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color: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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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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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ruby(伊, ruby=い)][ruby(藤, ruby=とう)] [ruby(博文, ruby=ひろぶみ)][구자체] | 伊藤博文 [신자체] | Itō Hirobumi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41년 10월 16일 | ||
스오국 쿠마게군 쓰카리촌 (現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 |||
사망 | 1909년 10월 26일 (향년 68세)[3] | ||
러시아령 만주 하르빈시 하르빈역 역사 (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역사) | |||
묘소 | 도쿄도 시나가와구 니시오이 | ||
재임기간 | 초대 내각총리대신 | ||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 |||
제5대 내각총리대신 | |||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 |||
제7대 내각총리대신 | |||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 |||
제10대 내각총리대신 | |||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 |||
초대 한국통감 | |||
1905년 12월 21일 ~ 1909년 6월 1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통칭 | 리스케(利助) → 도시스케(利助)[4] → 슌스케(春輔) | |
호 | 슌포(春畝) | ||
부모 | 부친 이토 주조, 모친 이토 고토네 | ||
배우자 | 선처 이토 스미코, 후처 이토 우메코 | ||
자녀 | 장녀 이토 사다코(요절) 차녀 스에마쓰 세이코 - 사위 스에마쓰 겐초 삼녀 니시 아사코 - 사위 니시 겐시로 사녀 오타케 사와코 - 사위 오타케 다케 양자 이토 히로쿠니 서장자 이토 분키치 서차남 이토 신이치 외외증외현손자 마쓰모토 다케아키 | ||
학력 | 쇼카손주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5][6] (중퇴)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7] | ||
신체 | 154cm[8] | ||
작위 | 공작[9] | ||
정당 | |||
약력 | 참의[10] 제4·6대 내무경 초대·제5·7·10대 내각총리대신 제6대 외무대신 초대 입헌정우회 총재 귀족원 의원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제3·8대 추밀원 의장 황실제도조사국 총재 초대 한국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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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초대, 제5, 7, 10대 내각총리대신.야마구치현 쿠마게군[11]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 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국 한자음은 이등박문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암살)[12] 이후 이토를 기리기 위해서 서울 남산에 지어진 사찰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博文寺)이다.[13] 참고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나 출판사 박문각은 이 사람과 무관하며 한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박사나 박학다식에 나오는 것처럼 "학문에 힘쓴다."는 뜻이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으로서, 대일본제국 헌법의 초안 작성, 일본의 의원내각제 시행, 양원제를 포함한 의회 제도의 확립, 일본 민법의 제정에 기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 내각총리대신직과 대신직들을 비롯한 행정부, 그리고 입법부(일본 국회)는 이토가 그 시작을 주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4] 총리로서는 도합 7년 6개월(2,720일)을 지냈는데, 1885년 당시 만 44세의 일본 역사상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일본에서는 정치, 법, 황실 등의 방면에서 업적을 많이 남긴 개국 공신 중 한 명이자 초대 총리를 역임한 정치 거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대한민국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장본인이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어 남녀노소 막론하고 아는 사람이 많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와 큰 연관이 있는 사건이 발발하던 당시 총리였던 가쓰라 다로나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팽창주의를 부르짖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기무라 헤이타로, 고이소 구니아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15]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통감 정치를 했다는 점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물어보면 "초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라는 답보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 당한 사람"이라는 답이 더 많이 돌아온다.[16][17] 때문에 한국인에게 구한말 침략의 원흉이라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다.
이러한 대중적인 악명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이토 성씨를 지닌 일본인들을 "이토 히로부미와 혈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는데,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며 자제해야 할 태도이다. 이는 국내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완용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구로 따지면 5위~6위에 해당하는 성씨이며, 같은 한자를 쓴다고 해서 한국처럼 한 집안에서 대대적으로 갈라져 나온 자손들이 아니라 완전히 남남인 경우도 비일비재한 일본의 성씨의 특성을 미루어 보면 정말 널리고 널린 흔한 성씨다. 사실 일본인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한국에 비해 성씨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성본변경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지만[18] 일본의 경우는 결혼만 해도 무조건 성이 바뀐다. 심지어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처가 쪽으로 바꾸기도 한다.[19] 또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경우나 도무지 발음하기 힘든 괴상한 성씨를 가지고 있어 일부러 읽기 편한 성씨로 바꾸는 경우 또한 의외로 흔하다.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가 없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이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에 아주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주장했던 양심적 정치인인 이토 잇쵸 전 나가사키시 시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같이 거물급 성씨나 되어야 그나마 애착을 갖는 편이고, 그렇지 않은 성씨들은 자기 성이 어떻거나 말거나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국회의사당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다.[20]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한일합병 반대론자?
