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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이타미 주조 [ruby(伊丹十三, ruby=いたみ じゅうぞう)] | Juzo Itami | |
본명 | 이케우치 요시히로 ([ruby(池内 義弘, ruby=いけうち よしひろ)]) |
출생 | 1933년 5월 15일 |
일본 제국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 |
사망 | 1997년 12월 20일 (향년 64세) |
도쿄도 미나토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감독, 배우, 작가, 방송인,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번역가 |
활동 | 1959년 – 1997년 |
학력 | 에히메 현립 마츠야마 미나미 고등학교 (졸업) |
가족 | 아버지 이타미 만사쿠 어머니 이타미 키미 여동생 오에 유카리[1] |
배우자 미야모토 노부코(1969년 결혼) 장남 이케우치 만사쿠(1972년생)[2] 차남 이케우치 만페이[3] | |
매제 오에 겐자부로 조카 오에 히카리 | |
신체 | 18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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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영화감독, 배우, 작가,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카피라이터, 번역가.당대 일본을 대표한 천재 멀티 엔터테이너로, 1980년대부터는 영화 감독으로 전업해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4]
2. 생애
2.1. 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타미 씨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특별 주문하신 네이비 블루의 라샤 반외투를 입은 그는-물론 고등학교에서 그것이 허가되었을 리는 없습니다-정말 아름다운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번역된 지 얼마 안 된 카프카의 심판에 대해 확실한 의견을 갖고 있으며, 랭보의 시집을 가리마르판으로 읽고, 베토벤 후기 현악 사중주곡을 깊이 즐기고 있다는 젊은이였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ゆるやかな絆) #
오에 겐자부로 (ゆるやかな絆) #
영화감독 이타미 만사쿠[5]의 장남으로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11세 때인 1944년에 교토 사범 남자부 부속 국민학교의 특별과학교육 학급에 편입했다. 이 학교는 정부가 우수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교육 기관이었으므로, 이타미는 영어, 과학, 예술, 프랑스어 등을 아우르는 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타미의 동료 학생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아들들도 있었다. 거장 화가로 유명한 우에무라 아츠시(上村淳之)도 이 수업을 받았다.
1946년 9월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에히메현 마츠야마시로 이사했다. 1948년에 교토 부립 야마시로 고등학교 병설 중학교에 입학했고, 1950년에는 마츠야마 히가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고등학교에서 후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오에 겐자부로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됐다. 이타미는 학교에서 아르튀르 랭보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읽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았던 탓에 낙제해 2년 유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마츠야마 미나미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2.2. 다양한 활동
1960년대의 이타미 주조(왼쪽). 오른쪽은 오에 겐자부로. |
195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6]한 뒤 상업 디자이너, 텔레비전 리포터, 잡지 편집자, 수필가, 배우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이러한 이유로 '13개의 얼굴을 가진 남자(13の顔を持つ男)'라는 별명을 얻은 이타미는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인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특히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로서의 평가가 매우 높았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조체를 그리는 남자'라고 칭해졌을 정도였다.#
