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6 20:53:50

무오사화

파일:Joseon_little_white_minimal.png 조선의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戊午士禍 / 戊午史禍.[1]

1. 소개2.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계기3. 과연 사실일까?4. 배경5. 김일손의 사초6. 주요 과정7. 핵폭탄 《조의제문(弔義帝文)》, 《화술주시(和述酒詩)》
7.1. 김일손 저술의 문제점
8. 결과9. 사화(士禍)냐, 사화(史禍)냐?10. 창작물에서

1. 소개

연산군 4년 (1498년)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로 성종때 성장했던 김종직 일파들이 실록의 사초 문제로 숙청당한 사건이다.

2.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계기

급기야 사국(史局 - 실록청)을 열어 (이)극돈 이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祖)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9일, 후대 중종 때 무오사화의 전말을 밝힌다고 정리한 기사

무오사화는 보통 훈구파 이극돈유자광이 손잡고 청렴결백한 사림파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나무위키의 연산군 항목의 무오사화 관련 부분에도 그런 논조로 서술되어있는데, 상당히 난잡하여 완전히 갈아엎지 않는 한 수정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인식이 반영된 기록은 연산군일기에서 무오사화를 총정리한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기록에는 무오사화의 시작을 성종실록의 편찬을 총지휘했던 좌의정 훈구파 이극돈과 사림파인 사관 김일손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2]이 있는 걸 보고 김일손에게 수정을 요청했지만 거부 당했다. 이 일로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때마침 성종의 사초에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게 된다.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항우에게 살해되었던 초나라 회왕의 사례를 들어 세조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됐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시놉시스다.

이극돈은 위에서 언급한 일과 그 외에도 사림파와 자주 대립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사림파들의 스승격의 위치였던 김종직과 엮어서 사림파를 숙청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을 유자광한테 전해줬다.

그리고 유자광도 《조의제문》의 엄청난 파괴력을 느꼈고, 마침 김종직과 개인적으로도 함양의 학사루에 걸어둔 자신의 시를, 함양군수 김종직이 부임하자마자 떼어내어 불살라버린 일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던지라,[3] 어느 날 새벽에 몰래 연산군을 찾아가 이를 고해바친다. 이에 연산군은 유자광의 부추김에 넘어가 당장 김일손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여기서부터 무오사화가 시작된다.

즉, 쉽게 요약하자면 각자 다른 이유로 사림파에게 원한이 있었던 두 훈구파 대신이 마침 조의제문이라는 훌륭한 떡밥을 알게 돼 단순무지한 연산군에게 떡밥을 던져 힘들이지 않고 사림파를 제거했다, 는 것이 무오사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3. 과연 사실일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일단 위의 갈등 이야기도 1차 사료인 연산군일기에 실린 서술이지만, 이는 중종 때 사관이 무오사화 과정을 총정리한다고 모아서 쓴 것이다. 신빙성이 아주 없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일기에서 이극돈의 행동에 대한 기록들을 날짜별로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순되는 기록이 상당히 많다.

일단 이극돈과 사림파의 관계를 살펴보면, 관계가 안 좋긴 했다. 김일손이 이극돈을 까는 사초를 썼고 그것이 국문 과정에서 드러나 추궁받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이극돈도 이조판서 시절 사림파의 승진을 가장 적극적으로 막았고, 특히 사림의 영수(領袖) 격인 김일손을 이조 전랑[4]에 임명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극돈이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들의 임명을 반대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림, 특히 김일손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사람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당장 사림파는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훈구파에 의해 옹립된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세력이었지, 그 능력을 인정해 등용한 자들이 아니었다. 성종이 이들을 중앙 정계로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냥 초야에 묻혀서 학문이나 닦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실무 능력은 형편 없었다. 즉, 훈수나 둘 줄 알지, 실제로 시키면 솜씨가 엉망인 이들이었다는 것이다.[5]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후술할 사초(史草) 건(件)만 보더라도, 춘추관의 사관이라는 인간이 사초를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쓰는[6], 관료로서의 능력이라곤 없는 인간이었다. 근데 그런 인간을 당하관(정 3품 이하) 인사, 즉 실무 관리직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7]인 이조정랑에 앉히라고 하니, 상식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김일손에 대한 이극돈의 비방도,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황희의 경우처럼 공식적으로 이를 알리고 수정을 요청하면 될 일이었고[8], 사실이라면 애초에 공문서인 사초를 개인의 청탁만으로 함부로 수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이극돈은 예종시절에 세조실록 집필에 참여하면서 자기 부하들이 사초를 함부로 빼돌려 수정하다가 목이 날아간 사건(민수의 옥)[9]을 옆에서 제대로 겪어본 사람이다.[10]

