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22:01:02

닛타 요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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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720년 11월 27일
724년
737년 8월 25일
(화력 서위일 불명)
요로 4년 10월 23일
진키 원년
덴표 9년 7월 25일
737년 11월 3일
749년 5월 4일
760년 9월 20일
762년 2월 28일
덴표 9년 10월 7일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덴표호지 4년 8월 7일
덴표호지 6년 2월 1일
770년 10월 23일
785년 6월 14일
785년 10월 31일
788년 6월 21일
호키 원년 10월 1일
엔랴쿠 4년 5월 3일
엔랴쿠 4년 9월 24일
엔랴쿠 7년 5월 13일
791년 1월
791년 1월
806년 6월
806년 6월
엔랴쿠 9년 12월
엔랴쿠 9년 12월
다이도 원년 6월
다이도 원년 6월
819년 1월 18일
823년 6월 17일
823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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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닌 9년 12월 19일
고닌 14년 5월 6일
고닌 14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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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년
8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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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초 10년
덴초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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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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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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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 19년 1월
조간 19년 1월
884년 3월 23일
884년 3월 23일
891년 2월 24일
895년 9월 20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교 8년 2월 23일
간표 3년 1월 13일
간표 7년 8월 28일
897년 7월 19일
898년 1월 3일
900년 4월 15일
906년 6월 24일
간표 9년 6월 16일
간표 9년 12월 7일
쇼타이 3년 3월 14일
엔기 6년 5월 30일
907년
909년 4월 27일
913년 4월 27일
937년 11월
엔기 7년
엔기 9년 4월 5일
엔기 13년 3월 18일
조헤이 7년 10월
949년 9월 13일
949년 9월 13일
962년 11월 17일
967년
덴랴쿠 3년 8월 18일
덴랴쿠 3년 8월 18일
오와 2년 10월 18일
고호 4년
969년 12월 2일
970년 6월 26일
972년 12월 13일
978년 1월 1일
안나 2년 10월 20일
덴로쿠 원년 5월 20일
덴로쿠 3년 11월 5일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987년 3월
989년 8월 23일
992년 7월 18일
993년 6월 12일
간나 3년 2월
에이엔 3년 7월 20일
쇼랴쿠 3년 6월 16일
쇼랴쿠 4년 5월 20일
993년 8월 19일
995년 6월 25일
995년 6월 25일
1025년 9월 23일
쇼랴쿠 4년 7월 29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조토쿠 원년 5월 25일
만주 2년 8월 29일
1029년 11월 25일
1073년 6월
1073년 6월
1075년 11월 16일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엔큐 5년 5월
엔큐 5년 5월
조호 2년 10월 6일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1094년
1107년
1146년 11월 9일
(화력 서위일 불명)
가호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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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년 11월 9일
1166년 9월 8일
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에이만 2년 8월 12일
닌난 3년 6월
닌난 3년 6월
1177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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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년
1242년
지쇼 원년 8월 3일
겐큐 원년 4월
조큐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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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7월
1632년 3월 30일
1651년 7월 4일
겐나 3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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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9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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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6월 17일
1709년 3월 4일
1709년 10월 9일
1712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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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1월 23일
호에이 6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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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6년 7월 1일
175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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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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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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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8월 29일
1880년 7월 20일
1882년 8월 7일
1885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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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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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8일
1899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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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월 16일
1901년 5월 16일
1903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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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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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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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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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50px-新田義貞公肖像.jpg
파일:닛타 가문 문장.svg
닛타 가문의 가몬인 닛타 인양문(新田一つ引き).[1]
1. 개요2. 세계(世系)3. 생애
3.1. 거병 이전3.2. 거병 이후3.3. 겐무 신정3.4. 호쿠리쿠(북륙)에서의 말년과 최후
4. 인물
4.1. 평가4.2. 고토노 나이시4.3. 이나무라가사키의 타치
5. 동상 · 유품 · 비6. 자손7. 대중매체에서

1. 개요

[ruby(新,ruby=にっ)][ruby(田,ruby=た)][ruby(義,ruby=よし)][ruby(貞,ruby=さだ)]
1301년[2] ~ 1338년 8월 17일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고케닌이며, 남북조시대의 무장으로 실명은 '미나모토 요시사다'([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義,ruby=よし)][ruby(貞,ruby=さだ)])였다. 카와치 겐지의 일문으로 고즈케국에 자리잡은 닛타 가문 종가의 제8대 당주였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82년 8월 7일 정1위(正一位)로 추증되었다. 에도 막부의 쇼군가인 도쿠가와씨가 닛타씨의 지족(支族)인 세라다씨에서 비롯되었다고 족보를 위조했다.

