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5:06:25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의 주요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1px; background: #663334"
{{{#!wiki style="margin: -7px"
<tablebordercolor=#663334><tablebgcolor=#66333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일본의 역대 노벨상
30회 수상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keep-all; font-size:.96em; letter-spacing:-.2px"
<rowcolor=#fff>
순서
이름 연도·부문 사유 비고
1 유카와 히데키
(湯川 秀樹)
1949
물리
중간자의 존재 예측 노벨상/물리학상 최초 수상
2 도모나가 신이치로
(朝永 振一郎)
1965
물리
양자 전기역학의 기초 연구
3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 康成)
1968
문학
소설 《설국 문학상 최초 수상
4 에사키 레오나
(江崎 玲於奈)
1973
물리
반도체와 초전도체의 터널효과 발견
5 사토 에이사쿠
(佐藤 榮作)
1974
평화
비핵 3원칙 제창 평화상 최초 수상
6 후쿠이 겐이치
(福井 謙一)
1981
화학
화학 반응의 궤도함수 대칭 해석 화학상 최초 수상
7 도네가와 스스무
(利根川 進)
1987
생리의학
항체 다양성의 유전학적 원리 해명
생리의학상 최초 수상
8 오에 겐자부로
(大江 健三郎)
1994
문학
소설 《개인적인 체험》
9 시라카와 히데키
(白川 英樹)
2000
화학
전도성 고분자 물질 개발
10 노요리 료지
(野依 良治)
2001
화학
키랄 촉매에 의한 비대칭 반응 연구
11 고시바 마사토시
(小柴 昌俊)
2002
물리
우주 중성미자 검출과 관련한 선구자적 연구
12 다나카 고이치
(田中 耕一)
2002
화학
생체​고분자의 질량 분석을 위한 연성 탈착 이온화 방법의 개발 과학분야 학사 출신 최초 수상
13 고바야시 마코토
(小林 誠)
2008
물리
CP 대칭깨짐 원리 발견
14 마스카와 도시히데
(益川 敏英)
15 난부 요이치로
(南部 陽一郎)
일본 출생
미국 국적
16 시모무라 오사무
(下村 脩)
2008
화학
녹색 형광 단백질 GFP 발견 및 개발
17 스즈키 아키라
(鈴木 章)
2010
화학
팔라듐 촉매교차​결합법(스즈키 커플링 / 네기시 커플링) 개발
18 네기시 에이이치
(根岸 英一)
히키아게샤
일본 국적
19 야마나카 신야
(山中 伸弥)
2012
생리의학
유도만능​줄기세포(iPS) 개발
20 아카사키 이사무
(赤﨑 勇)
2014
물리
청색 LED 발명
21 아마노 히로시
(天野 浩)
22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일본 출생
미국 국적
23 오무라 사토시
(大村 智)
2015
생리의학
회충 감염의 새로운 치료법 발견
24 가지타 다카아키
(梶田 隆章)
2015
물리
중성미자 진동 관측
25 오스미 요시노리
(大隅 良典)
2016
생리의학
자가포식(오토파지) 매커니즘 연구
26 이시구로 가즈오
(石黒 一雄)
2017
문학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일본 출생
영국 국적
27 혼조 다스쿠
(本庶 佑)
2018
생리의학
음성적 면역 조절 억제를 통한 암 치료법 발견
28 요시노 아키라
(吉野 彰)
2019
화학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29 마나베 슈쿠로
(真鍋 淑郎)
2021
물리
기후 변화에 대한 신뢰성 있는 예측 모델 제시 일본 출생
미국 국적
30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
(日本​原水爆​被害者​団体​協議会)
2024
평화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 일본 첫 단체 수상
일본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는 일본계 외국인 수상자는 포함하지 않은 집계. 다만, 1986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리위안저(대만일치시기 일본 국적) 및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일제강점기 일본 국적)은 제외.
}}}}}}}}} ||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rowcolor=#cd9f51> 1901 1902 1903 190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쉴리 프뤼돔 테오도르 몸젠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rowcolor=#cd9f51> 1904 1905 1906 1907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파일:폴란드 입헌왕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호세 에체가라이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조수에 카르두치 러디어드 키플링
<rowcolor=#cd9f51> 1908 1909 1910 1911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루돌프 오이켄 셀마 라겔뢰프 파울 폰 하이제 모리스 마테를링크
<rowcolor=#cd9f51> 1912 1913 1915 1916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로맹 롤랑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rowcolor=#cd9f51> 1917 1919 1920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카를 슈피텔러 크누트 함순
<rowcolor=#cd9f51> 1921 1922 1923 192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폴란드 국기(1919-1927).svg
아나톨 프랑스 하신토 베나벤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rowcolor=#cd9f51> 1925 1926 1927 1928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조지 버나드 쇼 그라치아 델레다 앙리 베르그송 시그리드 운세트
<rowcolor=#cd9f51> 1929 1930 1931 1932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토마스 만 싱클레어 루이스 에릭 악셀 카를펠트 존 골즈워디
<rowcolor=#cd9f51> 1933 1934 1936 1937
X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유진 오닐 로제 마르탱 뒤 가르
<rowcolor=#cd9f51> 1938 1939 1944 1945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핀란드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칠레 국기.svg
펄 벅 프란스 에밀 실란패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rowcolor=#cd9f51> 1946 1947 1948 1949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윌리엄 포크너
<rowcolor=#cd9f51> 1950 1951 1952 1953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영국 국기.svg
버트런드 러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프랑수아 모리아크 윈스턴 처칠
<rowcolor=#cd9f51> 1954 1955 1956 1957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어니스트 헤밍웨이 할도르 락스네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rowcolor=#cd9f51> 1958 1959 1960 1961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살바토레 콰시모토 생존 페르스 이보 안드리치
<rowcolor=#cd9f51> 1962 1963 1964 1965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존 스타인벡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장폴 사르트르(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rowcolor=#cd9f51> 1966 1967 1968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가와바타 야스나리
<rowcolor=#cd9f51> 1969 1970 1971 1972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칠레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사뮈엘 베케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블로 네루다 하인리히 뵐
<rowcolor=#cd9f51> 1973 1974 1975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패트릭 화이트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에우제니오 몬탈레
<rowcolor=#cd9f51> 1976 1977 1978 1979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스페인 국기(1977-1981).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그리스 국기.svg
솔 벨로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rowcolor=#cd9f51> 1980 1981 1982 1983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체스와프 미워시 엘리아스 카네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윌리엄 골딩
<rowcolor=#cd9f51> 1984 1985 1986 1987
파일:체코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클로드 시몽 월레 소잉카 조지프 브로드스키
<rowcolor=#cd9f51> 1988 1989 1990 1991
파일:이집트 국기.svg 파일:스페인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나기브 마푸즈 카밀로 호세 셀라 옥타비오 파스 나딘 고디머
<rowcolor=#cd9f51> 1992 1993 1994 1995
파일:세인트루시아 국기(1979–2002).svg.pn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데릭 월컷 토니 모리슨 오에 겐자부로 셰이머스 히니
<rowcolor=#cd9f51> 1996 1997 1998 1999
파일:폴란드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다리오 포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rowcolor=#cd9f51> 2000
파일:프랑스 국기.svg
가오싱젠
}}}
}}}}}}}}}
[ 21세기 ]
##
||<table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1 || 2002 || 2003 || 2004 ||

