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1 21:20:47

야요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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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인 남자아이

1. 개요2. 유전적 특징3. 고고학적 연구
3.1. 《후한서》 <동이열전>
1. 위키백과2. 기타


1. 개요

야요이인([ruby(弥生人, ruby=やよいじん)])은 일본의 야요이 시대일본 열도에서 거주했던 인구 집단이다. 이들은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에 위치한 집단이었으며 야마토 문화 및 일본인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집단이다. 동북아시아계 도래인과 조몬인의 혼혈이다.

2. 유전적 특징

아시아권의 유전자 이동을 보면 세계 DNA 이동[1][2] 야요이 시대를 연 야요이인은 고대 한반도에서 금속 문화와 농경 문화를 보유한 높은 조몬인 유전자를 가진 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야요이인 snp 분석결과 야요이인은 현대일본인과 상당히 가깝고 한국인 과는 가깝지만 어느정도 차이가있고 조몬인과도 가까우면서도 어느정도 차이가있고 중국의 집단들과는 상당히 멀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야요이인snp
야요이 시대 고인돌의 상염색체 분석결과를보면 이미 야요이 시대에 야요이인과 조몬인이 혼혈된걸 알수있다 오히려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보다 조몬유전자가 대체적으로 높게나오며 또 사람,지역마다 조몬유전자비율이 천차만별이다. 다만 조몬유전자가 극히 낮은 야요이인도 발견된다.야요이시대 고인돌 상염색체

이는 일본 열도의 야요이 시대인들의 고인골에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조몬인 성분이 20~60%씩 검출이 된다. 한반도 남부에는 신석기 이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유래한 조몬인들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거쳐서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신석기 시기 남해안 일대와 금관 가야국의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기득권층과 피지배층 가리지 않고 높은 조몬인 유전자를 가진 이들이 존재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야요이인은 산둥반도 또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쌀 재배를 가져온 집단으로 여겨지는데, 의학자인 사키타니 미츠루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 쌀 재배를 가져온 집단은 Y하프로그룹 O1b2에 속하는 집단이라고 한다. O1b2는 일본인을 제외 하면 만주족과 한국인들에게서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

후쿠오카현의 안도쿠다이 유적(安徳台遺跡)에서 출토된 형태적으로는 전형적인 도래계 야요이인으로 판단된 인골의 핵 게놈을 분석한 결과, 이미 야요이 시대 중기에 조몬인과의 혼혈이 진행되었으며, 한국이나 중국의 집단보다 현대 일본인 집단에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 남해안의 신석기 시대 인골에서도 고대 동아시아 연안 집단 또는 조몬인과의 혼혈 흔적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도래계 야요이인이 일본에 도래하기 전 이미 혼혈이 진행된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일본 본토의 야요이인들이 현대 일본인에 가까운 수밖에 없고, 연구결과 고대 한반도에 거주했던 조몬인은 워낙 적었기에, 한반도에서 한반도인과 조몬인의 혼혈은 당연히 적을 것으로 예상 할 수 있다. 심지어 일본열도에서도 나중에 도래인 집단과 비교하면 조몬인의 수는 훨씬 열세였다. 조몬인의 수가 20% 미만이었다.

도래인들이 한번에 이주한 것은 아니고, 조금씩 일본 열도로 이주해 조몬인과 혼혈화 되었다. 즉 야요이인=동북아시아인+조몬인의 혼혈 집단이다. 언어학적으로는, 한반도의 무문토기 문화(無文土器文化)를 이끈 집단이 현대 일본어의 조상인 일류어족(日琉語族)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 설에 따르면 현대 한국어의 조상인 한국어족(朝鮮語族)에 속하는 언어는 고대 만주 남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친 지역에서 정립된 후, 이 한국어족 집단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오면서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존재하던 일류어족 집단과 동화하였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동화되지 않고 대립하게 된 일류어족 화자 집단이 일본 열도로 넘어간 야요이인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3. 고고학적 연구

