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안동과 의성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내용은 안동·의성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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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전투 古昌 戰鬪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929년 (태조 12년) ~ 930년 (태조 13년) | |
장소 | 고창 전역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공세) 승 | 신라-후백제 연합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왕건 (고려 태조) 유금필 (고려 대장군) | 지휘관 견훤 (후백제 국왕) |
참전자 김선평 권행 장정필 | 참전자 참전자 불명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전사자: 8,000명 |
결과 | 고려의 승리 | |
영향 | 고려의 통일 주도권 장악, 후백제의 쇠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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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서기 930년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신라)의 견훤이 고창(古昌)(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맞붙은 전투.
고창전투는 사실상 후삼국 시대 최후의 승자를 결정지은 분수령이다. 고창 전투의 승리로 고려가 후삼국의 대권을 빼앗아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후백제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 수군을 통해 고려에 반격을 가하는 저력도 보였다. 확실히 후백제의 세가 꺾인 전투는 운주성 전투(934년)라 볼 수 있으나, 이후 백제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끝내 되찾지 못한 채 쇠락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보면 지극히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고창전투가 후삼국 시대의 승패를 결정지었고 평가할 수 있다.
2. 배경
고창전투 3년전에 벌어진 공산 전투(927년)에서 견훤이 대승을 거두고 후백제는 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며 고려에 대한 맹공을 가한다. 당시 신라는 사실상 후백제의 속국이 되었다. 통일 신라 9주 중 완주, 무주, 웅주, 강주, 양주, 상주의 6주를 점거했고, 나주도 재탈환하였다. 그리하여 겨우 한주, 삭주, 명주의 3주를 점거한 고려의 왕건에 비해 후백제 견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고려가 점령한 삭주, 명주는 변방이라 땅만 넓지 남방의 주들에 비해 경제력이 더 낮았던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명주도 독자세력을 구축한 성주 왕순식이 공산 전투 직후에야 고려에 귀부하면서 간신히 얻은, 느슨한 동맹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918년 왕건이 태봉의 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에 자신의 군사를 일으키려 할 정도로 반항적이었고, 그의 아버지인 허월을 보내고서야 귀부할 정도로 왕건이 경계하였다.이미 920년대 후반에 견훤은 지금의 경북 북부를 휘저으며 고려에 복속된 호족이던 의성부 태수 홍술, 순주(안동시 풍산읍) 장군 원봉 등을 격파하며 세력을 조금씩 넓히고 있었다. 왕건은 공산 전투의 피해를 만회하느라 한동안 제대로 된 대처를 못 하고 있었고, 드디어 930년 견훤은 상주에서 고려의 경상도 마지막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고창(안동 시내지구)을 점령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진군한다.
당시 후백제군이 워낙 기세등등했기에 왕건은 고창을 포기할 것도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유금필의 진언에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진군한다. 요약하자면 고창 포기 → 상주 완전 상실 → 후백제에게 북진 진격로 제공 → 호족들 대이탈 → 국가 멸망 테크. 고창이 완전히 후백제 땅이 되면 신라는 후백제한테 멸망이 확정될 정도로 위태위태해진다.
3. 전개
당시 고창에는 고작 고려군 3,000명이 주둔 중이었고, 이를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 그리고 속국화된 신라의 호족 지원군이 포위한다. 전사자를 보면 만 단위로 몰려왔던 듯 하다. 그리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왕건의 고려군과 대치한다.왕건은 질 것을 걱정하였는데, 죽령으로 달아나면 위험하다고 건의한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잇길을 닦으려고 했으나, 유금필이 도망칠 길을 미리 닦기보다는 본격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 그 뜻을 따라 고려군은 병산(와룡면 서지리)에 진을 쳤고, 후백제군은 석산(와룡면 서지리)에 진을 쳤다. 두 진 사이의 거리는 500보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가 3일 ~ 4일 동안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후백제가 우세했으나, 견훤에게 반감을 가진 고창 일대 신라 호족들이 고려의 편을 든다. 견훤이 927년에 서라벌을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인 사건에 대해 신라인들은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경애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왕비를 견훤이 겁탈(강간)하고 서라벌 물자를 대거 약탈, 서라벌 시민들을 대거 학살하는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러서 후백제에 대한 신라인들의 원한이 매우 컸다. 그래서 속국화된 신라 지원군들은 고창 전투 도중에 후백제가 밀리기 시작하자 고려군한테 붙어서 후백제의 뒤통수를 친다. 그틈을 타서 고려에서는 희대의 먼치킨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정예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에 총공격을 가해 견훤은 대패했다. 후백제군의 전사자만도 8,000명에 달했고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서 후퇴한다.
