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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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1. 개요
조선귀족([ruby(朝鮮貴族, ruby=ちょうせんきぞく)])은 식민지 조선의 조선인으로서 귀족이 된 자를 가리키는 용어.2. 상세
조선에서는 제후국의 예에 따라 오등작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으나,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오등작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한일합방에 크게 앞장선 조선인들에 보상하기 위해 천황의 칙령인 '조선귀족령'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게 된다. 이들은 일본 본국의 귀족이었던 화족과는 법적 근거가 다르지만 화족과 같은 이름의 작위를 받고 화족 내의 이름이 같은 각 작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 정부는 한일합방을 위해 총 3,000만 원의 임시은사금을 준비 하였다. 대한제국이 망할 때 약 1,300만 원의 부채로 국가 부도를 내었고, 망국 직전 1909년의 총세출 예산이 5,100만 원이었으니 임시은사금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돈에서 600만 원이 바로 한일합방 유공자인 조선귀족에게 지급되었다.
임시은사금 전액이 조선귀족에게 지급된 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전국 각도 12부 327군에 17,398,000원이 공채 형태로 지급되어 그 이자를 패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예산으로 쓰게 하였다. 나머지 12,602,000원은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해 지급 되었는데 조선귀족에게 600여만 원, 교육 기관인 경학원에 250만 원, 군수 등 한국 관리 3,638명과 병합 공로자들, 그 유족들에게 200여만 원, 조선 유생들 1인당 15원꼴로 30만 원, 효자, 열녀, 마을 모범자에게 1인당 10원씩 32,090원, 기타 환자나 고아, 광증자, 일반 궁민, 행려병자들에게 나머지 400만 원을 뿌리는 등 고위관료에서부터 하층민에게까지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뇌물로서 뿌렸다. 다만 이 은사금은 현금으로 전액 지급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공채" 지급이었으며, 일본은 조선귀족에게 공채 금액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년 이자의 명목으로 지급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되는 것이며, 연리 5%의 이자는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 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되었다. 일본 정부는 '50년 후에 원금을 모두 상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식민통치가 50년을 채우기 전에 일본이 패망해 만 35년 만에 조선이 해방되었으므로 약속된 50년 만기를 채워 원금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이 일제로부터 지급되던 매년의 '이자'를 36년간 꼬박 꼬박 모았다 하더라도, 그 액수는 실제로 적다고 본다.[1]
물론 액수가 적다한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적은 돈은 결코 아니었다. 예를 달면 순종의 장인 윤택영은 이 돈으로 순정효황후 시집 보낼 때 사용한 빚을 일부 갚았다.[2] 또한 여러 특권을 보장받았는데 조선 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불하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귀족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고자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공포하여 세습 재산을 설정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을 공포하고 재단을 설립하여 궁핍한 귀족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지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따라 실질적으로 무효화되었고, 1947년에 5월 12일 일본에서 조선귀족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국내법적으로도 무효화되었다. 현대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에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를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고 있어서 조선귀족 대부분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은 예외로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3. 명단
3.1. 수작자
일본은 경술국치 이후 총 77위의 작위를 수여하였다(후작 6위, 백작 3위, 자작 22위, 남작 46위). 1924년에 수작한 이항구를 제외한 76위는 모두 경술국치 직후 논공행상 및 회유의 대가로 수여한 것이다. 이들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은 전부 다 나라를 이끄는 정부 요인, 고위 관료, 장관급에 해당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을 때, 밤을 새워 큰 잔치를 열어 기쁨을 만끽했다고 한다.(제목: 敍爵者(서작자)의 喜悅(희열)#)이 중 8인은 작위수여를 거절하였으며, 3인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실작, 1인은 자진반납하였다. 김윤식, 이용직 등은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 때 독립 청원서를 보내면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도 않는다.[3]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의 경우 실작하지는 않고 해당 작위를 유지했으나, 아예 망명을 하여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유길준처럼 작위 수여 자체를 거부한 사람도 있다.
범죄 등 개인적 일탈로 인하여 실작하는 자들도 몇 명 있었으나, 이 경우 보통 자식에게 습작이 되었다.
1920년, 이완용과 송병준이 각 후작과 백작으로 승작하였다.
왕족이나 인척은 후작, 합방의 주역이나 총리대신 등 고급 관료는 백작,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현직대신은 자작, 전직 대신 및 민씨 척족은 남작이었다. 단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중 이완용은 겹치기 때문에 11명인데 이완용은 후작, 송병준, 이지용은 백작으로 승작하여 8명만 자작이 되었다.