조몬 시대 중기에 1만명, 즉 전체 인구 2.7%에 불과했던 서일본 인구가 야요이 시대에 17% 수준으로 크게 증가한 후, 수백 년이 지난 7세기 즈음에는 무려 100만이 넘게 되었는데, 소수가 이주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많은[3] 수치이다. 야요이, 혹은 고훈 시대에 도래했다고 알려진 하타씨가 120현(縣)을 이끌고 도래했다는 기록도 과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렇게 대규모로 이주한 집단이 발전된 농경, 양잠, 관개, 토목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교토를 중심으로 저수지, 제방, 관개 시설부터 쫙 깔아 기반을 마련한 뒤 야마토국의 국가 산업을 도맡았다고 하니, 당시 일본 인구 폭증의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기원전 - 기원후 당시 일본 인구를 분석한 자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기원전에는 100년당 몇 만씩 증가하던 게 기원후 3~5세기를 기점으로 수백 년간 몇 배 단위로 폭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반대로 한반도에서 인구가 엄청나게 줄었다는[4] 증거나 사료는 전혀 없다. 여러 부분을 다 감안해서 생각하자. 2025년에 와서는 야요이 ~ 고훈 시대에 걸쳐 도래할 때마다 수백 ~ 천 단위로, 도래한 인구 자체도 당시 일본 인구 상당수를 차지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5]

야요이 시대 말기에는 백여개의 소국들이 세워졌으며, 이때 촉나라 출신의 사관 진수는 통역이 되는 소국은 30여개에 불과하다고 기록을 남겼다. 한나라때 왜국 사신이 알현하러 왔다고도 적혀있다. 당시 중국과 통역하는데 중국어는 공용어였다.#

도래인들은 최초로 BC 10세기에 청동기 등을 사용하는 더 높은 수준에서 신석기 시대인 조몬인 시대(~BC 10세기)에 와 야요이 시대(청동기/철기 시대)를 열었다. 철기는 도래인들이 꾸준히 조금씩 넘어와 AD 3세기 정도에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기술적으로는 차이가 나, 처음에는 도래인들이 수적 열세였다곤 하나 기술력이 우위기에 조몬인들의 문화를 받아 들인게 이상하다고 생각 할수도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별 차이가 안나기에 조몬인들의 풍습을 받아 들였다.

얼굴 대부분에 동물 피 묻히기 또는 붉은색 도포하기, 머리 풀어헤치기 등. 청동기시대에 붉은간토기라고 있는데, 장송 의례와 관련이 깊다. 붉은간토기는 한반도 남부 전역에 분포한다. 또한 일본 열도의 야요이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산화철 성분의 붉은색 안료를 발라 만들 수 있기에, 얼굴에도 바를 수 있었다.[6] 이러한 행위는 인류의 수렴진화에 해당 한다. 그렇기에 한반도 역시 문화는 별차이가 없었으니 받아들였다는 것. 이때는 천둥번개, 지진, 쓰나미만 일어나도 하늘이 노했다고 하던 시절이다.[7]

특히 주거지, 토기, 묘제 등 고고학적 지표로 보면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대표 유형 중 하나인 송국리 문화 및 이후의 세형동검 문화와 여러 가지 문화요소들을 공유한다. 그래서 한반도 주민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이주하여 토착 조몬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야요이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다만 야요이문화 조기의 성립은 직접적인 이주보다는 송국리 문화의 간접적인 전파 혹은 파급의 결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후에 송국리 문화 및 후속하는 세형동검문화 등 다양한 지역 및 계통의 한반도 문화가 여러차례 규슈 일대에 전파 혹은 직접적인 이주로 확산된 결과로 야요이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홍종, 야요이토기와 무문토기의 실연대·이정은, 규슈지역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문화변동·조진선, 전근대의 한일항로와 세형동검문화의 파급 경로 등.)

다만 흔히 말하는 '송국리 문화가 북방에서 이주한 점토대토기문화인들에게 축출당해 이주한 것이 야요이문화다'라는 주장은 생각보다 마땅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다.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계에서는 주로 한반도 점토대토기문화의 성립은 정가와자 계통 문화권 주민들의 이주로 인한 전면적인 주민교체로 보기보다는 재래의 토착민들의 자발적인 문화수용 혹은 소수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교류 및 동화, 그리고 이로 인한 문화접변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오히려 후기의 송국리 문화에서는 종전에 '점토대토기문화'라고 분류했던 여러 문화요소를 이미 공반하고 있었고, 이들이 주체적으로 외래 문화를 지속적으로 흡수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애당초 '송국리 유적'과 '진주 대평리 유적'을 비교해도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송국리문화는 전파 및 파급된 지역별 문화적 변용이 심하고 토착 문화요소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그 원향이라 할 수 있는 송국리 및 관창리 일대와 이것이 전파된 다른 지역 간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차이점이 있어서 '송국리 문화'를 특정한 인종 내지 종족적 집단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송국리 문화는 일부 지역에서는 재래의 묘제인 지석묘를 지속해서 조영하기도 했지만, 사실 지석묘는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의 묘제가 아니며, 원향에서 직접적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취락일수록 지석묘를 묘제로 채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 열도 야요이문화 개막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집단 역시 충청지역 송국리문화의 원향에서 직접 이주한 이들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동남부 일대에서 이러한 송국리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역삼동-미사리 유형의 재지집단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흔히 도래인 하면 중국과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로 얘기된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케이스가 대다수로, 야요이의 묘제들인 지석묘와 주구묘들이 중국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나 도끼와 농경기구 등 여러 고고학적 유물들이 한반도에서만 동일한 것들이 발견된다는 것, 규슈 북부에서 발견되는 야요이인의 유골과 현대 한국인의 DNA 유사성 등도 이런 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당시 항해 기술상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는 것은 가능했으나 중국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바로 건너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중국계 도래인들도 대다수가 한반도를 경유한 경우로 추정되며, 중국에서 일본 열도로 바로 건너가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최소한 당나라 이후(특히 당나라 말기)의 일로 추정된다.[8]

