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科學革命 / Scientific Revolution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16, 17세기 유럽에서 과학의 여러 분야들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였으나, 본래의 의미는 이것이다.[1]
본래 중세 서구의 대학에서 중심이 되는 학과는 (일종의 교양 과목이라 볼 수 있는 자유7과를 제외하면) 법학, 신학, 의학 3학과였고, 학제가 발달하면서 철학이 추가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은 현대의 철학과 달리 자연철학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과학이 철학에서 분리되지 못하고 있던 중, 16~17세기 간 자연철학의 급격하고 비약적인 발전[2]으로 인해 과학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세분화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과학사의 대표적인 연구 주제 중 하나로, 이를 독립적으로 다루어도 될 정도로 그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이 시기 중국의 천문대인 흠천감의 주요 천문학자들이 중동계에서 서양계(아담 샬)로 바뀌는 것이 과학의 중심이 중동에서 서양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기도 한다.
2. 과학혁명기의 과학 발전
3. 과학혁명 연구의 역사
3.1. 20세기 초 과학인식론주의자들의 영향과 한계
허버트 버터필드가 과학혁명을 시대개념으로 정립시킨 것은 과학의 역사적 탐구를 통해 과학지식의 진보를 입증하려 한 과학인식론주의자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중세과학(특히 운동학)을 처음으로 발굴해낸 피에르 뒤엠이나 신칸트주의의 입장에서 실증주의를 비판한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 과학혁명의 선구적 업적을 쌓은 것으로 거론되는 에드윈 버트, 그리고 과학사학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평가되는 알렉상드르 쿠아레가 대표적인 과학 인식론주의자로 거론된다.과학인식론주의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사 전반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학사의 거대 상을 그리는 것을 추구하였다. 일반론자라고 불리는 그들은 16, 17세기에 일어난 과학발전이 근대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들의 과학혁명에 관한 과학학적 관심은 통사적인 분야사를 서술하려는 전통과 자연지식의 습득의 역사를 탐구한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들의 과학학적 관심을 철학적·윤리적·인간학적 관점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분석되었다.
첫 번째 관점은 실증주의의 유산으로 볼 수 있는데, 과학이란 다른 지식과는 구분되는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기에 확고하고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관점은 과학이란 자유·합리성·진리·선 등의 기본적인 가치가 체화된 것이며,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진보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관점은 과학은 보편적인 인간다운 활동으로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타고난 호기심의 표출이라고 보는 것으로, 조지 사튼의 새로운 휴머니즘이나 줄리언 헉슬리의 과학적 휴머니즘과 관련된 것이다.
과학사가들은 이 세 가지 관점을 수용하여 과학혁명 개념을 통해 근대과학의 기원을 설명하려 하였다. 첫번째 관점에서 과학혁명이란 인간의 사고방식과 자연연구 방법이란 측면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정의되었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과학혁명이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우주론과, 갈릴레이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역학의 등장 그리고 뉴턴에 의한 이 둘이 종합으로 등장한 기계적 세계관으로 규정되었다.
두 번째 관점에서 과학혁명이란 미신과 종교적 도그마를 물리치고 자유와 사상의 독립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정의되었다. 20세기 중반의 과학사가들은 과학혁명을 권위와 전통보다는 연구와 실험을 중시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 파악하였는데, 이 때문에 과학사가들은 고대 과학의 세 권위자들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갈레노스를 거부한 세 명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그리고 윌리엄 하비를 주목하면서 이들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근대인을 상징하는 영웅으로 규정하였으며, 그 연장선 상에서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을 중요시여겼다.
또한 자연을 지배하고 기술을 활용해야한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주장을 물질적 진보와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수단으로서 과학 활동에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왕립학회나 과학 아카데미와 같은 근대적 과학단체의 등장을 이끌어냈다라는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냈다.
또한 마지막 관점에서 과학혁명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였다라고 강조되었다. 과학사에 있어서 인식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점은 쿠아레와 같은 과학사가들이 과학사에 대한 내적 접근만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과학 발전을 이룩하게 만든 사회적 제반 요인에 관해서 무심하게 만들었다.
