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문학사 中文学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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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white> 루쉰[1] 鲁迅 | Lu Xu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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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000> 본명 | 저우수런(周樹人, 주수인) | |||
| 출생 | 1881년 9월 25일 | |||
| 청나라 절강성 영소대도 소흥부 회계현 동창방[2] (現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 웨청구 노신중로)[3] | ||||
| 사망 | 1936년 10월 19일 (향년 55세) | |||
| 중화민국 상하이 (現 중국 상하이시) | ||||
| 국적 | → [[중화민국| | |||
| 직업 | 작가, 평론가, 정치인 |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colcolor=white> 학력 |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중퇴) | ||
| 자 | 예재(豫才)[4] | |||
| 아명 | 아장(阿長) | |||
| 활동 기간 | 1918년 – 1936년 | |||
| 묘소 | 만국공동묘지 (1936~1956) 루쉰 공원 루쉰묘 (1956~현재) | |||
| 민족 | 한족 | |||
| 부모 | 아버지 주백의(周伯宜) (1859~1896) 어머니 노서(鲁瑞) (?~?) | |||
| 배우자 | 주안 (1878~1947) 쉬광핑 (1898~1968) | |||
| 자녀 | 아들 저우하이잉 (1929~2011) | |||
| 형제 | 남동생 저우쭤런 (1885~1967) 남동생 저우젠런 (1887~1984) | |||
| 데뷔작 | 광인일기 (1918년 4월) | |||
| 참여 운동 | 신문화운동 5.4 운동 | }}}}}}}}} | ||
1. 개요
| <nopad> |
근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5]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의 소설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날카로운 비판과 혁신적인 문체를 통해 중국 문학과 사상의 변화를 주도하면서 후대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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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루쉰/생애#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루쉰/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특징 및 성향
| <nopad> |
루쉰의 작품들은 대개 짤막짤막한 단편이지만 그 속에 깃든 철학과 예술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다. 루쉰의 문학은 혁명을 위한 문학이었으나,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6] 루쉰이 작품 속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슬로건이나 말뿐인 지식인 작가의 허위가 아닌,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뜨거운 정열, 그리고 상승하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또한 그의 글은 간결하다. 그의 문체는 핵심만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는 힘 있는 간결체 문장이다.[7]
평자들은 루쉰의 정체성은 반항인이라고 평한다. 그는 모든 부조리와 절망에 반항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공부한 것만 믿었으며 끊임없이 회의하고 도전하고 탐색했다. 그는 동서고금 다양한 사상가[8]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기의 피와 살로 소화한 다음 버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20~30대에 형성된 세계관에 기대어 세계를 해석하는데 루쉰은 거의 쉰이 된 나이에도 젊은이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사유 영역을 확장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학습하고 수용한 것이 40대 후반이었다. 특정한 사고의 틀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허물을 벗고 나아갔던 것이다. 이를 변증법적 사고라고 하는데 기존에 알고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검증하고 대체하고 변화한다. 정반합의 사고를 통해 나선식으로 계속 나아갔다. 루쉰의 연구자들은 그의 작품인 <광인일기>는 중국 역사를 식인의 역사로 규정한다. 식인으로 형상화된 국가폭력, 사회 시스템의 폭력성은 단지 1918년 중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루쉰의 글을 특정한 시대와 사회의 텍스트로만 볼 게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루쉰 사상의 근저에는 약자에 대한 속죄의식과 강자에 대한 도저한 전투의식이 있으며 몸부림치는 정신을 실천했다. 그것은 사상이라기보다는 삶의 태도다. 루쉰의 연구자들은 절망과 어둠의 시대에서 다시 일어서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내고, 쉼 없는 집요함으로 더 나은 곳을 꿈꾸는 이들, 또한 고독을 견디는 지혜를 배우고 싶은 인물들이 루쉰의 책을 읽기를 권하다고 말한다.
그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잣대를 가졌다. 사람과 사건을 동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따뜻하기보다 잔혹하다. 누구에게나 내리쬐는 햇볕처럼 내남 없이 모두를 ‘깐다’. 그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낙관 성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로 평가받는 〈광인일기〉는 현실을 고발하지만 어둡다 못해 절망적이다. 그는 전통과도 평행선을 긋는다. ‘인의 도덕(仁義 道德)’의 행간에 숨은 진짜 글자는 식인(食人)이더라는 진술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폭로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 유학과 마르크시즘을 두루 비판하는 ‘진실주의자’인 그를 상층부의 기득권자들은 불편해했다. 반대로 청년들은 허위와 과장을 혐오하는 그를 ‘인간 자석’이라고 부르며 쇳가루처럼 끌려갔다. 1930년대 이미 루쉰의 사유형태를 변증법이라고 평가하는 이가 있었다. 사유의 경계를 줄기차게 밀어나가는 것은 좋게 해석하면 끈질긴 집요함이라고 표현하겠지만, 어떤 이의 눈에서는 융통성 없음으로 비칠 수 있었다.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내던 루쉰은 1926년 천안문에서 매판적인 돤치루이 정부에 항의하던 시위대 47명이 학살당한 이른바 ‘3·18 참사’ 때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군벌을 비판했다가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후에 대학을 떠나 잡문과 강연을 통해 우익에 대한 비판적 정치적 입장을 계속 글로 썼다. 그는 중국좌익작가연맹에도 참여했고, 판화운동도 전개했다. 그는 권력도 싫어하고 사람 많은 곳도 싫어했지만, 그의 삶은 정치적이었다. 루쉰의 철학 사상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사상의 출발점은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한다’라는 것이다. 루쉰은 자신을 ‘중간물’이라고 했다. 생명의 사슬에서 지금 여기 존재하는 중간자인 것이다. 삶이란 중간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 출발점이었다. 루쉰은 봉건 시대의 끝에 태어나 70여년간 중국의 구국운동이 실패한 것을 목격했다. 아편전쟁 패전부터 양무운동, 변법유신운동, 신해혁명의 실패까지. 그는 전통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변화하여 새 시대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그의 혁명사상이 있게 된다. 그가 생각하는 혁명은 중국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이었다. ‘미완의 혁명을 위해서 계속 나아가는 사람’을 진정한 혁명인이라고 했다.
