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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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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역사적 변천4. 비동양권의 경우에5.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5.1.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5.1.1.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5.1.2. 동양(東洋)과 식민주의5.1.3. "대동아전쟁"과 오리엔탈리즘5.1.4. 현대 일본에서5.1.5. 기타
5.2. 한국 내부의 오리엔탈리즘
6. 사례7. 비판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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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1970년대영국령 팔레스타인 태생인 미국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한, 서구 중심의 동양관(비서구권)에 기초한 각종 담론들을 총칭하는 낱말이자 동양에 대한 이국적인 신비로움과 경외심, 두려움 등의 감정을 뜻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하기 이전에 오리엔탈리즘이란 주로 '동양학'을 가리키는 낱말이었다.

2. 설명

파일:Edward_W_Said.jpg
▲ 에드워드 사이드

에드워드 사이드영국령 팔레스타인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복잡한 정체성이 서구인들의 편협함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로 중동과 인도에 대한 서구의 시각을 드러내는 언설들을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정리했다.

저서의 핵심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지식은 현실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동양'의 여러 사회가 본질적으로 서로 닮아있으며 '서구'의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입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선험적 지식이 '동양'을 '서양'의 안티테제로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관계에는 힘이 작용한다.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16p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우선 18세기 말 나폴레옹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본격화된 ‘학문적인 의미’가 있다. 이는 동양을 연구하고 정의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두 번째 의미는 서양이 동양을 자신과 구별하는 인식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시아와 자신들을 대비한 이래로 점차 확장되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의미는 독립적이지 않으며, 통제된 교류의 과정을 통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낸다. 즉, 예를 들어 샤토브리앙과 같은 여행기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에 대한 경험과 심미적인 인식들은 레인으로 대표되는 동양학자들의 과학적 연구 결과의 권위에 기대어 '공적인' 하나의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한다.
곧 유럽인의 동양 거주와 그 기록은... 오리엔탈리스트(동양학자)가 그 위에 더욱 많은 학문적 관찰과 서술을 가하여 조립하고 기초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위의 책, 277p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의미와, 그것이 갖는 다소간의 상상적 의미 사이에는 (...) 상당한 양의, 엄격히 규율된―심지어 통제된―교류가 있었다.
▲ 위의 책, 17p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양은 동양을 비이성적, 전제적, 비도덕적이고 불결하며 정체적인 존재로 정의하며, 각종 생산물들을 통해 이를 텍스트화한다. 이러한 행위가 진행되고 또 그 결과물이 권위를 얻을 수 있던 까닭은 서양이 18세기 당시 동양과의 불균형적 관계 속에서 식민 지배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주의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다양한 층위의 권력 교환 과정에 융합하여 실존하는 담론이며[1], 세 번째 의미인 식민 지배 체제를 뒷받침하는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본 두 가지보다도, 역사적, 실질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한정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을 논의하고 분석할 때 대충 그 출발점을 18세기 말로 잡는다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다루기 위한―동양에 관하여 서술하거나, 동양에 관한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동양을 묘사하거나, 가르치거나 또는 그곳에 식민지를 세우거나 통치하기 위한―동업조합적인 제도로 볼 수 있다.
▲ 위의 책, 18p
종합해보면 근대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 체계에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2]이다.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양은 타자인 동양이라는 대상을 형성한 후 그들의 본질적인 열등한 속성을 정의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에 대비하여 '진보적이고 우월한' 속성과 주체성을 획득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이분적인 의식은 서양이 동양과의 관계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수동적인 동양을 지배하며 그 열등한 문명을 개량해야 한다는 지배의 당위성과 도덕적 사명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흔히 말하는 '동양'을 깔보는 선입견이나 풍조가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동양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형성된 동양이라는 범주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이다. 전혀 상관이 없는 수많은 제국을 서구의 입장에서 타자화해 동일한 담론으로 묶는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의 기본 전제다. 따라서 사이드의 이 저서가 출간된 이후로는 '오리엔트'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오리엔트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장된 것은 아니며, 예전에 쓰던 명칭인 중동(Middle East)은 '지중해의 입장이 담겨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주변의 국가들을 '오리엔트'라고 부르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극동(Far East)이라고 불렸다. 현재에 와서는 아시아라든지 동양 같은 단어가 거의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서양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등을 비난하는 용어가 아니며 서구에서 동양을 인식하고 정의하고 묘사하고 연구하는 그 담론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학문, 희곡, 회화, 문학 등 서구에서 생성된 담론 속 '서구가 동양을 인식하는 방식'을 분석하고자 만들어진 용어다. 그러므로 비서구권 나라의 문화를 깔보는 서양인에게 '이런 오리엔탈리스트!'라고 일갈하는 식으로 써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저런 상황을 마주하면 차라리 Racist(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기저에는 문명화되고 우월한 서양보다 열등한 동양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인 것이 현실이다. 예외라면 불교, 힌두교나 그에 기반한 문화들은 평화적이기에 물질문명에 찌든 서구사회에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나 몇몇 공동체주의 성향 정치철학자들이 말하는 "동양권에는 서구권에서 잃어버린 덕과 정의가 살아있다"는 등의 주장들이 있다. 그런데 이 또힌 '포지티브 오리엔탈리즘'의 예로 볼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라고 지적받는 부정적 인식들 사이에도 대조적인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동양인들은 비굴하고 소극적이며 겁이 많다." ↔ "동양인들은 잔인하고 무례하며 사기를 잘 친다." 와 같이 모순된 편견도 존재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는 주로 중동과 인도에 대한 서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중동과 인도를 제외한 비서구권에 대한 논의는 없으나, 이후에 비서구권을 대하는 근대 서구권의 시각을 분석하는 데 유효한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짧게는 시누아즈리, 자포네스크튀르크리부터 길게는 오리엔트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인식까지 그 기원을 소급할 수 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이질적인 것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 대상화이다.

근대 서구문명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나머지, 비서구권도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스스로 투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언설로는 소위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에서 외친 구호인 '근대로의 초극(近代への超克: 동양의 정신문명으로 근대 서구의 물질문명을 극복하자는 의미)'이 있다.

서구권의 영화나 드라마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며, 작품에 따라 상당히 묘하게 녹아있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동양의 신비성이나 이념을 강조하는 형태부터, 직접 일본도를 든 사무라이나 때로는 중국과 일본풍이 뒤섞인 닌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아시아 나라들의 문화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 한다. 한국인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문화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나마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같은 네덜란드 문화권이고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같은 북게르만 문화권이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물론 이렇게 구별하는 것도 유럽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얘기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러한 성향은 만화에도 등장한다. 서구권에서는 영어식 이름이나 지명, 소재가 등장하는 만화 못지 않게 동양풍 배경과 소재가 등장하는 만화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동양풍 복장과 소재를 이용하는 드래곤볼, 나루토, 블리치 등이 이 오리엔탈리즘과 맞아떨어져서 영미권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리엔탈리즘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 계열의 학자들이 흔히 일으키는 문제이지만 이론의 검토 대상이 너무 방대하다 보니 사실문제를 정확히 검토하지 않고 논증에 활용하는 일이 있어 설득력을 잃기도 한다.