일각의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근대화에는 동의했으나 합병에는 반대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합병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합병에 기술적이라고 표현되었다.이토 히로부미의 구상은 조선을 (훗날의 만주국처럼) 일본의 보호 하에 두며 조선인 스스로 자국의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도록 하여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자국의 근대화에 노력을 쏟고 있던 일본이 조선 합병에 따른 병참기지를 비롯한 병원, 철도 등의 기초 시설의 건설 부담을 지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며[21], 또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병합을 추진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발도 생길 수 있고, 합병 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구 열강들로부터 간섭과 마찰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측면도 있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염려는 일본이 1930년대에 만주사변, 열하사변 등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현실화되었다.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의 이권을 독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영국,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 열강들과 국제연맹은 반발했고 이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로 응수하면서 군국주의로의 경도가 심화된다.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일합병을 반대한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함으로써 한일 강제 병합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22] 실제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가 살아있을 때에는 조선 정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였으나, 이토가 사살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조선 정책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조선을 병합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하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당시 한국통감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를 사임시키고 자신의 뜻과 일치하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감으로 올렸으며[23], 결국 이토가 사망한지 1년도 안 돼서 대한제국은 합병되었다.[24]
다음은 월간조선 1984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으로 조갑제 기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 이토 도시오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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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반박
일청전쟁의 결과, 우리나라는 마침내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조선을 구하여 완전히 독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우리나라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러시아에 의지하고, (중략) 이에 이토는 또 조선, 만주, 러시아 영토 사이에 땅을 획정하여 완충지대를 만들어 이를 양국의 공동 보호하에 두기를 원한다고 러시아에 제안하려 하였으나, 어느 날 러시아 무관이 오이소 저택의 이토를 방문하여 조선은 단연 일본이 이를 취해야 하며(朝鮮は断然日本之を取るべし), 러시아는 마산포만 얻으면 충분하다는 희망을 털어놓자, 이토는 그 진의를 알고는 경악하여 전율하며, 이토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언젠가 조선을 합병하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입국의 대체(立国の大体)> 14장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니(日本は侵略国にあらず)' 중.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한일병합을 반대했던 것이지, 한일병합 자체를 반대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이토는 조선을 괴뢰국으로 삼고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동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에 급진적인 합병을 꺼린 것이다.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이토는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1909년 순종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기도 했다.[26] 그리고 이토는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군 해산 등 식민지화의 사전작업에 활발히 참가해 왔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었고(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 "조선 병합"을 가결하는 등, 가쓰라 다로 총리를 필두로 병합을 이미 추진 중이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입국의 대체(立国の大体)> 14장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니(日本は侵略国にあらず)' 중.
결정적으로 사망 시점의 이토는 한일합방을 반대할 능력이 없었다. 본래 그는 관료계 파벌의 수장이었으나,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승리로 인해 완전히 권력을 잡은 가쓰라 다로 총리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군부계 파벌에게 밀려난 상황이었던 것이기 때문. 조선통감이 된 것 역시 이런 상황을 뒤집어보려는 책략이었으나, 막상 한국통감부의 통치기간 동안 조선인들의 반발은 극심했고, 결국 이토는 말년이라도 편하게 일본에서 은퇴하려면 가쓰라와 군부파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909년 4월, 이토는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조선 병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뒤 1909년 6월 통감 자리에서 사임했으며, 애초에 4개월 뒤인 10월에 하얼빈으로 간 것 역시[27] 합병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과의 잡음이 없도록 조율하기 위해 간 것이었고, 이렇게 빈틈을 보인 덕에 하얼빈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다.
