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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漢城府 | 개성부開城府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외관직外官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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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 부 | 경주慶州 | 전주全州 | 영흥永興[2] | 평양平壤 | ||||||||||||||
대도호부 | 안동安東 | 강릉江陵 | 안변安邊 | 영변寧邊 | ||||||||||||||
목 | 광주廣州 여주驪州 파주坡州 양주楊州 |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 상주尙州 진주晉州 성주星州 |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 황주黃州 해주海州 | 원주原州 | 안주安州 정주定州 의주義州 | |||||||||||
도호부 | 수원水原 강화江華 부평富平 남양南陽 이천利川 인천仁川 장단長湍 | 창원昌原 김해金海 영해寧海 밀양密陽 선산善山 청송靑松 대구大丘 | 남원南原 장흥長興 순천順天 담양潭陽 | 연안延安 평산平山 서흥瑞興 풍천豐川 | 회양淮陽 양양襄陽 춘천春川 철원鐵原 삼척三陟 | 경성鏡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흥慶興 부령富寧 북청北靑 덕원德源 정평定平 갑산甲山 | 강계江界 창성昌城 성천成川 삭주朔州 숙천肅川 구성龜城 | |||||||||||
군 | 양근楊根 풍덕豊德 안산安山 삭녕朔寧 안성安城 마전麻田 고양高陽 | 임천林川 단양丹陽 청풍淸風 태안泰安 한산韓山 서천舒川 면천沔川 천안天安 서산瑞山 괴산槐山 옥천沃川 온양溫陽 | 합천陜川 함양咸陽 초계草溪 청도淸道 영천永川 예천醴泉 영천榮川 흥해興海 울산蔚山 양산梁山 함안咸安 김산金山 풍기豐基 곤양昆陽 | 보성寶城 익산益山 고부古阜 영암靈巖 영광靈光 진도珍島 낙안樂安 순창淳昌 금산錦山 진산珍山 김제金堤 여산礪山 | 곡산谷山 봉산鳳山 안악安岳 재령載寧 수안遂安 배천白川 신천信川 | 평해平海 통천通川 정선旌善 고성高城 간성杆城 영월寧越 평창平昌 | 삼수三水 문천文川 고원高原 단천端川 함흥咸興[3] | 중화中和 상원祥原 덕천德川 개천价川 자산慈山 가산嘉山 선천宣川 곽산郭山 철산鐵山 용천龍川 순천順川 희천熙川 이산理山 벽동碧潼 운산雲山 박천博川 위원渭原 영원寧遠 | ||||||||||
현 현령(縣令, 종5품) 파견 | 용인龍仁 진위振威 영평永平 양천陽川 금포金浦 | 문의文義 | 영덕盈德 경산慶山 동래東萊 고성固城 거제巨濟 의성義城 남해南海 | 창평昌平 용담龍潭 임피臨陂 만경萬頃 금구金溝 능성綾城 | 신계新溪 옹진瓮津 문화文化 우봉牛峯 | 금성金城 울진蔚珍 흡곡歙谷 | 용강龍岡 삼화三和 함종咸從 영유永柔 증산甑山 삼등三登 순안順安 강서江西 | |||||||||||
현 현감(縣監, 종6품) 파견 | 지평砥平 포천抱川 적성積城 과천果川 금천衿川 교동喬桐 통진通津 교하交河 연천漣川 음죽陰竹 양성陽城 양지陽智 가평加平 죽산竹山 | 홍산鴻山 제천堤川 덕산德山 평택平澤 직산稷山 회인懷仁 정산定山 청양靑陽 연풍延豐 음성陰城 청안淸安 은진恩津 회덕懷德 진잠鎭岑 연산連山 이산尼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진천鎭川 결성結城 보령保寧 해미海美 당진唐津 신창新昌 예산禮山 목천木川 전의全義 연기燕岐 영춘永春 보은報恩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아산牙山 | 개령開寧 거창居昌 삼가三嘉 의령宜寧 하양河陽 용궁龍宮 봉화奉化 청하淸河 언양彦陽 칠원漆原 진해鎭海 하동河東 인동仁同 진보眞寶 문경聞慶 함창咸昌 지례知禮 안음安陰 고령高靈 현풍玄風 산음山陰 단성丹城 군위軍威 비안比安 의흥義興 신녕新寧 예안禮安 연일延日 장기長鬐 영산靈山 창녕昌寧 사천泗川 기장機張 웅천熊川 | 광양光陽 용안龍安 함열咸悅 부안扶安 함평咸平 강진康津 옥과玉果 고산高山 태인泰仁 옥구沃溝 남평南平 흥덕興德 정읍井邑 고창高敞 무장茂長 무안務安 구례求禮 곡성谷城 장성長城 진원珍原 운봉雲峯 임실任實 장수長水 진안鎭安 무주茂朱 동복同福 화순和順 흥양興陽 해남海南 대정大靜 정의旌義 | 장련長連 송화松禾 장연長淵 강령康翎 은률殷栗 강음江陰 토산兔山 | 이천伊川 평강平康 금화金化 낭천狼川 홍천洪川 양구楊口 인제麟蹄 횡성橫城 안협安峽 | 홍원洪原 이성利城 길성吉城 명천明川 | 양덕陽德 맹산孟山 태천泰川 강동江東 은산殷山 | ||||||||||
주 | | |||||||||||||||||
[1] 1470년(성종 1) 함경도에서 개칭, 1498년(연산군 4) 함경도로 개칭. [2] 1470년(성종 1) 대도호부에서 승격, 1498년(연산군 4) 대도호부로 강등. [3] 1470년(성종 1) 부에서 강등, 1498년(연산군 4) 부로 승격. [4] 1592년 기점으로 속주로서의 지위 상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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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부(仁川府) | 인천, 부평, 강화, 교동, 금포, 통진, 양천, 시흥, 과천, 안산, 수원, 남양 | |||||||||||||||||
충주부(忠州府) | 충주,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음성, 진천, 괴산, 연풍, 청안, 여주, 이천(利川), 음죽, 용인, 양지, 죽산, 원주, 평창, 정선, 영월 | |||||||||||||||||
홍주부(洪州府) | 홍주, 결성, 예산, 덕산, 대흥, 서산, 해미, 태안, 청양, 정산, 아산, 온양, 신창, 당진, 면천, 보령, 남포, 서천, 비인, 한산, 임천, 홍산 | |||||||||||||||||
공주부(公州府) | 공주, 천안, 목천, 직산, 진위, 평택, 안성, 양성, 회덕, 진잠, 연기, 전의, 은진,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청주, 문의, 보은, 회인,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금산(錦山), 진산 | |||||||||||||||||
전주부(全州府) | 전주, 고산, 익산, 함열, 여산, 용안, 옥구, 임피, 김제, 금구, 만경, 정읍, 고부, 태인, 부안, 고창, 흥덕, 무장, 장성, 영광, 지도 | |||||||||||||||||
남원부(南原府) | 남원, 운봉, 장수, 무주, 진안, 용담, 임실, 순창, 담양, 창평, 곡성, 옥과, 구례, 순천(順天), 광양, 돌산 | |||||||||||||||||
나주부(羅州府) | 나주, 남평, 광주(光州), 능주, 화순, 동복, 낙안, 흥양,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함평, 무안, 진도, 완도 | |||||||||||||||||
제주부(濟州府) | 제주, 정의, 대정 | |||||||||||||||||
진주부(晉州府) | 진주, 산청, 단성, 함양, 안의, 하동, 거창, 사천, 곤양, 남해, 합천, 초계, 삼가, 고성(固城), 의령, 함안, 칠원, 창원, 진해, 웅천, 김해 | |||||||||||||||||
동래부(東萊府) | 동래, 기장, 양산, 거제, 울산, 언양, 경주, 연일, 장기, 흥해 | |||||||||||||||||
대구부(大邱府) | 대구, 현풍, 경산, 하양, 자인, 인동, 칠곡, 선산, 금산(金山), 지례, 개령, 성주, 고령, 청도, 영천(永川), 신녕, 의성, 비안, 군위, 의흥, 밀양, 창녕, 영산 | |||||||||||||||||
안동부(安東府) | 안동, 예안, 청송, 진보, 영양, 청하, 영천(榮川), 순흥, 풍기, 상주, 함창, 문경, 예천, 용궁, 영덕, 영해, 봉화 | |||||||||||||||||
강릉부(江陵府) | 강릉, 울진, 평해, 삼척, 양양, 고성(高城), 간성, 통천, 흡곡 | |||||||||||||||||
춘천부(春川府) | 춘천, 홍천, 낭천, 횡성, 양구, 인제, 철원, 금화, 금성, 평강, 회양, 양근, 지평 | |||||||||||||||||
개성부(開城府) | 개성, 풍덕, 장단, 삭녕, 마전, 이천(伊川), 안협, 금천, 토산, 평산, 수안, 신계, 곡산 | |||||||||||||||||
해주부(海州府) | 해주, 연안, 배천, 옹진, 강령, 장연, 송화, 풍천, 안악, 은률, 장련, 재령, 신천, 문화, 서흥, 봉산 | |||||||||||||||||