동명의 저서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교보문고에서 출판했고, 번역자는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다. 그런데 번역자가 법학자다 보니 사이드가 방대하게 인용한 문예 작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각주를 통한 보충이 부실하다. 반면에 역주 및 역자의 후기에는 번역자 본인의 성향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다가 오히려 옥시덴탈리즘 성향을 보이기도 하고, 오리엔탈리즘과는 관련이 없는 개고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게다가 번역된 문장이 정제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3. 역사적 변천

언급한대로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용어 자체는 1978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가 기원이기는 하지만 서구의 동양학을 지칭하는 말은 그 전부터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리엔트를 저열하고 퇴폐한 전제군주정이라 멸시했을 망정 야만인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대신 설화를 통해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했다. 이건 이집트도 마찬가지. 당대부터 페르시아 제국은 수준 높은 문명국이었고, 로마 제국 시절에도 파르티아, 사산 왕조는 야만국이 아니었으며 이들과 교류하던 유럽인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국에 대해서도 교역을 통해서 세리카 등으로 불렀는데 세리카는 비단을 뜻하는 라틴어 sericum에 a를 붙인 이름이다. Espania, Britannia, Italia, Croatia, Serbia, Romania 등 국가나 지명 뒤에 붙는 A이다. 비단이 서양에 전래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이며 로마 제국 시절에도 비단이 꽤 사용되었다. 참고로 영어의 Silk는 라틴어 sericum, 더 정확히는 라틴어 sericum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어 sērikós가 기원이며 이것은 다시 중국어 絲(si, 실 사)에서 온 것이다. 폼페이 유적에서 중국제 비단 옷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저 멀리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일단 알고는 있었다.

중세이슬람 제국 전성기에 서구 유럽 문명은 대체로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십자군 전쟁, 레콘키스타, 시칠리아 탈환과 노르만의 알제리 정복 등의 반격도 있었으나 유럽 문명의 기원인 고대 로마의 영토인 팔레스티나,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등이 모두 이슬람 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발칸 반도가 모두 먹히고 중부 유럽까지 공격을 받았다.

중세 유럽인들도 예루살렘성지순례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이슬람 세력과의 교역, 포로생활, 십자군 전쟁, 레콘키스타, 시칠리아 탈환을 거치며 남겨진 이슬람 문명의 모습 등을 통해 이슬람 문명이 야만스러운 문명이 아니라 유럽 문명 못지 않게 발달한 문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세 유럽인들은 동양인들을 신심없는 이교도라고는 욕할지언정, 열등한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가치관이 깊게 남아 있던 탓에 동방 문명을 상종하지 못할 이교도라 볼 뿐이지 이들을 연구하고 관심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기독교의 위상이 높던 중세유럽에서도 이미 몇몇 편리해 보이는 문물은 이교도들인 아랍에서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라비아 숫자. 원래 인도 기원이니 인도 숫자라 불러야겠지만, 유럽에서는 중동을 거쳐 들어왔으므로 아라비아 숫자(arabic number)라고 부른다. 아라비아 숫자는 1200년대 초반에 유럽에 들어왔으며, 중세 끄트머리인 1400년대 후반부터는 교회에서조차 아라비아 숫자를 썼고, 1500년대 중반부터는 일상생활에서도 로마 숫자를 거의 몰아내었다. 그 밖에 물질적인 것들로 면직물(인도기원이지만), 시럽, 소다(음료수) 등등은 모두 중세에 중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연금술과 거기서 이어지는 화학도 중동을 통해 도입되었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자 유럽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이슬람 세력은 더 이상 유럽의 위협이 아니었으며,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중동을 넘어 인도나 중국과도 교류하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났다. 또 계몽주의의 발현으로 유럽에서 기독교의 색채가 옅어짐에 따라 동양인들을 사악한 이교도들로 보는 관점이 아닌 우리들(유럽)과는 또다른 문명이 있는 세계로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이 시점부터 유럽의 작가나 예술가들이 동양의 문화를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고, 동양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당시 이들을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라고 불렀다.

이 시절에 전 유럽에 걸쳐서 동양풍 유행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풍이라고도 번역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터키풍인 튀르크리 등이 퍼졌으며 로코코 양식 전반에 동양풍 유행이 나타났다. 치펜델 양식(chippendale style)이라 일컫는 중국식 가구 스타일이 널리 유행했으며, 중국산 도자기가 널리 쓰였고 아예 유럽인들이 우리도 중국풍 도자기를 한 번 만들어보자해서 나온 게 오늘날에도 유명한 본차이나 도자기다. 건축양식 중에서는 영국의 로열 파빌리온, 프랑스 베르사유 궁의 트리아농 궁 등 동양풍 색채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들이 널리 등장했으며, 동양식 파고다 스타일 건축이 널리 쓰였다.

회화양식 중에서도 프랑수아 부셰, 크리스토프 위에 처럼 동양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때의 오리엔탈리즘은 오히려 동양을 신비하고 환상적이며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데브시르메 제도나 한자 문화권의 과거제도를 소개하며 '동양의 능력주의'는 근대 국가를 지향하던 계몽주의자들이 여전히 유럽 사회 전반에 남아 있던 봉건제적 정치적 분화, 귀족 권력의 잔재 등을 비판하는데 전형적으로 쓰인 레퍼토리였을 정도. 우습게도 정작 실무 능력은 대학에서 교육받고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서양 관료들이 훨씬 우수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 시기에 서구에서 다른 문명을 대등하거나 우월한 상대로 간주했던 것은 아니다. 오스만과의 관계 변화에 따른 튀르크리의 발흥이 대변하듯이 당시의 오리엔탈리즘 열풍은 대항해시대의 개막 뒤에 타 문명권에 대한 확고한 질적 우위를 점한 서구에서 지구 방방곡곡을 탐험하며 외국의 신기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즐긴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국처럼 타 문명을 오랑캐로 멸시하지는 않았지만 동경이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오히려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아직 막연한 환상이 남아 있었지만, 이 시기에 이미 서구에서는 이슬람과 인도를 후진적인 문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면 서구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이 또다시 달라졌다. 산업 혁명 이후에 유럽문명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패권문명이 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열려 비서구 각국이 유럽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때부터는 서양에서 비서구인들을 여지 없이 열등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하는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즉,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고 서양의 우월함을 내세우기 위해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정의를 떠나서 원래 오리엔탈리즘은 반드시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동양을 열등하다고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서양에서 동양을 인식하고 정의하는 시각 전반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은 위와 같다.

4. 비동양권의 경우에

오리엔트라는 말은 라틴어 'oriens'에서 왔으며 oriens는 원래 '뜨다'를 의미한다. 물론 해가 뜨는 곳, 즉 동쪽을 뜻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즉 아시아 문명에 대한 시각을 말한다. 그런데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으로 타 문명을 낮추어 보는 경우에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원주민, 오세아니아, 태평양 원주민들에 대한 시각은 원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곳은 오리엔트도 아니니, 엄밀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도 성립할 수 없다. 지금도 영어의 오리엔탈리즘은 원칙적으로는 이들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그냥 간단하게 인종차별이라고 부른다.

유럽에서는 고대부터 교류하던 동양과는 달리 신대륙,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대등한 관계로 교류한 적도 없고 인종주의가 타파되는 20세기 전까지는 아예 처음부터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바야돌리드 논쟁 등으로 알 수 있듯이 그나마 양심적인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교화의 대상 정도로는 보았지만 자신들과 대등한 존재라고 여긴 적은 20세기 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북미에서는 힘이 약했던 초기에 식민지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이 비교적 대등한 교역관계를 맺는 일이 있었지만 유럽에서 대등한 존재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이런 단어가 생겨날 여지도 없었다.

