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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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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석용.jpg
초명 이갑술(李甲戌)
자 / 호 경항(敬恒) / 정재(靜齋)
출생 1878년 11월 29일
전라도 임실현
(현재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상봉리)
사망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
서훈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의병활동2.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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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석용은 1878년 11월 29일 전라도 임실현(현재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상봉리)에서 이봉선(李鳳善)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승문박사(承文博士) 이태환(李泰煥)이었으며, 그의 가문은 6대조 이목(李穆)이 무오사화 이후 임실현으로 낙향한 이래 벼슬을 한 자가 없어 사실상 농사로 생활하는 이름뿐인 양반이었다. 그는 갑술년에 태어났다고 하여 어렸을 때 이름이 이갑술(李甲戌)이었다.

송상도기려수필의 따르면, 이석용의 부친 이봉선은 골패에 손을 대고 소일했지만 이석용이 "부모가 잡기에 어울리면 자식을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진언드리자 이봉선은 다시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7~8세 때 연장자들을 따라다니며 학문을 논하기를 좋아했으며, 고금의 충신, 열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며 홀로 누워 밖에 나오기를 꺼렸다고 한다.

이석용은 1895년 17세의 나이로 부근의 서당 훈장의 여식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이후 동료 10여 인과 함께 장인에게 글을 익혔는데 그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해 8월 을미사변이 벌어지고 11월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석용은 극도로 분노했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이석용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책을 덮으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한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시니 이것이 무슨 말이뇨. 임란 때 입은 수모도 아직 갚지 못했거늘, 일찍이 듣지 못한 금년 8월의 변을 당하였으니 백성들의 절박한 분통을 펼 때가 없도다. 이것은 또한 머리털을 깎고 살갗을 벗기고자 하는 것이라, 살고자 하는 생각을 버림과 같지 못함이 심하다. 또한 군부의 원수는 맹세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것이니, 만세토록 백성되고 자식된 자는 복수해야 하는 것인데, 빨리 죽은 뒤에 그치는 것이 가하리오."

그 후 이석용은 1898년 음력 8월에 진안으로 이거했으며, 그곳에서 널리 스승을 구해 학문 연마에 진력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죽음을 자청하고 청나라 군대에게 끌려간 끝에 참수된 삼학사의 충렬을 숭상했고, 남한산성에 들러 원혼을 기렸으며, 진주 촉석루에 들러 논개의 기상을 기렸다. 또한 운봉 황산대첩비 등 일본에 맞서 투쟁했던 유적지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민족의식을 굳혔다.

이즈음 이석용이 만난 유학자로는 송근수(宋近洙), 송병선, 송병순, 심석재(心石齋), 기우만, 전우, 곽종석, 그리고 최익현 등이 있다. 그는 이들과 함께 강학을 했으며 구국의 방편을 논의하기도 했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한번은 최익현이 이석용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의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자 이석용은 "개화를 쳐부수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유학자로서 효와 충에 대한 우선 순위가 어떻게 정해져야 하느냐는 것에 의문을 품고 송변선에게 물었다. 이때 송병선은 유인석이 친상을 당했을 때 의병장의 직을 내놓고 낙향한 것을 비판했고, 이석용은 이를 듣고 국가가 위급할 때는 효보다 충이 앞서야 하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2. 의병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이에 동향 출신의 유학자 전해산이 이석용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했고 이석용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기삼연이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수련산(秀蓮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이름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대장에 올랐다. 이에 이석용은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석용은 기삼연의 의진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기로 결정한 뒤 1907년 8월 26일 고향으로 가서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뒤 황사현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 계획을 논의했다. 그는 의진을 '의병창의동맹단'이라 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중군, 후군, 참모, 총지휘, 연락, 도로부장, 보급, 운량 등의 부서를 정했다. 그 후 자신은 의병대장으루 초대되어 9월 4일 진안 석전리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왜구의 10가지 죄를 논함'이라는 제목의 선포문을 발표해 을미사변,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의 강제 해산 등 일제의 만행을 열거해 민중의 항일 의지를 드높였다.

이러한 이석용의 거사에 호흥애 천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이석용은 9월 12일 27명의 부장을 선임한 뒤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진회 회원부터 처단했다. 일진회 회원 중 단장급에 속한 자로서 착취가 심하거나 평판이 좋지 않는 자는 살해하고 그들의 집을 방화했다. 또한 배반자로서 밀정 노릇을 하였거나 의병이었다가 일진회 회원이 있는 자 역시 처단하고 집을 불태웠고, 죄상이 심하지 않는 자는 훈계하여 타일렀다. 정보 누설자 역시 처형했으며, 세금 영수원인 자로서 세금을 독촉하거나 과다하게 징수한 자의 집을 방화하고 매를 때리거나 훈계했다. 한편 '개화인'으로서 머리를 깎은 자는 매를 때리고 갓을 쓰도록 했으며, 일본말을 배우는 자를 훈계하기도 했다.

이후 이석용은 진안읍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일본군 지휘관의 팔목에 탄환을 맞혀 팔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의복, 양총, 일본 옥편과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내려준 돈, 비단, 지물 등을 전리품으로 얻었으며, 일본군과 일본인 관리들의 행정용품을 거의 20여 짐 노획했다. 이후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 심원사로 철수한 그는 15일 진안 의병장 김동신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양 진영 사이의 불화로 문제가 발생했다.

