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7:28:06

이수일과 심순애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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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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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플롯3. 영향4. 영화

1. 개요

"장한몽"은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대한민국신파극 소설이다.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육혈포강도>[1]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신파극으로 꼽힌다.

장안 최고의 갑부의 아들 김중배(金重培, 도미야마(富山))와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李守一, 간이치(貫一)), 그리고 그 둘과 얽힌 여주인공 심순애(沈順愛, 오미야(お宮))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간략하면 결혼 조건이 "돈이냐 사랑이냐?"라는 것에서 돈(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을 선택한 여주 심순애 때문에 연인한테 차인 이수일이라는 가난한 남주는 정신이 붕괴돼서 돈 버는 것에 혈안이 되는 냉혈한 고리대금업자가 된다는 전개의 이야기다.

일재(一齋) 조중환(1863~1944)의 번안 소설 <장한몽(長恨夢)>은 1913년 1월 1일부터 1915년 5월 13일까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는데, 일본 소설인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金色夜叉, こんじきやしゃ)>(1897년~ 1902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가 원작이다. 당시 초베스트셀러로, 완결이 나면 책을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실은 <금색야차>도 영국의 작가인 버사 클레이(Bertha M.Clay,1836~1884)의 <여자보다 약한(Weaker than a woman)>보러 가기에서 캐릭터와 스토리의 구조를 무대와 이름을 일본으로 바꿔서 도용한 소설인 것이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2000년에 밝혀졌다.#@ 대사나 다이아몬드 소품 요소까지 동일하다. 그러니까 이수일과 심순애는 도용작을 다시 번안한 무려 3차 창작인 셈이다.

저작권법과 인식이 발달한 현대에서 보자면 이상하게 보이지만, 세계적으로 저작권법이 보편화된 시기는 후하게 잡아도 20세기 중후반이었고 당시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용이나 무단 번안 자체는 흔한 일이었다. 특히 이런 식의 번안작은 흔했고, 맥베스의 경우 거미집의 성으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경우 암굴왕으로 번안되어 주인공은 일본인이었으며, 등대지기처럼 유럽의 가곡에 자국 가사를 붙여 창작곡으로 쓰기도 했었다. 다만 <여자보다 약한>의 경우 복수극이 없고 주인공은 원래 가난뱅이도 아니라서 <금색야차>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일본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다면,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함께, 메이지 시대 당시 새롭게 도입된 문장 스타일로, 기존의 문어체소설이 주류였던 시기에 일반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일치(言文一致)로 쓴 작품이다. 일반 대중들이 읽는 신문에 연재한 소설이었기에, 문장을 쉽게 쓴 것이다.

2. 플롯

주인공 이수일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자라며 고등학교를 마친 뒤, 심순애와 혼인을 약속한다. 어느 정월 보름날, 심순애는 김 소사의 집에 윷놀이를 갔다가 대 갑부의 아들이자 도쿄 유학생 김중배를 만난다. 김중배는 심순애에게 매혹되어 다이아몬드 반지와 물질 공세로 심순애를 유혹해 심순애의 마음은 점점 이수일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수일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자 달빛 어린 대동강 변 부벽루에서 심순애를 달래고 꾸짖었지만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울분과 타락 끝에 금력과 물질의 원한으로 고리대금업자 김정연의 서기가 된 이수일은 김정연의 죽음과 함께 많은 유산을 받게 된다. 이후 김중배의 몹쓸 짓을 겪다가 과오를 뉘우친 심순애는 이수일에게 사과하지만 그는 냉담하게 그녀를 내치고 심순애는 속죄의 의미로 대동강투신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이수일의 친구 백낙관에게 구출된다. 낙관은 이수일을 설득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금전 일에만 몰두하다 신경쇠약으로 청량암에 휴향하며 머물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남녀 연인이 자살 시도하는 걸 구해주면서 기분과 감정에 변화가 오고 이후 두 연인은 백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결합하여 새 출발을 한다.