}}}}}} ||
물리학 | 화학 | 생리학·의학 | 평화 | 경제학

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 ||

<colbgcolor=#000>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郎|Kenzaburō Ōe
파일:201503131626536925_7.jpg
[[노벨문학상|{{{#white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오에 겐자부로 ([ruby(大江 健三郎, ruby=おおえ けんざぶろう)])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 1935년 1월 31일
일본 제국 에히메현 우치코정 오세히가시
사망 2023년 3월 3일 (향년 88세)
일본 도쿄도
직업 소설가, 사회운동가
학력 <colbgcolor=#fff,#191919>오세소학교 (졸업)
오세중학교 (졸업)
마츠야마히가시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문학부 (불문과 / 학사)
가족 아버지 오에 호타로
어머니 오에 코이시
배우자 오에 유카리[1] (1960년 결혼)
장남 오에 히카리
장르 소설, 수필
등단 기묘한 일 (1957)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
3.1. 대표작3.2. 소설
3.2.1. 장편3.2.2. 연작 단편집3.2.3. 중 · 단편집
3.3. 평론 · 수필3.4. 공저
4. 정치적 성향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Kenzaburo-Oe-2-1400x700.jpg

일본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

1935년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에서 출생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본의 혼란스럽던 시기에 불현듯 나타나 아베 코보, 엔도 슈사쿠, 미시마 유키오 등과 함께 일본 전후(戰後) 문학을 이끌었던 작가 중 한 명이다. 또한 일본의 국수주의를 비판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민주주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반전 및 평화 운동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 문학의 진보주의, 평화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며, '전후 민주주의 세대의 거성', '전후 민주주의의 기수'라 불렸으며, 단순히 생존을 넘어서 타자와의 공존을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하고 갈구하는 인간상을 맹렬히 그려낸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 일본 작가 중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 생애

