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2:10:26

전우(학자)

파일:간재 전우.jpg
<colbgcolor=#f5f5f5,#2d2f34> 성명 전우(田愚)
초명 전경륜(田慶倫)·전경길(田慶佶)
자명(子明)
간재(艮齋), 추담(秋潭), 구산(臼山)
본관 담양 전씨[1]
출생 1841년(헌종 7) 8월 13일
조선 전라도 전주부 부서면 4계, 통칭 청석동
(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1가)#
사망 1922년 7월 4일 (향년 80세)
일본 제국령 조선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계화리 계화도

1. 개요2. 상세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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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다.

2. 상세

1841년(헌종 7) 8월 13일 전라도 전주부 패서문 밖 청석동(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1가)에서 아버지 전재성(田在聖)과 어머니 남원 양씨 양성하(梁星河)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20세에 퇴계집을 보고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21세에 임헌회(任憲晦)를 소개받아 제자가 되었다. 임헌회는 기호학파 낙론계의 거두였고 전우는 이러한 스승의 성향을 많이 물려받아 이이, 송시열을 숭상하게 된다. 42세에 영의정 홍순목이 천거하여 선공감 가감역과 감역에, 이후에는 전설사 별제와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후 상주, 문경, 진천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 54세에는 사헌부 장령을 제수 받았지만 이 또한 거절했다. 다음해에 개화파였던 박영효가 수구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에 방해가 된다며 전우를 죽이라고 간언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절하며 되려 전우를 순흥 부사, 중추원 찬의에 임명하였다. 전우는 이도 역시 거절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떨어지자 격하게 반대하며 문인들에게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1905년 전우의 나이 65세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참오적이라는 제목으로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68세에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부안 앞바다에 있는 왕등도로 들어갔으며 70세가 된 1910년에 결국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72세에 계화도로 거처를 옮겨 계속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제자는 3천명이 넘었다. 전우는 이 제자들 중, 후에 개화를 따르거나 단발을 하는 제자가 있으면 문인록에서 삭제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가 사망하자 전우는 이 날부터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2] 3.1 운동에는 다른 유림 강경파들과 같이 불참하였다. 이후 1922년 7월 4일 사망하여 전라북도 익산군 삼기면 기산리 소재 선영에 묻혔는데, 그의 영구를 따른 사람이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3. 평가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은 학자로서, 당대에 전우의 명성은 상당한 것이었다. 위에서 보듯이 고종 역시 그를 꽤나 존중하며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다른 위정척사파 학자들처럼 모두 거절했다.

그가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방법은 다른 위정척사파들과는 다소 달랐다. 유인석처럼 강경한 무장 투쟁을 하지도, 최익현처럼 서울로 올라가 개화파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정치 투쟁을 하지도 않았고 오직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으며 단발령이나 을사조약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간간히 상소를 올려 현실에 관심을 끊지는 않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었다. 이는 영남학파의 적통이었던 정재 류치명의 정재학파가 적극 의병운동과 상소운동에 나섰음을 감안하면 위정척사파 중에서도 유별나게 특이한 현실 대응이었다.[3]

이러한 태도는 3.1운동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주학파나 화서학파가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 역시 유림의 원로이자 거두로서 함께 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그는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하면 이는 곧 개화와 서구 제도의 수입을 논하는 자들에게 동조하게 되는 것이라 보아 참가하지 않았으며,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지도 그렇다고 친일을 하지도 않으며 그저 깊은 산속으로 침잠해 학문을 닦을 뿐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전우 나름대로는 어둠의 시대에 지조와 절맥을 지키고자 한 행동이었을 지도 모르나, 역설적으로 간재학파는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해방 이후 유림계에서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이쯤 되면 유림계의 주도권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서구의 제도를 수용한 김창숙과 그가 이끄는 개신유림들이 차지했는데, 전통적인 성향을 그대로 간직할 뿐 앞장서 사회운동을 한 전력은 없는 간재학파를 비롯한 강경 보수 유림들은 그저 향촌사회에서만 발언권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중앙 유림계에는 전혀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나마 미군정에서 지방 향교의 재산을 모조리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전주를 중심으로 한 간재학파 유림들이 대거 반발 운동에 나서 강경 보수 유림들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증명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결국 강경 유림 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이승만의 독재, 산업화라는 격동의 시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천천히 소멸했으며 김창숙 등의 개신유림들이 이끄는 유도회총본부 또한 김창숙이 나이를 먹어 사회활동에 나서기가 힘들어진 50년대 후반 이승만 정부의 어용 인사들이 장악해 정통 유림들을 대거 내쫒는 분규 사태를 일으켜 사실상 유림들의 마지막 정치적 자산을 완전히 끊어버렸음을 감안하면, 만약 간재가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개화파, 공화주의 세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 하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고 적극 독립운동에 나섰다면 일제시대에 일본이 내세운 어용 학자들이 황도유림이라는 이름으로 유림계를 장악하는 일도, 해방정국에 유림계가 정치적으로 뭉치지 못하고 격동하는 시대 상황 속에 휩쓸려 무력하게 사라질 확률도 줄었으리란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4. 여담

  • 계화도에는 지금도 전우가 쓴 '단심가'가 적힌 바위가 남아있다.

[1] 야은파 23세 경(慶) 항렬.[2] 항목 상단의 초상은 이 때의 모습을 남긴 것이다.[3] 정재학파 역시 고향에 잔존한 유림들은 간재학파처럼 학문을 닦는 것에만 집중하며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일부가 그런 것이지만 간재학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