원작은 오자키 고요위암으로 병마에 시달리다 37살의 나이로 타계해서 이 작품이 유작이 되고 미완결로 끝난 것에 반해 <이수일과 심순애>에서는 결말이 났다.[2][3] <금색야차>에서는 오미야(여주인공)가 칸이치(남주인공)을 버리고 떠나는 이유를 '말하기 힘들다' '저한테는 어떤 생각이 있어요'라고 얼버무리는데, <Weaker than a woman>에서는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을 버리고 부자집 귀족과 결혼하려는 이유를 '난 돈이 좋고 사치와 호화로움이 좋고 당신 같은 가난한 집안에서 난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서로 비참해질 거다'라고 화끈하게 밝힌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 엄청난 재산을 얻게 되자 그녀의 첫사랑 남주인공과 비밀리에 재결합하려고 한다는 스토리로 이어진다.[4] 미완결로 끝난 <금색야차>에서도 오자키 코요의 원래 구상은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1940년 코요 전집을 낼 때에 구상 노트가 발견되었으며, 이에 따르면 칸이치는 마지막에 고리대금을 모은 돈을 모두 사회사업에 기부하고, 오미야가 왜 돈을 쫓아갔나 라는 이유를 밝힌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 노트는 태평양 전쟁 와중에 사라져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3. 영향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연재가 끝나기도 전에 연극 무대에 올려졌을 정도. 이후 신파극으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고, 총 7차례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수일과 심순애/영화 문서 참고.

왜인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들어가 있다. 애초에 가상 인물인 데다 해외 소설이 원작이라 아무리 봐도 오류.

이수일의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는 명대사는 이후로도 수없이 우려먹게 되고 xx의 xx가 그렇게도 좋더냐?라는 바리에이션이 수두룩하게 배출되었다. 그 외에 "순애야, 저 달을 보아라. 저 달이 흐리면 이수일이가 피눈물을 흘리는 줄 알아라" 도 유명하다. 여기에 심순애가 이수일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자 이수일이 외친 트레이드마크급 대사 "노~아라(놓아라를 극적인 분위기를 위해 늘려 말한 것)!"가 있다. 이 장면과 대사들은 단지 영화나 연극에서 만이 아니고 60-70년대 한국의 TV 코미디나 학예회나 학생들의 장기자랑 등에서 수없이 패러디 되었다. 특히 과장된 억양이나 극적 성조나 과장된 연극적 연기동작 등의 정형적인 신파조라는 것 각인시켜 신파극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신파극은 통속적 3류 코미디라는 인상을 굳혔다.

이수일이 심순애를 발로 차는 장면도 유명하다. 실은 이것은 실화에서 힌트를 얻은 일본판 오리지널 장면인데, 일본판 원작가 오자키 코요의 친구였던 아동 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에게 고급요정에서 일했던 애인이 있었는데 그가 다른 지방에서 2년간 파견 근무를 하는 동안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헤어졌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은 분노한 오자키는 그 요정으로 찾아가서 그 여자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고. 그런데 정작 당사자였던 이와야 사자나미는 결혼할 맘도 없었고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했었다나. 덤으로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의 호가 이 아동 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의 '小波'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심지어 일본 원작의 책 표지가 바로 그 장면.
파일:external/images-jp.amazon.com/4003101413.09.LZZZZZZZ.jpg
원작의 책 표지. 게다가 아래에도 언급되듯 이 장면을 그대로 묘사한 동상도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때 셀 수도 없는 문학 작품들에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글쟁이들의 상황이 이수일과 별로 다르지 않았고, 이상과 야망은 크지만 현실은 시궁창인지라, 자신들을 버리고 간 여자들을 생각하며 소설에 이 작품의 모티브를 딴 것들이 많다.