오에는 1935년 1월 31일 에히메현 오세 마을에서 부친 호타로와 모친 고이시 사이에서 7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가 무사인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그의 집안은 전후 농지개혁으로 사유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지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활약으로 예전부터 조부가 개량해온 닥나무를 통하여 지폐국에 납품할 종이를 만드는 것으로 집안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에는 마을의 민속 축제와 전통 연극을 담당하던 할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숲의 신비'라고도 불리었던 고향의 민담에 심취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얼마나 심취하였는지 1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무 도감과 책들을 들고 날마다 숲에 가서 나무들을 스케치하거나 책을 읽고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는 1944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 다음해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는데, 어린 오에에게 아버지의 기묘한 죽음은 깊은 죄책감과 상처를 주었으며 한동안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오직 고향의 숲에서만 시간을 보내며 방황하는 시기를 거쳐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자신이 구해내진 못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오에가 평생을 안식처로 삼았던 시코쿠의 '숲의 신비는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주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며, 특히 시코쿠의 지역사와 민담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2]

아버지의 사후,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홀로 오에를 가르치면서 그 전쟁 시기에 구하기 힘들었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 같은 책을 구해다 주었는데, 그는 그 책들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 책들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고향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그는 마츠야마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훗날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는 이타미 주조와 만나게 된다. 18세가 되는 해에 처음 동경에 다녀와서 그 이듬해 도쿄대학교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스승인 와타나베 가즈오는 프랑수아 라블레에 대한 전문가였다. 그는 1957년 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글은 프랑스와 미국의 현대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파일:9d8a64f8820d768aa42681af7dbe2dd120180207131956856.jpg
1958년의 오에 겐자부로
1958년 당시 '사육(飼育)'이라는 작품으로 23세 5개월의 나이로 아쿠타가와상 수상이라는 상당한 경력이 있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자였다. 이후 1999년 히라노 게이치로가 같은 23세의 나이에 생일만 약간 빨라 최연소 수상자 기록을 경신했고, 2003년 하반기 아쿠타카와상을 당시 19세이던 와타야 리사가 수상하며 이 기록은 한번 더 깨지게 된다.
시적인 힘으로 생명과 신화가 밀접하게 응축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현대에서의 인간이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양상을 극명하게 그려냈다.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2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아키히토 덴노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수여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부하였다. 이유는 전후 민주주의자[3]로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4] 후술된 정치성향을 보면 알겠지만 좌파성향이 강해 사회운동도 하고, 특히 원폭과 원전 전반에 대한 비판을 많이 남겼다. 반전 운동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대표적인 친한파 명사. 실제로 노령임에도 한국에 자주 방문했다.

2013년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 집필에 들어갔던 '만년양식집'을 마무리 지으면서 소설 창작을 마감한다고 선언했다. 대신 사회운동을 택했다고.

2023년 3월 3일 향년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음이 3월 13일 공고되었다. #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치뤄졌으며, 상주는 아내 오에 유카리가 맡았다. #

3. 작품 목록

3.1. 대표작

  • 만엔원년의 풋볼(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
    '만엔원년'이란 제목 때문에 막부 말기의 일본을 다룬 소설로 생각하기 쉽지만[5], 그렇지는 않다. 오에의 대표소설이자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이다. 1967년작이고 영제는 'The Silent Cry'.

    안보투쟁에 참가했다가 진압대에게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아 미쳐 버린 뒤 기괴한 몰골[6]로 자살한 친구를 부러워하며 폐인처럼 지내던 주인공 네도코로[7] 미쓰사부로는 안보투쟁에 참가했다가 전향한 인물의 대표로 미국에서 참회극 공연(…)을 하던 동생 다카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카시와 만난 미쓰사부로는 다카시의 권유로 (막부 말기) 만엔원년에 농민 봉기를 일으킨 (주인공의) 증조부 동생과 그를 진압한 증조부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고향 시골 마을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다카시는 자신을 증조부 동생과 동일시하며, 인근 조선인 부락 출신이었으나 지금은 시골 마을의 경제를 장악한 조선인, 일명 '슈퍼마켓 천황'[8]이 소유한 슈퍼마켓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마을 청년들을 모아 풋볼 연습을 빙자한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는데…