간단히 예를 들면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이 있다고 비판받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작품은 'Indiana Jones', 'Orientalism'으로 검색하면 학술 서적, 문서, 언론기사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물론 인디아나 존스는 4편을 제외하고는 동방이 배경으로 1편은 이집트, 2편은 인도, 3편은 터키(사실 주요 무대는 유럽 전역이다)이니 오리엔탈리즘이 맞다. 영화 300도 오리엔탈리즘적이라며 비판받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역시 식민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 아포칼립토를 다루는 학술 서적이나 언론 기사는 'Apocalypto', 'Orientalism'으로는 잘 나오질 않는다. 물론 'Apocalypto', 'Racism'이라고 검색하면 숱하게 나온다.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고 해서 비판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한다는 말이다. 다만, 원칙적으로는 이렇다는 것이고 영어로도 신대륙과 관련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주로 일반인들이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 등에서 잘 모르고 쓰는 것이지 학술적, 전문적으로는 이렇게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5.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상술한 바와 같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으로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관점, 이렇게 분리된 동양의 속성을 연구하는 학문, 그리고 이것이 근대의 식민 지배 시스템이라는 차등적 관계 속에서 형성한 담론이다.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결국 제국주의 지배 체계로 기능한다. 피지배자인 동양은 연구를 통해 서양에 대비되는 열등한 존재로 규정되며 서양의 동양 지배는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인식 체계는 단순히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인식 체계에서만 머물지 않고, 동양 국가가 자신과 주변국들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도 영향을 끼친다. 서구 식민제국들의 침탈 위기에 놓인 여러 국가들 역시 생존을 위해 서구의 사상적 조류를 흡수하고 내재화했는데, 오리엔탈리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근대 이래로 전 세계에 민족주의가 뿌리내리고 민족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이래로 이러한 '구별'은 심화되었다. 이는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린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동양의 서양에 대한 편견을 의미하는 옥시덴탈리즘과는 달리,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과 대비되는 동양 '내부에서' 다시 서로를 이항 대립적으로 구별하는 의식과 담론을 의미한다. 일본 제국주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중국 제국주의, 유라시아주의에 기반한 러시아 제국주의, 소비에트 제국주의 등이 내적 오리엔탈리즘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5.1.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대열(아시아)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이웃 나라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1885년 시사신보 논설에서. 그의 탈아론이 드러난 대표적인 문장이다.
내적 오리엔탈리즘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근대의 일본이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변용하여 자국과 주변국들의 위치를 새로이 정립하였다. 아시아 국가였던 일본 역시 우월한 서양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 속에서 일본을 문명으로, 그리고 여타 아시아를 야만으로 분리한 것이다. 이는 과거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제국주의적 팽창,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심리적인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전후 8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민족관 및 세계와 동아시아에 대한 국제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자에 따라 "내적 오리엔탈리즘", "일본적 오리엔탈리즘" 등으로 부른다. 도쿄대의 강상중 명예교수와[3] 캘리포니아 대학교 사학과의 스테판 다나카 교수[4], 국내에서는 고려대 일본연구센터의 전성곤 교수 등이 대표적인 연구자다.

5.1.1.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은 정치·경제적인 영역에서 시작되지만 곧이어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낯선 지역으로의 침략과 식민지화를 위해서는 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침략과 통치를 위해서는 식민지에 대한 인구, 기후, 지리적 특성, 토지를 비롯한 각종 자원에 대한 현황, 풍습과 습관, 사회적 상황 등을 파악해야만 했고, 이를 위한 조사과정에서 식민지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서구 제국에서는 이미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이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 제도화되어 있었으며, 이들 학문은 침략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서구 제국이 구축하였던 근대적 분과 학문들은 침략지에 이식되며 식민지 권력기구가 축적한 지식과 정보들을 바탕으로 식민지 사회를 연구하며 식민지 사회에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비서구 피식민 지역은 서구적 기준에 따라 열등한 지역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고, 서구의 지배는 당연시되었다. 즉 제국의 침략과 통치는 식민지를 발전시킨다는 것으로, 근대 ‘문명’의 관점에서 식민지를 ‘야만’으로 정의하며 식민통치를 ‘문명개화’, ‘계몽’이라고 정당화·미화했던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학은 식민지의 과거를 제국의 입장에서 정리하여 제국의 침략을 감추고 미화하는 데에 최상의 학문이었다. 제국은 자신들이 침략하여 식민지·반식민지로 전락시킨 아시아·아프리카를 상대로 식민지화의 원인은 제국의 침략이 아니라 식민지화된 사회의 내부에 있다고 강변하였다. 즉 식민지로 전락한 사회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이 없는 정체된 상태 혹은 거듭된 퇴보의 과정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는 식민지화된 사회는 스스로 근대 문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화는 제국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의 역사적 귀결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지배는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던 사회에게 근대화의 계기이자 근대적인 법과 제도의 이식 과정으로서 설명되었다.

이처럼 식민지에서 제국에 의한 역사학의 성립·확산은 아시아·아프리카 사회의 식민지·반식민지화를 그 사회의 ‘역사적 숙명’으로 고착화하는 것이자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차별을 식민지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제국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에 대한 역사상(歷史像)을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통칭하며,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제국 일본 역시 조선을 비롯한 침략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각종 기관을 만들어 전문적인 학자와 연구들을 양산하였다. 일제의 당시 연구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조선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려내어 조선이 식민지화된 원인을 자신들의 침략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과정에서 도출하였다.

1853년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의 내항과 개국, 뒤이어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개혁을 거치며 일본은 제국으로 거듭났다. 서구의 압력 속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서구를 배우면서 급속하게 진행된 일본의 근대화는 제국주의화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근대적인 분과학문들, 특히 근대 역사학의 성립은 조선과 같은 주변 침략지에 대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의 성립과정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 개혁이라고 이야기되는 메이지 유신은 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천황’(이하 ‘일왕’)에게 통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과정이었다. 이에 따라 일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 역사편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위해 국가 공식 역사편찬기구로서 1869년 3월 ‘사료편집 국사교정국’(史料編輯 國史校正局)이 창설되었다. 이후 국사교정국은 인선을 비롯한 사업의 주도권과 진행 방식, 최종 역사편찬물의 형태, 일본 정부의 직제 개정 등과 맞물려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러한 가운데 1886년 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의 개교는 일본 근대 역사학의 전개와 일본 정부 공식 역사편찬에 있어 획기적 사건이었다. 제국대학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편찬을 담당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그 출신들이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식민사학’의 전개와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895년 제국대학 문과대학 내에 ‘사료편찬괘’(史料編纂掛)가 설치되며(1929년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로 개칭), 사료를 수집하여 편년에 따른 사료집 편찬이라는 사업 목표가 확정됨에 따라 『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와 『대일본고문서(大日本古文書)』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업 방침은 이후 대만과 조선과 같은 일본의 식민지에서도 반복되었으며, 일본에서 역사편찬에 관여했던 이들은 대만과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한 역사편찬 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연구를 위한 사료 수집이 이루어지는 한편 일본의 대륙 침략이 전개되면서 제국대학의 교수와 학생으로 대변되는 아카데미즘의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조선에 자주 왕래하는 언론인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조선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과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이러한 저술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은 침략이 아니며 조선의 멸망은 침략 때문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결과라고 강변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에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다. 이때 오리엔탈리즘 또한 내재화되어, 서양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탈아’를 통해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 자신과 구별하고, 차별과 멸시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며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에는 '문명국인 서양과 대비되는 열등한 동양 국가인 일본'과 '열등한 여타 동양 국가와 대비되는 문명국가인 일본'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병존하며, 이 때문에 세계 인식과 주체성 획득의 측면에 있어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근대 일본의 국민적인 체험으로부터 생긴 대외관의 가장 큰 특징은 ‘낡은 모욕적, 양이적인 서양관’의 극복과 더불어 ‘구태의연한 근린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일본을 구별하려는 자의식’이 강화되어 두 가지 대외관이 양극으로 분해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임성모 역, 이산, 1997년, 91p
이 얼핏 자기모순적인 관념이 형성된 이유는 일본의 개항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고대로부터 형성된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집단을 구분하는 인식이 중간에 파괴되는 일 없이 점차 확장되어 끝내 근대 제국주의 식민권력과 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그들은 동양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하게 점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강제적인 개항이라는 폭력 행위의 피해자 상태에서 근대화를 시작하였기에, 한때 서양을 오랑캐로 여겼던 관념은 파괴된 대신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기저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 결과 일본의 심상에는 아시아 출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두 가지의 인식이 형성된다. 하나는 '유럽 세력의 동진을 막기 위해'[5] 유럽 문명을 내재화하여 이 당시에 입은 정신적인 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로서 서양 세력의 침탈에 맞서고 주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 식민제국의 건설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강박적이리만치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동양 안에서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열등 국가로 재정립하고 자신을 이에 대비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는다. 그리고 동진하는 서양에 대항하기 위해 자국을 중심으로 ‘주권선(내지)’과 ‘이익선(외지)’이 구축된 방사형의 제국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6] 때문에 강상중 교수는 당시의 일본의 제국 건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금융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제국주의 실행자라는 실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이미 훌륭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한편, 이 과정에서 동양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별을 통해 기존 동아시아 체계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대표하는 '지나(支那)'라는 열등한 대상, 그리고 문명이자 진보의 주체에 해당되는 '일본'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7] 그리고 사이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구별 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양한 서양의 과학적 학문이 동원되어, 일본 문명에의 문화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문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8] 과 세계 보편사적인 유럽 문명과 일본 문명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향의 연구가 진행된다.

