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2:07:41

헤이그 특사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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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3인
<rowcolor=#fff>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관 이위종
파일:Hague_Secret_Emissary_Affair.jpg
파일:201504231843_23110923047588_4.jpg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좌측부터 순서대로)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
1907년 7월 5일자 기사
1. 개요2. 배경3. 과정
3.1. 헤이그로 가는 여정
3.1.1. 신임장의 어새 위조와 특사자격 논란
3.2. 만국평화회의 입장 실패와 연설 활동3.3. 고종의 통치에 대한 비판3.4. 이준의 순국
4. 사건 이후5. 실패 원인과 평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고종의 헤이그 특사인 이위종과 이상설이 로이터 통신과 한 인터뷰 내용[1]
1907년에 대한제국 황제 고종제2차 한일협약의 부당함과 일본 제국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Den Haag-덴 하흐[2])에서 열린 2차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3명의 특사들을 가리킨다. 그 3명은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관 이위종. 여기에 일제의 특사인 척 연막 작전을 펴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합세했다.

2. 배경

대한제국은 만국평화회의, 적십자회의 등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하였다. 1900년 5월 외부대신 박제순으로 하여금 벨기에 전권대신에게 헤이그 평화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협조를 의뢰하였다. 이후 고종은 민영찬을 만국 평화 회의의 총재에게 보내 적십자회 가입과 만국 평화 회의의 사절단 파견 등을 타진하고 1903년 1월 가입 허가를 받았다.

1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것은 1899년이다. 1903년 고종은 2차 만국평화회의와 1864년에 창설된 국제 적십자 위원에 가입하고 싶다는 서한을 네덜란드로 보냈다. 이듬해인 1904년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3]은 러시아 외무 대신 람스도르프의 언질로 한국이 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명단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회담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을 한창 견제하다 못해 같은 해 러일전쟁까지 치르게 됐으므로 한국이 초청국 명단에 들어간 것은 다분히 일본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은 1905년 9월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가 함께 헤이그특사 파견을 계획하였다. 한국이 정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이범진이 1905년 10월 이미 람스도르프에게 정식 초청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은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계획한다.

3. 과정

3.1. 헤이그로 가는 여정

고종이 처음에 헤이그에 파견하려고 했던 인물은 이용익이었다.# 원래 보부상 출신에 발이 빨라 하루에 천리를 걷는다는 둥, 축지법을 쓴다는 둥의 소문이 돌던 인물로 임오군란명성황후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담당해 출세했지만 이내 경제 관료로서 엄청난 수완을 발휘했던 고종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이용익은 1905년 11월 고종의 밀명을 받아 출국했는데 중국 상하이연해주 등을 오가며 논의하던 도중 김현토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다만 대한계년사를 지은 정교는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현토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어 강사, 통역 역할을 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며 김현토의 이용익 암살은 양쪽의 파벌 차이 때문이었다.

다음은 특사 파견 움직임은 당시 '상동파'라고 불렸던 상동교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됐다.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이회영에게 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사실을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를 비롯한 상동교회 인사들과 특사 파견을 논의했다. 이동녕, 이시영, 전덕기, 정순만, 이준, 안창호, 이승훈,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으고 황제에게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회영은 대한자강회의 후신격인 대한협회에서 만난 내시 안호영을 통해 고종에게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 밀파 계획을 전달했다. 이때 이준은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이었다.

정사(正使) 이상설은 前 의정부 참찬으로서 당시 용정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했지만 일제가 문을 닫아 버렸다. 망명 전에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27세에 성균관장 겸 박사[4]를 지냈을 정도였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공법을 공부한 국제 정치, 국제법 전문가이기도 했다. 특히 이상설은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다. 즉,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의정부 회의를 담당하는 실무 관료였으며 어떤 위법한 절차가 있었는지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부사(副使) 이준은 前 평리원 검사였다. 법관 양성소를 1회 졸업하고 한성 재판소 검사보가 되어 법부 대신 이하영[5]을 탄핵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본인이 해임당한 적이 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통역관 이위종은 前 주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으로서 을사늑약 이후에도 러시아에서 버티고 있던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다. 당시 만 23세로 그야말로 홍안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7개 국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해 헤이그 특사가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고종은 말 그대로 황궁에 유폐당한 상태여서,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통감부가 모두 감시하고 있었기에 이준으로 결성된 특사 일행의 동정은 치밀했다. 3월 24일 고종 황제는 극비에 이준을 만났고 4월 20일자로 신임장을 보냈다.[6] 첩보 영화 수준의 작전을 통해 위임장을 받은 이준은 이상설과 이위종을 각각 다른 곳에서 만나 합류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고자 했다. 거기다 고종의 친서를 소지한 헐버트가 일본으로 이동하며 기만 작전까지 펼쳤다.[7]

고종 황제는 신뢰하던 헐버트를 먼저 출국시켜 특사 활동을 돕도록 했다. 이에 헐버트는 1907년 4월 초 한국을 떠나 일본, 중국,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러시아를 거쳐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는 이준 일행의 특사 파견이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발설하였고 이 때문에 일본은 헐버트가 평화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헐버트는 이준 일행이 이미 도착해 활동 중이던 7월 10일 헤이그에 들어왔다.