    제목처럼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얽혀 들어가는 전개가 일품이다. 재일동포 문제도 다룬다. 주인공 친구부터 시작해서 알콜중독자인 주인공 아내, 근친상간 이야기, 처참하게 죽은 마을 처자와 관련 묘사 등등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여럿 나오며, 이야기의 흐름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과 사건 자체의 의미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결말부의 충격적인 반전이[9] 인상적이다. 이렇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전개 방식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과 그에 대한 수치심을 오롯이 시사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치료탑(治療塔)
    1990년작.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탑이 있는 혹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장남인 히카리가 자폐를 안고 태어나서, 평생을 힘들게 살았던 저자의 개인적인 고뇌가 표출되었다고 해피 SF 2호(비정기 발행 무크지)에서는 말한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나왔다.
  • 체인지링(チェンジリング)[10]
    중년의 시점에서 자신의 친구 겸 처남과 작가 본인의 청소년기 시절을 회상하고 고뇌하는 소설. 역시 저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체험.[11]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 2000년작이다.
  • '나의 나무' 아래서(「自分の木」の下で)
    오에 겐자부로의 사상과 그 한계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집. 2001년에 발간되었다. 책 제목은 "사람마다 자신의 나무가 있으며, '나의 나무' 아래에서는 노인이 된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고향 지방의 전설에서 따 왔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의외로 '비교적' 쉽게 쓰여 있다. 그래도 꽤 어렵다.
  • 개인적인 체험(個人的な体験)
    한때 유망한 대학원생이었으나 술에 의지해 현실도피한 끝에 입시학원 강사로 전락한 주인공이, 막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머리에 기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아이를 기를 것인지 아니면 '안락사'시킬 것인지에 대한 선택에 놓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 1964년작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겐자부로의 아들인 유명한 음악가 오에 히카리는 뇌 헤르니아 장애로 뇌수술 끝에 무사히 태어나나 일생동안 지체장애를 안고 살게 되는데 특유의 절대음감으로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가족들의 격려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臈たしアナベル・リイ総毛立ちつ身まかりつ)
    나이가 70이 넘은 겐산로[12]는 지적장애인 히카리[13]를 돌보며 늙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겐산로의 지인이자 영화 제작자 고모리가 30년 만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겐산로와 고모리는 과거 8mm 영화 <애너벨 리>의 여주인공이었던 아역 배우 출신 사쿠라와 함께 30년 전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일본 시코쿠지역 농민봉기로 각색하여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불미의 사고로 영화 제작 프로젝트는 무산되어 고모리는 미국으로 도피했고, 사쿠라는 영화 출연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겐산로는 점점 글쓰기와 멀어지게 되어 서로 각자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겐산로는 고모리와 오랜만에 회동하고, 한국의 시인 김지하 석방을 위한 단식 농성장에 찾아온 사쿠라를 마주하게 되며 이 셋은 자신들에게 트라우마와도 같던 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재개하기로 하는데...

    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열정을 표현함으로써 지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노인들의 성장 소설이다. 또한 오에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도 들어있어 픽션과 논픽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3.2. 소설

3.2.1. 장편

발간년도 제목 비고
1958년 새싹 뽐기, 어린 짐승 쏘기
芽むしり仔撃ち
첫 장편 소설
1959년 우리들의 시대
われらの時代
밤이여 느긋하게 걸어라
夜よゆるやかに歩め
1960년 청년의 오명
青年の汚名
1962년 늦게 온 청년
遅れてきた青年
1963년 절규
叫び声
1964년 일상생활의 모험
日常生活の冒険
개인적인 체험
個人的な体験
신초샤 문학상 수상작
1967년 만엔 원년의 풋볼
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
1973년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洪水はわが魂に及び
상, 하권
노마 문예상 수상작
1976년 핀치러너 조서
ピンチランナー調書
1979년 동시대 게임
同時代ゲーム
1986년 M/T와 이상한 숲의 이야기
M/Tと森のフシギの物語
1987년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
懐かしい年への手紙
1988년 킬프군단
キルプの軍団
1989년 인생의 친척
人生の親戚
이토 세이 문학상 수상작
1990년 치료탑
治療塔
1991년 치료탑 행성
治療塔惑星
1993년~1995년 타오르는 푸른나무
燃えあがる緑の木
3부작
1999년 공중제비
宙返り
상, 하권
2000년 체인지링
取り替え子(チェンジリング)
2002년 우울한 얼굴의 아이
憂い顔の童子
2003년 200년의 아이
二百年の子供
2005년 책이여, 안녕!
さようなら、私の本よ!
2007년 익사
水死
2013년 만년양식집
晩年様式集(イン・レイト・スタイル)

3.2.2. 연작 단편집

발간년도 제목 비고
1982년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雨の木(レイン・ツリー)」を聴く女たち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작
1983년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新しい人よ眼ざめよ
오사라기 지로상 수상작
1985년 하마에게 물리다
河馬に嚙まれる
가와바타 야스나리상 수상작
1990년 조용한 생활
静かな生活
이 네 개의 작품은 2016년 현대문학에서 출판한 단편선 '오에 겐자부로'에 전부 수록되었다.