평양부(平壤府) | 평양, 삼화, 용강, 강서, 증산, 함종, 중화, 상원, 황주, 강동, 삼등, 성천, 양덕, 안주, 영유, 숙천, 순안, 순천(順川), 은산, 자산, 맹산, 영원, 개천, 덕천, 영변, 운산, 희천 | |||||||||||||||||
의주부(義州府) | 의주, 용천, 선천, 철산, 정주, 곽산, 박천, 가산, 태천, 구성, 삭주, 창성, 벽동 | |||||||||||||||||
강계부(江界府) | 강계, 후창, 자성, 초산, 위원, 장진 | |||||||||||||||||
함흥부(咸興府) | 함흥, 덕원, 정평, 영흥, 고원, 문천, 안변, 단천, 이원, 북청, 홍원 | |||||||||||||||||
경성부(鏡城府) | 경성, 부령, 길주, 명천,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 |||||||||||||||||
갑산부(甲山府) | 갑산, 삼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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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 }}} {{{#!wiki style="margin: -31px -1px -11px" {{{#!wiki style="margin: -31px -1px -11px" | 도 | ||||||||||||||||
경기 京畿 | 1등군 | 광주廣州 개성開城 강화江華 인천仁川 | ||||||||||||||||
2등군 | 수원水原 | |||||||||||||||||
3등군 | 여주驪州 양주楊州 장단長湍 통진通津 | |||||||||||||||||
4등군 | 파주坡州 이천利川 부평富平 남양南陽 풍덕豊德 포천抱川 죽산竹山 양근楊根 안산安山 삭녕朔寧 안성安城 고양高陽 금포金浦 영평永平 마전麻田 교하交河 가평加平 용인龍仁 음죽陰竹 진위振威 양천陽川 시흥始興 지평砥平 적성積城 과천果川 연천漣川 양지陽智 양성陽城 교동喬桐 | |||||||||||||||||
5등군 | - | |||||||||||||||||
충청북도 忠淸北道 | 1등군 | 충주忠州 청주淸州 | ||||||||||||||||
2등군 | - | |||||||||||||||||
3등군 | 옥천沃川 진천鎭川 | |||||||||||||||||
4등군 | 청풍淸風 괴산槐山 보은報恩 단양丹陽 제천堤川 회인懷仁 청안淸安 영춘永春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연풍延豐 음성陰城 | |||||||||||||||||
5등군 | - | |||||||||||||||||
충청남도 忠淸南道 | 1등군 | 공주公州 | ||||||||||||||||
2등군 | 홍주洪州 | |||||||||||||||||
3등군 | 한산韓山 서천舒川 면천沔川 서산瑞山 덕산德山 임천林川 홍산鴻山 은진恩津 | |||||||||||||||||
4등군 | 태안泰安 온양溫陽 대흥大興 평택平澤 정산定山 청양靑陽 회덕懷德 진잠鎭岑 연산連山 노성魯城 부여扶餘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결성結城 보령保寧 해미海美 당진唐津 신창新昌 예산禮山 전의全義 연기燕岐 아산牙山 직산稷山 천안天安 문의文義 목천木川 | |||||||||||||||||
5등군 | - | |||||||||||||||||
전라북도 全羅北道 | 1등군 | 전주全州 남원南原 | ||||||||||||||||
2등군 | 고부古阜 김제金堤 태인泰仁 | |||||||||||||||||
3등군 | 여산礪山 금산錦山 익산益山 임피臨陂 금구金溝 함열咸悅 부안扶安 무주茂朱 순창淳昌 임실任實 진안鎭安 | |||||||||||||||||
4등군 | 진산珍山 만경萬頃 용안龍安 고산高山 옥구沃溝 정읍井邑 용담龍潭 운봉雲峯 장수長水 구례求禮 | |||||||||||||||||
5등군 | - | |||||||||||||||||
전라남도 全羅南道 | 1등군 | 광주光州 나주羅州 영암靈巖 영광靈光 순천順天 제주濟州 | ||||||||||||||||
2등군 | 보성寶城 흥양興陽 장흥長興 함평咸平 강진康津 해남海南 무장茂長 담양潭陽 | |||||||||||||||||
3등군 | 능주綾州 낙안樂安 무안務安 남평南平 진도珍島 흥덕興德 장성長城 | |||||||||||||||||
4등군 | 창평昌平 광양光陽 동복同福 화순和順 고창高敞 옥과玉果 곡성谷城 완도莞島 지도智島 돌산突山 | |||||||||||||||||
5등군 | 대정大靜 정의旌義 | |||||||||||||||||
경상북도 慶尙北道 | 1등군 | 상주尙州 경주慶州 | ||||||||||||||||
2등군 | 대구大丘 성주星州 의성義城 영천永川 안동安東 | |||||||||||||||||
3등군 | 예천醴泉 김산金山 선산善山 청도淸道 | |||||||||||||||||
4등군 | 청송靑松 인동仁同 영해寧海 순흥順興 칠곡漆谷 풍기豐基 영덕盈德 용궁龍宮 하양河陽 영천榮川 봉화奉化 청하淸河 진보眞寶 군위軍威 의흥義興 신녕新寧 예안禮安 연일延日 개령開寧 문경聞慶 지례知禮 함창咸昌 영양英陽 흥해興海 경산慶山 자인慈仁 비안比安 현풍玄風 고령高靈 장기長鬐 | |||||||||||||||||
5등군 | - | |||||||||||||||||
경상남도 慶尙南道 | 1등군 | 동래東萊 진주晉州 | ||||||||||||||||
2등군 | 김해金海 밀양密陽 | |||||||||||||||||
3등군 | 울산蔚山 의령宜寧 창녕昌寧 창원昌原 거창居昌 하동河東 합천陜川 함안咸安 함양咸陽 고성固城 | |||||||||||||||||
4등군 | 양산梁山 언양彦陽 영산靈山 기장機張 거제巨濟 초계草溪 곤양昆陽 삼가三嘉 칠원漆原 진해鎭海 안의安義 산청山淸 단성丹城 남해南海 사천泗川 웅천熊川 | |||||||||||||||||
5등군 | - | |||||||||||||||||
황해도 黃海道 | 1등군 | 황주黃州 안악安岳 | ||||||||||||||||
2등군 | 해주海州 평산平山 봉산鳳山 | |||||||||||||||||
3등군 | 연안延安 곡산谷山 서흥瑞興 장연長淵 재령載寧 수안遂安 배천白川 신천信川 금천金川 문화文化 | |||||||||||||||||
4등군 | 풍천豐川 신계新溪 장련長連 송화松禾 은률殷栗 토산兔山 옹진瓮津 강령康翎 | |||||||||||||||||
5등군 | - | |||||||||||||||||
평안남도 平安南道 | 1등군 | 평양平壤 | ||||||||||||||||
2등군 | 중화中和 용강龍岡 | |||||||||||||||||
3등군 | 성천成川 함종咸從 삼화三和 순천順川 상원祥原 영유永柔 강서江西 안주安州 | |||||||||||||||||
4등군 | 자산慈山 숙천肅川 덕천德川 개천价川 영원寧遠 은산殷山 양덕陽德 맹산孟山 강동江東 증산甑山 삼등三登 순안順安 | |||||||||||||||||
5등군 | - | |||||||||||||||||
평안북도 平安北道 | 1등군 | 의주義州 강계江界 | ||||||||||||||||
2등군 | - | |||||||||||||||||
3등군 | 영변寧邊 정주定州 선천宣川 | |||||||||||||||||
4등군 | 초산楚山 창성昌城 구성龜城 철산鐵山 용천龍川 삭주朔州 위원渭原 벽동碧潼 가산嘉山 곽산郭山 희천熙川 운산雲山 박천博川 태천泰川 자성慈城 후창厚昌 | |||||||||||||||||
5등군 | - | |||||||||||||||||
강원도 江原道 | 1등군 | - | ||||||||||||||||
2등군 | - | |||||||||||||||||
3등군 | - | |||||||||||||||||
4등군 | 춘천春川 원주原州 강릉江陵 회양淮陽 양양襄陽 철원鐵原 삼척三陟 평해平海 통천通川 정선旌善 고성高城 간성杆城 영월寧越 평창平昌 금성金城 울진蔚珍 흡곡歙谷 이천伊川 평강平康 금화金化 낭천狼川 홍천洪川 양구楊口 인제麟蹄 횡성橫城 안협安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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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咸鏡南道 | 1등군 | 덕원德源 | ||||||||||||||||
2등군 | 함흥咸興 단천端川 영흥永興 | |||||||||||||||||
3등군 | 북청北靑 안변安邊 정평定平 | |||||||||||||||||
4등군 | 갑산甲山 삼수三水 장진長津 이원利原 문천文川 고원高原 | |||||||||||||||||
5등군 | - | |||||||||||||||||
함경북도 咸鏡北道 | 1등군 | 경흥慶興 | ||||||||||||||||
2등군 | 길주吉州 | |||||||||||||||||
3등군 | 회령會寧 종성鍾城 | |||||||||||||||||
