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6:55:40

육식금지령


1. 개요2. 역사 및 해제3. 영향4. 회피5. 비슷한 사례6. 매체에서의 묘사

1. 개요

675년 덴무 천황이 육식을 금하도록 선포한 명령으로, 1872년 메이지 천황이 해제할 때까지 약 1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물론 개중엔 노약자가 기력 보충을 위해 약으로 조금 먹거나 후술되어있듯 남들 눈치보며 몰래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놓고 고기를 먹는 문화가 생기질 못하다 보니 근대 이전 일본에선 제대로 된 육식 문화 자체가 거의 전멸한 지경이었다.[1]

2. 역사 및 해제

庚寅. 詔諸國曰. 自今以後. 制諸漁獵者. 莫造檻穽及施機槍等之類. 亦四月朔以後. 九月卅日以前. 莫置比滿沙伎理梁. 且莫食牛馬犬猿鷄之完. 以外不在禁例. 若有犯者罪之.
경인(17일)에 제국(諸國)에 조를 내려 “금후 각종 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자에게 금하노니 올무를 놓거나 함정을 파는 일, 기계를 이용한 창 놓기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 또 4월 1일부터 9월 30일 이전까지 어린 고기를 잡는 것을 하지 마라. 또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라. 이 이외에는 금례에 들지 않는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린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9, 덴무 4년(675년) 4월 17일 # 영인 페이지[2]
당나라·백제를 통해 일본불교가 유입되어 신토와 함께 자리잡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675년 덴무 천황은 농경 기간 동안 , , , 원숭이, 의 섭취를 금지했다. 단 식재료로 거의 쓰지 않는 원숭이가 있고 정작 역사적으로 훨씬 식용의 비중이 높았던 돼지는 없다는 점이 다소 특이한데, 일본에서 마침 돼지는 유입된 지 얼마 안 된 즈음이어서 대표성이 없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는 원숭이를 빼고 돼지, 을 더해 육축六畜(소·말·양·돼지·개·닭)을 금지했다고 바뀌었다.[3]

헤이안 시대 이후 천황의 영향력이 극감했지만 이 명령의 효력은 오래토록 유지되었는데, 오랜 기간 불교 국가였던 것과 맞물려[4] 일본의 문화로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계란, 채소, 곡물 위주로 식사했다. 단백질 섭취는 아니면 주로 생선 같은 수산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애초에 법령에 생선은 포함되지 않았고, 당시엔 생선과 고기는 엄연히 다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시류가 괜히 발전한게 아닌 것. 고래고기도 마찬가지라, 오늘날엔 생물학적으로 고래는 포유류란게 상식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다. 페스키테리언(pescetarianism) 계열의 채식주의를 한 셈이다. 일본인들이 오랜 기간 고래 고기에 집착한 것도 이 정책의 영향일 수 있다.