그러니 개인적으로 사초를 고쳐달라는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것을, 실록청 당상이고 예종때 시절에 민수의 옥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 이극돈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후술하겠지만, 당시 김일손의 사초는 내용이 너무 난잡해서, 실록청 직원들이 소위 개무시를 하던 상황이었다. 이극돈 입장에서 자신에 대한 김일손의 사초가 기분 나쁘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냥 사라질 이야기를, 굳이 (정치적이든 진짜든) 생명까지 걸어가며 공론화할 이유가 없었다.[11]

이극돈 개인의 능력을 살펴보면, 능력이 없는 주제에 아부를 잘해 승진했다는 김일손 등의 주장 또한 억측이다. 이극돈은 학식, 판단력, 실무능력 등 어느 하나 빠질 곳 없는 실무형 관리였다. 집안 자체도 본인을 비롯해 다섯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재상의 지위에 오른 인물들일 정도인 명문인데다가[12] 실록에서도 이극돈이 '숭정대부 행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된 소식을 전하면서 "이극돈의 정밀함은 그의 형제들이나 심지어 그의 아비보다도 정밀하여… 이때(예순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 이극돈이 윗자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당연히 여겼다"라고 언급할 정도이다.[13][14] 이조판서는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15]

이조판서는 현대로 비유하면 행정안전부 장관 격으로, 행정 조직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어서 암묵적으로 육조(六曹)의 수장을 맡을 정도인 중책인데, 이런 자리에 설혹 앉힌다 해도 문제만 일으키고 얼마 못 버티니 무능한 자를 앉힐 리가 없다. 그러니 이극돈이 사림파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능력자들 중에서도 일급으로 인정받던 사람이 실무 경력도 부족하고 능력도 좋지 않은 사림파들을 깔보는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 다시 말해 사림파에 대한 이극돈의 태도는,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단순한 무시와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관이라는 인간이 카더라 통신급 기사를 사초에 싣고도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르니,[16]이극돈도 갑갑함을 넘어 울화통을 터트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거기에 후술하겠지만, 이극돈의 행동이 무오사화를 키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극돈은 연산군을 최대한 말리려고 애쓴 사람이다. 사초를 보려는 연산군을 저지하고, 무오사화 전개 과정에서 이후 문제가 되었던 다른 사관들의 사초를 내놓지 않은 것도 이극돈이다. 물론 그가 사림파를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17], 그렇다고 강경 처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되려 연산군에게 밉보였는지, 그는 사화 이후 삭탈관직을 당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 무오사화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결국 이극돈은 사림파가 치기어리고 능력 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권력에 위협을 느끼고 숙청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유자광의 경우는 애매하다. 그가 무오사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김일손 등등 관련자를 국문하는 핵심 관계자인 것은 사실이다. 내용이 난해했던 《조의제문》의 뜻을 연산군에게 알려준 사람도 사람도 유자광이고, 왠지 야사에서 남이의 시를 뒤집을 때가 생각난다[18] 이걸로 많은 김종직의 제자들과 사림파들을 잡아들인 건 사실이다. 사림파와 사이가 나빴던 것 또한 사실이다.[19]