파일:external/m1.daumcdn.net/?fname=http%3A%2F%2Fcfile26.uf.tistory.com%2Fimage%2F117CF03951079CC708A4B8?.jpg

2. 세계(世系)

시조세이와 덴노의 손자이고, 사다즈미노미코([ruby(貞,ruby=さだ)][ruby(純,ruby=ずみ)][ruby(親王,ruby=ノみこ)])의 아들이었던 진수부장군 미나모토노 쓰네모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經,ruby=つね)][ruby(基,ruby=もと)])로 그의 14세손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7종형(16촌)이었다.
미나모토노 츠네모토 → 미츠나카(滿仲) → 요리노부(賴信) → 요리요시(賴義) → 요시이에(義家) → 요시쿠니(義國) → 요시시게(義重) → 닛타(新田) 요시카네(義兼)[3] → 요시후사(義房) → 마사요시(政義) → 마사우지(政氏) → 모토우지(基氏) → 토모우지(朝氏) → 요시사다(義貞)

3. 생애

3.1. 거병 이전

닛타 가문은 무가의 명문이었던 카와치 겐지의 제3대 당주로 '하치만타로'라 불리며, 도고쿠(동국) 무사들의 숭앙을 받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4남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서장자였던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를 시조로 하며, 닛타 장원[4]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닛타 요시사다 때는 닛타 가문의 본가 영지가 닛타 장원 60개 향(鄕) 중 겨우 10여개 향 이내에 지나지 않았고, 요시사다 자신도 이렇다 할 관위나 관직도 없이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분포 2년(1318년) 음력 10월 요시사다의 토지 문서에서 그의 토지에 대한 권한을 나타내는 매주(買主)의 이름이 사다요시(貞義)로 잘못 표기되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의 닛타 본가의 지위가 낮았음을 알려주고 있다.[5]

요시사다의 장자인 닛타 요시아키를 낳은 생모의 출자를 안도 가문으로 적은 사료가 있는데, 싯켄 호조 가문의 유력한 가신이었던 안도 세이슈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몰락한 무사 가문이었던 닛타씨 본가가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이었던 안도 가문의 딸을 맞이한 것이 된다.[6] 당시 호조 가문은 시모쓰키 소동을 통해 고즈케국의 슈고였던 아다치 가문을 멸망시키고, 고즈케 지역에 호조씨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는데, 닛타 요시사다가 호조 가문의 가신과 인척이 된 것은 권력 밖으로 밀려 쇠퇴해가는 닛타 본가를 다시 세우려는 아버지 닛타 도모우지와 함께 요시사다의 눈물겨운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7]

겐코 원년(1331년)에 일어난 겐코의 변[8]때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에 속했고, 카와치국에서 거병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치하야 성 전투에 참전했지만 곧 병을 핑계삼아 무단으로 자신의 영지인 닛타 장원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닛타 장원에 대한 막부측의 과도한 군비 요구와 강압적인 집행이었다고 하며, 이때의 일이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사료된다. 남조측의 시각에서 남북조시대를 그린 고전인《태평기》와 아시카가씨측의 사서인《매송론》에서는 병을 핑계로 닛타 장원에 숨어 있었던 요시사다가 닛타 장원에 조사하러 온 막부의 징세사인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9]와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포박해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는 유폐시키고,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살해한 후, 거병을 결의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 겐코의 변때 막부군에 속해 출병하던 중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10]으로부터 호조씨를 타도하라는 밀명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3.2. 거병 이후