4등군 | 경성鏡城 경원慶源 온성穩城 부령富寧 명천明川 무산茂山 | |||||||||||||||||
5등군 | - | }}}}}}}}}}}} |
조선의 부 {{{#!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fff,#1f2023><tablebgcolor=#ffffff,#1f2023> 평양부 平壤府 Pyeongyang-bu | }}} | |||
관아 소재지 | 평안도 평양부 평양읍 내성 인흥부 의리방(義理坊) | ||||
하위 행정구역 | 4부 46방[1] | ||||
인구 | 10만 7592명[2] | ||||
인구밀도 | 3,359.3명[3] | ||||
전신 | 서경 | ||||
후신 | 평양부 (일제강점기) | ||||
마지막 평안감사 | 김만식(金晚植)[4] | ||||
마지막 평양부사[5] | 박용관(朴用觀)[6] | ||||
현재 | 평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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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평양을 그린 <평양성도>에 나타난 조선후기 평양부의 모습 |
평양부 중심지역과 대동강 전경 | 평양부 읍내와 대동관 전경 |
1. 개요
조선 시대 평안도의 중심도시이자 조선에서 수도 한성부 다음으로 컸던 제2의 도시. 평안도 뿐만 아니라 조선 8도를 통틀어서 평양부보다 확실히 우위였던 지역은 수도인 한성부가 유일할 정도로 그 지위와 위상이 높았고,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도로서 그 역사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반도 북부지역 최대의 도시로, 의주부와 안주목과 더불어 손에 꼽히는 서북지역 고을의 지위를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지하였던 덕분에 여러가지 문화와 전통이 어울러지고 만들어지는 예향의 고장이었다. 또한 조선 건국 이후 멸망할때까지 총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평안감영이 이곳에 위치하였으며, 평안감사(관찰사)가 평양부를 포함한 평안도 전역을 자치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었던 권력의 고을이다.[7]
다만 인구 규모와 영향력과는 별개로 고려 말기의 원나라의 침공과 홍건적의 준동 같은 혼란 탓에 조선시대까지 내려온 명문가가 거의 없어 평양 사람들은 중앙 정계에서는 입지가 거의 없었고, 그 대신 북방의 정세가 차츰 안정되자 조선 후기부터 중국과의 인접성 및 상공업의 발달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곳의 상인은 유상(柳商)[8]으로 불리며 의주부, 개성부, 한성부, 동래부의 상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2. 역사와 문화
조선 왕조 풍패지향 朝鮮王朝豊沛之鄕 | |||||
전주부 | 함흥부 | 개성부 | 평양부 | 영흥부 | 경흥부 |
<colbgcolor=#BDB76B> 평안감사향연도 |
西都古高句麗所都也, 控帶山河, 氣像秀異, 自古奇人異士多出焉
서도는 옛 고구려가 도읍으로 삼은 곳으로, 산과 강을 끼고 기상이 빼어나 예로부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인로, 「파한집(破閑集)」 하권(卷下) 中
서도는 옛 고구려가 도읍으로 삼은 곳으로, 산과 강을 끼고 기상이 빼어나 예로부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인로, 「파한집(破閑集)」 하권(卷下) 中
上謂承政院曰: "太祖少時睟容在平壤、開城府, 晩年睟容在咸興、全州, 蓋平壤, 太祖卽位後所幸之地。 且平壤、開城, 皆朝廷使臣經過之處, 奉安晩年睟容, 全州、咸興、慶州則奉安少時睟容何如?且睟容之邊, 欲書某王之影, 然古無其制, 其擬議以啓。"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태조의 젊으셨을 때 수용이 평양과 개성에 있고, 만년의 수용이 함흥과 전주에 있는데, 대개 평양은 태조께서 즉위하신 뒤에 거둥하신 땅이요, 또 평양과 개성부는 다 중국의 사신이 경과하는 곳이니, 만년의 수용을 봉안하여야 할 것이요, 전주·함흥·경주는 소시의 수용을 봉안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또 수용의 가장자리에다 어느 왕의 영이라고 쓸까 하는데, 예전에 그런 제도가 없으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계축 3번째 기사 중에서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태조의 젊으셨을 때 수용이 평양과 개성에 있고, 만년의 수용이 함흥과 전주에 있는데, 대개 평양은 태조께서 즉위하신 뒤에 거둥하신 땅이요, 또 평양과 개성부는 다 중국의 사신이 경과하는 곳이니, 만년의 수용을 봉안하여야 할 것이요, 전주·함흥·경주는 소시의 수용을 봉안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또 수용의 가장자리에다 어느 왕의 영이라고 쓸까 하는데, 예전에 그런 제도가 없으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계축 3번째 기사 중에서
평양부(平壤府)는 현 한반도에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대도시이자 평안도 지역의 국방을 비롯한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던 대도시였다. 역사적으로만 따져도 고조선의 후기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로 비정되는 곳 중 하나인데다 고구려의 3번째 수도였으며, 고려의 부수도들이었던 동경, 남경과 더불어서 제2수도인 서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성장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도 명실상부 제2의 도시의 역할을 여전히 떠맡은 조선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비록 고려 후기에 들어서는 묘청의 난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이유로 지위가 약화되기는 했으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무려 종2품의 유수가 파견되는 등 그 명성을 유지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북국시대에 폐허로 전락했던 평양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에 의해 대대적으로 재건되었다. 고구려 계승 의식과 도참설에 입각해 태조는 서경을 중시하라는 유훈을 남겼고 역대 고려 국왕들의 대대적인 지원 덕분에 서경은 개성의 중앙행정기구와 동일한 독립적인 행정기구를 설치하여 관할할 정도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995년(성종 14년)에 서경에 3품 이상의 지서경유수(知西京留守)를 두어 서경 지역의 업무를 중앙정권의 직접적인 통제가 없이 총괄하게 했으며, 4품 이상의 부유수를 1명 두었고, 6품 이상의 판관을 2명, 7품 이상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2명과 장서기를 1명, 8품 이상의 법조를 1명씩 두는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부수도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1062년(문종 16년)에는 서경에 개경과 동일한 행정구역인 서경기4도(西京畿四道)를 설치하였으며, 1102년(숙종 7년)에 문·무반(文武班)과 5부(部)를 별도로 두게 하여 수도 개경과 대등한 제도·위치 등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태조와 정종은 아예 서경으로의 천도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 운동과 뒤이은 묘청의 난으로 인해 개경의 중앙정부에 의해 서경기4도는 폐지, 6현[9]으로 재편되었으며 평양부는 그 독립성을 상실하고 변방의 토관직으로 지위가 대폭 격하되었다.