1909년 주한 프랑스 영사가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이토는 보호령을 경영하는 영국의 방식보단 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우리 프랑스의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적혀 있다.[28]
이렇듯 안중근 의사가 조선 편에 섰던 온건한 일본 정치인을 죽였기에 결과적으로는 조선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29].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급진적인 합병을 반대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순전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급진적인 합병은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결코 조선을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나중에 가서는 강경파들의 합병론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기에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할 수도 없다.
모로코, 베트남, 인도의 사례와 같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직접 합병" 뿐만 아니라 여러 식민지배 방식이 있었다. 보호국, 제후국, 자치령, 번왕국, 부왕령, 심지어는 회사령 등 수많은 구조의 정치체들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체계로 도입되었다. 가령 영국의 인도 번왕국 중 하나였던 마이소르 왕국 또한 식민지로 간주되며,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응우옌 왕조 또한 마찬가지다. 외교권 박탈과 보호국화 역시 식민지로 간주된다. 그런 관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이미 조선은 일본의 영향권에 속한 사실상의 식민지였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이토는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이 맞다.
4. 평가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일본 내에서의 역사적인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19세기 독일을 벤치마킹하여 일본 내지 및 조선, 대만에 제국대학을 설치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다방면으로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적으로 온건파 성향이 강했기에, 그가 사망한 상황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할 인물이 없어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토는 초대 일본 총리로서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큰 역할을 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 대해 모두 개전에 반대하는 등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일본 내에서 온건파였든 강경파였든, 결국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앞장서 주도한 인물이었던 건 변함없기에 한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나쁠 수 밖에 없다.
일본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에도 반론이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이루려고 했던 독일식 입헌군주제는 실상 헌법만 존재하지 천황의 권력을 제한하는 기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삿초 번벌 출신 원로들과 총리가 위임하여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으로 수립된 의회는 이런 행정부를 견제하지 못했다. 이런 모순적인 체제는 훗날 군부의 폭주와 의회정치의 붕괴를 가져왔다.
총평하자면 그는 메이지 유신의 한 축이었고 근대화와 입헌군주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나 다른 유신지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신적 근대화를 이륙하지 못했고 국내에선 민중의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지배층의 안위만을 위한 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 어록
"영국, 미국, 프랑스의 자유과격론자의 저술만을 금과옥조로 과신하고, 국가를 기울게 만드는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얻어 마음 편히 죽을 곳을 찾은 기분입니다."
1882년 8월 11일, 이와쿠라 우대신에게 보내는 편지
1882년 8월 11일, 이와쿠라 우대신에게 보내는 편지
"사람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성실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친절한 것이다."
"학문은 읽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인간은 살아있는 책이기 때문에 서양에 가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나는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 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고 축재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의 인구는 4천만을 넘지만, 참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약 40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직접 국세 5엔을 기준으로 하여 170만 명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길입니다."
1899년 3월 9일 국회 연설
1899년 3월 9일 국회 연설
"귀국은 독립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로 허명뿐인 독립에 불과하다. 제군은 최근 10년간 나라의 생존 유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일본 정부와 이토 히로부미 한국특파대사의 고압적 태도에 다소 불만을 드러내자 남긴 말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일본 정부와 이토 히로부미 한국특파대사의 고압적 태도에 다소 불만을 드러내자 남긴 말
"제군은 동맹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릇 동맹이라는 것은 그들과 우리의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에 비로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귀국(대한제국)과 동맹을 맺는 나라는 절름발이를 동반하고 걷는 것과 같아서 자유로운 보행을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외교는 유치한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도 불사하는 바이다. 따라서 제군이 다른 세력을 믿고 이 조약의 결정을 지연시키려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완전히 헛된 의뢰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국에 하등 이익될 바 없음이 명백하다."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한 말
1905년 11월 16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 한 말
6. 여담
*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는데,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되었다.
- 당대 조선에서는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암살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에서 더 나간 이야기로,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뒤 주장한 이토의 죄목 중에 "대일본 명치 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짓"이란 내용이 있으며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통해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라고 주장하였다.