겐코 3년/쇼코 2년(1333년) 음력 5월 8일 고다이고 덴노의 부름에 응해 이쿠시나 신사에서 일가 친지를 모은 뒤 가마쿠라 막부 토벌을 기치로 거병했는데 처음 모은 병력은 겨우 150기에 불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도네 강을 건너 일가 친지가 있는 에치고 방면으로 진군할 예정이었지만, 동생인 와키야 요시스케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마쿠라로의 진격을 결의했다고 한다. 에치고의 일가 친지도 가세하여 닛타군은 도산도의 서쪽으로 진격해 고즈케 슈고의 관아를 장악했고, 도네 강을 건널 무렵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였던 센주오[11]군과 합류했다. 호조 가문과는 인척이었고, 닛타 가문과는 먼 친척관계였던 유력 고케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가 가세함으로써[12] 주변 고케닌도 힘을 모아 닛타군의 규모는 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의 대군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더욱이 닛타군은 가마쿠라 가도를 따라 이루마 강을 건너 고테사시하라[13]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사쿠라다 사다쿠니 및 가네자와 사다마사가 이끄는 막부군과 격돌했다. 이 고테사시하라 전투에서 막부군이 승리했지만, 막부측에 불만을 품은 가와고에 가문(河越氏) 등 무사시국의 고케닌들이 닛타군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막부군은 열세에 놓여 부바이가와라[14]까지 퇴각했다. 막부군은 다시 부바이가와라에 포진한 뒤 닛타군과의 결전에 돌입했다. 이 부바이가와라 전투에서 닛타군은 대패했지만, 다음날 지원군으로 가세한 오타와 요시카쓰군과 함께 막부군을 격파했다. 이는 아마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로쿠하라 단다이(탐제) 제압 소식을 들은 막부군의 증원대 내부에 배신과 분열 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날 세키토[15] 전투에서 닛타군은 막부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승리했다.
후지자와[16]까지 진출한 닛타 요시사다는 병력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가마쿠라로의 총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고쿠라쿠지(極樂寺) 방면군이 주춤하자 요시사다는 간조를 이용해[17] 이나무라가사키로 상륙한 뒤, 막부군의 배후를 파고 들어 가마쿠라로 난입했고, 도쇼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 중 호조 다카토키의 일가는 도쇼지에서 집단자결했고, 다카토키의 적남이었던 호조 구니토키는 가마쿠라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던 중 그의 외삼촌이었던 고다이인 무네시게에게 배반당해 닛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거병한 지 겨우 보름 만에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으나 가마쿠라 함락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인 아시카가 센주오의 보좌를 위해 파견되었던 호소카와 가즈우지 및 호소카와 아키우지와 마찰을 빚어 갈 곳을 잃고, 교토로 상경했다.

3.3. 겐무 신정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에 임명되어, 교토 경비 관아의 수장이 되었다.
1335년 가마쿠라에 있었던 호조 정권의 잔당들이 호조 도키유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나카센다이의 난)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덴노의 칙명도 없이 출병하여 이 반란을 진압[18]하고, 그대로 가마쿠라에 눌러앉아 멋대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을 내렸다. 당연히 고다이고 덴노는 다카우지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무가 정권의 수립을 도모하고 있었던 다카우지는 이를 무시했다.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요시사다 토벌령을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것이 많았던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렸다.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우며 교토에서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19]데고시가와라 전투[20]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21]와 고노 모로야스군을 격파했다.

다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조정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해 12월 요시사다는 가마쿠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다카우지에게 하코네 ·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참패해 교토로 도주했다.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 덴노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오슈(무츠국)에 파견된 구게(公家, 공가) 귀족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및 교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연합하여 상경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군을 교토에서 축출했고, 또다시 상경하려는 아시카가군을 셋쓰국도요시마가와라[22]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 공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정4위하 좌근위중장에 위계되었다. 계속해서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격했지만, 하리마국시로하타 성 전투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에게 저지되었다. 이후 다카우지가 규슈를 평정한 뒤, 바닷길을 통해 교토로 진격했고, 그동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로하타 성 공격에 시간을 허비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싸운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 곶에 진을 치고 맞섰으나 아시카가 수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결국 참패한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일족과 함께 할복했다. 한편 요시사다는 니시노미야에서 교토로 도주했다.

