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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일본 제국 제122대 천황 메이지 천황 明治天皇 | |||
출생 | 1852년 11월 3일 | ||
야마시로국 교토 나카야마 타다야스 사저 (現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교엔) | |||
즉위식 | 1868년 10월 12일 | ||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교엔) | |||
사망 | 1912년 7월 30일 (향년 59세) | ||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메이지 궁전 (現 도쿄도 치요다구 황거) | |||
능묘 | 후시미모모야마능([ruby(伏見桃山陵, ruby=복견도산릉)])[1] | ||
재위기간 | 제122대 천황 | ||
1867년 2월 13일 ~ 1912년 7월 3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휘 | 무쓰히토([ruby(睦仁, ruby=목인)])[2] | |
부모 | 부황 고메이 천황 모친 나카야마 요시코 | ||
형제자매 | 2남 4녀 중 차남 | ||
배우자 | 정실 쇼켄 황후 후궁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노 사치코 | ||
자녀 | 5남 10녀 | ||
종교 | 신토 | ||
신체 | 162cm[3] | ||
어칭호 | 사치노미야([ruby(祐宮, ruby=우궁)]) | ||
시호 | 메이지 천황([ruby(明治天皇, ruby=명치천황)]) | ||
연호 | 게이오([ruby(慶應, ruby=경응)], 1867년 ~ 1868년)[4] 메이지([ruby(明治, ruby=명치)], 1868년 ~ 1912년)[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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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122대 천황.휘는 무쓰히토(睦仁, 목인)였다. '메이지'(明治, 명치)라는 제호는 그가 천황으로 재위했을 때 사용한 연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재위 기간 동안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며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팽창 위협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그들과 대등한 열강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덕분에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군(明君)으로 꼽힌다.[6] 일본에서는 메이지 대제(大帝), 무쓰히토 대제, 메이지 성제(聖帝)라고도 부른다.
2. 생애
어강탄 (御降誕) |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교토 어소의 산실(御産室).
2.1. 출생과 어린 시절
입친왕선하 (立親王宣下) |
무쓰히토의 어린 시절의 어칭호는 '사치노미야'(祐宮)였다. 1852년 11월 3일, 고메이 덴노와 나카야마 요시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메이 덴노의 차남이었다. 외조부인 나카야마 타다야쓰의 저택에서 태어났고 탄생 후 4년 동안 외가에서 자랐다. 고메이 덴노는 2남 4녀를 두었으나 이 중 무쓰히토를 제외한 자식들은 모두 유아기 때 요절해 죽었고, 덕분에 측실 소생이면서 차남이었던 무쓰히토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고메이 천황의 정실인 에이쇼 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해 무쓰히토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1860년에 저군(황태자)에 책봉되고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아 '무쓰히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867년 아버지 고메이 덴노가 급사하자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2.2. 재위기간
메이지 천황의 즉위식 |
2.2.1. 막부 말기
<왕정복고의 대호령> (王政復古) |
무쓰히토가 즉위하기 이전 일본 열도는 대단히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 사건) 이후 반강제로 쇄국정책이 폐지되고,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양 제국주의 국가와의 불평등조약이 체결되었으며, 황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겹쳐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서양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이에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양이운동이 일어나고 존황양이[7]를 내세운 조슈 번과 공무합체[8]를 내새운 사쓰마 번 등이 에도 막부와 대립하면서, 도막파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쓰에이 전쟁을 겪은 사쓰마 번은 <양이론>이 비현실적임을 인지하고, 영국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참패한 조슈 번 역시 막부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시모노세키 항을 개항하는 등 서양을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격변속에 1867년, 무쓰히토가 일본의 제122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당시 사쓰마 번은 조슈 번과 힘을 합쳐 도쿠가와 막부를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토막[9])이었으나 토사 번의 고토 쇼지로가 사카모토 료마로부터 <대정봉환론>을 듣고 이를 채용할 것을 토사 번 간부들에게 제안했다. 