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포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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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3년 2월 22일 |
평안남도 용강군 서화면 죽본동 (現 남포특별시 온천군) | |
사망 | 1934년 3월 15일 (향년 42세) |
미국 뉴욕 | |
가족 | 아버지 김승원, 여동생 김승선 |
아내 이신실 장남 피터 김, 차남 데이비드 김, 삼남 제임스 김, 사남 리차드 김, 오남 아서 김 장녀 베티 김 | |
매형 안창호, 처형 이혜련, 처남 이두성, 장인 이석관 조카 안수산, 안필립, 안수나, 안필선, 안필영 | |
학력 | 평양 서문내 장로교 소학교 (졸업) 일본 고베 중학교[2] (중퇴) 일본 도쿄 세이소쿠 속성학교[3] (졸업) 배재학당 고등부[4] (졸업) 의명학교[5] (졸업) 세브란스연합의학교[6] (의학 / 학사) 토머스 제퍼슨 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석사) 존스 홉킨스 대학교 보건대학원 (공중보건학 · 세균학 / 박사)[7] |
약력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8] 교수 적십자 간호원 양성소[9] 창립자 겸 교수 산토 토마스 대학교 강사 흥사단 단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모집위원 수양동우회 의사부장 대한적십자회 초대 감사 겸 중앙위원 맨해튼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 위생병원[10] 의사 대한국적십자병원[11] 의사 상해 홍십자병원 의사 뉴욕 차이나타운 보건과장 프랑스 조계 공동국 위생과 위원 의명학교[12] 교사 조선연합회[13] 선교사 |
직업 | 의사, 교수, 독립운동가 |
종교 | 개신교 (재림교회) |
상훈 | 건국포장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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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세의 가족사진[14] |
2. 생애
1893년 평안남도 용천군에서 조선합회 출판부 부장[15]을 역임한 김승원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쇄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를 따라 현지에서 학교를 다니며 일본어를 배웠다. 한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토요일에 등교를 하지 않아 퇴학을 당하였고, 교사 대부분이 외국인 선교사였던 배재학당에서는 배려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배재학당에 입학해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의학교 입학을 위해 의명학교[16]에서 교사로 일함과 동시에 학생으로서 의명학교 교장이자 위생병원을 설립한 의사였던 러셀 박사 부부에게 해부학, 화학, 영어, 수학, 생리학 등을 배웠다.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하고 외과의사가 된 후 일제의 출국금지령을 피해 중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당시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교육협력병원이었던 상해 홍십자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과 대한국적십자병원(현 서울적십자병원) 등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이때 대한적십자회 감사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간호원 양성소의 설립을 제의하고 지원을 받아 적십자 간호원 양성소(현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을 공동 창립하였다.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 취득한 학점을 미국에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예과 과정을 다시 다녀야 했던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미대륙을 5번이나 횡단하면서 80여개 도시를 방문하며 책을 팔아서 마침내 5000달러를 모았다. 워싱턴 선교대학(현 워싱턴 어드벤티스트 대학교)에서 예과 과정을 마친 후 토머스 제퍼슨 대학교 의과대학에 등록하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민족 건강을 확보하는 일이 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라고 본 그는 공중위생학 연구에 매진하기로 하고 곧이어 존스 홉킨스 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도 우수한 단백질 공급원이 될 수 있는 녹두콩을 주제로 연구하여 2년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인 최초의 보건학 박사가 되었다. 학위를 마쳤을 때 수중에 남은 돈은 단 4달러 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김창세의 열정에 감동한 당시 재림교회 대총회장이었던 다니엘스 목사와 켈로그의 설립자인 윌 키스 켈로그가 각각 600, 300달러씩 지원하여 그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의 공중보건 실태를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베를린 대학교 세균학 교실을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파스퇴르 연구소와 독일의 코흐 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참관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모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국내 최초로 예방의학교실과 위생학교실을 개설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만주사변으로 중국에 세운 병원과 교육 시설을 모두 몰수당했고, 비자 문제로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열렬한 국외 독립운동을 펼쳤던 그의 행적을 가만히 지켜만 보지 않았다. 실제로 회고록에는 주체가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에 의한 위협으로 거처를 옮겨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중국의 국공합작 결렬과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지켜보며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1934년 미국 뉴욕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17] 그의 사망 소식은 뉴욕타임즈에도 보도되었다. 사후에 정부로부터 2001년 국민훈장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1. 독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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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성립 기념사진[18] |
그는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에서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는 유학파 엘리트 의사였지만 개인적 안일보다는 의술을 통한 독립이라는 공익적 가치에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미국의 현대 선진 보건학을 처음으로 한국에 들여와 위생학과 세균학 연구를 시작한다. 이것은 당대 조선 보건학 발전에 큰 공적일 뿐 아니라 한국 전염병 연구의 토대를 다지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3. 여담
- 어렸을 때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고 외무장관이 꿈이었던 그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4개국어로 프리토킹이 가능했으며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독일어를 비롯한 10개국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영어는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원어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회고록을 참고하면 그는 죽기 직전에도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 왕자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조선에 방문했을 때 의전과 통역을 맡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 뛰어난 의술을 보유하여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신임과 존경을 받을 정도로 당대에 미국에서 꽤 유명했다고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아인슈타인과도 종종 식사를 하며 독일어로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분을 가진 천재였다.
- 연세대학교 의료원을 빛낸 역사 인물 25인 중 한 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 또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문회 명예의 전당에도 등재되어 있다. #
- 종교활동에도 굉장히 열정적이었는데, 재림교회의 지원으로 의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선연합회 선교사 겸 의사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며 이광수가 신학대학 교수와 1년간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이어주었다. 또한 서울위생병원에 입원한 피천득, 노천명 등에게도 성경을 전했다고 한다.
[1] 스탠퍼드 대학교 후버 연구소 등재 기준[2] 현 神戶中學校[3] 현 正則高等學校[4] 현 배재고등학교[5] 현 삼육대학교[6]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7] 2개 학위 복수전공, 박사 학위 논문: Some Chemical and biological Studies of the Mung Bean, 지도교수 O. S. Rask[8]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9] 현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10] 현 삼육서울병원[11] 현 서울적십자병원[12] 현 삼육대학교[13] 현 한국연합회[14] 가장 왼쪽에 있는 안경 쓴 인물이 김창세다.[15] 현재의 시조사 사장[16] 현 삼육대학교[17] 유서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그가 일제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어 정말로 사인이 자살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8] 맨 뒷줄 오른쪽 끝이 김창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