3.4. 호쿠리쿠(북륙)에서의 말년과 최후

미나토가와 강 전투의 참패 이후 히에이산으로 도망친 남조군은 아시카가의 군세로부터 교토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지만, 이마저도 저지되었다. 고다이고 덴노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침으로써 히에이산에서 하산하려고 했지만, 요시사다의 가신이었던 호리구치 사다미츠가 고다이고 덴노에게
“우리 닛타 집안의 충의를 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우리 일족 전원의 목을 베고 가 주소서.”
라며 이를 저지했다. 이에 고다이고 덴노는 츠네요시 친왕에게 양위하고, 그와 다카요시 친왕(尊良親王)에게 지휘권을 위임한 후 하산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북륙)로 향해 에치젠국의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했다. 하지만, 곧 고노 모로야스[23]와 시바 다카츠네가 이끄는 아시카가군에 포위되었다. 닛타 요시사다와 와키야 요시스케 형제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소마야마 산성 성주였던 우리우 다모쓰와 함께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친왕과 닛타 요시아키는 자결했으며, 츠네요시 친왕은 추포되어 교토로 호송되었다.(가나가사키 성 전투)

파일:external/m1.daumcdn.net/?fname=http%3A%2F%2Fcfile23.uf.tistory.com%2Fimage%2F030B0B345109D266116A8F?.jpg

동년 여름이 되자, 닛타 요시사다는 세력을 회복한 후, 시바 다카츠네와 벌인 사바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치젠의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 엔겐 3년/겐무 5년(1338년) 윤 7월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선 헤이센지의 승병들이 농성하는 후지시마 성을 우익군으로 공격하게 하고, 구로마루 성에서 원군으로 가세하기 위해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불행하게도 닛타 요시사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24] 닛타 요시사다의 수급은 교토로 보내졌고, 그가 가마쿠라 막부 공격 때 노획한 세이와 겐지의 가보인 히게키리(髭切)[25]도 아시카가 가문의 손에 넘어 왔다.
이에 더하여 에도 시대1656년 이 전장터에서 경작하던 가헤(嘉兵衛)라는 농민이 투구를 발견하여 후쿠이 번주로 있었던 마쓰다이라 미츠미치에게 헌상했다. 투구의 장식으로 보아 꽤 높은 신분의 무장이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되어 감정에 들어갔고, 그 결과 닛타 요시사다의 투구로 여겨져 마쓰다이라 가문이 보관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닛타 요시사다를 모신 후지시마 신사가 창건될 때,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이 신사에 헌납했다.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관중이다.

4. 인물

4.1. 평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맞수로 불리기는 하지만 사실 무장으로서의 능력이 과연 다카우지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 당대의 무장들에 비하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서 논란이 있다.