6,000,000원의 은사금공채는 작위 내에서도 차등 지급했는데, 왕공족인 이강과 이희에게는 각 830,000원, 후작인 순종의 장인 윤택영이 504,000원, 흥선대원군의 조카 이재완은 336,000천 원, 철종의 사위 박영효는 280,000원을, 나머지 왕족인 이재각, 이해승, 이해창은 각 168,000원 등을 받았다.
백작인 이완용 150,000원, 민영찬 120,000원, 이지용 100,000원을 받았으며 자작들은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은 100,000원씩, 나머지 현직대신들은 50,000원을 받았다. 남작들은 25,000원을 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은 168,000원을 받았다.
사망한 친일파인 김옥균, 서광범, 안경수, 신기선, 우범선, 김홍집의 유족들에게는 소정의 은사금만 주어지고 작위는 부여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일본 제국이 패전하는 그날까지 조선인 신분으로 공작에 서임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구 조선 왕실의 직계인 이왕가에는 덴노 아래의 '왕공족' 신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뒤에 붙는 '공(公)'이란 호칭은 단순한 존칭의 성격에 그친다. 일본에서도 고셋케(五攝家: 구 교토 공가 중 최고위 가문)나 구 도쿠가와 막부 당주, 거대 다이묘나 조정 원로가 아닌 이상 공작 작위를 받은 사람은 극소수의 유신지사 외에는 없었고 황실에서 이탈해 화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후작이나 백작이었다.[4]
3.1.1. 공작
- 없음
3.1.2. 후작
철종의 부마로서 왕실의 일원. 을사조약 이후 이완용 내각에 편입되었으나 순종의 퇴위를 반대하는 등 저항을 지속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엔 체념해 완전히 친일로 돌아섰으며 3.1운동의 서명도 거부했다.순종의 두 번째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아버지. 해풍부원군에 봉해진 조선의 마지막 외척이었다. 병합 당시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으나 헤픈 씀씀이로 모조리 말아먹고 빚더미에 앉아 작위를 상실하기도 했다.[5] 작위는 훗날 복원되었으나 끝내 부채를 탕감하는데는 실패하고 1920년 중국으로 도망가 숨어살다가 1935년 객사했다.[6]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채무왕이었다. 나중에 작위를 박탈당하는데 독립 운동을 해서 박탈당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채무 때문에 파산 선고로 박탈당하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도망갔던 큰아들 윤홍섭[7]은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황족으로 사도세자의 막내아들 은전군의 증손자.[8][A]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황족으로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아들.[10][A] 한성은행 등 주로 금융 쪽에서 열심히 나라를 팔아먹었다.
황족으로 철종의 이복 형 영평군의 증손자.[12] 일본의 통치에 적극협력했다. 자신의 재산에 더해 앞서 서술된 윤택영이 파산할 때 임시로 맡긴 재산까지 합쳐 막대한 재산을 보유했으나, 본인은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고, 재산 중 318억 원에 달하는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황족으로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종가(宗家) 도정궁 사손. 이재완과 같이 한성 은행 운영에 참가했다. 병합 전에 민족 계몽 운동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특이하게도 병합 이후인 1931년에 단군을 모시는 단군 신전 봉찬회의 고문을 맡아 민족주의 활동을 지속했다.
3.1.3. 백작
여흥 민씨의 순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순명효황후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병합 당시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 흡입죄로 작위를 박탈당했다.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해당되는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한일합방의 최고 주역(...)이지만 작위가 후작이 아닌 백작이다. 후작을 받은 인물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친인척[13]들로, 대한제국 황실을 우대한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후작이 된 것이고, 대한제국 황실과는 아무 연고도 없는 이완용이 후작 다음가는 백작 작위를 받은 것은 순전히 이완용의 업적(?) 덕분이다.
결국 1920년 후작으로 승작하였다.
을사오적. 당시 내부 대신으로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일제 시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도박에 몰두했던 듯하다. 후에는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죽기 전 "일본에 속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3.1.4. 자작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의 이관왕. 갑신정변에도 관련이 되어 있는 개화파의 일원이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고종을 마지막까지 보호하려 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으나 고종의 양위를 막지 못한 뒤 자포자기했는지 이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에 협조하였다.을사오적. 국방 분야에 주로 종사했으며 조약 체결 당시엔 농상공부 대신을 맡고 있었으며, 당시 의병들을 탄압하는 명령을 내렸다. 몇 차례 암살 위험에 노출되었으나 목숨을 건졌다. 3.1 운동 이후 이재곤과 자작 작위를 반납하려 했지만 일본에 의해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종건은 제대로 작위를 반납한 것으로 보아 요식행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있다.
