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역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 ||||
일본 영화 1위 | |||||
제8회 (1931년) | → | 제9회 (1932년) | → | 제10회 (1933년) | |
마담과 마누라 | → | 태어나기는 했지만 | → | 지나가는 마음 | |
제9회 (1932년) | → | 제10회 (1933년) | → | 제11회 (1934년) | |
태어나기는 했지만 | → | 지나가는 마음 | → | 부초이야기 | |
제10회 (1933년) | → | 제11회 (1934년) | → | 제12회 (1935년) | |
지나가는 마음 | → | 부초이야기 | → | 아내여, 장미처럼 | |
제17회 (1940년) | → | 제18회 (1941년) | → | 제19회 (1942년) | |
코지마의 봄 | → |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 → | 하와이・말레이 반도 해전 | |
제22회 (1948년) | → | 제23회 (1949년) | → | 제24회 (1950년) | |
주정뱅이 천사 | → | 만춘 | → | 다시 만날 날까지 | |
제24회 (1950년) | → | 제25회 (1951년) | → | 제26회 (1952년) | |
다시 만날 날까지 | → | 초여름 | → | 살다 | |
역대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
일본 영화 대상 | ||||
제3회 (1948년) | → | 제4회 (1949년) | → | 제5회 (1950년) |
주정뱅이 천사 | → | 만춘 | → | 다시 만날 날까지 |
제5회 (1950년) | → | 제6회 (1951년) | → | 제7회 (1952년) |
다시 만날 날까지 | → | 초여름 밥 | → | 살다 |
감독상 | ||||
제3회 (1948년) | → | 제4회 (1949년) | → | 제5회 (1950년) |
기노시타 케이스케 (여자, 초상, 파계) | → | 오즈 야스지로 (만춘) | → | 요시무라 코사부로 偽れる盛装 |
각본상 | ||||
제3회 (1948년) | → | 제4회 (1949년) | → | 제5회 (1950년) |
이타미 만사쿠 (手をつなぐ子等) | → | 오즈 야스지로 노다 코고 (만춘) | → | 신도 가네토 偽れる盛装 |
블루리본상 감독상 | ||||
제1회 (1950년) | → | 제2회 (1951년) | → | 제3회 (1952년) |
이마이 타다시 (다시 만날 날까지) | → | 오즈 야스지로 (만춘) | → | 나루세 미키오 (번개) |
<colbgcolor=#151538><colcolor=#fff> 오즈 야스지로 [ruby(小津, ruby=おづ)] [ruby(安二郎, ruby=やすじろう)]|Yasujirō Ozu | |||
국적 | 일본 | ||
출생 | 1903년 12월 12일 | ||
일본 제국 도쿄시 후카가와구[1] | |||
사망 | 1963년 12월 12일[2] (향년 60세) | ||
도쿄도 분쿄구 도쿄의과치과대학 부속병원 | |||
수훈 | 자수포장 (1958년 수상) 욱일소수장 (1963년 사후 추서) | ||
직업 | 영화감독, 극작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51538><colcolor=#fff> 신체 | 170cm | |
활동 기간 | 1927년 – 1963년 | ||
묘소 | 가마쿠라시 엔가쿠지(円覚寺) | ||
부모 | 아버지 오즈 토라노스케 어머니 오즈 아사에 | ||
역임 직위 | 제3대 일본 영화 감독 협회 이사장 (1958~1963) | }}}}}}}}} |
[clearfix]
1. 개요
미조구치 겐지나 구로사와 아키라에 비해 뒤늦게 발굴된 감이 있지만, 사후 그의 작품들이 서구에 재조명됐다.[3] 이후 "미국 영화에 존 포드, 프랑스 영화에 장 르누아르가 있다면, 일본 영화엔 오즈 야스지로가 있다." 수준의 평가까지 받게 됐다.
