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5:08:32

후백제


[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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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 Later Baekje (Paek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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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년 후백제의 최대 판도
892년/900년 ~ 936년 9월 (36년 혹은 4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통일신라 고려
<colbgcolor=#008080> 위치 한반도 서남부
수도 무진주[1]완산주[2][3]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국성 (甄)[4]
역대 군주 초대 견훤
2대 견신검
언어 고대 한국어
종교 불교
문자 한자
종족 예맥, 한(韓)
주요 사건 889년 견훤 순천 봉기[5]
892년 무진주 점령
900년 완산주 도읍, 후백제 선포
909년 ~ 914년 나주 공방전
920년 대야성 점령
927년 서라벌 기습, 공산 전투
930년 고창 전투
935년 금산사 유폐사건(견신검의 쿠데타)
936년 일리천 전투, 후백제 멸망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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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1. 개요2. 국호3. 영역4. 정체성
4.1. 마한과의 관계4.2. 백제와의 관계
5. 역사
5.1. 건국과 초기5.2. 중기: 태봉 / 고려와의 대립5.3. 후기: 신라와의 대립5.4. 말기: 쇠퇴와 멸망
6. 사회
6.1. 건축6.2. 정치 체계6.3. 지방 통치6.4. 군사6.5. 대외 관계와 외교
6.5.1. 한반도 외교6.5.2. 해외 외교
6.6. 문화6.7. 인물
7. 왕사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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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백제(後百濟)는 후삼국시대, 한반도 남서쪽 지역에 위치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후삼국시대의 시대 범위가 학자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6] 대체로 견훤의 칭왕(892년)부터 후백제의 멸망(936년)까지로 비정되므로 후삼국시대는 후백제 건국으로 시작해서 후백제 멸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국가다. 공식 건국한 900년에서 936년까지 2대 37년간 존속했다. 태봉고려,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하나였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이름값에 비해 매우 짧게 존속한 국가이자 3대를 못 가고 멸망한 국가이다. 견훤이 칭하고 독자 세력화한 시기는 892년부터였고, '백제'로 국호를 정한 건 기원후 900년도였다. 견훤이 스스로 왕을 칭한 시점부터 계산하면 44년, 완산주에 입성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로 정한 때부터 계산하면 건국 36년 만에 멸망한 단명한 국가였다. 그렇다고 해서 후백제가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어수룩하고 힘없는 국가라거나 잠깐 생긴 무시해도 될 국가인 것은 아니다.[7] 오히려 한국사의 나머지 국가가 특이할 정도로 오래간 거지 이렇게 단명한 국가는 중국사유럽사만 봐도 흔하다. 또한 단명하고도 영향력있는 국가도 많다. 대표적으로 진나라. 후백제는 잠깐 지나가는 별 거 아닌 국가가 아니라 그 잠시동안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가였다.

신라태봉과 경쟁했고, 궁예가 왕건에게 축출된 후에는 왕건고려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었다. 고려가 무력해진 신라 조정에 대해 겉으로는 우호적인 포용 정책으로 일관[8]한 것과 반대로 후백제는 후삼국 시대 내내 동해안 일대를 제외한 그나마 남은 신라의 전체 영역을 공격하며 적대했다. 때문에 후백제의 강역은 물론 오늘날 호남 일대인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두었기에 호남을 기반으로 건국했고 호남 일대가 중심지였던건 맞지만, 원(原)신라 지역인 영남 일대까지 상당 부분 아우르고 있었다.

2. 국호

당시에 스스로를 사용한 공식 국호는 백제이며, 후백제라는 이름은 견훤 세력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부여씨 왕조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이는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매우 흔한 일로, 비슷한 사례로 후한, 촉한, 후금, 고조선, 후고구려 등이 있다. 모두 당시에는 후, 고 자 등이 붙지 않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후대인들이 구분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불가리아, 이집트 등 망한 나라가 훗날 새로이 건국될 때 같은 이름을 칭하는 건 세계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당장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일제에게 망한 대한제국의 이름을 정체명만 바꿔서 사용하고 있다.

견훤이 옛 백제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후백제가 자리잡은 지역의 백성과 호족들이 옛 백제 땅 사람들로 유민의식이 강했기에 이를 자극하고 새로운 왕국의 정통성을 이전 왕조에서 찾기 위해서였다.

3. 영역

수도는 완산주[9]. 즉 옛 사비백제의 부수도권이었던 익산-전주 권역이 수도권이었다. 또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10]은 내내 판도에 있었고, 백제부흥운동의 성패를 놓고 나당과 가장 치열하게 쟁패를 벌였던 대전 역시 안정적으로 지배했다. 때문에 옛 백제의 핵심 지역이 후백제에 호응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웅주(공주)와 홍주(홍성) 권역은 불교를 국가 정체성으로 삼아 백제 유민까지 포용을 시도한 궁예 때 잠깐 태봉의 판도에 있었으나, 궁예가 쿠데타로 실각한 후 왕건고구려 계승의지를 재천명하자 동요하면서 결국 얼마 못가 견훤의 후백제로 넘어갔고, 이 지역들은 후백제 패망이 가시화된 상당히 나중에야 다시 고려의 판도가 되었다.[11]

나주 일대의 경우는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건 백제 유민 의식이 있고 없고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는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한편 다른 특이사항은 한성백제가 고구려한테 상실한 이후로 영영 잃어버린 충북 남부 일대와, 신라 중 신라의 지역인 경북 서남부 일대 그리고 옛 대가야 일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정체성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백제 근초고왕 시대 기준[12]으로 보았을 때, 후백제는 백제로서는 상당히 어색해보이겠지만, 이는 공주, 부여 일대로 남천한 백제 및 통일신라 시대에 상당 부분 신라화된 옛 백제 지역의 실태를 모르니 나오는 편견에 불과하다. 신라 장군이었던 견훤이 군사를 일으켜 세운 나라로, 국호는 옛 삼국시대의 '백제'에서 따왔고 부흥운동과 유민의식으로 건국되었기에 그 전에 있었던 백제와는 당연히 관계가 있다. 고려도 고(구)려가 망한 뒤 200여 년 지나 건국된 나라였고 신라 또한 망한 지 이백 여 년 되는 시점에서 부흥운동이 있었다. 세계사에서 보면 500년 만에 부활하는 나라들도 있는 판국에 200년은 그저 우스울 뿐이다.

다만 정작 후백제의 창업군주이자 후백제 자체나 다름없는 견훤은 옛 백제와 별 관련 없는 원신라 영역인 상주 출신이란 게 이목을 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선 앞서 말한 영남 출신설을 인용한 후 다른 옛기록에 있던 호남 광주 북촌 출신설을 같이 기록하였으나, 광주 북촌은 실제로는 신검 형제의 외가인 걸로 추정되고 있기에 신빙성은 대단히 낮다. 《삼국사기》에는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 해당하는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쪽이 신빙성이 높다. 상주시에 견훤이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견훤 산성'이 있는데, 이것도 현재 행정 구역 소속상 상주라는 것이지 문경에서 더 가까운 위치의 산자락에 있다.《상주 견씨 족보》에 따르면 백제 부여씨 왕족 후손이 상주로 이주해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당대 기록이 아니라 훨씬 이후 조선시대에 작성된 족보상 기록이라서 믿기 어렵다. 사실 궁예도 옛 고구려 지역 출신 유민이 아닌 원신라 지역 출신임에도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듯, 옛 왕조의 이름을 다시 쓰는 건 지역 호족과 민심을 얻기 위한 한 방편이었지 국왕 개인의 출신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13]

4.1. 마한과의 관계

후백제란 나라를 논할 때, 후백제가 부흥시키기로 천명한 옛 백제의 전신인 마한을 논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마한은 차령산맥 이남을 다스리며 백제와 항쟁한 고대 국가가 아니라, 북에서는 임진강 유역부터 남으로는 섬진강 유역까지 포괄하는 넓고 느슨한 연맹체였음이다. 그리고 수장국은 오늘날 충남 천안 청당동에 소재한 목지국이었는데, 한강 유역에 자리한 백제국이 목지국을 타도한 후 마한의 새로운 수장국이 되었고, 이후로는 백제국이 그 전까진 자기네와 마찬가지로 목지국 진왕의 거수국들이었던 마한 연맹체의 나머지 거수국들을 가까운 순서대로 차례차례 공납-간접 지배-직접 지배 단계로 전환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한이라는 연맹체의 주류는 오히려 백제 및 그에 복속한 집단들에 해당하고, 그 백제는 근초고왕 당시 천안 일대를 제외한[14] 차령산맥 이북 및 전북 서부 그리고 전남의 몇 군데 요충지를 직할지화했던 것이 진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호남 자체가 마한인 것은 아니며, 굳이 말하면 전남 또한 마한계 세력이긴 하나, 마한의 수장국이 된 백제의 직접 지배지로 편제된 시기가 다른 지역보다 가장 늦었을 뿐이다. 전북 동부 및 전남 일대에 대한 간접 지배는 적어도 4세기 중후반부터 관철되었고, 직접 지배로 편제된 시기도 5세기 초반이기에 최소한 150년 이상은 된다고 봐야 한다.

