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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 회장 이용구 李容九 | Lee Yonggu | |
<colcolor=#fff> 성명 | <colbgcolor=#FFF,#1f2023>이용구(李容九) |
출생 | 1868년 (고종 5년) 2월 14일 |
경상도 상주목 외동면 진두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진두마을) | |
사망 | 1912년 (메이지 45년) 5월 22일 (향년 44세) |
일본 제국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 | |
직업 | 종교인, 정치가 |
본관 | 벽진 이씨[1] |
초명 | 이우필(李愚弼) |
이명 | 이만식(李萬植)·이성순(李聖順) 이상옥(李祥玉, 李相玉, 李尙玉) |
자 / 호 | 대유(大有) / 해산(海山) |
종교 | |
도호 | 지암(智菴)[2], 봉암(鳳菴)[3]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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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인, 종교인. 일제강점기 직전 일진회 회장을 지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1910년 한일병합 때 이완용 등과 함께 한일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후 일제에게 토사구팽당하고 귀족 작위도 거절하는 등 허탈해하다 1912년 사망했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 동학교도로서 도호는 지암(智菴)이고 시천교 교주로서 도호는 봉암(鳳菴)이다. 초명은 이우필(李愚弼)인데 이후 이상옥(李祥玉, 李相玉, 李尙玉)·이만식(李萬植)·이성순(李聖順) 등의 이름을 사용한 바 있다. 이용구라는 이름은 동학의 제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하사한 이름으로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의 9개 구절을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용구가 동학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2. 생애
1868년 2월 14일 경상도 상주목 외동면 진두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진두마을)에서 이일화(李一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농사를 짓다가 1890년 동학에 입교(入敎)하여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의 교육을 받았으며 투철한 신앙으로 손병희와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 뛰어난 학식과 품행을 지닌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때 동학 농민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손병희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03년 귀국하여 동학 포교(布敎) 운동을 벌였다. 외세의 침탈과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국내에서는 아시아가 뭉쳐 서구 열강을 몰아내자는 취지의 아시아주의가 큰 지지를 받게 된다. 동학의 제3대 교주인 손병희는 봉건적인 대한제국을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는 방안으로 아시아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로 한다. 손병희는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동학을 근본으로 한 국가의 개조를 꿈꾸었으며 이 때부터 여러 민회를 만들고 일본과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하지만 이용구는 아시아주의에서 더 나아가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자는 '대동합방론'[4]에 심취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명분으로 아시아가 뭉쳐 대동국을 이루고 일본과 한국이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소리를 선전하였고 이용구는 어리석게도 이를 철석같이 믿게 된다. 이용구가 바라던 한일 합방의 모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대한제국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하여 열강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일본의 '대동합방론'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목적하에 일본 우익에서 만들어낸 사상으로 이용구가 원했던 합방과 정반대의 입장이였다.
오른쪽이 이용구. 왼쪽은 송병준. |
이용구는 1904년경 '대동회'를 결성하는데 이후 대동회는 '진보회'로 명칭을 바꾸고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한다. 이 때부터 이용구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진회를 만들고 일진회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현양사(玄洋社)의 도움으로 친일 행위에 나서게 된다. 이용구는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 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여 고종에게까지 한일병합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용구의 친일 행동은 국내에서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에 1905년 손병희는 노골적인 친일 행동을 일삼는 이용구와 62명의 동학 지도자를 동학에서 축출함과 동시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다. 이용구는 출교 처분을 당한 후 동학 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친일 성향의 신흥 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이용구와 일진회는 친일에 대한 보상으로 몇몇 간부가 관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모든 국민들의 역적 1순위가 되었는데 각종 의병의 타도 대상이 되었으며 수많은 테러에 시달렸다. 송병준을 싫어했던 이완용은 송병준과 하나가 된 일진회를 고깝게 보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게 되었기 때문에 일진회는 어느 곳에도 발 붙일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며 조직은 와해될 위기에 놓인다. 더이상 한국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이용구는 조직을 만주로 옮기고 만주를 개척하면서 살 계획을 세운다. 이에 이용구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한일합방 청원을 앞장서 추진할테니 만주 이주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 엔을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 때 가쓰라 다로는 이용구에게 "합방에 힘써준다면 3백만 엔이 아니라 3천만 엔이라도 줄 수 있다."라고 약속한다. 이용구는 한일합방 전까지도 일본이 주장한 합방의 내용이 자신이 생각한 1:1 대등합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용구는 이후 대한제국과 일본이 맺은 한일병합조약의 병합을 문제삼으며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했다. 1910년 일본이 원하는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이용구는 바로 토사구팽당하는데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되며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일본은 1910년 9월 일진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해산비 명목으로 달랑 15만 엔을 던져주었는데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결국 이용구는 자신이 토사구팽당한 것을 깨닫고 귀족 작위도 거절한 체 허탈해하며 결핵에 몸져 눕게 되는데 1912년 죽기 직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바보짓을 했어요.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911년 일본 스마(須磨) 지방[5]으로 건너가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12년 병고(病苦)로 죽었는데 죽은 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勳)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아들로는 이석규(1910)가 있다.[6]
이용구: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7]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日本之亞細亞』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7]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日本之亞細亞』
그나마 사망 직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면서 지금도 이용구의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아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있다.[8]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전근대 시대에 무지의 위험함을 알려주는 산 증인이며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말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예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관련 매체
- 이용구의 생애를 다룬 만화 #
이용당한 호구
[1] 32세 우(愚) 항렬.[2] 동학교도로서의 도호[3] 시천교 교주로서의 도호[4] 이 사상은 차후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한다.[5] 현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6] 합병 이후 자신이 속았단 걸 깨닫고 죽어가며 후회한 아버지랑 달리 이석규는 그 후에도 당당히 친일파로 일본을 옹호하며 창씨개명을 홍보하는 등 최소한의 옹호 여지가 있는 아버지랑 달리 완벽한 악질 매국노가 되었다.[7] 정작 저 말을 전한 우치다 료헤이야말로 일진회의 고문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 낭인의 거두였다. 되도 않은 구라를 쳤을 확률이 높은 셈.[8] 위 링크한 이석규 인터뷰 기사에서 조갑제 전 조선일보 기자가 단언하듯 이용구에 대한 동정은 오직 문학적인 문제일 뿐이다. 아무리 실수라도 매국노라는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