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5 17:39:15

손병희

파일:대한민국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부장.png
1949
이승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49
이시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파일:미국 국기.svg
1953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1955
하일레 셀라시에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1957
응오딘지엠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1958
아드난 멘데레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1962
허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좌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오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조병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중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윤봉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강우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창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신익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창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손병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승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한용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최익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강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민영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svg
1964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svg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파일:독일 국기.svg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파일:차드 국기.svg
1965
다비드 다코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1965
수루-미강 아피디
파일:베냉 국기.svg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파일:세네갈 국기.svg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1965
레옹 음바
파일:가봉 국기.svg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기.svg
1965
하마니 디오리
파일:니제르 국기.svg
1965
조모 케냐타
파일:케냐 국기.svg
1965
무테사 2세
파일:우간다 국기.svg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파일:태국 국기.svg
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1968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8
천치메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1970
조만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6
임병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파일:미국 국기.svg
1979
박정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
최규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1
시리낏 끼띠야꼰
파일:태국 국기.svg
1981
푸미폰 아둔야뎃
파일:태국 국기.svg
1983
전두환(취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김규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조소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장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
여운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유관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
홍범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 독립유공자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손병희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colcolor=#fff>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aaa
권동진 권병덕 길선주 김병조 김완규 김창준(北) 나용환 나인협 박동완 박준승 박희도(日)
백용성 손병희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양한묵 오세창 오화영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일 이종훈 이필주 임예환 정춘수(日) 최린(日) 최성모 한용운 홍기조 홍병기

※ (北): 월북, (日): 친일반민족행위자
}}}}}}}}}}}}

파일:천도교 투명.png
동학 · 천도교 교주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교조
초대 2대 3대 4대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박인호
교령
초대 2대 3대 4대
이종린 정광조 이종린 공탁
5대 6-10대 11-15대 16대
공진항 신용구 최덕신 김명진
17대 17-19대 20-21대 22대
이우영 이영복 고정훈 정운채
23-24대 25-26대 27대 28대
오익제 김재중 김광욱 김철
29대 30대 31대 32대
이철기 한광도 김동환 임운길
33대 34대 35대 36대
박남수 이정희 송범두 박상종
}}}}}}}}}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손병희
孫秉熙 | Son Byong-hi
파일:손병희.png
초명 손응구(孫應九)[1]
족보명 손상현(孫祥鉉)
이명 손규동(孫奎東)·이상헌(李祥憲)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 의암(義菴)
본관 밀양 손씨[2]
출생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 385-2)[3]
사망 1922년 5월 19일 (향년 61세)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 상춘원(常春園)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직업 독립운동가
종교 천도교
가족 아버지 손두흥(孫斗興), 어머니 경주 최씨[4]
형 손병곤(孫秉坤), 첫째 남동생 손병흠(孫秉欽)
둘째 남동생 손병권(孫秉權)[5], 여동생 손조이(孫召史)[6]
첫째 부인 현풍 곽씨, 둘째 부인 홍응화
셋째 부인 주옥경[7][8]
슬하 딸 5명[9], 조카 손천민(孫天民)[10]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 동학천도교의 지도자,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한명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에서 청주목 아전인 아버지 손두흥(孫斗興)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경주 최씨 최정성(崔正成)의 딸 소생이었으므로 서자였다. 가난과 주위의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면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1877년[11] 괴산군에서는 배짱 좋게 수신사를 때렸는데 이유는 수신사가 하인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12] 1882년 동학에 입도한 후 양아치 짓은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하다가 이윽고 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에까지 올라간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하면서[13] 남접전봉준이 이끈 호남 창의군과 공동 작전을 벌여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후 손병희는 최시형 등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으로 피신해서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붙잡혀서 처형당한 후 동학 북접의 도통을 이어받았는데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이 때 도쿄에서 당시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역관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기존의 존왕양이 사상을 버리고 개화론자로 전향한다. 본래는 청나라망명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재정착한 후 유학생을 유치하고자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 했는데 이 때 사용하던 가명이 이상헌(李祥憲)이다.

망명 시절 신분을 숨기고 충주 출신의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던 손병희는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익혔다. 이 때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령으로 국내에 돌아와 1904년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 등 급진 개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등 손병희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정부에게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이용구에게 친일파였던 송병준이 접근하여 자신들의 어용 조직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치면 일제의 힘으로 탄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령 조직이나 다름없던 초기 일진회에 진보회가 합쳐지면서 회장 자리를 얻은 이용구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불과했던 <한일합방론>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합방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손병희는 이용구의 변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이용구와 갈등을 빚게 되고 정교 분리를 내세워 동학에서 일진회 세력을 모조리 처내고 조직을 분리한다. 이후 출교당한 친일성향의 일진회는 이용구를 교주로 하는 시천교를 세우게 되고 손병희가 이끌고 있는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의숙 등 본격적으로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다.