결국 당시 평양부 지역은 이러한 불명예를 떠안고 고려정부의 지원조차 받지 못한 채로 수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117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3품의 부유수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사건들을 거치며, 마침내 고려 충선왕 때 '평양대도호부'에서 '평양부'로 승격되었다. 아울러 충숙왕이 재위할 당시에는 안정도에 파견된 존무사가 평양부윤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1356년에는 다시 '서경유수'라는 이름으로 분리 하였다가 1362년에 다시 평양부로 종2품의 윤을 두었다.
하지만 북방 최대의 대도시이자 중심지로서의 역할 만큼 외세의 침략에서 항상 무사할 수 없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남부나 중부 지방의 도시에 비해 그 정도가 심하여 지역 명문가 비슷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여 양반과 그들이 데려온 노비가 매우 드물었다. 특히나 거란의 대규모 침입 당시에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직접 명하여 건설하였던 서경(평양)지역 대부분이 완전히 개박살났었고, 다시 재건된 직후에는 몽골이 처들어와서 다시 박살나게 되었다. 이후에도 홍건적의 난으로 평양 전역이 불바다가 되어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 이후로 수도 한성 다음가는 대고을로 다시 성장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도시 전역이 대부분 파괴가 되고 나서도 바둑판식 구획과 대규모 기와집 구역의 건설 등으로 평안도 제1의 도시로서의 위엄을 지켜내었던 경이로운 도시이기도 하다.[10]
평양부는 1000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대도시였던 만큼이나 문화와 예술이 상당히 발달하였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상급으로 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군사와 음식, 춤과 기생, 음악과 뱃놀이 등 평안도 최대의 문예의 중심지로 발돋음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평양냉면, 평양검무, 평양서예, 평양기생, 관서 뱃놀이, 평양사자놀음 등이 모두 평양에서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발전하였다. 음식 분야에서는 조선 후기에 이미 대동강변 향동(香洞)에 대규모 냉면가(冷麵家)가 조성되어져 있었으며#, 검무와 기생으로는 조선에서 따라올 지역이 거의 없었다. 인구로도 엄청났는데,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에서 이미 평양부의 인구가 많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또한 1789년 호구총수에서 역시 한성부를 제외하면 조선 팔도 가운데서 제일 인구가 많았다. 지리와 군사적으로도 평안도 중심에 위치하고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에 자리잡은 덕분에 방어에도 유리하였으며, 성곽 역시 고구려의 평양성을 재건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4중으로 된 성벽과 옹성, 치성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을밀대와 부벽루, 청류벽, 보통강과 대동강 일대에 위치한 버드나무숲, 용산, 추남허, 봉황대, 능라도, 춘양대, 추양대, 동양대, 옥류벽 등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장소도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풍요롭고 인구가 많으며 아름다운 지역이었던 만큼 부를 쌓기가 쉬웠으며, 결국 조선시대 삼남지방과 더불어 폐단과 부패가 엄청나게 심하였던 지역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
헌부가 아뢰기를,
"평양부(平壤府)는 인구가 많고 땅이 넓어 본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였고, 거기다 새로 중국 사신이 경유하였기 때문에 잔폐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진실로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아울러 지녀 적절하게 어루만져 다스리는 자가 아니면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서윤(庶尹) 윤삼빙(尹三聘)은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가는 곳마다 낭패를 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중요한 곳에 다시 시험해선 안 됩니다. 체차하라 명하소서. 본부 관원을 예전부터 문관으로 가려 보냈던 것은 그 의도가 있어서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더러 음관으로 제수하고 있으므로 물정이 편치 않게 여깁니다. 명망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가려 보내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삼빙은 내심으로 사악한 독을 품고 밖으로는 선비란 이름을 빙자하여 음관에서 몸을 일으켜 탐욕과 가혹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였다. 전에 서관(西關)의 수령이 되어서는 형장을 남용하여 사람을 매우 많이 죽였고, 뒤에 호서(湖西) 고을 원이 되어서는 탐욕과 포학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남김없이 긁어들였다. 그래서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마치 범처럼 두려워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이 다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는 의의가 아니라고 본다.
선조실록 201권, 선조 39년 7월 3일 경오 1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평양 서윤 윤삼빙을 탄핵하고 이곳에 문관으로 파견하자고 청하다.
"평양부(平壤府)는 인구가 많고 땅이 넓어 본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였고, 거기다 새로 중국 사신이 경유하였기 때문에 잔폐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진실로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아울러 지녀 적절하게 어루만져 다스리는 자가 아니면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서윤(庶尹) 윤삼빙(尹三聘)은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가는 곳마다 낭패를 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중요한 곳에 다시 시험해선 안 됩니다. 체차하라 명하소서. 본부 관원을 예전부터 문관으로 가려 보냈던 것은 그 의도가 있어서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더러 음관으로 제수하고 있으므로 물정이 편치 않게 여깁니다. 명망 있는 문관으로 각별히 가려 보내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삼빙은 내심으로 사악한 독을 품고 밖으로는 선비란 이름을 빙자하여 음관에서 몸을 일으켜 탐욕과 가혹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였다. 전에 서관(西關)의 수령이 되어서는 형장을 남용하여 사람을 매우 많이 죽였고, 뒤에 호서(湖西) 고을 원이 되어서는 탐욕과 포학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남김없이 긁어들였다. 그래서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마치 범처럼 두려워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이 다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는 의의가 아니라고 본다.
선조실록 201권, 선조 39년 7월 3일 경오 1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평양 서윤 윤삼빙을 탄핵하고 이곳에 문관으로 파견하자고 청하다.