- 개인적으로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조선인 첩도 있었다. 고려 청자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조선 통감에 부임을 한 후에 일본 천황과 귀족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있는 고려 청자들을 사들였다. 1906년에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 평정관이었던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회고록『그때의 기억-고려 고분 발굴시대』에 의하면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일본인을 시켜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 청자를 가져오라'했고, '몽땅 사자'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수집하여 반출한 고려 청자의 수는 최소 1,000점 이상으로 추정된다.EBS <역사채널e> - 고려 청자를 찾아라 이를 반영해서 tvN 드라마인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도공 황은산의 백자를 선물받고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 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암살 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 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황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에 돌려줄 마음이 없었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문화재청 보도자료 [30]
한복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다. 이토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다. 조선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는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황실에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본처인 우메코(梅子)에게 한복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가운데의 갓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찬성했던 행위에서 봤듯 이러한 팬서비스도 눈가림을 위한 위선적인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처음 런던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서 인종차별적인 조롱을 많이 받았는데, 이로 인해 독하게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 때려치워도 영어 선생은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이토는 실제로 UCL 화학부에서 수학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할 때 이홍장[31]과 통역없이 영어로 교류를 했고 이완용과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32] 심지어 메이지 덴노와 대화할때도 뜬금없이 영어를 섞어 말해 영어를 잘 모르는 메이지 덴노가 짜증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33]
- 놀랍게도 「동아찬영회」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총재는 장석주라는 친일파였는데, 이토가 죽은 뒤 이토의 동상을 세웠다.
- 2020년 10월 21일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전용기 의원이 확보한 사료를 통해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머릿돌)에 새겨진 '定礎'(정초) 두 글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로 밝혀졌다. #
-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워서 창경원이라는 유원지로 만드는 것을 주도했는데, 본래는 1909년 11월 1일에 열리는 창경원 개원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바로 며칠 전인 10월 26일에 저격당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일관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이라고 밝혔으나 일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시종일관, 자신이 대한 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제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여 재판을 거쳐 사형시키기 위하여 절대로 대한 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토의 사살 이후 안중근의 재판에서 사형에 이르는 절차에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일제는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하기로 결정한 뒤 이에 끼워 맞추는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서구 열강 사이에서도 국제법 위반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이 있고 삼권 분립이 확립되지 않은 국가도 상당수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그 문제점은 아주 심각하다.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중에 러시아군이 위에서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러시아와 일본이 둘 다 조선[35]을 탐냈다는 것.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려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며 러일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의 피해는 비등비등하였고 러시아에게서 배상을 얻어내려는데 "협상하기 싫느냐?"라는 압박과 조선의 독점권을 지켜야 하는 것 중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선택해 적은 보상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과 대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 안중근에게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 줄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역 건물 위의 러시아 저격수가 총을 쏴 죽였다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은 위에서 아래로 박혀있었다고 주장한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로 한 강경파인 일본 군부에서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에 따라 군부의 훼방으로 비참한 말로를 보낼 운명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이 사살한 덕분에 영웅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며 여러번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맡은 거물급 인사인데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 군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온건적이었던 인물이며 조급히 한일병합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와 반대로 일본 군부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온건파와는 다르게 즉시 한반도를 병합하는 것을 원하였고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보이며 일본 내각을 장악하여 추진력을 얻고자 했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천천히 하자며 가로막고 있으니 일본 군부가 직접 암살 사건을 꾸미거나 타살을 방치하도록 고의로 경비를 허술하게 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 하얼빈역에는 일본군보다 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당시 러일 관계를 생각하면 객관적으로도 경비가 허술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급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히려 일본군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안전을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암살 당시 아직 막부 측 인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던 시점이라서 역적에게 천벌이 내려졌다고 기뻐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37] 中에서.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로, 이토의 여색 밝힘은 유명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는데, 그 중의 1명이 이와쿠라 토모미의 딸이었다. 다행인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한다.[38]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39]라는 한시를 남긴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대중들에게는 총리보다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 School Days의 주인공인 이토 마코토의 모티브가 된 게 이 사람인데, 작품내에서도 상당한 색마로 나온다.