3.2. 기존 연구의 한계와 극복
비단 과학혁명 연구뿐만 아니라 20세기 초기의 과학사가들의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문제점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 내적 접근만을 선호하여 과학 발전의 사회적 기반을 무시한다는 문제점이 있고, 또한 과거의 과학을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평가함으로써 이전의 개념과 이론 등을 극복되어야 할 불완전한 것으로 취급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을 휘그적 역사관이라고 부르는데, 이 관점은 16, 17세기의 과학에서 현대과학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가 당시에는 어떠한 중요성을 갖고 있는가에 관해서는 상관없이 무시되었다.휘그적 역사 서술의 문제는 과학사 연구가 일반사가들과 지식사회학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극복되어갔다. 과학사학이라는 학문이 성숙해지고 전문적 연구 성과들이 나옴에 따라 버터필드와 같은 과학혁명에 대한 전통적 관점과 정전적 해석은 신뢰를 잃어갔다. 이 때 기존의 과학혁명관에 내재되어있는 문제 역시 드러남에 따라 전통적 관점은 힘을 상실해갔다.
그것은 근대 과학의 기원이 16~17세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튼 것이었다. 이 동향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 과학혁명 개념을 정립한 버터필드 역시 화학 혁명은 18세기에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화학 분야에 있어서의 과학혁명의 지연이라고 표현하였고, 전통적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도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일어난 물리학 분야의 성립(열역학과 전자기학, 통계역학의 등장과 현대적 의미의 물리학 개념의 성립)이라든지 화학에서의 여러 이론들의 발전이라든지, 생명과학에서의 유전이론의 등장과 진화론의 등장등 과학에서 여러 변혁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제 2의 과학혁명'이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그보다 과학혁명의 전통적인 관점이 갖고 있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점은 화학과 생명과학 분야는 어떤 식으로 확고한 자연지식을 획득하였는가는 문제였다. 생리학 분야에서 윌리엄 하비가 비록 기계론적 사고와 정량적 접근을 통해 과학혁명을 이루어냈다라는 전통적 관점은 비록 하비 이후의 생리학에서 어느 정도 근대적인 측면을 찾아볼 수 있으나, 오히려 근대과학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채 역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리학으로 돌아갔으며, 찰스 다윈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생명과학 전반의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설명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물리과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7세기의 기계론 철학자들의 이면도 드러났는데, 비록 그들이 근대적 자연관을 모색하려 했을지라도 그들의 자연관은 현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기계론 철학자들 역시 신학적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이용해서 자연을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서 16, 17세기의 자연철학자들의 연구대상은 단일한 과학이 아니었듯이, 과학혁명 역시 하나의 개념틀로 설명불가능함이 과학사학자들에게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 과학학자들이 갖고 있던 과학에 대한 견해, 확고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기에 과학은 확고하고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생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4. 논의된 여러 문제들
4.1. 용어의 문제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이후 쿠아레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 용어는 버터필드에 의해 과학사학계에 널리 퍼졌다. 이후 알프레드 루퍼트 홀은 그의 1954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과학혁명이란 용어를 처음 책 제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는 생각과는 다르게 상당히 최근의 것이며 과학혁명에 대한 연구는 1940년대 이후에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그 이전에 과학혁명이라는 용어가 없었긴 하지만, 당대의 학자들이 후에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 과학의 역사를 저술했던 이들은 이런 새로운 변화들을 혁명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이는 고·중세에 있었던 순환론적 역사 인식에 의한 것으로, 혁명이 오늘날의 의미로 확정된 것은 계몽철학자들이 활동했던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이와 같이 과학혁명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적합한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루퍼트 홀은 과학혁명을 의미하는 scientific revolution의 scientific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영어의 scientific이 상당히 모호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rational이나 technical, industrial이란 형용사와 혼동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버나드 코언은 이러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혁명이라는 모호한 용어는 널리 알려지고 쓰이면서 신성시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이렇게 과학혁명이라는 용어가 상당히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과학혁명을 크고 작은 많은 과학상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함에 따라, 과학혁명이 16, 17세기의 역사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패러다임의 전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어 개념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루퍼트 홀은 지적하였다.