도쿄로 올라간 후에는 영화 제작사 신도호(新東宝)에 입사해 편집이나 편집 조수 일을 하다가, 오래지 않아 퇴사했다. 유럽을 여행한 후, 도쿄의 무대예술학원에서 연기를 공부해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 다이에이에 입사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성격파 배우로 활약했다. 영화 배우 데뷔작은 이노우에 요시오 연출의 '긴자의 도둑고양이(銀座のどら猫)'이다. 다이에이 퇴사 이후에는 '북경의 55일 로드(55 Days at Peking)', '로드 짐(Lord Jim)' 등 외국 영화에도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60년 5월에는 영화 제작자 가와키타 나가마사의 딸 가와키타 가즈코[7]와 결혼했으나, 1966년 협의 이혼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출연한 NHK의 드라마 '내일의 가족'에서 배우 미야모토 노부코를 만나 연인이 됐으며[8], 1969년에 결혼했다. 부인 미야모토와 관계는 '선생님과 학생 같은 사이'였다고 하며#, 육아나 요리 등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주제로 많은 저작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무렵, 자신의 예명을 이타미 주조(伊丹十三)[9]라고 바꿨으며, 영화와 텔레비전에 많이 출연했다. 이타미는 40개가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다작 배우였다. 대표적으로 이치카와 곤(市川崑), 오시마 나기사, 히가시 요이치(東陽一),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구로사와 기요시, 테라야마 슈지의 작품에 출연했다. 1982년에는 NHK 대하드라마 '고개의 군상'에 출연했으며[10], 1983년에는 영화 '가족게임', '세설'에 출연해 키네마 준보와 요코하마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부터는 TV 맨 유니언(テレビマンユニオン)이라는 텔레비전 제작사에 입사하여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발표했다. 70년대 당시 이타미는 CM이나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구성해 자신이 직접 출연했다. 대표적으로 '멀리 가고싶다', '표현의 현장은 지금', '이타미 주조의 고대 여행', '독서 탐험 나는 책에 구원받았다', '이타미 주조가 본 의료폐기물의 어둠' 등 교양 프로그램과 사회파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여행 프로그램 '멀리 가고싶다'에 출연하여 스태프로서 직접 관여했으며, '물건을 보기 위해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정보 프로그램 '애프터눈 미해결 사건 시리즈'의 사건 리포터를 맡아, 치밀한 취재력과 분석력으로 MC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러한 활동은 후일, 영화 감독으로서의 경력에 영향을 미쳤다.
정신분석에 기초해 현대의 사조들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잡지 모농클(モノンクル)을 창간해 편집장을 맡았으며, 에세이스트로서도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다. 또한 상업 디자이너로서 단행본의 그림 일러스트부터 글씨체의 디자인까지 전체적으로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타미 주조는 '좌담회의 명수'로도 유명했는데, 담화를 글로 엮는 재능도 돋보였다. 대표적인 책으로 이타미의 저서 '소설보다 기이하다(小説より奇なり)'와 '일본 세상 만담대계(日本世間噺大系)'가 있다. 또 일본 및 일본 남자는 '어떻게 자신의 유아성을 극복하는가'를 연구했는데, 이것은 마지막까지 이타미 주조를 포착하고 있던 큰 테마 중 하나였다.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은 정신분석학자 기시다 히데와의 만남이었다. 기시다와 공동으로 저술한 '포육기 속의 어른'이나 자크 라캉 연구의 일인자 사사키 다카쓰구와 '정신분석 강의본'을 펴내기도 했다.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에쿠우스', '아마데우스'로 유명한 극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 '피사로'를 번역했다. 이외에도 마나 데이비스의 '포테이토 북', 윌리엄 살로얀의 '파파 유어 크레이지', 마이크 매그레디의 '주부와 생활', 잔 핸슨의 '중년을 깨달을 때'를 번역했다. #
2.3. 영화 감독 활동
1980년대 일본 영화는 극단적으로 일반 관객들로부터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당연히 흥행 성적도 나쁘고 밑바닥 시절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장례식'은 소규모 개봉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볼 수 있는 대히트 작품이 되었습니다. 일본 영화계에 혁명이자 저를 포함한 영화 제작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강렬한 자극이었죠.
