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8:45:30

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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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연호
고종 태황제 순종 효황제
[ruby(光武, ruby=광무)]
[ruby(明治, ruby=명치)]
1907. 8. 3. ~ 1910. 8. 29.
(3년 27일)
1. 개요2. 상세3. 기타4. 연보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제국 순종연호. 그리고 한국사의 마지막 황제 연호이다.

1907년 8월 3일에 발간된 대한제국 관보 3835호부터 사용되었고,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한국제국에서 공화국이 되면서 더이상 연호를 쓰지 않는다. 물론 대한민국 연호가 있기는 하지만 황제 연호랑은 상관없다.

2. 상세

1907년 8월 2일 당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이완용내각을 대표하여 연호 후보로 '융희(隆熙)'와 '태시(太始)' 2개를 상주하였고,[1] 순종이 이 중에 융희를 고름으로써 새 연호가 결정되었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융()은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고, 희()는 흥성하고 화목하며 넓고 장구하다는 뜻이다.[2]

원래 한국의 예법에 따르면 정변이나 반정 등 비정상적 황위 계승이 아닌 경우에는 유년칭원법에 따라 즉위년 다음 해에 개원(改元)하는 것이 전통이므로,[3] 정상적으로는 순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908년이 융희 원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엄연히 황태자가 예정대로 제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한국에서 썼던 유년칭원법이 아닌 일본에서 쓰는 즉위년칭원법을 택해 순종이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907년을 융희 원년으로 정했다.

융희 개원이 전통적인 예법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로 불명예스럽게 퇴위시켜 정상적인 제위 계승이 되지 못한 탓도 있고, 둘째로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에 따라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으므로 일본식으로 즉위년칭원법을 따른 측면이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이후로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제국의 메이지(明治)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국기를 게양할때도 태극기일장기를 함께 게양하였다. 순종 황제 시절에 이미 대한제국이 껍데기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3. 기타

  • 2016년 말, 1926년을 '융희 20년'으로 표기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을 연호로써 드러낸 것인데 이런 행동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4]

4. 연보

연도 대조표
융희(隆熙) 육십갑자 서력기원 비 고
(8월 3일부터)
원년
정미(丁未) 1907년 순종 즉위, 융희 연호 개원
2년 무신(戊申) 1908년
3년 기유(己酉) 1909년 기유각서
남한대토벌
간도협약
4년
(8월 29일까지. 이후 명치 43년)
경술(庚戌) 1910년 한일약정각서
경술국치, 대한제국 멸망

5. 둘러보기


[1] 당연히 이완용이 단독으로 연호를 지은 것은 아니고 내각에서 상의하여 정한 것이다. 직전 연호인 광무 또한 의정부에서 논의하여 올린 후보 중에 고종이 골랐다. 이 중 '태시'는 한무제와 발해 간왕도 사용한 적이 있던 연호다.[2] 이를 뒤집은 형태 희륭(熙隆)은 사도세자의 묘호 후보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현륭(顯隆)'이 낙점되었다. 단, 이완용이 이를 참고해서 상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3] 이렇게 새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 1월 1일부터 연호를 교체하는 것은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같은 해에 연호 2개가 공존하여 나타날 수 있는 혼란 역시 방지한다는 측면도 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즉위년칭원법을 따라 새로운 천황이 즉위한 그 해에 개원한다.[4] 조선의 유학자들이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 연호를 계속 사용한 것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전근대 시절 조선의 선비가 숭정 연호를 쓴다고 청나라에까지 알려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조선 조정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므로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념 문제일 뿐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일제가 실제로 통치하는 식민지 조선에서 굳이 융희 연호를 쓰는 것은 일본의 통치를 부정한다는 뜻이므로, 들킨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명나라가 망한 후 중국 대륙에서 대놓고 숭정연호를 쓴 것과 맞먹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