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7:31:00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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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갈래
<rowcolor=#fff> 서정 서사 교술
가사 소설 희곡 각본 수필 비평


1. 정의2. 어원3. 역사
3.1. 한국에서의 희곡
4. 나무위키에 등재된 희곡 작품 목록5. 관련 항목

1. 정의

문학의 역사는 곧 희곡의 역사이다.
장폴 사르트르

희곡( / play, drama)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 연극 대본으로, 인물의 대사(臺詞)와 행동을 중심으로 지시문[1]해설을 첨가하여 문자로 표현한 극 문학을 가리킨다. 대사, 지문, 해설을 희곡의 3요소라고 한다.

내용에 따라 비극, 희극, 희비극 등으로 나뉘고 막의 수에 따라 단막극[2], 장막극[3]으로 나뉜다.

서사시와 함께 서양 문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서사시와 그리스 비극에서 서양 문학이 기원하였다. 문학의 4대 장르 중에서 맏형 격인 셈이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작가를 소설가보다 더 높게 평가할 정도로 극문학이야말로 문학의 정수이자 원류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장폴 사르트르는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의 역사는 희곡의 역사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3분의 1은 극작가이다. 그러나 한국은 문학과 공연 예술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문학으로서 희곡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얕은 편이다.

보통은 무대에서 연극을 올리기 위해서 쓰는 대본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글로 읽는 문학 양식으로서도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애초에 상연을 전제되지 않고 쓰여진 희곡 작품들도 존재한다. 이를 흔히 "읽는 희곡"(레제 드라마)라고 하며 대표적으로 괴테의 "파우스트", 바이런의 "만프레드" 등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완결된 문학 작품으로서의 원형을 희곡이라고 부르고, 개별 연극 공연의 상황에 맞게 변형이 가해진 상영용 버전을 대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희곡은 분명 문학의 한 갈래이지만, 공연예술인 연극의 대본이기도 하다. 그만큼 연극과 희곡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희곡은 결코 연극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며, 희곡 자체만으로도 문학성을 갖추고 있다. 즉, 희곡은 극작가 개인(혹은 집단)이 자신의 생각과 사고 등을 표현하는 고유한 문학적 활동이며, 소설, 시 등의 다른 문학 장르과 달리, 공연화가 될 수 있는 속성을 지닌다.[4]

이와 달리, 연극은 희곡이 연출가, 배우, 무대 디자이너 등 여러 공연 요소와 만나 공연물로 탈바꿈한 종합예술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연극은 희곡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5]

간혹 '희곡'과 '희극'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희극(喜劇)은 연극의 양식으로, 즐겁고 우스꽝스러운 내용에 해피 엔딩인 코미디(comedy)를 말한다. 희극의 반대말이 바로 비극(悲劇)이다.

2. 어원

본래 희곡(戱曲)이라는 단어는 가무가 중심이 되는 중국의 전통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6] 이것을 근대 일본에서 서구의 '드라마(Drama)'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하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7]

Drama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인 dran(행동하다라는 뜻의 동사) + ma(결과를 뜻하는 명사 어미)의 합성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행동하기로 표현되는 문학 양식이라는 소리다.[8]

3. 역사

희곡은 고대 그리스 시기에 등장한 문학이다. 이 때의 희곡을 '그리스 비극'이라고 부르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희곡이 훌륭한 희곡인가에 대한 인류 최초의 미학서인 <시학>을 썼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그리스 비극 작품이라고 평가했고, 연극은 시간, 장소, 사건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삼일치의 법칙'을 정립하였다. 그러니깐 극단적으로 말해서 공연 시간이 1시간이면 희곡의 시간 흐름도 1시간이어야 했고, 장소의 전환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대표되는 초현실적 해결장치로 결말이 해결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말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해결되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시학'에서 비판하였고[9], 이를 진중권이 디워 논쟁에서 다시 인용하면서 이 비평 용어가 유명세를 탔던 적이 있다.