스오 마사유키 (영화 감독)[11] #
스오 마사유키 (영화 감독)[11] #
1984년 11월 17일, 51세의 나이로 첫 장편 영화를 연출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12] 데뷔작인 장례식(お葬式)은 ATG 배급의 작품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 부부의 한바탕 소동을 아이러니를 섞어 표현해 극찬을 받았다.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흥행 수익 10억엔을 넘기며 대성공했으며,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1위와 일본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같은 많은 영화상을 휩쓸며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례식'으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타미는 다음 작품으로 이른바 '라멘 웨스턴'이라고 불린 코미디 요리 영화 '담뽀뽀'를 연출했다. 일본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서양권에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아,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지는 유명한 감독이 됐다. 특히 북미에서 흥행에 성공했으며, 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극찬한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서양권이나 국내에서는 담뽀뽀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세번째 연출작인 '마루사의 여자'부터 자신의 작품의 기본 스타일을 완성시켰으며, 1988년 '마루사의 여자 2', 1990년 '아게망'[13][14], 1992년 '민보의 여자', 1993년 '중환자', 1996년 '슈퍼의 여자', 1997년 '마루타이의 여자'와 같은 작품을 차례차례 흥행시켜,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은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이 됐다. '사회 현상적인 화제를 모으는 오락 영화는 이타미 영화'라는 브랜드를 확립시켰다. 특히 이타미는 당대 일본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블랙 코미디풍으로 풍자한 것으로 유명했다. 일본식 자본주의와 조직화된 범죄, 관료사회와 경직된 법률체계, 위선에 가득찬 중산층의 삶, 종교법인의 탈세, 야쿠자의 민사 개입 폭력, 슈퍼마켓의 상품 위장과 같은 특이하고 사회성이 있는 분야에서 소재를 구해 철저하게 취재해[15]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타미 영화의 또다른 장점은 평이한 영화언어다. 그는 형식 실험보다는 드라마 구축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승부를 걸었다. 대부분의 영화를 유쾌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데 어두운 소재임에도 코미디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또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업보와 욕망을 바라보는 시각이 강고하고 흔들리지 않았지만, 대부분에 작품이 항상 따뜻하고 유머로 가득 차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각기 독특한 성격, 또 거기에 걸맞은 복장과 분장, 소도구들을 사용해 인물 하나하나가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작품 곳곳마다 이타미 특유의 개성이 매우 강렬했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이타미는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봐도 재밌을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아내인 미야모토 노부코(宮本信子)[16], 츠가와 마사히코(津川雅彦), 야마자키 츠토무(山﨑努), 이토 시로(伊東四朗), 다이치 야스오(大地康雄), 오타키 히데지(大滝秀治), 미쿠니 렌타로, 류 치슈 같은 실력파 배우들을 캐스팅해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활극적으로 인물들의 생태를 그렸으며, 아내 미야모토 노부코를 직업인으로서의 강인한 여성으로 캐스팅해, 여성 주인공 원탑물을 자주 만들었다.
이타미는 정체감이 감도는 1980년대~1990년대의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 중 한 명이었다.[17] 그는 인터뷰에서 "신념으로 이미지 그대로의 작품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기쁘게 하고 흥행에도 성공하는 것"을 목표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작품성있는 오락 영화를 연출해, 느와르나 멜로드라마처럼 특정장르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일본에서 가장 흥행하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대중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지만,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초현실주의부터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영화화한 '조용한 생활'의 자연주의에 이르기까지 이타미의 작품 세계는 다양했다. 그러나 이타미의 세계를 대표하는것은 '여자 3부작'에서 보여주듯, 서민들의 이야기로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비판과 일본인의 행동사고 양식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풍자의 정신이었다. #
습격 사건 후 첫 기자 회견에서 말하고 있는 이타미 주조[18] 영상 |
이러한 사회 비판 영화로 명성을 얻은 이타미는 야쿠자를 비판하는 영화인 '민보의 여자'를 만들어, 야쿠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자택 근처에서 칼을 든 야쿠자 고토구미의 일원 다섯 명에게 습격당해, 얼굴 등에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야쿠자들이 도스(휴대용 단도)로 무장하고 이타미에게 칼침을 놓아 얼굴과 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병원 치료 후 건강하게 퇴원했다. 습격 사건 후 기자 회견에서 이타미는 "나는 꺾일 수 없다. 영화로 자유를 관철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듬해인 1993년 5월 30일 차기작 영화 '중환자'가 개봉한 극장에서 상영 중에 야쿠자들이 스크린을 찢는 괴롭힘도 당했다. 워낙 충격이 컸던 사건인지라, 이타미가 사망한 이후에 일본 영화계에서 사회를 풍자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일은 상당히 드물어졌다.
1995년에는 절친인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조용한 생활'을 연출했다. 이타미는 지금까지 자신이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을 고집했는데, 이 작품으로 소설을 각색하는 도전을 했다. 또한 기존의 연출법이 아닌, 웃음기를 뺀 서정적인 연출 스타일로 변화해 주목받았다. 그러나 '조용한 생활'은 흥행 수입이 고작 1억엔밖에 안 돼서, '이타미 주조의 최대 흥행 실패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작품성으로는 '이타미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 1년 뒤인 1996년, '조용한 생활' 이전의 연출 스타일로 다시 돌아가서 만든 '슈퍼의 여자'가 좋은 평을 받았고, 흥행도 성공했다.