2. 소개
생전보다 사후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독일의 빔 벤더스,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대만의 허우샤오셴, 미국의 짐 자머시, 한국의 이명세와 홍상수등이 모두 오즈 야스지로를 멘토로 삼거나 깊이 영향을 받은 감독들이다. 다만 이 지지자들이 대중적인 영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구로사와 아키라에 비해선 지명도가 낮은 편이다.부모의 죽음이나 자식의 결혼, 취업, 실업으로 인한 일상적 문제들을, 평이한 홈드라마의 틀에서 묘사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총 57편 중 데뷔작인 《참회의 칼》이나 몇몇 느와르 영화들을 제외한 모든 영화가 동시대 가정을 다룬 홈드라마다. 그는 홈드라마의 틀 안에서 엄밀한 형식미를 추구하는 깐깐함으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놓인 맥주병의 위치를 cm단위로 조절했다고 한다. 당시 조감독으로 일했던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런 깐깐함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완벽주의 속에서 결혼이나 부모의 죽음, 청년실업과 같이 대부분의 사회에서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들을 깊이있게 다루어서, 일상의 문제를 다루는 많은 거장들이 그의 작품들에 경도되고 영향받았다.
이른바 다다미 쇼트(Tatami Shot)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다른 영화들처럼 사람 상체 높이와 카메라 높이를 맞추지 않고, 카메라 높이를 다다미에 앉아있을 때 눈높이에 맞추는 앵글이자 쇼트로, 일본인들의 생활 감각을 정확히 반영한 시점 쇼트라고 평가받는다. 대신, 특유의 카메라 위치 때문에 카메라맨은 엎드려서 촬영해야 했다. 촬영 현장엔 다다미 쇼트 전용 삼각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즈 야스지로 사후에는 활용빈도가 거의 없다. 재밌는 것은 일본에서는 다다미 쇼트가 아닌 로우 포지션(low position)이라고 부른다.
한편 오즈는 일본 3대 거장 가운데 가장 늦은 70년대에 들어와서야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먼저 오즈 야스지로 작품의 내러티브는 당시 서구 영화의 서사적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시시해보였고 영화문법도 비전형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즈의 영화가 해외에 뒤늦게 유통된 탓도 있다. 오즈가 생전 국제 무대에 알려진 것은 오즈의 감독 경력의 후기쯤의 작품이라 할 동경이야기(1953)가 1957년에 런던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이듬해인 1958년에 영국 영화 협회(BFI)의 서덜랜드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그리고 말기작인 '고하야카와 가의 가을(小早川家の秋, 1961년)'이 미국 개봉에 1962년 제12회 베를린 영화제에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부터 비로소 오즈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미조구치나 구로사와가 이미 해외 영화제에서 거장 대우받았던것과 대조된다.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가 이미 40년대 말 ~ 50년대 초에 서구 평단에서 거장으로 인정받았던 것에 비해 오즈는 대단히 늦게 발견된 작가. 반대로 일본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당대에도, 지금도 인기가 좋은 영화감독이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유명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의 열렬한 지지자다.
가장 유명한 대표작 《동경이야기》를 필두로 거의 모든 작품들이 국내에 DVD가 있기에, 영화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감독이다. 단, 1936년작 《외아들》 이전 작품들은 모두 무성영화다. 이 무성영화 중에서도 오즈 야스지로의 걸작이 있다.