거기다가 엄청난 역사와 위용을 지닌 도시인지라 조선정부 역시 평양부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실제 서북지역 출신의 고위직 관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도, 서북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거의 100% 대규모 사태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11] 평양부 자체를 배척하기는 엄청난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까닭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승정원 일기, 비변사등록과 같은 조선정부의 문서들에도 평양부는 타 지역에 비해 자주 서술되며,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에는 평양부만 해도 다른 지역들과 비교하였을때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특히 국명에서도 볼 수 있듯 조선 왕조가 고조선의 계승을 무척 중시했기 때문에 고조선의 옛 수도로 알려진 평양의 역사적, 상징적 가치는 무척 컸다.
- [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국문 (내용 펼치기·접기) ]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平壤府)
윤(尹) 1인, 【관찰사(觀察使)로 겸하게 한다. 】 소윤(少尹) 1인, 【중익 단련 부사(中翼團鍊副使)를 겸한다. 】 판관(判官) 1인, 【중익 단련 판관(中翼團鍊判官)을 겸한다. 】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역학 교수관(譯學敎授官) 1인.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 【곧 평양부(平壤府)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정미 【유송(劉宋) 태종(太宗) 원가(元嘉) 4년.】 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평양으로 이도(移都)하였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 【총장(摠章) 원년.】 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장수 이적(李勣)을 보내어 왕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나라가 멸망되고 신라에 통합되었다. 고려 태조 원년 무인 【양(梁)나라 말제(末帝) 정명(貞明) 4년.】 에 평양이 황폐되어 있으므로, 염주(鹽州)·배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州)·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그 땅을 실(實)하게 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삼았는데, 광종(光宗) 11년 경신 【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 에 서도(西都)로 고치고, 목종(穆宗) 원년 무술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咸平) 원년.】 에 또 호경(鎬京)으로 고쳤다가, 문종(文宗) 16년 임인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고쳐서 경기(京畿)의 4도(道)를 두었고, 숙종(肅宗) 7년 임오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원년.】 에 문무반(文武班) 및 오부(五部)를 두었다. 인종(仁宗) 13년 을묘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 에 서경(西京)의 중[僧] 묘청(妙淸)과 유참(柳旵)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모반(謀叛)하여, 군사를 보내어 절령도(岊嶺道)를 끊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며, 모든 관료(官僚)를 두고, 그 군사를 ‘천견충의(天遣忠義)’라 하니, 이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 등을 명하여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토평(討平)하고,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分司)·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또 경기(京畿)의 4도(道)를 삭제하였다. 원종(元宗) 10년 기사 【송나라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 에 서북면 병마사 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亂)을 일으키어 서경(西京) 및 여러 성(城)을 가지고 몽고(蒙古)에 붙으니, 원(元)나라에서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관리를 두었다가, 충렬왕(忠烈王) 16년 경인 【원나라 지원(至元) 27년.】 에 원나라에서 서경과 여러 성(城)을 도로 우리 나라에 돌려주었으므로, 다시 서경 유수관(西京留守官)으로 삼았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2년.】 에 만호부(萬戶府)를 서경에 두고, 좌익(左翼)·우익(右翼)·전군(前軍)·후군(後軍)·정예(精銳)·정의(精毅)·충의(忠義)·충성(忠誠)·신첨(新僉)·신성(新成) 등 10군(軍)을 두어, 각기 상·부천호(上副千戶)를 두었다가, 뒤에 평양부로 고쳤다.
명산(名山)은 금수산(錦繡山)과 【부(府) 북쪽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 일컫는다. 】 대성산(大城山)이다. 【부(府) 북쪽에 있는데, 혹은 구룡산(九龍山), 혹은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산정(山頂)에 99개의 못[池]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만 3개의 못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면 비를 빈다. 2개의 못에는 순채(蓴菜)가 있다. 】 대천(大川)은 대동강(大同江) 【부(府) 동쪽에 있다. 】 과 상갑신소(上甲神所) 【부(府)의 성내(城內) 관풍전(觀風殿) 북쪽 춘양대(春陽臺)에 있다. 】 ·진명소(津溟所) 【부성(府城) 동쪽 대동문(大同門) 밖의 강변(江邊) 덕암(德岩)에 있다. 】 ·진분소(津墳所) 【부(府) 동쪽 대동강 가의 술당(述堂)에 있다. 】 ·진연소(津衍所) 【부(府)의 북쪽 장수역(長壽驛)에 있다. 】 ·진연소(津淵所)이다. 【부(府) 동쪽 추오말리(推吾末里)에 있다. 위의 5소(所)는 모두 소재관(所在官)이 제사지낸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상원(祥原)에 이르기 31리, 서쪽으로 강서(江西)에 이르기 42리, 남쪽으로 중화(中和)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순안(順安)에 이르기 31리이다.
태조 진전(太祖眞殿) 【의리방(義理坊)에 있는데, 토관(土官)의 서반(西班) 각품(各品)으로써 시위 직숙(侍衛直宿)하게 하고, 유명일(有名日)에는 별제(別祭)를 지낸다. 】 문묘(文廟).
호수가 8천 1백 25호, 인구가 1만 4천 4백 4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백 36명, 익군(翼軍)이 2천 9백 51명, 선군(船軍)이 4백 37명, 수성군(守城軍)이 1백 45명이다. 인물(人物)은 영도첨의부사(領都僉議府事) 평양군(平壤君)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 【고려 충렬왕 때 사람. 】 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이다. 【인규(仁規)의 증손(曾孫)인데,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
땅의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 기후가 매우 차다. 간전(墾田)은 4만 8천 1백 60결(結)이다. 【논이 8분의 1이 넘는다. 】 토의(土宜)는 기장·피·보리 뽕나무·삼[麻]·왕골[莞]·닥나무·배[梨]이요, 토공(土貢)은 옻·족제비털·표범가죽·여우가죽·삵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속서근풀[黃芩]·겨우살이풀[麥門冬]·흰바곳[白附子]이다. 염소(鹽所)가 2곳이다. 【가마[盆]가 모두 18인데, 모두 부(府) 서쪽에 있다. 】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4천 88보(步)인데, 본조(本朝) 태종(太宗) 9년 을축에 수축(修築)하였다. 옛 성터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기자(箕子) 때 쌓은 것으로, 둘레가 6천 7백 67보이며, 성안[城內]을 구획(區劃)하여 팔가동정(八家同井)하게 하였다. 하나는 고려 성종(成宗) 때 쌓은 것인데, 지름이 9백 44보이다. 】 관(館)이 1이니, 대동(大同)이다. 【부성(府城) 가운데 있다. 】 기자묘(箕子廟)가 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는데, 정자각(亭子閣)·석인(石人)·석양(石羊)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祠堂)은 성안 의리방(義理坊)에 있다.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유사(有司)에 전지(傳旨)하기를, "예전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太師)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文物禮樂)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금상(今上)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始祖)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南向)하게 하였다.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 동명왕 묘(東明王墓)가 부(府) 동남쪽[巽方]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모두 화반석(畫班石)으로 광(壙)을 영조(營造)하였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진주묘(眞珠墓)"라 한다. 