다만 고고학적 연구가 보다 진척된 현재 전라도 동부는 5세기 후반에 침미다례 일대와는 달리 가야 연합의 일원이 되는 걸 선택하면서 그 시기에 아예 백제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이 밝혀져 있으나, 이후 백제가 6세기 초반에 가야와 개전하면서 전라도 동부를 놓고 각축을 벌였으며, 적어도 520년대까지는 전라도 동부를 가야로부터 군사력으로 빼앗은 것이 밝혀져 있다. 이후로 호남 동부는 호남 서부보다도 면밀한 직접 지배가 관철되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15]

그렇게 호남 전체가 백제 아래에서 처음으로 한 국가의 직접 지배령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이후 부흥한 백제인 후백제의 판도가 옛 침미다례 일대 외의 호남 전체를 포괄했으니 호남이 백제였다는 인식이 고착되었지만 이것이 그저 마한과 가야가 기록 문화가 부재해서 생긴 일은 아니었다. 그나마 옛 마한 연맹 내에서 백제국 다음으로 세력이 컸던 침미다례마저 4세기부터는 아예 마한 호칭 자체를 쓰지 못할 정도로 백제국에게 제압당했으니, 마한이란 이름은 백제가 지배 영역 전체를 직접지배화한 6세기 초반 기준으로 봐도 호남에서조차 잊힌 지 이백여 년은 되어가는 단계였고, 이미 삼국통일 이전부터 아예 마한의 후계를 고구려로 인식하던 상황이었다.[16] 그나마 마한 최초 수장국인 건마국이 익산에 소재했던지라, 이러한 기억이 익산이 사비백제의 부수도였다는 과거에 합쳐져서 뒤죽박죽인 단계로 내려왔을 뿐이었다. 광주와 전주를 중심으로 통일신라에게서 떨어져나간 나라의 국호가 '마한'이 아닌 '백제'였던 건 이것이 원인이었다.

4.2. 백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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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

후삼국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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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건국과 초기

상주 호족 아자개의 아들로 본래 신라의 무관이었던 견훤은 서남해(전라남도 지역)에 배치되어 해적[17]을 소탕하고 있다가, 신라가 점차 쇠망하고 있음을 느끼고 서기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거병했다. 《삼국사기》는 이 과정에서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호응하여 견훤에게 가담했다고 전하며, 견훤과 그의 군대는 진군하여 무진주와 완산주(전주)를 점령하였다. 이후 해당 지역을 통치하며 내부적으로 을 칭했다. 다만 외부에는 감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서명했다. 일단은 신라의 신하라고 간판을 내건 것이다.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양길의 세력이 강해지자 비장(裨將) 벼슬을 이 쪽에서 하사하는 식으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8년 동안 이런 식으로 군림하던 견훤은 900년, 의자왕의 숙원을 풀고 옛 백제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백제'를 칭했고, 무진주 대신 옛 백제의 중심에서 가까운 완산주(현재의 전주)를 도읍으로 삼으며 나라 각지에 관서를 설치했다.

이후 바다 건너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 정책에 나서서 여러 성주들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북부의 궁예가 세운 태봉웅주(충청남도) 지역을 경계로 마주하게 되면서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미 신라는 김헌창의 난 때와는 달리 견훤과 궁예의 세력을 스스로 제압하기에는 너무도 쇠약해졌기에 사실상 한반도의 세력은 남서부 후백제와 북부 태봉으로 양분되다시피 했다. 다만 신라 역시 후삼국시대 초기까지는 공세적으로 나설 군사적 힘을 잃었을 뿐, 여전히 많은 호족과 백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신라는 수세적으로 어느 정도까진 두 나라를 막아낼 여력은 남아 있었으며,[18] 삼한의 백성과 호족들이 인정해온 종주국이라는 확고한 정통성이 있었기에 가벼이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5.2. 중기: 태봉 / 고려와의 대립

궁예의 재위 당시인 903년에 왕건의 공격으로 금성[19] 일대를 잃어 해상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비록 나주 일대를 빼앗기며 형세는 불리해졌지만 후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땅 중 하나인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국력은 태봉에 밀리지 않았다.[20][21] 그리고 907년에는 지금의 충북과 경북 일대 추풍령 지역을 판도에 추가하는데 실은 바로 이것이 그나마 후삼국 시대가 반세기는 가며 장기화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도 역시 왕건이 직접 출동해서 후백제의 해당 지역 장악을 막으려 했고 나주 장악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고, 기록상으론 왕건이 이겼다고 되어 있으나 불과 1년 후 후백제가 삼년산성을 비롯한 충북-경북 상당 지역을 영역화한다. 이를 보면 그 패전으로 인한 후백제의 손실이 별거 아니었거나, 실제로는 백중세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일대는 신라가 5세기 중반에 장악한 이래로 약 450년 동안 백제, 고구려, 당나라 이 세 강대국 모두에게 한번도 내줘본 적이 없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즉 후백제는 과거의 백제와 비교해보면 과거 삼한 시대부터 융성했던 영산강 일대를 잃으면서 생산력과 인구에서 큰 손해를 봤지만, 군사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요지들을 한꺼번에 장악하게 된 것이었다. 영역만 따져보면 영산강 일대와 그닥 차이도 나지 않고, 뭣보다 그 일대에 여전히 주둔해 있었던 신라 정규군 부대들과 신라군 요새 및 군사 시설들을 역시 무진주에서 건국할 때부터 신라 정규군 부대들을 갖고 시작한 견훤이 모조리 장악했을 개연성이 크다. 물론 인구도 어느 정도 얻으면서 전남에서 받은 손실을 벌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마진-태봉과 지속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에 918년, 태봉의 2인자였던 왕건이 기행을 일삼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로 국호를 되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친궁예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줄을 이었다. 굵직굵직한 것들만 나열하자면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이나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웅주의 이흔암, 청주의 임춘길 그리고 명주의 순식 등등 모두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이었다. 한마디로 초기 왕건 정권은 공중분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렇게 친궁예 호족들이 반발하는 이때가 견훤으로서는 고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견훤은 축하 사절을 보내는 등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해 7월 이후 수도에서의 쿠데타 모의는 대부분 8월까지 정리된 상태라 견훤이 이들과 연계해 침공을 시도하기에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다. 명주의 왕순식은 후백제가 연계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고 왕건에게는 패서와 고려 불교계라는 든든한 지지기반이 있었으며, 몇 년 후 공산 전투에서 보이듯 정권 내부 결속력이 탄탄해 반란모의 몇번에 무너질 레벨이 전혀 아니었던 것도 고려할 만한 사실이다. 게다가 2차 대야성 전투에서 패전한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2년 후의 3차 대야성 전투를 위해 이를 박박 갈고 있었던 후백제 입장에서 과연 고려를 멸망시킬 수준의 공세 여력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훗날 후백제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폐위하는 패륜이 터졌을때도 고려는 곧바로 후백제를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관망하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도 아닌 견훤을 귀부시키고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내 삼한일통의 결정적 한방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이 때 고려가 성급하게 후백제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면 신검에게는 오히려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22]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몇 장면에 걸쳐서 사절단을 보내는 것에 대해 나왔지만, 내부 안정이니 뭐니보다 사나이다운 면모니 호방함이니 하는 두루뭉술한 단어로 포장해버렸다.[23]

대신 이흔암이 지키던 웅주와 임춘길의 고향인 청주가 이때 후백제로 귀부함으로서 후백제는 반사이익을 톡톡히 챙겼다. 이 지역은 후기백제의 핵심 지역으로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국초부터 수복하여 판도에 추가했음직했지만, 금강과 차령산맥이 연달아 자연방어선 역할을 하기 때문에 후백제가 섣불리 북진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견훤은 조카 진호(후백제)가 고려에서 사망하자 925년 웅진 일대에서 공세를 취했지만 고려의 대응은 "그냥 문닫고 버텨"였고 후백제는 별 소득 없이 철수해야 했다. 반대로 고려 역시 927년 4월 왕건이 웅주에 대해 친정을 단행했지만 실패했을 정도로 이 지역은 후삼국 내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즉 천 년 이상 현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구축된 교통축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생각과 달리 후삼국 시대 당시에는 통일신라 체제에서 백 년간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구축된 교통로를 따라 대군의 진군 경로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환경에서 후백제는 간선도로가 부재했던 웅주 방면이 아니라 고려와 신라를 직통으로 연결해주는 패강진로를 장악할 수 있는 상주, 그리고 그 간선도로의 시발점인 경주에 대한 공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웅주 일대의 귀부는 이런 교착상태를 단번에 타개하고 후백제가 상주 전선에 좀 더 심혈을 기울일 수 있게 해준 대호재였다. 실제로 이후 서라벌 기습을 보면 후백제군의 기동은 근품성(경북 문경 일대)에서 시작하는데, 아마도 이 때 확보한 청주 영토가 작전의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나주 공방전을 토대로 왕건이 후백제에게 저승사자 같은 존재였다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해전에서나 그랬지 육전에서 왕건은 그전에 추풍령 일대를 놓고 겨룬 일전에서 입증되었듯이 그렇게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으며, 실전에서 왕건의 최정예 친위대는 같은 장소에서 벌인 세 번의 결전에서 견훤에게 모조리 패배하였다. 그보다는 신라 군대의 군인이었고 신라 치하를 산 견훤이 신라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한채 오늘 내일 하는 신라 공략을 우선한 게 더 이유가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견훤이 모든 호기를 놓친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반발하는 일부 세력들은 견훤에게 붙으면서[24] 견훤은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고, 점차 양국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후백제는 고려에 대해 코 한 번 안 푼 채로 충청 지역에서는 이흔암이 죽은 후 웅주(공주시를 중심으로 한 충남과 충북 일부)가, 임춘길이 죽은 후 매곡(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이 귀부하는 등 상당한 이득을 챙겼다.