2.4. 사망
야쿠자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자세를 관철해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한 이타미였지만, 1997년 12월 20일 사무실 아파트에 인접한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리고 다음날인 21일에는 이타미가 워드프로세서로 친 것으로 예상되는 "몸소 결백을 증명합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이것 이외의 방법으로는 입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유서 같은 것이 사무실에서 발견됐다. 또 싸운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경찰은 자살로 단정지었다. 다음날인 12월 22일에 발매된 사진 주간지 'FLASH'에는, 이타미가 젊은 여성과 둘이서 사무실에 출입하고 있는 2장의 사진이 게재되어 두 사람이 교제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경찰은 이타미의 죽음을 이 불륜 보도에 대한 '항의 자살'로 파악했다.그러나 이타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와 라쿠고가 타테카와 단시는 "불륜 보도 정도의 일로 저 녀석은 자살하지 않는다." "투신 자살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이 자살설을 부정했다. 실제로 이타미는 사망 당시 5개~6개의 시나리오를 작성해,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또한 이타미는 자신의 레터링에 자부심을 가진 글꼴 디자이너였고, 글씨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명필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서가 워드프로세서로 적혔다는 점, 그리고 유서의 문장이 문법적으로 정확한 언어를 구사한 이타미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서투른 문장이었다는 점, 게다가 생전 이타미는 사진주간지 'FLASH'의 기자로부터 불륜 의혹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아내 미야모토에게 물어보면 돼. (불륜의혹은) 늘 있었던 일이니까"라고 웃으면서 말한것으로 인해 자살설을 의문시하는 목소리가 다수 나왔다.
그리고 이타미가 사망하기 5일 전까지 의료폐기물 문제를 취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관계자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냐는 '타살설'도 부상했다. 또 이타미가 한 거대 종교단체[19]와 야쿠자의 관계를 그린 영화 기획도 진행하고 있었으며,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야쿠자 관계자에게 자살로 위장해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요미우리 신문 사회부에서 활동한 미국인 기자 제이크 에델스타인(Jake Adelstein)은 "야쿠자 관계자 5명이 이타미에게 총을 겨누어 옥상에서 뛰어내리게 했다."라고 증언하는 사람에게 취재를 했다는 것을 자신의 저서에서 쓰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이타미의 사인은 자살로 확정됐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많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그가 자살한게 아니라 타살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
오에 겐자부로는 2000년 출판한 소설 '체인지링'에서 이타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실은 <체인지링>을 출판한 후에도 제가 이타미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진 않습니다. 저와 아내에게 있어 이타미의 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뼈가 저릴 만큼 고통스럽게 우리들 속에서 진행 중인 사건인 것입니다. #
3. 연출작 목록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비고 |
1962 | 고무뎃포우 ゴムデッポウ | ○ | ○ | 단편 영화 |
1984 | 장례식 お葬式 | ○ | ○ | 장편 영화 데뷔작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
1985 | 담뽀뽀 タンポポ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출시작 |
1987 | 마루사의 여자 マルサの女 | ○ | ○ | 제4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1988 | 마루사의 여자 2 マルサの女2 | ○ | ○ | |
1990 | 아게망 あげまん | ○ | ○ | 제4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1992 | 민보의 여자 ミンボーの女 | ○ | ○ | |
1993 | 중환자 大病人 | ○ | ○ | |
1995 | 조용한 생활 静かな生活 | ○ | ○ | 오에 겐자부로 원작 |
1996 | 슈퍼의 여자 スーパーの女 | ○ | ○ | |
1997 | 마루타이의 여자 マルタイの女 | ○ | ○ | 유작 |
4. 여담
- 호적에 실려 있는 이름은 이케우치 요시히로(池内義弘). 집에서는 다케히코(岳彦)라고 불렸다.