4.2. 왜 서구 문명에서만 과학혁명이 일어났는가?
현대의 과학기술사회학을 토대로 하는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크게 특별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들은 과학의 진보가 명백한 방향성이 있어 반드시 한쪽 방향으로 진보해야 하며, 그것을 성취한 것이 서유럽 중심의 서구 세계였다는 관점 자체를 부정한다. 대신 이들은 과학혁명 혹은 과학의 진보는 어떤 방향으로든 이뤄질 수 있었으며, 그것이 반드시 지금의 과학과 같은 모습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3] 이러한 관점 하에서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왜 하필이면 서유럽 중심의 과학혁명이 성공하였는가?"4.2.1. 사회 분위기 차이에 따른 것이라는 의견과 그 반론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서구 문명에서만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사회의 관용성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은 이의 제기와 존중 사이의 긴장, 즉 다른 사람들의 관점으로부터의 독립과 그 관점에 대한 관용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을 통해서만 살아 있고 자라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의 제기의 자유성, 그리고 이런 의문을 받아주는 관용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온화하고 친절한 것이 미덕이고 기존의 질서에 반대하는 것이 개인적인 실책이 되는 동양의 문명권에서 과학이 강력하게 발전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보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매우 편협한 주장일 수 있다. 사회분위기라는 것은 동서양 문제가 아니라 지역따라 다르고 시대따라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서양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서양이라고 항상 열려 있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동양에서 기존의 질서에 반대하면 비난을 받았지만, 종교 재판 시대에 이는 산채로 타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4]
그 밖에도 종교갈등,인종차별,성차별 등등 근대에 이르러서도 서구 사회에서 관용은 다소 낯선 개념이었다.
서양[5]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진 것은 수많은 사람의 투쟁의 결과이다. 서양에서 근대과학은 숱한 불관용을 이겨내고 꽃피운 결과에 가깝다. 관용 덕에 가능했던 결과가 아니라.
동아시아권이 불관용적이라는 의견 또한 편견일 수 있다. 일례로 조선의 경우 기대승과 이황의 논쟁 등 유학적인 논쟁이 활발하던 시기가 있었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조선/오해등의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한국 특유의 권위주의는 사회 혼란기에 나타난 현상이었지 역사 내내 그런 모습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이렇듯 권위주의, 불관용이란 것은 사실 어느 사회에든 생기는 현상으로 이것이 동서양 차이를 갈랐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4.2.2. 각 지역별 차이
4.2.2.1. 서유럽: 안정되고 발달한 분권 사회
서유럽은 서로마의 멸망 이후 지속적인 분권화 상태였다.서로마의 잔존 세력은 다시 부흥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 상태였고, 게르만족은 원시적이었고 통합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유럽 통일은 커녕 프랑크 왕국을 제외하면 오래 존속 하지도 못했다, 바이킹도 이는 마찬가지. 유목민이나 아랍인도 유럽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는데 길고 가는 형태의 유럽 반도는 거대 세력이 유입되는 것이 아시아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고로 유럽엔 통일왕조도, 정복왕조도 들어서지 못한 채 이러한 분열 구조거 고착화 되었다.
그러자 유럽에선 세계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른 현상이 일어 났는데 이런 분열 상태에서 안정적인 문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분열기 상태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고, 학문을 연구할 여유도 생겼다.
그러자 이러한 분권사회의 장점도 빛을 발하는데 다원화 사회에선 어떠한 지적 혁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6]고대 학문 부흥을 목표로 가진 사람들은 수많은 왕과 귀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고, 이들 중 일부는 이를 받아 들이고 후언 함으로써 과학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4.2.2.2. 동아시아: 고질적인 이과학문 천대와 일원적 정치 체제
동아시아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유교를 이념으로 삼았다.공자는 실용철학이나 자연철학보다 도덕철학을 우월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공자의 생각으로 인해 한자 문화권에는 이른바 사농공상이라고 하는 신분 체제가 생겼다.