이욱연 서강대학교 중국문화학과 교수는 그의 사상을 중간물 사상이라고 평했다. "루쉰 사상의 독특한 점은 자신은 어둠의 마지막 인물이며 새 시대의 주인공이 못 된다는 생각이죠. 그는 내가 새 시대를 열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어둠과 같이 쓰러질 터이니 청년들이 새로운 세상에 서라고 했어요. 자신을 포함해 어른들은 아무리 깨끗한 척해도 때가 묻어 있다는 거죠. 죄인 의식 혹은 희생 의식입니다. 역사가 발전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죠. 지금 한국 청년들은 어른들에게 그런 의식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학생들은 루쉰의 이런 생각이 담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 같은 산문을 보며 통쾌해 하죠. 루쉰은 다수의 힘을 누구보다 믿지만 다수가 가진 어둠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민중이 떨치지 못한 노예 정신 같은 게 대표적이죠.[9] 그 때문에 다수 민중이 건설뿐 아니라 파괴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수의 빛과 그늘을 늘 같이 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죠. 루쉰은 또 자기다움을 강조해요. 특히 생각의 자기다움이죠. 옛날부터 그래 왔고, 다수가 옳다고 해서 옳은 일이냐는 거죠. 요즘 사람들이 과잉 정치화하면서 자기 판단이 중지되기도 하잖아요. 루쉰은 모든 문명에는 다 편향이 있다면서 근대도 역사의 한 시기일 뿐이라고 해요. 그래서 근대도 성취와 그늘을 함께 봐야 한다고 하죠. 이런 통찰은 청년들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욱연 교수는 루쉰 문학의 가장 위대한 점을 “위선이 없는 거죠. 어둠 자체가 루쉰의 문학입니다. 삶이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둠이죠. 삶의 어둠 자체를 계속 드러내는, 절망적인 항전의 문학이죠. 계몽문학과 다른 점이죠.”라고 평했다.#
4. 위상 및 영향력
근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이자,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평가받는다.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 천두슈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입을 근대화의 첫걸음으로 여겼다. 이에 호응하여 나온 것이 후스의 문학 혁명이다. 그의 문학혁명은 백화문의 보급이다. 그는 모든 국민이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근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근대화의 필수 조건인 문학혁명을 실천하고 성공으로 이끈 것이 바로 루쉰이다. 그의 소설은 중국이 봉건주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하던 과도기에 중국인들이 체험하였던 고통과 혼란과 방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2000여 년간 쌓이고 쌓여 왔던 봉건주의 전통 사회의 거대한 탑이 붕괴되는 현상은 중국인들로서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루쉰은 봉건주의라는 전통 사회의 미망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문학 작품을 통해 계몽하여 봉건 윤리라는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앞장서서 중국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루쉰은 중국에선 마오쩌둥에 의해 신격화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루쉰 전집은 살아남았다. 중요한 것은 루쉰의 의도와 상관없이 루쉰의 이미지가 넘사벽의 위인으로 화석화됐다는 거다. 마오쩌둥은 루쉰 정신으로 식민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루쉰은 공산주의자 이미지가 돼버렸다. 루쉰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뒤 공산당중앙은 루쉰을 "공산주의 소비에트운동의 친애하는 전우"로 일컫고, 서거 1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마오쩌둥은 루쉰을 "공산당의 조직원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 행동, 저작은 모두 마르크스주의화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루쉰을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 혁명가"로 자리매김한다. 이건 루쉰을 문화적 아이콘으로써 선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루쉰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중국공산당의 혁명적 자원으로 독차지한 셈이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사상가임을 중심으로 부각된 루쉰 때문에, 문인으로서 그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때문에 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에서 문인으로 루쉰을 더 자세히 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루쉰이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소설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는 그의 내적 모순과 다양한 갈등을 분석하기 위한 작업도 중시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루쉰 작품이 전해진다. 1948년 이후 한국에선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중국과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은 금기시됐고,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루쉰에 대한 편견도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받아들인 루쉰의 모습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1920년대는 무정부주의자, 1930년대는 좌파 작가, 1960~1970년대 오면 실천적 지식인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평자들은 읽는 사람의 환경과 사고의 스펙트럼에 따라 루쉰을 굉장히 다양하게 읽게 된다고 평한다.[10]
루쉰의 작품은 중국 밖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그의 작품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권에서도 널리 애독되고있다. 일본에서도 중학교의 모든 국어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서양권에서도 유명하며 가장 인지도 높은 근현대 중화권 소설가다. 그의 소설 《광인일기》는 노벨연구소 선정 세계 100대 문학에 포함됐다.[11] 1986년, 문학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모든 제3세계 문학이 취하는 국가적 우화 형식의 최고의 예로 《광인일기》를 인용했다. 문해 비평가 글로리아 데이비스는 루쉰을 프리드리히 니체와 비교하면서 두 사람 모두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대 건축에 갇혀 있었다"고 말한다. 비평가 레오나르도 비토리오 아레나의 말에 따르면, 루쉰은 니체의 스타일과 컨텐츠가 과도하기 때문에 니체의 매력과 거부감이 뒤섞인 니체에 대한 모호한 관점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한편 루쉰은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와 비교되는데, 루쉰이 중국 민중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무지함과 천박함을 그대로 묘사했다면 톨스토이는 정반대로 기독교 이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민중들을 현실보다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작품 목록
5.1. 소설집
| 순서 | 제목 | 발간년도 |
| 제1소설집[12] 납합[13](吶喊) | ||
| 1 | <colbgcolor=#ffffff,#1c1d1f> 자서 自序 | <colbgcolor=#ffffff,#1c1d1f> 1922년 12월 |
| 2 | 광인일기 狂人日記 | 1918년 4월 |
| 3 | 쿵이지[14] 孔乙己 | 1919년 3월 |
| 4 | 약 藥 | 1919년 4월 |
| 5 | 내일 明天 | 1919년 6월 |
| 6 | 작은 사건 一件小事 | 1920년 7월 |
| 7 | 머리털 이야기 頭髮的故事 | 1920년 10월 |
| 8 | 풍파 風波 | 1920년 8월 |
| 9 | 고향 故鄕 | 1921년 1월 |
| 10 | 아Q정전 阿Q正傳 | 1921년 12월 |
| 11 | 단오절 端午節 | 1922년 6월 |
| 12 | 흰 빛 白光 | 1922년 6월 |
| 13 | 토끼와 고양이 兔和猫 | 1922년 10월 |
| 14 | 오리의 희극 鴨的喜劇 | 1922년 10월 |
| 15 | 마을 연극 社戲 | 1922년 10월 |
| 제2소설집[15] 방황(彷徨) | ||
| 16 | 복을 비는 제사 祝福 | 1924년 2월 16일 |
| 17 | 술집에서 在酒樓上 | 1924년 2월 16일 |
| 18 | 행복한 가정 幸福的家庭 | 1924년 2월 18일 |
| 19 | 비누 肥皂 | 1924년 3월 22일 |
| 20 | 장명등 長明等燈 | 1925년 3월 11일 |
| 21 | 조리 돌리기 示衆 | 1925년 3월 18일 |
| 22 | 까오선생 高老夫子 | 1925년 5월 1일 |
| 23 | 고독한 사람 孤獨者 | 1925년 10월 17일 |
| 24 | 죽음을 슬퍼하며 傷逝 | 1925년 10월 21일 |
| 25 | 형제 弟兄 | 1925년 11월 3일 |
| 26 | 이혼 離婚 | 1925년 11월 6일 |
| 제3소설집[16] 고사신편(故事新編) | ||
| 27 | 서언[17] 序言 | |
| 28 |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18] 補天 | 1930년 1월 |
| 29 | 달로 달아난 상아[19] 奔月 | 1927년 1월 |
| 30 | 치수[20] 理水 | 1926년 |
| 31 | 고사리를 캐는 사람[21] 採薇 | 1925년 |
| 32 | 도공의 복수[22] 鑄劍 | 1936년 |
| 33 | 출경[23] 出關 | 1936년 1월 20일 |
| 34 | 전쟁 반대[24] 非攻 | 1934년 8월 |
| 35 | 죽은 자 살리기[25] 起死 | 1934년 12월 |
5.2. 국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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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소설의 번역의 최고봉은 김시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로 꼽힌다. 김시준 교수가 번역한 루쉰 소설 전집은 1996년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번역됐고, 2008년 을유문화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루쉰이 일생 동안 발표한 소설들을 엮은 소설 전집은 <납함>, <방황>, <고사신편> 3권에 수록된 작품들을 모두 번역한 완역본 소설 전집을 냈다. 가격도 저렴하고 번역도 훌륭해 루쉰의 문학 세계가 궁금하면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김시준 교수는 평생을 중국 현대문학 연구에 천착하여 유려한 문체로 루쉰 소설의 감동을 되살렸다.[26] 김시준 교수의 번역은 전공자들의 루쉰 소설 번역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서 있다. “아직도 이 번역을 능가하는 후학자들의 번역이 드물다”라고 평가될만큼 국내 루쉰 번역에서는 단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무엇보다 루쉰 문학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장 표준적인 번역’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으며, 번역의 정확성 역시 큰 신뢰를 얻고 있다. 이 번역은 교수 신문이 뽑은 최고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루쉰의 소설 전집은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목록#, 서강대학교 필독서 목록에도 올라와 있다.#
2011년 고인돌 출판사에서 '한 권으로 읽는 루쉰 문학 선집'을 공개했다. 루쉰의 수많은 저작 중에 소설집 <납함> <방황>을 제외하고 가려 뽑아 1권에 5책을 담은 '선집'이다. 5책은 <잡문>, <수필집>, <서한집>, <양지서>, <고사신편>이다. 1책 '잡문'에는 루쉰이 일생 동안 가장 많이 쓴 '짧은 비평', 그가 쓴 사회비평과 문화비평 뿌리를 이루고 있는 글이 실려 있다. 2책 '수필집'에는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쓴 산문 모음이다. 3책 '서한집'은 편지글 모음이며, 4책 '양지서'는 루쉰과 그가 사랑했던 애인 쉬광핑과 나눈 서간집이다. 5책 '고사신편'은 루쉰 최후 창작집인 '고사신편'에 실린 역사소설들이다.