하지만 이것을 유자광의 원한 때문으로 보기도 부적절한 것이, 우선 유자광과 김종직은, 김종직이 살아있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서로 크게 갈등을 빚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성종 때) 유자광이 현석규 사건으로 파직 후[20] 복귀할 때 복귀를 지지한 사람들 중 한 명이 김종직이었고[21], 위에서 말하는 현판 사건도 구체적인 근거가 없이 (중종 때) 사관의 평으로 넣어둔 야사였을 뿐이다. 오히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던 시절에는 유자광에 대한 무고를 저지른 무고자가 처형[22]당했는데, 만약 김종직이 그런 식으로 상관을 모욕했다면 단순 파직이 문제가 아니라 이 무고죄의 주범으로 찍혀서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그리고 유자광이 사건을 취조하는 사람이었지만, 사건의 발발 원인은 《조의제문》이 아니었다. 《조의제문》은 그저 사건을 확대를 불렀을 뿐이다. 그리고 《조의제문》은 분명히 김종직이 쓴 글이었고, 이것을 《조의제문》을 사초에다 넣은 것도, 이 《조의제문》이 단종과 세조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밝힌 것도 유자광이 아니라 김일손이었다. 유자광은 이것을 취조하고 발표했던 것이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다.

4. 배경

먼저 당시 국왕 연산군대간들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당시의 임금이었던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통치 방식에 대하여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 문제 의식이란 "우리 아빠는 조선의 왕인데 왜 저럴까, 신하들 버릇 나빠지게"라 하겠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어린 나이와 낮은 계승순위에도 훈구파의 힘을 빌어 용상에 앉은 임금이라 초창기에는 훈구파가 국정을 총괄했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친정을 하려니 훈구파의 세력이 자기가 어떻게 손을 쓰기 힘들 정도였던 터라 그들을 상대할 무기로 사림들을 대간에 배치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성종 옹립에 앞장섰던 한명회 등의 원로 훈구 대신들이 하나 둘 나이가 들어 죽고, 또 대간들이 줄기차게 훈구 대신들을 까준 덕분에(?) 훈구파의 힘은 예전보다 확실히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부작용이 나타났다. 대간들의 발언력과 영향력이 성종의 통제권 밖으로 나갈 정도로 큰 것이다.[23] 이로 인하여 성종은 재위 기간 내내 훈구 대신들과 대간의 사림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을 키우는 방식으로 줄타기를 하며 조선을 이끌었다. 비록 후대는 그러한 통치 방식을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좋게 이야기해 주기도 하지만, 정작 성종 스스로는 "나는 명색이 이 나라의 왕인데 이렇게 신하들한테 시달리며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24]

그러나 연산군은 아버지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성종이 대간에게 이렇게 고생을 한 건 다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25] 데다가 고작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에서 비롯됐지만, 연산군은 왕의 정실 부인이 낳은 첫째 아들, 즉 적장자(嫡長子)였고 20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적장자라는 확고부동한 정통성에, 딱 좋을 나이에 즉위했던 것이다.[26] 당시 '적장자 왕세자'라는 지위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적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조선에서[27] 크나큰 메리트라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아마 이 때문에 연산군의 주변에서도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다음 왕위에 오를 게 확실한 왕세자 연산군을 떠받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 환경 속에서 연산군 스스로도 왕과 왕족에 대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자랐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곧 조선이다"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갖고 자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28]