사실 의외로 오즈 사후에 등장한 일본 감독들은 경외는 하되 적극적으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드문 편이다.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부류가 더 많다. 오즈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며 대놓고 오즈식 영화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마무라 쇼헤이[4]와 오시마 나기사 같은 일본 뉴웨이브 감독들부터 시작해 일본 집을 찍으면서 오즈의 영향을 드러낼까봐 걱정했던 스와 노부히로라던가 오즈 영향을 받을까봐 일본식 집에서는 영화를 찍지 않는다고 말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 아오야마 신지, 세간의 평가와 달리 “나는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한 적이 없다.”라고 발언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보듯이 일본 내 감독들에게는 일종의 거대한 벽으로 다가오는듯 하다. 오히려 해외 감독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편이다. 애니메이션 계에도 영향력이 커서 하라 케이이치, 후루하시 카즈히로가 이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3. 일생과 일화
1903년 12월 12일[5]에 도쿄에서 5남매의 중산층 상인[6] 집안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제법 규모가 있는 도매상의 지배인을 맡고 있는 아버지때문에 유년시기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은 없이 지냈다.[7]초등 4학년 미에현[8]으로 이주,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당시 미에현이라고 하면 아예 깡촌 시골 정도로 볼 수 있겠으나 아버지가 자녀 교육을 시골에서 시키길 원했다고 한다. 오즈는 미에현 공립중학교에 진학하는데 이때 기숙사로 들어가고,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허구언날 영화관에 처박혀 영화를 보았으며 학교에서 영화동아리 모임까지 조직할 정도로 영화에 광적이었다.
이후 해당 학교에서 상급생이 잘생긴 미소년 하급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건이 생기고 학교는 발칵 뒤집어지게 되는데 이때 오즈 야스지로가 연관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오즈 야스지로는 정학처분과 기숙사 퇴거 처분을 받게 되고 오즈는 평생 이를 마음속에 담아두며 나쁜 기억으로 기억했다고 한다.[9]
이후 기숙사 퇴거 이후 집에서 통학하게 되었지만 오즈의 관심사는 여전히 영화였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가는 것보단, 영화관에 등교(?)하는게 다반사였고, 학교에서는 교칙을 어겨 선생님들의 요주의 학생으로 찍어있었으며 성적도 밑마닥이어서 주변에서는 "과연 오즈가 졸업이 가능할까?" 하며 걱정하고 있었다고.
결국 오즈는 중학교 졸업은 하지만 부모님이 기대했던 고베 고등 상업학교 입시에도 떨어졌으며 나고야 고등 상업학교 입시도 낙방했다. 가족의 걱정에도 오즈는 천하태평 백수생활에 은근 잘 적응하는데 수험공부를 핑계로 고베나 오사카에 머물면서 역시나 주요 활동무대는 영화관이었다. 이후 미에현 사범학교에 응시하지만 역시나 불합격하여 이후 근처의 초등학교에 대용 교원[10][11]으로 취업하였다.
이당시 오즈 야스지로는 선생님으로의 능력은 모르겠지만 인기는 좋았다고 하는데 수업시간에 수업보다 헐리우드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만돌린 악기로 노래를 연주해 주기도 하고, 학생들과 함께 나막신을 신고 몇십리 길을 걸어 등산과 피크닉을 나가는 등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다고.
자신의 영화에서는 항상 결혼, 취업이나 실업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감독 본인은 그 문제들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평생토록 독신이었으며, 잠시 중학 임시교사 일을 한 것 외에는 샐러리맨 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졸업 이후의 취업 걱정을 해 본 적도 없다. 그의 말년 작품들이 점점 현실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고 패턴화된 이야기의 반복으로 끌려갔던 것도 이러한 일상적인 경험의 부재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앞서 밝혔듯이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로, 굉장한 쑥맥에 샌님이어서 평생동안 여배우 하라 세츠코를 짝사랑했지만 한 번도 고백을 못 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지인에게 실토했다고 한다.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미조구치 겐지와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성격이었다.
학창 시절, 외모가 수려한 남학생에게 러브 레터를 보내어 학교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오즈의 성정체성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남녀가 저녁 식사를 세 번하고도 관계가 진전이 안 되면, 단념하는 게 좋다.
인터넷에선 위 발언으로 유명하다.가마쿠라시 엔가쿠지에 있는 그의 묘비엔 '無'라는 단 한 글자만 새겨져 있다.