'1권 5책'이란 표현을 쓴 것은 5권을 1권으로 묶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가 '루쉰 문학 선집' 해설을 쓰고, 옮긴이 송춘남이 '영원한 루쉰'을 썼다. 글을 뽑은 잣대는, 루쉰의 저작 가운데 널리 읽히는 글들만 뽑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펴낸 고인돌 출판사 정낙묵 대표는 "<한권으로 읽는 루쉰문학선집>은 일반 독자들이 방대한 루쉰의 문학과 사상에서 '숲과 나무', '전체와 부분'을 아울러 볼 수 있게 기획되었다"라며 "그동안 단편적인 부분 번역 출판은 '나무는 보되 숲을 볼 수 없었고', 루쉰의 방대한 저술을 다 번역 출판한다 해도 연구자들에게는 유용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숲을 보지만 나무를 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이 책을 펴낸 까닭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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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그린비 출판사에서 국내 중문학자들로 구성된 루쉰전집번역위원회가 '루쉰 전집' 총 20권을 완간했다. 2007년 번역에 착수해 2010년 1차분으로 3권을 출간한 뒤 11년 만에 모든 작업을 마쳤다. 번역은 중국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에서 펴낸 루쉰 전집 1981년판과 2005년판 등을 저본으로 삼았다.
6. 어록
6.1. 그에 대한 언사
독창성의 원천. 중국 민족 문화의 원천. 루쉰은 셰익스피어가 영국에서, 톨스토이가 러시아에서, 괴테가 독일에서, 타고르가 인도에서의 위치와 같다.
― 첸리췬 (베이징대학 문학 교수)#
― 첸리췬 (베이징대학 문학 교수)#
중국 현대문학의 누구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옌조차도 ‘루쉰의 영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후 역사에서도 루쉰 정신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류즈취안 (난징대학 문학학원 원장)#
― 류즈취안 (난징대학 문학학원 원장)#
중국 문학 경전에서, 루쉰은 찰스 디킨스와 제임스 조이스가 하나로 합쳐진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무자비하게 예민한 관찰자; 그리고 언어와 형태를 다시 만든 사람.
― 더 가디언#
― 더 가디언#
현대 중국의 걸출한 문인으로 널리 알려진 루쉰은 한 나라의 양심의 목소리로 존경 받고 있으며, 위상과 영향력 면에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에 필적하는 작가다.
― Lu Xun's Revolution #
― Lu Xun's Revolution #
루쉰은 중국의 첫 번째 성인(聖人)이다. 중국 최초의 성인은 공자도 나도 아니다. 나는 현명한 사람으로, 성인의 학생이다.[27]#
루쉰은 이 새로운 문화 세력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용기 있는 최고 사령관이었습니다. 중국 문화혁명의 최고 사령관인 그는 문단의 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습니다. 루쉰은 고집불통이나 비굴함에서 벗어나 고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질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민들 사이에서 매우 귀중합니다. 국가의 대다수를 대표하는 루쉰은 적의 성채를 침입하여 습격했습니다; 문화적 전선에서 그는 가장 용감하고 올바르며, 가장 확고하고,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열렬한 국가적 영웅이었고,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길은 중국의 새로운 국가 문화의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 마오쩌둥[28]
루쉰은 이 새로운 문화 세력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용기 있는 최고 사령관이었습니다. 중국 문화혁명의 최고 사령관인 그는 문단의 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습니다. 루쉰은 고집불통이나 비굴함에서 벗어나 고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질은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민들 사이에서 매우 귀중합니다. 국가의 대다수를 대표하는 루쉰은 적의 성채를 침입하여 습격했습니다; 문화적 전선에서 그는 가장 용감하고 올바르며, 가장 확고하고,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열렬한 국가적 영웅이었고,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길은 중국의 새로운 국가 문화의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 마오쩌둥[28]
오늘날 중국 문인들이 그를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루쉰 선생'이라고 하며, 마오둔, 바진, 선충원, 차오위, 라오서, 빙심 등에 대해서도 그렇게 직접 그 이름을 부르지는 않는다. (중략) 루쉰 선생은 중국인의 보편적인 존경을 받았는데, 단지 그가 걸출한 작가, 문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정신은 '작가'라는 호칭을 훨씬 능가한다. 그는 인생에서 한 마디도 한 번도 쓰지 않더라도 여전히 중국 국가에서 위대한 인물이다. 하늘을 가엾게 여기는 그의 마음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민중을 일깨우는 일에 매진하였기 때문에, 비참한 중화민족을 진흥시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이러한 위대한 사람을, 중국인들은 '지사인인[29]'이라고 부른다.
― 김용#
― 김용#
중국에 신문학 운동이 생긴 이래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묻는다면? 누가 가장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을까?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루쉰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루쉰의 소설은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이 방면의 모든 걸작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수필에 얽힌 잡감은 옛사람과는 달리 뒤쫓을 수 없는 풍격을 제공하는데, 먼저 그 특색이 관찰의 깊이, 화술의 날카로움, 문필의 간결함, 비유의 묘미, 그리고 유머가 넘치는 분위기에서 독주를 마셔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처절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는 데 열심일 때 그는 이미 고금동서를 장악했다. 중국의 민족정신을 전면적으로 이해하려면 《루쉰전집》을 읽는 것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 위다푸#
― 위다푸#
대략 18년간 루쉰은 중국 문단의 중심적 위치에서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문단의 중심으로 뚜렷이 인식한 것은 그가 죽고 나서였다. 생전에는 그를 찬성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이 반반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비난하는 쪽이 많았다. (중략) 살아생전 그는 문단 생활의 많은 부분을 논쟁 속에서 보냈다. (중략) 불량 학자, 타락 문인, 위선자, 반동분자, 봉건 유물, 독설가, 변절자, 돈키호테, 잡문장이, 매판, 허무주의자 등 오로지 루쉰을 비방하기 위해 고안해낸 이 수많은 조롱들은 그가 사용한 필명에도 뒤지지 않을 다채로움으로 논쟁의 격렬함과 성격을 암시한다.
― 다케우치 요시미 (중국학자)#
― 다케우치 요시미 (중국학자)#
19세기에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와 스탕달이 있을 것이고, 대영제국에는 찰스 디킨스가 있을 것이고, 인도에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있을 것이고,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실러가 있을 것이고, 러시아에는 레프 톨스토이가 있을 것이고, 미국에는 마크 트웨인과 에밀리 디킨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중국은 어떨까요? 그의 문학적인 업적과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저는 모든 중국인이 루쉰이라고 답할것라고 생각합니다.
― 중국의 세기의 거장들#
― 중국의 세기의 거장들#
6.2. 본인 어록
앞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무리 선명하고 보기 좋은 깃발이라 할지라도, 무릇 언동이나 사상 속에 그것을 빙자하여 자기 소유로 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자는 도적이며, 그것을 빙자하여 눈앞의 하찮은 이익을 차지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자는 노예이다.
젊은 영혼들이 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그들은 벌써 거칠어져 있거나, 거칠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 피 흘리면서 아픔을 견뎌내는 영혼을 사랑한다. 내가 인간 세상에 있음을,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 마음 유난히 쓸쓸하다. (중략) 이전에 내 가슴속에도 피와 쇠붙이, 불꽃과 독기, 회복과 복수의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 찬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홀연히 이런 것들이 모두 공허해져버렸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속이는 덧없는 희망으로 그 빈자리를 메워보려 했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이라는 방패로 그 공허한 가운데의 어두운 밤을 막아보려 애썼다. 하긴 이 방패 뒤에는 여전히 어두운 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의 청춘을 소진시켰다.