그런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자라는 연산군의 눈에 '조선의 왕인 우리 아빠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별별 시답잖은 것까지 이리저리 물고 늘어지면서, 지네들 말을 들으라고 설치기까지 하는 대간놈들'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다. 그 결과 대간에게 짜증과 울화통은 터뜨리더라도,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결국은 다 들어주었던 아버지 성종[29]과 달리, 연산군은 대간들의 말이 자신의 생각에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매우 단호하게 물리쳤고, 반대로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여보겠다고 평소 같으면 문제 삼지 않을 문제까지 거의 게거품을 물며 덤벼들었다. 연산군 즉위 초기의 기사를 보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대간들이 더 문제이다. 대간들은 연산군 즉위 초기에 소위 '신고식 모드'에 들어갔다. 즉위직후부터 연산군이 아버지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에서 대간은 '인'을 대신은 '성'을 주장했는데 '성'이 받아들여지자 '성'을 주장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는데 대간의 존재 자체가 언로를 열기 위함이고 언로를 열려면 의견을 무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자기네의 의견만 옳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언로를 막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이 의견을 낸 것에 처벌이 아니라 기각된 것만으로도 언로를 막는다며 성종 때부터 게 거품을 물어댔던 이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조(능상)'를 혐오하는 개인적 성향, 그리고 무분별하다 싶을 정도로 임금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던 대간들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연산군과, '임금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견제해야 한다'는 명분과, 조선 역사상 가장 대간들에게 관대했던 성종 25년 동안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시콜콜 잔소리를 매우 위험한 수위로[30] 해댄 대간들의 인식 차는 거의 안드로메다 수준이었고, 그 인식차가 좁혀질 가능성도 전무했다. 이 때문에 연산군 초기의 국정은 거의 개판이 되어갔다. 당시 국왕의 인사 업무는 최종적으로 대간이 동의해야 확정되었다. 그런데 대간들이 툭하면 연산군이랑 싸우면서 총 파업을 해버리는 바람에, 국가의 인사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러니 행정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그나마 실무적인 부분은 그나마 굴러가서 백성들의 삶은 괜찮았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들 대부분에겐 놀라운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연산군이 자제를 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과 대간들의 대립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연산군이 즉위한 해인 1495년에 벌어졌던 불교 문제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아버지를 위해서 '수육제'[31]를 지냈다. 이 수육제는 조선이 개국한 이래 모든 왕들이 다 지냈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치 아래 불교 타도를 외쳤던 신하들도 자신들이 죽을 때는 공공연하게 지냈으며, 인수대비까지 찬성한 일에[32] 대간들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33][34]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까지 상소를 올려서 연산군을 거든 노사신을 파직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연산군은 상소가 과도하다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조리 하옥하고 추국(推鞫)하는데, 대간들이 성균관 유생들을 하옥하면 안 되고, 대간들은 말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루에 한 번 정도 비율로 이어졌다.

다른 예로는, 훗날 중종의 외숙부가 되는 윤탕로를 통해서 불경을 편찬하게 하는데, 이 문제로 대간들의 반대가 다시 반복된 일도 있다. 그 외에 정미수를 당상관으로 임명하는데, 정미수가 문종의 외손(정종과 경혜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이 반대하여 몇 개월을 끌었다. 그다음엔 정도전의 후손 정문형을 우의정에 임명하는데 이 것도 결사반대로 또 몇달을 끌었다. 하다못해 '정도전은 감히 종친들을 해치려한 자로 무인정사 때 태종대왕께서 친히 처단하신 자입니다. 그런 자의 후손을 중용하는 건 안됩니다.'라는 논리도 아니고 그냥 '정문형 그자는 특별히 공을 세운게 없다'라는 이유 뿐이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왕조 시대에 왕이 한번 내린 결정은 쉽게 되돌릴수가 없다. 그 자체가 왕이 잘못을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왕의 권위 자체에 큰 흠이 되기 때문이다. 후대 왕들이 선왕의 정책을 쉽게 뒤집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큰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공이 없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왕이 직접 내린 인사 결정을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연산에게는 '우리한테는 당신의 권위 따위는 우습다'는 뜻으로 보이게 된다.

그 다음에는 노사신에 대한 탄핵이 다시 몇 개월.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문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적장자 왕세자로서 자부심이 강했으며, 아버지가 대간들에게 휘둘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보아왔던 연산군과, 말발과 비판이 자신들의 존재 근거라고 믿었던 대간들 사이에서 양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35] 자연히 즉위 이후부터 성종과는 다르게, 대간에 대해서 강성(强性)인 연산군과 대간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연산군 치세 초기부터 연산군과 대간들의 충돌이 시작되어, 그것이 점점 고조되어갔다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연산군은 대간들을 하옥하고 정거[36]하는 등 어느 정도 채찍을 쓰기도 했지만, 우의정 정문형의 임명을 취소하고 그럴 듯한 비판은 칭찬하는 등 당근도 많이 내밀었다.

