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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鎌倉時代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대. 1185년부터 1333년까지 사가미국(相模国) 가마쿠라에 막부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타이라(헤이시, 平) 가문을 물리치고 일본 전국을 제패한 후, 각처에 수호를 설치하고 사가미국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면서 가마쿠라 시대가 시작되었다.
집권가문인 쇼군가의 성은 미나모토였으나 3대만에 대가 끊기고 이후에는 호조씨가 싯켄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이끈다.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를 종종 쇼군의 성씨에 따른 아시카가 막부, 도쿠가와 막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를 미나모토 막부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1] ##
2. 시대적 특징
일본에 최초로 완전한 무가정권이 들어서서 쇼군 정치가 처음 시작된 시대다.[2][3]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여전히 교토의 조정이 더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교토의 조정-지방의 장원이라는 체제와 가마쿠라 막부-지방의 슈고(수호), 지토(지두)라는 이원적인 지배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어디까지나 교토의 조정이 공적 기관이었고,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 소속의 변방 지행국과 막부에 속한 무사들을 다스리는 조직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막부가 조큐의 난으로 조정을 물리친 이후부터 점점 막부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이후로는 막부가 완전히 일본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부의 실권이 쇼군이 아닌 싯켄에게 넘어가면서 덴노와 쇼군을 제치고 싯켄이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그래서 본 문서에는 역대 쇼군과 함께 역대 싯켄들도 언급되어 있다.
3. 역사
3.1.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
헤이안 시대 말기에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중심으로 한 타이라 가문으로 구성된 헤이케가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이에 못지않은 무력을 가진 미나모토 가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타이라 가문의 집권에 반발하고 있던 세력들은 1177년 교토의 시시가타니에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으나(시시가타니 음모사건), 1180년, 모치히토 왕이 타이라 가문에 맞서 봉기했다. 모치히토는 나라로 탈출해 미나모토씨에 기댔으나 결국 붙잡혀 패배하고 처형당했다.[4]타이라 가문과 쌍벽을 이루고 있던 미나모토 가문은 1159년 헤이지의 난[5]에서 타이라 가문에 패배하면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살해당했고 요시토모의 아들인 요리토모는 생포되어 이즈로 유배되었으나, 호조씨와 혼인동맹을 맺는 등 이때는 충분히 세력을 회복하고 모치히토 왕자의 봉기에 동참하여 1180년 8월 군사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요리토모는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반(反) 타이라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간토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두고 본격적으로 타이라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스모마타가와(후지천) 전투에서 승리한 요리토모는 간토를 본격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때마침, 키요모리가 1181년 병사했다. 열세였던 미나모토씨는 1183년의 쿠리카라 전투에서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승리로 전세를 뒤집게 된다.
한편 요리토모의 사촌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1183년 말 가장 먼저 교토에 입성해 타이라 가문을 추방했지만 다음해 정월 수도를 불태우는 등 전횡을 일삼았고 이를 우려한 고시라카와 태상황은 요리토모에게 교토 입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되려 요리토모는 동국(간토와 그 인근)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해줄 것을 요구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리토모는 우지 강 전투와 아와즈 전투에서 승리해 요시나카를 살해하고,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세토내해 방면으로 도주한 타이라씨와 안토쿠 덴노를 지금의 시모노세키인 단노우라 해전에서 몰살시켰다. 타이라씨 일족과 안토쿠 덴노 등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 삼종의 신기의 진품도 이때 없어졌다.
3.2. 조정과 막부의 대립 및 조큐의 난
▲ 13세기경부터 사용된 니시키노미하타 기.[6]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대에 가마쿠라 막부는 그 세력을 확고하게 다졌지만, 사실 지배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지역은 여전히 간토 지방 뿐이었고, 덴노의 조정이 있는 기나이 지방에 있는 장원 등은 조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고 그 자손도 죽어 미나모토씨(정확히는 카와치 겐지 본가)가 3대만에 끊어지자, 본래 미나모토씨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고토바 덴노(당시는 상황)는 이 기회를 노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문제는 고토바 덴노가 너무 정국을 유리하게만 판단했다는 점이다. 고토바 덴노는 막부를 없애겠다는 칙서 1장만 내려보내면 간토의 무사들이 알아서 조정의 편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전쟁 준비도 하지 않고 일단 칙령을 먼저 내려보냈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7]가 나서서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을 규합했기 때문에,[8] 막부 세력에는 거의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간토의 무사들은 이미 가마쿠라 막부의 지도력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덴노의 조정과는 별다른 유대 관계가 없었다. 막부 내부에서도 이미 싯켄 호조씨의 호조 요시토키가 쇼군을 제치고 실질적인 집권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미나모토씨가 끊어졌다고 막부가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가마쿠라 막부의 내부사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놓은 발상이었다.