말없이 누워 때때로 찾아 오는 고통스런 생각과 마주한다. 이런 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꼭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최후의 진통이 평온한 것이 아니라 해도 내 일생에 한번 일어나고야 말 일이라면 나는 죽음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천재란 깊은 숲속이나 거친 들판에 절로 나서 자라는 괴물이 아니라 천재가 생겨나고 자랄 수 있는 민중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민중 없이는 천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튼튼한 나무가 있기를 바라고 고운 꽃을 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좋은 흙이 있어야지요. 흙이 없으면 꽃도 나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꽃이나 나무보다 흙이 더 중요합니다
먹으로 쓰인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을 수 없다.
상술한 1926년 3월 18일, 천안문에서 시위대 47명이 학살당한 '3·18 참사' 당시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군벌을 비판하며 쓴 글의 구절 중 하나.[31]
상술한 1926년 3월 18일, 천안문에서 시위대 47명이 학살당한 '3·18 참사' 당시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군벌을 비판하며 쓴 글의 구절 중 하나.[31]
지금은 아주 절박한 시기이다. 작가는 해로운 사물에 대해 즉각 반응하거나 항의하고 투쟁하는, 느낌과 반응의 신경, 공격과 방어의 수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편 대작에 마음을 두고 앞으로 세워야 할 문화를 설계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현재를 위해 항쟁하는 것 역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현재를 잃는다면 미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길은 아직 얼마든지 있다. 나는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떻게 해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지를 모른다. 때로는 마치 그 삶의 길이 한 마리의 회색빛 뱀처럼 스스로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기다리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자 갑자기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비평할 때는 반드시 우선 자신을 비평하고 또 거짓으로 하지 말아야만 비로소 말이 말 같아지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면목이 설 것이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아직 있다면, 그들은 먼저 큰소리로 말하고, 웃고, 울고, 울며, 화내고, 비난하고, 싸워야 한다. 그들은 적어도 이 저주받은 장소에서 그 저주받은 분위기를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먼저 대담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는 할 수도 없고, 더 뒤에 가서는 당연히 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게 된다.
누군가 게를 먹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거미를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맛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먹는 것을 중단했다. 이 사람들은 또한 우리의 진심어린 감사를 받을 만하다.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항상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다른 사람을 먹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도 마찬가지로 노예로 부려지고 먹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망각한다.
진정한 투사들은 인류의 슬픔을 감히 맞닥뜨리고, 끊임없이 유혈 사태를 바라본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러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주의 공통적인 장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창백한 핏자국과 막연한 고통만을 남긴 채 오래된 흔적들을 씻어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이러한 반인간적인 세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무뚝뚝하게 살아가게 한다.
비굴한 자일수록 주인의 사랑을 받는 법이다.
사자라면 얼마나 비대한지를 자랑한다고 해도 문제 되지 않지만, 돼지나 양이라면 비대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나는 이제 우리 스스로가 무엇과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미 스러져 간 그 쓸쓸한 시간들을 정신의 실오라기로 붙들어 매어 둔들 또 무슨 의미가 있으랴.
타인에 대해서는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공리를 요구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저승에서까지도 사정을 봐주기를 바란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리는 아주 현묘하다. 마음은 물론 살아야 하거니와 지나치게 살아서는 안 된다.
분명 나는 종종 남을 해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더 사정없이 나 자신을 해부한다. 조금만 발표해도 따뜻함을 몹시 좋아하는 인물들은 이내 냉혹함을 느껴 버리는데, 만약 내 피와 살을 전부 드러낸다면 그 말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반응이 없는 것보다야 그래도 행복한 일이다. 세상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이 많지만, 오로지 스스로 마음 편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날의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 죽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일찍이 살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썩었다. 나는 이 썩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공허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 오로지 추억만 남아 있다면 아마도 그 생애는 무료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나, 하지만 때로는 추억마저도 없을 때가 있다. 중국에서 글을 짓는 데는 규범이 있으며, 세상일도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
우리 삶을 구원하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다.
새로운 삶의 길은 아직 얼마든지 있다. 나는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떻게 해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지를 모른다. 때로는 마치 그 삶의 길이 한 마리의 회색빛 뱀처럼 스스로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기다리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자 갑자기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껏 내가 슬픔에 빠져 있다고 해서 홀연 색깔을 바꾸는 가을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번잡함을 좋아하든지 고요함을 좋아하든지 간에 바람이 불어야만 대해가 울부짖었다.
펜촉이라면 날카로워야 하고 뚫을 수도 있어야 한다.
'돌진하기'는 가장 시원스러운 전법이다. 자동차 대열이 종횡으로 돌진하여 적들로 하여금 바퀴 아래에서 죽거나 다치게 하니 얼마나 간편한가.
복고하는 사람이나 피난하는 사람은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 간에 모두 벌써 300년 전의 태평성세, 즉 ‘잠시 안정적으로 노예가 된 시대’에 마음이 끌리고 있는 듯하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놓인 길과도 같은 것이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32]
물에 빠졌건 빠지지 않았건 사람을 무는 개는 때려야 한다.[33]
나 역시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참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체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중략) 하지만 나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인간세상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뿐이다. 40여 명 청년의 피가 주변에 흘러념쳐 숨이 막히고 보기도 힘든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 비분을 글로 쓴다 해도 그것은 아픔이 가라앉은 뒤라야 할 것이다.(중략) 나는 나의 더 없는 애통을 이 비인간적인 세상에 공개하여 그것으로 나의 고통을 위안할 것이며 이것을 죽은 자에 대한 약소한 제물로 삼아 영전에 삼가 바치리라.
자식은 자기의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져 있기에 또한 인류 속의 사람이다. 자기 것일진대 더욱 교육에 의무를 다하고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하고 또 내 것이 아니기에 해방시켜야 하고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해주어야 하며 하나의 독립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청춘시대에 갖가지 우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이 되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중국인에게는 쌓이고 쌓인 원망과 분노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그 분노는 물론 강자의 유린을 받아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강자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약한 자한테 터뜨린다.
그 분노는 물론 강자의 유린을 받아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강자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약한 자한테 터뜨린다.
중국에서는, 특히 도시에서, 누군가가 병에 걸려 길에서 쓰러지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면, 많은 행인들이 구경하고 즐기기 위해 서 있을 것이지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국가로서, 중국인들은 타협하고 중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방이 너무 어둡고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확실히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붕을 제거할 것을 제안하면, 그들은 중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창문을 여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부자가 된 후에 2가지 다른 방향들 중 하나로 갈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볼 것이고, 그리고 인도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전의 고난은 그들에게 세상이 잔인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될 것 입니다. 일부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중국에는 아마도 이기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나는 왜 중국인들이 오래된 환경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고 우울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은 현재와 타협하지만 새로운 것에 완벽을 요구합니까.
이전에, 나는 사람들이 유죄이기 때문에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악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너무 오랫동안 마스크를 쓴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얼굴에서 자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다시 벗기고 싶다면, 당신의 피부를 찢고 뼈를 부러뜨려야 할 것이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고 해서 맞는 말인가?
유럽 사람들은 임종 시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라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행한다. 나는 원한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신식 인물들이 내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끝에 나는 결심했다. 그들이 나를 증오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나 역시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34]
사나운 짐승들은 항상 혼자 걷는다. 소와 양만 무리를 지어 모이면 된다.
루쉰: "가령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그런 방 말이야. 만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면, 얼마 안 가서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러나 잠을 자다가 죽은 것이니까 죽어가는 고통을 느낄 수는 없을 걸세. 그런데 자네가 크게 소리쳐서 잠이 덜 든 몇 사람을 깨워놓는다면, 그 불행한 몇몇은 임종의 쓰라린 고통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러고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첸쉬안퉁(錢玄同): "아닐세, 몇몇 사람이 깨어났으니 그 무쇠 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네."