여기에 사쓰마 번의 코마츠 타테와키가 동의하여 두 번 사이에 삿토맹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토사 번은 대정봉환에 대한 의견을 막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알렸다. 결국 1867년 11월 9일, 에도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10]을 통해 '대정'(大政)을 조정에 반납하고 천황이 이를 칙허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권을 반납했지만 교토 조정에서는 여전히 대부분의 정무 처리(정사에 관한 모든 전권)를 요시노부에게 위임했고, 그는 의회에 구 막부 세력을 심어놓으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 번은 오와리 번, 토사 번, 후쿠이 번, 히로시마 번을 동원해 교토 황궁을 포위하고, 메이지 천황으로 하여금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내리게 하면서 신정부의 수립을 선언했다.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천황은 <왕정복고의 대호령>[11]을 발표했다. 동시에 요시노부에 대해 관직의 박탈과 함께 영지를 반납하라는 선언이 내려졌다. 결국 구 막부 세력은 보신전쟁을 일으켜 저항했으나 신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2.2.2. 메이지 시대
1872년, 20세때의 메이지 천황. 소쿠타이와 류에이노칸으로 이루어진 귀족 소복의 정장 차림이다. | 1873년, 궁정 개혁 후의 사진. 이각모(Bicorne)와 서양식 제복(대원수 군복)을 착용 중이다. 우치다 쿠이치(内田九一)가 촬영한 사진이다. |
1896년 메이지 천황이 도쿠가와 가문의 저택을 방문하여 산책할 때 몰래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 1872년 4월 연미복 차림의 메이지 천황. 우치다 쿠이치가 촬영한 사진이다. |
어진영(초상화) |
1868년 3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오개조의 어서문>(五箇条の御誓文)을 발표했고, 음력 9월 8일 연호를 '게이오'(慶応, 경응)에서 메이지(明治, 명치)로 개원했다. 10월 13일엔 에도(江戸)에 행차한 후 칙서를 내려 명칭을 도쿄(東京, 동경)로 바꾸었고, 에도성도 도쿄성(東京城, 동경성)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9년에 메이지 정부도 고도(古都) 교토를 떠나 신수도인 도쿄에 자리를 잡았고, 구 막부의 거점이었던 도쿄성이 황실의 새 궁전인 황거가 되었다.[12]
또한 그해에 오섭가[13] 중 하나인 이치조 가문의 딸 이치조 마사코를 황후로 책봉했다. 이때 마사코는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또한 하루코 황후는 1849년생으로 1852년생인 메이지 천황보다 3살 위였는데, 당시 일본의 풍속에서 3살 연상은 좋지 않다고 하여 하루코 황후의 생년이 1850년으로 고쳐졌다.
1870년 신토가 국교로 지정되었고, 1871년에는 지방 행정 개혁인 폐번치현(廢藩置縣)이 실시되어 기존에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이 천황 직할로 바뀌며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뒤이어 1872년에는 서구식 학제가 공표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민권운동이 일어나면서 서남 웅번인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이 정권을 휘두른다는 비판이 거세졌고, 헌정과 의회 개설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신정부의 내분으로 이어졌다. 이에 1875년 4월 메이지 천황의 조칙을 통해 입헌정치체제를 점차 도입할 것이 발표되었다. 1881년에는 <국회 개설 칙유>가 내려지고 《화족령》, 즉 귀족제도의 도입과 시·정·촌제 마련 등이 추진되었다.
1885년 의원내각제가 도입되어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1888년부터 추밀원의 의장으로서 헌법 초안을 마련했고, 1889년 2월 11일, 공식적으로 메이지 천황이 《대일본제국 헌법》[14] 조칙을 발표했다. 1890년엔 《교육칙어》를 발표[15]하고 동시에 중의원과 귀족원을 개설했다.
개선 열병식의 메이지 천황 | 개선 관함식의 메이지 천황 |
1894년 청일전쟁[16]이 발발하자 청나라에 대한 선전조칙을 내렸다. 전쟁을 하고 난 뒤 청나라에게 타이완을 임시로 할양받았고,[17] 1902년에는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그 후 1904년에 러일전쟁[18]이 발발했으며, 당시 러시아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 덕분에 대한제국(조선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영향력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고, 전쟁 보상으로 남사할린(가라후토)을 얻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가 발생했고, 배상금도 받지 못해 국내에서 불만이 폭발했다. 어찌 됐건 이후 일본은 세계 열강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1911년 과거 구미와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함으로써(조약 개정, 条約 改正) 메이지 천황 개인에 대한 신격화가 더욱 더 공고해졌다.