현재 일본 교과서에서도 야요이인들은 고고학적 유물과 묘제를 증거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만 2007년 전후 무렵쯤 역사학자가 아닌 몇몇 일본 학자들이 쌀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쌀 품종들이였지만 그 중에 중국 장강(양쯔강) 지역에서 건너온 쌀 품종도 매우 적은 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장강의 쌀 품종이 정확히 야요이 시대에서 건너간 것인지 아니면 백제의 무역이나 송나라 시절 무역으로 장강 지역 쌀이 건너간 것인지도 확실치 않으며, 뭣보다 그 수 또한 매우 적어 기존 학설의 전제를 뒤집을 수준은 아니다.

또 최초로 일본과 장강 문명을 관련 있다고 한 사키타니 미츠루(崎谷満) 이후 호오가 토시오(宝賀寿男), 야스모토 히덴(安本美典)이라는 학자들이 산둥반도를 지나서 일본에 건너갔다는 학설, 근거가 부족한 장강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호오가 토시오의 경우 역사학자가 아니며 사키타니 미츠루는 전문 분야가 의학자이다. 야마모토 히덴은 심리학자이다.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교수는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기조가 일본 학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인의 기원의 다양한 갈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도래인의 위상을 과소평가하거나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 정도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역사학자도 아닌 사키타니 미츠루(崎谷満), 호오가 토시오(宝賀寿男), 야마모토 히덴(安本美典)도 도래인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시베리아, 만주, 중국 대륙 남부에서 산둥반도를 지나 바로 건너왔다고 보기도 한다는데, 어떻게든 한국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피하고자 하는 주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현 일본 학계가 한일 간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은 알고 있으면서도 혈연 관계는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세키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대 일본어, 한국어 연구로 유명한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반도 일본어설을 제시하며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서 쓰였고 고일본어족 화자들이 한반도로 남하하는 한국어족 계통의 집단과 접촉 하였고, 동화 하지 않고 밀려나간 집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한국어와 일본어가 각각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을 풀어보면 야요이인의 언어는 한국어 계통이 아닌 일본어 계통이 주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한반도인과 야요이인의 DNA는 매우 가까운 수준이다. 심지어 현대 한국인, 현대 일본인도 가장 가까운 유전자다. 애초에 일본열도에 조몬인은 20% 미만으로 숫자가 열세였다. 한반도는 매우 극소수였다. 또 조몬인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족의 언어가 일본어와 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보아 야요이인의 형성 과정에서 북방에서 남하해온 한국어족, 일본어족과 유사한 언어 집단과 일본 열도에서 도래해온 조몬인 집단이 합쳐지면서 고일본어족을 형성 하였고, 이들이 일본 열도로 도래하면서 한반도에서는 자연스레 소멸 되었다고 본다. 일본어족 계통 인구와 한국어족 계통 인구는 서로 이웃 민족 정도로 유전적 거리가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 당시 한반도에는 북부에서 한국어 계통이 계속 남하해 존재했기에 한국어 계통 인구도 일본어족 계통 인구와 함께 일본 열도에 건너갔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보빈 교수도 사망해서 다른 학자들의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반도 일본어설 참고.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한반도의 이민자에 의해 야요이 시대가 열렸다고 봤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야요이 일본은 한국에서 수백만의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이들 이민자들은 야요이 전환기 무렵에 7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의 유전자를 압도했을 것이다.
총, 균, 쇠〉 - 재레드 다이아몬드
昔『日本は三韓と同種也』と云事のありし、かの書をば、桓武の御代にやきすてられしなり。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 같은 동족)의 나라였다.’고 적힌 책이 전해내려 왔는데, 간무 천황 시대 때 불태워 버려 소실됐다고 한다.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9]