유럽에서는 7교양[7]에서 알 수 있듯 학문들을 분야에 상관치 않고 평등하게 보았으나, 동아시아에선 유학을 가장 우월한 학문,사의 학문으로 보고 우대 했다.
이러한 방식은 관료제에 고스란히 적용되어 상급 관료는 모두 유학,문학,수사학을 바탕으로 한 문과로 선발 되었고 높으신 분들이 전부 문과인 이 극단적인 관료체제 아래에서 과학과 수학,공학 연구는 극도로 위축 되었다, 천재 공학자들이 화약,시계,나침반 같은 걸 만든 들 높으신 문과들을 이를 신기하게 볼 뿐 원리에 관심이 없었다. 이런 공학자들은 책을 쓰고 학문을 남기긴 커녕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발명품만 남기고 떠나가는 경우가 허다했고, 자연히 동양엔 과학의 응용품만 있고, 과학 그 자체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부조리를 바꾸려는 노력은 많았으나 유럽과 달리 한 나라의 모든 것을 왕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 아래에선 왕이 이를 받아 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가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시대의 실학운동으로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볼 수 있겠으나 이를 지원하던 정조가 죽자 손쓸 수 없이 쇠하고 말았다.
4.2.2.3. 인도:카스트 제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예나 지금이나 카스트는 인도 발전을 가로막는 원흉이다.극소수의 브라만 계층에게만 학문의 권리를 준 인도에선 과학발전이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공업자와 과학자를 제도적으로 분리 시킨건 덤이다.
4.2.2.4. 중동,그리스
중동 세계와 그리스(비잔티움)은 헬레니즘 세계의 직계 후예로써 중세시대까지 학문적인 발전의 대부분에 기여 했으나, 근대에 들어와선 이슬람 근본주의가 대두돠고 서유럽세계에 사회,경제,학문적 우위를 빼앗겼다.4.2.2.5.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단절된 사회
이 두 지역은 나라가 분권화 되어 있었으나 그게 과하여 아예 단절되어 실패한 사례이다.중앙아시아 사회는 대체로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사람은 지하수가 흐르는 오아시스 근처에 도시를 짓고 살거나 떠돌이 유목생활을 해야 했다. 자연히 통합은 지연되고 이런 단절 사회에서 과학은 축적되기 매우 어렵다.[8]
동남아시아 사회도 이유는 다르지만 그 양상은 비슷한데 동남아시아는 산맥과 정글 사이에 사람이 몰려 사는 평야 지대가 점점이 박혀 있다. 그래서 이곳 또한 단절된 양상을 띄게 되었다.
5. 관련 문서
[1] 이것은 쿤의 저서를 국문으로 번역한 최초 역자의 실수 때문에 같은 용어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오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유명사인 과학혁명과는 별개로 토머스 쿤은 과학사에 일반적인 혁명들(그의 책의 원서 제목도 '과학 혁명들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이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들이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2] 영향을 준 여러 연구가 있었지만 가장 치명적이었던건 영국 왕립과학학회장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였다. 가설 수준이 아닌 진짜 자연의 보편을 인간이 온전히 수식만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걸 특출나게 증명함으로써 유럽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3] 이를 상대주의라 부르며, 앨런 소칼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4] 이는 역사상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심한 불관용의 사례이다.[5] 사실 이 단어 조차 지나치게 뭉뚱그려진 개념이다. 현대에도 유럽내 많은 나라에서 권위주의는 팽배해 있다.[6] 후술하겠지만 조선 시대 실학혁명보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더 성공적일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7] 문학,수사학,논리학,천문학,수학,기하학,음악 이 7 과목을 말하는 것으로 대학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치는 교양과목들이다.[8] 국가 단위에서 지원하기도 하나, 그 국가가 망하면 혼란기 속에 방치되다가 사라지기 일상, 결국 자체적인 학문 성과가 부족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