2.3. 붕어(崩御)
1909년 11월에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며 보고를 받는 중인 메이지 천황 | Isabel Weld Perkins가 1914년 그린 초상화 |
위 이미지는 메이지 천황을 직접 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가 다카키 하이스이가 그린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를 흑백 버전으로 가공한 것이다.## 즉, 다른 초상화들처럼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 초상화의 흑백 버전은 몇 개 더 있지만, 음영이 있는 건 이게 유일하다고 한다. |
기록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 소싯적엔 고기를 아예 거부할 정도의 채식주의자였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채식보다는 육식을 즐겼고[19], 거기에 빵과 커피, 와인을 곁들이는 서양식 생활을 주로 했다고 한다.[20] 여기에 술과 달콤한 화과자와 양과자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매일 빠짐없이 먹기까지 했는데 운동은 승마를 제외하면 거의 하지 않아서 말년으로 갈수록 비만이 심해지고 그로 인해 당뇨까지 앓게 되었다.
여기에 위장염과 신장염까지 겹쳐 고생하던 중 1912년 7월 29일 22시 43분, 당뇨가 악화된 요독증 때문에 만 5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기존의 일본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던 메이지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21] 다만 일본 정부가 메이지 천황의 붕어 일시를 7월 30일 0시 43분이라고 늦춰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메이지 시대가 하루 더 이어졌다. 당시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태자가 선황 붕어 당일 즉위해야 했으나 사망시간이 너무 늦어 도저히 당일 즉위가 불가능했던 까닭에 이튿날 0시를 넘겨 붕어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즉위할 시간을 번 것이다.
메이지 천황의 대상례(大喪礼) |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에서 대상례가 거행되었고, 시신은 구도인 교토로 운구되어 후시미모모야마능에 매장되었다.
3. 천황으로서의 역할
성덕기념회화관 聖徳記念絵画館 (도쿄도 신주쿠구 카스미가오카마치 1-1) |
위에서 언급된 사건들로 인해서 일본은 명목상 천황 중심의 국가로 변모했으나 오랫동안 천황에게 실권이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백성들은 천황이 주권자라는 인식이 없었다.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 통합, 그리고 이를 통해 국민들이 신체제에 순응하길 원했다. 그래서 메이지 신정부는 법적으로 천황의 절대적인 권위와 신성함을 인정하고 1870년, 신도의 국교화와 제정일치 선언과 함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천조대신)의 직계자손인 천황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22] 1871년에는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방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했고, 1882년부턴 일본의 모든 군대가 천황의 군대로 규정되었다.
인나이 은광(院内銀山) 방문[23] |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메이지 천황은 전국 순행을 자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방 순행을 자주 하면서 국민 통합 차원에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고, 지방의 유력자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국민 사이에서 권위를 갖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덕치의 개념을 이용해 순행 중 재해를 입었거나 빈곤한 사람들을 볼 경우, 금전을 하사하거나 노인과 효자를 표창하여 국민들이 신체제에 순응하게끔 했으며, 서양식 군복에 칼을 차고 수염을 기른[24] 천황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전국에 유포시켰다. 아무튼 이 덕분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천황이 일본의 주권자이자 신성불가침한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천황 중심으로 국민 통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정치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았으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책에 따르면, 오쿠보 도시미치 내무경 사후에 일본 지도부 사이에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는 데 메이지 천황이 개입했다고 하며, <정한론>이 대두될 때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파견을 중지시키는 과정에도 개입했다.[25] 또 1893년 제국의회에서 예산안을 둘러싸고 불화가 생기자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메이지 천황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천황은 궁정 예산의 일부를 내놓으며 관리의 봉급 일부를 납부해 예산을 보충하도록 조치시켰다. 이 외에도 제국의회 초기에 대립이 생길 때 종종 조칙을 내려 중재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26]
《대일본제국 헌법》 제1장 제1조에 의하면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고 규정되어 있으나 메이지 천황은 정작 정치에 크게 개입하진 않았다. 사실 메이지 시대의 총리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고 했고, 천황 본인도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지 신하들이 알아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묵인했기 때문에, 일본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능력있는 신하들은 메이지 천황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일본은 신속한 개혁을 거쳐 근대국민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정치에 개입하지 않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된 셈이다. 메이지 천황 부처의 그림 |