서예가로 유명했으며 그의 필체는 '미남궁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가 박탈당했다.
경술국적. 이완용과는 사돈간이자 절친이었다고 한다. 여흥 민씨의 일원으로 1889년 평안 감사를 지내면서[14] 개막장 행보를 보여 을사늑약 때 자결하는 조병세에게도 탄핵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에 친구인 이완용을 따라 친러파에 속해 있다가 친러파가 몰락하자 역시 친구와 함께 잽싸게 친일파로 갈아탔다.
- 민영규
역시 여흥 민씨 가문의 거두로, 초명은 민영준이었으며 임오군란 때 집이 습격당했다. 초반엔 대표적인 친청 수구파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일을 맡기도 했고,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유배되자 청나라로 도망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여 작위를 받았으며, 경제에 밝아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휘문의숙과 풍문여고[15]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의 이관왕.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토벌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동학 농민 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청파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일본군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등 접촉을 가지다가 일본의 협박에 못이겨 을사 조약에 서명을 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 일을 계기로 조약 체결 반대파였던 한규설을 밀어내고 부수상의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했다.[16]
정미칠적.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의 양대거두로 불린다. 본래 서얼 출신으로 기생집에서 잡일을 하던 사람이었으나 우연히 민태호의 눈에 들어 여흥 민씨 가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청나라으로 파견되었으나 오히려 그에게 설득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17] 결국 1920년 백작으로 승작하였다.
경술국적. 후작 작위를 받은 윤택영의 형이다. 조카딸의 간택으로 왕실 관련 일에 종사했는데, 이때 보여준 친일 솜씨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조선 왕실의 덴노 방문을 추진하려는 일본의 앞잡이로써 일주일간 고종을 쫓아다니며 압박을 가해 결국 승낙을 받아내었다.[18] 이때의 활약은 일본인 관료였던 곤도 시로스케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경술국치 당일에는 동생인 윤택영, 민병석 등과 함께 대궐의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고종과 순종을 협박했으며 조카딸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자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뺏어다 일본에게 갖다 바쳤다. 이렇듯 고종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행적 때문에 1919년 고종이 사망했을 때 독살설의 배후로 강력하게 지목되기도 했다. 고종의 장례식 때 왕실 장례에 참석한 민간인들에게 명예직이나마 관직을 내린다는 조선 시대 법을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의 직원 임명장을 위조해 장례 참석 인원들에게 팔아먹었다가 물의를 빚었다. 당시 이왕직에 근무하던 곤도 시로스케가 쓴 회고록 '이왕궁비사'에서는 이왕비 전하(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왕실의 지친이라는 사람이 막장짓한다고 대차게 깠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1907년부터 본격적인 친일로 돌아섰다.
을사오적. 무인 집안 출신으로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바친 일을 계기로 관직에 올랐다. 을사 조약 체결 당시 군부 대신으로 조약 체결에 찬성하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며 기뻐했다고 한다.[19]
왕족으로 별다른 능력은 없었는지 그저 왕실 관련 업무에만 종사했다. 병합 이후 작위와 돈을 받았으나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해 한차례 파산하기도 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이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처벌을 면했고 병합 당시 작위를 받은 귀족 중 가장 장수했다. 언제 죽었는지는 불명확하나 1960년 한 잡지가 친일파의 현재 행적을 조사하여 취재했을 때 서울 서대문구에 살아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이관왕. 무관 출신으로 이른 시기부터 친일파로 활약(...)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 위기에 몰렸을 때 고종이 양위를 거부하자 고종의 앞에서 자해 소동을 벌여 결국 양위에 동의하도록 했다. 이후 정미 신협약 때는 군부 대신으로서 조약 체결에 서명했고 조약 체결로 해산된 군대가 해산 명령에 불복하고 한양 시내에서 봉기 시가전을 벌이며 저항하자 진압을 지휘하여 자신의 옛 부하들을 자신의 손으로 괴멸시켰다.
왕족 출신으로 은언군가의 종손이다. 앞선 이완용과는 동명이인이다.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가 박탈당했다.