(안동시 북문동의 태사묘 전경)
이 때 견훤에게 반기를 든 고창의 호족 중 김행, 김선평, 장정필 3명은 훗날 3태사라 해서 고려의 공신에 봉해진다. 지금도 안동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사당인 태사묘(太史廟)가 있어 제사가 지내지고 있다. 그야말로 공산 전투의 복수요, 왕건으로선 죽음 근처까지 갔던 패배 이후 판세를 뒤집는 승리. 특히 김행과 김선평의 항복은 신라의 방계혈통이자 종친이 고려에 투항했다는 점에서 견훤의 정통성을 크게 흔들었다.
이 중 김행에 대해 왕건은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이라 하며, 김행이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지휘능력이 뛰어났음을 높이 평가여 권씨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후 김행은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김선평, 장정필도 각각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된다. 이들 안동지역의 세 공신을 모신 태사묘에는 하사품인 관모, 신발, 혁과대(가죽 허리띠) 등 관제복식 일습이 같이 보관되어 있고 보물 4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부는 공민왕대 등 고려 후기시대의 유물. 권행은 권씨 성을 하사받으면서 동시에 안동시(고창) 일대를 식읍으로 받았다.
4. 결과와 영향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전사자만 8천 명에 육박할 만큼 엄청난 대패를 당해 주력 병력이 궤멸당하고 기세까지 확 꺾여 주도권을 잃은 뒤 고려의 공세에 조금씩 밀리게 된다. 기록을 보면 고창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던 도중에 고려 성 하나를 함락하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 후백제는 이제 거의 다 먹었던 상주를 완전히 고려에게 빼앗기고, 소백산 일대를 고려에 넘겨야 했으며, 신라와 양주에 대한 영향력도 모조리 상실한 것은 물론 웅주와 강주 역시 고려군의 맹공에 밀려서 위태위태해지고 재탈환했던 나주도 유금필의 기습 공격을 당한다. 그나마 회심의 작전이었던 수군을 이용한 송악 공격이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엎질러진 판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끝내 후백제는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이전의 기세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후계자 문제까지 겹치며 결국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한편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모든 경상도 일대의 대부분의 영토들을 전부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켜 한반도 중북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기존 영토를 동남부까지 확장하여 경주에서 차타고 30~40분 거리인 포항까지 고려의 영토가 된다. 후백제의 영향력이 사라진 신라는 육지 영토 3면이 경주를 제외한 경상도 대부분의 땅을 흡수한 고려에 갇혀 수도 서라벌과 인근 동해안 영토만 지배하는, 말 그대로 초기 신라 수준의 도시국가 겸 일방면해국으로 전락하였고, 고창 전투, 운주성 전투 이후에 935년 경순왕이 항복할때까지 고려의 종속국이 되었다.
5. 안동이란 지명 유래
고창 전투 이후 고려에서는 동쪽(東, 신라)을 평안(安)하게 했다는 의미로 고창(古昌)을 안동(安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름 때문에 헷갈릴 수 있지만 보다시피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과는 전혀 상관없다. 한자로 봐도 완전히 다르고, 그 곳은 후백제의 중심지인 완산주 소속으로 내내 후백제 영역이었다.왕건의 입지 회복이 이뤄진 곳이라 고려 조정에서는 안동을 매우 귀하게 여겨서, 안동에 고려 4경(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서울)) 다음가는 대도호부를 하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수부가 생겨서 도호부 위에 상위 지역으로 편제했지만, 대도호부는 유수부랑 동격으로 친 것으로 보인다. 안동 대도호부 부윤과 수원 유수의 관등이 정3품으로 같았기 때문이다. 왕건의 대도호부후 하사는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 대한제국 선포 직전인 1897년까지 무려 960년 동안 안동은 대도호부 지위를 유지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경북 북부 일대는 개발 정책에서 소외되어 안동도 지방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경북 북부에서는 그 안동보다도 더 큰 도시가 없는지라 경북 북부에서는 여전히 중심지 노릇을 하고 있다. 경상북도청이 이전되면서 명목상이긴 해도 경북의 수부도시가 될 정도로 중요성은 인정받고 있다.