간토의 무사들은 막부를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막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거병하고 기나이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력 충돌에는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던 조정은, 그제서야 허겁지겁 방어를 하려 했다. 하지만 애초에 전쟁 준비도 되지 않은 판국이라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덴노의 조정이 있던 기나이는 막부군에 완전히 함락당했다.
그렇게 조정은 최소한의 권리도 잃어버린 채 막부의 포로가 되었다. 고토바 상황과 그 혈통을 이은 덴노를 비롯하여 그의 세력들은 모두 낙도로 귀양을 갔으며, 그나마 덴노의 조정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기나이의 장원들도 모두 막부에게 빼앗겨서 재정적인 능력마저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호조씨는 모계로 요리토모와 피가 이어진 섭관가 출신의 후지와라노 요리츠네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여 허수아비 지도자로 세우고 실권을 장악했다. 요리츠네는 장성한 후 호조씨와 대립하며 실권을 찾으려 하였으나 호조씨에 의해 아들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막부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였고 결국 호조씨는 요리츠네와 그 아들 요리츠구를 함께 교토로 추방하였다. 이후 쇼군직은 친왕(황족)이 계승받게 되었다.[9]
3.3. 몽고습래와 막부 권력구도의 변화
그러던 중 가마쿠라 막부와 일본 전체에 엄청난 위기가 닥쳤으니, 그것은 바로 몽골 제국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복속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당시 싯켄인 호조 도키무네는 이를 거부했다. 이 요구는 호조 가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만약 이미 이름 뿐인 천황이 쿠빌라이 칸에게 책봉을 받게 되면 막부 체제는 붕괴하고 호조 가문은 멸문지화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10]때문에 쿠빌라이 칸이 일본 침공을 지시하여 여몽연합군이 규슈에 상륙해 일본군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으나, 때마침 불어온 카미카제라 불리는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두 차례의 원정 모두 실패로 끝나며 호조씨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것으로 호조씨의 명목상 권위는 크게 상승하였고, 이는 막부 권력 구도의 재편은 낳았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호조씨가 고케닌의 1인자라는 입장에서 막부를 주도했다면, 몽고습래 이후로는 다른 고케닌과는 격이 다른 존재로 격상되었다. 때문에 호조씨는 더이상 싯켄이라는 막부의 역직을 권력 기반으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고, 이후로는 호조 본가의 가주인 도쿠소(得宗)가 최고권력자가 되어 본인이 싯켄직을 퇴임하고 아들이나 친척에게 계승시킨 후 상왕정치를 하는 행태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호조씨의 권력이 마냥 공고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몽고 방어를 위해 무사들은 많은 돈을 사용하고 피까지 보았지만 방어전이다 보니 충분한 은상을 지급해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몰락한 무사들이 생기거나 막부에 반감을 가지는 무사들이 속출했다. 이는 시모츠키 소동(霜月騷動, 1285)에서 숙청된 자들의 토지를 분배함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서서히 말기적 증상을 보이며 쇠락해가고 있었다.