정미칠적. 정미 신협약 체결 때 학부 대신으로 조약 체결에 찬성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을 했다. 한일 병합 후에도 불교와 왕실을 중심으로 친일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으며 광나루에 별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호화롭게 살았다. 3.1 운동 당시 권중현과 함께 작위 반납을 원했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하지만 이종건은 제대로 작위를 반납한 것으로 보아 요식행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있다.
오성 이항복의 후손.[20] 일찍이 가계가 몰락하여 행상을 하는 등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으나 개화기 당시 조선에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전무했던 영어를 어느 정도 익히는 데 성공하여 당시 의료 선교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알렌 등의 통역을 맡으며 출세했다. 이후 외교 관련 업무에 종사하며 나라의 이권을 외국에 팔았다. 찹쌀떡 행상 출신에서 고위 관리로, 다시 친일파로 돌아선 그의 기구한 행적이 흥미를 끌었는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일화를 방영하기도 했다.[21]
정미칠적. 조약 체결 후인 1908년 탁지부(재정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의 대신으로 취임하여 일본 소유의 군용지와 철도 용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주고 의병에게 살해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친일에 몰두했다. 이완용과는 사돈 사이.
경술국적. 이완용의 처남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고종의 개인적인 일을 담당하는 승녕부총관의 자리에 있었으나 고종을 지키려 들기는커녕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고종과 왕실을 압박해 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병합 후 막대한 은사금을 받았으나 관리를 잘 하지 못해 파산했다고 한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의 이관왕. 일찍이 해외로 여행을 다니고 돌아와 러시아 등과 대립하고 일본과 친해야 한다는 북방 남개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유배되었다. 청일전쟁 직전 의친왕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본격적인 친일파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당시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 작업을 지휘하는 등 사후 처리에 가담했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여기서 일본인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문제는 그가 이미 유부남이었다는 것. 훗날 상황이 호전되어 귀국했을 때 이 일본인 부인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기다리고 있던 전 부인은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빡쳤고 말썽이 벌어지자 고종이 중재에 나서 두 명 다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고 같이 살도록 조치했다.
3.1.5. 남작
안동 김씨로 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이 일어난 후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 다만 작위는 본인은 버렸지만[22] 공식적으로는 박탈되진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사망하고,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계속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의한은 6.25 전쟁 때 납북되고, 정정화는 1982년, 김의한은 1990년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김가진은 남작 작위를 받은 이력 때문에 독립운동가이지만 독립유공자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및 친일인명사전에는 항일 행적을 인정받아 빠졌다.- 김병익
의친왕의 장인으로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서예 실력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병합 직후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7년 고종 망명을 꾀하는 해외 독립 운동 조직과 연계하고 있던 것이 발각되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이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및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다. 한일 병합 이후 남작의 직위가 내려지자 큰 잔치를 열어 기쁨을 표시했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된 뒤, 일제가 남작의 작위를 수여, 회유하려 하자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젊어서 개화파 관료로 정계에 투신했으며 이 때 안중근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양반답지 않게 이재에 밝아 고리 대금업으로 재산을 불리고 있다가 친일로 전향한 후엔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처럼 재산 축적에 열을 올렸다.
개화파 김홍집의 조카이다.
척화파 원로 관료로 개화기 반일 활동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 중에서도 굉장히 명망 높은 사람이었던 걸로 보이며 이 명성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라 감사로 임명되어 농민들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그는 폐정 개혁안 12개조를 전면 수용하여 1차 농민 봉기를 종료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 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최익현을 옹호하고 일본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일본 헌병대에 구금될 정도로 반일 활동을 벌였으나 결국 친일로 돌아서 병합 이후 일본이 내려준 작위를 받았다.
춘생문 사건에도 가담했고 홍영식 이후 우정사업 확장에 기여하였고 이를 일제에 넘겨주는 걸 반대했으나, 경술국치 이후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여흥민씨 일원으로 황국 협회 창설에 관여하여 독립 협회 해산에 기여했다. 을사조약 당시 한규설과 함께 마지막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한 인물이었으나 한규설과는 달리 끝까지 반일을 고집하지 못하고 1908년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부총재로 취임하며 친일로 돌아섰다.
민영달
여흥민씨로. 을사조약 체결 당시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1910년 병합 당시 남작 작위를 받으며 슬그머니 친일로 돌아섰고 1911년 매일신보에 병합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며 빼도 박도 못하는 친일파가 되었다.
- 민형식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와 1905년 을사 조약 체결에 격렬하게 반발하여 상소를 올렸고 이 때문에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낙향했다. 그러나 훗날 일본에 협력하여 친일파로 돌아섰다.