동물을 키워도 잡아먹을 용도로는 키우지 않았다. 는 오직 농사에만 사용했고 은 교통수단으로만 사용했으며 은 알람시계, 계란 생산에만 사용했다. 그리고 만약에 키우다가 죽으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고 기름을 짜내 불붙일 때 사용했지만 절대로 살을 발라내 먹지 않았고 나머지 부위는 땅에 묻었다. 11대 조선 통신사(1763년)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는 에도시대 당시 육식을 하지 않는 일본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여섯 가지 가축(소, 말, 양, 닭, 개, 돼지)을 먹지 않으며 집안에서도 키우는 마축이 드물다. 풍속에서 도살을 기피하는데 개나 말이 가장 심하다. 가축이 죽으면 모두 땅에 묻는다. 소가 만약 병들어 죽으면 태워서 기름을 취하여 등(燈)을 태우는 데 쓴다. 이런 일은 천한 자들로 하여금 맡아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꺼려서 나가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즉시 그 나머지 살과 남은 뼈를 땅에 묻는다. 혹 병자의 약으로 쓸 경우에는, 소를 낭떠러지 위에 세워 놓고 밧줄로 끌어서 거꾸러뜨려 추락사하면 적당히 약용을 취하고 그친다. 나머지도 죽은 소의 예와 같다.
집돼지는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사행을 위하여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서 보내주었기에 잡게 하여 음식으로 하였다. 닭 또한 드물게 키우는데 그 키우는 자들은 단지 때를 알려주는 것만 취할 뿐이요 음식으로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화국지(和國志, 1763?) - 음식(飮食) 편[5]
매우 오래 전에 내려진 명령이고 '육식 금지'라는 폭이 너무 넓기에 정말로 곧이곧대로 지켰을까 싶지만, 아래 언급한 몇몇의 회피 사례를 제외하면 육식을 꺼리는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이어져온 듯하다. 위의 조선 통신사 일행의 기록에서 보듯 외국인인 조선 사람도 일본인의 육식 금지를 언급하고 있으며[6], 비슷하게 18세기에 출간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에서도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피한다"라는 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고 메이지 유신을 선포함에 따라 전통으로부터 단절을 선언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육식금지령도 1197년만에 해제되었고 천황이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었으며 이를 알렸다. 다만 1000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이라 반발이 심해 자객이 궁궐에 침입할 정도였다.[7] 전통도 전통이지만 오랜 기간 고기를 먹지 않다 보니 고기 특유의 누린내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그래도 점차 스키야키[8], 돈까스[9]경양식이나 일본식으로 개량한 고기요리를 먹어 서서히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다. 소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과장광고가 나왔을 정도로 이전과는 달라졌다. 고기를 먹는 행위가 문명화된 사람의 상징처럼 통하는 분위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여기에 조선, 대만 등 일본 제국 식민지의 고기요리가 일본 본토로 유입되는 것까지 더해졌다. 덕분에 오늘날에는 일본 사람들도 고기를 잘 먹는다.

3. 영향

1200년 가까이 지속된 명령이었기에 당연히 일본 식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양갱(羊羹)이란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10], 일본에서 선지를 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다. 만두중국은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11]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고, 이것이 만쥬이다. 그 외에 양갱과 유사한 과자류로 규히(求肥)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중국에서 본래 牛脾라고 소 지라로 만든 음식이었던 것을 찹쌀가루로 대체하고 글자를 求肥로 바꾼 것이다.

육식금지령이 시행되기 이전 고대인들의 유골을 분석해 본 결과 한중일 민족의 신장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 있는 반면, 전근대 이후 일본인들의 평균 키는 한국인들보다 몇 cm 정도 작은 편인데 이걸 육식금지령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이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까지는 없다. 당장 육식 많이 한다는 인상이 있는 남미나 몽골 지역 등에서도 평균 키가 작은 현상은 관찰할 수 있다. 애초에 육식 외에도 환경이나 민족간 혼혈[12] 등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설령 당시 일본인들이 육식금지 때문에 키가 작았다고 해도, 몇 만년도 아니고 천년 정도의 시간 동안 유전자까지 변형되었을지도 의문이기에[13] 이미 고기를 멀쩡히 먹게 된 지 오래인 해제 이후부터 현대 일본인들까지 평균 키가 작은 것도 그 영향이라고 봐야 할지는 애매하다.

일본인이 한국/중국인에 비해 이 갸름하고 덧니가 많은 원인 중 하나도 육식금지령이라는 추정도 있다.

일본에서 십이지돼지(ぶた)가 아닌 멧돼지(いのしし)인 것 역시 육식금지령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멧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 일본서기에는 600년대 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14] 이 시기에 육식금지령도 이루어졌으니 집돼지로의 개량이 활발히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위 화국지 기록에서도 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를 잡아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식 자체를 쉬쉬하는 문화다 보니 육식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도축업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반도 국가에서도 '백정'이라는 말이 비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기를 먹는 문화권이니 어떻게든 곁에 끼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었지만, 일본에선 '먹어서는 안 될 것을 죽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 회피