3.2.3. 중 · 단편집

발간년도 제목 수록 작품 비고
1958년 사자의 잘난 척
死者の奢り
[ 펼치기 · 접기 ]
사자의 잘난 척 (死者の奢り, 1957)
위증의 때 (偽証の時, 1957)
사육 (飼育, 1958)
비둘기 (鳩, 1958)
기묘한 일 (奇妙な仕事, 1957)
인간 양 (人間の羊, 1958)
남의 다리 (他人の足, 1957)
단편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보기 전에 뛰어라
見るまえに跳べ
[ 펼치기 · 접기 ]
보기 전에 뛰어라 (見るまえに跳べ, 1958)
어두운 강 무거운 노 (暗い川おもい櫂, 1958)
돌연한 벙어리 (1958, 不意の唖)
갈채 (喝采, 1958)
싸움의 오늘 (戦いの今日, 1958)
1960년 고독한 청년의 휴가
孤独な青年の休暇
[ 펼치기 · 접기 ]
고독한 청년의 휴가 (孤独な青年の休暇, 1960)
후퇴 청소년 연구소 (後退青年研究所, 1960)
상쾌한 기분 (上機嫌, 1959)
공동생활 (共同生活, 1959)
여기보다 다른 장소 (ここより他の場所, 1959)
1963년 성적인간
性的人間
[ 펼치기 · 접기 ]
성적인간 (性的人間, 1963)
세븐틴 (セヴンティーン, 1961)
불만족 (不満足, 1962)
1969년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われらの狂気を生き延びる道を教えよ
[ 펼치기 · 접기 ]
제1부 왜 시가 아닌 소설을 쓰는가 하는 프롤로그와 네 개의 시 같은 것
제2부 나 자신의 시 같은 것을 핵으로 하는 세 개의 단편 달려라, 달려라/ 핵시대 숲의 은둔자/제물 남자는 필요한가
제3부 오든과 블레이크의 시를 핵으로 한 두 편 사냥으로 살았던 우리의 조상/아버지,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1972년 공중 괴물 아구이
空の怪物アグイー
[ 펼치기 · 접기 ]
공중 괴물 아구이 (空の怪物アグイー , 1964)
불만족 (不満足, 1962)
스파르타 교육 (スパルタ教育, 1963)
경로 주간 (敬老週間, 1963)
아토믹 에이지의 수호신 (アトミック・エイジの守護神, 1964)
브라질식 포르투갈어 (ブラジル風のポルトガル語, 1964)
개의 세계 (犬の世界, 1964)
스스로 내 눈물을 닦아내는 날
みずから我が涙をぬぐいたまう日
[ 펼치기 · 접기 ]
스스로 내 눈물을 닦아내는 날 (みずから我が涙をぬぐいたまう日, 1971)
달의 남자 (月の男, 1971)
두 개의 중편을 잇는 작가의 노트 (二つの中篇をむすぶ作家のノート)
1980년 현대전기집
現代伝奇集
[ 펼치기 · 접기 ]
머리 좋은 '비의 나무' (頭のいい「雨の木」, 1980)
몸이 바뀌는 염소의 반격 (身がわり山羊の反撃, 1980)
'새싹 뽐기, 어린 짐승 쏘기' 재판 (『芽むしり仔撃ち』裁判, 1980)
1984년 어떻게 나무를 죽일까?
いかに木を殺すか
[ 펼치기 · 접기 ]
튀긴 소시지 먹는 법 (揚げソーセージの食べ方, 1984)
구르트 섬의 엑스레이 화법 (グルート島のレントゲン画法, 1984)
보여주기만 하는 고문 (見せるだけの拷問, 1984)
메이코의 큰 허점 (メヒコの大抜け穴, 1984)
또 하나 이즈미 시키부가 태어난 날 (もうひとり和泉式部が生まれた日, 1984)
그 산양을 들에 (その山羊を野に, 1984)
'죄의 용서'의 푸른 풀 (「罪のゆるし」のあお草, 1984)
어떻게 나무를 죽일까? (いかに木を殺すか, 1984)
1992년 내가 정말로 젊었을 적에
僕が本当に若かった頃
[ 펼치기 · 접기 ]
불을 두른 새 (火をめぐらす鳥, 1991)
‘울보’ 느릅나무 (「涙を流す人」の楡, 1991)
우주대의 '비의 나무(레인 트리)' (宇宙大の「雨の木(レイン・ツリー)」, 1991)
꿈의 스승 (夢の師匠, 1988)
치료탑 (治療塔, 1991)
벨락콰의 10년 (ベラックヮの十年, 1988)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マルゴ公妃のかくしつきスカート, 1992)
내가 정말로 젊었을 적에 (僕が本当に若かった頃, 1992)
수유나무의 가르침·서 (茱萸(ぐみ)の木の教え・序, 1992)
2014년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郎自選短篇
[14]