호조씨 본가에서 가주의 이른 죽음으로 어린 도쿠소의 취임이 반복되며 실권은 호조씨 방계 가문들과 호조씨의 직속 가신단인 어내인들에게 옮겨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도쿠소가 이들을 숙청하고 다시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호조씨의 권위가 겉으로는 공고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내실은 점점 불안정한 권력구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3.4. 악당의 등장, 그리고 막부의 멸망
한편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악당이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호조씨 정권의 또다른 위협이 되었다. 갈수록 공경 귀족과 상층 무사들이 장원의 규모를 확대하면서 토지의 불균형한 분배 문제가 심각해졌고, 영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농지에서 이탈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는 일종의 무장 집단[11]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을 막부 정권에서 악당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여장 혹은 바사라라고 불리는 화려한 옷차림을 좋아하였고, 이러한 모습은 가마쿠라 시대 무사들의 전통과 완전히 대비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뜻에서 이형이류(異形異類)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하층민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조씨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호족들과 고케닌도 점차 합세, 세력을 불러나갔다.이들 중 가장 막부에 위협적이었던 존재가 충신으로 유명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이다. 그는 소수의 병력으로 막부의 토벌군을 여러 차레 패퇴시켰다. 거기다 구스노키가 고다이고 덴노와 연합하자 결국 호조씨는 강력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고케닌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하지만 다카우지는 호조씨를 배신하고 교토 로쿠하라 단다이를 기습하여 호조씨 병력을 전멸시켰고, 동시에 또다른 유력 고케닌 닛타 요시사다가 에치고와 고즈케 등지에서 일문의 병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함께 가마쿠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아시카가-닛타 연합군에 뒤를 찔린 가마쿠라 막부와 호조씨는 멸망하여 가마쿠라 시대도 종식되었다.
4. 기타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쇼군에 취임한 1192년은 일본 학생들이 역사 연표를 외울 때 '좋은 나라 만들자, 가마쿠라 막부(いい国作ろう鎌倉幕府)'라고 외우곤 한다.[12] 1192가 고로아와세로 '이이쿠니(いいくに)'라고 쓸 수 있는데 이게 '좋은 나라(いい国)'라는 의미의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 가끔 일본 서브컬처에서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할 때 '좋은 나라 만들자' 어쩌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다만 위 설명대로 1185년 막부 성립이 다수설이 된 이후에는 '좋은 나라'를 '좋은 상자(1185-이이하코:いいはこ-いい箱)'로 바꿔서 외운다고 한다.
- 백인일수가 이 시대에 탄생했다.
5. 대중 문화
자세한 내용은 분류:가마쿠라 시대/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이는 미나모토씨가 본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2] 이전의 집권 세력인 헤이케 역시 무가정권이나 이전의 공가 귀족정치를 담습한 부분이 대부분이라 과도기적 정권으로 평가받는다.[3] 공교롭게도 당대 한반도의 고려에서도 무신정변으로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다만 한반도의 경우 무신정권이 이후의 시대에도 다시 나타나거나 영향을 주는 현상이 일어나진 않았으나, 일본의 경우 이 시대를 기점으로 일본만의 막부 체제가 성립하는 시작이 되었다.[4] 모치히토는 친왕 칭호조차 받지 못해서 모치히토왕, 즉 조선시대식으로 말하자면 대군도 아닌 군호만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모치히토가 타이라 가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모치히토에게만 친왕 칭호를 내려주지 않아서인 것도 있다.[5] 겐페이 전쟁을 길게 보는 측에서는 이때부터를 원-평 양씨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6] 현 일장기의 전신으로, 조정에서 당 무사단을 관군(官軍)으로 인정했음을 알렸다.[7] 여자 쇼군, 비구니(남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죽은 후 비구니가 되었다.) 쇼군 등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여걸이었다.[8]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은혜는 산과 바다와 같다. 조정을 토벌하라. 떠날 자는 떠나라."라는 발언이 유명하다.[9] 섭가 출신 쇼군은 섭가장군(셋케쇼군), 황족 출신 쇼군은 궁장군(미야쇼군)으로도 불린다.[10] 막부 체제 자체가 군권을 지닌 쇼군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천황을 뒷방에 앉혀버리는 바람에 성립했는데, 천황이 책봉을 받아 전권을 위임받게 되면 막부는 동 시기 고려의 무신정권마냥 괴뢰정권으로 전락하게 된다. 거기다 쇼군의 섭정에 불과한 호조씨는 더더욱 권력을 유지할 명분이 없어져버린다.[11]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산적이나 도적들(...).[12] 아마브릴 2화에서도 주인공인 카니에 세야가 이걸 "좋은 파벌 만들자, 요리토모 막부" 라고 외우는 엑스트라를 보고선 그게 아니라고 츳코미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