예를 들어 사학자 다케고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의[9] 경우, 저서 《이천오백년사》에서 유럽 문명이 해양을 통해 일본에 도달하였고, 그 증거로 일본이 가나로 대표되는 자체적인 표음문자를 사용함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정체적인 중국의 표의문자인 한자는 단순히 빌린 것일 뿐이다.[10]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11] 경우에도 《부시도》를 통해 서양에서 종교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무사도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유럽적 특징을 강조하였다.[12]

이러한 이항 대립적 비교 연구는 일본이 1895년과 1910년에 각각 대만조선 등 '지나'에 속하는 식민지들을 획득함에 따라 식민지 지배 권력과 융합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로 인해 식민지의 지나적인 속성,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일본의 유럽적, 즉 보편적 속성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통제된 교류를 통해, 일본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지배의 당위성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본격적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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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

대표적인 예시가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와[13] 니토베 이나조의 사례이다. 후쿠다 도쿠조의 경우, 그의 저서인 《일본경제사론》과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에서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 발전 이론에 따라 문명야만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높은 노비의 비율로 보아 봉건제 사회 진입하지도 못하였기에, 정상적인 발전 단계에서 이탈한 '이상 계통(異系)'으로 정의된다. 반면 일본은 서양의 봉건제에 대응하는 무사 계급의 지배를 받아 근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정상 계통(正系)'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도의 문화로 갑작스레 군림해서 그 역사적 발전을 무시하고 그 국민적 성격을 양해하지 못하는 외국 문화(서양)여서는 안 된다. 한국인을 노동자로 계발하고 유도해서 완전한 인격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토지를 개척하고 경작해서 서서히 자본화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수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년의 교류에서 얻은 양해와 동정을 통해 한국인을 부리는 데 익숙하며, 한국의 토지를 사실상 자기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업경영을 시도하고, 그 생산품인 쌀, 콩의 최대 고객인 우리 일본인이야말로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자가 아닌가. (......)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그 부패와 쇠망의 극을 달리고 있는 ‘민족적 특성’을 밑바닥부터 소멸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동화시켜야 할 자연적 운명과 의무를 지닌 ‘유력하고 우세한 문화’라는 무거운 사명을 다해야 할 자가 아닌가."
▲ 후쿠다 도쿠조,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韓国の経済組織と経済単位)”, 1904년

그리고 샤토브리앙이 여행기에서 오리엔트에 대해 보였던 사례와 같이, 후쿠다의 조선 연구에는 조선 여행에서 받았던 경험에서 기인한 '전근대적이고 더럽고 나태한 조선인'이라는 개인적 편견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그는 이 편견을 사회경제발전이론과 결합하여 조선인들이 발전에 대한 욕망이 낮다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고대 노예제 사회에 안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 담론 내의 통제된 교류를 통해 형성된 그의 관념은 최종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이끌어 이러한 열등한 속성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14] 후쿠다 도쿠조의 주장은 한국의 역사 발전 과정이 '정체(停滯)'적이었다는 관념을 처음 학문적으로 고착화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강박적이고 급격하게 형성되었다. 이는 일본이 서양의 동진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일본 역시 서양의 침탈 대상이 아닌, 그들과 같은 문명이자 보편자임을 한시바삐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동양적' 속성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순간 서양 문명국들에 의해 야만으로 간주되어 계도와 침략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공포가 그 기저에서 작동한다. 그렇기에 위에 언급한 부시도 및 일본경제사론 모두 서양의 역사적인 사례와 서양 기준으로는 엄연히 동양에 속하는 일본의 사례를 무리하게 등치시켰다. 반대로 일본과 오랜 기간 공통의 문명권을 형성했던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의도적으로 일본과 분리하였으며, 그들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가령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에 도덕 교육이 있냐는 서양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옛 일본 무사들의 부시도를 선택적으로 재조합하였다. 후쿠다 도쿠조의 경우, 그의 이론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막스 베버부터가 직접 '일본의 봉건제는 서양의 레엔제 봉건제와는 다르다'고 딱 선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이론을 일본의 무사 지배 체계를 설명하는 데 그대로 인용하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버는 서양의 레엔제 봉건제를 일본의 봉건제와 이슬람의 봉건제도와 '대비'했다. 그는 일본의 봉건제가 인적인 봉사 관계에 기반할 뿐이며 은급제(恩給制)에 기반한 장원영주적 구조가 결여되어 있었다고 보았다.[15] 때문에 동시대 독일 제국의 경제학자이자 베버 연구자였던 칼 라트겐(Karl Rathgen)은[16] 권위있는 학술지 《슈몰러 연보(Schmollers Jahrbuch)》에 후쿠다의 이런 어거지 대입을 두고 '선을 넘었다'고 평가하는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 더구나 근래에 조선 경제사의 영역에 실마리를 잡은 최초의 학자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선사(先師)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일 것이다. 하지만 후쿠다 박사는 조선에서 봉건제도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에 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선배 이타니 젠이치[猪谷善一]가 『조선경제사』란 것을 공적으로 발행했다. 그 내용은 제쳐 두고 책 이름에서는 이것이 조선 경제사의 효시일 것이다. 만약 이를 엄격하게 말한다면, 이 책은 ‘계(契)’라는 특수 문제에 관한 귀중한 문헌이지만 전면적인 경제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게는 책 이름이나 내용보다 서문의 한 구절이 가장 귀중하고 시사적이다. 즉 “조선 자신의 연구는 조선어를 이해하는 조선인 여러분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 유학 온 학생 여러분이 머지않아 모국의 경제사적 연구를 크게 이루어, 나의 보잘것없는 연구가 무용지물이 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 백남운,[17] <조선사 연구의 방법론> 서문 中

그 외 후쿠다의 조선 경험 또한 오랜 시간에 걸친 관찰과 탐구가 아니라, 단편적인 여행 경험일 뿐이었기에 학술적인 가치는 거의 없다. 후쿠다는 고작 며칠 동안 한국을 여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인상에 기반한 악의적 평가는 사회과학이 적용되고 일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고착되었다. 이에 맞서 단재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백남운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대항담론을 구축하였으나 한 세대 후의 일이었다. 그마저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학계와 식민지가 된 조선이라는 현실 속에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들의 연구가 빛을 본 것은 한국이 독립하여 한국인 스스로가 운영하는 국가와 학계가 수립된 후의 일이었다.