사실상 이러한 시간, 장소, 사건의 일치는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었고, 모든 연극은 하루 안에, 한 장소에서 한 가지 사건만을 나타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셰익스피어는 '삼일치의 법칙'을 깨부순 희곡을 창작하면서 극문학에 혁신을 불어넣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몰리에르, 스페인의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이 등장하여 중세 희곡의 황금기를 만들어 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세 희곡은 왕과 귀족들의 저속한 구미에 맞춘 세속극으로 전락하여 갔으며, 이에 프랑스 혁명과학 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한 프랑스의 문예운동은 낭만주의 운동을 탄생시킨다. 이 낭만주의 운동은 바로 셰익스피어와 같은 중세 문학에 대한 재조명과 절대적인 찬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낭만주의 극 시대의 희곡은 자연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채택하여 실생활과 같은 모습을 그려냈으며, 이 시기 멜로드라마와 그 공식이 탄생했으며, '웰메이드 드라마(Well-made Drama)'라는 용어도 이 시기 생겨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웰메이드 드라마는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기 위한 유흥거리로서 공장화되고 공식화되어 갔다. 그 공식이란 것이 1) 관객(독자)이 감정이입을 할 만큼 멋지고 잘난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긴장이 형성되고, 2) 관객(독자)은 알지만 주인공이 모르는 어떤 비밀 때문에 위기가 생기고, 3) 그러던 중에 반전이 생겨서 긴장감을 자아내다가, 4) 사건이 해결되고 주인공이 승리하는 식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공식 때문에 그 작품이 그 작품 같고 비현실적인 요소로 욕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근대연극과 근대희곡이 탄생하게 된다.

특히 노르웨이헨리크 입센(1828~1911)에 이르러 진정한 근대희곡이 시작된다. 입센은 '문제극 (Problem-Play)'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훌륭한 극문학은 인생과 사회에서 문제적 상황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본격적으로 희곡 속에 사회적 문제를 담기 시작했으며, 일반 사람들이 봉착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일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실생활의 평범한 언어를 쓰며 일상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불유쾌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10]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연극만 해도 주로 왕족과 귀족이 주인공이지 일반인이 주인공이 아니었으며, 대사들은 천박한 일상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라임을 전부 맞추어 고급스러운 시 구절로서 작성되어야 했다.

이 시기부터 '웰메이드(Well-Made)'라는 표현은 근대극 이전의 낭만주의 시대의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텅 빈 상업적인 드라마들을 경멸하고 비꼬는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도 문학이나 영화 비평에서 웰메이드는 비하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즉, 어떤 영화의 웰메이드라는 평가는 겉보기에는 칭찬처럼 보이지만 실은 멸칭이다.

이러한 입센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 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등의 극작가가 등장하여 북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연극이 발전해 갔으며[11], 미국에서는 근대 미국 삼대 극작가라고 불리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가 등장했다.

이후의 중요한 희곡 운동으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소격 효과', '제4의 벽', '거리 두기', '감정 이화' 등의 개념을 들고 나오면서 주창한 브레히트의 서사극,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와 외젠 이오네스크, 장 주네, 페르난도 아라발, 해럴드 핀터 등의 극작가로 대표되는 부조리극 등이 있다. 실제로 한국 대학로에서 주로 공연되는 연극은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체호프, 부조리극, 이 4개 중에 하나라고 보면 된다.

