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2:18:39

가마쿠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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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makura_logo.jpg
[ruby(鎌, ruby=かま)][ruby(倉, ruby=くら)][ruby(市, ruby=し)]
가마쿠라시 / Kamakura City
파일:가마쿠라시 시기.svg
시기(市旗) & 문장(紋章)
기본 정보
국가일본
지방간토
도도부현가나가와현
면적39.67km²
인구172,782명[1]
시장(市長)마쓰오 다카시(松尾崇;
[[무소속(정치)|
무소속
]])
시의회 (26석)
의장(議長)나카무라 소이치로(中村聡一郎;
[[무소속(정치)|
무소속
]])
회파꿈 미래 가마쿠라 (4석 / 17%)
가마쿠라의 비전을 생각하는 모임 (4석 / 17%)
공명당 (3석 / 13%)
일본 공산당 (3석 / 13%)
가마쿠라 물총새 클럽 (3석 / 13%)
자유민주당 (2석 / 9%)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가마쿠라 (2석 / 9%)
가마쿠라 업데이트 챌린지 (2석 / 9%)
무소속 (3석 / 13%)
상징
시화용담(リンドウ)
시목산벚나무(ヤマザクラ)
홈페이지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라인 아이콘.svg
파일:고토쿠인 대불.png
가마쿠라의 주요 상징인 고토쿠인(高徳院)의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仏).
1. 개요2. 역사3. 지리4. 교통5. 관광6. 경제7. 자매결연 및 우호교류 도시
7.1. 자매결연 도시7.2. 우호도시7.3. 파트너 시티
8. 가마쿠라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9. 출신 인물10.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가나가와현 남동부 해안에 위치한 시(市)이다.

2. 역사

이 도시에 과거 가마쿠라 막부가 소재해 가마쿠라 시대 당시 중세 일본의 실질적인 정치 중심지였다. 나라, 교토간사이의 고도들에 비해서는 역사가 짧지만 비교적 정치 중심지로서의 역사가 짧은 간토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다.

하지만 천년고도 교토와는 달리 시가지 자체는 그 당시와 연속성이 없고 고건축물 또한 나라와 교토에 비해 비교적 적은데 이는 무로마치 시대 이후 간토의 중심지가 오다와라를 거쳐 에도로 바뀌며 가마쿠라의 중심성이 해체되었고 황실의 본향인 간사이에 비해 관리를 덜 받았으며 또한 간사이보다 지진이 훨씬 잦은 간토 특성상 다수의 고건축이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륙 도시인 나라, 교토와 달리 가마쿠라는 판 경계인 사가미 해곡 및 스루가 해곡을 마주보는 해안 도시이기 때문에 간간이 쓰나미에 의한 큰 피해를 겪기도 했다.

가마쿠라가 일본사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는 막부가 창건되는 1185년인데, 이전에는 다른 간토 지역과 마찬가지로 변방에 위치한 읍락이었다. 하지만 겐페이 전쟁에서 타이라 가문을 물리치고 헤이안 시대를 종식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자신의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거점으로 가마쿠라를 채택해 이곳에서 막부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148년간 일본사를 지배하는 가마쿠라 막부가 창건되었고 가마쿠라도 일본 제2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일본에서는 막부의 가마쿠라가 조정의 교토와 더불어 사실상 이원화된 정치 권력의 중심지로서 한반세기 동안 융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가마쿠라에는 당풍과 불교 문화의 나라, 국풍과 귀족 문화의 교토와 차별화되는 무사 기풍의 독자적인 문화 기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막부 정권답게 정치적인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고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후대의 무로마치와 에도 막부에 비해 비교적 단명한 원인이 되었다.[2] 1293년에는 가마쿠라 대지진이 발생해 도시가 초토화되었으며 결국 가마쿠라 막부는 1333년 멸망했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뒤이은 무로마치 막부가 교토로 막부의 근거지를 이전한 뒤에도 가마쿠라 공방[3]을 두어 간토 지방의 중심지로 꽤 오래 번영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가마쿠라 공방이 막부 및 관동관령과 대립하면서 전란에 자주 휩싸였다. 결국 1455년에 공방을 시모우사의 코가(古河)로 옮기면서 가마쿠라는 과거의 영광을 다 잃고 농어업에 의존하는 시골로 전락했으며 간토 지방의 패권 역시 후호조씨오다와라를 거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꿔낸 에도(도쿄)로 넘어갔다. 결정적으로 에도 시대 중기에 1703년 겐로쿠 대지진과 1707년 호에이 대지진 및 그로 인한 쓰나미가 짧은 시차를 두고 연달아 발생했고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1707년 12월 후지산이 분화해(호에이 대분화) 기존 시가지가 완전히 파괴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다시 간토 지역의 고도로서 인식되어 자연재해로 파괴된 문화재가 복원되었고 관광 및 참배객의 방문으로 발전했으며, 1869년 도쿄 천도 이후 간토 지역이 일본의 새 수도권으로 폭풍성장하는 과정에서 가마쿠라는 수도권의 옛 고도로서 황실 구성원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별장이 지어지는 등 관광도시로서 발전하였다. 현재 가마쿠라 시가지는 쇼와 시대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가마쿠라시는 문화재가 일부 남아있는 현대적인 중견 도시이자 도쿄의 위성도시이다.

