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6 09:44:24

아시카가 다카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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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정이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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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파일:attachment/아시카가 다카우지/다카우지.jpg
초명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
출생 1305년 8월 18일
사망 1358년 6월 7일 (향년 52세)
재임기간 초대 정이대장군
1338년 9월 24일 ~ 1358년 6월 7일
형제 아시카가 다다요시(동생)
서명
파일:아시카가 다카우지 서명.svg
1. 개요2. 세계(世系)3. 생애4. 평가5. 대중 문화6. 여담

1. 개요

일본 가마쿠라 시대 말기, 남북조 시대의 무장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명은 '마타타로'(又太郞)였고, 본명은 '다카우지'(氏)였다. '다카우지'(氏)는 개명한 것으로 그의 두 이름 모두 편휘[1]를 받아 지어진 이름이었다.

첫 이름인 '高氏'는 가마쿠라 막부집권(싯켄)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로부터 편휘를 받아 지은 이름이었고, 바꾼 이름인 '尊氏'는 협력 관계였으나 나중에 적대 관계로 돌변한 고다이고 덴노의 휘인 '다카하루'(尊治)에서 편휘를 받았다.

2. 세계(世系)

시조세이와 덴노의 손자고, 사다즈미노미코([ruby(貞,ruby=さだ)][ruby(純,ruby=ずみ)][ruby(親王,ruby=ノみこ)])의 아들인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 미나모토노 츠네모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經,ruby=つね)][ruby(基,ruby=もと)])로, 시조부터 14세손이고, 닛타 요시사다의 7종제(七從弟, 16촌 아우)다.
미나모토노 츠네모토(源經基) → 미쓰나카(滿仲) → 요리노부(賴信) → 요리요시(賴義) → 요시이에(義家) → 요시쿠니(義國) → 요시야스(義康) → 아시카가(足利) 요시카네(義兼)[2] → 요시우지(義氏) → 야스우지(泰氏) → 요리우지(賴氏) → 이에토키(家時) → 사다우지(貞氏) → 다카우지(尊氏)

다카우지의 집안은 카와치 겐지 계열의 명문 무가였다. 하치만타로(八幡太郞)로 불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요시쿠니(義國)는 시모츠케국[3] 아시카가(足利)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차남 요시야스(義康)가 우지를 버리고 아시카가(足利)라는 묘지로 갈아버리면서 이 집안이 비롯하였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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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일반적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막부 창건자들은 대체로 냉정하고 비정한 정치가형 인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요리토모는 친동생이자 겐페이 합전의 영웅인 요시쓰네를 토벌한 일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압박하고 끝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멸문시킨 일로 인한 영향이 큰데 그럼에도 이들은 당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한 유능한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 특히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시대의 통치 안정성과 그의 인내와 실용주의적 정치술은 현대에 매우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장 낮은 대중적 평가를 받고 있는 막부 창건자다. 특히 에도 시대 이후 유학의 유입,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 덴노 중심주의 사관이 확립되면서, 다카우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덴노에 대한 도전과 배반의 이미지 때문인 것이 가장 큰데 유교적 근왕(尊王) 사상 아래에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역적으로 간주되었고, 메이지 이후의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덴노를 서양식 절대군주에 준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신격화했기 때문에, 그에 맞선 다카우지는 전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위험한 역사적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었기 때문.

이런 부정적 인식은 구체적인 행동으로도 이어졌는데, 에도 시대인 1863년에는 교토에서 다카우지, 요시아키라, 요시미쓰 세 쇼군의 목상이 참수당하고 효수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남북조시대를 직접 겪은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는 물론이고 요시미쓰도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國王) 칭호를 부여받고, 덴노 앞에서 사실상 외교적으론 군주로 군림한 전력이 있어, 같은 ‘역적’ 범주로 취급된 것. 창립 3대가 역적으로 취급받았으니, 당연히 그 창건자인 다카우지의 취급이 좋았을리가 없다. 보신전쟁 당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에도성을 무혈 개성한 결정 역시, 다카우지 같은 역적으로 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는 다카우지가 후대 일본 정치문화 속에서 얼마나 뿌리 깊은 부정적 상징으로 기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지 유신 후 남북조정윤론에 따른 남조 정통론이 대세가 된 이후인 1934년에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당시 상공대신[4]이었던 나카지마 구마키치가 어느 잡지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인간적으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고 기고했다가 귀족원화족들에게 역적 소리까지 들으며, 상공대신을 사직하기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한 평가는 일정 부분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전후 민주주의 체제에서 덴노 중심주의 사관이 약화되면서, 다카우지를 단순한 역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점차 힘을 잃었다. 특히 20세기 중반, 역사학계에서는 “어떻게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역적으로 규정되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었으며, 이후 관련 연구들이 이루어지며 다카우지의 정치적 선택과 정권 운영 방식에 대한 보다 중립적이고 구조적인 평가가 시도되었다.