- 이타미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데, 그런 그가 이타미의 스토리텔링을 극찬한 바 있다. 오에는 이타미의 여동생인 유카리와 1960년에 결혼했다.[20] 또 오에는 자신의 작품에 이타미를 여러 차례 등장시켰다. 1964년 소설 '일상 생활의 모험'의 주인공 사이키 사이키치는 이타미를 모델로 하고 있고, 1987년 소설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의 등장인물 아키야마 군 역시 이타미가 모델이다. 또한 1995년 저서 '회복하는 가족'에서 이타미에 대해 썼으며, 2000년 소설 '체인지링'에서 이타미의 자살을 다뤘다. 이 소설은 이타미의 투신 자살에 충격을 받아 쓴 작품이다.기자: 전학을 간 마쓰야마히가시 고등학교에서 이타미 주조 씨. 그의 여동생인 유카리 씨와 후에 결혼하셨으니까 처남이기도 하시지요. 그런 평생의 친구와 만나시게 됩니다. 이타미 씨는 아주 도회적인 분위기에 잘생긴 소년이셨다지요?오에 겐자부로: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중략) 내가 전학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혼자 교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그 소년이 다가와서는 "네가 오에니?"라고 하기에 맞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네가 쓴 글 읽었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격려해서 글을 쓰게 한다고도 말했어요.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소년이 "글 재미있게 읽었어"라고 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어요. 바로 그 소년이 이타미 주조입니다. (중략) 이타미와 친하게 되면서 문학에 급속도로 빠져들어갔습니다.[21]
오에 겐자부로는 2007년 발표한 저서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에서 이타미의 성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했다.어렸을 때부터 준수했고 재능이 많았던 이타미는 실제로는 속 깊은 곳에 커다란 decay라고 할까. 어딘지 모르게 황폐한 구석을 지니고 있는 듯했어요.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면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요.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 황폐한 성격이 내면에서 우세를 점할 경우에는 이타미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원래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란, 마음도 유약한 사람이었지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른 죄과' 때문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영혼이 등장하는데, 남을 쓰러트려야 할 순간에 자신이 죽고 마는 인간의 영혼입니다. 이타미에게는 그런 식으로 자기 파멸적인 구석이 있었어요.
- 아내 미야모토 노부코(宮本信子)를 자신의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했다. 이타미의 모든 영화에 미야모토가 출연하며, 이후 실력파 배우로 대성했다. 미야모토는 지금까지도 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에 자수포장을 수상했다. 미야모토는 인터뷰에서 "이타미 주조 감독 덕분에 성장했기 때문에, 이타미 작품은 저에게 소중한 보물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역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 분이었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은 꽤 힘들었습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
- 자신이 연출한 영화의 예고편에 출연하는 마케팅[22]을 하기도 했으며, 전직 상업 디자이너로서의 센스를 발휘해 포스터와 로고도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 참신한 제목과 카피로 영화 주제를 정확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했고, 팜플렛 제작에도 매번 관여했다. 언론용 프레스 시트 원고도 직접 써내기도 했다.
- 일본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제작사인 아트 시어터 길드(ATG)의 로고 마크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ATG가 발행하고 있던 영화 잡지 '아트 시어터'의 타이틀 문자와 표지의 디자인도 담당했다.
-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악연이 깊다. 원래 이타미 주조는 하스미 시게히코를 경애해서 하스미의 강연을 반드시 들으러갔고 대담을 여러차례 하기도 했다. 하스미빠였던 이타미는 자신의 데뷔작 '장례식'을 하스미의 이론을 강렬하게 의식해서 연출했다. 주로 1930년대부터 194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이나 샷의 인용이 다수 박혀 있다. 그러나 시사회를 찾은 하스미는 이타미에게 "솔직히 최저예요"라고 말하고 나가버렸다.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은 절연 상태가 됐다. 하스미는 자신의 저서 '영화광인'에서 "그 후로도 그의 작품은 다 보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도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카메라가 도와주지 않고 그렇게 좋은 샷이 없는 영화는 드문 것 같아요."라고 적으며 이타미의 영화를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23] 이 때문에 오에 겐자부로랑 하스미 시게히코 사이가 안 좋더라는 카더라가 많이 돌았던 편이다. #
- 요리에 관심이 많아, 집에서는 스파게티나 오믈렛 같은 간단한 요리는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미식가로 유명해, 요리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津川雅彦)를 자주 영화에 기용했다. 츠가와는 인터뷰에서 "감독 이타미 주조, 각본가 제임스 미키, 그리고 원작자 와타나베 준이치. 이 세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배우 츠카와 마사히코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 '악기란 그 사람의 평생 친구'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바이올린과 기타 연주를 자주 했다.