924년에는 조물성에서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충돌하였는데, 서로 화친을 맺고 인질을 교환했다. 《삼국사기》에는 왕건이 견훤에게 밀려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고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작스럽게 죽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여 고려 측에서 볼모로 왔던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신을 살해하였고, 곧 다시 양국간에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

5.3. 후기: 신라와의 대립

왕건이 이미 무력해진 신라에 우호적인 포용 정책을 펼친 것에 비해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공약 그대로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삼국시대 시절부터 영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대야성을 901년, 916년, 920년에 세 차례나 공격했고, 대야성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기에 견훤의 친정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막아냈지만 결국 920년에 함락당했다. 다만 2차 대야성 공격 이전에 실은 더 충격적인 일이 있었으니, 918년도에 서라벌에서 김씨 족단의 반란이 있었을 당시 경남 서부 일대, 즉 옛 대가야 일대를 모조리 함락하여 판도에 추가한 일이었다. 이는 신라 입장에서는 660년도 백제 멸망 당시 판도로 확정한 대가야 일대를 260년만에 완전히 잃은 큰 일이었다.[25]

때문에 경명왕 때부터 신라는 별 수 없이 고려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면서 물론 고려의 경북 서북부 점유도 인정한 형태로 가면서, 고려와 군사동맹을 맺어 후백제를 견제하는 구도로 간다. 물론 이 정책은 경애왕 또한 계승한다. 그나마 이 시기까지는 신라가 얼마 안 되는 영토긴 하지만 영토 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하던 때로서, 영남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신라군을 보내서 고려에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고, 후백제와 고려군이 전투 끝에 소강 상태를 보이자 왕건에게 좀 더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놓고 친고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애왕에게 견훤은 크게 분노했고, 하여 927년에 그가 친히 이끄는 후백제군이 신라 수도 서라벌을 기습 침공해 그를 죽이고, 서라벌을 불태우며 약탈했다. 다만 왕건의 고려군이 곧 엄습해오는 상황이었던지라 신라국 자체를 폐지하진 못하고, 박씨 대신 김씨인 경순왕을 신라 왕으로 세웠다. 이때 후백제군은 철군하던 도중 신라를 구원하러 온 고려군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를 공산 전투에서 격파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고려사》 <유금필전>을 보면 후백제는 궁예 시절부터 뒤통수의 골칫덩이였던 나주까지 되찾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수차례 고려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하였다.
파일:나말여초(929).png
고창 전투 직전의 후백제 최대 강역

5.4. 말기: 쇠퇴와 멸망

그러나, 930년고창 전투에서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인데 흥미로운 점은 고창의 이름이 안동이 된 계기가 이 전투와 연관있다는 것. 해당 내용은 고창 전투 문서 참조. 이 때 견훤에게 불만을 품었던 일부 호족들이 고려로 투항하면서 영토 손실도 커졌다. 특히 932년공직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매곡성이 있는 청원 일대를 상실했고, 934년에는 견훤이 지휘하였던 최후의 전투인 운주성 전투에서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의 급습으로 패하며 치명타를 입은 것이 뼈아팠다.

이후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졌다. 견훤은 장남이었던 신검 대신 금강 왕자를 후계자 감으로 내심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창업군주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해버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폐주가 된 견훤은 금산사에 3개월 정도 갇혀 있다가 탈출한 뒤에 아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평생의 적이었던 고려로 망명했고 견훤이 세운 신라경순왕도 고려에게 항복했다. 신검은 나름대로 혼란한 후백제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고 중국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1년 뒤인 936년 9월에 견훤은 고려 왕 왕건과 함께 선산 일리천(현 경북 구미시 선산읍) 전투 당시 고려군 좌익의 선봉으로 참전하여 후백제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위에서 쫓겨났다고는 하나 후백제 그 자체나 다름 없었던 자신들의 건국 군주 견훤이 적진에 있는 것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싸움도 해보기 전에 투항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속출했다. 설상가상으로 후백제군 우익의 지휘관이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는 전투 이전에 고려군과 내통한 상태였고, 교전 초반부에 투항하고 만다. 그나마 후백제의 중군은 고려군 중군을 상대로 분투하였으나, 고려군의 용장 유금필이 이끄는 말갈과 돌궐 기병 1만명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결국 후백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며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일리천 전투 문서 참조.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신검 휘하의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피해 도망쳤으나 왕건의 군대는 완산주 근처의 황산[26]까지 쫓아왔고, 신검은 마성[27]에 고립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멸망했다. 결국 견훤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기구한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바로 그 해에 견훤도 병사하였다.[28]

후백제가 멸망한 이후, 2대 왕인 신검의 처우에 대해서는 기록상 엇갈리는 편이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죽였다고 기술했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사강목》은 살려주면서 관직도 줬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932년 투항한 후백제 호족인 공직은 939년에 사망했고, 견훤의 사위로서 고려와 협력했던 박영규는 고려 왕씨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고 큰 권세를 누렸다. 현재에도 박영규를 시조로 한 순천 박씨가 있다.

6. 사회

6.1. 건축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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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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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별궁 태봉국 철원성 만월대 내 별궁 고려의 궁원 남궁 의종 대 별궁 삼소궁궐 흥왕사 안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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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정치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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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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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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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왕건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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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탐라국
제43대 제44대 제45대
경직왕 민왕 자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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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50년간 유지되던 후백제의 정치 체계는 잘 보면 오로지 견훤 1인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형태였다. 후백제의 모든 국가 기구 기능이나, 신하들의 충성심 역시 후백제라는 나라가 아니라 견훤이라는 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견훤의 리더십과 군사적, 정치적 역량으로 후백제 휘하의 호족을 통솔하고 신라, 고려에 대한 공세에 나설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견훤이 내세운 후계자인 견금강이 아닌 견신검쿠데타를 일으켜 견훤을 폐위하자 후백제는 1년만에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마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프란츠 요제프 1세의 리더십 하나로 유지되다가 황제가 사망하자 2년만에 급격히 멸망한 것과 같은 루트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백제를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본인 혈통부터가 원신라계였고, 신라 장수로 활동했던 경험 때문인지 후백제를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에도 신라의 관등명과 관직 체계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능환이 신라 관등 체계의 2등위인 이찬(伊飡) 벼슬을 지냈던 것,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가 신라 제 7등위에 속하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지냈던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훗날 견훤이 신라의 도읍인 경주시까지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자진케하고 경순왕을 옹립함으로써 신라를 반속국화하고, 정치적으로 후백제에 귀속시켜 사실상 망하게 만들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왠지 아이러니. 하지만 어떤 국가가 멸망하고 복국 운동이 일어날 때 지배 국가의 관제를 실용적 이유에서 그대로 쓰는 경우는 꽤 흔하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었던 발해나 고려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차용해 관제를 운영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 기록엔 후백제도 도독(都督), 태사(太師) 등 당나라의 관직명을 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당장 현대 역사만 봐도 해방 직후 대한민국일제강점기 시절 법령과 제도를 답습하였다. 즉 후백제가 신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후백제가 백제와 아무 상관 없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의 정치체계를 일단 도입하되 광평성을 비롯해 명칭을 새로 고치고[29], 순군부를 도입하며 관등 체계 자체도 아예 당나라 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적용하면서 전반적인 운영 원리 자체를 바꿔버렸던 궁예나, 그 궁예의 제도를 거의 답습한[30] 왕건과 달리 견훤이 신라식 체계를 명칭까지 그대로 도입한 것은 그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거나 옛 신라 체제에 대해 어느 정도 향수나 익숙함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견훤이 왕건이나 궁예와는 달리, 역시 어디까지나 기원은 신라 정규군 장수였다는 이점과 한계라고 볼 수 있겠다. 즉 신라와는 통일신라 시기를 거치면서 인적, 문화적, 제도적으로는 훨씬 일체성이 강화되었지만, 서로에 대한 반감 역시 정확히 그만큼 더욱 강렬해졌던, 후백제와 신라 사이의 특수한 관계의 일면이라 하겠다.