- 이름인 博文은 히로후미(ひろふみ)라고 읽기도 한다. 사람 이름에 들어가는 문(文)은 '후미(ふみ)'라고 읽는 경우가 더 흔하며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히로부미'와 '히로후미' 두 발음 모두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히로부미'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일본 교육 과정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라고 가르치는데 일본 사람들(특히 학생들)도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다. ## #(세 링크 모두 "伊藤博文"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읽나요? '이토 히로후미'라고 읽나요?"라는 내용의 질문이다)도 적지 않은 듯하다. 허나 아래의 손자와의 인터뷰를 보면 훈독 '히로부미'로 읽지 않고 '하쿠분(はくぶん)'이라고 음독으로 부르는 사례도 나온다.
7. 대중매체에서
7.1. 영상물
- 구한말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사람이 등장할 때는 배우 윤주상이 많이 연기하는 편인데, 실제로 많이 닮았다. 그는 2002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와 MBC 창사 41주년 특집극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 2004년작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 각각 연기했다.
- 1959년작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최남현이 연기했다.
- 1963년작 영화 《백년한》에서는 배우 변기종이 연기했다.
- 1971년에 개봉된 영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선 배우 장동휘가 연기했다.
- 1973년작 영화 《삼일천하》에선 배우 오사량이 연기했다.
- 1979년작 북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선 배우 황영일이 연기했다.
- 1981년작 연극 《한만선》에서는 배우 김동원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선 배우 이승호가 맡았다.
-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선 배우 김성원이 맡았으며, 1990년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과 1995년작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도 각각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박경득이 연기했다.
- 1996년작 연극 《제국의 광대들》에서는 성우 겸 배우 조명남이 연기했다.
- 2009년부터 상연된 뮤지컬 《영웅》에선 배우 이희정과 조승룡, 김도형, 이정열, 정의욱 등이 이 배역을 거쳤다. 2014년 시즌부터 고증 오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2014년 시즌부터 1막에 외무 대신과 대화할 때 조선인으로 생체 실험을 지시하고, 2막 넘버 출정식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이야기하는데, 이토가 살아있던 시절(1841~1909)에 언급하기엔 너무 일렀다.
- 2022년작 영화 《영웅》에서는 뮤지컬 배우 김승락이 연기했다. 위의 김인우와 마찬가지로 재일교포이자, 일본에서 극단 배우를 했던 경험이 있던 사람인지라, 일본어나 일본인 특유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 교양 프로그램 중 2022년 11월 1일 tvN 《벌거벗은 세계사》제 71회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를 다뤘다.
- 일본 근대사를 다룬 사극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인물이기도 한데, 특히 NHK 대하드라마의 경우 1967년작 《세 자매》부터 2015년작 《꽃 타오르다》까지 총 9작품이나 등장했다. 담당 배우로는 후쿠다 요시유키, 나카무라 아츠오, 이타미 주조, 게키단 히토리 등이 있으며, 이들 중 《꽃 타오르다》에서 이토 역으로 나온 게키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친한(親韓) 성향 인물이다.[40] 살짝 어리버리하고 심약한 인물로 나온다.
- 2006년 이가라시 쇼 감독 영화 《조슈 파이브》에선 배우 미우라 아키후미가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했다.
