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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덕궁(龍德宮) 또는 용언성(龍堰城), 용언궐(龍堰闕), 용언궁(龍堰宮)은 고려 예종이 서경 평양부에 지은 별궁이다. 용언성, 용언궐, 용언궁이라고도 한다.2. 설명
예종은 아버지 숙종의 뒤를 이어 여진정벌에 힘 썼는데 윤관을 시켜 동북 9성을 쌓는데 성공한다.이후 예종은 북진정책의 상징인 서경을 매우 중시해 자주 행차했고 아버지 숙종이 남경 별궁을 건설한 것처럼 서경 별궁 건설을 추진한다.
예종은 계획을 세울 때 풍수지리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현실적인 신하들의 조언에도 관심을 기울여 공사 시작을 늦게 시작한다. 서경 용언구허(西京 龍堰舊墟)란 곳에 신궁을 건설했는데 오연총[1]이란 신하는 신궁을 짓는 것을 매우 반대했다. 용언이란 곳에 지어 용언궁이란 별칭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예종 재위 11년, 1116년에 '용덕궁(龍德宮)'이 완성되어 직접 서경에 행차한다. 궁궐의 이름은 '용의 덕성'이란 뜻으로 예종의 의지가 크게 담겼다. 후대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화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종은 대동강을 타고 서경 장락궁에 먼저 들러 업무를 보고 영명사 등 여러 사찰을 둘러본다. 그 다음 구제궁에 들렀다가 4월 용덕궁에 도착한다.
짐(朕)이 조종(祖宗)께서 쌓아온 덕을 이어 삼한(三韓)을 보유했으나, 인신(人神)의 희망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 늘 고민하느라 편안하지 못했다.
오늘 일관(日官)의 건의에 따라 서도(西都)로 옮겨 신교(新敎)를 반포해 새롭게 시작하고 백성들이 귀의할 곳을 알게 해 선왕(先王)의 구업(舊業)을 이어 갈 것이다.
또한 그 성현(彼 聖賢)의 교훈(訓)과 여러 도참(諸 圖讖)의 말(言)에 따르면:
음양을 따르라.
불석을 존경하라.
형벌을 밝게 해라.
유명을 분별해라.
삼보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사선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
이 말대로 따르되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원구단(圓丘), 태묘(太廟), 사직(社稷), 적전(籍田) 및 여러 원릉(園陵)은 국가의 경중(敬重)의 장소다. 관리하는 담당자들은 때에 맞추어 수리해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라.
소위 국선(國仙)은, 근래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많아져 되려는 자가 없어졌으니 대관자손(大官子孫)을 자리에 임명토록 하라.
문무양학은 국가 교화의 근원이니 일찍이 지휘를 내려 양학을 세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장상을 키우려 했으나 유사각집이 서로 말이 달라 결정된 의제가 없으니 빠르게 아뢰어 시행하라.
그리고 국풍(國風)을 검소하게 하려하나 금조정(今朝廷)의 선비(士庶)들의 의복(衣服)이 번잡하여 존비(尊卑)를 가릴 수 없다. 그러니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에 명하니 조종대(祖宗代)의 식(式)과 예(例)를 따라 아뢰게 하라.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서경 용덕궁에서 제령(制)을 내리다.
오늘 일관(日官)의 건의에 따라 서도(西都)로 옮겨 신교(新敎)를 반포해 새롭게 시작하고 백성들이 귀의할 곳을 알게 해 선왕(先王)의 구업(舊業)을 이어 갈 것이다.
또한 그 성현(彼 聖賢)의 교훈(訓)과 여러 도참(諸 圖讖)의 말(言)에 따르면:
음양을 따르라.
불석을 존경하라.
형벌을 밝게 해라.
유명을 분별해라.
삼보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사선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
이 말대로 따르되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원구단(圓丘), 태묘(太廟), 사직(社稷), 적전(籍田) 및 여러 원릉(園陵)은 국가의 경중(敬重)의 장소다. 관리하는 담당자들은 때에 맞추어 수리해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라.
소위 국선(國仙)은, 근래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많아져 되려는 자가 없어졌으니 대관자손(大官子孫)을 자리에 임명토록 하라.
문무양학은 국가 교화의 근원이니 일찍이 지휘를 내려 양학을 세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장상을 키우려 했으나 유사각집이 서로 말이 달라 결정된 의제가 없으니 빠르게 아뢰어 시행하라.
그리고 국풍(國風)을 검소하게 하려하나 금조정(今朝廷)의 선비(士庶)들의 의복(衣服)이 번잡하여 존비(尊卑)를 가릴 수 없다. 그러니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에 명하니 조종대(祖宗代)의 식(式)과 예(例)를 따라 아뢰게 하라.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서경 용덕궁에서 제령(制)을 내리다.
예종의 태자 인종이 지은 대화궁은 묘청의 난을 일으킨 묘청이 주도해서 지은 궁궐이라 고려의 흑역사로 묻혔으나 예종이 지은 용덕궁은 화려하기도 하고 별 다른 구린 점도 없어 먼 후대인 고종 대, 충렬왕 대까지 그 명성이 이어졌다.
동문선 104권에 '서경 용언궁 대연치어'가 남아있다. 낙랑군 개국후 김부식의 형 김부일이 지었다. 서경을 호경, 청도(淸都)라 하고 백벽(百辟)[2]이 예종에게 조천한다고 했다.