후백제는 외적으로는 신라 왕을 섬기는 부용국으로 행세했으나,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표명하고 천자라고 자칭했다. 후백제가 신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는 나라였음을 표방한 면은 처음에 견훤이 세력을 일으켰을 때 함부로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 자칭했던 점과, 《삼국사기》 및 《고려사》 등의 기록에 나오는 왕건에게 보낸 서찰에서 스스로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히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였다.' 운운하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31] 이런 점은 한반도 내부의 친 신라계 호족들의 반감을 덜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신라를 적대했기 때문에 왕건의 포용 정책에 비해서 효과는 적었던 편이다. 후백제가 일본에 사신을 여러 번 보냈을 때도 후백제가 말이 후백제지 실상은 신라의 신하라는 점을 문제삼아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다. 다만 이는 일본이 후백제를 도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핑계를 댄 것에 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 후백제에 독자적인 천하관과 연호가 있었음은 <편운화상(片雲和尙) 부도 명문>에 후백제의 연호 정개(正開)가 있으므로 알 수 있다. 승려 편운이 죽은 후에 (당시 견훤의 세력권인) 남원에 부도를 세웠는데, 명문에는 부도를 세운 시기를 정개 10년 경오년이라고 기록했다. '정개 10년 경오년'을 역사적 정황에 맞춰 짚어보면 910년이 된다. 따라서 정개 원년은 901년이고, 견훤이 후백제를 개국한 다음해이다. 즉 견훤은 900년에 정식으로 후백제를 개국한 뒤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후백제가 곧 신라를 의식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국으로 자처하였음을 내외에 표방한 것이다. 후백제의 '정개'는 궁예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연호 '정개(政開)'와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

6.3. 지방 통치

통일신라의 직접 통치가 무너지면서 일제히 지방세력이 일어나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보니 동시대 궁예의 태봉, 왕건의 고려가 그랬듯, 후백제 역시 기본적으로는 중앙 집권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호족 연합체성격이 짙었다. 왕건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견훤 역시 왕건 비슷하게 아내 여럿을 두어 자식을 최소한 열 명을 넘게 두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왕건이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의 딸이나 친족들과 혼인하여 혈연 관계를 맺었던 것과 같은 사례였을 것이다.[32]

후백제를 괴롭힌 요소 중 하나는 국토를 연결할 종축 간선도로의 부재였다. 신라는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경주와 전주/무주/웅주를 각각 연결하는 횡축 간선도로는 구축했지만 이 각 주를 연결하는 종축 간선도로는 부재했다.# 견훤이 무주에서 전주로 북진하면서 양 구간에는 간선도로가 구축되었겠으나 무주에서 강주에 이르는 남해안 지역이나 북쪽 웅주, 청주 방면으로는 통일신라의 지선도로조차 없었으므로 후백제는 영역 통치를 위해 이들 지역에 대한 도로망부터 구축해야 했다. 핵심 영역인 한주 전역은 물론 상주를 거쳐 신라까지 패강진로와 그 지선도로를, 삭주 지역에 대해서는 한강 수로를 활용할 수 있었던 고려와는 매우 큰 차이였다.

후백제의 지방행정은 왕도 전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익산 등의 범위는 중앙에서 직접 통치하고, 거리가 먼 지방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지배했다.

첫째, 믿을 수 있는 친족을 도독으로 임명해 각 지방 요충지에 파견해 통치[33]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935년 당시 견훤의 두 아들인 견양검견용검은 각각 무진주(광주광역시)와 강주(진주시)의 도독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이 점은 고려가 태조의 재위 내내 별다른 지방관 임명 사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과 대비되며, 수도 서라벌에서 근무했던 견훤과 역시 서라벌 중앙 6두품 출신인 최승우 등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친아들이라고 믿었더니 능환과 모의해 친아버지 견훤을 쫓아냈다는 것이지만...

둘째, 강한 호족 세력이 존재하는 지역은 그들의 독자적인 지배권을 존중해 간접 통치하는 것이었다. 승주(순천시) 호족 박영규나 무진주(광주광역시) 호족 지훤, 매곡현(보은군) 호족 공직이 대표적이다. 이 중 박영규나 지훤은 견훤의 왕녀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6.4. 군사

후백제의 군사력은 이미 다 쓰러져 가던 신라는 논외로 치고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태봉이나 고려의 군사력에 비해 매우 강대한 편이었다. 이는 우선 후백제의 왕인 견훤의 출신 성분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본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던 점도 있었지만 후백제가 자리한 호남 지방에 비옥한 곡창 지대가 펼쳐져 있었던 것도 한몫하였다. 특히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왕건을 크게 이긴 후에 조서를 보내어 "평양성 문루에 을 걸어두고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고 싶다."라며 반 협박 수준의 말을 한 것도 이렇게 튼튼한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역으로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왜 우리는 고려보다 군사가 갑절이나 많은데 이기지 못하는가"하는 식으로 한탄하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통일신라의 정규군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건 바로 후백제군이었다.

기록에 보면 후백제군의 구성은 크게 보병대와 기병대, 수군으로 나뉘었으며, 특히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병대는 정예병으로 쳤다. 실제로 견훤은 한반도에서 마지막으로 카타프락토이를 대규모로 운영한 군주였다고 한다. 다만 중무장 기병을 정예병으로 치는 것은 고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로도 중기병을 애용하였다. 오히려 중기병이든 경기병이든 편제상으로는 고려가 후백제에 앞서 있었는데, 이는 후백제의 영토인 전라도 일대가 비옥한 곡창 지대이긴 하지만 넓은 평원 농지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대규모 기병 양성은 힘들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때문에 후백제군의 전력은 보병 중심이었다.

후백제 수군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그리 강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해전에 능하였던 왕건의 공격을 받아 후방을 늘상 털리기만 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후백제 후방의 금성 (전라남도 나주시)을 빼앗겼던 일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옛 침미다례 일대를 고려군이 점령하면서 후백제는 늘 후방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한쪽 다리를 묶은 상태로 고려군과 대적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해상로가 줄어들었고 경제력도 크게 상실하였다. 다만 후에 나주를 회복하고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나 상애 등이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도읍인 개경 근처의 해안까지 진출해 깽판을 쳤던 기록을 보면, 갖은 굴욕을 당한 이후로 나름대로 수군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건이나 궁예가 그랬듯이 백제왕인 견훤 역시 직접 전장에 나서서 군대를 통솔하는 친정 지휘 체계를 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견훤 자신이 군인 출신이라 군을 지휘하는 데에 자신이 있었던 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왕이 직접 전장에서 공을 세워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록에 따라서 굳이 왕이 전장에 나서지 않고 왕자들과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했던 사례도 없지는 않다. 견훤의 아들인 수미강(견신검)이 군대를 지휘했던 기록도 간간히 보이고, 특히 수군 대장인 상귀나 상애는 직접 수군 함대를 이끌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개 왕이 친솔하는 중앙군이 아닌 지방에 파견된 장수나 도독들이 지휘하는 지방군인 경우일 것이다. 또한 중앙군 중에서도 왕이 언제나 친솔하지 않는 부대와 언제나 왕의 친솔을 받는 친위군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견훤의 측근이었던 김총은 견훤의 인가별감이 되었는데, 이 인가별감이라는 직위가 곧 견훤의 친위군의 장으로 추정된다.

또한 특기할만한 점은 전북 임실군 지사면에 배치되었던 신라 정규지방 기병군단 10정 중 하나인 '청웅정'의 존재다. 청웅(靑雄)정(=거사물정)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역시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견훤이 후백제 중앙군으로 개편하여 편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4] 견훤은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걸 즐겼는데, 옛 백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신라의 옛 정규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걸로 추정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왕을 죽게 해서 백제군에게 최악의 대패를 안겨주는 데 크게 공헌한 삼년산성도 꽤 빠른 시기에 후백제 손에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신라와 고려는 경북과 충북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후백제군에게 크게 고생해야 했다.

후백제 같은 경우 옛 백제와 비교하면, 상당한 알짜배기 지역인 영산강 유역 일대를 잃었기에 적어도 경제력과 인구 면에선 절름발이긴 했지만, 반면 신라를 부여씨 백제로부터 지켜주던 충북, 경북에 위치한 추풍령 일대의 주요 요새들은 거의 디폴트로 깔고 시작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부터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왕 이 세 명군이 온갖 노력을 기울어 완성했던 신라의 대고구려 및 대백제 방어망이었고, 그후로 거의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능했었는데 그것을 900년에 갓 건국한 후백제에게 겨우 7년만인 907년도에 허망하게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지역이 이미 904년도에는 태봉의 영역이었음이 더 충격적인 일이다. 견훤의 후백제가 그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손을 뻗자 그걸 막기 위해 왕건이 이끄는 마진의 군대와 906년에 접전하긴 했고, 기록에선 왕건이 이겼다고 되어 있지만 견훤의 후백제군은 그럼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후 이렇다할 전투 기록도 없이 그 중요한 지역을 907년에 태봉으로부터 송두리째 전부 접수했다. 견훤이 물론 한국사에서 손에 꼽는 우수한 장군이긴 했지만 이를 보면, 순전히 무력으로 함락하기보다는 견훤 자신의 신라 중앙군 복무 경력을 통해 포섭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패배로 기록된 전투도 실제로는 후백제군의 손실이 적었거나 거의 없었을 개연성이 크다.