메이지 천황의 정실인 쇼켄 황후(하루코). 일본 황실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은 황후이다. 복장뿐 아니라 역할면에서도, 이전까지의 황후들과 달리 서구적&근대적 황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사진속의 책은, 쇼켄 황후의 서양식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여성의 부덕(婦德)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4. 성격과 특징
- 일본 문화를 기초로 한 서양 문물과의 조화를 중시했다.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나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高行)의 영향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적절한 설득으로 입헌군주제 등에 반대하진 않게 되었고, 1886년부터는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허락했다. 그의 이런 성향은 《군인칙유》(軍人勅諭)(1881),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같은 봉건적인 요소가 가득한 표어들을 만드는 데 영향을 크게 미쳤다. 본질적으로는 일본 개방의 중심이었던 사쓰마, 조슈 무사단의 성향 자체가 보수 개혁파였기 때문이다. 아들인 다이쇼 천황은 서양 문물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는 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 학습에는 열중했는데, 메이지 천황은 이런 아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이 상당했다.[27] 그래서인지 자기 자식들조차 잘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자녀들의 혼인날 처음 만났다는 농담 같은 야사도 있다. 손자들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는데 그들이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면 군복 차림으로 앉아 고개를 끄덕인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식들도 아버지와의 정이 없었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 승마[28]와 와카를 좋아했고, 100,000여 수의 시가를 남겼다. 또 도검 애호가로 여러 명검을 수집했으며, 그중 일부는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실제로 야마다 아사에몬이 바친 일본도인 코류 카게미츠를 패용했다고 한다. 난보쿠초 시대 남조 요시노 조정(다이카쿠지통)의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검으로 전해지는 물건이었는데, 마사시게가 일본 제국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널리 활용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인 상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생전에 여자와 유흥을 매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또한 식욕이 대단하여 대식가인터라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비대해졌고 결국 당뇨병에 걸리게 되었다.
- 아들인 다이쇼 천황이 어렸을 때, 그의 건강 상태나 수업 진도를 확인하는 등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본인이 가지고 있던 대인기피증 탓에 거의 만나지도 않았고, 종종 만날 때도 대화를 자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대화 나눌때도 말버릇이 경솔하다거나 성적이 안 좋다며 질책이나 하다보니 다이쇼 천황도 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을 불편하게 여겼고, 아버지와의 정이 없었다.[30]
- 노기 마레스케,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소박한 성격의 무인들을 좋아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야마가타를 꾸짖을때면 매우 강하게 질책하여 야마가타는 식은 땀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 메이지 천황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메이지 천황기》가 있다. 쉽게 말하면 그의 실록인 셈인데, 1914년에 처음 편찬할 때는 우리가 아는 실록대로 그 시대의 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천황의 언행 등을 기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부총재였던 가네코가 이에 반대하여 1920년, 다이쇼 천황의 재가를 받아 메이지 시대의 국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후 1930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3년 뒤인 1933년에 <본기> 250권, <화권> 1권으로 완성되어 쇼와 천황에게 봉헌되었다.
5. 가족 관계
가운데 남자가 메이지 천황,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 오른쪽 남자는 아들 요시히토 황태자, 왼쪽의 서있는 여자는 며느리 사다코 황태자비, 나머지 4명의 작은 여자아이들은 황녀들이다. |
정실인 쇼켄 황후는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여러 측실들을 거느려 자녀를 많이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1~2살 안팎의 아주 어린 나이에 주로 뇌막염으로 죽었다. 결국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는데, 측실인 야나기하라 나루코와 소노 사치코가 낳은 자녀만이 살아남았다.
- 황후皇后: 쇼켄 황후(光明 皇后, 1849년 5월 9일~1914년 4월 19일)
(자녀 없음) - 전시典侍: 하무로 미츠코(葉室 光子, 1853년 2월 3일~1873년 9월 22일)
- 1남: 와카미즈 테루히코노 미코토(稚瑞照彦尊)(사산, 1873년) - 사산된지 4일뒤 생모도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
- 전시典侍: 하시모토 나츠코(橋本 夏子, 1856년 3월 19일~1873년 11월 14일)
- 1녀: 와카타카요리 히메노 미코토(稚高依姫尊)(사산, 1873년) - 사산된지 1일뒤 생모도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
- 전시典侍: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 愛子, 1859년 6월 26일~1943년 10월 16일)
- 2녀: 우메노미야 시케코(梅宮 薫子) 내친왕(1875년 1월 21일~1876년 6월 8일) - 뇌질로 요절.
- 2남: 타케노미야 유키히토(建宮 敬仁) 친왕(1877년 9월 23일~1878년 7월 26일) - 이복형이 사산되어 어칭호와 이름으로 보다시피 황태자가 되어야 했지만 수두증으로 요절. 동복 동생인 하루노미야 요시히토(明宮 嘉仁) 친왕이 다이쇼 천황이 되었다.