7.2. 만화
- 와츠키 노부히로의 소년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판》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오자와 유키요시(小澤征悦).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닥친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허위 사실을 흘리게 해 능구렁이처럼 피해가거나 권력을 위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냉혹한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한국에선 굳이 원작에 안 나오는 인물을 넣어서 논란을 일으킬 이유가 있냔 반응도 있었지만, 보여지는 모습은 작중 등장하는 이름 있는 유신지사 중에 가장 안 좋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동행한 수행원이 우오누마 우스이에게 살해당하자 시시오 앞에서는 화도 못내고 도착하기 전에 죽은 거라고 발표하라며 사건을 은폐하고, 그 모습을 본 시시오가 그게 너희들 방식이라며 비웃는다. 그 이후 켄신을 체포하도록 전국에 포고를 돌리고, 켄신이 제 발로 잡혀 들어오자 온갖 소리를 다 붙여 켄신에게 시시오를 처단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놓고는 후에 켄신이 연옥 호에 올라타고 시간이 오래 걸리자 아예 육상에서 포격을 가해 시시오와 켄신을 같이 매장시켜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간신히 나룻배를 타고 일행과 불바다에서 탈출해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켄신에게 사무라이라고 부르며 경례를 붙이는 모습이 압권.[41][42]
- 《아이돌 사변》에서는 6화에서 일본을 만든 정치인으로 등장해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 주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7.3. 대체역사물
- 복거일 작가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처단에 실패해서 살아남는다. 이를 원안으로 한 영화《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미래에서 건너온 일본 극우파인 이노우에의 도움으로 살아남지만 후반에 역사가 다시 바뀌면서 안중근에게 처단된다. 해당 영화에서 이토 역은 배우 우상전이 맡았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무진전쟁에서 막부가 이기는 바람에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어부로 은신 중이다. 여전히 체제변혁을 생각 중이며, 하코다테에서 조선 남부 지역으로 은신처를 바꾼다. 그러나 다시 큐슈로 탈출했다가 도쿠가와 막부의 사주를 받은 조선 제국익문사에게 체포된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 체포 작전의 현장 책임요원은 안중근, 이후 황제는 굳이 마지막 남은 도막파의 간부인 그를 처형해 순교자를 만들어 주기보다 평생 철창에 넣어두는 게 낫다며 그를 독도로 유배 보낸다. 철창에 들어가면서 안중근과 하는 만담이 일품, 당시 기득권을 끌어내리고 황제를 올바르게 보좌하자는 근왕적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이미 절대권력을 확립한 황제가 쓸데없이 이들을 간접 지원해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안중근이 황제의 말, 즉 지금 괜찮다고 해서 개혁과 발전을 멈추면 쇠퇴해 과거에 묻힐 뿐이라는 말을 전해주자 한탄하며 "천년 만년 니들이 다 해먹어라." 라고 내뱉고는 순순히 감옥에 갇히는 것이 끝, 아마 독도에서 늙어죽었을 듯하다.
- 대체역사물 웹툰인《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한일합방에 대해 기술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을 반영하여, 조선을 합방하려는 야심을 품지만 전면전을 자제하고자 하고, 즉각 합방하자는 강경파들을 제어하며, 본인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강경파들이 자의적으로 저지른 귀국선 폭파 사건을 계기로 강경파들을 숙청할 생각을 품는 인물로 묘사되다가, 안중근에게 피격되지 않고 강경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감금신세가 된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일찍부터 신정부의 2인자로 부상하였으나 국내 친조 여론을 제거하기 위해 세웠던 '일본책략'에서 정한론을 내비쳤다가 이등박문 네 글자 기억하고선 다른 나라 해치려 드니 고놈 나쁜 놈이라며 꿍꿍이가 뭐든 제 뜻대로 두지 않으려는 김귀남 옹에게 잘못 걸려서 조일동맹이라는 생각도 못한, 아니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져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나야 했다. 이후 미국에서 경전과 칼이라는 칼럼을 투고하여 동아시아 전문가로 입지를 다졌고 일본에서 이 이상 조선에게 뒤쳐지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조성되자 막후에서 조일동맹 파기, 영일동맹 체결을 이끌어내 금의환향했다. 그런데 영일동맹 체결를 도와준 세력이 바로 조선이라서 동맹을 파기했지만 전쟁이 나면 이기든 지든 자기는 모가지가 날아가는지라 여전히 조일양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신정부 초기에는 조선 병합을 꿈꾸는 모습을 보였으나 지금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조선의 '선의'에 물들어 전쟁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경제동물로 진화했다. 나중에 나가사키 아주대회 사격 종목에서 안중근이 옥패, 즉 1등을 하자 시상식에서 옥패를 매어주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복통을 일으켜 잠시 식이 중단되는 헤프닝도 있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역사의 변화로 서양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자 조선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온건파가 된다.