한편 이 지역 장악은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충북 추풍령 일대 영역은 백제가 고이왕 혹은 책계왕 이래로 비류왕 때까지 목지국및 그 친위 마한 거수국들과 거의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군사적 응징 및 회유, 협박 등을 통해 어렵게 장악했던 영역이었고,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거듭 대패당하면서 빼앗긴 후 다름아닌 나제 동맹 당시부터 어물쩍 신라가 장악했었던 지역이었다. 백제는 그 시기에 고구려의 공격이 너무나도 날카로웠고 버티기 어려웠던 나머지 그 일대에 신라가 오히려 성곽을 세워 고구려를 방어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백제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성왕 당시에 신라와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었을 때 성왕은 이 중요한 지역을 되찾는 건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원래는 한성백제 영역이었던 삼년산성에서 붙들려서 죽었었다. 그 후로는 의자왕 때 아주 잠깐 찔러본 사례 외에는 백제가 한 번도 되찾아본 적 없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지역이 경북 일대 추풍령 지역과 함께 묶여 세트로 후백제로 넘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해당 지역은 아신왕 이래로 거의 약 오백여년 만에 백제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지역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 수도권-강원도 지방에서 신라가 있는 대구광역시-경상북도 지역으로 들어가는 주요 고개가 추풍령, 문경새재, 죽령 세 곳이었는데 후백제가 추풍령, 문경새재 일대를 싹 접수하면서 신라의 방어선이 죽령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령 이북(제천-단양)은 궁예-왕건이 장악했고 추풍령과 문경새재는 견훤이 접수했으니 신라는 천혜의 요새인 소백산맥, 즉 추풍령, 문경새재, 죽령 모두 상실하고 낙동강만을 방어선으로 삼아야 했다. 더 문제는 낙동강은 강폭만 크지 범람원이 넓게 설정될 정도로 "강바닥이 너무 얕았다". 강물 깊이가 깊어봤자 5m를 넘지 못했으니 위치만 잘 잡으면 헤엄쳐서 낙동강을 넘는게 아니라 타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 깊이밖에 안 되는게 낙동강[35]이다. 결국 소백산맥 동쪽+낙동강 서쪽 지역은 대야성이 뚫린 직후 후백제 견훤고려 왕건한테 나눠져서 넘어간다. 심지어 왕건은 섬강 유역도 장악해 고창 전투 이후 진주시, 사천시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해버린다.

때문에 적어도 대신라 공세에 있어서는 온전한 몸이었던 옛 백제보다 이 후백제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정예병과 주요 군사적 요충지가 깔린 충북 - 경북 서남부 일대가 생산력이 풍부한 전남북 및 충남 일대와 결합하여 시너지를 내는, 그 전 삼국 시대 때는 없었던 희한한 판도가 형성되어 버린 것이었는데, 후백제가 백제에 비해서는 다소 동쪽으로 치우친 모양새였던 건 이것이 이유였다. 물론 견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에 대한 향수랄까 미련을 못버려서 신라만 평정하면 게임은 끝난다는 생각이 있었을 가능성 또한 높았지만, 침입하기 쉽고 성과도 올리기 쉬우니 자연 그쪽으로 군사적 역량이 쏠리게 될 수밖엔 없었다. 장기 쟁패보다는 단기전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판세가 형성되었다는 얘기. 이렇게 되어갔으니, 경애왕 때 벌어진 서라벌 함락의 비극은 이미 907년에 반쯤은 결과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취약해진 신라를 그나마 지켜주었던 건 대야성과, 아이러니하게도 친고구려 성향 탓에 자비 마립간 ~ 지증왕 때 여러모로 신라 왕실을 상당히 귀찮게 했었던 이른바 '고구려 고지'(봉화, 영주 일대)의 호족 세력 및, 경덕왕이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부산 일대로부터 경주로 침입하는 경로에 대대적으로 확충해놓은 요새들이었다.

6.5. 대외 관계와 외교

6.5.1. 한반도 외교

후백제는 신라 왕실 근위대 장교 출신 견훤이 신라 정규군 장병들과 함께 신라에 반기를 일으켜 세운 나라였기에, 일찍부터 신라와 관계가 최악이었다. 견훤이 처음에 접수한 서남해 방수군은 장보고 집단의 반란을 막기 위해 신라가 일부러 추풍령, 조령 등을 비롯한 신라 왕실 직할령 출신 군인들을 지휘자들로 보내던 부대였는데, 견훤이 그 사람들을 데리고 빠져나갔기에 그나마 남은 신라 정예 장교 집단 상당수가 거의 그대로 백제 부흥군의 장교단에 합류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36][37] 신라 입장에서 후백제는 그 수장부터 시작해서 말단병사까지 반란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견훤도 반란자 취급을 하는 신라에 자주 쳐들어가는 등 아주 대놓고 태도가 적대적이었다. 여기서 고려와의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고려를 건국한 주축 세력은 패서 계열 고구려계 호족이었고, 신라는 이 지역에 대해 그렇게 큰 욕심 내지 않았으며 간접 지배로 만족했다.

오히려 옛 백제 지역이 신라가 중앙행정력을 전력투구해서 직접지배하며 유지하던 지역으로, 적어도 신라 왕실 입장에선 옛 백제 지역이 이반한 게 더 뼈아프게 다가왔을 개연성이 높다. 앞서 얘기했지만 백제를 부활시킨 견훤 집단 자체가 바로 신라 정규군 부대였던 게, 신라가 옛 백제 지역에 얼마나 밀도 높은 직접 지배력을 행사해왔는지를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증거다. 그러나 옛 백제 유민 입장에선 그렇게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여러모로 고구려 유민보다 더한 차별을 겪어야 했기에, 신라에 대한 감정은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결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삼한일통을 이끌었던 바 있는 신라의 유구한 역사와 정통성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던지라, 견훤은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신라의 왕과 군신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라 왕실에게 견훤의 이러한 접근은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견훤이 군생활을 시작했던 신라 왕실 근위대는 진골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왕실 근위대장 자리는 진골은 오히려 아예 임명될 수 없도록 규정까지 만들어져 있었고, 왕실 근위대 장병들도 마찬가지로 진골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되도록 서라벌 출신 젊은이들의 입대는 배제되어 있었다.[38] 이 때문에 신라 왕실 근위대는 견훤처럼 진골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서라벌 바깥 유력 호족 자제들 중에서 자원 입대한 인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랬던 견훤이 뜬금없이 백제를 부활시킨다고 하면서 옛 신라 정규군 부대들을 유혹해 수중에 넣거나 말을 듣지 않는 신라 군부대들을 초토화 중이었다. 그러니 신라 왕실 입장에선 견훤과는 그 어떠한 협상도 불가했다. 이 때문에 견훤은 신라와의 관계 개선은 거의 포기하고 압박 일변도로 나가게 된다.

한편 견훤이 서라벌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살해하여 일단 서라벌을 손아귀에 넣었음에도, 함부로 병합하지 못하고 경순왕을 옹립하는 형태로 일을 급하게 끝냈던 건 딱히 신라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고려군이 내려오는 상황이었던데다 견훤 자신도 김씨 족단과 연계한 커넥션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게 원인이 더 크다. 그 당시 견훤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국의 국방력 자체를 무력화하고 신덕왕계 일파를 철저하게 뿌리 뽑는 작업은 했었으니, 경순왕을 찍어눌러 제후인 백제왕으로 인정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견훤의 처신이 후세인이 보기에도 기이할 정도로, 백제왕이라기보다는 신라 권신에 더 가까웠던 데 있다.