이준은 특사 위임장, 러시아 황제와 미국 대통령, 만국평회회의 등에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전달받아 서울을 출발하여 4월 2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나가사키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준 일행은 1907년 5월 초순 지린성 용정에서 온 이상설과 합류하였다.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기서 열흘가량 소요하며 활동에 필요한 외교 서류들을 준비하는 한편 니콜라이 2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906년에는 이미 러일 협약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처음 이범진에게 만국 평화 회의 초청 사실을 알렸던 1904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지 못했으며 고종의 친서만 외무부에 접수할 수 있었다. 이후 이범진의 주재로 탄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이위종을 만났고, 러시아 호위병의 호위를 받아가며 베를린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 특사는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역에 도착한 후 바흔스트라앗(Wagenstraat) 124번지 융 호텔(Hotel De Jong) 3층에 투숙하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 중이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헤이그 특사들은 1907년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6월 30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이미 특사의 타원서와 숙소 주소가 적힌 명함을 받은 네덜란드 수석대표 보퍼르(W. H. de Beaufort)는 세 특사를 방문하였다. 7월 1일부터 17일까지 한꺼번에 기록한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는 한국 특사들의 도착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 넬리도프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전적으로 일본에게 위임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저항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여 사실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보퍼르는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을 한국특사들에게 전달했음이 기록되었다. 또한 보퍼르는 "그들에게 네덜란드 정부에 그들의 정체성을 알릴 것을 권했다"며 한국특사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보퍼르가 "일본이 대한제국과 만주에 정착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다. 향후 우리 인도 군도(群島)들에도 시선이 향할 것이다"며 일본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8]

러시아는 일찍이 대한제국의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해 알고 있었고 초기엔 대한제국을 독립시킬 수도 있다고 보고 협조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국의 시위와 외교 갈등을 이유로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결국 러시아 외무부와 주일 러시아대사 등은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정보를 비밀리에 일본측에 알림으로써 대비하게 하였다.

3.1.1. 신임장의 어새 위조와 특사자격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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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가 가져간 위임장(위)와
실제 고종의 어새(아래)
2007년 조선일보는 헤이그 특사가 가져간 신임장에 찍힌 고종 황제 어새의 날인이 위조되었다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위조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서울에서 제기됐다. 서지학자인 이양재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이사는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도장인 어새(御璽)는 진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는 “황제의 다른 친서와 비교해볼 때 전각의 글자체가 크게 다르고,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 붓으로 그려 번진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전각 전문가인 정병례 고암전각예술원장도 사진을 본 뒤 “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다른 문서의 어새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대단히 어설픈 실력으로 만든 모작(模作)”이라고 단정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내가 보기에도 신임장의 어새와 수결 모양은 이상하다. 그러나 황명(皇命)이 없이 특사 활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임장에 고종의 의중이 들어 있었을 것이고, 임무를 구두로 전달하고 나중에 적게 한 백지 위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물샐틈없이 황제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르칠 경우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고종으로선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고, 촉박한 만국평화회의의 일정에 발을 구르던 밀사들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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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학계는 이준이 3월 24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를 극비리에 만나 특사 임무를 부여받았고 이후 누군가 황제 어새의 날인을 모작한 신임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9]

한편 2021년 출간된 조선레지스탕스의 두 얼굴의 저자 진명행은[10] 이와 함께 몇 가지 근거를 더 들면서 이준이 고종으로부터 임명받은 헤이그 특사가 아님을 주장했다.