1960-70년대 극장 쇼나 TV 코미디에서 신파극 특유의 변사 말투나 소위 신파쪼의 대사로 단골로 패러디되던 장면이었다. 사실 이게 하이라이트였다. 당시 극 무대에서 배우들은 대사 없이 연기를 하고 대신 변사가 극 중 인물들의 대사를 읊었는데 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일부러 대사의 말미를 늘이거나 줄이는 식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끈 것. 예를 들어 심순애가 자기는 일편단심 이수일뿐이란 말을 "내게는 오직 수일씨뿐입~니!"라고 하는 식이다. 그래서 학생들 장기자랑 따위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로 쓰이기도 했다.

1990년대 극중극의 형태로 드라마화된 적이 있다. 장한몽을 공연하던 악극단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 대하극인데, 중간중간 장한몽 공연 장면이 나와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수일 역은 유인촌.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인 일본 아타미에는 원작을 훌륭히 재현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게임 러브 플러스+에서도 아타미 관광을 가면 볼 수 있다.
동상 사진

이 동상 근처에는 여주인공 오미야의 이름을 딴 '오미야의 소나무(お宮の松)'라는 이름의 소나무도 있다.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으나 1919년 8월 오자키 고요의 제자인 작가 오구리 후요가 금색야차 문학비 건립을 계기로 오미야의 소나무라고 부르게 된 이후 아예 이 이름으로 굳어졌다. 현존하는 오미야의 소나무는 2대로, 초대가 1966년에 차량 배기가스 등의 영향으로 쇠약해지면서 새로 심은 것.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2대 소나무도 점차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1990년대 수능 시험 관련 교육 방송 예문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데, 이 예문으로 쓴 어느 수필에서 '일본 번안 소설의 가상 등장인물이 왜 위인이라고 들어가야 하는가? 의문이 든다'고 씹은 적도 있다. 뭐 그만큼 한국 연애물에 너무나도 영향을 주었지만[5]. 사실 한국(더 크게는 한중일의 극동 국가)의 근대화 과정(흔히 말하는 개화기)에서 연애, 그리고 연애 이야기를 다룬 창작물은 곧 대중들이 '개인'과 '개인의 의사 및 욕망'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매개 중 하나였기에 작품성은 둘째 치고 본작이 한국사(개화기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그리 작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말하자면 본작과 본작을 원작으로 한 신파극의 내용은 현대인 독자들의 눈에 보기에는 신기할 것이 전혀 없지만, 당대 독자들의 관점에서 <돈과 사랑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까 저울질하는 여주인공>과 <여자에게 차였다는 이유로 충격을 받아 자신의 인생 행보를 바꾸는 남주인공>은 문화충격 그 자체였고, 이것이 본작의 폭발적인 인기의 비결인 동시에 그 독자들에게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6]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욕망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현대적 의미의 개인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측면에서 보면, <장한몽>은 같은 시대, 4~5년 늦게 쓰여진 작품인 이광수의 계몽 소설 무정(소설)보다도 더 급진적인 측면을 강하게 보이다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 무정에 등장하는 형식은 "중요한 것은 개인의 감정이나 욕망이 아니라 문명 개화! 과학!" 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영채는 형식을 위해 기생으로 일하면서도 정조를 지키다가 강간으로 정조를 잃고 연애 전선에서 스스로 리타이어하며, 선형은 개인의 욕망을 '인식'하여 못생긴 형식이 자신의 남편감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집에서 정해준 혼약이므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긴다. 이에 비해 장한몽에서 심순애는 연애 감정을 자각했을 뿐 아니라 김중배의 재력(다이아몬드 반지)와 이수일에 대한 연애 감정을 저울질하여 스스로 한쪽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수일 역시 심순애가 자신을 차버린 것에 분노하여 (사회적으로 나쁘게 여겨지는) 고리대금업에 투신하는 등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사회적 가치관이 요구하는 바와 완전히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즉, 개화기의 소설(특히 연애 소설)이 독자들에게 '개인'을 발견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보면 무정과 같은 대표적인 계몽 소설보다도 훨씬 강렬하고 명확하게 개인의 욕망과 그 행보를 표현하고 전달하고 있는 것이 장한몽이다.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번안물이라는 한계상 이를 작가의 업적이라고 인정해 주기는 민망하지만 어쨌건 출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작품으로서 그 역사적 영향력과 의미는 인정할 만하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보면 일부 판본에서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를 받은 것은 심순애가 아닌 심순애의 어머니'라거나 '결국 심순애는 자결했다'와 같은 개작이 이루어지고, 원작에서도 결말에서 결혼 후 4년간 심순애가 순결을 지켰다는 무리한 설정이 등장하게 된 이유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대 독자들의 기준에서 심순애는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기존 사회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심순애(결혼 경력 있는 여자)와 이수일(결혼 경력 없는 남자)이 재결합한다는 결말 역시 당시 사회의 기준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종의 2차 창작 비슷한 심리로 '당대 독자들에게 좀 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작이 이루어지거나[7] 개연성에는 무리가 있지만 독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설정이 추가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당대 독자들이 가진 가치관을 아슬아슬한 한계점까지 자극한 작품인 셈.