또한 견훤은 궁예와 처지가 다르다는 걸 고려해봐야 한다. 궁예가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며 극렬히 적대하다가 왕건에게 폐위되어 처참한 말로를 맞이한 건, 왕건과 패서 호족들이 별나게 신라왕에게 충성해서가 아니라 궁예가 고구려의 부흥을 완전히 저버리고 백제계 호족들을 지나치게 대우해주다가 끝내는 이들마저 가혹하게 탄압하는 이상한 짓을 저질러서였다. 한편 견훤이 봉기한 옛 백제 지역의 신라 왕실에 대한 악감정은, 신라 왕실에 악감정이 있기는커녕 일정 부분 호감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는 패서 호족들과 정반대였다. 게다가 상술했듯 신라의 후백제에 대한 태도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으니, 후백제 또한 신라에 대해선 상당 부분 취할 수 있는 행동폭이 제한될 수 밖에는 없었다. 신라인들이 후백제를 대놓고 싫어한 것과 마찬가지로 옛 백제 유민들 또한 신라를 대놓고 싫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잖아도 출신 성분이 원신라지역인 신라 장군 견훤이 어설프게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면, 과연 옛 백제 유민들에게 백제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후백제가 고려에게 밀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 후백제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기 때문. 신라에서 벼슬하는 아자개, 소격달 등 영남 지역 호족들은 고려에 비해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가 그렇게 영 좋게 비쳐지지는 못했는지 대부분 후백제보다는 고려에 협력하는 쪽을 선택했으나, 견훤의 군사적 능력이 워낙 우수했던데다가 후백제는 가깝고 고려는 상대적으로 멀었기에 후백제가 한참 고려를 밀어붙이고 있을 때는 다름아닌 영남 지역 일대에서도 후백제 쪽으로 이탈하는 자가 자주 나오곤 했다. 아무리 이념이니 뭐니 해도 눈 앞에서 압도적인 무력으로 밀어버리고 있을 때는 굴복할 수밖에는 없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다름아닌 그 경순왕조차도 즉위 초반에는 살아남기 위해 왕건과는 거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견훤에게 협조해야만 했었다. 이러했으니, 경명왕 때부터 견훤에게 항복한 영남 지역 호족들은 처신을 어찌 해야만 했을진 불을 보듯 뻔했다. 굳이 말하자면 후백제의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실패는 견훤이 서라벌 함락 때 보인 행동이다. 경애왕을 죽이고 그 왕비를 강간한 건, 적어도 옛 백제 지역의 민심엔 그닥 영향을 끼치진 못할지라도, 원신라 지역이나 패서 호족들의 동정심과 적개심을 자극한 큰 실수는 맞았다. 하지만 후백제의 신라에 대한 처신 자체는 견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보면, 그외엔 크게 실수한 건 적어보인다.

한편 영남 지역에서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도 후백제에게 한 번도 굴복하지 않고 죽기살기로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정작 신라 중고기 때는 친고구려 성향으로 여러모로 의심과 견제를 받았던 고구려 고지 일대(경북 봉화, 영주 등 경북 서북부)[39]였고, 위 항목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선산 지역을 위시한 경북 서남부 지역[40]은 후백제가 굳건히 장악하고 있었다. 경남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여론은 친신라-고려 & 반백제였던 것 같지만, 후백제의 또 다른 주된 침공 경로였던지라 자주 초토화된 탓에 실질적으로는 거의 후백제의 판도 아래 있던 기간이 더 길다.[41]

신라와 후백제 사이의 관계에서 또 다른 큰 갈등요소는, 고려에 대한 신라의 태도였다. 신라는 적어도 꽤 이른 시기부터 고려를 정식 국가로 승인했고 나중에는 아예 왕건을 신라왕보다 상위에 있는 대왕으로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물론 이건 신라 왕실에서 대단히 큰 굴욕 수준으로 양보한 것이었다. 반면 후백제에 대해선 왕이 시해당하는 그 난리통 속에서도 국가로 인정한 정황은 한 번도 드러나지 않는다. 즉 후백제 같은 경우는 서라벌 함락 이전도 이후에도 적어도 신라한테는 단 한 번도 정식 국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제후국 왕으로라도 신라가 인정한 바는 한 번도 없었다. 그냥 후백제는 신라와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 자체를 맺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신라는 철저하게 후백제를 미승인국 취급했고, 후백제는 신라와 관계 개선을 시도할 때마다 신라가 보이콧으로 일관하니, 이런저런 사정과 겹쳐 신라와는 관계 개선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견훤경애왕을 잡아 죽이고 세운 경순왕조차 후백제를 국가로 인정한 바가 전혀 없다. 적어도 신라 왕실 입장에서 보기에, 후백제는 군벌조차도 아니고 그냥 반란 일으킨 통일신라의 정규 부대 집단에 불과했다. 쉽게 말해 신라는 서라벌 기습으로 경주시가 초토화된 상태에서도 후백제에 대한 입장은 단순 '미승인'을 넘어서 "불인정", 더 넘어서 "반국가단체" 정도의 취급이었다.

한편 태봉과는 대립했다. 특히 왕건보다도 더 호전적인 성격의 궁예 시절에는 늘 싸우기만 했다. 하지만 의외로 고려와는 서로를 대등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는 상황이 자주 보인다. 왕건이 처음 고려를 세웠을 때에는 선물을 보내주는 등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도 보여주었을 정도. 그러나 고려와는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다투지 않을 수 없었던 사이였기에 결국은 과거에 태봉과 싸웠던 것처럼 언제나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를 유지하였다. 물론 조물성에서의 사례처럼 일시적으로 화친하는 경우는 있었다.

6.5.2. 해외 외교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은 젊은 시절을 신라 서남 해안가에서 해적을 소탕하며 지낸 경험 덕분인지 해외의 나라들과 국교를 맺는 것을 꽤 중요시했다. 때문에 원교근공책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한반도 내에 가깝게 있던 고려와 신라와는 줄곧 대립했던 것과는 달리 바다 건너 외국들과 지속적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당시 중국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라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는 혼란기였고, 이에 견훤은 10국 중 하나인 오월이나 오대 중 하나인 후당에게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기도 했다. 오월은 엉뚱하게도, 왕건에게 보낼 국서를 견훤에게 보내 왕건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견훤이 부탁받은대로 이걸 왕건에게 전한 건 후세인이 볼 때는 나름 블랙코미디.[42]《삼국사기》의 <견훤 열전>에는 925년에 후당으로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측의 사서인 '《오대사》'에도 936년 1월에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대사》에는 사신을 보낸 주체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견신검이 즉위했을 때이므로 이는 신검이 자신의 정변을 중국 측에 알리고 국제적으로 정권을 승인받기를 노린 것이다.

일본 측의 기록을 보면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해 그들과 접촉하고자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 역사서 《부상략기(扶桑略記)》와 《본조문수(本朝文粹)》에 따르면 장언징(張彦澄), 휘암(輝巖) 등의 인물을 대마도에 여러 차례 파견하여 일본과 통교를 요구하는 한편, 옛 백제와 일본이 우호 관계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견훤을 '신라의 신하'라고 규정하여 통교를 거부했고[43], 대마도에서 약간의 식량만 받고 돌아와야 했다. 후삼국시대의 발단 배경과 겹치는 9세기 후반의 혼란 기간은 신라 해적 신라구가 극성이던 시절이었다. 신라구란 당연히 원신라영역(경상도) 출신 해적만 말하는 게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역 전체에서 온 해적을 통틀어 말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백제 유민이라고 해적질과 상관이 없다고 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신라 군인 견훤이 옛 백제 땅으로 부임한 이유도 '서남해' 해적 소탕 임무였다. 일본을 털었던 신라구를 포함해 당시의 해적 중 원신라계나 고구려계, 당나라계도 있었겠지만 그 외 많은 수는 옛 백제 영역 출신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44]

그리고 일본이 처음부터 후백제를 진심으로 신라의 신하로 규정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옛날 삼국시대 때 왜국과 우호 관계였음을 내세우는 후백제의 메시지에 상당 부분 호의를 보였으며 사실 통교하려고 했으나[45] 이렇게 하면 일본 측은 예전에 백제에게 그랬듯[46] 후백제도 지원해야 하는데, 당대의 일본은 천황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는 등 국내 사정이 너무 나빴던 탓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견훤은 건국 초에는 형식적으로 신라 왕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자칭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 백제가 일본과 통교하고 신라와 대립한 게 분명한 데 그걸 반복하겠다는 건 신라의 신하로서 할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요시노 마코토 저의 《한•일 2천년사》 참조)

그 외에도 《삼국사기》에 거란의 사신 35명이 후백제에 내빙하였으며, 견훤이 이들의 귀환길에 장군 최견을 시켜 호송케 하였으나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후당의 등주(산둥성)에 난파하여 모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란과도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외교에 관해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후백제가 외교 부문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어떤 국가도 외교 부문에서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후백제의 주적인 왕건의 고려만 해도 거란이나 일본과 잘 지내고자 하는 의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알다시피 고려는 거란과는 만부교 사건처럼 초기부터 적대 관계를 표명했으며 일본과도 건국 후 100여년 동안 제대로 된 사신단 교환이 없을 정도로 데면데면 했다. 그나마 고려도 본격적으로 후삼국 통일 싸움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47] 오대의 나라들인 후당, 후진 그리고 남쪽 십국의 나라인 오월 등 중원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48] 후백제는 중원을 포함한 모든 주변국과의 외교를 중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후백제의 이런 적극적인 러브콜은 실질적인 효과를 얻진 못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이 나라 내부 사정이 과거 삼국통일전쟁 시절과 다르게 별로 좋지 않아서 바다 건너 후백제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중국은 오대십국시대의 분열기라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 바빴고, 일본도 헤이안 시대 중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천황의 권력이 땅에 떨어지고[49], 외척인 후지와라씨의 세력이 전성기를 맞이하며, 타이라노 마사카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같은 지방세력이 강해져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후백제를 한가하게 도와줄 상태가 아니었다.

