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 국민회라고도 불리는 제1공화국 시기 정당에 대한 내용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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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배우자 이혜련 · 장남 안필립 · 장녀 안수산 | ||
사상 | 민족개조론 | ||
성향 | 사회민주주의 | ||
사건사고 | 수양동우회 사건 | ||
관련 단체 | 신민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흥사단 · 독립협회 · 한국독립당 · 국민대표회의 · 대한인국민회 | ||
기타 | 연통제 · 도산공원 · 대성학교 · 도산안창호급 잠수함 |
1. 개요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1908년 7월,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대회의 결의를 계기로 1908년 10월 30일,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 대표 7인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대표 6인이 모여 단체의 통합을 결의하여, 1909년 2월, 국민회가 창립되었다. 1910년 2월,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변경했다.[1]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1910년경 대한인국민회 입회증서. 증서의 주인은 이승만이다. |
1914년, 안창호가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8년, 이승만이 날인한 국민회 의무금 증서 |
1919년, 전미 총회에서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3인을 파리 강화회의의 한국 대표로 파견하였지만 당시 일제와 밀월 관계였던 미국은 비자 발급을 허락해주지 않아 프랑스에 갈 수가 없었다. 그대신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미국 상원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