- 3남: 하루노미야 요시히토(明宮 嘉仁) 친왕(1879년 8월 31일~1926년 12월 25일) - 훗날의 다이쇼 천황. 구조 사다코와 결혼하여 쇼와 천황 등 4남을 낳았다.
- 전시典侍: 치구사 코토코(千種 任子, 1855년 7월 19일~1944년 2월 1일)
- 3녀: 시게노미야 아키코(滋宮 韶子) 내친왕(1881년 8월 3일~1883년 9월 6일) - 뇌막염으로 요절.
- 4녀: 마스노미야 후미코(増宮 章子) 내친왕 (1883년 1월 16일~1883년 9월 8일) - 뇌막염으로 요절.
- 전시典侍: 소노 사치코(園 祥子, 1867년 12월 23일~1947년 7월 7일)
- 5녀: 히사노미야 시즈코(久宮 靜子) 내친왕(1886년 2월 10일~1887년 4월 4일) - 뇌막염으로 요절.
- 4남: 아키노미야 미치히토(昭宮 猷仁) 친왕(1887년 8월 22일~1888년 11월 12일) - 뇌막염으로 요절.
-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 昌子) 내친왕(1888년 9월 30일~1940년 3월 8일) -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 恒久)[31] 왕에게 시집가 1남[32] 1녀를 낳았다.
-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 房子) 내친왕(1890년 1월 28일~1974년 8월 11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 成久) 왕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다. 1947년 구황족의 황적이탈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후사코의 차녀인 사와코(佐和子) 여왕은 이우 왕자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에 밀려 탈락했고, 후사코의 손녀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태어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33]한 후 규슈의 명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 8녀: 후미노미야 노부코(富美宮 允子) 내친왕(1891년 8월 7일~1933년 11월 3일)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낳았다.
- 5남: 미츠노미야 테루히토(滿宮 輝仁) 친왕(1893년 11월 30일~1894년 8월 17일) - 뇌막염으로 요절.
- 9녀: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 聰子) 내친왕(1896년 5월 11일~1978년 3월 5일)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에게 시집가 4남을 낳았다. 장남인 모리히로(盛厚) 왕은 쇼와 천황의 장녀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했다. 1947년 구황족의 황적이탈 때 평민으로 전락했다.
- 10녀: 사다노미야 타키코(貞宮 多喜子) 내친왕(1897년 9월 24일~1899년 1월 11일) - 뇌막염으로 요절.
==# 천황 계보 #==
초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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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체에서
1957년작 메이지 천황과 일러대전쟁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대배우 아라시 간주로가[34] 연기한 메이지 천황은 매우 근엄하며 끊임없이 국가와 신민들을 걱정하는 모습이다. 천황의 모습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기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제작사인 신토호는 신생영화사여서 상영관의 수가 적었음에도 대히트를 쳐 극장마다 복도, 로비, 바닥에까지 관객들이 들어 차서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이렇게 동원한 관객수가 무려 2000만명이었다.[35]중국 영화인 1894 갑오대해전이라는 영화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성군이자, 정복왕으로 나온다. 영화 내내 무능한 모습만 보여주는 서태후와 광서제에 비해 확실한 비전을 보여주며, 황실의 재산을 털면서까지 조국의 발전에 힘쓰는 걸 보면 이게 중국에서 제작된 영화가 맞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
라스트 사무라이에선 일본의 전통과 개화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 천황으로 묘사했다. 담당 배우가 가부키 명문가의 나카무라 시치노스케라 일본 내에선 꽤 화제가 된 건 덤이다.
1965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최남현이 연기했다.
Victoria 3에서 역사적 인물로 등장한다. 세력권 DLC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7. 여담
7.1. 동시대의 군주들
같은 섬나라인 데다가 치세가 겹치고, 본격적인 식민주의 시대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대영제국의 황제였던 빅토리아 여왕과 많이 비교된다.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독일 제국 황제였던 빌헬름 1세와도 비슷한 게 많은데 둘 다 근대 통일 제국의 첫 번째 군주이고, 통일 및 근대화의 상징적인 군주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한 통일 및 근대화의 주역은 초대 총리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이토 히로부미인 것도 같으며, 말로는 입헌군주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황제/천황의 권력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과 1852년생으로 동갑이고, 똑같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생일은 고종이 양력 9월 8일(음력 7월 25일), 메이지 천황이 11월 3일로 메이지 천황이 2개월 가량 늦다. [36] 왕실에 서양 음식을 도입해 즐겨먹기 시작한 시기도 비슷해서, 고종은 커피와 각종 서양 디저트를 즐겼고 메이지 천황도 일본에서 1200년간 이어진 육식금지령을 깨고 서양식 고기 요리를 즐겼다.