5.1.2. 동양(東洋)과 식민주의

미국을 위시한 서구세력에게 굴복한 일본에게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동양론(東洋論)’은 단순한 이론 이상의 것이었다.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내용과 구조는 근대로 넘어오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거의 유사하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이어 만주와 중국으로 점차 침략을 확대해 가는 과정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일본은 ‘서양(西洋)’을 자기화하면서 ‘동양(東洋)’에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을 부과하였다. 스테판 다나카는 일본의 동양사학자들이 서양에 의해 규정된 ‘동양적(Oriental)’과 구분되는 ‘동양(とうよう)’을 창안하고 그 안에 중국을 ‘지나(支那)’로 재배치했다. 새롭게 창안된 이데올로기적 공간인 ‘동양’을 통해 일본은 동양의 타자인 서구와 차별화되고, ‘동양’ 내부의 여타 아시아 국가와 민족에 대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창출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자로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동양의 중심대상은 ‘지나’(支那)였다. 서구 근대문명 기준에 의한 새로운 자기-타자 규정이 형성된 것이다. 즉 서구 보편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동양’이라는 또 다른 가상의 동일성을 설정하고 이 속에서 자기 동일적 주체의 정체성을 구획해낸 것이 일본의 동양론(東洋論)이다. 그러니까 ‘동아(東亞)’는 1945년까지 제국 일본의 역사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던 개념이다. ‘동아’만이 아니라 ‘아세아’도 ‘동양’도 마찬가지이다. ‘동아’란 다른 ‘동양’등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 윤명철.[18] (2010).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 -한국상황과 관련하여-. 민족학연구, 9(0), 225p.
그러나 일본이 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유럽 국가와 동등한 위치에 선 반면 서양 국가들 간의 관계는 전쟁의 여파로 경색되자 이러한 상태는 전환기를 맞이한다.[19] 이제까지는 서양을 답습하는 데 머물렀다면, 이제는 일본 고유의 문명을 재평가함으로써 일본 문명이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또다른 '보편 문명'임을 드러내어 완전한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강상중 교수는 당시 일본의 이러한 조류를 두고 '나르시시즘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를[20] 필두로 한 '동양사학' 연구였다. 시라토리는 만주조선 지역(만선)에서 서양의 학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서양이 동양(오리엔트)를 학문적 연구를 통해 유럽에서부터 분리하였던 것처럼, 이 지역의 언어학적 기원 연구를 통해 일본과 열등한 만선의 기원적 공통점이 없음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일본은 독립된 인종으로 규정되며, 서양과 동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이 둘의 장점을 주체적으로 흡수하는 또 다른 보편자로 정의되었다.[21]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천황제에 기초한 일본 민족이념을 창출하고자 했다. 이는 비교언어학에 기반했던 당대 유럽에서의 민족연구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형제 민족 중 '오리엔트'와 '아시아'의 열등한 문화에 물들지 않은 가장 순수한 이들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당시 유럽 민족주의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셈족 유대인이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망친다며 모조리 학살한 나치 독일이 가장 유명하지만, 정도만 다를 뿐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자국이 가장 순수하다며 제국주의와 민족의식 고취에 잘 써먹었다. 가령 영국인은 형제 민족인 인도인들이 열등해진 이유가 아랍을 비롯한 오리엔트에 물들어 기존의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순수성을 잘 보전한 앵글로색슨이 이끌어 교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그 외 아시아 기원 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발칸 반도 국가들과 러시아는 종종 진정한 유럽이 아니라고 매도당하였으며, 아예 기원이 아시아 국가인 튀르키예헝가리 그리고 핀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인도유럽어족 이론에 기반한 순수 아리아인 담론이 그러했듯, 시라토리는 초기에는 우랄알타이어족 이론에 기반하여 몽골어일본어가 동류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그 중간 가교 역할을 하는 조선어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이 방식을 통해 그는 몽골, 조선과 일본을 중국과 기원적으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뜻하는 단어의 언어학적 비교 연구를 통해 우랄알타이어족 민족들의 천손강림 신앙, 즉 북방민족의 텡그리 신앙과 고대 조선의 단군 신앙, 그리고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숭배 신앙이 공통의 기원을 가졌으며 중국 문명과 관계 없음을 밝혔다.[22] 그러나 이어진 연구를 통해 일본과 몽골 그리고 조선 간에 언어학적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자, 그의 논리는 오히려 한술 더 떠 일본은 '순수한', '독자적'인 민족이라는 아주 인종주의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후대 동양사학 연구자들은 그의 논리를 이어받고 더 발전시켜 나갔다. 가령 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의[23] 경우 일본인이 '혼합민족'임을 최초로 주장했다. 에미시, 하야토, 그리고 진무 천황의 동정으로 야마토가 정복한 한인들 역시 일본을 형성하는 뿌리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사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24] 같은 이들은 각 민족의 샤머니즘 전통과 일본 고대 신토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북방민족의 샤머니즘, 조선의 무속신앙과 고인돌 문화, 그리고 일본의 태양신 신앙과 고분 문화가 샤먼 숭배 전통이라는 공통점의 측면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본 그는, 과거 조선의 우수한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예를 들어 기타와 도리이는 일본민족의 혼합론을 주장하면서 국가 내부의 지역적 차이와 주변국가들과의 차이를 통합하는 '탈영토주의'를 그려냈다. 물론 기타의 혼합민족론은 일본내부에 존재하는 이민족들의 차이성을 소거하는 동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피식민지 민족들의 차이를 메우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도리이 또한 일본의 주변 지역을 현지조사하면서 일본민족의 혼종성을 증명해냈지만 그 혼종의 중심을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식민주의 이론을 구축했다.
▲ 전성곤,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근대 일본의 '식민' 담론들>, 소명출판, 6p
이러한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학자들은 이후 1910년을 즈음해서는 강점을 ‘복고’ 내지 ‘태고로의 복귀’라고 강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제국의 위기 상황이 전개될 당시에도 제국의 팽창을 주장·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였다. 대표적인 일선동조론자라고 할 수 있는 키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 운동 직후인 1921년, 조선과 일본만이 조선민족의 기원을 만주에서 찾으며 민족적으로 만주까지를 하나의 영역으로 설정하며 제국의 팽창을 설파하기도 하였으며, 강점을 전후하여 수차례 조선을 직접 답사하며 인종과 무속을 조사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3·1 운동이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것이었다면서 조선과 일본은 원래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한일병합이 민족자결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일선동조론은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 일본 제국의 침략을 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반도는 일본에 합병되었고, 그 땅의 경영과 백성에 대한 보호와 유도가 일본 국민의 임무가 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반도의 과거 및 현재 사정에 관한 확실하고 정밀한 지식이 더욱 간절해졌다. 동시에 정치적 위치의 변천에 따라 종래의 비각에 다발로 보관되어 있던 저들 나라의 도서도 점차 세상에 나오기에 이르렀으니, 한반도에 관한 학술적 연구도 지금부터 점차 활발해질 것이다. 특히 사적의 기록에 의지하는 일이 많은 역사 연구는 이제 비로소 실마리를 푸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업이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학계에 미력을 다함으로써 착실한 학술적 연구의 기운을 촉진하는 데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실질적 경영에 대하여 학술상으로 다소의 참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철 소속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의 <조선 역사 지리(1913)> 서문 중에서. 이들의 연구는 근대적 한국사 연구의 시초가 되었으며, 식민사학이라는 악영향을 뿌리내렸다. 저자 쓰다 소키치가 서문에 밝힌 바와 같이 이들의 연구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라는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는 식민제국 체계 속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는 객관적으로 진행된 연구가 아니었으며, 매우 정치적이었다. 전성곤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동양학자들은 일본인의 혼종성과 타 민족들의 영향을 인정했으나 그러한 긍정은 결국 그들을 동화시키는 주체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이라는 것을 바탕에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조선은 일본과 달리 위만조선이나 한나라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소위 '식민지배'를 받았기에 순수성을 잃었다는 것이 동양사학자들의 시각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의 정복과 식민 정책에 다시 적용되었다. 즉 동양사학 연구는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앙만이 북방 계통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했던 천손 사상의 유일한 정통이자 순수한 형태이며, 따라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제국만이 옛 형제들을 이끌고 교화할 자격이 있다는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결론의 역사적 근거로 작용한다. 일본인이 혼종 민족이라는 연구 결과 역시, 반대로 일본이 여타 민족들을 정복하고 동화해도 된다는 역사학적 근거로 작용했다.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최종적 의미, 즉 식민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기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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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 중앙 홀의 두 벽화. 둘 다 일본의 서양화가 와다 산조(和田三造)가 총독부의 의뢰로 만들었다. 왼편은 북벽에 걸려 있던 <선녀와 나무꾼> 이며, 오른편은 남벽에 걸려 있던 <하고로모>다. 둘 모두 각각 한국과 일본의 선녀 승천 설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사한 내용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벽화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한 것에는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총독부의 조선 통치 의중이 반영되어 있다. 총독부 청사 철거 당시 별도로 떼어내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출처

