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카와치 겐지 [ruby(河内,ruby=かわち)][ruby(源氏,ruby=げん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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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f2170> 본성 | 미나모토노 아손 (源朝臣) |
본가 | 세이와 겐지 |
시조 | 미나모토노 요리노부 |
분류 | 황별 (皇別)[1] |
분가 | 아시카가 (무로마치 막부) 도쿠가와 (에도 막부) |
1. 개요
미나모토 일족 중 세이와 겐지의 분가로, 카와치국을 근거지로 삼았던 가문이다.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했으며, 일본사를 통틀어 도쿠가와 가문과 함께 가장 유명한 무사 가문이었다.
전성기에는 무가의 동량(武家の棟梁)이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2. 역사
2.1. 초창기
시조는 미나모토노 요리노부였다.[2] 요리노부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무츠의 후슈 대호족 아베씨와 관군이 싸운 전9년의 역(前九年の役)에서 활약한 전쟁 영웅이었다. 요리요시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도 아버지와 함께 전9년의 역에 참전했으며, 이후 데와의 후슈 대호족 기요하라씨의 내분으로부터 시작된 후3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는 간토(관동)의 무사들을 휘하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3]2.2. 헤이지의 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이세 헤이시의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패배하고 이후 가신이었던 오사다 타다무네(長田忠致), 카게무네(影致) 부자에게 배신을 당해 살해되었다. 장남 요시히라와 차남 토모나가를 제외한 그의 아들들은 요시토모의 아내 토키와 고젠이 키요모리의 첩이 되는 수모를 겪어가면서까지 구명을 요구했기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키요모리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헤이지의 난의 여파로 헤이케가 절대 권력을 구축한 것에 비해 겐지 세력은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20년이 지나서야 요시토모의 실질적인 장남[4]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반(反) 헤이케 세력이 결성되었다.
2.3. 겐페이 전쟁
키요모리가 죽이지 않은 요시토모의 아들들은 오랜 기간, 헤이케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윽고 요시토모의 3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6남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막내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함께 거병하여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었다.1180년부터 1185년까지 5년의 전쟁 끝에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의 패배가 확정되었고 헤이케를 외척으로 둔 안토쿠 천황도 어머니와 함께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렇게 겐지의 승리와 헤이케의 몰락으로 인해, 헤이안 시대가 종말을 맞이했다.
2.4. 가마쿠라 막부
헤이케를 상대로 승리한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를 거점으로 무가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했다.막부의 창건 과정에서 친척인 기소 요시나카와 분쟁이 있었고, 요시츠네를 포함한 동생들도 숙청했다. 가문 내의 분쟁은 요리토모의 아들 대까지 이어져서 결국 제3대 쇼군인 사네토모가 형이자 제2대 쇼군이었던 요리이에의 아들 구교(公暁)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가 끊김과 동시에 카와치 겐지 본가는 소멸되었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은 요리토모의 처가인 헤이시 계열의 호조 가문이 장악하게 되었고, 쇼군 직에는 섭관가와 황실 출신의 인사가 허수아비로 세워졌다.
하지만 카와치 겐지가 쌓은 명성과 영향력은 무사들의 관념에 오랫동안 남았다. 카와치 겐지의 분가인 아시카가씨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 막부와 호조 가문을 무너뜨리고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세번째 막부인 에도 막부를 창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카와치 겐지의 분가인 닛타씨의 후예임을 자칭했다.
3. 계보
4. 관련 문서
[1] 황족에서 갈라진 씨족을 뜻한다.[2] 세이와 겐지에 속한 미나모토노 미츠나가의 아들이었다.[3] 이 일은 훗날 요시이에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게 될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4] 3남이지만 어머니가 본처였기 때문에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