하나는 이준이 1907년 4월 22일에 출국한 뒤인 그해 4월 말 고종의 측근이자 황태자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이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영사인 플란손을 만나서는 자신이 헤이그 특사라고 밝힌 적이 있고 이것이 플란손 문서(국문본)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자인 플란손이 "하지만 다른 무리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애국심이든, 아니면 사리(私利) 때문이든, 또는 어쩌면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이든, 국제회의에 가겠다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윤택영과 권신목, 이용익의 손자와 이종호 무리과 함께 이준 역시 언급되므로 헤이그 특사에는 여러조가 계획되어 있었다고 파악할 수 있고 특사가 황제의 직접 명령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가 이준 일행에 대해서 보고한 문서의 내용에 의거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前 평리원 검사 이준과 의관(議官) 나유석은 간도관리사 이범윤 등이 이곳에서 번번히 재류 한국인 간에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사실에 관하여 지난달 29일자 機諸 제5호로 보고한 바입니다. 이번에 이 자들의 협의결과, 前 학부협판(學部協辦) 이상설이라는 자가 북간도에 있으면서 학교를 사설(私設)하고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임하고 있던 중에 이곳에 불러들여 다시 모의를 짜낸 결과, 한국의 장래에 관하여 직접 러시아 정부에 탄원하기 위해 위원을 간선하여 파견한다는 의논을 결정한 후, 전기 이준, 이상설과 이곳의 부호 차석보(車錫甫)와 아들 某 외 3명은 결국 지난 21일 이곳을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한 바 있습니다. 그 탄원의 요지라는 것을 듣건대, "근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심한 압박과 특히 러시아령 연해주 방면에서의 한국인 모두가 일본 무역사무관의 권한 내에 속하도록 하기 위한 형세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보호와 단속 개시에 관하여 이후 일본 무역사무관이 러시아 정부에 어떠한 조회가 있을 경우에도 반드시 거절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또 파견위원은 만국평화회의 개최를 기회삼아 헤이그(海牙)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열국의 전권 위원 사이에서 운동한 바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당초부터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며 그와 같은 우매한 행동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또 이로 인하여 이 지방에서 배일파의 소식의 일단을 게시(揭示)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참고를 위하여 보고합니다.

機密第六號, "前 韓國學部協辦 李相卨 및 李儁, 李範允 등에 관한 件" 1907년 05월 24일, 통감부 문서 제3권
세 번째로 저자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p.79
러시아의 수석 대표이자 평화회의의 의장이었던 넬리도프는 헤이그 특사단 일행이 황제가 보낸 특사인지 의심했고, 일본 역시 이들 특사단이 소지한 신임장의 진위에 대해 의심 합니다.[11] 일본의 외무대신인 하야시 다다스(朴董)가 이토에 발신한 전보에 따르면 이들 특사가 '사칭'된 한국 사절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준 일행이 황제가 파견한 특사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고 봐야겠죠.[12]
일본은 애초에 이준, 이상설 일행이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갔다가 러시아 황제에 탄원을 올리고 헤이그로 갈 것이라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이 헤이그에서 물의를 일으키도록 고의로 내버려둔 것이라는 학계의 지적이 있습니다.[13]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짜 특사인 것을 알면서도 고종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큰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죠.

3.2. 만국평화회의 입장 실패와 연설 활동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에 시작됐다. 이보다 열흘쯤 늦은 6월 24일 ~ 25일경에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는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숙소에 국기를 게양한 뒤 공식 활동에 돌입했다. 일본은 헤이그에서 특사들이 회의장 입장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특사가 파견됐음을 알아챘다. 이들은 한국에서 헐버트를 감시했는데 헐버트가 일본까지 이동하며 일본의 눈길을 끄는 동안 특사 셋이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로 간 것이었다. 여기에 헐버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당시 대한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에서 특사가 목격됐다는 전보를 받고 노발대발하며 고종에게 찾아가 따졌다.[14]

그들은 만국 평화 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에게까지 찾아가 일본의 국권 침탈을 설명하고 의장 직권으로 참석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넬리도프 백작은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동정했으나 이미 러시아 본국에서 대한제국 특사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는 밀명을 내려 놓은 상황이었던 터라 결국 유야무야 말을 돌리면서 이들의 회의 참석을 거절했다. 일본은 이들이 사칭한 특사라 주장했고 회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밑 작업으로 방해했다.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열강 대표단에게도 회의 참석 협조를 요청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러던 6월 30일 헤이그 일간지 'Courrier de la conference(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는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보도하였다. 편집자인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15] 주석 기사에서 특사들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한국 대표들은 공식초청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다른 신문들도 한국 특사에 관해 보도하며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입장을 알렸다.

7월 5일, 특사의 정사인 이상설이 회의장에 나가 호소문을 발표했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16]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17]
같은 날 윌리엄 스테드와 이위종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날 이위종은 매우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국제 정치의 핵심을 꿰뚫는 거침없는 발언을 보여준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 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을사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인터뷰는 이 문서 맨 위에도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특사들은 언론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7월 8일 저녁 각국 신문 기자단이 주최한 국제 협회에 이상설과 이위종은 귀빈으로 초대받아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은 유창한 불어로 연설을 하였다. 당시 회의장 주변에는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시민 운동가들이 몰려든 상태였다고 한다.
러일전쟁 중 일본이 공언한 전쟁목적의 두 가지는 첫째, 한국독립의 유지와 영토보전, 둘째, 극동의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의 유지였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번 전쟁이 일본 자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문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하였으므로 동양에 파견된 영·미인 모두가 일본의 언명에 대한 이행을 믿었으며, 특히 한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장기집정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으므로 일본인들을 애원과 희망으로 환영하였다. 그당시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관리들을 처벌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서는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하여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진출을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하기 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연승을 거두게 되자 태도를 바꾸어 추잡하고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가혹한 처사를 감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들의 맨 처음 요구는 한국영토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개간지를 하등의 보상도 없이 50년간 그들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의 요구는 일본황제 특사인 이토가 저들 군마보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애워 싼 가운데서 11월 15일에 제시한, 그들에 의해서 꾸며진 조약체결 내용을 황제가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조약의 초안은 첫째, 한국의 대외적 문제의 관할 및 지휘는 일본에게 위임할 것, 둘째, 한국 정부는 국제적 성격의 어떠한 회합이나 약정일지라도 일본의 중개 없이는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셋째, 서울에 일본통감을 배치할 것, 넷째, 한국 내에 일본 주재관을 임명할 것 등 네 가지로 되어 있다.