일선동조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며, '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이들 동양사학자들이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도하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산하에 수립한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의[25] 연구자들은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만주'로 새로이 규정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만주는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됐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시라토리는 일본의 순수한 '기원이라는 키메라'에게 매혹되어, 역사가 '기원의 엄숙함'을 웃어넘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쳐주는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의 그림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역사라는 의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모든 차이, 분산, 불연속을 일본의 '기원'이라는 하나의 동일성을 향해 통합하면서 신화의 세계로 귀환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누차 지적한 대로 <타자>가 없는 공허한 동일성의 원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라토리는 그러한 동양사의 구상만이 서양 중심의 위계적인 세계질서로부터 일본을 자유롭게 하여, 유럽에 대한 아시아의 열등한 지위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나게 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을 유럽 열강과 동일한 지위로 끌어올리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본의 동양'은 바로 서양의 '전체성'을 대신한 일본 중심의 '전체성'이었다. 그 귀착점이 '대동아공영권'이 되어 마침내 자폭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시라토리는, 쓰다 소키치의 말처럼 '행복한 시대의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한' 시대가 '동양'에게는 아주 불행의 시대였다.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139p
동양사학의 과제는 발견, 창조한 ‘동양’을 통해 서구와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강조하고, ‘만선(滿鮮)’, ‘지나(支那)’에 대한 동양적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하면서 특수한 일본을 구축하는 것, 그 특수한 일본을 세계사의 또 다른 보편으로 설정해 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럽과 서양을 세계사라는 보편사에서 강등시키고 복수의 세계사(多元史觀)를 설정한 후 서구와는 보편사를 향한 헤게모니 투쟁을 진행하고 제국의 판도에 든 아시아 제민족에게는 일본을 보편자로 강요하는 것, 이것이 동양사학이 창출해낸 복수의 보편사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윤명철. (2010).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 -한국상황과 관련하여-. 민족학연구, 9(0), 227p.
이렇게 일본은 열등감을 벗고 주체성을 확보했으며, 자신의 오리엔트인 만선 지역과 중국을 정당히 침공할 수 있는 사상적인 근거를 완벽히 마련하여 1931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됐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경제적 발전 단계가 아니라 주체성의 획득과 주권선의 보호를 위한 심리적인 강박관념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의 확장은 대공황과 겹쳐 제국의 경제적인 부담을 가속화시키고 적을 양산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5.1.3. "대동아전쟁"과 오리엔탈리즘

그러나 일본의 과도한 팽창은 단순히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을 넘어서 국제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일본은 추축국을 결성하면서 유럽 열강들과 미국마저도 적으로 돌려버렸고, 이는 끝내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보편 문명인 서구 열강과의 충돌이 가시화되면서 일본은 국제관을 재정립해야만 했다. 그 결과 침략을 이어가기 위해 형성된 것이 '동아'라는 협동체 개념이다. 일본은 열등 인종이라고 정의했던 만선 지역 주민들, 심지어 지나라고 멸시해 마지않던 중국인마저도 일본인의 개념에 억지로 포괄해서라도 전쟁을 무리해서 수행하였던 것이다.[26]

탈아입구에서 대동아공영권으로의 이러한 국제관 변화는 일견 급작스러워 보이지만 동양사학과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변화이기도 하다. 소위 "대동아전쟁"이라는 일본의 선전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제국에 있어 태평양 전쟁이란 "서양"의 침략에 놓인 "동아"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이항대립 구조를 내포한다. 그러나 실상 그 "동아"라는 협동체 역시 동등한 연합이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 일본에 열등한 동아시아를 종속시키는 방사형의 제국주의 지배 체계였다는 점에서 지극히 오리엔탈리즘적이었다.

결국 아시아를 지배하는 식민제국 체제이자 서구로부터 '일본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설정한 주권선 및 이익선이 대동아공영권의 실상이다. 일본에게 있어 동양이란 결국 '일본의' 동양을 의미했으며 다른 아시아 민족들의 의사와 이익은 고려되지 않았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식민지 조선에 조선인들의 권리가 없었고 오족협화를 내세운 만주국에 "협화(協和)"[27]가 없었듯이, 대동아공영권에는 "공영(共榮)"[28]이 없었다.

종합하자면, 위와 같은 발전 단계를 통해 서구 식민제국들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 내부에도 내재화되어, 일본이 서구에 맞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같은 동양 국가들을 폭력적으로 침탈하는 제국주의 체계로써 작용하였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변용하자면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일본의 방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역시 근본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했던 만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는 달리 이중적인 모순점이 존재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이 자신의 체급과도 맞지 않는 거대 제국을 형성하다가 전쟁을 일으키고 파멸하는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5.1.4. 현대 일본에서