- 박용대
1910년 한일합병이 된 뒤, 일제가 남작의 작위를 수여, 회유하려 하자 거부하였다.
윤용구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온건 개화파. 별기군의 총책임자였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임오군란 때 일본 대사관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의 표적이 되어 집이 파괴되기도 했다.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벌어지자 여기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1910년 작위를 받았으나 1년 만인 1911년 사망했다. 그의 온건 개화파로서의 생전 행적[25]과 작위만 받고 관직엔 나가지 않은 점, 작위를 받은 지 1년 만에 사망한 점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견이 있다. 일단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및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었다.
- 이건하
이근택과 이근상의 형으로 이씨 형제의 맏이. 이들 형제들은 5명 중 3명이 작위를 받고 그 아들 3명까지 작위를 세습해 모두 6명의 작위자를 배출한 뼈대있는(...) 친일 집안으로 세상에서 이들 5형제를 일컬어 오귀(五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 이봉의
- 이용원
동학 농민 운동 발생 초기 안핵사로서 봉기를 진정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내려갔으나 봉기를 진정시키기는커녕 강압적인 탄압을 일삼아 오히려 농민들의 기세를 천원돌파하게 만들어버려 파직되었다. 결국 이완용에게 붙어 친일파로 전향했다.
이완용의 배다른 형제. 원래 이완용의 아버지인 이호준은 이윤용 외엔 자식이 없었으나 이윤용이 서자였던 관계로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다. 이후 형제는 격동의 개화기를 미꾸라지처럼 이러저리 헤엄친 끝에 친일파로 성공을 거두었다.(...) 징글징글하게 오래 살며 동생인 이완용의 임종까지 지켜보고 1939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궁내부 대신으로서 고종을 협박하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메이지 덴노 생일에 일본 공사관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축배를 들고 '천왕 폐하 만세" 를 삼창하는 기행을 선보였고 이 소문을 들은 고종이 핀잔을 주자 하는 말이 "신은 만세(萬歲)라고 하지 않고 반자이(ばんざい)라고 했나이다"라는 병맛 넘치는 대답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재산 관리에 능했으나 그가 죽자 모자란 아들과 며느리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나 버린다.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이완용의 차남. 일찍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았으며 대한 제국 시절부터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한일 합방 이후엔 구왕실을 관리하는 이왕직으로 이동했으며 고종 실록 편찬부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27] 이런저런 본인의 공로와 아버지인 이완용의 공로까지 합쳐 1924년 따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가 나라 팔아먹고 번 재산을 바탕으로 젊었을 때부터 놀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자란 모양이다. 참고로 1913년 한국 최초의 인명 상해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초명은 장박으로, 젊은 시절부터 비상한 수재로 명성이 높았다. 관직에 들어서고 난 뒤엔 친일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는 등 주로 언론 쪽에서 일본의 후장을 열심히 빨았다. 이 공으로 작위를 받았는데 대개 이 시기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병합 이후 나이도 들고 쓸모도 없어져서 별다른 공식 활동을 하지 않는 데 반해 장석주는 3.1 운동 당시 조선 총독부에 시위의 무력 진압을 촉구하고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죽었다.
- 정한조
조경호
풍양 조씨 척족으로 권세를 누렸던 조영하의 아들. 아버지가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게 살해당한 후 한동안 개화파와 척을 지고 살았으나 진심으로 그런 것은 아닌 듯 이후 슬그머니 친일로 전향하여 군사 분야에서 친일 행위를 자행했다. 이근택처럼 조동윤도 부인이 두 명인데 첫 부인은 개화파의 거두였던 홍영식의 조카딸로 어린나이에 조혼하여 살다가 아버지가 개화파에 살해된 뒤 집안에서 내쫓아버렸다. 그 후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개화파가 복권되자 은글슬쩍 고종에게 부탁하여 옛 부인을 다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런 은혜(?)도 모르고 그는 윤덕영과 함께 고종의 장례식을 일본식으로 치르는 데 앞장섰다.