오즈 씨의 연출 방식에 대해서는 촬영장에 들어가기 전 머릿속으로 완벽한 그림을 꾸며놓았기 때문에 우리 배우들이 할 일은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방식부터 눈을 깜빡이는 방식까지 그의 연출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연기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영화에서 놀고 있을 때 꽤 편안함을 느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장면들이 결국 어떻게 연결될지 몰랐다고 하더라도, 첫 상영을 볼 때,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내 연기를 발견하고 종종 놀랐다.
ㅡ 류 치슈 #
ㅡ 류 치슈 #
자주 캐스팅한 배우로는 류 치슈, 하라 세츠코, 스기무라 하루코, 사카모토 타케시가 있다. 류 치슈는 오즈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에 출연했다.
4. 연출작 일람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비고 |
무성 영화 | |||||
1927 | 참회의 칼 懺悔の刃 | ○ | ○ | ○ | 데뷔작,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1928 | 젊은이의 꿈 若人の夢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잃어버린 아내 女房紛失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호박 カボチャ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이사하는 부부 引越し夫婦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육체미 肉体美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1929 | 보물산 宝の山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학생 로망스 젊은 날 学生ロマンス 若き日 | ○ | ○ | ○ | 현존하는 야즈지로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 | |
일본식 싸움 친구 和製喧嘩友達 | ○ | ○ | ○ | 유실 영화, 77분 중 10분 분량만 현존 | |
대학은 나왔지만 大学は出たけれど | ○ | ○ | ○ | 유실 영화, 70분 중 10분 분량만 현존 | |
회사원 생활 会社員生活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못말리는 꼬마 突貫小僧 | ○ | ○ | ○ | 단편, 유실 영화, 38분 중 14분 분량만 현존 | |
1930 | 결혼학입문 結婚学入門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즐겁게 걸어라 朗かに歩め | ○ | ○ | ○ | ||
낙제는 했지만 落第はしたけれど | ○ | ○ | ○ | ||
그 날 밤의 아내 その夜の妻 | ○ | ○ | ○ | ||
에로스의 원령 エロ神の怨霊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발에 닿은 행운 足に触った幸運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아가씨 お嬢さん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1931 | 숙녀와 수염 淑女と髯 | ○ | ○ | ○ | |
미인애수 美人哀愁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동경의 합창 東京の合唱 | ○ | ○ | ○ | ||
1932 | 봄은 여인으로부터 春は御婦人から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태어나기는 했지만 大人の見る繪本 生れてはみたけれど | ○ | ○ | ○ | ||
청춘의 꿈은 어디에 靑春の夢いまいづこ | ○ | ○ | ○ | ||
다시 만나는 날까지 また逢ふ日まで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
1933 | 동경의 여인 東京の女 | ○ | ○ | ○ | |
비상선의 여자 非常線の女 | ○ | ○ | ○ | ||
지나가는 마음 出来ごころ | ○ | ○ | ○ | ||
1934 |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母を恋はずや | ○ | ○ | ○ | 일부 유실[12] |
부초이야기 浮草物語 | ○ | ○ | ○ | ||
1935 | 순진한 처녀 箱入娘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동경의 잠자리 東京の宿 | ○ | ○ | ○ | ||
1936 | 대학은 멋진 곳 大学よいとこ | ○ | ○ | ○ | 유실 영화, 각본만 현존 |
유성 영화, 흑백 | |||||
1936 | 카가미지쉬 菊五郎の鏡獅子 | ○ | ○ | ○ | 단편, 다큐멘터리 |
외아들 一人息子 | ○ | ○ | ○ | ||
1937 |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 淑女は何を忘れたか | ○ | ○ | ○ | |