루쉰이 "광인일기"를 쓴 계기가 되었다는 대화.
첸쉬안퉁(錢玄同): "아닐세, 몇몇 사람이 깨어났으니 그 무쇠 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네."
루쉰이 "광인일기"를 쓴 계기가 되었다는 대화.
이미 완전히 다른 현실이지만 전혀 어둠이나 빛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중국의 문인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만사에 눈을 감고 잠시나마 스스로 속이고 남도 속인다. 그 방법은 바로 감춤과 속임이다.
역사서에서 (오대, 남송, 명말 등등) 기록한 것을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비슷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유독 우리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하다. 현재의 중화민국은 여전히 오대요, 송말이요, 명말이다.
현상을 바꾸지 않고도 흥성할 수 있고 진실로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야만적인 삶도 너무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길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서 생겨난 것이고 가시덤불로 뒤덮인 곳을 개척하여 생겨난 것이다. 예전에도 길이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길은 생길 것이다.
진정한 전사들은 감히 인생의 비참함을 직시하고, 흘러내리는 피와 맞서 싸운다.
나는 시대의 폐단을 공격한 모든 글은 반드시 시대의 폐단과 더불어 사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혈구가 종기를 생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거되지 않으면, 다시말하면 자신의 생명유지는 바로 병균이 여전히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통과 인생이란 항상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고통이 잠시 사라질 때가 있다면 단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뿐입니다. ‘오만’과 ‘냉소주의’는 깨어 있는 동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뿐이지요.
살면서 벗 하나를 얻는다면 무엇을 더 바라리(人生得一知己足矣).
이 세상 마땅히 같은 마음을 품고 바라보아야 하리(斯世當以同懷視之).
이 세상 마땅히 같은 마음을 품고 바라보아야 하리(斯世當以同懷視之).
凡是愚弱的國民,即使體格如何健全,如何茁壯,也只能做毫無意義的示眾的材料和看客,病死多少是不必以為不幸的
무지한 인민들이여,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힘이 강력한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오직 목적없는 진열대나 감시자처럼 섬길 수만 있다. 우리는 그들이 죽거나 병에 걸렸을때 슬퍼할 필요가 없다.
무지한 인민들이여,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힘이 강력한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오직 목적없는 진열대나 감시자처럼 섬길 수만 있다. 우리는 그들이 죽거나 병에 걸렸을때 슬퍼할 필요가 없다.
横眉冷对千夫指
俯首甘为孺子牛
매서운 눈초리로 뭇 사람들의 질타에 맞서며
기꺼이 머리숙이고 대중을 위해 봉사하리라.
俯首甘为孺子牛
매서운 눈초리로 뭇 사람들의 질타에 맞서며
기꺼이 머리숙이고 대중을 위해 봉사하리라.
아이들은 커서 재능이 없다면, 조그만 직업들을 택해서 살도록 하라. 절대로 실속 없는 문학자나 음악가나 미술가 등이 되지 말도록 하라.
나는 하나의 종착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에 있다. 물론 길은 한 가닥이 아니다.
루쉰의 묘비명
루쉰의 묘비명
희망은 허무한 것이다. 마치 절망이 그러한 것처럼.
실은 혁명이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일이다.
사람이 적요(寂寥)를 느낄 때, 창작이 생긴다. 공막을 느끼면 창작이 생기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사랑할 것이 없으므로, 필경 창작은 사랑에 뿌리박는 것이다.
漢字不滅,中國必亡。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
모든 문학(문예)은 선전이지만, 모든 선전이 문학(문예)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꽃이 다 색을 지니고 있지만 색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꽃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혁명이 구호나 표어, 포고, 전보, 교과서 외에 문학(문예)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문예)이기 때문이다.
7. 기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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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훙커우구에 위치한 루쉰공원(鲁迅公园, 루신궁위안)은 루쉰의 묘와 기념관, 윤봉길 의사 추모관인 매원(梅园)이 있다. 이 곳은 과거에는 훙커우공원(虹口公园, 홍구 공원)이라고 불렸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우리에게 유명한 훙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다. 공원 내부에 루쉰 기념관도 같이 있다. 기념관에는 그가 소장한 생필품, 사진, 예술품 20,000여점의 물품이 있으며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루쉰의 문학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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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 기념관 |
루신공원은 1898년 조성되었으며 1956년 루쉰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루쉰기념관이 들어서면서 훙커우 공원에서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7년 루쉰은 장제스의 국민당 혁명 후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상하이로 이주 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루쉰공원을 즐겨 산책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중국인들은 루쉰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고 공원의 이름도 루쉰 공원으로 바꾸었다. 상하이루쉰기념관(上海鲁迅纪念馆)은 1950년 봄에 화둥군정위원회(华东军政委员会) 문화부(文化部)의 건설계획으로 셰단루(谢旦如)가 건설기획을 담당해 산양로(山阴路) ‘상하이루쉰옛집(上海鲁迅故居)’ 근처에 설립했고, 1951년 1월 7일에 정식으로 개방했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관명을 썼다. 이 기념관은 1956년 9월에 훙커우공원(虹口公园), 지금의 루쉰공원(鲁迅公园)으로 이전했다. 또 루쉰 서거 20주기인 10월에, 루쉰의 묘(鲁迅墓)도 만국공묘(万国公墓)에서 이장했고, 현재의 비문을 당시 마오쩌둥이 썼다. 상하이루쉰기념관은 1층에 문화명인 지원센터인 조화문고(朝华文库), 학술세미나실 서우런탕(树人堂), 테마전람실 분류예원(奔流艺苑) 등이 마련되어 있어 루쉰 문학 및 문화 관련 행사 겸 전시실로 사용되고, 2층은 ‘루쉰생평진열청(鲁迅生平陈列厅)’이다. 현재 루쉰 기념관에는 대략 20만 건의 자료가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루쉰이 상하이에서 10년 동안 활동했던 내용들로 주를 이룬다. 전시관 안에는 루쉰의 대표작과 그가 잡지에 기고한 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그의 중편소설인 《아Q정전》은 관련 영화 상영과 함께 소설 줄거리를 미니어처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진열된 전시물을 따라 쭉 거닐다 보면 루쉰이 쓴 에세이들을 비롯해서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을 볼 수 있다.디시 유저의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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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의 묘지 |
기념관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는 루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루쉰의 시신은 만국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가, 1956년 루쉰 사망 2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의 루쉰공원으로 옮겨졌다. 루쉰의 부인 쉬광핑(许广平)과 자녀인 저우하이잉(周海婴)이 묘 양 옆에 심은 2그루의 전나무가 있다. 공원은 상하이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공원이다. 개방시간은 오전 5시부터 19시까지이며 입장료는 없다.
고향 사오싱의 루쉰 생가 겸 기념관
8. 기타
- 그의 이름을 딴 루쉰문학상은 마오둔문학상[35]과 함께 중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루쉰문학상은 종합 문학상이다. 장편소설과 중·단편소설, 번역, 시 등 4개 부문을 3년마다 시상한다.#
-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인 모옌, 옌롄커, 위화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다. 위화는 "루쉰의 중국 사회에 대한 조롱을 보면 매우 유쾌하다"며 "루쉰이 아직 살아 있다면 차도 마시고 담배도 피면서 함께 이야기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중어중문학과 학생들에게는 끝판왕급 인물이다. 국어국문학과의 정철, 영어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 일어일문학과의 나쓰메 소세키, 독어독문학과의 괴테, 불어불문학과의 빅토르 위고, 노어노문학과의 톨스토이, 서어서문학과의 세르반테스 같은 존재. 중문학도들에게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루쉰이다.[36] 중문학과 학생들은 루쉰 소설을 읽지 않고는 전공 수업을 들을 수가 없는 급이다. 왜냐하면 중국 근현대문학사를 다루는 모든 전공 수업에서 그의 출현 빈도가 엄청나게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문학과 학생들에게는 너무 자주 나오다보니 악몽과도 같은 인물이다.