이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3. 기타

  • 3.1 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탑골공원(옛 이름은 파고다 공원)에 손병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3.1 운동에서 그의 주도적 비중을 반영한 모습.
  • 손병희는 대한제국 민간인으로서 1905년 최초로 본인 소유의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애마가 심지어 캐딜락이었다. 참고로 이 캐딜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의 캐딜락과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14] 후술할 소문에 비추어볼 때, 천도교 자금으로 꽤나 호화롭게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캐딜락에 관한 일화가 또 있는데, 운전석하고 유리벽으로 분리가 되어있는 리무진 버전[15]이어서 수행기사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한 별도의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 손병희의 일화 운운 나온 것은 일제 당국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 계간 '역사비평'에서 3.1 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나 분석을 따로 연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나 기관지에서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나 손병희와 기독교 선교사들 간의 밀착류였다. 전자야 당연히 흑색선전 목적이 짙었고 후자는 3.1 운동의 배후 세력을 기독교계 반일 인사들로 초기에는 봤다는 이야기인데 당대 현장 증인인 윤치호가 3.1 운동에 쓴 일기에 "사이비 교주 손병희가 순진한 사람들 재산 털어먹으려고 독립운동한다고 나서는구나!"라고 쓴 걸 보면 일제가 퍼트린 흑색선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시에는 유인석 안중근의 경우처럼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동학을 토비나 화적떼처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 신복룡 교수가 일제의 이런 자료를 분석하고 여러 후일담을 넣어서 어느 신문에서 "3.1 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올렸다. 주제는 민족 대표 33인은 진정한 민족 대표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이러한 손병희의 행각과 민족 대표의 전원 변절설[16]을 들어 비판한다는 점. 문제는 그 신문에서 삽화를 기생이 민족 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천도교 쪽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해서 사과하기는 했으나 단행본에서는 사과하지 않고 있다.
  • 한때 방송에서 민족 대표 33인을 희화화한 인터넷 강사 설민석과 유족회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설민석은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를 하였으나, 유족회는 설민석의 방송 출연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벌어진 재판에서 재판부는 "새롭게 건설한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까지 추서 또는 수여받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언사이지 필요 이상으로 경멸, 비하 내지 조롱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해 그 후손들이 선조에게 품고 있는 합당한 경외와 추모의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설 강사에게 손씨 아들에게는 200만 원, 손자에게 150만 원, 증손자에게 100만 원, 현손자에게 50만 원, 그 밖의 민족대표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1인당 25~100만 원으로 해서 총 1,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출처 링크 자세한 내용은 설민석/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조.

4. 대중매체에서

파일:제1공화국 손병희.png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김호영이 연기했다. '33회 - 이기붕과 자유당' 편에서 보성중학교 교주 시절 모습으로 잠깐 등장했다. 소년 이기붕(김진만 분)이 보성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경주수학여행을 갈 때 키가 작다고 제외당했고[17] 이에 이기붕이 교무실로 찾아가서 "작은 고추가 더 맵다"며 참석 의지를 드러내자 "그래, 사람은 항상 자신을 갖고 살아야지"라며 허락한다.
  •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김중희가 연기했다. 또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조정석이 연기한 백이강은 손병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파일:투명 1x10.png파일:고려대학교 심볼.svg파일:투명 1x10.png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보성전문학교 교주(校主)[1]
초대

이용익
2대

이종호
3대

손병희
<nopad>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2]
<nopad>
1932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초대

김성수
1-4대

이활
5-8대

김상만
9대

김용식
10대

채문식
11·12대

김병관
13대

현승종
14·15대

김정배
16-19대

김재호

[1] 학교의 주인 또는 경영자를 지칭하는 말[2] 1921년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설립.
}}}}}}}}} ||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1] 자 또한 응구(應九)였다.[2] 국자진사공파 역승공계 44세 병(秉) 항렬.[3] 현재도 이 지번에 청주손병희생가가 남아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4] 최정성(崔正成)의 딸이다.[5] 큰아버지 손두성(孫斗星)에 입양되었다.[6] 손소사(孫召史)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인 조이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후 손시화(孫時嬅)로 개명했으며,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과 혼인하였다.[7] 주병규(朱炳圭)의 딸이다. 명월관 기생이었다. 1914년 손병희와 결혼하였다.[8] 1894년 ~ 1982년 (향년 88세)[9] 그중 셋째 딸 손용화(1901~1992)는 독립유공자 방정환과 혼인하였다.[10] 형 손병곤의 장남이다. 손병희보다 4살 연상이었다.[11] 천도교 측에서 1877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수신사 파견 연도를 보면 1876년이 맞는 듯.[12] <계몽사 위인전>에는 수신사가 하인의 머리를 말총에 묶어 끌고 다니다 이를 목격한 손병희에게 맞았다고 한다.[13] 이 시기 북접의 성향은 남접과 판이했다. 초기 북접과 남접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북접의 거병 이유를 남접군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 초기의 활약은 남접에서 다 했으며 북접과 같이 활동한 시기는 오히려 쇠퇴기이다. 자세한 것은 동학 농민 혁명 항목 참조.[14] 이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어차(등록문화재 제319호)가 원래는 손병희의 차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5] 21세기 현재에도 최고급 리무진은 운전석과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다.[16] 민족 대표들이 전부 변절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민족대표 33인 문서 참고.[17] 서울에서 대구까지만 기차를 탔고 대구에서 경주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두 도시의 거리는 200리, 현재 단위로 무려 80km 가까이 되는 먼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