고기 문서에서도 보듯 '육식 금지'는 너무나 폭이 넓기 때문에 여러 회피 수단이 등장했다. 집권층은 약재용이니 뭐니 이런저런 꼼수로 고기요리를 즐겼으며 일반 백성들까지도 다양한 편법으로 법망을 피해 고기를 즐겼다. 가령 오리고기는 물에서 나오니 생선이라는 식으로, 멧돼지고기는 산에서 나오니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던지 산에 사는 고래이므로 생선이라던지. 굶주림에 몰래 도축해 먹거나, 신분에 상관없이 질병 치료형식의 약으로 삶거나 구워서 먹는 경우도 많았다. 육포의 형태로 말린 것을 환약처럼 만들어서 조선의 비법(...)이라면서 '조선우육환'(朝鮮牛肉丸)이라고 만들어 팔기도 했다.#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도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이들이 꽤 있다. 전국시대때 오다 노부나가엔랴쿠지를 공격하면서 "무슨 스님들이 매일 고기를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여자를 끼고 사냐?" 하는 투로 비판했고[15] 승려로 출가한 다케다 신겐도 죽기 몇 년 전부터 으로 매일 을 잡아서 삶아먹었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록도 있다.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느 날부터 다케다 신겐의 전속 요리사가 닭을 잡지 않고 있다는 간자의 보고를 듣고 신겐이 죽었음을 눈치챘다고 한다.

다만 이런 식으로 먹어봤자 편법으로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하는 짓이라 전반적으로 육식 문화는 엄청나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쉬쉬하는 요리이니 고위층들의 식단으로도 전면에 오를 수 없고, 고기 요리를 잘 한다고 누가 잘 대접해주긴커녕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니 고기 요리 방법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단적으로 말해서 일본에는 제대로 된 토착 전통 고기요리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일본 고유의 고기요리라 할 만한 스키야키마저도 본래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두부, 곤약, 버섯 등만 넣어 만든 채식 요리였다가 나중에 고기가 추가된 것이다. 고기 냄새가 낯선 일본인이 이를 감추기 위해 달걀을 넣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근대기 발생한 일본의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야키니쿠, 호루몬 등), 중식(징기스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돈가스, 니쿠자가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5. 비슷한 사례

고려불교의 영향으로 육식문화가 쇠퇴했다. 다만 일본처럼 정부가 나서서 대놓고 금지한건 아니고 육식을 비권장하는 사회 풍조가 생겼다. 이 때문에 도축 기술이 쇠퇴해 중국 사신들이 올땐 접대용으로 고기를 대접하긴 했지만, 이것도 많이 잡질 않다보니 (상기된 조선통신사들의 일본 도축 기록과 비슷하게) 고기를 두들겨 패거나 절벽으로 떨어트리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핏물도 제대로 안 뺀 것을 대충 구워서 내놓았다고 한다. 물론 이 당시에도 아예 안 먹은건 아니라 권신 이자겸이 세도를 부릴때 뇌물로 받은 고기가 너무 많아 썩을 지경이라는 기록이 정사인 고려사에 있을 정도로 일부에선 고기를 먹었다. 개고기에 관련한 유물도 남아있다. 그러다 유목민족인 원나라의 간섭을 받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육식이 다시 성행하였으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조선은 숭유억불로 불교 문화를 탄압했기에 오히려 육식이 더 융성해졌다.[16]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 조선 침공을 위해 전국에서 군사들을 징발해 시모노세키 군항으로 집결시켰는데, 당시 시모노세키는 복어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징병된 군인들은 당연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이었기에 바다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이때문에 제독 기술이 부족한 군인들이 복어의 독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하고(...) 요리해먹다가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나가자 복어금식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에도 막부에서도 유지됐다가 근대화 이후 이토 히로부미 시기 해제했다고 한다. 복어 관련 영상.

