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나기사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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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 나기사 [ruby(大島, ruby=おおしま)] [ruby(渚, ruby=なぎさ)]|Nagisa Oshima | |||
출생 | 1932년 3월 31일 | ||
일본 제국 오카야마현 타마노시 | |||
사망 | 2013년 1월 15일 (향년 80세) | ||
일본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영화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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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교토시립 라쿠요 고등학교 (졸업) 교토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
활동 기간 | 1959년 – 1999년 | ||
묘소 | 가나가와현 켄쇼지(建長寺) | ||
부모 | 아버지 어머니 | ||
배우자 | 코야마 아키코 | ||
자녀 | 장남 오시마 다케시 차남 오시마 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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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평양 전쟁 중에는, 천황폐하를 위해 죽으라고 배웠죠. 그런데 전후에는 이런 가치관이 180도 뒤집어졌습니다. 높으신 분이 말하는 것은 전혀 신용할 수 없고 신용한다면 엉망진창이 되는거죠. 국가라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들은 속은 것이죠. 이런 생각이 오시마 씨한테는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국가가 그럴듯한 말을 하면 그런 것은 다 수상하다, 국민을 홀리려고 지껄인다. 오시마 씨의 영화는 이런 생각을 고발하기 위한 영화였습니다.
- 저널리스트 타하라 소이치로
- 저널리스트 타하라 소이치로
일본의 영화감독.
쇼치쿠 뉴웨이브(누벨바그)라는 일본 영화사에 중요한 흐름을 이끌었던 감독이다.
2. 상세
쇼치쿠 입사 5년째인 27살 때 만든 청춘 잔혹 이야기는 자유분방한 일본 젊은이들의 실태를 다룬 작품으로 "일본 영화계의 최전방, 누벨바그의 기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쇼치쿠와 불화를 일으킨 후, 아트 시어터 길드(ATG)라는 제작사로 이적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명작들을 연출해 일본 인디 영화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대표작은 《감각의 제국》[1]과 《교사형》, 《전장의 크리스마스》,《일본의 밤과 안개》가 유명하다. 일본 매체에서 뭔가 흑막이 있어보이면 안개 운운하는 게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3]
주로 성과 정치를 화두로 담는다. 그의 영화는 2차 대전 이후 청산되지 않은 제국주의의 잔재로 인해 발생하는 일본의 사회적 부조리를 다루거나, 군국주의의 왜곡된 남성성을 묘사한다. 대표작인 《감각의 제국》은 그 과격한 묘사 때문에 꽤 논란이 되기도 했다. 《감각의 제국》 이후 해외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아 《열정의 제국》은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Lawrence)> 역시 오시마 감독의 대표작. 이 영화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이 영화에 사카모토와 더불어 데이비드 보위, 톰 콘티, 기타노 다케시 등이 출연. 빠방한 출연진이다.[4]
유럽 영화계와 협업한 감각의 제국을 기점으로 작품 세계가 달라지는 감독인데, 전반적으로 감각의 제국 이전 일본을 기반으로 작업한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중적으로는 후기작이 잘 알려졌지만, 아무래도 전기랑 달리 독기가 빠졌다는 평가가 대세. 실제로 영화사 해산 이후 경색되어가는 일본 영화 제작 환경에 실망했는지 [5], 후기엔 해외 합작으로 활동하는 과작 감독이 되어 버린다. 맥스 내 사랑은 아예 프랑스에서 만들었을 정도.
1996년부터 겪은 뇌졸중으로 활동이 어려워져 12년만에 쇼치쿠랑 만든 《고하토》 이후 반신 불수에 언어 장애까지 겹쳐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태였다. [6] 그래서 2000년대에는 주로 번역가로 활동해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등 4권의 책을 번역했다. 이후 하야카와 셋슈의 헐리우드 배우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제작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상영하려 했지만 감독이 2013년 1월 15일에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병원에서 향년 81세로 폐렴으로 별세하면서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7]
정치적인 입장은 좌익으로, '우리들은 피해자(일본의 피해자 행세)가 아니다. 가해자다. 가해자, 범죄자의 입장에서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하는 질문을 추구했다. 그 원인에는 빈곤, 가난과 시대적 병리가 있었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도 어릴 적에 태평양 전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남 오시마 다케시는 교수 등을 거쳐 경영학자로, 차남 오시마 신은 TV 다큐 감독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3. 여담
- 1990년 10월 23일, 오시마가 자신의 결혼 30주년 파티를 열었을 때, 오시마는 단상에서 축사를 할 예정이었던 친구이자 작가인 노사카 아키유키 [8]를 깜빡 잊어버렸고, 노사카는 자신의 차례가 올때까지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술을 마시며 화를 삭히던 노사카는 결국 축사를 읽은 직후에 분이 안 풀렸는지 옆에 서있던 오시마의 왼쪽 뺨을 안경이 날아갈정도로 때렸다. 오시마도 곧바로 가지고 있던 마이크로 노사카의 머리를 2번 때리며 응전했고(..) 이 장면은 고스란히 일본 방송에 보도 되었다.해당영상 나중에 두 사람은 서로 반성문을 써서 보내고 화해했다. 이후 오시마의 아내 코야마 아키코는 이 난투 소란에 대해, “사건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교류가 깊어졌다”며 언급했다.