또한 대중문화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는데,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역사소설 《태평기》를 통해 다카우지의 이미지가 일정 부분 개선되었고,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로 재구성되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1991년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로 재해석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주인공이 된 NHK 대하드라마까지 나오기도 했으니 상전벽해가 된 셈.

그러나 그 일대기를 살펴보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다른 막부 창건자들에 비해, 다카우지는 정치적 기량이나 부하 관리 능력 면에서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그는 군사적 재능도 일정 수준 갖추고 있었고,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규슈로 퇴각하던 중에도 지방 무사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외교력과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을 때에도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아낌없는 포상을 내렸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은밀한 정치 공작도 주저하지 않는 등, 리더로서의 기민함과 자질은 평균 이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질이 전국적 혼란을 수습하고 완전한 체제를 구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전에는 남북조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손자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까지도 남북조 통일이 지연되며 내전이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정치적 완결성이 결여된 역사적 결말, 그리고 이에야스나 요리토모처럼 권력 구조를 정비하고 장기 체제를 마련한 인물들과의 대비는, 다카우지가 막부 창건자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낮은 인기를 얻는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다만 요리토모나 이에야스보다 개성적인 점을 들면 풍류인 및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이 둘보다 뛰어났다. 무사임에도 시짓기나 그림 그리기 등의 예술활동을 좋아했다고 하며,《쓰구바슈》(菟玖波集)라는 남북조시대의 렌가(連歌)집에 60여수의 렌가를 남겼고,《신센자이와카슈》(新千載和歌集)라는 와카집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림 분야에서는 지장보살을 직접 그리는 등 그가 그린 그림도 전해지고 있다.

5. 대중 문화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작품은 1991년 NHK 대하드라마였던 <태평기>[5]였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소설《사본태평기》가 원작으로, 주연은 사나다 히로유키였다. 이 작품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까지도 남북조시대 말기~무로마치 막부 초기를 다룬 유일한 작품이다. 보통 남북조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다카우지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다카우지보다는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닛타 요시사다의 인기가 많은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악역으로 그려진다.

코에이의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한다. 마사시게 및 요시사다와 함께 등장하는데 라이벌들에 비해 능력치도 균형이 잡혀 있다. 정치 82, 전투 76, 지모 85에 특기도 농업, 외교, 등용, 기동, 공성 특기를 가지고 있다. 전투치는 요시사다를 능가할 정도지만 등장시기가 늦어서 보기가 어려운 편이다. 2시나리오가 1271년 시작인데 다카우지는 1320년에야 등장한다. 예술가로서 제법 소질이 있었던 인물 치고는 문화 특기가 없다.
파일:足利尊氏.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열풍전> 플레이스테이션판에서는 '제왕(諸王)의 싸움'이라는 일종의 영웅 집결 시나리오[6] 플레이 가능한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얼굴은 <징기스칸 4>의 얼굴이다. 여기서 오프닝 이벤트가 제법 개그인데, 손자인 요시미쓰와 함께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거성으로 쳐들어가서 "내가 세운 아시카가 막부가 요 모양 요 꼴로 돌아가는 걸 못 보겠다! 내가 대신 막부를 다스린다!"며 요시아키의 거성을 탈취해 버린다. 요시아키는 조상님 얼굴을 보더니 그냥 넘겨준다.[7] 맨 위의 개성 넘치는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징기스칸 4>의 얼굴과는 달리 <람세기>에서는 아래쪽의 초상화를 모티브로 한 듯한 비교적 평범한 얼굴로 등장한다.

이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인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도 일종의 고대 무장 개념의 추가 장수로 등장한다. <징기스칸>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의 얼굴은 모두 저 맨 위 초상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차나왕 요시츠네》의 작가였던 사와다 요시후미의 작품인《산적왕》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어쩐지 채치수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할 중요한 5명의 인물이 각각 몸에 별 모양의 점을 가지고 있는데, 막부 타도 후에는 이 별이 몸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다카우지의 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이를 본 다카우지는 "내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인가?"라며 홀로 생각한다. 호조씨 정권 타도의 시점에서 작품이 끝나 다카우지의 이후 행보는 나오지 않는다.