동시대에 남조를 주도한 키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26]가 쓴 《신황정통기》에서는
“고즈케국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라는 자가 있다. 고 가문(高氏)[27] 일가다.”
라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격하시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 같은 기사는《마스카가미》(增鏡)에도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닛타 가문의 조상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3남 요시쿠니의 장남이었던 닛타 요시시게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 창설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막부 성립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계통을 묶어 이들 가문을 이끌 기둥은 닛타 요시시게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네로 봤고, 닛타 가문 뿐만 아니라 겐지(源氏) 계보를 가진 무사들에게도 관행처럼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닛타 일가 중에서도 아시카가 가문을 무가의 도료(당주)로 인식한 자가 있었고, 야마나 가문 등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했을 때, 아시카가 센주오(훗날 제2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휘권 안에 편입되어 아시카가 측에 조력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집필된 군기물인《태평기》에서는 문무와 지략을 겸비한 무장으로 그려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비해 닛타 요시사다는 작자의 공감대를 사지 못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우유부단한 무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일례로 다카우지가 셋쓰국의 도요시마가와라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에게 패배해 규슈로 도주했을 때,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추격에 소홀했고, 그 틈에 다카우지는 세력을 수습해 다시 거병하여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병력을 격파하고 교토를 탈환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황국사관 아래에서 '역적'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비해 고다이고 덴노를 따른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뒤를 잇는 영웅으로 평가되어 강담의 소재로 이야기되었지만 패전 이후에는 일개 간토의 무장에 불과한 자가 능력 이상의 대임을 맡은 평범한 무장으로 보기 시작했고, 전략가로도 우둔하다는 평가가 나왔다.[28] 다만 이는《태평기》의 묘사만의 평가로 그다지 신빙성이 낮으며, 다카우지와의 인망의 차이도 가문의 격에서 온 것일 뿐, 단기간에 가마쿠라를 함락시킨 점과 압도적인 실력차가 있었던 다카우지를 잠시 동안이나마 격파했던 점 등을 거론하여 무장의 자질을 재평가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및 무로마치 막부측의 사료인《매송론》에서는 하코네 전투에서 패배한 닛타군의 병사가 덴류 강의 다리를 끊으려 할 때, 요시사다가
“다리를 끊더라도 다시 놓으면 된다. 닛타군이 다리를 끊고 허둥대며 도주한다면 이는 후대까지 수치로 남는다.”
라고 말하며 현지 주민에게 다리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고 병력을 이끌었는데, 그후 추격해온 아시카가군의 장병이 그 발언을 듣고
“무가에서 태어난 자는 누구라도 요시사다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라며 상찬했다고 서술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입장에서도 닛타 요시사다가 마냥 과대평가된 고만고만한 무장 1 정도로 취급된 건 아니었다는 얘기다.
군마의 지역 가루타인 조모 가루타에서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해 지역민에게는 친숙한 무장이다.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하는 부분은 이로하 중 레(れ) 부분이며,
“역사(레키시)에 명망높은 닛타 요시사다”
로 쓰여져 있다.

4.2. 고토노 나이시

《태평기》에서는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추토를 명령받은 닛타 요시사다가 고다이고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궁녀인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애석하게 여겨 추토의 시기를 놓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고토노 나이시란 궁중의 역직 중 하나로 고다이고 덴노를 모신 이치조 츠네타다의 딸을 가리킨다. 연대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실재 존재 유무가 의문시되어 가공의 인물로 사료된다.

《태평기》에서는 덴노의 윤허를 받아 요시사다의 아내가 된 나이시를 요시사다가 애석하게 여겨[29]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 시기를 놓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때문에 황국사관에서는 충신 닛타 요시사다의 아내이면서, 같은 충신인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으로 간주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이시는 요시사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와호에 투신했다고 한다.[30] 혹은 교토 또는 가타타[31]에서 요시사다의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그녀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도 다소 전해져오고 있다.

4.3. 이나무라가사키의 타치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할 때, 호조 사다나오가 수비하는 고쿠라쿠지 방면에서 결착이 나지 않고, 더욱이 해안은 호조 측 선단으로 막혀있었다. 이에 닛타 요시사다는 이나무라가사키에서 황금으로 된 보검(타치)을 바다에 던져 용왕에게 기원했고, 그러자 바닷가에 썰물이 나타나 그곳으로 강행돌파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라는 기술이《태평기》 등에서 나온다. 문부성에서는 이 일을 창가로 만들어 교과서에 개재했다.
《태평기》는 그날이 겐코 3년(1333년) 음력 5월 21일이라고 했지만, 1915년 오가와 기요히코가 그날을 전후하여 이나무라가사키의 물때를 계산한 결과 음력 5월 21일에는 간조가 없었고, 실제 막부군은 닛타군이 이나무라가사키로 도해(渡海)할 수 없음을 알고 방심한 결과, 닛타 요시사다가 바닷물이 빠지고 뭐고에 상관없이 그냥 이나무라가사키를 건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1993년 이시이 스스무가 오가와 기요히코의 산출 기록을 오래된 기록과 대조해, 닛타군의 이나무라가사키로의 도해 및 가마쿠라 공격 시기를 실제로 썰물이 발생했던 음력 5월 18일 오후라 보고,《태평기》의 날짜가 잘못 표기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32]