이승휴(李承休)가 동명왕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雲輧)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玉鞭)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또 인리방(仁理坊)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御押)을 내리어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도 또한 그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동명 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 한다. 】 을밀대(乙密臺)는 곧 금수산(錦繡山) 꼭대기에 있는데, 평탄하고 훤칠하다. 대(臺) 아래 층안(層岸) 위에 누(樓)가 있으니, 이름을 부벽루(浮碧樓)라 하는데, 보이는 경치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옆에 영명사(永明寺)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안에 기린(麒麟)을 기르던 굴(窟)이 있는데, 후인(後人)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窟) 남쪽 백은탄(白銀灘)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朝天石)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天上)에 주사(奏事)하였다." 한다. 이승휴(李承休)가 이르기를, "천상(天上)을 오가며 천정(天政)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굴 북쪽에 춘양대(春陽臺)가 있는데, 우뚝 솟아서 서쪽으로 관풍대(觀風臺) 터와 서로 마주 서 있으며, 서남쪽[坤方]에 누각 터[樓基]가 있으니, 이름을 다경(多景)이라 한다. 경치가 부벽루와 더불어 서로 갑을(甲乙)을 다툰다. 서쪽[兌方]에 높은 언덕이 있으니, 이름을 봉황대(鳳凰臺)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봉황이 와서 울었으므로, 이름을 봉황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안[城內]에 9개의 묘(廟)와 9개의 못[池]이 있으니, 9묘(廟)는 곧 9개의 별[九曜]325) 이 날아 들어온 곳이며, 그 못 옆에 첨성대(瞻星臺)가 있다. 봉화(烽火)가 4곳이니, 빈당점(賓堂岾) 【남쪽으로 화사(畫寺)에, 북쪽으로 잡약산(雜藥山)에 응한다. 】 ·잡약산(雜藥山) 【북쪽으로 부이산(斧耳山)에 응한다. 】 ·부이산(斧耳山) 【북쪽으로 순안(順安) 독자산(獨子山)에 응한다. 】 ·화사(畫寺) 【남쪽으로 중화(中和) 신주원(神主院)에 응한다. 】 ·수로불곡(水路佛谷) 【남쪽으로 증산(甑山) 탄곶입소(炭串立所)에, 서북쪽으로 영유(永柔) 활곡입소(闊谷立所)에 응한다. 】 이다. 영명사(永明寺)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을 주었다. 】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부루가 아들이 없어서 금색 와형아(金色蛙形兒)를 얻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세워서 태자(太子)를 삼았다. 그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다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동해(東海) 가에 땅이 있는데, 이름은 가섭원(迦葉原)이며, 토질이 오곡(五穀)에 적당하여 도읍할 만하다. ’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에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였다. 천제(天帝)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扶餘)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海慕漱)이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從者) 1백여 인은 모두 백곡(白鵠)을 탔는데, 채색 구름이 그 위에 뜨고, 음악소리가 구름 가운데에서 울렸다. 웅심산(熊心山)에서 머물러 10여 일을 지내고 비로소 내려왔다.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성(城) 북쪽 청하(靑河)의 하백(河伯)이 세 딸이 있으니, 큰딸이 유화(柳花), 둘째딸이 훤화(萱花), 막내딸이 위화(葦花)인데, 자태가 곱고 아름다왔다. 세 딸이 웅심연(熊心淵) 위에 가서 노는데, 【청하(靑河)는 곧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 왕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저 여자를 얻어서 비(妃)를 삼으면, 가히 자손을 두리라." 하니, 그 딸들이 왕을 보자 곧 물로 들어갔다. 좌우가 말하기를, "대왕은 어찌하여 궁전(宮殿)을 지어, 저 여자를 맞아 방[室]에 들이고 문[戶]을 꼭 닫지 아니합니까." 하니, 왕이 옳게 여기어 말채찍[馬鞭]으로 땅을 그으니, 동실(銅室)이 잠깐 사이에 이루어졌다. 방 가운데에 세 자리[席]를 베풀고 잔과 술을 두었더니, 그 여자들이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하였다. 왕이 나아가 붙드니, 그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유화(柳花)가 왕에게 잡히었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고(告)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내 딸을 붙잡아 두느냐."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이제 하백과 결혼하고자 하노라." 하매, 하백이 또 사신을 보내어 고하기를, "네가 만일 구혼(求婚)하려거든 마땅히 매파를 보낼 것이지, 이제 덮어놓고 내 딸을 붙잡아 두니, 어찌 그리 예를 모르느냐."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서 장차 하백을 가 보려고 하나 〈하백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고, 또 그 딸을 놓아주려고 하나, 그 딸이 이미 왕과 더불어 정(情)을 통하였는지라, 떠나려 들지 아니하고 왕을 권하기를, "만일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하늘을 가리키며 고하매, 조금 있더니 오룡거(五龍車)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왕이 그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풍운(風雲)이 갑자기 일어, 대번에 그 궁(宮)에 이르렀다.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좌정(坐定)하고 이르기를,
"혼인의 예는 천하의 통규(通規)이거늘, 어찌 이렇듯 실례(失禮)하여 나의 문종(門宗)을 욕되게 하느뇨. 왕이 천제의 아들이면 어떠한 신이(神異)함이 있느뇨."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오직 시험해 보면 알 것이오." 하매, 이에 하백이 뜰앞의 물에서 잉어로 화하여 물결을 따라 노는지라, 왕이 물개로 화하여 잡으려 하니, 하백이 또 사슴으로 화하여 달아나므로, 왕이 승냥이로 화하여 쫓으매, 하백이 꿩으로 화하니, 왕이 매로 화하여 쫓았다. 하백이 그제서야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예(禮)로써 성혼(成婚)하였다. 왕이 그 딸을 거느릴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을 마련하여 왕에게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하고, 딸과 더불어 작은 혁여(革轝) 가운데에 넣어서 용거(龍車)에 실어 승천(升天)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 수레가 물에서 나오기 전에, 왕이 곧 술이 깨어 그 딸의 황금비녀를 빼어서 혁여를 찌르고, 그 구멍으로 혼자 나와서 승천하니, 하백이 노하여 그 딸에게 이르기를, "네가 내 가르침을 좇지 아니하여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 하고, 좌우(左右)로 하여금 그 딸의 입을 얽어 잡아당기게 하니, 그 입술이 늘어나 길이가 3척(尺)이 되매, 노비(奴婢) 2인과 함께 우발수(優渤水) 가운데로 내치었다. 【곧 지금의 태백산(太白山) 남쪽이다. 】 고기잡이[漁師]가 금와(金蛙)에게 고하기를, "근래 어살[梁] 가운데 있는 고기를 훔쳐 가는 것이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매, 왕이 곧 고기잡이로 하여금 그물로 끌어내게 하니, 그 그물이 찢어지므로,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내니, 그제야 비로소 한 여자가 돌 위에 앉아서 끌려 나왔는데, 그 여자가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하지 못하므로, 세 번 그 입술을 끊어내니, 그제야 비로소 말을 하였다. 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의 비(妃)임을 알고 별실(別室)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그 여인이 창 가운데로 들어오는 햇볕을 품어서 아들을 배어, 한(漢)나라 신작(神爵) 4년 계해 4월에 주몽(朱蒙)을 낳으니, 우는 소리가 매우 크고, 골표(骨表)가 영기(英奇)하였다. 처음에 왼쪽 겨드랑이로부터 큰 알을 낳았는데, 5되[升]들이만 하니, 왕이 괴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말먹이는 데[馬牧]에 갖다 버리게 하였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아니하고, 깊은 산에 버리니, 백수(百獸)가 모두 보호하며, 구름이 낀 날에도 알 위에는 늘 일광(日光)이 있으므로, 왕이 알을 도로 갖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다. 한 달 만에 그 알이 열리며 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난 지 한 달도 지나지 못하여 말을 능히 하며,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파리들이 눈을 건드리어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십시오." 하므로, 그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더니, 스스로 물레[紡車] 위에 앉은 파리를 쏘아 번번이 맞히매, 민간에서 이르기를, "활 잘 쏘는 이는 주몽이다." 하였다. 나이가 장성하매, 재능이 겸비하였다. 