고려와 후백제는 935년 견신검의 난 이전까지는 슬슬 후백제가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그럭저럭 용호상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가 거란이나 일본과 함께 고려를 양쪽에서 공략하여 양면전쟁을 강요했다면[50] 최후의 승자는 후백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백제의 의지와 별개로 운이 없었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6.6. 문화

견훤은 신라삼최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명사 최승우와 같은 유능한 문인들을 등용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나름대로 문화의 발전에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최승우는 후백제 측에서 남긴 거의 유일무이한 역사 기록인 《대견훤기고려왕서》를 집필했다. 견훤이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무찌른 후에 보낸 편지로, 《고려사》와 《삼국사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최승우가 지은 《호본서》라는 책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사관을 두어 사서를 편찬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서 그 흔적을 희미하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후백제가 스스로 남긴 역사 기록 또한 대부분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하여 알기 힘든 부분이 많다는 점은 왠지 비슷하다.

그 외에도 불교의 진흥에도 상당히 노력한 면모가 보이는데[51], 아마도 당시에 유행하던 미륵 신앙을 사상적 토대로 이용해 보려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난세가 이어져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자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 신앙이 유행하였다. 태봉 왕 궁예 역시 이를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견훤 역시 궁예만큼 본격적으로 신정 국가를 추구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미륵 신앙을 이용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제 때에 지어졌던 금산사를 견훤이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혜거국사 비문>에 따르면 922년에 미륵사에 개탑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후삼국 중 승과를 가장 먼저 실시한 나라기도 하다. 922년도에 승과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고려보다도 매우 앞선 것이었다.

6.7. 인물

7. 왕사

대수 재위기간
1 견훤(甄萱) 892 ~ 900(칭왕, 건국 이전)
900 ~ 935(후백제 건국)
2 견신검(甄神劍) 935 ~ 936
진흥왕
구륜
선품
작진
아자개
1.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대주도금
2.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능예 애복 진호

견훤은 스스로를 부여융의 8대손이라 선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는 견훤이 이씨임을 전하는 이제가기의 특성, 백제 부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다 이씨도 아닌 김씨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전하는 족보, 견훤과 아자개의 출신 지역 추풍령 지역 일대가 눌지 마립간 이래로 400년 동안 눌지, 무열왕계 왕실에 정예병을 공급했던 역사적 사실, 추풍령 지역(옛 사벌국의 판도기도 했다)이 기원후 5세기 이래로 신라 왕실에게서 특별한 우대를 받았음이 드러난 고고학적 사실로 돌이켜보면, 진흥왕과 소비 부여씨[52]의 손자인 선품의 먼 후손 중 하나가 아자개의 선대와 혼인했고 이 사건이 가문에 구전으로 남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견훤의 3백 년 전 조상 할머니가 성왕의 딸이라는 이유로 백제 왕실의 후손을 자처한다는 건 어떻게 봐도 무리라는 점과[53] 견훤이 후백제 건국의 정당성을 내세우고자 부여융의 후손을 자칭한 점에서 이런 '어중간함'이 오히려 신빙성을 높여준다.

