왕 시기에도 이 인재들 전부가 고려에 입적하고 있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홍건적의 침공 때 개경 탈환을 주도한 4명의 원수는 총병관 정세운을 필두로 김득배, 이방실, 안우였다. 그런데 간신 김용이 왕이 정세운을 제거하려 한다며 나머지 세 원수에게 정세운을 죽이라고 부추겼고, 정세운이 살해당한 뒤 나머지 세 원수도 죽임을 당한다. 충분히 일군을 지휘할 수 있는 원수 4명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요동 정벌을 속행했을 당시 고려는 인재진들마저도 많이 감소했을 때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문관쪽은 아직 많이 남아있긴 했다. 정몽주를 위시한, 공민왕 시기부터 일하고 있었던 이숭인, 권근, 이색, 이첨,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아직까진 협력중인 신진사대부들이 있었고 이후 성장하며 두각을 드러내는 하륜, 우현보 등 사대부 출신 권문세가들에 무엇보다 아직은 하급 관료이지만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있었다. 정몽주와 이색 등 조선에 반대한 문신들의 당대 위치나 능력, 정도전, 하륜 등 훗날 조선에 협력한 문신들의 능력, 태종의 정치 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한 협상이 주가 되는 게 결과론적으로 고려에도, 최영과 우왕에게도 이로웠다.[46]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였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제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참고로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000 - 6,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나라는 150,000명의 군사력과 최소 400,000명이 넘는 인적 자원을 요동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던 것이다.[47] 당시 남송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몽골에게 손을 내밀어 몽골과 연합했고, 이 때문에 금나라는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까지 온전하게 군사를 동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금을 멸망시킨 후 몽골은 남송으로 말머리를 돌렸고, 수십 년간 전력을 다해 공격해서야 남송까지 멸망시킬 수 있었다.[48] 설사 경고성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명나라 입장에서는 내부 불만분자들을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겸 해서 고려와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다. 물론 주원장 본인은 명이 건국되자 내부 정리와 반란 세력 소탕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쟁할 수도 있다.'는 겁만 주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 또한 가능성이자 고려의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 주원장이 어떤 결정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주원장 이후 황제가 되는 영락제는 주원장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전적인 성향이었으므로 주원장 이후에도 고려가 명과의 충돌을 계속 피할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49] 아마도 정사 기준으로는 고려가 요동을 공격한다면 맞서게 될 군대이다. 고려와 여진족의 대결을 보면 여진족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다.[50] 참조링크. 다만 링크의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고, 화기 전문가가 아니며 한국 폄하적이라는 것은 감안하고 보자. 동아시아 고화기 전문가이자 로켓 공학 박사 채연석이 참여한 문화 콘텐츠 닷컴 글에는 이미 세종 때 중국 화기를 압도했다고 밝히고 있다.[51]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려는 홍건적 잔당한테도 수도가 털릴 정도였고 이성계도 적과 아군의 무장과 보급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무식하게만 싸운 것은 결코 아니다. 북벌을 준비하던 조선의 효종도 금군을 가지고 군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다 상태가 개막장이니까 북벌을 포기한 것처럼 이성계도 행군을 하다 군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군이 아주 형편 없었으면 승리 가능성도 있겠지만 당시 명군은 그야말로 승천하는 기세를 가진 군대였다. 정주민족의 군대가 초원지대로 원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보자[52] 이성계는 시기가 좋지 않아 활이 풀린다고 했는데, 이는 훗날 조선 후기의 박제가도 지적한 것으로 중국의 활은 사정거리는 짧으나 상시 사용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의 활은 그렇지 못하다고 단점을 지적했었다.[53] 몽골은 베이얼 호 전투에서 져서 수만 명을 잃고, 그 결과 카라코룸이 파괴당하게 되며, 베트남은 학살과 수탈을 당하다 명군의 1.5군 혹은 2군급 인물들에게 최고 지략가나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고전 끝에 간신히 독립했다.[54] 후룬베이얼에서 요동까지의 거리는 함경북도 온성군 부터 전라남도 목포시 까지의 직선거리 내외이다. 