3.3. 평론 · 수필

발간년도 제목 비고
1962년 세계의 젊은이들
世界の若者たち
유럽의 목소리, 나 자신의 목소리
ヨーロッパの声、僕自身の声
1965년 엄숙한 줄타기
厳粛な綱渡り
히로시마 노트
ヒロシマ・ノート
1968년 지속하는 뜻
持続する志
1970년 부서지는 존재로서의 인간
壊れものとしての人間
핵시대의 상상력
核時代の想像力
오키나와 노트
沖縄ノート
1972년 고래가 사멸하는 날
鯨の死滅する日
1973년 동시대로서의 전후
同時代としての戦後
1974년 상황에
状況へ
문학 노트 첨부 15편
文学ノート 付15篇
1976년 말에 따라서 - 상황·문학
言葉によって-状況・文学
1977년 소설의 방법
小説の方法
1978년 표현하는자 - 상황·문학
表現する者-状況・文学
1980년 방법을 읽는다=오에 겐자부로 문예시평
方法を読む=大江健三郎文芸時評
1982년 핵의 대화재와 '인간'의 소리
核の大火と「人間」の声
히로시마에서 오일로시마로-82 유럽의 반핵·평화운동을 보다
広島からオイロシマへ―'82ヨーロッパの反核・平和運動を見る
1984년 일본 현대의 휴머니스트 와타나베 카즈오를 읽다
日本現代のユマニスト渡辺一夫を読む
1985년 삶의 방식의 정의 - 다시 상황으로
生き方の定義-再び状況へ
소설의 전략
小説のたくらみ、知の楽しみ
1988년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
新しい文学のために
'최후의 소설'
「最後の小説」
1991년 히로시마의 '생명의 나무'
ヒロシマの「生命の木」
1992년 인생의 습관 (해빗)
人生の習慣(ハビット)
문학재입문
文学再入門
1993년 신년인사
新年の挨拶
1994년 소설의 경험
小説の経験
1995년 애매한 일본의 나
あいまいな日本の私
회복하는 가족
恢復する家族
1996년 일본의 '나'가 보낸 편지
日本の「私」からの手紙
느긋한 유대
ゆるやかな絆
1998년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私という小説家の作り方
2001년 '나의 나무' 아래서
「自分の木」の下で
쇄국해서는 안 된다
鎖国してはならない
말하기 어려운 탄식
言い難き嘆きもて
2003년 '새로운 사람'쪽으로
「新しい人」の方へ
2005년 말하고 생각한다 쓰고 생각한다
「話して考える」(シンク・トーク)と「書いて考える」(シンク・ライト)
2006년 회복하는 인간
「伝える言葉」プラス
2007년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한다
大江健三郎作家自身を語る
읽는 인간 - 독서강의
読む人間-読書講義
2012년 말의 정의
定義集
2023년 친밀한 편지
親密な手紙

3.4. 공저

발간년도 제목 비고
1971년 대화·원폭 후의 인간
対話・原爆後の人間
시게토 후미오와 공저
1988년 유토피아 찾기 이야기 찾기-문학의 미래를 향해
ユートピア探し 物語探し—文学の未来に向けて
이노우에 히사시, 츠츠이 야스타카와 공저
1990년 자립과 공생을 말하다—장애인·고령자와 가족·사회
自立と共生を語る—障害者・高齢者と家族・社会
우에다 사토시, 카와시마 미도리, 마사무라 키미히로와 공저
오페라를 만들다
オペラをつくる
타케미츠 토오루와 공저
1996년 일본어와 일본인의 마음
日本語と日本人の心
가와이 하야오, 다니가와 슌타로와 공저
2001년 문학과 음악을 이야기하다
同じ年に生まれて: 音楽、文学が僕らをつくった
오자와 세이지와 공저
오에 겐자부로 재발견
大江健三郎・再発見
2003년 폭력을 거스르며 쓰다 오에 겐자부로 왕복서한
暴力に逆らって書く 大江健三郎往復書簡
2006년 왜 바꾸나? 교육기본법
なぜ変える? 教育基本法
2009년 명탄 가토 슈이치 추모
冥誕 加藤周一追悼
2015년 오에 겐자부로의 말: 후루이 요시키치 대담
文学の淵を渡る