몇 년 후, 내적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팽창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함께 끝났다. 압도적인 미군의 폭격과 원자폭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과정 속에서, 과거 쿠로후네 사건 당시에 그러했듯 서구에 대한 열등 의식이 다시 살아났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동작하는 하드웨어적 기반인 일본 제국 체제는 GHQ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일본이 당연히 이끌어야 하는 영역이었던 식민지들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제국의 중심이자 한때 신이었던 천황은 이제 어떤 정치적 권한도 없는 단순한 상징이자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이유로 태평양 전쟁의 전후 처리가 확실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국제 질서에 복귀했고, 일본의 오리엔탈리즘과 우월 의식도 전체주의적인 식민제국의 모습을 탈피하여 경제적인 형태로 복귀하였다. [29] 1970년대부터 일본은 자유 세계의 핵심 국가 중 하나로 등극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세계 2위까지 급격히 치고 올라가면서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의 문화 역시 바다를 건너 유럽과 구미권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비록 제국은 무너졌을지언정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헤게모니는 근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제2세계에 속하면서 공산당 일당 독재와 빈곤에 고통받는 중국북한, 낙후된 데다 군사독재에 시달리는 옛 식민지 남한, 그리고 역시 또다른 옛 식민지이자 한때 주적이었으나 국부천대 이래로 국가 인정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대만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완벽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과거 제국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일본인들이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스스로를 대조하며 국가적인 자신감을 되찾고자 시도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러한 차이 속에서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적 대외관이 되살아났다.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료마가 간다> 등을 저술한 일본의 국민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다. 그는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1년에 한국을 여행한 후 아사히신문에 기행문을 연재했다. 과거 동양학자들의 인식을 계승했던 그의 여행 목적은 '일본의 근원 국가'에 대한 탐방이었다. 따라서 시바 역시 과거 동양학자들이 그러했듯 한국의 생활상을 낙후된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근세 한국의 역사는 타율적이었으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였다. 그 역시 메이지 시대 인물들이 조선을 바라보던 정체성론에 입각한 시각을 현대적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자립의 길을 선택하였을 때, 조선의 운명은 그 지리적 위치와 주체적 무능력에 의해 일본에 종속하고 그 지배하에 놓인 것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 시바 료타로의 조선론의 골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고 했을 때 활발하게 배포된 조선정체론, 조선낙오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 정당화로 나아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30],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그의 조선관과 메이지 영광론을 묻다>, 박현옥 역, 모시는사람들, 2014, 41p
시바 료타로가 정치적으로 극우이거나, 한국과 한국인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에 대한 고대 한국의 영향을 적극 긍정한 축에 속하며 제국 말기 쇼와 시대의 폭주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관은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와 영광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므로 한국을 철저히 주변부화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지극히 오리엔탈리즘적인 성격을 띄었다. 나카츠카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바의 시각에서는 일본의 생존을 위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정당했고 '뒤떨어진 조선'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국민 작가였던 그의 명성으로 인해 이러한 차별적인 시각은 일본 사회에 다시 널리 퍼져나갔다. 시바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이 '시바 사관'은 일본 극우의 동아시아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31]

이처럼 근대 이래로 정립된 일본인으로써의 정체성과 국제관 자체가 내적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따라서 일본과 여타 동아시아를 이항 대립 구도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일본 내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에도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유럽미국에 대해 열등 의식을 내보이면서도 그들과 자신들의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 때문에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은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진 민족의식과 외부 인식의 근간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 이래로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안에 자리잡은 양가적 인식, 즉 '동양과 달리 서양 문명에 가까운 일본'을 내세우면서도 '서양과는 다른 일본'[32]이라는 자기모순적인 관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괴리감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아시아 유일의 보편자라는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제국 시절과 냉전 후반기 두 차례에 걸쳐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로 불타올랐으나, 결국에는 1853년의 강제 개항과 1945년의 패전, 1990년대의 경제적 몰락, 그리고 구 식민지들과 이웃 국가들의 약진 속에 여러 차례 무너지고 빛이 바랬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그토록 유별나게 한국과 중국의 부정적 측면에 집착하고 구미권의 시선과 인정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은,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양과 동양, 그리고 일본과 동양 사이에서 이중의 혼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존재론적 불안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은 두 국가의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위상이 일본과 동등 또는 그 이상이 된 오늘날이 되어서는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우선 20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사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문명 발전론이나 과거의 만선사관은 설득력을 잃었다.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의 '열등한' 한국중국의 이미지 역시 실제 그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경제문화 강대국으로서의 한국과 중국의 모습으로 인해 점차 깨지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로 일본인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20년 가까이 노출되고,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역전된 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잔영은 남아 있으며, 종종 한일 양국의 문제에 있어 일본이 자신들의 우위를 은연중에 확인하려 하는 근원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5.1.5. 기타

  • 내적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가장 활발했던 일본 제국 시절 생산된 동양사 정보들은 비단 현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극단적인 일본 추종자들이 객관적인 정보랍시고 앵무새처럼 주워섬기는, 구 제국 시절 일본인들이 저술한 조선 여행기들과 역사서들이 그 예시다. 이 서적들은 라트겐이 비판했던 후쿠다 도쿠조의 저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세기도 더 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는 한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한국역사에 관해 제국주의 시대의 자료를 근거로 서술하는 일이 많다. 이미 폐기된 만선사관에도 긍정적이며 만주사와 한국사를 엮어서 설명하거나 한국의 역사를 속국의 역사로 설명하려는데 적극적이다.
  • 피지배자인 조선 스스로의 학문 연구를 중시했던 일본 학자들 역시 물론 있었다. 가령 이노타니 젠이치(猪谷善一)는[33] 1928년에 출판한 저서 <조선경제사> 에서 조선 스스로의 한국사 및 한국경제사 연구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이는 한국 경제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백남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 체계로 동작하던 시절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의 이중적인 구조는 오늘날 러시아 제국주의중화 제국주의가 동작하는 방식과도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패권주의 국가 역시 과거 일본 제국이 그러했듯 서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동시에 일본이 '동아'를 바라보던 시각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으로 우크라이나한반도 등의 주변 국가들을 바라본다.

5.2. 한국 내부의 오리엔탈리즘

한국인의 근대적 자아는 식민주의, 근대성, 민족주의 등과 복합적 관계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근대화과정에서 전통적 정체성이 근대적 방식으로 재해석되거나 변형되면서 형성되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국제사회'의 변화에 따른 '문명관'의 변화에 의해 주도되었고, 뒤를 이어 일제식민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의 '외상'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전통 중화문명을 대체하는 근대 서구문명관의 수용과 저항과정에서 한국인은 문명적, 인종적, 민족적, 개인적 자아의식을 형성해갔다. 특히 서구 문명관의 도입과 함께 수용된 오리엔탈리즘은 근대적 자아형성에 기본 배경을 형성하였으며, 그 이후 일본과의 관계에서 수용된 '일본형오리엔탈리즘'은 한국인의 자아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 일본에 대한 이중감정, 전통에 대한 편견과 자기분열이라는 현상이 발생되었고 그 그림자는 지금도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용화. (2004). 한국인의 근대적 자아 형성과 오리엔탈리즘. 정치사상연구, 10, 33-54.[34]
한국은 타 민족에 대한 지배 체계를 구축한 적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와 아시아 인식 역시 내적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가령 한국과 서구 선진국 간의 공통점이나 한국이 보다 나은 모습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갈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낙후된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발전된 한국과 대조하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 차이를 민족성 등에서 찾는 담론은 한국 사회에 꽤나 보편적이고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오리엔탈리즘의 정의에 완벽히 부합한다.

인접한 지역과 한국 간의 관계, 또는 한국 스스로를 보는 시각에는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적 뿌리가 한국이라는 인식이나, 엄연히 다양한 민족이 살아가는 장이었던 만주를 한국사에 종속된 잃어버린 고토로 여기는 관념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국 민족주의 세력이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해 근대 일본 제국이 구축한 일선동조론만선사관을 변용한 것이다. 여기서 지배자-피지배자 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 외에는 차이가 없다. 이와 반대로 한국사는 타율적이고 정체적이었으므로 이러한 부정적인 민족성을 극복하게 해 준 일제강점기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일각의 인식은 일본 제국 시절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자체적으로 재생산한 결과다.

그 외 단편적인 사례로는, 전공자거나 대(大)중동의 역사/군사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대(大)중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슬람, 히잡, 밸리댄스, 알라딘, 아라비안 나이트, 테러리즘, 성차별"이 전부인 사람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1990년대에 민주화가 되면서 미국 문화가 유입되었는데 그중에서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성행했던 뉴에이지가 유입되어 인도, 티베트 등 남아시아에 대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관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현재에도 이슬람권 문화를 몰이해하여 논란을 빚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유튜브 콘텐츠 튀르키예즈 온 더 블럭에서 튀르키예인 흉내를 낸답시고 아랍 복장을 입었다가 튀르키예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은 것이 그 사례도 있다. 아랍 옷 입고 터키 아이스크림 판 이용진...제작진 사과 “새 의상 준비 중”(조선일보).[35]

6.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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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판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난 2세기 간의 서구 및 러시아 학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나무라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공들여 연구하지 않았다면 이슬람권을 비롯한 동쪽 세계의 지적 활기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결코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철저한 국제적 공조 덕에 가능했다.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오남용하면 상술한 사이드 쿠틉의 극단적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이, 제3자가 자신들을 비판, 비평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배타주의로 이어지기 쉽다.