- 해외소설을 대거 연환화로 만드는 작업에 나선 적이 있다. 다만 중국 내에서 연환화 작가는 일반적인 만화가와는 따로 취급하는 듯.
- 생전에 루쉰은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후스를 치고, 가장 훌륭한 산문가 셋 중의 하나로 린위탕을 꼽았다.
- 루쉰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본래 저우(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다. 루쉰은 그가 작가 활동을 하면서 지은 필명으로, 러시아 제국의 문호 투르게네프의 소설 <루딘>의 주인공인 청년 지식인 '루딘'[37]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다른 설로는, 루쉰 생전의 절친이었던 쉬서우장(许寿裳)이 말하기를 자신이 루쉰에게 필명에 대해 물어봤고 루쉰은 루(鲁, 노씨)가 어머니의 성씨고 쉰(迅)은 자신의 아명이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필명을 지음으로서 "우둔하지만 빠르다(愚鲁而迅速)" 라는 의미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 생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다른 근현대 중문학의 중요한 인물 궈모뤄는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나팔수’였던 반면, 루쉰은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차이는 궈모뤄가 희곡에 공을 들인 극작가이기도 했으나, 루쉰은 희곡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연극을 증오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 루쉰에게 두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큰동생 저우쭤런(주작인(周作人), 1885~1967)은 루쉰처럼 문학을 공부했으며 신문화운동에도 함께 참여한다. 저우쭤런은 문학이론가,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그 명성은 훼손된다. 전쟁으로 베이징 등 주요 도시의 일본군이 진주하자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등 많은 대학의 교수들은 협력을 거부한 채 낙향하거나 쿤밍에 세워진 시난연합대학으로 강단을 옮긴다. 그러나 베이징대학에서 일하고 있던 저우쭤런은 베이징에 남아 베이징대학 총장, 왕징웨이 정권의 교육청 독판(교육부 장관)을 지낸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기도 한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1남 2녀를 얻었는데 전쟁 중 보여준 그의 친일적 행보로 인해 종전 직후 국민정부는 저우쭤런을 한간으로 처벌했다. 14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했는데 같은 친일 한간으로 총살당한 딩모춘을 기리는 시를 썼다가 더 욕먹어야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한간이라고 욕먹으며 복권되지 못한 채 1967년 삶을 마무리해야 했다. 반면 1888년생으로 막내인 저우젠런(주건인,周建人)은 생물학을 공부했는데, 국공내전 중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중공 수립 이후 고향인 저장성의 성장과 교육부 부부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요직을 맡으며 존경받다가 1984년 만 95세로 눈을 감으며 장수했다.
- 후스 등과 함께 한문 대신 상대적으로 쉬운 백화문을 쓰자는 백화운동을 벌여 중국에서 한문을 몰아내고 북경어 백화문에 기반한 표준 중국어(글말)를 쓰게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본인부터가 문학작품을 한문이 아닌 백화문으로 썼다.
- 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38] 마오쩌둥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마침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라 문화계 인사들의 행로가 화제에 올랐는데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한 틈을 타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 실제로 루쉰이 마오쩌둥 집권기까지 장수했다면 십중팔구 감옥 신세였을 것이다. 루쉰 성격이나 행보를 보면 마오쩌둥의 정치 방식에 동조할리 만무할 테니까.
- 자기 나라의 중국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을 이기적이고 허세와 정신승리를 잘 드러내며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고 쓸데없이 외래문화에 배타적이라고 주장했다.[39] 루쉰이 생각한 중국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아Q정전〉이다. 그런 시각에서 한자 폐지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漢字不滅,中國必亡。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
-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작 외국인이 중국인을 이렇게 비판하면 그건 또 싫어했다. 펄 벅을 비난하고 그녀 대표작인 《대지》를 비난한 것도 바로 루쉰이다. 펄 벅의 경우 당시 서구(특히 미국) 문단에서 대표적인 중국통 작가로써 긴 중국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실상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글을 많이 저술했다. 《수호전》 등의 중국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중국의 문화적 전통을 서구에 널리 알리고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근거없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비하하던 당시 서구의 태도에 일침을 가했으며, 그러한 비하적 태도를 가진 이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중일전쟁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면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평생에 걸쳐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벅에 대한 루쉰의 이런 박한 평가는 좀 너무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루쉰이 이와 같이 벅에게 적대적인 대응을 보인 이유는 크게 2가지 정도로 지적되는데, 1) 벅의 작품에는 리얼리즘 관점에 따라 중국인 대중의 어리석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부분도 적지 않고, 이러한 부분에 대해 루쉰은 (자기 자신도 그런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입장이긴 했지만) 국외자인 벅이 중국인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는 설이 있고, 2) 하필 루쉰이 구해 읽은 《대지》가 중역본이라서 중역으로 인한 의미 왜곡으로 벅이 반중적인 작가라고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
이 중 1)의 설, 즉 중국인 자신이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 중국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설의 경우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대지》의 3부 분열된 일가를 보면 주인공격인 왕옌이 미국 대학에서 중국 농민으로 분장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공연한 중국인 학생들을 보고서 '중국인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격분하여 항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대지 1부의 출간 이후 한국의 재미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였던 강용흘이 왕룽이 이화를 돈으로 사서 첩으로 삼는 장면을 두고 '중국에는 이런 일이 없다'고 벅이 중국인의 도덕적 품성을 비하했다고 공격하다가 '중국에서 만난 노부인들이 자신들이 실제로 겪은 일을 들려준 증언에 기반한 내용'으로 그저 '원론적인 도덕론을 내세워 분명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우월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반박당한 사례가 있다.[40] 중국이나 한국의 유교적 도덕 원칙과는 별개로, 실제로 최근까지 매매혼이나 축첩이 있던 것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비판이나 풍자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의 문제이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사건에서 '우리는 샤를리 엡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인 서구 지식인 중 하나였던 《팔레스타인(만화)》의 작가 조 사코의 '가끔 어떤 집단은 조그만 풍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발언처럼, 방어적인 입장에 몰린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한 조그만 풍자나 비판에도 격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서구 열강[41]의 침탈과 문화적인 비하에 시달리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설령 사실에 근거하고, 정당성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루쉰 자신 역시 펄 벅이 지적한 문제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고 있었음에도, 외국인[42]이 이를 지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었다. 이게 꼭 루쉰만의 문제도 아니고, 루쉰을 존경하는 인물로 유명한 리영희가 젊은 시절 미국으로 교육연수를 받으러 겪었던 일을 회상한 일화 중에 미국 언론이 북한에 호의적인 기사를 싣자 동료들이 해당 언론사에 항의하러 몰려갔고, 해당 언론사의 책임자는 대한민국 언론인들이 해당 기사에 항의하러 몰려온 것을 보고 '거짓이 아닌 이상 언론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냐'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좋은 기삿거리가 있으면 가져오라. 그러면 실어주겠다'고 타일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생전에 리영희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자서전 격인 《대화》를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한국 한자음인 '노신'으로 읽지 않으면 느낌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 루쉰 전집의 정장 기념본 초판은 200질만 만들었는데 예전부터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저우언라이가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에게 선물해 줄 한 질을 구하지 못해 애먹었을 정도다. 마오쩌둥 역시 한 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 중국엔 루쉰문학관이 6개나 있다. 베이징·상하이·사오싱·난징·광저우 등에 루쉰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 중에서 사오싱이 가장 크고 볼거리도 많다. 사오싱은 루쉰의 고향으로, 루쉰 생가 일대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다. 심지어 단편 ‘공을기(孔乙己)’에서 주인공 ‘공을기’가 자주 들락거린 식당 ‘함형주점’(咸亨酒店)도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다음으로 상하이가 유명한데, 상하이는 말년의 루쉰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루쉰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43] 문학관 2층 입구 벽에 ‘뭇사람의 비판에 차갑게 대하고 고개 숙여 민중의 소가 되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루쉰 산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1942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옌안(延安)강화’에도 등장하는 문구다.#
- 다자이 오사무가 루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석별〉(惜別)을 발표한 적이 있다(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본유학 시절의 루쉰의 모습을 회고하는 형식. 문제는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이 일본이 한창 전쟁 막바지에 다다랐던 1945년이었고, 집필 동기도 전시 어용문인 단체인 문학보국회[44] 의뢰를 받아서 지어진 소설이다. 실제로 다자이는 1944년 1월 30일에 도호 영화사 프로듀서 야마시타 료조에게 쓴 편지에서 "새해가 되자마자 문학보국회에서 대동아 5대 선언을 기초로 한 소설을 쓰라는 어려운 명령을 받아, 이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다른 일을 제쳐두고 이 일에 매진하는 중입니다."라고 밝혔다. 소설 후기에서도 "써달라는 의뢰가 없었어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료를 모으고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자이 자신이 당시 일본문학보국회에 소설 개요를 제출했던 소설가 50명 가운데 선발된 6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본문학보국회의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평론가들은 작품에 그려진 루쉰의 모습과 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지극히 피상적이라면서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간주했다고.[45]
-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로 우리에게 유명한 훙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다. 공원 내부에 루쉰기념관도 같이 있다.