1941 |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戸田家の兄妹 | ○ | ○ | ○ | |
1942 | 아버지가 있었다 父ありき | ○ | ○ | ○ | |
1947 | 셋방살이의 기록[13] 長屋紳士録 | ○ | ○ | ○ | |
1948 | 바람 속의 암탉 風の中の牝鶏 | ○ | ○ | ○ | |
1949 | 만춘 晩春 | ○ | ○ | ○ | |
1950 | 무네카타 자매들 宗方姉妹 | ○ | ○ | ○ | |
1951 | 초여름 麥秋 | ○ | ○ | ○ | |
1952 | 오차즈케의 맛 お茶漬の味 | ○ | ○ | ○ | |
1953 | 동경이야기[14] 東京物語 | ○ | ○ | ○ | |
1956 | 조춘[15] 早春 | ○ | ○ | ○ | |
1957 |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 ○ | ○ | ○ | |
유성 영화, 컬러 | |||||
1958 | 피안화 彼岸花 | ○ | ○ | ○ | |
1959 | 안녕하세요 お早よう | ○ | ○ | ○ | '태어나기는 했지만'의 리메이크 |
부초 浮草 | ○ | ○ | ○ | 부초이야기의 리메이크 | |
1960 | 가을햇살 秋日和 | ○ | ○ | ○ | |
1961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小早川家の秋 | ○ | ○ | ○ | |
1962 |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 ○ | ○ | ○ | 유작 |
[1] 現 일본 도쿄도 고토구[2] 육십갑자 뒤 생일에 죽은 사람이다.[3] 일본 영화계에서는 오즈가 살아있을 때부터 거장으로 인정받았다.[4] 그러나 아들 덴간 다이스케에 따르면, 말년이 지날수록 '그래도 오즈가 영화는 잘 만들었다.'라고 비교적 전향적으로 변했다고 한다.[5] 1903년 12월 12일에 태어나 1963년 12월 12일에, 딱 예순의 나이에 급성 간염으로 별세했다. 즉, 육십갑자 뒤 생일에 죽은 사람이다.[6] 중산층이라 하지만, 야스지로 일가의 본가인 오즈가는 한때 그 이세 상인 중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린 마츠사카 지역, 그 안에서도 대표적인 상인 가문이었다. 전성기에는 여러 분가에서 각기 가게를 차릴 정도였으며 현재도 오즈 산업이라는 기업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출생지가 미에현이 아닌 도쿄도인 이유는 오즈 산업 및 그의 분가가 도쿄로 이동했기 때문.[7] 오즈는 1909년 메이지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에 입학한다. 당시 서민이나 중산층에서 초등학교입학 전 유치원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경제적 능력이 가계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8] 현 마쓰사카 시/松阪市[9] 동창회에서도 자신을 두둔해 주지 않거나 정학/기숙사 퇴거 처분을 내린 선생님과는 아예 동석을 거부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어도 뒤끝을 보여주었다고.[10] 교원자격증이 없는 교사[11] 1872년(메이지5년) 일본은 포고령을 통해 일본역사 처음으로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학교제도를 발표하고 전국민 의무교육제도의 틀을 만든다. 일본 사회에서 엄청난 변화중 하나인데, 교원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자 초등과 중등 그리고 고등 일부에서도 무자격 교원이 일선교육을 담당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생겨났다. 이에 1900년(메이지33년)에 초등학교령을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초등학교에서 교원자격증이 없는 구제중학교,고등여학교 혹은 특수과목에 한해 고등 초등학교 졸업생도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현실과 타협했다. 이후 적극적으로 이들 대용교원들에게 사범학교를 이수하게 하여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도록 유도하거나 타 직업 으로서의 전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하여 1949년(쇼와24년)에는 교육 직원 면허법을 전면 개정하여 일본의 모든 학교에서 교사는 사범 대학을 통해 교원 자격증을 취득한 자만 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대용교원이란 직업은 사라지게 되었다.[12] 총 9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판본은 1부와 9부가 소실된 판본이다.[13] 원제를 그대로 번역한 '나가야 신사록'으로 표기하기도 한다.[14] 그의 대표작이자 일본의 국민 영화.[15] '이른 봄'으로 표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