[43]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때도 살아있어서, 안중근이 사격 선수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딴 것이 '아시아의 승리'로 포장되어서 일본도 떠들썩한 것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조선이 일본을 어느새 앞질렀다는 사실에 묘한 감상을 느끼는 개그를 연출한다. 이후에도 원훈이라고 계속 정치에 간섭하는데 일본 정치인들은 노인네가 아직도 살아있었나며 신경 끄라는 반응을 보인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때까지 살아있다가 하라 다카시의 권유로 오랜만에 정치활동을 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지지하고 후임으로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지지했다가 일본내 좌우 급진파의 공공의 적[44]이 되고 결국 아사히 헤이고[45]에게 암살당한다. 사망 이후 원훈이라고 국장으로 치러지나 하필 죽은 장소가 게이샤와 함께 하는 요릿집이었고 유서 공개로 살인범이 살인 할만했다는 여론이 생겨서 국장에 논란이 생긴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조선 병합 실패 때문에 생긴 쌀 폭동, 미국과 경제 전쟁, 군부 쿠데타, 황도파 내전 등으로 고통받는 모습이 처절하게 묘사된다. 처음에는 친일 국가로 생각되던 조선이 점점 성장하면서 일본과 비슷할 만큼 강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그 속에서도 일본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갈수록 나빠지는 일본의 상황에 고통받아 나중에는 자포자기하며 황도파 반란군에 사살된다.
-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서는 어릴 적 아버지가 청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아편 때문에 중독자가 되어 가산을 탕진해서 제대로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타이밍에 조선의 곡물지원으로 간신히 굶어죽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후 아편을 퍼트린 청나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조선의 사관학교에 유학생으로 입학한다.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조선에 극도로 호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특히 박현상을 존경해서 박현상 아들이 자신의 사수가 되자 거의 시종을 자처할 정도. 다만 호색적인 성향은 그대로라서 말년에 본부인한테 이혼당했고, 애인의 공격을 받아 고자 신세가 된다. 불필요한 부위의 적출로 수명이 늘어나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날 때까지 생존했다.
7.4. 기타
- 《유신의 폭풍 막말지사전》에서 좌막파로 플레이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수 있다.
8. 사건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참고.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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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체] [신자체] 藤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3]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로 사망했다.[4] 읽는 법만 음독에서 훈독으로 달라졌다.[5] UCL 최초의 유학생이다.[6] 조슈 정벌 소식을 접하면서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함께 유학 중이던 이노우에 가오루과 긴급 귀국하였다.[7] Evolution of the Japanese, Social and Psychic. BiblioBazaar. p. 198.[8] 156cm는 추측한 키이고 일본에서는 그의 키가 154cm라고 알려져있다.[9] 암살 후 양자인 이토 히로쿠니가 습작하고 귀족원 공작 의원에 취임하였다.[10] 1868년에 태정관 제도의 부활과 함께 설립 되었으며,1885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에 의해 태정관 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없어진 직책. 오늘날 국무대신에 해당되는 경(卿)보다 상위에 있는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을 대신하여 각료들을 지도하는 과두제식 정부수반이었다.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은 실질적 권한이 없었고 공경 출신이 독점 했지만, 참의는 삿초도비(사쓰마, 초슈, 도사, 히젠) 출신이 대부분 임명되었다. 여담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으로 인해 잘 알려진 메이지 6년 정변도 바로 참의들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다툼이었다.[11] 현(現) 히카리시[12] 공식적으로는 암살이라고 많이 쓰나 문헌에 따라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암살보다 '사살', '척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13] 박문사가 헐리고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빈관이 들어섰다가 현재는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다.[14] 단 국회를 만든 남자(国会を創った男)라는 타이틀로 알려진 것은 이타가키 다이스케.[15] 그래도 이 중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을 지냈던지라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교과서로 많이 언급된 사람이다. 도조 히데키는 안경 쓴 대머리에 아돌프 히틀러 콧수염이라는 전형적인 일본군 외모로 유명한데다 일본군 생김새를 묘사할 때, 자신의 외모로 고착시켜 버린 장본인이어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 8권인 일본의 역사에도 나오므로 읽었다면 잘 기억할 수도 있다. 이시이 시로와 기무라 헤이타로는 나무위키 등의 수단을 통해 각종 전쟁범죄에 대해 열독해보지 않았거나 나무위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모를 수 있다.