근데 특이한건 용덕궁이 별로 화려하지 않다고 언급했다. 뒤이어 이는 예종이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기 싫어 일부러 검소하게 만든 것이라고 하는 걸 보면 단순히 예종을 찬양하려한 표현일 수도 있다. 아님 정말 당시엔 작았다가 조금씩 화려하게 바꾼걸지도?
보한집에선 용언궐로 등장하는데, 예종은 용언궐에서 상원수 윤관에게 부월을 주어 북벌에 나서게 했다고 한다.
3. 주요 건축
- 건원전(乾元殿)
아쉽게도 용덕궁의 건축물이나 구조는 기록 실전으로 알 수 없다.
4. 후대 기록
4.1. 삼도부
고종 시기의 신하인 최자는 서도[3], 북경[4], 강도[5] 세 수도에 대해 논하는 '삼도부' 부시를 지었다.이 부시는 구제궁 문서에도 조금 나오는데 '용언궐(龍堰闕)'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구제궁과 함께 동명제(東明帝)의 궁궐이었다고 한다.[6]
또한 서도의 가장 아름다운 두 궁전 중 하나로 나오며 그 멋짐이 하늘과 귀신도 이기지 못한다고 해놓았다. 이걸 보면 어쨌든 화려하긴 했던 걸로 보인다. 용언궐의 근처엔 조천대(朝天臺)가 있어 제(帝)가 승천했다고 한다. 또한 원문엔 '서도와 북경의 명성'을 '이국지명(二國之名)' 두 나라의 명성이라 하여 은근 두 수도를 제후국으로 취급하고 있다.
4.2. 삼국유사
삼국유사엔 용언성(龍堰城)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웃기게도 고려 예종이 지은 궁성이 고구려 보장왕 대에 지은 궁궐로 변해있다.삼국유사는 '고려고기(高麗古記)'란 책을 인용했는데 고구려를 미워한 수나라의 신하 양명이 고구려의 신하 개소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생한 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를 수입하자고 요청했고 보장왕은 수락, 당태종에게 부탁한다.
이에 당태종은 도교의 도사들을 보내 응답한다. 이 도사들이 고구려 '고평양성(古平壤城)'[7]을 보곤 이 성이 반달 모양의 성, 즉 신월성(新月城)의 모습[8]을 하고 있으니 보름달 모양의 성이 필요하다며 남하룡(南河龍)[9]을 소환해 만월성(滿月城)을 짓고는 용언성(龍堰城)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영석(靈石)을 짓밟아 깨트리기도 했다며 이 영석이 세간엔 조천석이라고 불린다고 해놨다.
척 봐도 도교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찼다는 걸 알 수 있다. 도교를 받아드리자 한 주체인 연개소문은 적국인 수나라 사람의 전생이 됐고 당나라 도사들은 용을 부려 고구려에 노동이 많이 필요한 대공사를 추진하고 신령한 돌을 깨트리는 악당이다. 이는 불교 승려인 일연이 고구려 멸망 원인을 도교 수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화가 기록된 부분도 삼국유사 제 3권 흥법(興法) 중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에 있다. 제목은 '보장이 노(자)를 믿자 승려 보덕이 암자를 옮겼다.'란 뜻이다. 보덕대사(普德大士)는 원효와 의상의 스승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며 도사들이 고구려에 오자 나라가 망할 것이라 예언한 뒤 백제로 떠나 현 전주 지역에서 열반종을 개종하였다고 한다.
일연과 고려고기는 용덕궁을 도교의 산물로 본 셈이다. 하지만 실제론 용덕궁은 전통신앙과 섞인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다. 애초 용덕이나 용언은 도교보단 풍수지리의 용어에 가깝다.
5. 위치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569219&cid=46621&categoryId=4662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용덕궁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용덕궁 링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용덕궁은 평양성 북성 구역 남쪽에 위치했을 것이라 본다. 구제궁도 북성 구역 근처에 있으니 가까운 위치에 있는 셈. 용덕궁을 세운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론 용언 구허, 용의 둑, 보의 옛 터란 곳인데 이 용의 둑, 보는 고구려의 장안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6. 기타
- 용덕궁은 친구 구제궁과 같이 고구려 때의 궁궐이란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구제궁과 다르게 용덕궁은 누가 지었는지, 어디다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가 고려사 등 사서에 정확히 등장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전설로 여겨지고 있다.
구제궁 또한 전설 뿐이지만 우선 지어진 시기 미상, 구제궁 터가 옛 고구려 영명사의 터, 용덕궁보다 더 오래된 설화 전래 등으로 전설이 실제일 가능성이 용덕궁보단 훨씬 높다.
- 예종이 용덕궁 건설을 오연총의 반대에도 지은 이유는 왕권 강화를 위함이다. 서경에 큰 힘을 실어주고 북방 정벌에 나섰던 자들을 지원함으로써 개경의 중앙귀족과 문벌 가문들을 견제한 것이다. 서경파가 중앙 정계에서 힘을 쓰려면 개경파를 밀쳐내야되고, 개경파는 서경파를 견제해야 기득권이 유지될테니 예종은 이런 이이제이 효과로 자연스럽게 왕권 강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아들 인종도 대화궁 건설로 이런 효과를 노렸지만... 제어 실패로 인해 묘청의 난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