- 조동희
동학 농민 운동 때 초기 진압군의 일원으로 토벌군의 물자 공급을 맡았다. 친일파로써 조정의 청군 소환을 반대했고 갑신정변이 벌어졌을 때 가담하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도박에 빠졌다. 특이하게도 죽을 때 작위를 반납하여 그의 작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한규설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교관을 계속 역임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과 점차 친해졌다. 한일 병합 후 구왕실을 관리하는 관직에 올랐는데 거침없는 언행과 왕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사로 민중의 분노를 샀다. 특히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 옹주를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보내고 거기서 일본인과 결혼하게 하여 정신병을 앓게 한 일로 격렬한 증오를 샀는데 고종이 죽었을 때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홍순형
3.2. 습작자
습작자는 총 80명으로 확인되며, 이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은 자들이다. 작위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작하는 특별한 사례도 있으나 대부분은 가업(?)을 이어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 활동을 하였다.한편 습작자 중 3명은 독립운동 등으로 인하여 실작하였으며, 2명은 습작은 하였으나 1945. 8. 15. 기준 미성년자, 1명은 습작 당시 강제징병으로 인한 군복무 중이라는 사유가 있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1920년,
3.2.1. 공작
- 없음
3.2.2. 후작
- 박찬범: 박영효의 작위를 계승.
- 윤의섭: 윤택영의 작위를 계승. 맏형인 윤흥섭은 독립 운동에 투신했기에 차남인 그가 대신 작위를 계승했다.
- 이달용: 1922년 아버지인 이재완이 사망하자 이전의 남작 직위를 버리고 아버지의 후작 직위를 승계했다. 이때 무척 황송해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대로 병합 이후에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은 하지 않고 그저 이왕직의 관리로서 조선 왕족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가끔 일본 황실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정도의 활동만 하였다. 다만 이때 아버지인 이재완의 재산을 그대로 계승하여 부유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비판받는다. 아들은 셋이 있는데 첫째 아들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둘째 아들인 이철주와 셋째 아들인 이계주는 각각 연세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 이덕용: 이재각의 작위를 계승.
- 이완용: 1920년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했다. 그의 큰아들이 일찍 죽었기에 둘째 아들인 이항구의 아들 중 첫째인 이병길을 큰아들의 양자로 들여 작위를 계승했다. 이병길은 6.25 전쟁 중 실종되었다.
3.2.3. 백작
- 고희경: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이었던 고영희의 아들로 일찍부터 영어 등 외국어를 배워 외교 관련 직위에 종사했다. 부자가 2대에 걸쳐 중추원(조선 총독부의 고문 기관)에 소속되었다는 명성 아닌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16년 아버지의 자작 작위를 승계하여 열심히 노력(…)한 끝에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이후 그의 작위는 아들인 고흥겸과 손자인 고중덕[28]에게로 이어졌다.
- 송병준: 병합 당시 자작 작위를 받았던 송병준은 1920년 백작으로 승작된다. 그러나 그 직위를 오래 누리지 못하고 1925년 연회에 참석했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죽었다.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는듯. 그의 작위는 양아들인 송종헌에게 계승되었다.
- 이영주: 을사오적인 이지용의 작위를 계승.
3.2.4. 자작
- 김호규: 김성근의 작위를 계승.
- 민병삼: 민영규의 작위를 계승.
- 민충식: 민영소의 작위를 계승.
- 민형식: 민영휘의 작위를 계승. 앞에 서술한 남작 민형식과는 동명이인이다. 아버지인 민영휘와는 여러모로 성격이 달랐으며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고 의를 숭상했다고 한다. 글씨도 잘썼다고... 젊은 시절 나철, 오기호 등의 을사 오적 암살단에 거액의 자금을 댄 사실이 적발되어 유배되기도 하고. 신민회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1936년 아버지인 민영휘가 죽자 작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민영휘의 친자가 아닌 양자인데, 민영휘는 소실 소생의 서자들은 있었지만, 정실 소생의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양자를 입양했다.
- 민홍기: 민병석의 작위를 계승.
- 박부양: 박제순의 작위를 계승. 계승 당시 10대였기에 청년 자작으로 불렸다. 당시로선 드물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가 사고를 당해 기사가 나기도 했다. 훗날 반민 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 특위가 와해되면서 처벌을 면했다.
- 윤강로: 경술국적인 윤덕영의 작위를 계승. 윤덕영의 손자로 윤덕영의 아들이 일찍 사망하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였다. 반민 특위에 소환되었으나 1940년 작위를 계승했을 때 나이가 20대 초반에 불과했고 곧이어 반민 특위가 와해되었기에 불기소처분되었다. 이후 병원을 경영했다고 한다.
- 이규원: 이하영의 작위를 계승.