6. 대중매체에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다루어졌다. 167화(본격적으로는 168회)에서부터 171회까지 이어졌으며, 여기서는 신라 호족들의 도움이 승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창작을 더해, 후백제 집안 싸움이 커져서 백제가 패배한 결정적 원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난 공산 전투와 삼년산성 전투의 대승으로 승승장구하던 후백제는 기세를 몰아 상주 일대를 집어삼키려 든다. 한편 공산 전투의 대패로 아우 신숭겸을 비롯한 여덞 충신을 잃은것도 모자라 삼년산성에서 목숨만 부지한 수준으로 처참히 패배한 왕건은 복수심과 더불어 삼한통일의 주도권을 빼앗길것을 두려워해 맞출정을 하려드나, 병부령 최응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며 이를 반대한다. 결국 문소성을 비롯한 상주 대부분이 후백제의 영토가 되면서 삼한의 주도권은 후백제에게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날이 지날수록 강성해지는 후백제의 기세에 초조해진 왕건은 최응을 불러 이를 질책하나 최응은 침착히 자신의 계책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출정을 반대한 것은 후백제의 맹렬한 기세에도 고려의 아군이 되어줄 호족들을 솎아내기 위함이었다. 추가로 그는 서라벌에서 악행을 저질러 신라 왕실을 욕보인 패륜아라는 멸칭을 얻은 견훤과 달리 지난 전투의 고초 덕분에 왕건은 위기의 신라를 도우러 오다 고초를 당한 명군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얻었기에 신라에 대대로 충성한 고창은 고려를 도와 후백제를 칠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것이니 이제 반격의 때가 왔음을 알린다.
한편 상주 최후의 보루 고창이 중요한 격전지임을 알고 있던 견훤은 스스로 2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소식을 접한 왕건은 문무관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를 알린다. 지금까지의 치욕스런 패배를 갚아줄 절호의 기회에 장수들은 환호하지만 시중 김행선을 비롯한 대신들은 강성한 후백제의 군세와 아직 어느 편을 들어줄지 모르는 고창 호족들의 속내를 우려한다.
여기에 왕건 본인이 직접 출정할것이라는 의사를 보이자 정윤 왕무를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이를 만류하고 정윤을 보낼것을 청한다. 그러나 왕건은 죽고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것이라며 이를 일축한뒤 내의성령 최지몽에게 전투의 승패를 물어본다. 최지몽은 지난 전투를 통해 왕건에게 들이닥친 삼재가 모두 지나갔으므로 전투의 승리를 확신한다. 최지몽의 예언에 모든 대신들은 기뻐하고 왕건은 이번 전투에서 패배하면 살아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채 출정한다.
다시 상주 일대에선 태자 신검이 고창을 다스리는 3태사(고창성주 김선평, 별장 김행(권행), 장정필)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가득이나 서라벌의 일로 후백제에게 이를 갈던 태사들은 신검의 항복이 아니면 죽이겠다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서신에 분노해 완전히 고려의 편으로 돌아서버린다.
그렇게 전투를 둘러싼 양군의 작전 회의가 오가는데 고려군은 고창의 지형이 공산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착안해 지난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이 쓴 유인 전술을 쓰기로 하고 군을 셋으로 나눠 왕건이 이끄는 동군은 북쪽 방어를 맡고, 홍유가 이끄는 서군 제 1군은 견훤을, 유금필이 이끄는 서군 제 2군은 신검을 견제, 나머지 고창성 병사들은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을 동군에 포함시킨다.
후백제군은 견훤이 이끄는 군대가 태자 신검이 원래 정해진 때에 협공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유금필의 군대에 길이 막혀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신검은 일단 시간을 벌려 했으나 계속되는 아버지의 독촉에 결국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그러나 유금필의 고려군은 이미 매복을 마친 뒤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습해 후백제군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때, 동문 애술을 발견한 박술희가 활로 쏴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유금필의 허락을 받아 결투를 신청하고 애술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둘사이의 일기토가 벌어진다. 일기토가 진행되던 중 애술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자 신검이 종훈의 경고에도 무시하고 구달과 소달을 보내는 실책을 저지르고 여기에 참지못한 유금필이 직접 나서 둘을 죽여버린다. 가득이나 장수 둘을 보내버려 애술이 밀린다는 인식에 더해 보낸 장수들마저 유금필에게 처치되자 사기가 꺽일대로 꺽인 후백제군은 뒤이어 고려군이 일제히 들이닥치자 퇴각하고 만다.
본래대로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을 피해가는게 정답이지만 여기서 신검은 "길이 막혔다는 핑계로 여기서 내가 협공을 안 하면 아버지도 금강이도 전투에서 다 죽어버리겠지"라는 삐딱한 생각으로 유금필을 피해가지 않고 정말로 협공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이런 돌발행도에 유금필은 의아해하면서도 절호의 기회라 여겨 갈라산에 주둔 중이던 자신 휘하 부대를 반으로 나누어 박술희에게 갈라산 지역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왕건의 본대를 지원하러 간다. 지원군이 절실한 상황에서 신검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백제군 본대는 완전히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패배하며, 견훤은 금강, 박영규, 최승우 등과 함께 초라한 몰골로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간다.