3. 지리

시가지는 크게 중심가인 가마쿠라 지구와 서쪽의 고시고에(腰越)지구,[4] 북쪽의 오후나(大船), 다마나와(玉縄), 후카사와(深沢) 지구로 나뉘어 있다. 고시고에와 북쪽의 3개 지구는 각각 1939년과 1948년에 편입되어 가마쿠라 중심지와는 산지로 떨어져 있으며 분위기도 다르다. 시내 최대 역은 오후나역으로 네기시선, 요코스카선이 분기하는 큰 역이다.

4. 교통

가마쿠라시의 철도역
철도회사 노선
JR 동일본 파일:JRE-JT.svg도카이도선
파일:JRE-JK.svg네기시선
파일:Logo_of_NEX.png나리타 익스프레스
오후나역
파일:JRE-JO.svg요코스카선
파일:JRE-JS.svg쇼난신주쿠라인
카마쿠라역 - 키타카마쿠라역 - 오후나역
에노시마 전철 파일:Enoden-EN.svg에노시마 전철선 코시고에역 - 카마쿠라코코마에역 - 시치리가하마역 - 이나무라가사키역 - 고쿠라쿠지역 - 하세역 -
유이가하마역 - 와다즈카역 - 카마쿠라역
쇼난 모노레일 파일:Shonan-SMR.svg에노시마선 후지미초역 - 쇼난마치야역 - 쇼난후카사와역 - 니시카마쿠라역 - 카타세야마역
굵게 표시 된 역은 환승이 가능한, 사실상 같은 곳이다.

도쿄에서는 도쿄역에서 JR 요코스카선으로, 이케부쿠로역, 신주쿠역. 시부야역 등에서는 JR 쇼난신주쿠라인 또는 오다큐 전철 에노시마선으로 갈 수 있다. JR은 가마쿠라역(편도로 도쿄역에서 54분, 신주쿠역에서 1시간 정도)으로, 오다큐는 서쪽 후지사와시후지사와역 또는 카타세에노시마역으로 연결된다.(신주쿠-후지사와는 쾌속급행으로 1시간) 이 경우 에노시마 전철 환승이 필요하다.

5. 관광

도쿄도의 근교로, 주말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도시이다. 한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도 도쿄 여행을 가면 요코하마, 닛코, 하코네 등과 함께 근교 관광으로 많이 다녀오는 곳이다. 도쿄는 아무래도 도쿄 대공습 등을 통해 역사적인 흔적은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마쿠라는 간토에서 일본의 문화유산을 많이 볼 수 있는 도시이다. 문화유산만 있는 건 아니고 해수욕장이나 근처 에노시마처럼 경치가 좋으며 한적한 분위기인 명소가 많다.

주요 볼거리가 분산되어 있는데, 크게 JR 키타카마쿠라역 근처의 사찰들과 가마쿠라역 근처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를 들 수 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를 기준으로 동쪽의 여러 사찰들, 그리고 에노시마 전철 하세역 주변(이곳에 가마쿠라 대불이 있음)으로 나뉜다. 주로 이 지역을 이동할 때에는 에노시마 전철의 1일 자유 승차권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5] 버스편도 있기는 하지만 동쪽 지역의 사찰들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에노시마 전철의 정차역들만으로도 거의 모든 볼거리는 볼 수 있다.