금와(金蛙)가 아들 7인이 있는데, 늘 주몽과 함께 사냥을 다녔다. 왕자와 종자(從者) 40여 명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는데, 주몽은 사슴 여러 마리를 잡으니, 왕자가 이를 시기하여, 주몽을 잡아 나무에 매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 갔다. 주몽이 나무를 뽑고 돌아가니, 태자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영검하고 날랜 선비입니다. 치어다보는 것이 심상치 않사오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으리이다." 하매, 왕이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주몽이 한(恨)을 품고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손자인데 목마(牧馬)가 되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남쪽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오나,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합니다." 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속썩이는 바이다. 내가 들이니, 선비가 먼 길을 떠나려면 모름지기 준마(駿馬)에 의지하라 하였으니, 내 능히 말을 가리어 주리라." 하고 드디어 마목(馬牧)에 가서 곧 긴 채찍으로 말들을 마구 후려치니, 뭇 말들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는데, 붉누런 말[騂馬] 한 마리가 2길[丈]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어 달아나고 있었다. 주몽이 그 말이 뛰어남을 알고, 몰래 바늘을 말의 혀뿌리에 찔러 박으니, 그 말이 혀가 아파서 몹시 여위었다. 왕이 마목(馬牧)에 순행(巡行)하여, 뭇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해서, 그 중의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그 말을 얻어 가지고, 그 바늘을 뽑고 더욱 잘 먹여서 몰래 오이(烏伊)·마리(馬離)·협부(陜父) 등 3인과 결탁하여 남행(南行)해서 개사수(蓋斯水)에 이르렀는데, 건너려 하여도 배는 없고, 쫓는 군사는 급히 따라오므로,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몹시 분개하여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손자요, 하백(河伯)의 외손인데, 지금 난리를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사오니, 황천 후토(皇天后土)께서는 저 고자(孤子)로 하여금 빨리 주교(舟橋)를 이루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활로써 물을 치니, 자라떼들이 떠올라 와서 다리를 놓아 주몽이 곧 건넜다. 한참 있다 쫓는 군사가 물[河]에 이르니 자라다리[鼈橋]가 갑자기 없어져서, 이미 다리에 올랐던 군사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주몽이 그 어머니를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한 어미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하고, 오곡(五穀)의 씨앗을 싸서 주어 보냈는데, 주몽이 어찌나 생이별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던지 그 보리씨를 잊어버리고 떠났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에서 쉬는데, 쌍곡(雙鵠)이 날아와 모이니, 주몽이 말하기를,
"아마도 이것은 어머니가 보내 주시는 보리씨리라." 하고, 활을 당기어 쏘았다. 한 화살에 모두 떨어져서, 목구멍을 열고 보리씨를 꺼내고, 물[水]을 곡(鵠)에게 뿜으니, 다시 소생되어 날아갔다. 왕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비수(沸水) 위에 집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고(高)로써 성을 삼고, 풀더미[蕝] 위에 올라앉아서 대략 군신(君臣)의 자리[位]를 정하였다.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왕의 얼굴이 비상함을 보고, 인도하여 함께 앉아서 말하기를, "궁벽한 바다의 모퉁이에 있어서 일찍이 그대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어찌 다행하지 아니하리오.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나이까."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天帝)의 손자로서 서국(西國)의 왕입니다. 감히 묻노니, 군왕은 누구의 뒤를 이었습니까."
하매, 송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본디 선인(仙人)의 자손이라, 여러 대로 왕이 되었노라. 이제 땅이 작으니, 나누어서 두 임금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며칠 안 되니, 나에게 부속(附屬)함이 마땅하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하느님의 뒤를 이었고, 지금 왕은 신(神)의 맏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하니, 만일 나에게 귀부(歸附)하지 아니하면, 하느님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 하였다. 송양이 왕으로서 늘 하느님의 자손이라 칭하였는데, 속으로 의심을 품고서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왕과 더불어 활쏘기를 원합니다."하고, 사슴을 그리어 1백 보(步) 안에 놓고 쏘니, 그 화살이 들어가지도 아니하였는데, 사슴의 배꼽이 손을 거꾸로 놓은 것같이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玉指環]를 1백 보(步) 밖에 달아 놓게 하고 쏘매, 와해(瓦解)되듯이 부수어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왕이 말하기를, "국업(國業)을 새로 세웠기 때문에 고각(鼓角)이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使者)가 왕래할 때에, 내가 왕의 예(禮)로써 영송(迎送)할 수 없으므로, 나를 가벼이 여기게 된다." 하니, 종신(從臣) 부분노(扶芬奴)가 나아와 아뢰기를,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고각을 가져오겠나이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의 장물(藏物)을 네가 어찌 가져온다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는 물건이온데, 어찌 가져오지 못하오리까. 무릇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고생하실때, 누가 대왕께서 능히 이곳에 이를 것이라 하였겠습니까. 이제 대왕께서 만사(萬死)에서 분신(奮身)하시어 요좌(遼左)에 양명(揚名)하셨으니, 이는 천제(天帝)께서 명하여 하셨음이온데,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오리까." 하고, 부분노 3인이 비류에 가서 고각(鼓角)을 가지고 왔다. 비류왕이 사신을 보내어 고하매, 왕이 와서 볼까 염려하여, 고각의 색(色)을 어둡게 하여 헌 것같이 해 놓으니, 송양이 〈와 보고〉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로써 부속(附屬)을 삼으려고 하매, 왕이 궁실(宮室)을 짓기를, 썩은 재목으로 기둥을 해서 천년이나 묵은 것같이 하니,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로써 다투지 못하였다. 왕이 서쪽으로 사냥가서 흰 사슴을 잡아 해원(蟹原)에 거꾸로 매달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서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漂沒)시키지 아니하면, 내가 결코 너를 놓아주지 아니하리라. 이 난경(難境)을 면하려거든 네가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하니, 그 사슴이 슬피 울매, 그 소리가 하늘에 닿아서, 장맛비가 7일 동안 내리어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왕이 갈대새끼[葦索]를 횡류(橫流)시키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들이 모두 그 새끼를 잡은지라, 왕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들매, 송양이 온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검은 구름이 골령(骨嶺)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을 보지 못하는데, 오직 수천 사람의 소리만 들리며 토공(土功)을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걷히고, 성곽과 궁궐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왕이 황천(皇天)께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 때의 나이가 40살이었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으로써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2이니, 중화(中和)·상원(祥原)이요, 현(縣)이 8이니, 삼등(三登)·강동(江東)·순안(順安)·증산(甑山)·함종(咸從)·삼화(三和)·강서(江西)·용강(龍岡)이다.
토관(土官)은, 동반(東班)이 도부사(都府司)·군기서(軍器署)·정설국(正設局)·장작국(將作局)·대흥부(大興部)·융덕부(隆德部)·천덕부(川德部)·흥토부(興土部)·전례국(典禮局)·영작원(營作院)·도진서(都津署)·동면 도감(東面都監)·서면 도감(西面都監)·남면도감(南面都監)·북면 도감(北面都監)·유학원(儒學院)·의학원(醫學院)·역학원(譯學院)·전주서(典酒署)·진설서(陳設署)·대창서(大倉署)·장선서(掌膳署)·대영서(大盈署)·사옥서(司獄署)·장루서(掌漏署)·기자전직(箕子殿直) 【모두 94인. 】 이요, 서반(西班)은 진서위(鎭西衛) 5령(領)이니, 각각 사직(司直)이 1인 【5품. 】 , 부사직(副司直)이 2인 【6품. 】 , 사정(司正)이 2인 【7품. 】 , 부사정(副司正)이 2인 【8품. 】 , 대장(隊長)이 20인, 대부(隊副)가 40인 【9품, 모두 3백 36인. 】 이다.