- 이육사가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기도 했다.
- 루쉰의 일기를 보면 루쉰은 하루에 대단히 많은 양의 글을 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루쉰은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태도로 쉼 없이 일했다.[46]
- 중국의 소설가 위화는 수필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한 친구와의 사소한 논쟁에서 불현듯 떠오른 "루쉰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던 그 친구의 입을 다물게 한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루쉰이 기본적으로 반유교, 반전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서양으로부터의 혁명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텍스트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목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될 만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는 위대한 문학인이자 또한 위대한 사상가였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한창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어수선하던 시대였는데, 그 서슬퍼렇던 문혁 시절조차 루쉰의 이름이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그러나 개혁과 개방 이후로 점점 사회주의적인 인력이 약해지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재고가 일어나면서 노신의 위상도 예전보다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무협소설로 이름났던 김용도 자신의 《천룡팔부》 등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보면서 "중국이 서양중심적 문학에서 다시 전통문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 「와사등」, 「외인촌」, 「설야」, 「추일서정」등으로 수험생들에게도 익숙한 시인 김광균이 「노신」 이라는 시를 썼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자는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인이자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 해야하는 가장이기에,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시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화자는 노신을 떠올리며 그가 굳은 결심으로 고난를 헤쳐나간 것처럼 마음을 다잡는다.
- 루쉰에 관심이 있다면 먼저 루쉰의 전기나 평전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 한국에도 읽을 만한 루쉰의 전기나 평전이 꽤 출간되어 있다. 일반 독자들이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왕스징(王士菁)이 지은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다섯수레, 1992)를 권한다. 1949년 초판이 발행되었던 터라 다소 딱딱하고 경전화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루쉰의 인간적인 면모를 맛보고 싶다면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周海O)이 지은 <나의 아버지 루쉰>(강, 2008)을 읽는 게 좋다. 루쉰의 자질구레한 가정사로부터 문단의 일사까지 두루 맛보는 재미가 있다.
- 그가 80년 전 쓴 편지 한 통이 2013년 경매에서 약 12억원에 경매에서 낙찰되기도 했다. 21일 중국 청두상바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6일부터 닷새간 열린 자더 경매에서 루쉰이 1934년 6월 8일 쓴 220자 분량의 '타오캉더에게 보내는 편지'가 655만 5,000위안(약 11억 5,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원래 감정가인 180만~220만 위안보다 3배 높은 가격이다. 한 글자당 가치가 3만 위안(약 520만원)에 달하는 셈이다.#
- 2019년 루쉰의 말을 인용한 트위터 계정이 폐쇄됐다고 보도 됐다. 중국에서는 현재 트위터가 차단되고 있지만, 중국의 많은 사용자들이 VPN을 사용하여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속하고 있으며, 2018년 중국 관리들은 그것의 사용을 점점 더 단속하여,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게시물을 검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루쉰의 말을 인용한 @luxunbot25라는 사용자는 트위터에 선전 경찰이 자신과 대화할 것을 요청했다고 Quartz는 보도했다.#
- 2020년대에 중국의 청년실업률이 20%를 넘길정도로 심각해지면서 단편소설 쿵이지(공을기 孔乙己)가 재조명을 받아 큰 인기를 끌고 있고, 패러디 문학도 유행하고 있다. 대학정원 증가와 교육열로 대학에 진학하는 청년들은 크게 늘어났지만 야간자율학습과 과도한 사교육까지 받으며 밤 늦도록 공부하고, 가오카오 시험을 뚫어서 어렵사리 대학 졸업해도 질 좋은 일자리는 경제성장률 저하로 그만큼 증가하지 않아서 기대했던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취직하기는 더럽게 힘든데, 그렇다고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공장에서 일하거나, 건설직에서 일하는 것을 대학에 간 매몰비용이 아깝다며 기피하거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직장에 취직하라고 닦달하면서 별 수 없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기업에 입사 지원서를 수없이 내거나 합격률이 매우 낮은 공무원 시험에 인생을 걸며 응시하고 낙방하는 것을 반복하거나 그마저도 포기하고 별 수 없이 저임금직이나 3D업종이라도 취직해서 비싼 생활비를 감당하는 모습을 과거 시험 장수생인 쿵이지에 비추며 풍자하거나 자조하는 것이다. 이런 패러디 글들을 '쿵이지 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 당국에서 이런 글을 삭제하기도 하지만, 취업난이 해소된것도 아니고, 당국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땜빵용이라 대체적으로 질이 낮기 때문에 회자자체는 계속 되는 중이다. 같은 중화권인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에서는 예전에 겪어 왔던 적이 있거나 겪고 있는지라 딱히 특별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루쉰은 쿵이지를 통해 오랜시간 존속했다가 폐지된 과거시험에 목숨을 걸다가 몰락한 지식인이 밥벌이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체면만 차리는 모습을 풍자했다.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서 몰락한 주인공 쿵이지는 매우 궁핍하며서도 고급 문체를 남발하고 지적 허세를 부리지만 돈벌이를 하거나 신체 노동은 하지 않는다. 선비 신분을 상징하는 낡은 장삼을 끝내 벗지 않고 다니지만 결국 생계를 위해 도둑질까지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종적을 감춘다는 식의 내용이다. 한국으로 치면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과 비슷한 작품인 셈인데,[48] 중국 교과서에서는 많이 실린 작품인지라 인지도 자체는 높았고, 종종 패러디되기도 했다.