한국 구비 문학 관련 서적들을 찾다 보면, 설화랍시고 채록된 사례도 있는데, 당시만 해도 구전 문화가 강했기 때문에 실제로 설화처럼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위의 금색야차 표지 그림 남주인공의 복장 (가쿠란 교복에 놋쇠 교표와 흰띠를 두른 학생모자, 긴 검은 망토의 삼종세트)도 다른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이수일과 심순애 작품 뿐 아니라 일제시대를 다룬 대부분의 해방전과 해방후의 연극 영화 방송 작품에서 학생 신분, 특히나 대학생 등장인물의 통상적 복장으로 나왔다. 단지 학교 등교 때만 입은게 아니고 양복처럼 사회생활이나 여행이나 남녀교제 때도 입고 나온다. 심지어는 1970-80년대에 만든 일제강점기나 해방전후 한국 배경의 영화에서도 그 흔적이 보인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대학생인 장하림이 저 복장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가쿠란이 통일되어 있었다. 자세한 것은 가쿠란 참고. 다만 장하림의 경우 제국대생인 반면 하자마 칸이치는 구제고등학교중 하나였던 제1고등학교 학생으로 설정된 게 차이점. 그리고 여명의 눈동자는 고증 오류인 게, 사실 일본에서 가쿠란 교복을 입고 망토를 두르고 다니는 건 구제고등학교 학생들의 패션이었지, 제국대생들은 망토를 두르지 않고 단정한 롱코트를 많이 입고 다녔다. 가쿠란 교복과 망토 조합의 패션은 그 당시 폐의파모(弊衣破帽) 내지는 반카라(バンカラ)로 많이 불렸다.

한국에서 대학교 교복과 고등학교 교복의 차이가 생긴 것은 1950년대 이후. 그것도 일본에서는 제각각이다. 영화 박치기 초반부에 보면 도쿄에서 교토로 여행 온 고등학생들은 1960년대 한국 대학생 교복에 해당하는 교복을 입고 있다.

김장훈의 노래 난 남자다 뮤직비디오 컨셉도 야인시대와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 모티브가 바로 이 이수일과 심순애다. 김장훈이 이수일로, 차승원이 김중배로 분했다.

2007년 무한도전 영어마을 특집에선 2006년도 방송대상 수상자와 비수상자로 나뉜 무도 멤버들 중 수상자팀인 유재석(이수일), 박명수(김중배), 하하(심순애)가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을 영어로 진행했다.[8]

사쿠라 대전 코믹스판에선 제국가극단이 원작인 금색야차를 연극무대에 올리는데 간이치 역은 키리시마 칸나, 오미야 역은 칸자키 스미레가 맡았다. 다이아몬드 반지 관련 해서 칸나가 스미레를 발로 차는 장면 리허설에선 칸나가 그만 실수로 돌려차기(...)를 하는 바람에 스미레가 식겁했다.