노사신, 윤필상 등의 피혐[37]에는 "다 내 결정이었으니 내 책임이다"라고 보호해주어 대신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승지급들을 매개로 제어도 시도했다. 하지만 연산군의 성격상 이런 식의 부드러운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대간들은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없이, 툭하면 사표를 던지고 물러나는 강경 투쟁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던 터라 연산군 즉위 후 4년 내내 이런 상태가 반복되었다. 왕이 기가 꺾일 때까지는 결코 안 물러서겠다는 뜻이었을 지도.

그러나 너무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비타협적인 삼사의 태도는 김일손과 김종직 등의 처리 문제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때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됐다. 연산군과 훈구 대신들이 김일손과 김종직 등에게 적용한 범죄는 단연 '대역죄'였다. 연산군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이자 선왕 성종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세조를 모독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사는 눈치 없이 이보다는 보다 더 온건한 쪽의 처결을 주청하며 다른 의견을 내버렸다.

그러자 연산군은 삼사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대간 니네들이 김종직-김일손 무리와 같은 편인 게 아니라면 이렇게 나올 순 없다"면서 대간들을 김일손, 김종직과 연루시키며 삼사의 대간들을 마침내 직접 처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에 질려버릴 만큼 대간들에게 시달리던 훈구 대신들은 연산군의 대간 손봐주기에 적극 동참했다.

5. 김일손의 사초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는 주로 사관으로 활동했다. 다만 업무능력은 정말 떨어져서 사관의 업무인 사초 작성을 자기 멋대로 뒤죽박죽 써버렸고, 이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성종실록을 집필할 때 실록청 당상 윤효손(尹孝孫)은 '(김일손의 사초는) 날짜에 따라 기사(記寫)하지 아니해서, 어느 날 아래에 편입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고 언급하는 등 실록청 관리들에게 무시당할 정도였다.[38]