마인탐정 네우로》와《암살교실》의 작가였던 마츠이 유세이의 신작인《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에서는 어마어마한 포스의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다카우지에게 멸망당한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후예였던 호조 도키유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다카우지의 다면적이고 기이한 매력이 잘 드러난다. 원작의 작가 코멘트에는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앞으로의 행동까지 포함하여 '창작물 속 다카우지 중에서 제일 역사대로의 모습'이라는 의견도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그건 그것대로 실제 역사가 이상한데"라는 말이 이어져 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문서 참고.

MUCDICH》의 로블록스 공포 게임인《The Mimic》에서 다카우지 아시카가로 등장한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사무라이로, 과거 수많은 요괴들과 싸우던 시절 마사시게 쿠스노키와 함께 흉상의 괴수들과 싸운 전우 관계라는 것을 직접 밝혔다. 질투의 책 챕터 4에서 주인공인 우치우미 이사무의 앞에 처음 등장하고, 백염의 힘을 주려 했지만 엔즈카이에 의해 목이 꺾이게 된다. 그렇게 죽은줄 알았지만, 영혼은 죽을 수 없다며 이사무의 조력자/동반자가 되어준다. 다카우지 아시카가 문서 참고.

6. 여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0px-Ashikaga_Takauji.jpg

흔히 곱슬머리장발 헤어 스타일인 오른쪽 초상화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것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것이 다카우지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고노 모로나오(高師直, ?~1351)의 초상화거나 아니면 확인할 수 없는 무사의 초상화로 간주하고 있다. 다카우지의 초상으로 공인받은 상단의 초상화는 히로시마현 오노미치 시에 있는 절인 죠도지(浄土寺)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파일:attachment/takauzi3.jpg

교토의 진고지(神護寺)라는 사찰에 소장되어 있는 일명 '진고지 3상(象)' 가운데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것으로 전해지는 이 초상화 역시 사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고, 이 설은 현재 일본 학계에서 차츰 힘을 얻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죠도지 소장 초상화와 미묘하게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메이지 유신 이후 패전까지 지속되며 강화된 '황국사관'에서 역적의 대명사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아시카가씨의 후손들은 유신 이후에 상당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8]

[1] 본래 가 여러 글씨면, 모든 글씨를 다 안 쓰는 피휘지만 에서 한 글씨를 이름으로 쓰는 꼼수로, 일본에서 뜻이 바뀌었다.[2] 종형제인 닛타 요시카네와 이름이 같다. 왜 아시카가 요시카네와 닛타 요시카게가 종형제냐면, 요시쿠니의 장남 요시시게(義重)는 코즈케국 닛타노코오리(新田郡)에 정착하고 요시시게의 아들 요시카네부터는 확실히 우지를 버리고 닛타(新田)라는 묘지로 갈았기 때문이다. 아시카가씨와 닛타씨는 카와치 겐지라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 집안이다.[3] 오늘날의 도치기현으로 영화 <초속 5센티미터>의 첫 에피소드에서 이와부네역의 대합실에 아시카가 테마 여행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4] 현 경제산업대신[5] 메가드라이브, PC엔진으로만의 호화 게임으로도 등장했다.[6] 단순한 군웅 집결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센고쿠시대 다이묘들뿐만 아니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삼국지연의》의 군주들과 칭기즈 칸, 남송의 마지막 황제, 후한의 광무제에다가 심지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까지 일본 통일을 노린다는 설정의 막 나가는 시나리오다. 거기다가 이 시나리오에서는 잔 다르크까지 나온다. 그냥 코에이 영웅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이 시나리오는 플레이스테이션, PSP 파워업키트, NDS판에서만 플레이가 가능하다.[7] 이 시나리오는 <노부나가의 야망 람세기>의 PS판에서도 나오는데 손자 요시미쓰와 잇큐를 만나는 것과 다짜고짜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거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똑같지만 조상님들 얼굴을 보더니 데꿀멍했던 전작과는 달리 여기서는 요시아키가 미친놈들 취급을 하면서 부하들을 시켜 조상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버린다.보통은 이게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 세력은 다른 거성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게 된다.[8] 다카우지의 차남인 모토우지에게서 뻗어 나온 간토 아시카가씨(키츠레카와로 성을 바꾸었다가 유신 이후 아시카가씨로 복귀했다.)는 다이묘 가문이어서 자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당시의 당주는 가쿠슈인 같은 상류층의 학교에서도 역사 수업 시간만 되면 괴롭힘을 받았다는 웃지 못할 증언을 남겼다.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히데의 출신 지류인 히라시마 가문은 아시카가 쇼군가의 직계 단절 이후 혈통상으로는 가장 적통에 가까웠지만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화족은 커녕 아예 사족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평민으로 취급당하는 굴욕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