내연 기관도 없던 당시 15만 병력이 이동하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다.[55] 그러나 이건 고려도 마찬가지다. 고려라고 요동 현지에서 병력을 징집해서 막는 것도 아니고 결국 고려 본국에서 병력과 보급이 올라와야 하며 그 대부분의 인구는 삼남지방에 몰려있다.[56] 최영은 친원파다. 계통상으로 보면 외려 최영은 이인임과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57]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제도 개혁>, 김당택[58] <위화도 회군과 그 추진 세력에 대한 검토>, 강지언.[59] 전쟁터에서는 사령관의 권한이 일반적인 정치 세력을 초월하는 만큼, 최영이 일선에 나서서 원정 중 이성계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옳다면 최영이 원정군을 직접 지휘하며 기회를 봐서 이성계 제거 시도를 했어야 옳은데, 실제로 최영은 개경에 그대로 남아 출병하는 원정군의 배웅만 했다.[60] 달리 보면 이런 정예군을 맡길 정도로 이성계를 신임했다고 볼 수 있다. 위화도 회군 그 자체에서 보듯 정예병을 이끄는 장군이 마음을 바꿔먹어 중앙군을 공격하면 정부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해진다.[61] 정말 깊게 따져보면 요동 정벌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명나라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이때 이성계를 명 태조에게 제물로 바치는 식으로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번 언급한 것처럼 그 정도로 명나라가 넘어갈지도 의문이고, 원래부터 본인이 원정에 나서려했다가 우왕의 반대로 못간걸 보면 아닐 가능성이 높다.[62] 물론 전투를 치른 후 돌아오게 되는 그림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63] 이 경우, 최영이 그토록 제2차 요동정벌을 밀어붙인 건 북벌이 태조 왕건이 꿈꿨고, 공민왕이 시도했던 고려 왕조의 비원이었던 만큼 그 자신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살아 생전에 대업을 이루려는 공명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64]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군[65] 지금의 황해남도 과일군 초도[66] 이 중에는 조준도 있었다.[67]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이상훈.[68] 중국 명나라도 농민 반란이 빈발하는 17세기 무렵에 이르자, 황제가 장군들의 충성심을 믿지 못해서 그들이 행여나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 여러 군대에 환관들을 보내 장군들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69] <위화도(威化島)의 장마>, 변희룡[70]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이상훈[71] 이성계의 가족들의 경우에는 이방원이 대피시킨 것으로 전해진다.[72] "그는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 갔다가 회군 모의를 주도함으로써 이후 이성계 일파의 정권 장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한남, -고려왕조의 멸망-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96, 201쪽~202쪽.[73] 남은의 여론 몰이는 <정도전(드라마)>에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걱정하여 '회군'이란 내용이 쓰여진 밀서를 남은을 통하여 이성계에게 전달하고, 남은 또한 회군에 동의해 끝까지 회군을 망설인 이성계를 설득하는 내용으로 각색된다.[74] 물론 대부분의 병력이 비어버려서 최영은 급하게 징집한 민병대 수준으로 저항해야 하긴 했지만, 한양과는 달리 개경은 수도 방위전에서 외적을 버티고 격퇴한 적도 몇 차례 있을 정도로 수도의 성벽치고는 실질적인 방위 능력이 꽤 있는 편이었다. 왜구를 막기 위해 보낸 예비 병력만이라도 최영에게 있었다면 그렇게 빠른 승리를 보장하기 힘들었다.[75] 상식적으로 일단 한번 징집을 하고 나서 바로 다음 징집을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싫어한다. 게다가 당시 이성계의 인식은 "고려의 구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니 남부의 병력을 소환한다 해도 늦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회군하는 시점에서 막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위에서 양광도의 왜구 침입조차 "병력이 부실해서 막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을 상기하자. 백성들 입장에서도 전쟁 끌려나가 죽을 뻔했던 가족들이 돌아오고, 전쟁이 터지면 당연히 따라붙을 고된 노역과 납세가 취소되는데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76]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이상훈[77] 소라 껍데기로 만든 연주용 또는 군사용 악기의 한 종류[78]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성계는 나라의 주인이 되려는 자입니다."라고 경고를 거듭했지만 최영은 이를 이간계로 받아들여 무시했다고 한다.[79] 1388년은 5월 30일이 없는 년도.[80] 고려의 명나라 정벌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명령에 반기를 들은 점[81] 침공 군대의 회군과 조국에 대한 쿠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