문제는 개인 일기장에나 싸지를 것들도 사초에 써서 제껴놨다는 것이었다. 하나 같이 성종의 할아버지요, 연산군의 증조 할아버지인 세조를 모독하고 그의 집권이 부당하다는 글들이었고, 일부는 왕실을 모욕하는 글들도 있었다. 그나마 근거라도 정확히 썼으면 모르겠는데, 하나같이 소문에 불과한 카더라급이거나, 근거? 그게 뭔데? 식의 내용이었다.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 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39]
  • 김일손은 허반에게서 들었다고 증언했는데, 정작 허반은 자기 집안의 소문(…) 중 '의경세자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 권 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하고, 권 씨가 안 먹자 세조가 화를 내고 권 씨가 달아났다'는, 김일손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소문을 알려 줬는데, 김일손은 이것을 가지고 아예 한편의 소설을 써냈다.
    김일손의 사초 중 가장 근거 없는 내용이자 위험한 내용이다. 당장 세조는 정희왕후 외의 후궁도 다른 왕들에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고, 그나마도 수양대군 시절 으로 들였다가 왕이 된 후 후궁으로 격상한 것 뿐이지 이후 새로 후궁을 들인 적도 없었다. 여기에 조정 회의 때 '내 아내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던데 말이야'라는 식으로 정희왕후의 의견을 인용할 정도의 애처가였다. 그런 사람이 자기 며느리를 건드리는 막장 불륜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물론 왕가의 간통 여부는 왕가에서 증명해 주지 않는 한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조심히 해야 했고 특히 내명부의 불륜문제는 왕위계승과 직접 연관되는 사항이라 특히 신중하게 써야했는데[40] 김일손은 그러지 않았다. 이걸 들은 연산군이 "실록은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써야 하는데 어찌 (누구한테) 들은 걸로 썼냐?" 라고 할만큼 공정성에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더불어 덕종의 후궁이라는 기록도 연산군에게는 엄청난 모욕이 될만한 내용인데 덕종=의경세자는 연산군의 할아버지 즉 성종의 친아버지이다. 가뜩이나 정통성 문제로 평생을 골머리를 앓던 성종 입장에는 엄청난 치명타가 될만한 내용으로, 이 기록을 근거로 "성종은 의경세자의 아들이 아닌 세조의 사생아다"라는 식으로 공격할수도 있는 내용이다. 당장 이성계가 이런 논리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권력을 잡은 것을 생각하면 연산군등 조선왕실입장에서 결코 좌시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소릉의 재궁(문종의 부인인 현덕왕후의 관)을 꺼내 바닷가에 버렸다.[41]
  • 계유정난과 관련된 야사에서 이 이야기가 자주 나와서 이를 사실로 여기는 경우가 현대에도 적지 않은 부분이다. 현덕왕후를 소릉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터가 크게 좋은 자리가 아니었을 뿐, 바닷가와는 크게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정말 바닷가에 버렸다면 중종 때 현덕왕후를 다시 소릉에 묻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정사'인 실록에 올리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이가 없으니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다. 한 동자가 어느 날 밤에 와서 시신을 짊어지고 달아났는데,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42]
  •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이것도 사실로 착각되는 김일손의 찌라시들 중 하나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그냥 방치했고 이를 엄흥도가 몰래 묻었기 때문에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도는데, 중종실록에는 아전이었던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는 것과 그 무덤이 어디있는지에 대해서 당시 영월지방 아이들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중종실록 즉 시신이 어디있는지 모르기는 커녕, 단종이 죽고 60년이 지난 뒤인데도 주변 사람들은 거의 다 알았다. 다만 노산군으로 취급 받았기 때문에 국왕의 예로 장사지내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이다.[43] 무엇보다 세조실록에서는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실록라고 기록했고, 이게 국가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세조실록에서는 동네 아전이 묻어준 정도면 충분히 예를 갖춘 것이다로 봤을 수도 있고, 사림들 입장에서는 저건 암매장이고, 자기들은 영월 근처에도 안 가봤고 왕릉으로 대우도 못 받았으니까 어디있는지 모른다라고 평가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내용도 과장이 심해서 처참할 뿐 아니라, 공식적 기록인 세조실록의 내용과 다르게 기록했으며,[44] 이름 모를 동자가 등장하는 등 이건 소설 한 구절이지 사초에 걸맞는 내용이 절대로 아니다. 정 남기려면 '~~가 남긴 글에서 보았다'라는 식의 출처라도 제대로 명확하게 남겨야 했다. 게다가 이 자체가 세조를 비난하는 내용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45]
  • 이 구절은 당시에는 역적 취급을 받았던 황보인김종서에게 역적이라는 칭호를 안 쓰고 일반인처럼 써서 문제가 되었는데, 김일손은 그 이유를 두 사람이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세조는 절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죽였다'고 비난하는 말이 된다.
    그리고 사실에도 어폐가 있는게 두 사람은 절개를 지킬 새도 없이 죽었다. 김종서는 세조가 건네준 글을 읽다가 세조의 종인 임어을운의 철퇴에 맞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세조 측이 보낸 무사들이 오자 자기를 그냥 체포하는건 줄 알고 갔다가 죽었고(...) 황보인은 명에 의해 궁에 갔다가 매복하고 있던 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46]
  • 김일손은 이것을 박경에게 들었다고 진술했고, 박경은 이것을 동대문(東大門)에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승려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찌라시가 붙어있기에(…), 이것을 김일손에게 알려줬다고 진술했다.

여기까지 읽으면 대충 감이 오듯, 김일손의 사초 작성은 그야말로 감히 왕실을 능멸했다고 할 정도의 위험 수위였다. 한 마디로 "나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수준. 현대에도 기레기들이 이런 짓 했다가는 명예훼손 등 형사, 민사까지 소송을 푸짐하게 받을 만한 일인데,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더욱이 자존심이 강하고 왕의 권위를 다시 찾으려고 노력했던 연산군으로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큰 문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간들 쓸어버리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명분을 만들어준 김일손이 조금 고마웠을 지도

그리고 왕실의 권위 문제는 둘째 치고, 이 과정에서 김일손의 처사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엄연한 공식 역사 기록인데, 거기에 확인이 불가능한 소문성 기사를 1차 기록인 사초에 제멋대로 집어넣은 건, 대놓고 "세조! 엿이나 먹어라!"라는 짓이다.