작고한 원로 가수 고복수황금심 씨가 노래한 가요 장한몽도 있다. 1917년에 발표된 일본 원곡을 한국어로 개사만 한 것. 원곡. 한국어판 가사는...
대동강 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兩人)이로다
악수논정(握手論情) 하는 것도 오날뿐이요 / 도보행진 산보함도 오날뿐이다
수일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 / 어이하여 심순애야 못 참았더냐
남편의 부족함이 있는 연고(緣故)냐 / 불연(不然)이면 금전이 탐이 나더냐

(이 부분은 대사)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탐이 나더냐 에이!악마!매춘부!
만일에 내년 이 밤 내명년 이 밤 / 만일에 저 달이 오늘같이 흐리거던
이수일이가 어디에선가 심순애 너를 원망하고 오늘같이 우는 줄이나 알아라)

낭군의 부족함은 없지요만은 / 당신을 외국 유학 시키려고
숙부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 김중배의 가정으로 시집을 가요
순애야 반병신 된 이수일이도 / 이 세상에 당당한 의리 남아라
이상적인 나의 처를 돈과 바꾸어 / 외국 유학 하려 하는 내가 아니다

4.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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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


[1] 1886년 도쿄에서 권총을 들고 강도 살인을 벌인 시미즈 사다키치 사건을 소재로 했다. 이때 순직순사 오가와 다키치로를 주인공으로 하였다. 번안판은 당연히 조선인 순사가 주인공이고 합병 이후 이미지가 좋지 않던 순사들의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만들어진 극이다. 순사는 죽으면서 잡혀가는 강도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마지막 대사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범인 시미즈는 오가와 순사를 죽인 죄로 사형되었다.[2] 김중배가 심순애를 4년간 건드리지 않아 순결을 지키는 것에 성공한 심순애와, 고리대금업자 밑에 들어가 큰돈을 번 이수일이 훗날 재결합한다. 상식적으로 4년간 아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기 때문에 사실 김중배는 이수일을 좋아한 게이가 아니었냐는 썰이 잠시 나돈 적도 있다.[3] 다만 김중베 게이설은 (당연히) 본작을 현대적 관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일종의 농담에 가까운 재해석으로 제시한 것이고, 진지하게 해석한다면 당대 처녀충독자들의 가치관, 특히 성적 가치관으로는 만약 김중배와 심순애가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 이수일과 심순애가 재결합하는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말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개연성을 포기했다는 해석이 주류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에 나온 작품이고 당대의 독자들이 가진 가치관으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관계까지 가진 여자(=순결을 상실한 여자)가 주인공(이자 결혼하지 않은 총각)과 결합한다는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므로 해피 엔딩을 위해 개연성이 없는 설정을 집어넣었다는 것. 본작이 통속소설로 평가되는 이유 중에는 이와 같이 독자의 기호를 위해 작품의 내적 개연성을 포기하는 편의주의적 태도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품이란 어디까지나 그것을 볼 독자들을 위해 쓰여지는 만큼 이러한 타협이나 개연성의 포기가 그리 드문 일까지는 아니다.[4] 어느 판본에서는 심순애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반지에 넘어가고, 은단도로 심순애가 자결하는 스토리로 끝난다.[5] 돈이나 야망을 위해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다는 내용은 원작의 국적을 막론하고 인기 높은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6] 대표적으로 충효[7] 비슷한 예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미국에서 상연될 당시 원작에 없는 5막이 추가되어 가족을 떠났던 노라가 집으로 돌아오고 헬메르가 이를 따뜻히 맞아주는 결말로 개작된 사례가 있다. 20세기 초 한국의 독자들이 여자가 '돈과 사랑 중에서 저울질하여 누구와 결혼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결혼했던 여자가 옛 연인과 재결합'한다는 결말을 납득하기 힘들어하고 부도덕하다고까지 여겼던 것처럼 19세기 후반의 미국인들 역시 '가족이 있는 여자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가족을 떠난다는 결말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8] 비수상자 팀이 한 연극은 춘향전이었는데, 배역은 정준하(변사또), 정형돈(성춘향), 노홍철(이몽룡)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