20세기 후반부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화두가 되면서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오늘날 중동/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한 것에는 19세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기여가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발 오일머니 때문에 서구 학자들의 중동사/중동문화 해석은 무조건 다 틀린 것이라고 강요당하는 분위기마저 조성되어 있는데,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서구 학자들의 기여를 모두 평가절하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R. A. 니콜슨이 아랍 문학사 연구에 기여한 바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해당 개념의 주창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영문학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은 영문학 고전을 상당히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그의 책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런 부분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해서 한국어판 번역본 기준으로는 제대로 된 책이라고 보기 힘든 수준이기도 하다.즉 사이드는 중동아시아 전문가가 아니다.

비교하자면 190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중동아시아에 대하여 전공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양성과정은 런던파리베를린로마이스탄불모스크바중앙정부부처, 싱크탱크, 명문대에서 극소수의 자국민을 선발한 다음에 약 10년간 이런저런 전공학문들(언어학, 논리학, 역사학, 지리학, 사회학, 고고학, 인류학, 종교학)을 섭렵하면서 현장학습과 실무연수를 모두 마치고, 학석박사학위를 받아 연구원이나 정보기관원 및 고급관료와 대학교수로 임용하는 절차였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런 절차를 밟지 못했고, 전공 분야도 문학과 철학에 한정되어 있으니, 그의 논거는 허점이 많다. 실제로 그는 중동아시아 학술연구에 어설프게 덤벼드는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중동아시아 전공학문(앞에서 언급한 학문들)의 대석학급 학자들인 버나드 루이스, 클로드 카엥, 루이 마시뇽, 파울 크라우스, 할릴 이날즉, 조셉 플레처 등은 하더라도 이론과 현장에 모두 밝은 VIP급 능력자로서 사이드를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논설문의 기초지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엉터리로 덤비냐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오늘날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론을 그대로 잘못 인용하면, 이를테면 오늘날의 시점에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관련한 논문을 쓰면서 18세기 에드워드 기번로마제국 쇠망사에 나온 낡은 이론을 재인용하는 수준으로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방패를 내세우면서, 서구인에게 동양에 대한 학습을 강요하는 문제도 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동양인은 과연 서양을 깊이 있게 알고 있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발틱 국가를 발칸 국가로 잘못 표기해 놓고 방치하다가 라트비아 대사가 외교부에 항의한 사건도 있었다.#1 #2.

북미와 유럽 등으로 큼직하게 구분하는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고 그냥 '서양=미국'으로 퉁치는 사람이 넘치는 게 현실이다. 또한 일본산 서브컬처에서는 중세와 근대가 버무려진 시대를 배경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섞인 공간에서 영어와 독어가 섞인 이상한 이름을 쓰는 캐릭터들이 돌아다닌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든 문화권과 문화권의 관계에서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이해가 필수적인 것일지, 그 기준을 외국인들에게 터무니 없이 올려잡는 게 아닐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8. 관련 문서


[1] 임시연,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년, 40p~41p[2]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18p[3] 재일교포 2세 출신 국제정치학자. 와세다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한민국 국적자 출신으로는 처음 도쿄대 정교수에 취임한 인물이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러했듯 강상중 교수 역시 재일교포로서 한국과 일본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였다. 이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의 학문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주로 베버, 푸코, 그리고 사이드를 연구했다. 현재 일본 사회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참여적 지식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대중적으로도 자주 모습을 비춘다.[4]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근현대 일본사를 전공했다. 대표적인 저서는 국내에도 발매된 <일본 동양학의 구조(Japan's Orient)>다. 현재는 절판되었다.[5] 고야스 노부쿠니,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이승연 역, 역사비평사, 2005, 27p[6] 위의 책, 85p[7] 윤명철,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한국상황과 관련하여〉, 한국민족학회, 2010, 225p[8]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9] 1865~1950. 게이오의숙 출신의 사학자. 중의원과 귀족원 의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10] 위의 책, 69p~72p[11] 1862~1933. 일본의 외교관. 무사도를 주창하는 등 소위 '문명국' 일본의 위상 확립에 매진했던 인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차등적 질서를 옹호하고 제국 식민정책에 실무자로 참가했다.[12]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즉 ‘종교 없이 어떻게 도덕교육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고.” 위의 책, 51p[13] 1874~1930. 일본의 경제학자. 뮌헨 대학교 출신으로 일본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당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복지국가론까지 주창한 인물이었으나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14]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15] 위의 책, 100p[16] 함부르크 대학교 초대 총장. 1882년부터 1890년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동시기 일본 제국 농상무성의 고문으로 있었다.[17] 1894~1979.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이자 북한의 정치인. 한국인에 의한 한국 경제사 연구를 개척한 인물로, 그의 연구는 훗날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론이 싹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학계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그의 영향력은 많이 사그라든 상태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초대 교육상 등 공직 생활을 했다. 8월 종파사건도서정리사업 등의 사건으로 김씨 일가의 독재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숙청당하지 않고 1979년에 사망했다. 다만 최후가 아주 불명확하며, 황장엽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그 또한 결국 김일성에게 제거당했다고 본다.[18] 동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19] 위의 책, 131p[20] 1865~1942.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로, 동양사학 연구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미우라 고로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가쿠슈인에서 교편을 잡았고, 쇼와 천황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나, 그의 연구는 제국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 연구라는 속성을 강하게 띄었다.[21]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22] 전성곤,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275~283p[23] 1871~1939.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로, 메이지 시대 말기에 문부성에서 국정교과서를 편찬했다.[24] 1870~1953.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 일본 내 동아시아, 특히 만주와 한반도 지역 인류학의 선구자로 꼽힌다.[25] 1914년에 해산되었으나, 이후 도쿄제국대학에서 관련 연구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를 반도 내로 국한했으며, 반도의 역사는 대륙과 해양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연구결과를 통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사학적 조선사 연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조선 역사 지리》역시 만선역사지리조사실에서 경술국치 3년 후인 1913년에 펴냈다. 이 작업은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이끌었다. 이들의 연구는 현대 중국의 동북공정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26]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27] 협력하고 화합하다.[28] 공동으로 번영하다.[29] 위의 책, 94p[30] 1929 ~ 2023. 교토대학 출신의 역사학자로 1963년에서 1993년까지 나라여자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청일전쟁동학농민운동 등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사를 연구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 교정에 큰 공로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202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31] 일본지식인층에 의한 조선정체론(朝鮮停滞論) 연구: 비문명화ㆍ비경제화ㆍ비합리화를 중심으로[32] 이 '서양과 다르다'는 관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속성을 띈다. 근본적으로는 일본 역시 동양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열등감'의 모습을 보이며, 개항과 제국 시절 전반, 그리고 패전 직후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의 속성 역시 강하게 띄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와 같은 시기에는 반대로 서양에 대한 '우월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33] 1899~1980. 도쿄상과대학 출신의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의 제자인 우에다 테이지로 밑에서 수학했다.[34]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시절 게재한 논문이다.[35] 이란을 방문해서는 아랍문화 운운했다가 관계가 깨졌다는 기업인의 사례도 존재한다.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