한국황제와 대신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토가 이를 고집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에 동의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7일 저녁까지도 결론을 짓지 못하자 일본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만사에 있어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할 뿐이다”라고까지 위협해 왔다. 공포에 질린 대신들은 주변에서 나뭇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더라도 일본군인들이 살그머니 옆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상상할 정도였다.

급기야 완강히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하여 감금한 상태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평론가나 선전가들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이 조약이 마치 한국측의 선의적이며 자진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가장 우의적이며 형제적인 우호관계를 가진 체 하면서 슬쩍 상대방의 호주머니를 터는 위선가는 공개적인 강도 행위보다도 더욱 경멸해야 할 일이며 잔인한 일일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강탈·강도 또는 잔인한 흉계 등을 감행하였으니 이로 인한 3년간의 실질적인 손해는 구체제하 정부의 가장 잔혹한 정치가 50년간 저지른 해독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이토가 일본에서 1억원(500만불)을 차관해 온 돈으로, 재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토 봉급의 3∼4배를 받았고, 수도공사는 일인들의 거주지인 제물포와 서울의 日本人街에만 시설되었으며, 교육기관의 설치는 한국어를 根滅시키고 일본어를 대신 가르치려는 것이었고, 한국인의 해외유학은 반일주의를 호소·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불허하였으며, 행정개혁은 유능하고 신망 있는 한국인 정치가를 축출하고 일본화한 사람들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권은 개인 소유지를 군사상의 필요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박탈하였으며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한국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국 국민들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여하한 행동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에 대한 엄숙한 공약을 배반하였다.(YE WE CHONG, "A Plea for Korea" The Independent, Vol. LXⅢ, New York, 1907년 8월호)
출처
미국 공사, 유럽 공사,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의 활약은 특사 일행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러시아에서 지낸 경험 덕분에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초급 장교 훈련을 받은 바 있어 국제 외교가에서 공식 언어로 통하던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 중 서양 3개국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위종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해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다. 이 연설문 전문은 스테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었고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게다가 서구 언론은 이위종을 '한국의 프린스' 쯤으로 보도했다. 이위종이 전주 이씨였기 때문인데 사실 이위종은 '낙동염라' 이경하의 손자로 광평대군파였다.[18]

연설에 대한 반응은 만족스러웠다. 이위종의 위 연설이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Haagsche Couront》에 게재되는 등 각국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고 대한제국을 지지하는 성명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당시는 국제연합(UN)이 없던 시절이라[19] 힘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측은한 반응을 보일 뿐 거기까지였고[20] 심지어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한 것처럼 보였던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 역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는데 1904년의 영일동맹 때문이다. 한편 친한파라고 알려진 일본 특파원은 직함이 언론인이었을 뿐 실은 일본 대사의 첩보 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되어 한국에 전달되었다.

3.3. 고종의 통치에 대한 비판

파일:A plea For Korea.jpg

1907년 8월 22일 자 미국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지에 실린 연설문이다. 이 잡지는 이위종을 '왕자 이위종(Prince Ye We Chong)'으로 소개했다. 연설문 제목은 '한국을 위한 호소문'(A Plea for Korea)이다.
일본 정치가들은 늘 일본이 일본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모든 국가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하지만 놀랍고 슬프게도 일본은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구호와 달리 추하고 불의하며 비인도적이고 이기적인 야만스러운 행동을 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The Japanese publicists proclaimed, time alter time, that Japan was not fighting for herself alone, but also for all civilization and for the commercial benefit of all nations. (중략) To our amazement, and great resentment, Japan had been and is playing the ugly, unjust, inhuman, selfish and brutal role instead of a fair and 'equal opportunities for all' role.

다음은 위 인용문 가운데 '(중략)'으로 가려진 부분이다.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고 믿었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We believed, at that time, that Japan, while dealing possibly stern measures against the corrupt officials, would give justice to the common people and would give honest advice in the administrative work. We believed that Japan would seize the occasion and lead the Koreans in their efforts to bring about the necessary reforms.

