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2 22:20:52

대성학교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330066><tablebgcolor=#330066> 파일:안창호 투명.svg안창호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330066> 일생 생애
가족 배우자 이혜련 · 장남 안필립 · 장녀 안수산
사상 민족개조론
성향 사회민주주의
사건사고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 단체 신민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흥사단 · 독립협회 · 한국독립당 · 국민대표회의 · 대한인국민회
기타 연통제 · 도산공원 · 대성학교 ·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 ||

1. 개요2. 이념3. 설립 계기4. 주요 인사
4.1. 교사
5. 교육 과정6. 평가 및 의의
6.1. 당시6.2. 의의


파일:대성학교.png

1. 개요

도산 안창호윤치호평양에 세운 교육기관으로 신민회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9월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존재한 교육기관이다.

1909년 일장기 불게운동, 105인 사건 에 발이 묶여 안창호는 망명을 가게 되었고, 일제의 눈초리를 받은 대성 학교도 19명의 졸업생을 남긴 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2. 이념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교육 방침을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3. 설립 계기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 등의 재정적 원조로 설립하였으며,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안창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4. 주요 인사

교장 : 윤치호
대변 교장 : 안창호 [1]
교무 책임 : 장응진

4.1. 교사

교장에 윤치호(尹致昊),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홍현주(洪顯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형식(金瀅植)의 글에 의하면, 대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전국적인 성원과 지지를 얻었다.

5. 교육 과정

중등학교 과정이었으나 수학을 중심으로 한 4학년 과정은 전문학교 정도와 대등하였고, 학교 설비도 중등학교로는 드물게 완비하였다고 한다.

특히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필요하므로 군사관(軍事官)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하여, 체육시간에는 군대식 훈련을 강행하였다.

6. 평가 및 의의

6.1. 당시

대성 학교 개교 당시 김형식 이라는 학생의 글에 따르면, 당시 대성 학교가 전국적 지지를 받았다고 하며, 지원자가 수백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6.2. 의의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함께 평안도 지방 교육구국, 계몽운동을 앞장선 대한제국기 중등교육기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이 학교의 정신을 대성고등학교(강원), 대성고등학교(서울) 이 이어받았다.

[1] 실질적인 교장 역할은 안창호가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