[16] 무단 통치를 펼친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유사한 이유로 일본 제국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보다 초대 조선 총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17] 이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례로는 조명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높은 거물인 일본 황족을 척살하려 했다. 그것도 다른 황족이 아니라 일본의 국구(= 천황의 장인)를 말이다. 끝판왕은 바로 쇼와 덴노를 노린 이봉창 의사이지만 그는 알려졌다시피 실패했다.[18] 양육자의 재혼, 부모 중 다른 한 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다.[19] 대표적인 사례가 김전일이다.[20] 다른 귀퉁이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동상이 있으며 나머지 한 자리는 의원 스스로가 그 자리에 올라가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21] 실제로 직할 통치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의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22]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 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또한 이토가 한일합병에 반대했는지, 온건했는지를 떠나서 조선 침략의 원흉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의 의로움을 담은 내용도 있다.[23] 나중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직을 그대로 유임 승계한다.[24] 그리고 강경파가 득세하였으므로 일제시대 초기에는 정책이 강압적이어서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3.1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25] 인터뷰에서 손자는 이토를 "히로부미"라는 훈독이 아닌 하쿠분이라는 음독으로 읽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이름 자를 마치 한자 음독으로 읽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근대 일본어에서는 상당히 흔한 방식이었다. 이를 '유쇼쿠요미'라고 부른다.[26] 조선일보에서도 이토의 이러한 음모를 기사로 싣기도 하였다.관련 기사[27] 이 때 하얼빈은 러시아 땅이었다.[28] 민유기 著 <프랑스의 1910년 한일병합과 그 결과에 대한 인식>[29] 주로 일본의 혐한 넷우익이나 그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 극우들이 이런 식의 입장을 드러낸다.[30] 반환도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반출한 책 외에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책들도 포함되었다.[31] 이홍장도 놀라운 게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영어에 매우 능통했다고 한다.[32] 이완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는 거의 못했다.[33] 참고로 메이지 덴노는 독일어를 배웠다.[34] 야마구치 출신의 시타오 미우가 여기에 간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프로듀스 48 출전 도중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여파로 시타오 미우는 최종 데뷔조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35] 러시아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선을 탐냈고 일본에서는 섬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로써의 조선을 탐냈다.[36] 곳케이 신문(滑稽新聞), 1903. 09. 05.[37] 저자: 한상일, 한정선 / 출판사: 일조각 / 출판년도: 2006년.[38] 반대로 야마가타는 여자 문제는 없었으나 돈 문제가 깨끗하지 못 했다.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놈은 이노우에 가오루로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 스캔들 메이커였다.[39] 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40] 이런 케이스는 또 있는것이 게키단 히토리보다도 더 친한 연예인으로 유명한 초난강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의 정서하고도 너무 다른 히데요시라 이질감이 심하다.[41] 당연하지만 켄신 일행은 굉장히 어이없어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엇보다 경례받는 일행 중에 진짜 사무라이 출신은 한명도 없다.[42] 이 단체 경례 장면은 군국주의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띄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폭주할 일본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작 교토편의 마지막에 메이지 정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시시오의 말처럼 군국주의 행보를 걸었다는 내레이션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43] 원래 역사에서도 서양 눈치를 많이본 것을 고증한 듯.[44] 우익 정치인이라서 좌익에게는 원래부터 평가가 나빴고 러일전쟁을 막으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우익에게 러시아 스파이로 찍혔고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지지로 영미권에 일본을 팔아먹으려는 친미파로 낙인 찍힌다. 특히 이토 본인의 막후 정치 때문에 실제로는 별 실권없는 원로임에도 급진파들은 일본정부를 이토가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45] 실존인물로 원 역사에선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에게 앙심을 품고 암살한 뒤 체포당하기 전 자살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