7월 8일 연설에서 이위종은 일본 제국뿐 아니라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한국의 독립유지와 영토보존을 위해서라는 일본의 정중한 약속을 믿고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의 결과로서 한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다. 또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한국 국민과 정부는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하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해 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 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출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문명국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15-16
이위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근대사상의 조류들이 유행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철저한 근왕주의자인 이범진보다 정치사상 면에서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1896년 7월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부친의 영향으로 나이 어린 야무진 군권주의자의 면모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07년 7월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을 때에 대한제국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 가혹한 행정 등으로 인해 인민이 고생하고 있음을 인정했을 뿐더러 그러한 정치를 ‘구체제하 정부의 잔혹한 정치’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는 이위종이 고종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1919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국민들만이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쫓지 않고 박해받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진정으로 투쟁할 수 있다”며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이위종의 정치사상이 군권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전환해 갔음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43-44

3.4. 이준의 순국

7월 14일,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이준은 투숙하던 헤이그의 호텔에서 사망했다. 이것을 보고 후에 변절한 황성신문장지연이 위암문고에서 "할복 자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내장을 꺼내 던졌다더라."고 기술했다.

이준의 사인(死因)에 대해선 이런저런 추측들이 많이 있었으나 헤이그의 문서 보관소, 사망 당시의 신문 등을 살펴보아도 사망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원인은 나와 있지 않다. 실패로 인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홧병에 걸려 병사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정설은 아니다.

1907년 7월 16일 네덜란드 현지 신문인 뉴 코란트 신문에서 "장례연설은 없었고 아주 조용하고 침묵한 분위기속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때 같이 왔던 한국 사람이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고 자기의 삶을 앗아간 것처럼 심하게 통곡을 하였다."고 보도했으며 1907년 7월 16일 미국 뉴욕 타임즈 신문에서는 "이준의 장례식 후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일본의 첩보문서에 의하면 이준의 얼굴에 난 종기를 조사해 보니 이준이 단독이라는 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인다면서 세간에 자살설이 돌고 있지만 단독으로 인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단독은 연쇄상구균이나 포도상구균으로 인해 피부에 감염되는 질환인데 세균에 감염되면 2일 정도가 지난 후 고열과 오한 및 두통과 피로감을 동반하는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치료는 페니실린, 에리스로마이신 같은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이준은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30년도 전에 사망했다. 현지 언론에서 뺨의 종기를 거론한 것이 이 단독의 증세를 말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감기로 인한 사망이다. 이준을 포함한 특사 3인이 회의장 앞에서 입장을 요구할 때 헤이그에 큰 비가 내렸는데 이때 이준이 고뿔이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 이런 설들을 종합한다면 이준이 감기에 걸린 가운데 몸을 돌보지 않고 외교전을 펼쳤고 면역력이 약해진 가운데 세균에 감염되어 단독에 걸렸고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또는 이준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측에서 독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준의 사후 조선 내부에서는 화병으로 사망설 또는 자살설 내지 일제 독살설이 파다하게 나돌아 반일 감정만 고조시켰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이 이준을 독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여하튼 결국 지금에 와서는 국사 교과서에서도 호텔에서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순국했다."고만 밝히고 있으며 정확한 사인을 적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이 어떻게 됐든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조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객사한 것이니 열사순국이라 불리는 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교외의 뉴 아이큰다우(Nieuw Eykendunen) 공동 묘지에 가매장되었으며 미국 일정을 마치고 헤이그로 돌아온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유해를 뉴브다이컨 묘지로 이장했다. 이준의 유해는 56년이 흐른 뒤인 1963년에야 서울 수유리에 이장되었다.
파일:external/www.yijunpeacemuseum.com/01_01_img.jpg
이준 열사가 순국했던 호텔 자리에는 1995년에 이준 열사 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이 건립되었다. 현지 교포 이기항의 노력으로 매입되어 유지, 관리 중이며 헤이그 특사 관련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파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청사와 더불어 유럽에서 드문 한국 항일 유적지다.#

4. 사건 이후

대한제국 통감부는 한국 법부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기소하고 1907년 7월 20일 평리원궐석재판을 개정하여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에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그로 떠난 후 생사가 묘연해져 버렸다.

이준 열사의 순국 이후 남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외교 행보를 이어나간 것이 무려 2019년에야 확인되었는데 흥사단 측에서 발굴한 앨리스 아일랜드의 출입국 기록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의 기록을 찾아낸 것.