- 영화감독이자 연출가 짓소지 아키오와 친했다. 짓소지가 연출 초창기에 오시마 각본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을 정도. 영화 감독 마츠모토 토시오, 각본가 사사키 마모루, 이시도 토시로도 친구였다고.
-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와 60년대부터 알던 사이다. 이타미가 자살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불륜 보도 정도의 일로 저 녀석은 자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오시마 나기사의 증조할아버지 오시마 도모노조(大島友之允)는 쓰시마 후추 번의 번사로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대조선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이며, 유명한 서계 거부 사건 때에 일본의 왕정복고 소식을 알리러 초량왜관에 파견되었다가 답을 못 듣고 돌아온 인물이 이 사람이다. 아울러 유신삼걸의 한 사람인 카츠라 코고로(기도 다카요시)가 이케다야 사건 때에 교토의 쓰시마 후추 번저에 있으면서 이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가 이케다야에 신선조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아울러 겐지 원년(1864년)에 조선으로 진출(침략)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건백(建白)을 제출하기도 하고, 카츠라에게 정한론을 설파하기도 한 인간이다.
4. 작품 일람
- 내일의 태양(明日の太陽) (1959)
- 사랑과 희망의 거리(愛と希望の街) (1959)
- 청춘잔혹이야기(青春残酷物語) (1960)
- 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1960)
-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 (1960)[9][10]
- 사육 (1961)
-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四郎時貞) (1962)
- 작은 모험 여행(小さな冒険旅行) (1963)
- 나의 벨렛(私のベレット) (1964)
- 윤복이의 일기(ユンボギの日記) (1965)[11]
- 열락(悦楽) (1965)
- 백주의 살인마(白昼の通り魔) (1966)
- 닌자 무예장(忍者武芸帳) (1967)
-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無理心中日本の夏) (1967)
- 일본춘가고(日本春歌考) (1967)
- 교사형(絞死刑) (1968)
- 돌아온 술주정뱅이(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 (1967)[12]
- 소년(少年) (1969)
- 신주쿠 도둑 일기(新宿泥棒日記) (1969)
- 도쿄전쟁전후비화(東京戦争戦後秘話) (1970)
- 의식(儀式) (1971)
- 그 여름날의 누이(夏の妹) (1972)
- 감각의 제국(愛のコリーダ) (1976)
- 열정의 제국(愛の亡霊) (1978) - 칸 영화제/감독상 수상
- 전장의 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1983)
- 내 사랑 맥스(マックス、モン・アムール) (1987)[13]
- 고하토(御法度) (1999) - 감독의 유작.
볼드 처리된 작품은 필름 코멘트가 선정한 감독의 에센셜 작품들.
[1] 1930년대 실제로 일어났던 아베 사다 사건을 다룬 영화. 퀸시 존스가 이 영화를 보고 노래 〈사랑의 싸움(Ai no Corrida)〉을 만들었다고 한다.[2] 다만 제목 자체는 오시마가 처음 지은 것이 아니고,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에서 따온 것이다.[3] 마츠모토 세이초의 저서 일본의 검은 안개도 영향을 주었다.[4] 물론 촬영 당시엔 셋 모두 배우로서의 경력은 미비했던 수준이었던 게 사실이다.[5] 허문영 평론가가 밝히길, 당시 오시마는 "일본을 떠나 국제적 감독이 되고 싶다", "밑바닥 인생들은 체재가 바뀌어도 그대로" 같은 자조적인 발언을 하면서 TV 프로에 나오고 깔끔한 패션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6] 인터뷰는 응할 수 있었던지 2010년까지 다큐멘터리 출연은 좀 있었다.[7] 여담으로 오시마의 타계로 친했던 오비모리 미치히코 감독도 부고 소식에 충격을 받고 3일 후 타계했다.[8] 반딧불의 묘 원작자로 유명하다.[9] 안보투쟁을 다룬 작품. 일본 좌익 운동에 비판적 시각으로 의문을 던졌다. 영화는 개봉된 지 사흘만에 회사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상영 중지가 됐다. 오시마는 맹렬히 항의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해 독립 프로덕션을 창립한다.[10] 국내 관객 후기에서는 전공투를 많이 언급하는데 1960년은 전공투 이전 시기이다.[11]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가지고 만든 다큐멘터리 사진 영화. 크리스 마르케의 활주로랑 비슷하다. 오시마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당시 내한했다고 하며, 이때 찍은 사진들로 만들었다고 한다.[12]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의 데뷔 싱글인 동명의 음반이 일본 최초 오리콘 차트 100만장 판매로 1위를 차지할 만큼 대인기를 끌자 이 곡을 모티브로 한 각본의 영화를 촬영했다. 사토 케이, 와타나베 후미오 같은 당대 청춘 스타들과 포크 크루세이더스의 멤버들을 주연으로 발탁해서 망명 한국인을 소재로 일본인의 정체성을 묻는 작품이었지만 일주일만에 상영중지됐다.[13] 침팬지와 수간 (...)하는 샬롯 램플링 등장하는 풍자 영화나, 범작 평가를 받고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