5. 동상 · 유품 · 비

  • 닛타 요시사다의 동상은 군마현 오타시 세라다정의 도모 역사자료관 앞과 도쿄도 후추시 부바이가와라역 앞 로터리 앞에 세워져 있다.
  • 유품으로는 앞서 서술한 대로 투구가 있으며,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미츠미치가 세운 비가 있다. 비가 세워진 곳은 도묘지나와테 닛타 요시사다 전몰 전설지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군마현 오타시 닛타소리마치정에 있는 사찰인 소리마치야쿠시(反町薬師)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을 결의한 곳인데, '소리마치 관터'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이 되었다.
  • 후쿠이현 후쿠이시에는 닛타즈카(新田塚: 닛타 무덤)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6. 자손

무로마치 시대에 닛타 가문은 조정의 적 혹은 역적의 무리로 인식되어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닛타 요시사다의 직계를 살펴보면 오에이 연간(1394년 ~ 1427년)에 요시사다의 손자인 닛타 사다카타가 체포되어, 그의 큰아들 닛타 사다쿠니와 함께 가마쿠라에서 처형되었다. 사다카타의 여러 아들 중 호리에 사다마사는 호리에(堀江)라는 씨명을 사용하여 무사시국의 이나게에서 살아남아 그의 자손은 센고쿠 시대고호조 가문을 섬겼다. 나카무라 사다나가는 나카무라(中村)라는 씨명을 사용하여 무츠국(오슈)에서 살아남아 다테 가문을 섬겼으며, 요시사다의 서가 출신인 후지자와씨(藤沢氏) 등이 현재 남아있다. 이에 더하여 사다카타의 서자인 닛타 무네지카의 가계도 존속해 있다고 한다.
한편, 이와마쓰 미쓰쿠니와 닛타 요시카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이와마쓰 미쓰즈미가 닛타 요시카타의 아들로 이와마쓰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에도 시대에 닛타 가문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던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33] 닛타씨로의 복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와마쓰 가문은 닛타 요시사다를 조정을 위해 '역적'에 맞서 싸운 충신으로 인정했고, 메이지 정부의 판단에 따라 요시사다의 자손으로 인정되어 닛타씨로 복성해 화족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34]
이와마쓰 가문의 가신인 요코세 가문은 센고쿠 시대의 하극상을 통해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나 유라씨(由良氏)로 개성하고, 닛타 가문의 자손임을 강조했다. 요코세 가문도 메이지 유신 이후 닛타씨로 복성했다.
지바 우지타네와 닛타 요시사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지바 미쓰타네의 가계는 지바 가문의 종가로 명맥을 유지했다.

7. 대중매체에서

파일:新田義貞.jpg 파일:新田義貞1.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한다.