서구의 근대 희곡은 현대문학이 시작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중세 문학은 기사문학과 영웅담, 괴담집에 불과했으며, 소설을 일컫는 프랑스어 '로망'은 중세 기사들의 영웅담을 일컷는 '로망'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서사 예술의 방식을 체계적으로 기승전결 및 인물 구성과 복선의 서사적 구성, 그리고 상징의 개념 등을 완비한 현대적 문학이 등장하게 된 계기에는 소설에 앞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근대 희곡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19세기 이후 극작가들이 과거의 연극 주류를 정면으로 배격하고 오늘날 현대문학에 당연시되는 여러 장치와 소재들과 테크닉들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데, 현대의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표현주의상징주의 같은 다양한 문학 이론과 기법들이 바로 희곡에서 탄생하였다. 현대문학은 바로 이들의 연구성과를 받아먹고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사르트르는 '문학의 역사는 희곡의 역사'라고 까지 말하기도 했다. 때문인지 유럽과 미국의 문학평론가들은 극작가를 소설가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두는 경향도 많다. 실제로 해외 문학저널에서는 희곡의 비중이 많은 편으로, 극작가들이 홀대받는 것은 문학의 역사가 채 백 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한국만의 특징이며, 그리스 로마 희곡에서 문학의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에서는 제대로 된 희곡 작품을 하나 남겨야 진정한 작가라고 평해주는 풍토가 있었기에, 프랑스의 오노레 드 발자크와 같은 작가는 대중소설로 부와 명예를 모두 성취한 이후에도 희곡을 쓰는 것에 집착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소설가로만 알려진 폴 오스터, 프랑수아즈 사강, 아멜리 노통브, 귄터 그라스, 페터 한트케, 비톨트 곰브로비치, 아리엘 도르프만, 아베 코보, 미시마 유키오 등도 극작가로서 상당한 편수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3.1. 한국에서의 희곡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희곡이 문학으로서 홀대받는다는 이야기가 반복하여 제기되고 있다. 시, 소설, 희곡에서 모두 작품 활동을 하였던 장정일이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 대표적인 작가 중에 한 명이다. 한 번 한국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들 중에 희곡이 몇 편이나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자. 한국의 문학상은 이름만 '문학상'이지 대부분은 소설에게만 수여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는 한국에서 연극의 위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는 보더라도,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한편으로는 과거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개판이었던 것이 크다. 일제강점기에는 어떤 극작가가 창작한 작품이 인기가 있다 싶으면 비슷하게 베껴서 공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던 데다가, 극작가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공연하기도 했다.[12] 그리고 '신극(新劇)운동'이라 하는 비영리/반직업적인 연극운동에서 실질적인 근대연극이 출발한 터라 대중성이나 상업성과는 거리를 두는 경향이 강했다. 돈을 버는 목적보다는 문화운동이라는 사명감이 더 컸던 터라 직업으로서의 본격적인 극작가 출현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13]

무엇보다도 유럽에서는 '극장(Theatre)'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존재하였기 때문에, '극장(Theatre)'이라는 존재 자체가 워낙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오늘날까지도 유서 깊은 유럽 귀족 가문들의 자식 교육 방식은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붙여 그리스어, 라틴어를 공부하고 그리스 비극과 로마 희곡을 읽는 것이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 장뤽 고다르가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도련님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미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엘리트 귀족 계층이 희곡을 쓰고 이를 무대에 올리고 배우로 연기했으며[14] 오늘날에도 영국은 혈통을 따져서 왕실의 피가 섞여야 왕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할 정도이다. 즉, 유럽과 미국에서는 희곡이란 인류 문명의 정수로 대접받았다.

반면 한국은 구한말까지 '극장(Theatre)'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국가였으며, 구한말까지 한국에서는 공연예술이라고 하면 '극장(Theatre)'이 아닌 흙바닥에서 하는 탈춤이나 판소리 같은 것이었다. 1950-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극장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이미 영상 매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자리잡았고 이에 연극을 고급스러운 귀족 문화로 간주하고 영화를 저속한 대중문화로 여기는 유럽/미국과는 정반대로 한국에서는 영화가 고급 문화가 되고 연극은 탈춤 같은 서민 문화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15]

이러한 결과로, 한국에서는 돈 안 되고 열악한 희곡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가 훨씬 더 돈이 되니...[16] 당연히 그 방면으로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당장 희곡 공모전보다는 시나리오 공모전이 더 많고, 상금도 더 많은 편이다.