왕건의 입장에서는 공산과 삼년군에서 당한 패배를 똑같이 갚아준 격. 이는 화공으로 박살나는 백제군을 지켜보며 "옛날에 저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야. 저 공산에서 나처럼 이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야." 라고 하는 왕건의 멘트로 드러난다. 왕건에게는 공산 전투의 완벽한 리벤지 배틀이었던 셈. 덤으로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포위되었을 당시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하라며 도발을 하고 약을 올렸는데, 고창 전투에서는 홍유와 배현경이 견훤이 화공으로 갇혀서 오도가도 못할 때 승리의 웃음까지 더해서 철저하게 견훤을 약올리며 조롱하여 자신들의 군주가 당했던 굴욕을 그대로 갚아준다.
"백제 왕은 목을 내어놓아라! 이미 돌아갈 길도 다 끊겼느니라! 어서 목을 내어놓아라!"(홍유)
"백제 왕은 어디 있느냐?!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배현경)
"백제 왕은 어디 있느냐?!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배현경)
고창 전투에서 한참 백제군이 박살나고 있는 때 3태사가 이제 백제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무너지고 있으니 백제 왕을 잡으면 된다고 하자 왕건은 "나도 공산에서 살아나왔소이다. 수만 명이 어우러져 싸우는 전장이올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백제 왕을 놓치는 수가 있소이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며 끝까지 방심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어이없게도 신검의 군대를 막고 있던 유금필은 이미 오래 전에 그곳을 빠져나와 고려군 본대에 합류한 상황인데 신검은 여전히 유금필이 막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움직이지 않았다. 유금필은 오히려 백제군 본대를 처참히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견훤도 신검의 군대와 대치 중이라는 유금필이 왜 여기 와 있냐며 당황해한다. 이 전투에서 유금필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백제군 병사들이 "유금필이다! 유금필이다!"를 외치며 줄행랑치기도 하고 금강 태자도 견훤에게 "어서 피하시오소서. 저 자가 유금필이옵니다." 라든지, "폐하, 피하시오소서. 유금필이옵니다. 저 자와 마주친다면 여기서 살아 나가기 어렵사옵니다."라고 말하는 등, 황제에서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백제군 전체가 유금필 한 명 때문에 벌벌 떠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그 전에 벌어진 삼년산성 전투에서 유금필이 보여준 대활약에 떤 나머지... 물론 이후로도 이 상황은 계속된다. 도망친 견훤 일행을 끝까지 추적한 것도 유금필이었다. 유금필을 본 견훤의 코멘트는 "나는구만. 아주 그냥 훨훨 날아다녀."그래도 총사인 금강은 매부 박영규에게 유금필 부대를 막으라고 지시한다.
유금필 부대에게 쫓기다가 화공을 당해 견훤과 최승우가 말에서 떨어지고, 박영규와 금강은 말에서 내려 견훤을 호위해 비참한 꼴로 탈출한다. 전투 전 고창성을 함락시키고 다음날 아침 낙동강 어죽을 먹자던 견훤은 어죽은 고사하고 불맛과 연기만 실컷 먹고 마신 것이다. 나중에 완산주로 겨우 돌아와서 대신들에게 말하길 "전사자만 8천이야! 8천! 8천! 이런!!!"