미국으로 떠나기 전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이 인터뷰 내용을 실은 1907년 7월 25일자 <알게마이네 차이통>의 기사가 2019년 3월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는 고종황제의 마지막 전언을 같이 싣고 "이위종 왕자는 미국에 가서 일본의 한국탄압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고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리고 나서 몇 주 후에 런던으로 돌아와 런던에 회사를 차리고, 대한제국에서 펼치는 일본의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또 "헤이그에서 그들의 임무가 실패했더라도, 그들에 대해 뭐라 말하지 못할 것"이라며 "특히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대표사절단은 한국의 상황에 깊은 동정심을 표했고 도움을 줄 것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인터뷰 말미에 대표단은 고종의 강제퇴위는 일본의 돈과 한국인 변절자들이 만든 것이라 했다"고 전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상설과 이위종은 사우샘프턴에서 마제스틱호를 타고 1907년 8월 1일 미국 뉴욕항에 도착했으며 입국 심사에서 자신들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소개하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루즈벨트를 만나 친서를 전달하는 건 실패로 돌아간 걸로 보인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당하고 7월 19일 강제 퇴위했다.

5. 실패 원인과 평가

우선 헤이그 특사 파견 전인 1905년에도 고종은 미국에 헐버트를 파견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미국은 대한제국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을사늑약은 체결되었다. 고종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다시 한 번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수많은 나라 중에서 미국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고종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항 '거중조정'(居中調停) 항목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거중조정'이란 현재의 상호방위조약처럼 상대국이 제3국과 분쟁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겠다는 선의의 조항이었다. 바보처럼 고종이 이 조항을 믿어버렸다는 비판이 있지만, 옹호해보자면 청일전쟁 당시 평화를 주선한 데 힘쓴 것도 미국이었고, 고종 입장에선 이것 외엔 선택지가 더 없었으며 명분상으로도 유리했다. 자국의 역량으로는 일본 제국에 맞설 수 없으니 부작용이 크고 성공률이 낮긴 하지만 뭘 해도 안 될 상황에서는 해볼만 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고종과 밀사들은 이번만큼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공개적인 회담이기에 이를 공론화하기만 하면, 열강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이미 손을 써서 영국과 1차 영일동맹을 맺었고, 미국과는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그리고 러시아청나라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향력이 줄어든 상태였다. 특히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적 수단으로나마 한국에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는 입장이었지만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제안했던 1904년1907년에 이르러선 러-일간 외교적 합의가 이뤄지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이 만국평화회의에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자리가 있었다. 그것도 47개국 가운데 12번째였다. 그리고 회담 내내 "참석국은 47개국"이라고 언급되었다. 대한제국의 특사가 참석하지 못한 원인은 흔히 알려진 외교권 박탈에 따른 무시나 초청장의 부재가 아니라 일본의 방해와 대표성의 부실 때문이었다. 의장 넬리도프는 본국으로부터 대한제국 특사들이 협조를 요청하면 정중히 거절할 것이라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부의장이었던 네덜란드의 보폴트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며, 보폴트는 네덜란드 정부와 상의하도록 주선했다. 주최국이었던 네덜란드도 대한제국의 회의 참석에는 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 대표가 네덜란드 정부에 일본 국가 명의로
'한국'은 일본의 속령 지역이니만큼 귀국(네덜란드)께서는 한국 대표의 회의 참가를 불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은밀히 압박을 놓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대부분이 을사늑약을 인정하고 자국의 대한제국 주재 영사관을 철수시킨 마당에 대한제국을 변호해 줄 강대국이 있을 리 없었다.

이 점을 두고 권력에 집착하는 고종이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국제 정세따윈 우습게 여기고 안일하게 행동했다며 비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미 나라의 군사력은 거의 궤멸 상태였고[21] 황제는 일제의 감시 아래 손발이 다 묶인 상황이었는데 사실 할 수 있는 카드는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었다. 고종으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상황에서 달리 해볼 수 있는 방법은 그때 상황에서는 전혀 없었다. 애당초 헤이그 특사는 고종에게 있어, 일본 제국의 침략과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고종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아키야마 요시후루도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때 한국의 헤이그 특사들을 저지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그런데 그는 정작 회의에서 열심히 졸고 있었다고.