9. 외부 링크
[1] 한국 한자음으로는 "노신"이라고 읽는다.[2] 영소대도(寧紹臺道) 소흥부(紹興府) 회계현(會稽縣) 동창방(東昌坊).[3] 소흥시(紹興市) 월성구(越城區) 노신중로(魯迅中路) 229호[4] 어린 시절 자는 예산(豫山).[5] 근현대 일본 문학의 아버지가 나쓰메 소세키라고 하면 중국은 루쉰으로 꼽힌다.[6] 이 점에서 루쉰의 작품들이 여타 계몽주의자들의 계몽문학, 공산주의자들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는 구분된다. 여타의 계몽/프롤레타리아 문학 작가들은 자기 이데올로기를 담아내기 위해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작품들을 마치 정치 팸플릿처럼 활용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당대에는 공감을 받고 널리 읽히고 사랑받았다 하더라도, 수십년이 지나 그 정치적 메시지가 효용을 다하고 나서는 생명력을 잃고 거의 다 잊히게 되었다. 반면 루쉰의 작품들은 혁명적인 메시지를 빼고 보아도 작품 자체로도 완성도가 충분하고 문학성이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그래서 배경지식 없이 처음 휘리릭 읽으면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히지, 그 안에 녹아 있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배경을 이해하고 연구자들의 비평과 해석도 읽은 후 다시 작품을 읽으면 루쉰이 굉장히 명료하고 정확한 은유로 자신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작가라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7] 다만 쉽지는 않다. 루쉰은 현대의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워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작가 위화는 루쉰을 "학생용이 아니라 어른용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다.[8] 프리드리히 니체, 레프 톨스토이 등.[9] 당장 본문에서 대략적으로 소개한 광인일기나 불후의 명작 아Q정전에서도 '개혁가(광인일기)든 모지리(아Q정전)든 눈에 띄기만 하면 헐뜯기만 하고 나서지 않는 우매한 민중'이 계속해서 등장한다.[10] 실제로 루쉰은 민중의 힘을 믿고서 혁명을 도와줬지만 한편으론 민중의 몽매함에 대해서도 경계했는데, 초점을 앞에 맞추면 혁명투사가 되고 뒤에 맞추면 중립적인 저술자가 된다.[11] 중국 소설 중에서 유일하게 포함됐다.[12] 제1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중 몇 편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배경이 대부분 시골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루쉰을 현대 '향촌소설'의 창시자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며, 그의 뒤를 이어 많은 문하생들이 향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써서 '향촌소설파'라는 명칭이 나오기도 했다.[13] 외침이라는 뜻.[14] 공을기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15] 제2소설집은 제1소설집에 비해 그의 말대로 창작 기법이 많이 원숙해졌으며 내용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수록된 작품 중 몇 편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배경이 향촌에서 도시로 바뀌었고 등장 인물들이 지식인이다. 또 루쉰의 자아의식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고, 서술의 내용이 길어졌다는 것이 제1소설집과의 차이라고 여겨진다.[16]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의 소재는 모두가 신화와 전설, 그리고 고대사에서 취재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역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풍격이 전혀 다르다. 신화, 전설, 고대사 등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인물을 현대 사회에 투영하여 작가 나름대로 작품세계를 전개시키고 있다. 제목 그대로 '새로 꾸민 고사'이다.[17] 머리말[18] 여와가 인간을 창조하고 공공이 무너뜨린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19] 명궁 예와 그의 아내 항아의 이야기[20] 우 임금의 치수 이야기[21] 백이와 숙제 이야기. 백이와 숙제가 중국을 망친 유교적 위선자의 대표로 묘사된다[22] 간장·막야의 아들 적비의 복수 이야기[23] 노자가 윤희에게 도덕경을 써주고 속세를 떠난 이야기[24] 묵자가 공수반을 워게임에서 쳐발라 전쟁을 막은 이야기[25] 장자가 죽은 자를 되살린 이야기[26] 이 책은 <魯迅全集(北京:人民文學出版社, 1961)>을 대본으로 했다.[27] 1971년 베이 성의 당 및 정부 관리들과 이야기 할 때 루쉰에 대한 평.[28] 마오는 루쉰의 소설을 굉장히 좋아했다. 마오쩌둥은 옌안(延安) 시절에 루쉰의 책을 밤새도록 읽어서 ‘마오쩌둥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29] 높은 뜻을 가진 선비와 어진 사람[30] 중국 난징대학과 일본 도쿄대학, 홍콩 HKBU대학, 타이완사범대학에서 방문학자이기도 하다.[31] 웅진출판사의 위인전 만화 "20세기의 큰 인물"에서는 이 일을 두고 '내가 글쓰기니 뭐니 하면서 노닥거리지 않고 시위대와 함께했다면 그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32] 그의 단편 소설 <고향>의 마지막 문장. "고향"은 루쉰이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같이 루쉰을 데리고 뛰돌던 동네 형이자, 루쉰의 가문이 부잣집이던 시절에 루쉰의 집안을 위해 일하던 한 소작농의 아들 룬투를 모델로 삼아서 쓴 것이라 한다. 루쉰은 어른이 돼서 가족을 데리러 고향에 갔다가 룬투와 재회했는데, 그 때까지도 루쉰의 집안을 보필하고 있었지만 각박한 살림살이와 세월의 타격을 받아 어렸을 시절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잃어버려 내심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단편 "고향"에서 룬투를 주인공 삼아 중국의 가엾은 평민들의 참상을 그려내다가도, 마지막에 '우리 후손들만큼은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마무리한 것이다.[33] 신해혁명 전후로 구체제 인사들과 신진 세력들 사이의 충돌이 잦아지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내의 구체제 파벌에 맞서다 퇴학당하기까지 하는 등 논쟁이 과격화되자, 린위탕(林語堂)이 이에 대해서 자제를 요청하면서 "이미 구체제는 무너졌는데 그 잔당들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은 '물에 빠진 개를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서구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배워 궁지에 몰린 적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자"라는 취지의 글을 썼는데, 이에 대해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제목으로 1925년에 쓴 글의 내용이다.[34] 죽기 1달 전 남긴 『죽음』에서.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나 '하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발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루쉰은 용서보다는 복수를, 즉 끝까지 철저하게 책임을 따져 묻는 것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왕조와 만주귀족들이 몰락한 뒤 폐허로 변한 팔기군영을 지나가면서 그곳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만주족 할머니들이 루쉰과 친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아무것도 없다우. 여긴 아무것도 없다우'라고 애걸하다시피 하는 것을 보았다는데, 반사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즉 그동안 자주 약탈 등의 폭력에 시달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에 루쉰은 한스러운 어조로 "젊은 시절 말을 타고 만주족들이 사는 곳 근처를 지날 때마다 '한족 주제에 무슨 말을 타냐'는 만주족 꼬마들의 조롱을 들었다"고 회상했다고 할 정도.[35] 81년 제정된 마오둔문학상은 장편소설 문학상이다. 4년마다 수상자를 발표한다. 현존하는 중국 문학상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36] 그 외에는 이백, 두보, 소동파, 한유, 조설근. 현대로 넘어오면 천두슈, 라오서, 저우쭤런, 선충원 등이 있다. 이 작가들 중에서도 루쉰의 비중은 독보적이다.[37] 현실의 변혁을 바라는 이상주의자이지만 막상 현실의 행동에서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인물로 1840년대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38]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이 쓴 '나의 아버지 루쉰'(2008, 도서출판 강)의 에필로그에 따르면 저우하이힝의 어머니 쉬광핑의 친구이자 번역가였으며 루쉰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진 뤄지난이라는 인물이다.[39] 서성, '한권으로 읽는 중국문화', 넥서스, 2005, p30[40]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강용흘이 영미권 독자들에게는 '무분별한 옹호로 펄 벅한테 반박당한 문인'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강용흘이 마냥 중국을 두둔한 건 아니었고,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서구 독자들이 중국과 일본조차 잘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이미지가 막연한 상태에서 악마화가 이뤄질까 봐 우려를 표했던 것이다. 한국 옛날 이야기와 문화를 글로 써서, (대중적으로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미국 문학계에 알린 강용흘이었으니 《대지》에 담긴 중국인 이미지가 이웃 한국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이어질까 봐 두둔했던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틀린 지적이 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있다.[41] 및 그 워너비인 일본 제국주의[42] 그것도 침략의 주체이던 서양인-설령 성장기를 중국에서 보내 중국에 대해 친근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더라도[43] 여담으로 루쉰의 묘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지였던 홍커우공원에 있으며, 루쉰의 묘 바로 맞은편이 윤봉길 의사가 물통 폭탄을 던진 장소이다.[44] 국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거나 전쟁터에서의 옥쇄를 찬미하고 승전을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업무였다.[45] 출처: 다자이 오사무 전집 제6권 '쓰가루', 도서출판b, 2013년[46] 마오쩌둥은 루쉰을 두고, 식민 중국사회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경골(硬骨)’이라고 했다.[47]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라고 극찬했다. 또한 홍루몽을 "《홍루몽》이 나타난 이후로 전통소설의 모든 사상과 작법이 타파되었다.”라고 평했다[48] 다만 공을기는 구시대 지식인을 풍자한 반면에 반면에 레디메이드 인생은 신교육을 받으면서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는 커녕 곤란을 겪는 지식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풍자한 작품이라는 것이 다르기는 하다.[49] 중국 4대 미술대학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