에노시마(江の島)도 가마쿠라의 주요 관광지로 흔히 소개되는데, 에노시마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후지사와시에 속한다. 시 경계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관광객 입장에선 십중팔구 묶어서 돌아본다.

에노덴으로 통칭되는 에노시마 전철이 다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에노덴은 이 도시와 후지사와(藤沢)를 잇는 전철 노선이다. 이 노선의 카마쿠라코코마에역에서 내리면 가마쿠라 고등학교가 있는데, 바로 슬램덩크에 나오는 능남(료난)고교의 모델이 된 학교이다. 에노덴 노선은 그리 길지도 않고 시착역에서 종착역까지 편도 4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으니 1일 승차권을 샀다면 주요 명소 방문을 마친 뒤 경치 감상용으로 한 번쯤 전 노선을 일주해 보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이 노선은 해변을 따라 달리는 경치(슬램덩크에도 나오는)도 볼만하지만, 주택과 주택 사이의 좁은 길에 깔린 선로 위를 통과하는 것이 참으로 신묘하다. 철도 동호인이 아닌 일반 관광객이어도 한 번쯤 일주해 볼 만한 노선이다. 어차피 시종착역인 가마쿠라와 후지사와 두 곳 모두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직행 노선은 존재한다.

6. 경제

일본에서는 부촌으로 유명하다. 도쿄와 가깝고 교통이 잘 정비되어 있으면서도 대체로 개발이 덜 되어서 전원 생활을 원하는 부유층들이 거주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서 나라, 교토 등의 고도(古都) 유적지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당 지역의 건축을 규제하는 내용의 고도보존법(古都保存法)이 제정되게 한 계기도 이 가마쿠라에서 비롯되었다. 가마쿠라는 이미 쇼와 초기인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요코하마선 개통 및 수도권으로 도쿄와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점 등에 힘입어 대규모 택지 개발이 이루어졌고, 이에 가마쿠라 출신인 작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를 위시한 뜻있는 지역 주민들의 발의로 '무분별한 택지 개발을 막고 가마쿠라의 옛 모습을 보전하자'는 시민운동이 전개되었고 이것이 1966년의 '고도에서 역사적 풍토의 보존에 관한 특별처치법(古都における歴史的風土の保存に関する特別措置法)' 제정으로 이어졌다.[6]