8. 관련 문서



[1]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광산구 지역. 892년 스스로 왕을 칭할 때는 무진주가 기반이었다.[2]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백제 부흥을 천명하고 완산주에 도읍하였다.[3] 후백제측의 정식명칭은 전주성(全州城)으로 추정되는데,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에 위치한 왕궁터 근방의 동고산성에서 대규모 유적과 함께 전주성이라 적힌 수막새가 발굴되었다. 두 유적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서 평시궁성과 전시궁성을 동시에 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두 궁성을 합쳐서 전주성이라 불렀는지 아니면 전시궁성만 전주성이라 불렀는지 불분명하다.[4] 단명한 왕조라 존재감이 낮지만 엄연히 지금까지 존속하는 성씨로 유명인으로 견미리가 있다. 다만 후백제 왕조 당대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인지 후백제가 멸망한 뒤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인지는 불명.[5] 《삼국유사》에서는 칭왕 시기에 대해 892년 혹은 889년이라는 두 전승을 모두 기록해두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庚寅(930년)이 후백제 42년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역산해보면 889년 칭왕이 맞다는 설도 있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826쪽). 다만 이 때는 외부에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는 외왕내제 비스무리한 애매한 선포였고 900년에 공식적으로 '백제 왕'으로 즉위했다.[6] 889년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7] 당장 대한민국만 봐도, 광복 후 36년이면 한창 새마을 운동 하고 있을 때다. 심지어 개헌도 6번을 했다. 36년은 아직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어영부영 굴러갈 수준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 빠르면 이미 나라 내부와 외교도 정비하고 문화 진흥까지 손댔을 시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후백제는 그랬다.[8] 완전히 다 내주는 식으로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다. 경애왕 사후 고려가 엄연히 신라 영토였던 곳에 무단으로 군부대들을 박고 인질도 일부러 잡아가는 등, 은근히 압력과 위협을 행사했다.[9] 전라북도 전주시[10] 충청남도 부여군[11] 웅주와 청주, 홍주 권역은 918년 ~ 920년에 후백제에게 넘어옴. 김갑동 저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 유민 편 참조. 두 저서에서 인용한 고려사 근거# (918년 8월 23일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개의 주현(州縣)이 모반하여 백제(百濟, 후백제)에 붙자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 知牙州諸軍事)로 임명하였다.[12] 황해도 동부, 경기도, 충청도 서부 및 전라도 북부 정도 직접 지배지, 그 외 외곽지역은 간접 지배지[13] 다만 이는 중국사의 경우와는 다르다. 5호16국 당시 북조계 왕조들이 옛 춘추전국 시대 국가들의 국호를 취한 건 그저 발흥지나 기원지를 춘추전국 시대 국가의 일자 국호로 취한 관습에 불과했을 뿐이었고, 한제국을 계승했다는 유연(전조)도 결국은 흉노 도각부가 한 황실의 의동생뻘 가문이 된다는 걸 명목으로 계승한다고 했지 한제국 자체를 잇는다고 천명하진 않았었다.[14] 옛 목지국 세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적어도 동성왕 때까지는 직접 지배화를 유보하며 자치력을 유지해주었음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어 있다. 성주탁 교수 추모회 간행 백제와 주변 세계 참조.[15] 다만 호남 동부 내륙부 일대, 즉 오늘날의 무주, 진안, 장수, 남원은 약 560년대 즈음 신라가 관산성 전투 승리의 여파로 진격해 점령해서 616년에 백제 무왕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유지했고, 무주군 일대는 아예 백제가 망할 때까지도 되찾지 못했다는 세부 사항은 있었으나, 전체 맥락에서 곁가지므로 각주로만 남겼다.[16] 정작 백제는 변한의 후계로 인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변한의 후계인 가야 국가들은 아예 이 삼한계승론과 삼한일통에서 주체로 인정을 못 받았다.[17] 당시는 한국인 해적 신라구일본 본토 서부 지역까지 탈탈 털고 있었을 정도로 기승을 부렸다.[18]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견훤은 서라벌로 가는 신라의 중요 방어선 대야성을 오랜 세월에 걸쳐 세 차례나 시도해서야 겨우 점령할 수 있을만큼 신라의 저항도 결사적이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도 없는 살림에 버틸 수 있을만큼 버티는 모습을 보여 고려 왕건도 이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9] 나주시, 지리적으로는 목포시무안군으로 보기도 한다.[20] 게다가 태봉 또한 북방의 여진족이 내리누르는 압력이 생각보다 거셌기에 마찬가지로 양면전쟁 형세였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태봉/고려가 이 족쇄에서 풀려나는 건 대거 유입된 발해인들이 대여진족 전선에 투입되고도 전력이 남아 후백제 전선에까지 투입되는 920년대 후반부터 얘기다.[21] 다만 이 시기 호남평야의 생산력을 마냥 과대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평야지대는 이 시기에는 갯벌이었고 금강과 영산강은 전형적인 감조하천으로 하류의 평야지대가 고질적인 염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금강은 논산평야까지 짠물이 올라왔다. 나주의 상실이 뼈아팠던 것은 그 영산강 감조구간의 종착지로 막대한 생산량을 보장해 줄 당대 최고의 곡창지대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는 이미 태봉 초기부터 남한강 일대의 평야지대를 확보하고 왕건이 충주 지역 유력 호족인 유긍달의 사위가 되는 등 한강 유역의 생산력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22] 승리하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대호재고, 패배한다 해도 일단 고려가 쳐들어온다는데 금산사의 견훤이나 박영규 등 친견훤파들이 언제까지고 신검 정권을 백안시할 수는 없을테니까. 견훤과 신라의 귀부 없이는 고려도 대놓고 후백제를 밀어버리는 캐삭빵급 대원정은 힘들었다.[23] 소설판에서는 최승우가 함부로 침공하면 상대방의 결속만 돕는 꼴이라며 정확하게 지적한다.[24] 특히 웅주 지역의 호족들이 대부분 후백제에 붙어서 두 나라의 최전방 전선이 북상하게 된다. 나중에 930년대가 되어서야 고려가 이 지역의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25]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익숙한 후백제 판도는 사실 이 시기 이전까지 판도로서 정확한 형세는 아니다.[26] 백제멸망전 당시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5만의 신라군과 싸웠던 황산벌 전투의 그 황산과 같은 장소다.[27] 한자로는 馬城으로, 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 혹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124-1번지에 위치한 미륵산성.[28] 드라마 태조왕건 나레이션에 말에 의하면 절간에 옮겨졌다가 등창이 터져서 죽었다고 언급한다.[29] 가령 시중은 광치나(匡治奈)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30] 잠깐 통일신라 제도로 돌아갔다가, 얼마 못가 궁예가 채택한 제도로 돌아갔다.[31] 그렇다면 외공내왕이 된다. 다만 이건 900년 전주에서 개국하기 전만 해당하고 그 이후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황제가 아닌 왕 밑에 왕이 있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는데 신라는 신라왕 아래에 갈문왕이 있었던 나라이다. 또한 신라만 그런 게 아니라 백제도 제후왕들을 뒀고 아예 마한이나 가야 소국들과 삼국의 관계도 비슷했다. 특히 아직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이 만연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왕과 황제의 구분도 엄밀하지 않았고 세계사적으로도 황제라는 개념이 없을 경우 강대국의 대왕 밑에 왕이 있는 경우는 흔했다(황제 단위의 칭호가 모든 문명권에 있던 건 아니었다). 또한 예법, 한문 지식이 성숙한 이후에도 아예 일부러 어긴 경우도 많아서 조선은 격식상으론 제후왕의 나라였지만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묘호를 몰래 사용하였고(임진왜란 때 명나라 인사들이 조선에 몇 년 이상 자리잡고 있으면서 이 점을 알게 되어서 문제 삼았던 게 정응태 무고사건이다), 일본의 지방정권이나 류큐에서는 조선왕을 황제라고 불렀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애초에 천자-제후의 격식이 구분되는 것이지 상주~전국시대만 해도 국왕이 곧 천자였다. 춘추시대에 천자인 주왕에게 명목상 신속한 제후들은 왕을 칭한 초나라를 중화가 아닌 야만 질서의 왕을 참칭했다 여겨 오히려 우습게 봤다.[32] 이는 신라 골품제의 폐쇄적인 혼인 풍조와는 대조적인데, 과거 김유신무열왕과의 혼인 동맹을 위해서 상당히 무리한 계책을 썼으며, 바다를 주름잡은 대호족 장보고조차도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드는 것은 약속까지 받아냈음에도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신라 중앙과 거리가 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은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중앙 권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고려, 후백제의 체계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태조 왕건에서도 이런 점을 묘사하여 견훤 본인이 호족 출신을 후처로 받아들이는 한편 승주(순천시) 일대의 영향력 있는 호족 박영규를 사위로 맞이하였다.[33] 원소 또한 장남 원담과 차남 원희, 조카 고간을 각각 청주, 유주, 병주로 파견하여 통치하였다.[34] 전주 일대의 현지인으로 구성된 지방군 부대였으니만큼 백제 복권이라는 기치에 더욱 쉽게 감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5] 21세기 현재의 낙동강안동댐, 임하댐 등 각종 건설 및 이명박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대규모 치수사업과 관개사업을 진행해 깊이를 깊게 파낸 인공수로이다. 현재의 낙동강을 보고 후삼국시대 낙동강을 떠올리면 곤란하다![36] 물론 현웅정을 비롯한 신라 지방 주둔 군부대들은 장교급 제외한 사병들은 현지 출신이었을 것이기에 군대 전반적으로 조정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했던 점이 반란에 쉽게 동참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휘자들이 다그쳐서 군기를 잡았다면 일이 그렇게 쉽게 될리가 없었다. 견훤이 광주로 입성할 때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의외로 통일신라가 백제에 이어 또 다시 나주보다 광주를 우대하는 기조로 일관한 탓에-이 일로 옛 침미다례 일대가 신라에 대한 반감을 키웠을 개연성은 별도로 치고-, 광주 내에서 견훤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견훤 자체가 원신라 지역 출신인 것도 이유의 일부였을 것이다.[37] 고고학적으로 전주 일대에 후백제 초기에는 상주, 문경계 고고학적 자료가 급증하고, 후백제 말기 즈음에는 서라벌계 자료가 급증하는 걸로 나타난다. 문헌 자료 없이 그냥 읽으면 당대 통일신라 왕실이 전주 일대를 강압적으로 신라화했다고 봐도 믿을 정도. 물론 당연히 이것은, 견훤이 처음에는 고향 사람들을 대거 끌어들여 정권에 참여시키고, 그 이후에는 서라벌 일대를 헤집으면서 서라벌인들을 강압적으로 대거 전주로 압송한 게 이유다.[38]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39] 해당 지역은 이후 신라부흥운동 기간에 근왕군을 일으켜 신라부흥군을 요격하기까지 한다.[40]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역은 신라 김씨 왕실이 5~6세기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국력을 기울여 군사 지역으로 키웠던 곳이었다.[41] 또한 이 지역은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아예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비록 세력 한계상 국가를 세우진 못했지만 호족들 중 그나마 가장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던 행보 자체는 정말로 가야의 후신 그 자체였다.[42] 후백제가 오월에게 보내는 사신을 왕건이 태봉국 장수 시절 체포해서 태봉으로 압송한 사건도 있었으니, 견훤 입장에서는 오월과 후백제 사이의 관계를 자랑하고 나름의 도량도 뽐낸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3권 참조[43] 19세기 서구 열강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조선 정부는 조선이 청나라의 신하국이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가 판단할 일이지 외국과 개별적으로 통상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청나라는 또 청나라대로 “조선이 니들이랑 통상하고 말고는 조선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우리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고.[44] 이렇게 신라구는 당연히 그들을 토벌하려 한 신라 정부와도 자주 싸움을 치렀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아예 그냥 한구(韓寇)라고 불린 경우가 잦다. 신라의 정규조직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신라 정부와도 적대적인, 출신성분도 다양한 집단을 뭉뚱그려 신라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기엔 부적절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 이후의 고려-조선과 중국에서 왜구와 일본 정부를 분리해서 지칭했던 것과 비슷하다.[45] 이 때 후백제는 일본에게 꽤 저자세로 나갔다. 발해의 경우처럼 사방이 적이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동맹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46] 백제의 구 마한 세력 공략과 수시로 벌어지는 고구려·신라와의 전쟁, 관산성 전투, 백합야 전투와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벌어진 백강 전투 등 일본은 백제를 도와 원군을 정말 많이 보냈다.[47] 사실 초기에는 해외 외교에 그다지 신경을 못 썼다고 보는 게 맞긴 하다. 견훤의 후백제가 왕건 즉위 때는 이미 자리 잡은 국가였던 반면 왕건의 고려는 신생국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건국 초부터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여러 호족 세력들을 견제 및 포섭해야 했고 그 작업을 끝마친 이후에도 한동안 후백제와 혈투를 벌이다 924년 공산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에는 오히려 밀리는 양국이 되었던 것도 해외 외교에 영향을 쓰지 못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완벽히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야 본격적으로 중원 국가들과의 외교에 신경을 쓰게 된다.[48] 933년에 건국 초부터 사용하던 연호 '천수'를 폐지하고 후당의 연호를 사용했을 정도. 이는 후대로도 이어져 후진, 송의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른다.[49] 이 때쯤부터 섭정, 관백, 쇼군 등이 실제 정치를 맡고 천황은 허수아비인 상황이 거의 1,000년이 지난 메이지 유신까지 간다.[50]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킨 뒤 여요전쟁을 벌이는 한편 송나라를 압박하는 등 당대 최강의 군사국가로 성장하였다.[51] 태조 왕건에서는 스스로 귀국한걸로 나온 승려 경보는 사료에서는 견훤의 지원을 받은 인연으로 그의 왕사가 된 걸로 나온다.[52] 이제가기에서는 진흥왕의 처 사도왕후의 시호가 백숭부인이라고 적혀 있으나, 그것은 사도왕후의 시호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53] 백제는 신라와 달리 왕족과 귀족의 결혼이 활발했고 이 과정에서 흑치씨와 귀실씨와 같은 귀족 분가들이 창설되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 백제계 호족들은 대부분 대성팔족을 비롯한 백제 귀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논리라면 대부분의 백제계 호족이 다 부여씨 후예를 자처 가능하다. 진짜 부여씨의 후예로 추정되는 서씨 호족도 있는 판이니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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