다만 메이지 천황이 고종보다 7년 일찍 붕어했다. 반면 재위기간은 고종이 1864년~1907년으로 43년인데 비해, 메이지 천황은 1867~1912년의 45년으로 조금 더 길다. 고종은 이후 3년을 대한제국의 태상황으로, 9년을 이태왕으로 재위했다.
7.2. 그 외
이 문단은
자세한 내용은 명예 아리아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은 러일전쟁의 육전에서 많은 전사자를 낸것에[37] 책임을 지고 종전 직후 할복하려다가 메이지 천황이 "나 죽기 전에는 절대로 못 해"라고 말하자 메이지 천황의 붕어때까지 기다려 장례 절차가 다 끝난 날 밤, 부부가 동반자살했다.
- 메이지 천황은 조선 왕조 말기때의 군주인 고종(1863~1907)과 순종(1907~1910)의 치세 때 재위했는데, 이 당시 일본 제국은 이후의 한국사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메이지 유신 이후 역대 천황의 계보를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폐위되었던 천황들을 사후 복위 시켰다.[38] 기존에 15대 천황으로 공인되었던 진구 황후를 역대 천황 대수에서 제외 시키고, 1870년 8월 20일 폐위 되어 역대 계보에서 제외 되었던 오토모 황자, 아와지 폐제, 구조 폐제를 각각 39대 '고분 천황', 47대 '준닌 천황', 85대 '주쿄 천황'으로 시호를 추상하고 복위시켜 역대 계보에 정식으로 포함 시켰다. 이후 1884년에 고카쿠 천황의 부친이자 본인의 4대조 할아버지인 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을 '교코 천황'로 추존 하였고, 1911년에는 북조 천황들인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고코곤 천황, 고엔유 천황을 역대 계보에서 제외 시키고 남조 천황들인 고무라카미 천황, 조케이 천황, 고카메야마 천황을 역대 계보에 정식으로 포함 시켰다.伊藤、俺も今日でやっと今までの罪ほろぼしができたよ。慶喜の天下を取ってしまったが、今日は酒盛りをしたら、もうお互いに浮き世のことで仕方がないと言って帰った― 메이지 덴노 #
-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해서는 꽤나 온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황과 조정을 늘 존중해왔던 요시노부를 몰락하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있었던 듯. 그래서인지 말년의 요시노부에게 공작위를 수여하고 은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등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1]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소재[2] 안창호의 유언에 나오는 '목인'(睦仁)이 메이지 천황이다.[3] 지금 보면 작은 키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평균보다 큰 키였다.[4] 선황인 고메이 천황의 연호 습용[5] 이때부터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어 한 군주가 재위 중일 때는 한 연호만 사용하게 되었다.[6] 사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개혁을 주도했던 것은 아니고, 개혁을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들은 이토 히로부미 등 하급 무사 출신의 신정부 정치인들이었다. 그래도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임을 감안하면 역할 수행은 잘한 편이다. 역사상으로 잘 나가는 개혁을 무능한 군주의 방해로 망친 사례가 제법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만 하다.[7] 尊皇攘夷.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8] 조정(공가)과 막부(무가)로 대표되는 무가의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체하자.[9] 討幕. 도막은 반막부를 뜻하는 포괄적인 뜻이고, 토막은 무력으로 막부를 전복시키자는 용어이다.[10] 사쓰마 번은 막부에서 이를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고,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 했으며, 쇼군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여 토막의 명분을 없애려고 했다.[11] 주요 내용은 막부,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천황 휘하에 총재, 의정, 참여의 3직을 설치하는 것이었다.[12] 다만 1869년부터는 메이지 천황 본인이 뭔가를 주도한다기보다는 민부경/내무경이 실권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시절 대표 실권자가 오쿠보 도시미치.[13] 헤이안 시대의 외척이자 최대의 명문가였던 후지와라씨의 후예였다.[14] 공식 명칭은 《대일본제국 헌법》(大日本帝国憲法)[15]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 등 골수 천황주의 군인과 신료들의 영향을 받아 '교육에 대한 훈시'를 한 《교육칙어》(敎育勅御)라는 글을 썼다. 군국주의 시대를 산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것을 암송하고, 글자까지 모두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사무치게(지독하게) 배웠다고 한다.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16] 일본어로는 '일청전쟁', '일중전쟁' 또는 '동중국해 해전'[17] 나중에 1937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승리한 중국에게 1945년 타이완을 다시 되돌려줘야 했다.