평양부(平壤府)도무사(都務司)에는 도무(都務), 교부(校簿) 각 1원씩 전사(典事) 2원을 둔다. 전례서(典禮署)에는 장부(掌簿), 감부(勘簿), 전사(典事), 급사(給事), 섭사(攝事)를 각 1원씩 둔다. 제학서(諸學署)·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영작서(營作署)에는 감부(勘簿), 관사(管事)를 각 1원씩 두고, 섭사(攝事)를 각 2원씩 둔다. 수지국(收支局)에는 장사(掌事), 급사(給事), 섭사(攝事)를 각 1원씩 둔다. 전주국(典酒局)에는 급사(給事), 참사(參事), 섭사(攝事)를 각 1원씩 둔다. 사옥국(司獄局)에는 섭사(攝事) 2원을 둔다
「대전통편」이전(吏典) 토관직(土官職) [定額] 中
「대전통편」이전(吏典) 토관직(土官職) [定額] 中
한편 조선시대 평양부는 외관직으로 종2품의 부윤 1명을 두었으나, 이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파견된 평안도 관찰사가 겸하는 경우였다. 그 외에도 종4품의 서윤 1명과 종5품의 판관 1명, 역학훈도 1명을 평양부에 상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속대전'에서는 평양부에 있었던 판관들을 모두 폐지하여 『대전회통』이 편찬되기 이전까지는 판관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양은 다른 고을들과는 달리 여러 특혜가 주어졌는데, 조선은 강상죄나 역모와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당 고을의 명칭을 강등하고 지위를 낮추어 제재를 가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평양부만은 예외적으로 제외하였다. 이는 조선정부가 평양이 옛 단군과 기자가 도읍으로 삼았기에 사실상 수도와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 적용된 이유였다. 덕분에 평양부는 큰 사건이 일어나도 서윤을 판관으로 강등하거나 파견 관리직의 품계만 강등하고서, 훗날 다시 되돌리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부분들은 당대 조선에서 평양부가 지닌 상징성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근대시기 평양장의 모습 | 구한말 평양장의 모습 |
구한말에는 개항장의 대표인 부산부가 급성장하면서 평양과 인구가 비슷해졌고 이후 인구순 제2의 도시는 평양과 부산이 수시로 뒤집고 뒤집히게 된다.
일제강점기때는 외곽지역은 대동군으로 분리되었다. 평양부(일제강점기) 문서 참조.
3. 수도-서북 갈등의 중심지
평양부는 묘청의 난 직전까지의 고려시대, 외침을 딛고 경제가 성장한 조선 후기에는 수도와 정치적 갈등이 컸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시대 평안도 지역의 과거 합격률과 중앙 진출 사례를 통해서 두드러지는데,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인 평안도 정주목의 경우는 조선시대 지방에서 과거 합격률로는 조선 후기 최고였으나 중앙 정계로 진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그리고 이러한 상황 이전에 평양부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실에 영향을 받은 명문가와 궁궐, 사찰 등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그 위상이 드높았으나, 고려시대 여러 차례의 외세 침입과 묘청의 난 등을 거치면서 평양지역 명문가들이나 토착 세력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 건국 이후로도 고려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중앙 조정에 입지가 거의 없어 차별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영의정까지 오른 평양 조씨가문의 조준이나, 대사성까지 오른 평양 이씨가문의 이희보와 같이 평양부에서 자리잡은 명문가들의 경우는 중앙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후로도 이들 가문은 어느정도 평양부 내에서도 상당히 대우를 받았다.
실제로 조선왕조 500년동안 평양을 대표한 명문가인 평양 조씨가문은 영의정 외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당장 태종실록에서 물이 흐르는 듯이 업무처리를 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개국공신 조박도 평양 출신이었고, 조준의 아들이었던 조대림은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와 혼인을 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이후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가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세종이 직접 3일동안 조회를 멈추고 쌀과 콩, 종이 200권을 부조로 내렸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 초기를 기준으로 하였음을 감안하여야 한다. 앞서 언급하다시피 조정에서도 이 지역의 역사성을 무시한 건 아니지만, 1633년의 인조실록에도 이미 임금에도 평양부를 포함하는 '서북민'의 등용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다. # 이 당시는 그나마 호서 혹은 영남 출신이 대우를 받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후 수도와 지방의 격차가 심해지는 '경향분기(京鄕分岐)'의 흐름 속에 한양 사람이 아니면 영남 출신이든 호서 출신든 서북 출신이든 모조리 정계에서 배제되는 경향도 생겼고, 탕평책이나 흥선대원군의 지역 안배 정책도[12] 큰 효과가 없어# 함경도 출신의 이용익도 대접받은 고종의 시대까지 정치적으로 제대로 대우받기는 어려웠다. 서북, 특히 평안도가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는 사람들이 많아 과거 합격률이 높았기에 지방 중에서는 한양에 반기를 들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던 그 이외 시대에는 반기를 들 세력도 없었기에 정치적 충돌이 드러나지 못했다.
또한 인터넷에서는 북한에 대한 혐오를 과거에까지 소급시켜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을 무슨 유럽의 지역갈등처럼 서술하는 사례가 자주 발견되는데 평안도가 역사적 가치가 없어서 차별받은 것이 아니라 평안도 사람이 명문가가 아니어서 차별받은 사례이다. 저런 논리라면 평양 출신 유일한[13]이 세운 유한양행이나 평양에서 재건한다는 의지가 강한 숭실대학교까지 차별해야 한다. 분단이 되리라고는 1945년까지 거의 예상을 못했고, 심지어 평양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4. 기타 및 대중매체
- 소설과 웹툰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 진성대군과 장금이가 혜민서를 대표해서 북방에 종두법과 비누를 전파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또한 웹툰에서는 주인공 본인이 분단된 조국에서 태어나 대통령도 아니고 삼성전자 사장도 아닌데 평양에 왔다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아이진에서 대립질을 하던 김가 억수가 탈영하여 진성대군을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 네이버 웹툰 봉이 김선달에서 주인공 김선달과 주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주 배경이 되는 지역이 이곳 평양부이다. 작품 내 김선달이 거주하고 있는 곳 또한 평양부이며, 그가 운영하는 서당인 '봉추당' 및 활동하는 주 무대도 평양부와 평안도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나오는 홍경래의 난의 목적 역시 평양부를 점령한 후 한성부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되었다.
[1] 4부는 각각 인흥부(仁興部), 의흥부(義興部), 예안부(禮安部), 지안부(智安部)를 말한다.[2] 1789년 『호구총수(戶口摠數)』의 기록을 기준으로 함. 당시 조선에서 한성부 다음으로 인구수가 많았다.[3] 면적은 1㎢ 기준으로 계산[4] 1895년 2월 12일, 승정원일기에서 기록한 마지막 평안감사.[5] 평양군수[6] 1909년 12월 24일, 승정원일기에서 기록한 마지막 평양군수.[7] 여기에서 나온 속담이 그 유명한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8] 평양의 별칭이었던 유경(柳京)에서 유래.[9] 강서, 강동, 중화, 순화, 삼등, 삼화.[10] 물론 이렇게 재건된 모습마저 이괄의 난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많이 훼손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다. 결정적으로 평양부의 모습이 사라지게 된 요인은 다름아닌 6.25 전쟁이다.[11] 대표적인 사례로는 이괄의 난(영변)과 홍경래의 난(정주)이 있으며, 두 사건 중 하나는 한성부를 점령당할 만큼 큰 위기였다.[12] 심지어 고려 왕조와 관계가 있다고 여긴 모양인지 강화도까지 차별받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 '기호'와 서북이 아니라 수도와 서북 등 그 이외의 차별이라고 여긴 것이다. '기호'가 지역 문제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양반 가문은 독립운동 당시 황해도 출신까지 김구처럼 기호파에 섰지만, 명문가의 편에 서지 않으면 서북파가 되던 신분갈등의 일환이다.[13] 실제로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므로 '평양부' 출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