3.1. 《후한서》 <동이열전>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飲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 진(秦)나라 망명인인데,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했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진한(秦韓)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우두머리 혹은 군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10]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에 적당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비단의 일종)를 짓는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는 예법이 있다. 보행하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는 풍속이 있다. 나라에 철(鐵)이 산출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무릇 재화를 교환할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그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금(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11]
辰韓... 其人皆長大... 被髮... 有似倭
진한인은 모두 키가 크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왜인과 유사하다.
<후한서> (AD 5세기)

진한(辰韓)이 왜인과 유사하다고 하면서 진한(辰韓)이 진(秦)나라의 유민이라는 모순적인 기록이 혼재하는데, 마한(馬韓)이 동쪽 경계를 나누어줬다는 내용으로 보아, 위 중국측 기록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마한(馬韓)인들은 왜인과 유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진한(辰韓)에 거주하던 집단도 마한(馬韓)과 마찬가지로 왜인과 유사할 것으로 보이고, 일부 진나라 유민들도 진한땅으로 유입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로비츠는 요동 기원설을 주장했는데, 그는 그 시대에 장거리 이동이 어렵다는 점에서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기원했으며 부여어족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증거로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지명을 예로 들었다. Alexander Vovin(2014) Out of Southern China? 다만 일본의 대표적 묘제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되는 한반도의 방형주구묘(方形周構墓)는 요동으로 갈수록 수가 적어지기에, 요동에서 야요이가 기원한 것이 아니라 요동은 한반도인들이 진출한 곳이라는 반박도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방형 주구묘가 일본에 건너가 지배적인 묘제가 되는 것을 보면 야요이인들은 요동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기원했다고 보는게 정확하다는 것이다. (季刊考古学 弥生墓制の地域的展開 2005.6.1)

시노다 켄이치도 고훈인설과 함께 한반도 남부 거주민과 야요이인을 계속 랴오닝(요녕) 출신이라 엮고있다. 그런데 야요이가 랴오닝 출신이라는 이유나 근거는 제대로 없다. 거기다 현대 랴오닝성의 유전자를 근거를 들기도 하며 도래인이나 한국인의 고향까지 싸잡아서 "요하출신"으로 보려는 수가 일본에서 매우 비약적으로 늘어나고있다. 하지만 정작 고대 요하 근처 만주 거주민들은 대부분 한국계 국가나 중원으로 갔으며 지금의 동북3성 거주민들은 거의 18세기 이후의 이주민이다. 거기에다 O1b2 하플로는 고대까지 고려한 분포도만 봐도 한반도 기원이 확실하다. O1b2는 요하에서 남하한 것이 아니라 북상한 것이 확실한 것.

야요이 시대의 유물이나 야요이 시대의 석기는 형태, 석재가 한반도의 것과 유사했으며, 철기 및 청동기 역시 매우 흡사한 모습을 띄었다. 또 한반도에서 가까운 북규슈과 서남쪽 혼슈 지방을 중심으로 야요이 문화가 전개되었다. 이런 점을 들어 야마구치현사가현 등지의 간몬(關門) 지역 일대에 한반도로부터 도래인 집단이 정착하여 야요이 문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천선행, 〈무문토기시대 한일간 지역관계변천〉, p.3)

1. 위키백과

일본 민족주의적 성향의 발로인지 2007년 이후 일본어판 위키백과에 대만계, 중국계 일본인들로 추정되는 일부 네티즌들이 야요이 시대의 한반도 관련 내용을 지우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소수 넷우익들도 이것에 동조해 상기된 쌀 드립 등을 내세우며 야요이인들이 장강 지역에서 직접 건너왔다는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하지만 야요이 시대의 묘제들이 중국 장강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에서만 대량으로 발견되는 지석묘와 방형주구묘들이며, O1b2가 중국 장강 지역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O1b2가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것이라면 적어도 중국 남부에 어느 정도 O1b2의 인구가 존재해야 한다. 이런 점을 들어 야요이인이 장강에서 기원했다는 설은 비판받고 있다.