-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 없는 삶은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말했을정도로 고양이를 사랑했으며, 큰 고양이를 좋아해서 영화 '장례식'에 고양이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에세이나 일러스트에도 고양이 소재가 많았다.
- 패셔니스타로도 유명했다. 이타미 주조의 스타일 변천사
- 사망 후, 이타미를 기념하는 박물관인 이타미 주조 기념관이 설립됐다. 아내 미야모토 노부코가 관장직을 맡고 있다.
- 그의 이름을 딴 문화상인 이타미 주조상(伊丹十三賞)이 2009년 설립됐다. 신인 시절의 이타미의 영화 '마루사의 여자'의 메이킹 비디오를 연출했던 스오 마사유키(周防正行)가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이토이 시게사토, 타모리, 호시노 겐, 쿠도 칸쿠로가 이 상을 받았다.
- 2010년 한국의 독립영화관 시네마루에서 이타미 주조를 조명하는 회고전을 열었다. #
-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이타미 주조 영화들의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크라이테리온 채널에서 이타미 주조의 모든 영화들을 스트리밍 서비스하고 있다. #
5. 외부 링크
[1] 작가 오에 겐자부로와 결혼했다.[2]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3] 이타미 프로덕션 대표 이사 사장이다.[4] 2022년에 아사히신문이 주최한 '지금이야말로! 보고싶은 일본영화의 거장' 투표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를 꺾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5] 반권위주의적인 풍자 영화와 반전 운동으로 유명했다. 일본 제국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어 정부로부터 탄압받기도 했다.[6] 고교 졸업 후, 오사카대학 이학부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오에 겐자부로에 의하면 수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7] 후일 프랑스 영화사(이름만 프랑스일뿐 일본의 영화 제작사다)의 부사장이 된다.[8] 당시 가와키타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불륜 교제였다.[9]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꾼다는 의미다. 원래 예명은 이타미 이치조(伊丹一三)였다.[10] 키라 고즈케노스케로 나왔다.[11]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감독. 스오 마사유키는 이타미 주조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루사의 여인의 현장에는 스오 마사유키가 스태프로서 참가하고 있어, 그 현장에서 알게 된 이타미 특유의 연출법이 자신이 영화를 찍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스오는 후일 인터뷰에서 말했다.[12] 1962년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13] 제4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초청작.[14] 어떤 게이샤와 관계를 가지면 하는 모든일이 성공한다는 소문이 돌아 정치인이건 사업가건 달려들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15] 이타미는 기록한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취재 당시 이타미가 녹음한 방대한 테이프와 노트가 남아 있다. #[16] 미야모토 노부코는 이타미가 연출한 모든 작품의 출연(단편 제외)한 페르소나였다. 이타미는 "아내는 좋은 여배우인데, 좀처럼 주연의 이야기가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를 주연으로 한 영화를 스스로 찍어 버리면 된다."라고 말했다.[17] 대부분의 작품들이 흥행 10억엔 이상의 수입을 기록할 정도로 당대의 흥행 보증수표였다.[18] 오른쪽은 아내인 미야모토 노부코다.[19] 이타미가 사망하고 이 종교단체가 창가학회라는 소문이 퍼져셔, 창가학회가 한 일반인에게 소송을 걸기도 했다.[20] 참고로 이타미는 자신의 여동생과 오에가 결혼할 때 소설가란 오에의 직업 때문에 반대를 했었다. #[21] 출처: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35쪽~36쪽, 38쪽[22]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사이코를 홍보했을 때 사용한 마케팅 방법으로 유명하다.[23] 참고로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타미의 아버지인 이타미 만사쿠의 영화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