7. 자매결연 및 우호교류 도시

7.1. 자매결연 도시

7.2. 우호도시

7.3. 파트너 시티

8. 가마쿠라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

9. 출신 인물

10. 여담

  • 일본에서는 쇼와 시대 가마쿠라 지역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하는 소설가들이 많았다. 이들을 통칭하는 '가마쿠라 문사(文士, 분시)'라는 용어도 있다. 가마쿠라 자체가 메이지 시대에 요코스카선(横須賀線)이 개통되면서 도쿄 도시권에 들게 되다 보니[11] 도쿄의 출판사 본사와도 오가기 쉽고 또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그나마 간토 내 피해가 덜했던 지역 가운데 하나가 가마쿠라였다 보니 많은 도쿄의 문인들이 재해 직후 가마쿠라로 이주 혹은 임시로 머무르면서 작품을 썼다.[1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작품을 쓴 인연이 있어 '가마쿠라 문사'에 포함된다. 패전 뒤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다카미 슌(高見順)이나 나카야마 기슈(中山義秀) 등이 이곳에서 대본실(貸本屋) 「가마쿠라 문고(鎌倉文庫)」를 꾸리기도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로도 유명한 대문호인 미시마 유키오가 정식 등단 전 아마추어 시절(당시 직업은 대장성 공무원[13])에 연재하던 출판사도 가마쿠라에 있는 "가마쿠라 문고"[14]였다. 다만 요새는 가마쿠라 문사라는 용어는 물론 '문사'라는 단어 자체가 사어가 되어 잘 쓰이지 않는다.
  • 대불 근처의 산지에는 솔개가 많다. 자주 날아다닐 뿐만 아니라 음식을 들고 다니면 채가는 경우도 있어 솔개를 조심하라거나 음식을 함부로 들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문을 자주 볼 수 있다. 굳이 음식이 아니어도 솔개 입장에서 먹이로 착각할 수준의 작은 물건도 채가는 듯 하다. 실제 사례[15]
  • 2023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으로 한국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늘었다. 이때 소변을 보거나 차도를 방해하는 등의 관광객의 민폐 행동이 언론에 보도돼 화제가 됐다. 실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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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1년 8월 1일 기준.[2] 가마쿠라 막부의 문제점 중 하나는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가마쿠라의 지리적 고립성이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후쿠오카에서 벌어지는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간사이 지방에서의 반란에 무능하게 대처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 고립이라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무로마치의 아시카가 가문은 막부를 아예 교토에 설치했고 에도의 도쿠가와 가문은 참근교대 등 중앙집권적 정책을 정립해 조정을 압도하는 권력을 누렸다.[3] 가마쿠라와 간토 지방을 관리하는 무로마치 막부의 일족으로 사실상 이 지역의 총독 격이다. 다만 실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총독비서에 가까운 위치인 간토 간레이(관동관령)에게 넘어갔다.[4] 후지사와시에노시마 일대와 연담화되어 있다.[5] JR과 오다큐에서도 에노시마 전철 패스가 포함되는 패스 상품이 있다. 여행 계획에 따라 미묘하게 유불리가 갈리는 데 유의.[6] 한국에도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비슷한 법이 있다. 2011년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 2012년부터 시행되었다.[7] 월간 망가타운에서 연재되는 '가마쿠라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야마자키 다카시(Yamazaki Takashi)가 2017년에 찍은 영화. OTT서비스 웨이브, 티빙, 왓챠에서 볼 수 있다.[8]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9] 작중 등장인물들의 성씨는 가마쿠라의 지명에서 따온것이다.[10] 앨범의 모티브가 에노시마 전철의 역들이다. 곡명에 전철의 역명이 포함돼있다. 트랙 1번이 시종착역인 후지사와이며 마지막 트랙인 10번도 마찬가지로 시종착역인 가마쿠라이다.[11] 패전 이후 작품이지만 오즈 야스지로 영화 중 만춘초여름나 가마쿠라 분시였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의 소리 영화판을 보면 당시 풍경을 알 수 있다.[12] 사실 간토대지진 당시 가마쿠라의 절대적인 피해가 경미했던건 아니고 시내에서 약 2,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밀집한 거대도시 도쿄에서 무려 10만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마쿠라의 피해가 경미했던 것으로 보일 뿐이다. 오히려 도쿄보다 가마쿠라가 지진의 진원인 사가미 해곡에서 훨씬 더 가까웠기에 진동 자체는 가마쿠라가 더욱 셌는데 현대 진도 기준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진도 6 정도였던 도쿄와 달리 가마쿠라의 진도는 7에 가까웠다. 다만 비교적 약한 진동에도 절대적인 피해는 물론 인구 대비 피해도 도쿄가 더욱 컸는데 이는 인구 밀집 지역 특성상 도쿄가 대규모 재난에 더 취약했기 때문이다.[13] 한국의 5급 공무원에 해당한다. 지금의 재정경제부 사무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미시마는 도쿄대학생 시절부터 공무원 시절까지 계속 연재했고 공무원 생활은 1년도 안 돼서 금방 그만뒀다.[14] 엘리트 공무원이던 미시마의 아버지가 하루는 이곳에 찾아가 편집자 기무라 도쿠조에게 "당신네 같은 문인들이 게이샤(기생) 꼬셔내듯 내 아들을 자꾸 꼬셔서 글만 쓰게 만들어서, 고위관료가 되어야 할 내 아들이 공무원 생활에 집중을 못한다"고 항의를 했었다는 일화가 일본 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무라는 미시마 유키오가 "화려한 작가가 되고 말고야 운에 달렸지만, 못해도 아사히 신문에 소설 연재를 할 일류 작가의 역량은 틀림없이 가지고 있다"고 태연히 말했고, 부친은 이내 항의를 포기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15] 현지인들조차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희귀한 사례인 모양.[16] 이글루는 일본어로 가마쿠라(かまく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