기려수필에 따르면, 의진이 연합한 후 적과의 교전이 벌어졌을 때 김동신은 싸울 뜻이 없고 노획물에만 욕심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9월 16일 내원사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과 교전해 모조리 살해할 때 김동신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동신이 노획물을 용담, 고산의 무뢰배들에게 나눠주고 무뢰배들이 이에 호응해 김동신이 연합의진의 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우기자, 이석용은 "호남에는 의(義)의 기세가 없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둘이 서로 좋지 않은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1907년 9월 29일, 이석용은 검은 옷을 입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10월 8일에는 화암리 후방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했지만 일본군과의 병력 차이로 많은 의병을 잃었다. 이석용은 10월 9일 <창의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의병을 일으킨지 3개월여이나 몸에 가진 물건이 없으며 군용을 제외하고는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지금 입은 솜바지 아나, 명주두루마기 하나는 친구가 준 것이며, 겹바지 하나는 내자가 손수 짠 것이며, 세탁할 겨를 조차 없었다. 평생에 호화로운 마음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돈독했다."

10월 11일, 이석용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닭이 울자, 잡방산의 주인에게로 가서 안선봉을 세차게 일으켜 본시 빌어먹는 사람 모양을 만들어 거적을 지고 길을 나서게 하면서 서로 떨어져 가자고 말했다."

이는 그가 걸인 행색을 하면서 일본군의 감시를 모면하는 방법을 사용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렇듯 그는 일본군의 눈을 숨기기 위해 위장술로 신분을 감추며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진안, 용담, 정천, 임실, 순창 등을 거쳐 태원, 남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11월 14일에는 성수산에서 의진을 제편했고, 17일 장수읍을 공격해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했다. 하지만 12월에 이르러 날씨가 추워지자 의병의 생활이 더욱 곤궁해졌고, 이석용은 병든 군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12월 22일에는 두봉리에서 전투를 벌였고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했다.

1908년 1월, 이석용은 병사들의 군복을 일제히 청색으로 염색시켜 부대의 형태와 기강을 위해 힘썼다. 또한 그는 병사들이 주민들의 재산을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주민들은 그런 그에게 호응해 음식과 군자금을 기꺼이 기부했고 일본군이 자신에게 현상금을 걸었으니 피하라는 정보를 전해주고 그를 밀고한 자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주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순조롭게 이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군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졌고, 의병들의 생활은 갈수록 곤궁해졌다. 의병대장이었던 이석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908년 4월 5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때 나는 얼굴이 검고 외관이 남루하여 버선도 없이 다니고 먹지도 못하고 누워 자니 대장의 위엄이 없어지는 것 같다."

1908년 10월, 이석용은 더이상 부대 행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부대를 해산시켜 병사들을 쉬게 한 뒤 후일 재기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신문선 등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임실과 진안 등지에서 소수의 부대원을 이끌고 투쟁을 계속 전개했다. 그는 전라도 내륙 지방에서 1909년 봄까지 저항을 계속했고 문태수 의병장의 부대와도 연락을 취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연계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1909년 3월 6일 남은 의병들까지 해산시킨 그는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지하로 숨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일제가 헌병경찰제도를 더욱 강화하자, 이석용은 의병 활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1911년 3월 은밀히 자객을 도쿄로 파견해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자, 그는 1912년에 비밀단체를 조직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여러 인사들을 모아 을사오적정미칠적을 암살하고 도쿄를 방화하려 했다. 하지만 이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이석용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천하의 호걸들과 힘을 합쳐 조선의 광복을 꾀하려 했다.

2.3. 최후

그러나 1913년 겨울, 그는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망명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친구를 찾았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끝내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살인, 방화, 강도 등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일본인 검사가 폭도의 일을 한 목적을 묻자, 그는 "일본 무리를 물리치려 함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창의록과 불망록을 쓴 것에 대해서는 창의록을 통해 충의의 마음으로 거의함을 일본정부에 알리며, 불망록을 통해 봉기 5, 6년간 자신을 보조해 준 친구에게 보답하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이때 일본인 판사가 물었다.
"천황의 신민이 될 의사가 없느냐?"

이석용이 답했다.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너희 나라의 신하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자신이 살인과 방화 및 강도를 저질렀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한국을 배신하고 일본에 아부하는 자는 죽일 수밖에 없고, 불사를 수밖에 없으며, 공금은 대한의 국세인 바 임금이 잃은 것은 신하가 되찾고 어버이가 잃은 것은 아들이 되찾는 것이 이치이므로 당연한 것이지 어찌 불법인가! 시세가 불리하여 의병 전쟁이 성과가 없음을 알고 있는 고로 잠시 병사들을 쉬게 하여 후일 재기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나는 의병 전쟁이 성사되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당당한 국사(國士)로서 후일의 복수를 도모하는 것은 생각지 않으며 스스로 죽을 뿐이다."

또한 이석용은 재판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판사가 일어나라고 요구하자, 그는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일어날 것이며, 일본인을 원수로 생각한다며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간수가 억지로 일으키자, 이석용은 크게 꾸짖으며 마음 속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 후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아들과 면회할 때 형제간에 우애하고 효도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2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고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이석용의 아들 이원영은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사재를 털어 전주에 황극단을 세우고, 1957년에 고향 성수면에 소충사를 건립해 부친을 비롯한 28의사를 배향했다. 그러다 장소가 협소해 오봉리에 새 터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석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