사실 O1b2 드립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와의 연관성이라면 일단 부정부터 하고 싶은 일본 극우 세력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주장도 있다. 요지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한국인, 일본인의 중국 남부 기원설을 지지하는 해외 학자에게 투자를 하였는데, 2003년과 2006년 경부터 이런 설을 지지하는 일본 학자들이 나타났고, 이 일본 학자들이 고대에서 일본으로 왔는지 송나라 때 무역으로 일본에 왔는지 모르는 오래된 일부 벼와 쌀알들을 가지고 야요이인들이 중국 남부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어 위키에 O1b2 관련된 설명이 없어서 추가 서술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인 유전자 관련 영어 위키에도 일본인과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유사하지만 한국인은 베트남과 유전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 양쯔강 출신이라는 편향적인 서술이 되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 게다가 여기서도 유전학적으로 한국인과의 연관성을 희석하고 있어서 내용 보정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얼굴 길이 차이와 야요이인의 정체

https://m.dcinside.com/board/history_qna/6456

2. 기타

상술한 내용 때문에 재한일본인들과 재중일본인들(특히 전자)은 농담삼아 고향으로 돌아온 야요이인으로 불리기도 한다.[12]
[1] NO(기원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남부), 이후 N(시베리아, 북유럽 등 이동), O(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이동), O1b2(동북아시아, 한국인, 일본인 유사), D1a2a(시베리아, 조몬, 아이누 유사), C1a1(동남아시아, 조몬, 류큐 유사), O-M134(동아시아 대륙 공통 성분)[2] D1a2a 시베리아→한반도→일본 열도 (약 30,000~20,000년 전) 조몬인, 아이누인으로 일본열도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C1a1는 D1a2a 보다 약간 늦었는데, 동남아시아→대만·류큐→일본 남부 (약 15,000~10,000년 전), 조몬인 남부 계통이다. O1b2 한반도 중남부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토착) 조몬 시대 말기~야요이 초기 (기원전 1,000~300년), O-P201 (O2b1a1a) 중국 동부(산둥 반도 일대) → 한반도 남부 → 일본 열도 야요이 시대 본격적 유입 (기원전 300년~서기 300년)[3] 다만, 고대 한반도 역사나 대외 교류 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7세기까지 가면 대규모 이주는 별로 없었을 가능성이 큰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인지 저 링크 안의 내용도 그렇고 일본 고대 인구수 증감 추정치 그래프들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서일본 인구가 수십 ~ 수백만까지 늘어나는 시기는 도래인 이주가 이루어지던 시기보다 몇백 년 이후라서, "저 시기 도래인 수십만이 서일본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한반도가 텅 비었구나!"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없고, 보통은 여러 산업들이 전파된 서일본의 고대 국가에 중앙 집권화가 자리잡아 국가 안정화가 끝난 상태에서 수백년에 걸쳐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4] 사실 이 시기는 그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과 교류할 거 다 하고 고구려가 망하니 백제가 망하니 하던 삼국시대 말기 시대라서 이후 유민들이 일부 건너가거나 하는 정도로, 그 이외의 일본과의 교류는 잘 묘사되지 않는다. 시대상 다른 원인으로 인구가 왕창 줄었을 수 있다는 추측은 할 수 있지만...[5] 기사 7페이지에는 300년동안 순수 도래한 인원만 당시 일본 인구 1/4에 달할 거라는 내용도 있다. 기사 전체적으로는 유전자 분석 결과 애초 도래할 때부터 마을 단위로 도래해, 귀족, 기술자 뿐 아니라 농민 등 일반 백성들도 많이 건너왔을 거라는 내용으로, 기술자나 귀족 소수만 도래하여 일본 전체적으로는 극소수였을 거라는, 이른바 '귀화인' 가설을 반박하는 셈.[6] 붉은색의 안료를 바른 토기는 신석기 시대에도 있었다.[7] 아즈텍 제국은 인신공양까지 했다.[8] 중국 문화가 본격적으로 일본 열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도 당나라 때부터의 일이며,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하여 일본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당나라 때의 중국인들 또한 당나라 말기의 여러 혼란을 피해 일본으로 대거 망명하여 일본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한반도계 도래인의 역사가 매우 긴 것과 달리 중국계 도래인의 역사는 국수주의 성향 중국인들의 주장과 달리 의외로 짧다는 것이다.[9] 일본의 3대 사론서 중 하나로 명장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인 키타바타케 치카후사가 14세기에 집필했다.[10] 모두 그 나라의 관직 명이다.[11] 편(扁)의 발음은 보전(補典)이라 한다.[12] 비슷한 이유로 모로코계 스페인인들 또한 고향으로 돌아온 무어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세한 건 스페인-모로코 관계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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