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배우에 대한 내용은 나철(배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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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신윤복 | 2월 안향 | 3월 이상화 | 4월 석주명 | 5월 이익 | 6월 송흥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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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 ||||||
1월 이중섭 | 2월 혜초 | 3월 유형원 | 4월 최한기 | 5월 김창숙 | 6월 권율 | |
7월 맹사성 | 8월 황현 | 9월 김시습 | 10월 최세진 | 11월 정부인 안동 장씨 | 12월 이승훈 | |
2000년 | ||||||
1월 남궁억 | 2월 나혜석 | 3월 김육 | 4월 서경덕 | 5월 진감국사(혜소) | 6월 하규일 | |
7월 정인보 | 8월 김좌진 | 9월 김수영 | 10월 류희 | 11월 김창하 | 12월 장승업 | |
2001년 | ||||||
1월 김부식 | 2월 최용신 | 3월 강항 | 4월 함석헌 | 5월 지눌 | 6월 이병기 | |
7월 이현보 | 8월 오세창 | 9월 허균 · 허난설헌 | 10월 설총 | 11월 의천 | 12월 송만갑 | |
2002년 | ||||||
1월 정약종 | 2월 김환기 | 3월 이상재 | 4월 박두성 | 5월 박수근 | 6월 조지훈 | |
7월 성삼문 | 8월 박효관 | 9월 김병연 | 10월 신숙주 | 11월 김승호 | 12월 손진태 | |
2003년 | ||||||
1월 안확 | 2월 양주동 | 3월 이동백 | 4월 양팽손 | 5월 정지용 | 6월 정몽주 | |
7월 김장생 | 8월 박세당 | 9월 유정 | 10월 월명 | 11월 이인성 | 12월 유길준 | |
2004년 | ||||||
1월 조희룡 | 2월 신흠 | 3월 이항로 | 4월 이경석 | 5월 의상 | 6월 백광홍 | |
7월 이첨 | 8월 김창조 | 9월 조헌 | 10월 최항 | 11월 장욱진 | 12월 박두진 | |
2005년 | ||||||
1월 정정열 | 2월 이예 | 3월 강경애 | 4월 신동엽 | 5월 임윤지당 | 6월 김종직 | |
7월 강정일당 | 8월 이규보 | 9월 나철 | 10월 이승휴 | 11월 효명세자 | 12월 최북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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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나두영(羅斗永) |
본명 | 나인영(羅寅永) |
자 | 문향(文鄕) |
호 | 경전(耕田) → 홍암(弘巖) |
본관 | 나주 나씨 |
출생 | 1863년 12월 2일 |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 |
사망 | 1916년 9월 12일[1] (향년 52세) |
황해도 안악군 구월산 삼성사 | |
묘소 |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룽청진 칭후촌 삼종사 묘역 |
종교 | 대종교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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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종교의 초대 도사교(都司敎)[2].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3년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용집(羅龍集)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철이 썼던 한시가 김윤식의 눈에 들어 그의 문하생으로 있었다고 한다. 189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한 후 승문원, 승정원 등 관청에서 문신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벌였다.을사조약 체결 후인 1907년부터 자신회를 결성한 그는 오기호 등과 함께 오적 암살단을 조직,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창보 등이 붙잡히면서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에 고종의 특사를 받아 풀려난 그는 1908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구국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아무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훗날 대종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 일본이 종교 간섭을 시작하자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 일부가 만주로 이동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했다. 1914년에 나철은 아예 대종교 총본사도 만주로 옮겼으며 수많은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급속한 교세 확대에 일본은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서자 나철은 이를 막기 위해 애를 썼으나 되지 않았고 마지막 수단으로 6명을 데리고 1916년 음력 8월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달 15일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김교헌을 2대 도사교로 지명한 뒤 삼성사에서 자결했다.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한다.
대종교 교단에 따르면 자결 방법은 폐기법(閉氣法)이었다고 한다. 폐기법이라는 것은 스스로 숨을 멈춘다는 뜻이다. 나철의 묘는 중국 지린성 허룽시(和龙市)에 있다. 나철과 함께 김교헌, 서일의 묘도 함께 있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정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
- 장남 나정련, 차남 나정문도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두 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영화 사바하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동방교 교주 풍사 김제석의 신문 사진에 나철 영정을 사용해 논란을 일으켰다.[3] 제작사 측은 곧바로 명백한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다.[4] 그러나 박웅재가 사이비 종교를 취재하면서 "교리 쪽은 좀 어때? 동학 쪽이야? 단군?"이라며 묻는 대사가 나오고, 대종교 경전 중 하나인 천부경의 81수에 맞춰 암호를 푸는 장면이 나오는 등 정말 의도된게 아니라 단순 "실수"인가에 대해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나철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보성군 측에서도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고[5], 4월 4일 홍암나철기념사업회 회장과 회원 30여 명이 영화사에 항의 방문하였다. 제작사 측에서 잘못된 사진 교체를 완료하고서[6] 4월 9일 보성 홍암나철기념관 사당에 참배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7]
나철은 1916년 일제에 항거하여 순교를 결심하고 황해도 구월산 행을 하였는데, 해당 사진은 1916년 음력 8월 5일 황해도 사리원 역 앞 대기사진관에서 촬영해 전해지는 2장 중 하나다. 동정 달린 흰색 도포는 백두산과 한민족을 상징하고, 왼손의 단주(檀珠, 박달나무 염주)는 신단수와 민족경전을, 오른손의 단장(檀杖)은 대종교 지도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사진에는 주시경의 제자이자 나철의 수제자인 김두봉 외 엄주천(본명 엄주동,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등 나철을 뒤따라 간 6명의 시봉자가 함께 촬영했다.
- 나철에 관한 특집은 여수MBC, 「잊혀진 민족의 지도자 홍암 나철」 (2000.4.7),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4회 특집)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 (2004.2.29), 광주MBC, 「(창사 52주년 특집) 홍암 나철, 백년의 유산」 (2016.10.27) 총 3회 방영되었다.
[1] 음력 8월 15일[2] 대종교 최고지도자[3]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328_0000602995[4] http://sports.donga.com/SPORTS/3/all/20190328/94791391/1[5] https://www.yna.co.kr/view/AKR20190402102900054?section=search[6] http://sports.donga.com/SPORTS/3/all/20190405/94912734/2[7]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