6. 매체에서의 묘사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일본은 육식금지령을 반영하여 게임 내에서도 동물의 도축과 사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만의 특수건물을 지으면 동물 가축이 그 주변에 모여들어서 모여들어 있는 동물의 수만큼 자원이 쌓이는 구조로 되어있다.
    문제는 컴퓨터와 동맹을 할 경우 컴퓨터 동맹군의 주민들이 멋대로 우리 영토로 들어와 도축하고 채취해가는 일이 발생한다. 사람과 동맹해도 마찬가지 동맹이 멋대로 주민으로 도축해가면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자동으로 그냥 막 자원이 올라가는 구조 자체가 좀 일뽕이다 싶을 정도로 사기적인 면이 있다. 에이지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자원이 고갈되어 몰빵전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일본처럼 자동으로 올라가는 치트키스러운 구조로는 쭉 농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밸런스적으로는 양해할 만한 페널티이다.
  •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장 파스파르투가 일본을 구경할 때 육식금지령에 관련된 언급이 잠시 나온다.
    는 일본의 푸줏간에는 고기나 염소고기, 돼지고기가 전혀 없다는 걸 알고 놀랐다. 또 일본에서는 를 오직 농사짓는 데만 쓰고, 소를 죽이는 것을 불경한 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쇠고기가 매우 귀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쇠고기는 없다 해도 멧돼지사슴, 이나 자고새, 가금류 또는 일본인들이 과 함께 거의 주식으로 삼다시피 하는 생선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불운을 견뎌야 했다. 양식을 구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중에서. 시공주니어 김주경 번역본(1872년)

    위는 장 파스파르투가 돈도 없이 일본에 상륙해 식량을 찾아나서는 장면이다. 1872년에 나온 소설인데 메이지 유신 이후지만 아직 육식금지의 영향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근대 이후 일본의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야키니쿠, 호루몬 등), 중식(징기스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돈가스, 니쿠자가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 왼쪽 페이지, 오른쪽에서 2번째 줄부터이다.[3] 돼지는 확실치 않지만 양은 분명 600년대 일본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4] 참고로 대승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게 된 것은 보통 양무제가 517년 내린 단주육문(斷酒肉文)으로부터인 것으로 본다.[5] 번역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박재금 역, 소명출판, 2006"을 그대로 옮겼다. 번역서 기준 308쪽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6] 위의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외국 사신에게는 고기 요리를 대접했는데, 고기 요리법이 발달하지 못했다보니 누린내와 같은 잡내를 전혀 잡지 않아 먹는게 고역이었다고 한다.[7] 이들은 체포되고 나서 "일본은 신의 나라인데, 외국인들처럼 고기를 먹으면 타락할까봐 두려워서였다."라고 동기를 밝혔다.[8] 고기를 얇게 썰고 날계란물에 찍어 먹어 그나마 익숙한 비린맛인 계란 비린맛으로 육향을 가렸다.[9] 고기를 얇게 피고 튀김옷으로 완전히 덮어버려 육향을 가렸다.[10] 원래 갱(羹)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고깃국을 의미하는 것이다.[11] 당면이 전래된 이후. 한국에 당면이 들어온 건 일제강점기 때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정통 한국 잡채는 문자 그대로 채소와 나물을 섞어 만든 것이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양을 불리기 위해 당면을 섞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한복려 여사의 어머니 황혜성 여사의 스승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서 조선궁중요리 초대 기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였던 한희순 여사는 늘 당면잡채를 '가난뱅이 잡채'라고 깎아내리면서 제자 황혜성 여사에게도 '가난뱅이 잡채'는 절대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였다.[12] 현대 일본인들은 야요이인조몬인의 혼혈이 직계 조상이다.[13] 진화생물학적으로 천년은 짧은 시간이다.[14] #[15] 근데 오늘날 일본의 승려들도 술, 고기, 여자(결혼) 끼고 사는 경우 많다.(...) 종파에 따라 대처승이라고 아예 허용해주는 것. 사실 승려 항목에도 있지만, 불교에서 육식을 무조건 금하는건 아니다.[16] 단, 소가 여전히 농업국가의 주요 자산이었기 때문에 고기를 얻기 위한 도축을 금지해서 대놓고 쇠고기를 먹진 못했고(물론 편법으론 먹었다) 다른 고기를 섭취했다. 그 외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불교색이 강한 문화는 오히려 주춤했고, 조선의 차 문화는 후기에 와서야 다시 부흥한다. 차례도 원래 고려시대까지는 문자 그대로 차를 올리는 것이었는데 조선시대부터 차가 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