4. 정치적 성향

일반적인 정치 성향은 반전체주의, 반군국주의, 반덴노주의, 반권위주의 등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민주주의 정치 성향으로서, 좌파이자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 더 나아가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고 아키히토 천황의 훈장 수여[15]를 거부하는 등 천황제 자체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편.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도 스웨덴 국왕이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표했으나 결국에는 수여받으면서 본인은 스웨덴 국왕이 아닌 스웨덴 국민이 자신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천황제를 넘어서 군주제 자체에 반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자위대의 파병에 대해 '이라크에 대해서는 순수한 인도적 원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2004년에는 헌법 9조(평화헌법)를 지키기 위한 '9조의 회(모임)'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일본과 일본의 젊은 세대의 장래를 최대한으로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며, 2012년 영토 문제의 악순환을 막자며 독도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해서는 과거에 일본이 침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 또한, 난징대학살에서 일본군의 잘못을 인정하는 등 일본의 우익세력이 이를 갈만한 성향이다.

2014년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을 가짐으로써 20년만에 한국 언론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때는 아베 신조의 행보를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다. 아시아의 평화가 개별 국가의 번영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되어야 한단 말도 했다.

5. 여담

  • 루쉰을 20세기 가장 위대한 아시아 작가라고 평했다.#
  • 나이를 먹은 뒤로는 작품 활동보다는 에세이를 더 많이 쓰는 편이다.
  • 일본 유명 음악가로 활동하는 장남인 히카리가 자폐증 환자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오에는 상심이 컸는데, 그런 고통을 나중에 소설 '치료탑'과 '치료탑 혹성'으로 표출했다는 평도 있다. 이후 개인적 체험을 통해 아들과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이 아들인 히카리는 절대음감을 통해 유명한 음악가가 된다.
  • 처남인 영화 감독 이타미 주조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오에는 이타미 주조에 대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인간"이라고 적고 있다. #
  • 사회주의 사상가였던 고토쿠 슈스이도 이 사람과 비교해 볼 만한 인물이다.
  • 오에의 청년시절 이후의 작품들은 비비꼬인 복잡하고 난해한 문장 때문에 읽기 쉽지 않은 편이다. 오에 스스로도 자신의 문장을 '악문'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래서 그가 일본 문학계의 거성이 되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고 난 후에도 '일본 사람들은 누구나 집에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한 권씩 사 두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적다'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 엄숙해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강연을 할 때 청중에게 자작 유머를 들려주길 좋아했다고 한다. 자기 어머니가 등장하는 유머를 많이 들려줬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50년 뒤에 노벨 물리학상을 타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노벨 문학상을 타고 어머니에게 노벨상을 타서 약속을 지켰다고 당당히 말하자 어머니가 '아니.' '네가 약속한 건 물리학상이었잖니.'라며 받아쳤다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에 열리는 문화행사에 초청되어 애틀랜타에 가게 되자 어머니에게 그 말을 했더니, 어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네요. 내 아들이 글쎄 올림픽에 참가한다지 뭐에요. 걔는 뜀박질도 전혀 못하고 나이가 예순이 넘었는데...'"
  •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타카하타 이사오와 같은 도쿄대학 불문과 동기이지만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서로 이렇다할 친분을 가진 사이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의 접점이 있다고 하면 1955년 당시 도쿄대학 학우회의 기관지에 오에는 자신의 첫 소설 작품이었던 '화산'을 게재하였고 타카하타는 영화 연구회의 동인지를 기고했다고 한다.
  •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해 "이 자리에는 노벨상을 이미 받았어야 하는데 못 받은 작가 한 사람과, 앞으로 받을 사람이 세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때 '못 받은 작가 한 사람'은 르 클레지오(2008년 수상)였고, '앞으로 받을 사람 세 사람'은 오르한 파묵(2006년 수상)과 모옌(2012년 수상) 그리고 황석영이었다. 관련 기사.[16]
  •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오에씨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노벨상과는 상관 없이 원래 위대한 작가입니다"라고 말했다. # 다만 오에와 하스미는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많이 있었다. 오에가 하스미의 이름이 목차에 있는 것만으로 그 문예지를 쓰레기통에 던진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다. #