즉 헤이그 특사 당시 주변국과 열강들의 상황을 보자면
  • 청나라 -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뒤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기존 조선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 러시아 -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뒤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영향력을 승인했다.
  • 영국 -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영일동맹) 러일전쟁 때 일본의 편을 들어줬다.
  • 프랑스 -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긴밀한 협약을 맺었으며, 과거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엿먹인 전적이 있긴 했지만 러일전쟁 후 외교관계에서는 가급적 일본의 우방국을 유지했기에 대한제국의 도움을 외면했다.
  • 미국 - 러일전쟁 때 만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함께 일본에 막대한 금융지원을 했고 결정적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편을 들어줬다. 밀약을 맺으며 필리핀은 미국이,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 독일 - 영프를 견제하기 위한 삼국동맹 당사국이었으며 영일동맹을 의식하여 1902년 빌헬름 2세가 고종의 친서를 받고 고종한테 답장을 써 주기도 했지만... 아시아에서 칭다오와 뉴기니에 신경쓰기도 바빴던 당시 독일이 영국, 일본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면서까지 대한제국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 독일과 같은 삼국동맹 당사국 중 하나였지만 발칸반도 식민지로 러시아와 다투기 바빴으며 마찬가지로 일본과 척을 지면서까지 아시아에서 대한제국을 두둔할 생각은 없었다.
  • 이탈리아 - 이탈리아도 삼국동맹 당사국이었지만 20세기 초부터 점점 영프와 밀월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아시아와 대한제국에 그다지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스페인 - 스페인은 19세기에 브라질을 제외한 옛 중남미 식민지를 모두 상실하여 국력이 반쯤 약해졌으며, 식민지배 전성기에 비하면 약해진 입장이었고 당연히 대한제국과는 수교를 하지 않아서 관심이 없었다.
  • 포르투갈 - 1822년 남미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잃었지만 대신 중국의 마카오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식민 지배하는데 신경쓰는 입장이라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도, 외교관계도 없었다.
  • 스웨덴 - 전통적인 중립국이었으나 정작 대한제국과는 수교하지 않았고 강대국 편도 아니어서 무관심했다. 게다가 2년 전인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으로 국력도 다소 줄어들었다.
  • 덴마크 - 전통적인 중립국이었고, 북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대한제국과 수교[22]했으나 을사늑약 때 단교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 벨기에 - 네덜란드의 이웃나라이지만 일제처럼 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지배하던 당사국 입장이라 콩고와 같은 대한제국의 입장에 관심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2년 후인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여했다[23][24].
  • 네덜란드 - 이 회의의 주최국이다. 대한제국과는 수교하지 않았고 이쪽도 동인도 및 티모르 섬 식민 지배에 신경을 쓰는 입장이라 당연히 그들과 같은 대한제국의 입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벨기에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지만 나라 자체가 약하고 작아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와 외교관계도 없었으며 나라의 존재도 모르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입장이나 이쪽은 대한제국과는 달리 강대국들이 1867년 영세중립을 보장해 주었다는 점이 있고 나라가 약하고 작아서 대한제국을 변호해 줄 여력도 없었다.
  • 스위스 - 전통적인 영세중립국이며 대한제국과 역사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적도 없고 중립을 고수하는 있어 대한제국에 대한 변호나 구제를 해줄 입장도 아니었다.
  • 오스만 제국 - 과거 유럽과 중동을 호령했던 전성기에 비해서 1830년 그리스의 독립 등으로 국력이 약해지게 되어서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처지에 대한제국과도 수교를 맺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었다.
  • 멕시코 - 만국평화회의 참가국이자 미국의 주변국이었으나 미국에 비해서 국력이 약하고 서구 열강축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인 데다가 대한제국과는 당연히 수교하지 않았으므로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은 낯선 아시아 변방국인 대한제국을 변호해 줄 입장도 되지 못했다. 또 일본인 지주들에 의해 조선인들이 본국에 와 애니깽 농장에서 노역과 혹사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
  • 시암 시절의 태국 - 영프 열강들이 버마와 인도차이나를 장악하여 식민지배를 했던 와중에도 유일하게 동남아시아에서 자주 독립을 유지한 나라였지만, 정작 식민 지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입장이 아니라서 당연히 대한제국이라는 변방의 국가를 편들어주고 변호해 줄 리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대다수의 나라들은 대한제국을 구제할 이유가 있기는커녕 관심도 없었으며, 몇몇 강대국들은 이해관계상 일본의 편에 서는 게 유리했으니 그 어떤 나라도 대한제국을 도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6. 대중매체에서

  • 이 사건을 단독으로 다룬 1984년작 북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가 있는데 이 작품은 신상옥 감독이 납북된 후에 만든 것이며 체코슬로바키아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 대체역사소설 <서부전선 이상있다>에서 주인공이 굴린 스노우볼로 인해서 전 유럽이 영국을 엿먹이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회의장에 들여보냄으로써 성공했다.