드라마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검의 군대가 합류하였다면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며 최응 역시 "만약 신검 태자의 군대가 움직여서 우리의 뒤를 쳤다면 전투 결과는 굉장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왕건 역시 신검이 군대가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군대는 포위당한 백제군을 지원하고 고려군의 뒤를 칠 수 있는, 한 마디로 전술적으로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규모도 1만이나 되는 대군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보면 움직이는게 당연하며, 만약 진짜로 유금필때문에 길이 막혔다고 해도 다른 길로 돌아서 가려는 시도라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초라한 몰골로 도망쳐 잠시 숨을 돌린 견훤은 함께 탈출한 최승우, 박영규, 금강과 자신의 모습을 깨닫자 껄껄 웃으며 지난 날 공산에서 왕건도 이러했을 거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서는 도와주러 오지 않은 신검에 대해 고심하며 "그 놈은 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 그 주변을 지나가던 신검군 전령이 견훤에게 딱 걸리고 말았고, 그 전령으로부터 더욱 속이 터질 소식을 듣게 된다. 신검이 자신을 도우러 오기는 커녕 문소성으로 후퇴를 해버렸는데, 돌아가보니 문소성마저 고려에 뺏긴 상태였다는 것이다. 평소 불같은 성격으로 태자들을 갈구면서 구타하기도 서슴지 않고 수틀리면 참수하라고 명령까지 내리던 견훤도 모든 사실을 알고는 너무 기가 막혔는지, 이번에는 태자들에게 어느 정도 갈굼을 시전하는듯 하다가 "너무 기가 막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난다. 우선 회군부터 하자."며 금강에게 퇴군 총사를 맡기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신검의 위험한 반항은 창작이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이게 견훤이 신검과 멀어지고 막내인 금강을 후계자로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사건으로 나온다. 전투 이후 돌아와서 한 어전회의 후 최승우와의 대화에서 "신검이에게 실망을 했네. 아니, 실망이 아니라 절망을 했어!" 라면서 신검을 아예 후계자에서 리타이어 시켜버리려 했지만, 최승우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의 간청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한다. 문제는 마지막 기회였던 송악 기습을 포함한 예성강 전투에서도 신검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으면서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이후 운주성 전투에서의 대 병크로 결국 후계자 교체 시도와 쿠테타라는 후백제의 국가 막장 테크로 이어진다. 극중에서는 후반부 운주성 전투 이후에 완전히 금강에게 후계를 주는 것을 결심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고창 전투가 끝나고 운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백제의 장군이던 공직이 백제에 환멸을 느껴 고려로 귀순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 역시 백제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공직이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비중 있게 나오다가 후반부에 공직 역을 맡은 배우 이정웅이 건강 문제로 드라마에서 하차해 버리는 바람에 이 사건도 전혀 묘사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간다. 처음 공직이 등장할 때 나레이션으로 공직의 투항과 처벌을 언급하니 배우 건강 문제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들어갔을 것이다. 대신 실제로도 귀순한 기록이 있는 '일길찬' 벼슬을 맡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염흔이라는 다른 인물이 이후 고려에 귀순하는 것으로 나온다. 제작진도 염흔의 귀순이 갑툭튀성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견훤의 아우 능애와 같이 한탄하는 모습으로 166화부터 조금씩 비중을 할애해줬다. 기록상으로는 이 고창 전투 에서의 백제 전사자 규모가 이전에 공산 전투에서의 고려군 피해규모 보다 좀더 컸던 것처럼 쓰여 있지만, 드라마 내에서는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1만여 명 가까이가 거의 전부 싸그리 전멸한 것처럼 나와 오히려 이때의 백제군 전사자 8천명 보다 2천이나 더 큰 피해를 봤던것 처럼 묘사되었다. 다만, 고창 전투는 투항자가 8천명이 나왔으므로, 고창 전투가 작게 잡아도 피해가 2배 이상 더 나온 건 사실이다.
한편, 고려 쪽에서도 이 전투로 인한 갈등이 터져 나오는데, 이전 삼년산성 전투에서부터 맹활약을 한 유금필에 대해 여기저기서 칭찬을 많이 하자 개국공신인 홍유와 배현경이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후 신라의 수도 서라벌 행차와 북방에서 일어난 사고(북방의 부족장들이 왕건이 아닌 유금필에게 '만세'를 부른 일)로 인해 왕식렴도 불만을 가져 유금필은 탄핵을 받고 곡도로 유배를 떠났고, 그 와중에 최응이 병이 심하면서 병부령 직에서 잠시 물러나고 왕건을 비롯해 고려 조정이 방심한 틈을 노려 후백제는 최승우의 의견대로 예성강 전투를 일으키게 된다.
견훤을 연기한 서인석이 태조 왕건 촬영 때 화상을 입은 적이 있다고 밝혔는데 정황상 고창 전투 촬영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7. 여담
안동에는 이 고창 전투와 관련된 설화에서 유래한 지명과 풍습이 남아있다.- 합전길 : 안동시 송현동 소재.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맞붙어 싸웠다고 해서 합전(合戰)이라는 지명이 남게되었다.
- 말구리길 : 안동시 태화동 소재. 후퇴하던 견훤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여 말구리라는 지명이 남게되었다.
- 차전놀이 : 안동 지역의 민속 놀이이자 무형문화재 24호인 차전 놀이가 고창 전투에서 유래되었다.
삼태사의 후손 가문인 안동 권씨, 신안동 김씨, 안동 장씨 문중은 현대에도 안동시 정계에서 막대하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안동시 문서 참조.
현대에도 삼태사 가문 중에 누가 안동 대표 호족이었고 수훈을 세웠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놀랍게도 조선시대에 이미 같은 논쟁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결론은 고려에 귀부하여 후백제와 싸우자 주장한 것은 권행이지만, 그 의견을 채택한 고창성주 김선평이 수훈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