- 이창훈: 을사오적인 이근택의 작위를 계승. 아버지와 함께 떵떵거리며 살다가 광복 2년 뒤인 1947년 사망했다. 이창훈의 자손들은 작위를 계승받지 못했기에 반민 특위의 조사 결과 풀려났으며 이후 교육계에 활발히 진출했다. 특히 이창훈의 손자들이 공주 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들을 역임하며 영향력을 끼쳤다.
- 이택주: 왕족인 자작 이완용의 작위를 계승.
- 이충세: 이근명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종승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해국: 정미칠적인 이재곤의 작위를 계승.
- 이홍묵: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인 이병무의 작위를 계승.
- 임낙호: 정미칠적인 임선준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임선재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조대호: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인 조중응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조원흥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조중수: 경술국적인 조민희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조용호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3.2.5. 남작
- 김교신: 김춘희의 작위를 계승.
- 김덕한: 김학진의 작위를 계승.
- 김세현: 김종한의 작위를 계승.
- 김석기: 김사철의 작위를 계승.
- 김영수: 김영철의 작위를 계승.
- 김용국: 김영수의 작위를 계승.
- 김정록: 김교신의 작위를 계승. 김정록은 학자였는데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중이던 1932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작위가 계승되자 중국 유학생으로 감시받고 있던 자신의 처지 때문에 작위를 계승하고 매달 생활 보조비를 받으며 살았다. 훗날 1948년 반민특위가 결성되었을 때 자수하여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조사를 받은 뒤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는 작위를 계승한 후에도 자신이 작위를 가진 귀족임을 주변에 알리지 않아 아무도 그가 귀족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시인 김지하, 미술사학자 유홍준 등을 가르쳤다.
- 남장희: 남정철의 작위를 계승.
- 민건식: 고영희 고희경 부자처럼 아버지인 민영기와 함께 2대에 걸쳐 중추원에 소속된 친일 집안. 1927년 아버지인 민영기의 죽음으로 작위를 계승했다.
- 민영욱: 민상호의 작위를 계승.
- 민철훈: 민종묵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민규현, 증손자인 민태곤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민태곤: 민규현의 작위를 계승. 위의 민철훈의 증손자인데, 조선 귀족 신분으로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조선 귀족으로서는 유일하게 독립 유공자로 서훈되었다[29]. 사후 민태곤의 작위는 일본군에 징집되어있던 남동생 민태윤에게 강제로 세습되었다.
- 민태윤: 민태곤의 작위를 계승: 민태곤의 남동생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상황에서 영문을 모른 채 억지로 습작했다고 하며, 이 상태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측에 형 민태곤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였고, 그의 증언과 일본의 역사학자인 미즈노 나오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2009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민태곤에게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박경원: 박용대의 작위를 계승.
- 박서양: 박제빈의 작위를 계승. 독립 운동가 박서양과는 동명이인이다. 아들이 없어 박승방을 양자로 들였는데, 박승방은 작위 계승을 거부하고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기에 작위가 소멸되었다.
- 박승원: 박기양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박정서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성주경: 성기운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성일용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규환: 이주영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경우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기원: 이봉의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강식, 증손자인 이홍재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능세: 이정로의 작위를 계승.
- 이동훈: 이근호의 작위를 계승.
- 이범팔: 이건하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완종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병옥: 이윤용의 작위를 계승.
- 이원호: 이용원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이창수까지 작위가 계승된다.
- 이인용: 아버지인 이재극의 작위를 계승했다. 작위뿐 아니라 재산도 상당한 규모로 물려받았으나 방탕한 생활 끝에 탕진하고 부인과 재산 문제로 소송에 휘말려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찍은 뒤에 가까스로 승소했으나 이미 재산의 대부분은 중재역을 자처했던 박영효가 홀랑 까먹은 뒤였다.
- 이장훈: 이근상의 작위를 계승.
- 이중환: 이용태의 작위를 계승.
- 이풍한: 이종건의 작위를 계승.
- 장인원: 장석주의 작위를 계승.
- 정주영: 정낙용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정두화까지 작위가 계승되었다.
- 정천모: 정한조의 작위를 계승.
- 조중구: 조동윤의 작위를 계승.
- 조중헌: 1921년 조동희가 박탈당한 작위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 최정원: 최석민의 작위를 계승.
- 한상기: 한창수의 작위를 계승. 이후 손자인 한상억까지 작위가 계승되었다.