[1] 닛타 가문의 시조인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의 남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足利義康)의 후손이었던 아시카가 가문도 비슷한 아시카가 인양문(足利二つ引き)이었지만 그쪽은 3중 가로줄 문장이라서 닛타 가문의 인양문과는 꽤 차이가 난다.[2] 130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3] 종형제인 아시카가 요시카네와 이름이 같다.[4] 현 군마현 오타시 부근[5]아즈마카가미》에 보면,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이복형이자 요시토모의 장남이었던 가마쿠라 아쿠겐타 미나모토노 요시히라의 부인인 쇼주히메(祥寿姫)에게 요리토모가 찝적거려서 우필(右筆) 후시미 히로쓰나(伏見広綱)를 시켜 연애편지를 보냈고, 이를 쇼주히메가 받지 않자 요리토모는 다시 쇼주히메의 아버지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시게(닛타 요시시게)에게 직접 말을 넣었다. 하지만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의 성깔을 잘 알고 있었던 요시시게는 대답을 못하고 모로 로쿠로(師六郎)라는 사람에게 쇼주히메를 재가시켰다. 이에 요리토모가 불쾌하게 여겨 이후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요시시게의 후손, 즉 닛타씨는 두고두고 요리토모의 미움을 사서 찬밥 신세를 전전하게 되었다... 물론 요리토모가 거병한 뒤에 요시시게의 조카나 아들, 손자 등이 요리토모의 거병에 동참한 것과 달리 요시시게 본인은 참진 요청을 무시하고, 형세를 관망하다가 요리토모가 간토 지방을 제압하고 가마쿠라로 들어온 12월에나 가마쿠라로 가서 요리토모를 만났고, 조큐의 난 때도 닛타씨의 총령(당주)이 나오지 않고, 그 대관(대리인)으로 세라다씨(世良田氏)를 보냈으니,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도, 싯켄 호조씨에게도 요시시게의 자손인 닛타씨가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반대로 요시시게의 일족 가운데 일찍부터 요리토모를 도와 참전했던 조카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나 아들 야마나 요시노리(山名義範), 손자 사토미 요시나리(里見義成) 등은 모두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으로 대우받았다.[6] 안도 세이슈의 일가인 안도 시게야스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7] 다만 겐코 2년(1322년) 닛타씨 일가인 이와마쓰 마사쓰네와 오다테 무네우지가 용수 사용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가마쿠라 막부에 판정을 요구했지만 닛타 요시사다의 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8] 1331년에 고다이고 덴노가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었다. 근신(近臣)의 밀고로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고다이고 덴노는 섬으로 유배되었다.[9]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인 기씨(紀氏)쪽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10]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로 무예에 뛰어났으며,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나 부황이 막부 타도를 외치며 거병했을 때 환속하여 부황을 도왔다. 함께 막부를 타도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위험인물로 보아 경계했으나 부황 고다이고 덴노와의 불화[35]로 인해 황위 찬탈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가마쿠라에 유폐되었으며 얼마 안 가 살해되었다. 황족의 대표로써 그 자신이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모리요시 친왕이 덴노가 되었다면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일본의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호사가들로부터 받고 있는 인물이다.[11] 훗날 무로마치 막부의 제2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12] 물론 당시 센주오의 나이는 세 살밖에 안 되었지만, 아시카가 집안의 적장자라는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카가의 적장자가 왔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주변 무사들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13] 현 도코로자와 시[14] 현 후추 시[15] 현 다마 시[16] 현 후지자와 시[17] 여기서 이나무라가사키를 건너기 위해 바다의 용왕에게 황금 보검을 바쳤더니 신기하게도 물이 빠져서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18] 막부 개설은 이 뒤의 일이었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때 다카우지가 칙명도 없이 그냥 출병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이대장군(세이이다이쇼군)의 직함을 내렸다.[19]오카자키시[20]시즈오카시 스루가 구[21]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친동생[22] 현 이케다 시[23]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의 동생이었다.[24] 《태평기》에서는 닛타 요시사다가 탄 말이 활에 맞아 고꾸라졌고, 왼발을 안장에서 빼려는 찰나에 미간에 화살을 맞아 요시사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고 적었다. 닛타 요시사다가 이곳에서 전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사실로 보기 어렵고,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죽음에 힌트를 얻어《태평기》의 작가가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25] 헤이안 시대때 미나모토노 미츠나가가 만들게 했다는 일본도로, 히자마루라는 일본도와 함께 세이와 겐지 가문의 중요 보검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토의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 칼의 길이는 약 81 cm다.[26]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아버지.[27]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노 모로나오와 같은 집안이다. 덴무 덴노의 먼 후손으로 알려진 다카시나(高階)씨의 일족이라고 한다.[28] 또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29] 사실은 나이시의 미모에 요시사다가 푹 빠져 며칠 동안이나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느라고 지쳐서, 다카우지를 공격하러 갈 날짜를 놓쳤다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30] 그러나 죽지 않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1] 현 오쓰 시[32] 호소이 히로시 저, 《고대 천문이변과 사서》[36], 깃카와고분칸 2007년[33] 도쿠가와 가문이 정말 닛타 일족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족보 위조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34] 아이러니하게도 닛타 요시사다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충신인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경우, 후손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구스노키의 후손인 화족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