[18] 일본어로는 '일러전쟁', '일로전쟁' 또는 '일본해 해전'[19] 말년의 메이지 천황이 먹은 채소는 아스파라거스밖에 없었다.[20] 다만 저녁에는 일본식으로 초밥과 생선구이를 곁들여서 먹었다.[21] 생활습관의 문제도 있었겠으나 이후 천황가(家) 4대의 사인 및 지병을 살펴보면 가족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다이쇼 천황도 요독증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붕어했으며, 손자인 쇼와 천황도 붕어 이전 신장 질환을 앓다가 십이지장 염증으로 하혈, 끝내 장폐색과 간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붕어했으며, 증손자였던 아키히토는 심장마비로 죽은 조부 다이쇼 천황의 영향인지 협심증으로 두 차례의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22] 천황의 신격화는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 제1장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해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을 통해, 천황은 신성불가침하며 법 위에 있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을 천황대권(天皇大權)이라고도 한다.[23] 메이지 천황 우측 뒷쪽에 얼굴이 또렷이 확인되는 인물은 오쿠마 시게노부이다.[24] 실제로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자신의 콤플렉스인 주걱턱을 가리기 위한 것이 컸다. 비슷하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도 주걱턱을 가리려고 수염을 길렀다.[25] 결국 사이고는 서남전쟁을 일으켰고, 그걸 진압한 건 메이지 천황이 아니라 오쿠보 중심의 주류 개혁파였다.[26] 이후 다이쇼 천황 또한 이런 중재자로의 역할을 요청받았으나 정치에 염증을 느낀 다이쇼 천황은 무시해버렸다.[27] 이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메이지 천황은 주걱턱을 갖고 있었고 그 턱에 천연두 자국까지 있어서 본인의 외모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다보니 미화된 초상화를 더 좋아하여 사진도 미화된 초상화를 찍어서 배포할 정도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28] 처음 말을 탔을 때는 벌벌 떨면서 무서워했다고 한다.[29] 반면에 그의 아들인 다이쇼 천황과 장손인 쇼와 천황은 황후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다이쇼 천황의 아내인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아들을 4명이나 낳아 후사 문제가 없었으나, 쇼와 천황의 아내였던 고준 황후(나가코)는 결혼 후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았다. 그래서 데이메이 황후는 며느리가 딸만 낳는 못난 여자라고 매서운 시집살이를 시켰으며 주위에서도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권유하여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추천하기까지 했으나, 쇼와 천황은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고준 황후가 어렵게 두 아들을 낳고서야 후궁 이야기는 수그러들었다. 훗날 고준 황후는 본인이 시집살이당했던 것 이상으로 재벌 가문 출신의 며느리였던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치코 황후는 나루히토와 후미히토를 먼저 낳은 덕에 아들 문제로 혼날 일은 없었다.[30]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다이쇼 천황은 결혼했을 때 자녀들과 자주 놀아주며 애정을 많이 주는 좋은 아버지가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과의 관계가 좋았다.[31] 츠네히사 왕의 여동생 호시나 다케코(保科 武子)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이며, 쇼다 미치코가 하츠코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후로는 나가코 황후의 시녀장(侍女長)을 지내며 미치코 황태자비 시집살이 시키기에 한 몫을 했다.[32] 아들인 다케다 츠네요시는 731 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했던 전범이다. 그리고 츠네요시의 손자는 극우, 혐한 논객으로 유명한 다케다 츠네야스이다.[33] 이무렵 후사코는 이세 신궁의 신관이었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이세 신궁에 참배하러 왔을 때, 후사코는 미치코를 홀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로 정해진 미치코가 미웠던 것이다.[34] 1980년 그가 타계하였을때 한국 신문에 부고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35] 당시 일본의 인구는 9000만 남짓이었다.[36] 현재 일본에서 11월 3일은 문화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37] 이때 노기 자신의 두 아들도 잃었다.[38] 이 부분은 공정왕에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추상하고, 노산군에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 추상하고 복위시킨 숙종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