[1] 인터뷰에서는 '황제의 마지막 전언\'이라고 했다.[2] 한자로는 해아()라고 한다. '잘왔군 타령'에서 화자2가 해아 일로 나왔다고 하는데 헤이그를 가리키는 말이다.[3]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으므로 당연히 이범진의 지위도 무력해진 상황이었지만 이범진은 본국의 호출도 씹고 경술국치까지 버티며 공사관 업무를 지속했다. 경술국치 후엔 결국 자결하지만...[4] 과거의 성균관 대사성.[5] 찹쌀떡 장수가 외부 대신이 된 것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친일파 이하영이다.[6] 신임장을 전달했느냐, 못 했느냐로 설이 갈리고 전달한 이가 누구냐에 따라 또 3가지 설로 갈린다. 이 중에서 박 상궁이 전달했다는 유자후의 기록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신임장에 찍힌 날인이 붓으로 그린 모작으로 확인되면서 이준 일행이 모작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헐버트 또한 어새가 모작된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작의 주체가 이준 일행이 아닌 어새가 없던 황제 측이라고 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어새가 모작이 맞으나 전후 상황을 보아 황제의 명령을 받은 특사는 맞는 것으로 보고 있다. 황제가 신임하던 헐버트가 헤이그로 파견돼 이들을 도운 점, 이토가 황제를 만나 헤이그에 특사 파견을 추궁하며 퇴위 시킬 때 고종이 어떤 부정도 하지 않은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7] 그 와중에 헐버트는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적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간 경천사 10층 석탑의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재팬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 '한국에서의 만행'이라는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뉴욕타임즈 등이 대서특필 하는 등 석탑 반환을 촉구했다. 이후 석탑은 1918년 다시 한국으로 반환되었다.#[8] 선견지명이다. 30여 년 후 일본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침공했고 자바 해전으로 ABDA 연합군을 개박살내고 식민지에 거주 중이던 네덜란드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오늘날에도 일본의 과거사 문제나 상임이사국 진출 등에 있어서 유럽 국가 중 가장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네덜란드와의 교류로 인한 난학으로 인해 메이지 유신에 성공했고, 네덜란드의 중립을 사실상 보증하던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동맹의 동맹에 가까웠던 관계와 비교 사례로 당시 미국이 색부호 전쟁 계획을 싹 다 만들면서도 내심 최악의 시나리오로는 대 영국전이나 일본이 포함되더라도 대 영일동맹 전 정도를 예상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혜안인 셈.[9] 신임장의 수여여부와 모작의 주체가 누군지는 설이 갈린다.[10] 저자 진명행은 역사전공자가 아닌 것과는 별개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을 폭도로 지칭하며 지만원을 지지하는 의사를 표하는 등 광주폭동설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 외 역사적 견해나 성향에 관한 것은 개인 블로그와 저널 참조.[11] Willem Henrik de Beaufort의 일기와 메모 1874-1918, 꾼 드 퀘스터,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성공과 좌절, 한국사학보(30), 고려사학회 2008, p.321에서 재인용 1907년 7월 11일, 來電第139 號 "헤이그에 파견된 詐稱 한국 使節의 행동에 관한 件"[12] "헤이그에 파견된 詐稱 한국 使節의 행동에 관한 件". 來電第139 號, 1907년 7월 11일[13] 이에 대해서는 한성민의 연구를 참고할 만하며 그 외에 김지영, 한철호, 무라세 신야(村瀬 信也)의 연구가 있다.[14] 일설에 의하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이 벌개져서 고종에게 "조선의 모든 외교는 을사조약을 지켜 우리 일본을 반드시 통해야 하거늘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을 난처하게 만들다니, 조약을 어긴 데 대한 배상금을 물어내던지 차라리 일본한테 전쟁을 선포하던지 하시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15] 최초로 신문과 잡지의 보도에 삽화를 삽입하는 보도 기법과 현재 모든 기자들이 조사를 위해 반드시 하게 되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오늘날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에게 지침표를 마련한 인물. 2020년 2월 2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영국의 아동매춘에 대한 실태를 폭로하여 법 개정을 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의로운 행보를 보여준 기자였다고 한다.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고. 이후 1912년, 다른 나라에 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불행히도 그 배가 타이타닉호여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구명조끼를 다른 이에게 양보한 뒤 독서하며 최후를 맞이했다.[16]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이다. 그리고 1894년에 갑오개혁이 일어나 군주명을 중국 황제의 제후작위인 에서 독립적인 대군주로 바꿨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종주권을 잃어버렸다.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은 1897년 완공되었으며 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한국계 국가와 중국의 통일 왕조가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이같은 주의 내용은 과거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한중일 역사적 관계는 서양 방식으로 그대로 적용했을때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17] 박은식 <한국통사>, 위키피디아에서 재인용.#[18] 이준 역시 이성계의 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으로, 전주 이씨다. 이상설은 경주 이씨.[19] 유엔은 2차 대전 이후 창설되었다.[20] 오늘날에도 중국의 압력으로 외교적 고립에 직면한 대만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주요 국제기구 총회가 열릴 때마다 중국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대만 대표들의 참석이 거부당하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실정이다.[21] 1905년 일본의 요구로 대대적인 군축과 항일장교의 퇴출이 벌어졌고, 이 사건 이후 정미 7조약으로 군대는 완전히 해산되었다.[22]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은 마지막 국가이다.[23] 그리고 바로 이때 애국자 이재명 열사가 휘두른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24] 게다가 레오폴드 2세 역시 일제 못지않은 식민 지배를 주도한 왕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 지배하면서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고 고문까지 하도록 지시한 장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