[1] 영화 감독 이타미 주조의 여동생이다. 이타미와 오에 겐자부로는 절친으로 유명하다.[2] 또한 아버지의 죽음은 훗날 노년의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하는 <익사>라는 소설을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3] 허나 민주주의가 군주제와 항상 대립하는 관계는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와 군주제가 양립한 입헌군주제라는 사례가 근현대 들어 뿌리깊게 정착되어 있으며, 오히려 민주공화제를 참칭하면서 대통령직을 왕처럼 세습하는 독재 공화국 대통령들도 수도 없이 많다. 때문에 오에가 말하는 이 "민주주의자"는 "평등주의자" 내지 "공화주의자"로 해석하는 게 더 맞다. 아키히토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천황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4] 재미있는 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상 수상을 예언한 미시마 유키오는 극단적인 덴노주의자였다. 친군국주의 vs 반군국주의로 정치성향이 완벽하게 정반대. 상술된대로 미시마 유키오는 그걸 다 알면서도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오에의 작품성을 최고라고 공식적으로 단언했으니, 문학인으로서의 평가 태도는 모범적이었다. 문학으로 한정짓지 않아도 전공투와의 대담이 의외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등 사상적으로는 극단적이여도 꽉 막힌 인물이라 평가하긴 힘들다.[5] 츠츠이 야스타카가 이 작품의 제목을 패러디해 만든 '만엔원년의 럭비'라는 단편이 있는데,거기서는 만엔원년에 일어난 사쿠라다문밖의 변을 배경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잃어버린 목을 두고 닌자들이 럭비 대결을 벌인다. 물론 공은 이이의 머리다(...)[6] 벌거벗은 채 머리와 얼굴을 빨간 페인트로 칠하고 항문에 오이를 쑤셔 박은 채 목을 매달았다. '허벅지에는 생애 마지막 정액이 묻어 있었다'라는 자비 없는 추가 묘사까지 있다![7] '네도코로'(根所)는 '네즈'로도 읽을 수 있는데,이를 이용해 주인공은 스스로를 '네즈미'(쥐)라 부른다.[8] 조선인에게 천황이란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은, 자신들이 과거 깔보고 무시하던 조선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훌륭한 정신승리법이다.[9] 농민 봉기를 일으킨 증조부 동생은 증조부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마을에 퍼진 이야기였는데, 미쓰사부로는 증조부 동생이 죽지 않고 혼자 도회지로 도망쳤음을 나타내는 증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진실은…[10] 일어 제목의 가타카나를 그대로 번역한 영향인지 체인지링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지만 작가가 영감을 얻은 서구 유럽의 설화에 나오는 존재의 올바른 표기는 영문 표기가 Changeling이므로 '체인질링'이 맞다. 서적 겉표지의 일러스트 밑에도 확연하게 Changeling이라고 쓰여 있다.[11] 자신의 불알친구이자 처남이었던 명감독 이타미 주조(1933~1997)의 자살 사건이다. 오에는 이타미의 스토리텔링에 대해 칭찬을 남겼고, 이타미 역시 오에의 소설 '조용한 생활'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그는 본격 야쿠자 까는 영화 '민보의 여자'의 내용 때문에 야쿠자에게 심한 린치를 당했을 때도 '나는 굴하지 않는다. 영화로 자유를 가로지를 것이다'라고 선언한 그런 쿨가이였다. 하지만 불륜 의혹에 대해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다만 이 자살에 대해서는 상당히 뒷말이 많다. 정작 생전 인터뷰에서 불륜 의혹에 대해서는 아내한테 물어보라고 대답한데다, 향후 스케줄도 제법 있었기 때문.[12] 작가 자신의 이름 '겐자부로'를 그대로 음독한 것이다. 절친한 친구이며 처남인 이타미 주조가 고등학교시절 붙여준 별명.[13] 오에의 장남[14] 오에 겐자부로의 60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 가운데 직접 고르고 손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15] 다만 아키히토 천황은 우익들에 비해 과거사에 대해서 상당히 전향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대해서도 김대중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자국 일본과 한국의 과거에 대해 언급하며 "반성"이라는 어휘를 언급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선왕인 간무 덴노에 대해 "백제 왕실 후손으로 알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일본 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자민당 정권과 은근히 갈등도 있던 사람이다. 다만 오에 겐자부로는 천황 개개인을 떠나 천황제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반발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16] 그 이전에도 황석영의 손님(2001년작)에 대해 "황석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유한 작가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호평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