한국의 전통극은 문자화된 희곡이 존재하지 않았고,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일본만 해도 에도 막부 시절에 ''와 '가부키' 등의 극문화가 발달하여, 가부키 희곡이 삼백여 편이 문자화되어 전승된다. 한국은 문자화된 희곡의 시초를 조선 말기 신재효가 판소리 6마당을 문자화한 것으로 보며, 구한말 일본을 통하여 서구의 연극 개념과 신파극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문자화된 희곡 창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희곡 작품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제각각 입장이 다르다. 이광수의 <규한>(1915)을 언급하기도 하고, 실제 공연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死)>(1919)가 거론되기도 한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 조중환의 <병자삼인>(1913)이 근대 희곡의 시작이라고 언급되었었지만, 일본 신파극인 <희곡 우승열패>의 번안임이 밝혀졌다.[17] 그래서 지금은 최초로 지면에 발표된 희곡으로 언급되곤 한다.

분명한 사실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우진, 김정진(김운정), 송영, 유치진 등 본격적으로 희곡을 창작하는 극작가들이 등장했으며, 1935년 동양극장이 생기면서 월급제의 전문 극작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극단 내 전속 극작가를 두는 수준이거나, 아예 극작가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4. 나무위키에 등재된 희곡 작품 목록

5. 관련 항목



[1] 지문이라고도 한다.[2] 하나의 막으로 구성된 작품[3] 두 개 이상의 막으로 구성된 작품. 5막극이 원형이지만 최근에는 2~4막극도 많이 창작된다.[4] 본질적으로 모든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창작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단지 현재 공연하기 어렵거나 쉽거나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다. 가령 파우스트는 당대엔 기술적인 문제 등으로 결코 공연될 수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숱하게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5] 물론 한국 전통극인 판소리탈춤처럼 문자화된 대본 없이 구전으로 전래되었으며, 아예 원본이라는 것이 없이 공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상연되었던 연극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과연 판소리나 탈춤과 같은 제3세계의 구전 공연을 연극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존재한다. 아프리카 부족들의 민속춤도 부족의 역사에 대한 일정한 서사를 담고 있는데, 이것도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6] 훈몽자회에 따르면 戱는 '노릇'을, 曲은 '노래'를 가리키며, '가무로서 고사를 표현하는 것'을 '희곡'이라 일컫는다.[7] 물론 경우에 따라 Drama는 연극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희곡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Play도 연극이나 희곡으로 번역되기도 한다.[8] 이재영, 『극문학이란 무엇인가』 참조[9] 한정된 시간과 장소에 사건을 해결해내야 하다보니 수습 불가능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던 건지도 모른다.[10] 돈 내고 즐기러 왔는데 왜 그런 걸 봐야 하느냐는 식이었다.[11] 엄밀하게 스트린드베리는 입센과 동시대의 극작가이긴 하다.[12] 당장 인터넷에 희곡 제목을 검색하면 그 희곡을 너무나도 쉽게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13] 1900~1920년대 신파극쪽대본과 함께 어떠한 줄거리 흐름이 존재하고 거기에 맞게 배우가 사실상 애드립을 하는 터라 극작가가 탄생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신파극 대본은 없다. 당장 1910년대 유명한 신파극인 이수일과 심순애도 소설이 존재할 뿐 현존하는 당시 희곡은 없다.[14] 그리스어, 라틴어 같은 어떠한 엘리트 교육을 받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희곡을 썼던 천재 셰익스피어에게 열폭했던 영국 귀족 계급 출신 작가들이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말로나 베이컨 같은 귀족 출신 작가의 대역에 불과하다는 음모론을 만들어 퍼트렸고,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다.[15] 한국의 국립 극장이 1960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5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의 성장과 70~80년대 TV드라마의 등장과 시기가 겹친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던 시기에 공연하던 국립 극장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다.[16] 물론 넓은 의미에서 희곡의 하위 범주에 시나리오를 두는 경우도 있지만...[17] 김재성, 「<병자삼인>의 번안에 대한 연구」(2007)에서 처음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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