4. 기타
- <진상(眞相)> 1960년 3월호에 '일제한인귀족의 근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귀족들의 후손들이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가 언급되어 있다. #
-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귀족의 책무를 강조하는 사설을 자주 올려 조선귀족이 조선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식민통치에 도움이 돼줄 것을 원했지만 정작 대부분의 조선귀족은 이러한 일제의 기대와는 달리 도박, 축첩, 축재, 사치, 마약에 몰두해 도덕적으로 지탄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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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 }}}}}}}}} |
[1] 식민통치 초기의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재정이 상당히 궁핍했다. 참고로 이런 국공채 지급은 이미 자국의 폐번치현 때부터 쓰던 수법이다.[2] 왜 전액이 아니고 일부냐면 윤택영 자신이 여러 곳에 빚을 지다보니 미처 갚지 않은 채권자가 있었기 때문이다.[3] 독립 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년 ~ 1927년)는 김윤식의 자작 작위 박탈을 두고 "왜 그럼 (합방 당시에는) 자작 자리를 좋아라 받아들였냐"며 깠었다.[4] 조선 귀족의 후작 작위도 이완용과 그 후손을 제외하면 조선 왕실 방계나 친인척에 한정되었다.[5] 원래는 일제도 "그래도 귀족인데" 라며 도와줬지만 이후에도 계속되자 작위를 박탈했다.[6] 이 도망치고 객사한 과정이 참 웃긴데 도망칠 때는 채무자들에게 자신이 갚을 돈이 있는듯이 보이게 해서 도망쳤는데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아무리 그래도 사위이자 임금인 장례식에는 참석해야지" 라며 다시 돌아왔는데 채무자들은 이때를 노려 물어뜯었다. 결국 윤택영은 이로 인해서 다시 도망쳐야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이 사람은 사실 이전부터 신용불량자로 자기 딸이 혼례를 치를때 필요한 돈조차 빌려놓고 갚지 않은 인간이었고 빚을 갚기 위해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가리지 않고 손을 벌렸다.[7] 이사람도 아버지 채무를 갚아 보겠다고 미두 투기에 손댔다가 망하기도 했으며 미국 유학 중에 황후 윤씨에게 학비 달라고 징징댄 경력이 있다.[8] 실제 피를 이은 후손은 아니다. 이재각의 아버지 완평군이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하여 계보 상 후손이 되었다.[A] 실제로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10대손.[10] 친아들은 아니고 양자이다.[A] [12] 실제 피를 이은 후손은 아니고 입양 관계로 족보상 후손이 되었다.[13]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 조선의 왕족, 황제의 국구 윤택영 등[14] 청일전쟁 시기까지 평안감사였다.[15] 1944년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가 민영휘의 처 안유풍의 이름을 따서 풍문여학교로 설립[16] 1905년도 일본의 독도 무단 점거 사건 당시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처히 조사 후 보고하라"는 지령을 내렸다.[17] 사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직후 부산에서 일본인과 조선 최초의 합작 회사를 차리기도 했으나 분노한 군중들에게 가게가 개박살나 실패로 끝났다.[18] 다만 고종 본인이 가지는 않고 아들인 순종을 대신 보냈다.[19]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라고 발언했다고 전해진다.[20] 또 다른 후손인 먼 친척 이회영은 가산을 다 처분해 온가족과 함께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참고로 이하영은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의 9대손이고,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이항복의 차남 이정남의 9대손이다.[21] 이 사람의 손자가 그 유명한 이종찬 장군이다.[22]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버린 것도 아니다.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게 침투 등에 용이하여 대일 공작활동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의친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시키려고 계획했던 것도 그가 작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밀리에 추진할 수 있었다.[23] 반민 특위의 소환 대상자 명단에서 김병익과 관련된 인물이 빠져 있다.[24] 증편 작업 자체는 1903년부터 시작되었다.[25] 일부 친일 행위로 보이는 일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급진 개화파는 물론 친일 세력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갑신정변 때도 소수의 급진적인 행동은 실패할 거라며 참여하지 않았다.[26] 그래도 고종에게 말해 노병대에게 밀지를 내리게 하는 등 간접적인 지원은 했다.[27]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것으로 일제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탓에 고종실록은 그다지 역사적 가치를 높게 쳐주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 철종실록까지다.[28] 1923년생으로 태평양 전쟁 때, 학병에 지원한 조선귀족 출신이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조선귀족&친일반민족행위자 중 마지막 생존자이다.[29] 또다른 조선 귀족인 김가진에 대해서도, 몰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고종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한 점과 이 공작이 실패한 후에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일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의 서훈이 고려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서훈이 되지는 않고 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