당시에는 사초를 중요히 여겨서 쉽게 삭제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어느 정도냐면 세종실록 편찬 때 영의정이었던 황희의 기록에 악의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내용이 '황희는 재산도 넉넉하지 않고 장인에게 노비 셋만 물려받았는데 저리 잘 사는 건 매관매직을 했기 때문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했다.'이다. 이 부분은 논란 끝에 삭제하자는 분위기가 우세했으나 끝내 삭제되지 않아 세종실록 10년 6월 25일자에 실리게 됐다.

거기다 실록은 일단 작성되고 나면 그 자체는 어떤 수정도 할 수가 없다. 후세에 수정실록이라는 보완본이 나온 이유도 기존의 실록을 감히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목적이 어쨌든 간에 따로 업데이트 버전을 만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강력한 정권도 과거에 마음에 안 드는 실록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실록은 단순한 역사기록수준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왕들이 결정을 할때 참조 지침 즉 일종의 관습법같은 역할을 하는 문서였다. 당장 김일손 일당이 왜곡한 내용을 살펴보면 관련 인물의 후손들의 복권 및 공신임명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특히 연좌제가 있던 조선에서는 후손의 범죄를 가감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들이 즐비하다. 더불어 불륜문제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파혼이 아니라 중범죄였는데[47] 멋대로 불륜문제를 조작한 것은 조선시대 기준으로 누구하나 죽이려고 작정한 수준이다. 그것도 일반 평민도 아닌 왕실 종친들을 대상으로 한 조작행위라서 더욱 심각했다.

세조의 부당한 집권을 사림 출신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사관으로서 본분을 잊고 확인 없이 소문성 기사를 집어넣은 것은 현대의 관점으로 봐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하물며 그 세조의 증손이 왕이고 그 왕이 다른 사람도 아닌 '왕권 지상주의자'인 연산군인 시절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문제를 설령 신하들에게 관대히 대했던 성종이 알았다 해도 극형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6. 주요 과정

성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즉위한 연산군은 이극돈 등등의 관리들에게 성종의 실록을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1차 기록인 사관들의 사초를 모았고 이중에는 김일손의 사초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김일손의 사초는 훈구파(+연산군)와 사림파와의 갈등과는 완전히 별개로, 김일손이 사초를 너무 못 써서(…) 국가 기록물인 실록에 넣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성종실록 편찬 초기에는 묻혔다.

그러나 1498년 실록 편찬이 마무리가 되어갈 때 즈음에 성종실록의 편찬 책임자인 이극돈은, 한치형의 언급을 계기로 김일손이 사초에 뭔가 이상한 짓거리를 해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기록에 있는, 이극돈이 해당 사건을 항변한 상소에 따르면, 이극돈은 이후 노사신 등과 의논하여 공식적으로 이를 수정할 것을 논의하고, 이후 7월 9일에는 좌의정 어세겸 등과 같이 김일손이 쓴 이 초특급 찌라시를 목격하게 된다. 이극돈은 상소에서 자신은 16일에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고 항변했지만, 이 발언은 연산군한테 안 죽으려고 항변한 것으로 보이며[48], 실제 이극돈의 행동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이 찌라시를 숨기거나, 적어도 김일손 주변인으로 사건을 축소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난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이러한 터무니없는 기록을 보고, 노사신과 더불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냐?"라고 울었다(!!)고 한다. 김일손은 대의명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능력도 없는 인간이 그저 세조가 싫다는 철없음에 북받쳐서 쓴 글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런 작자가 사림파의 영수나 하고 있는 판이었으니, 정말 답이 없다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김일손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초특급 수중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극돈은 이것을 연산군에게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냥 넘길 경우 자신에게도 책임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이극돈은 여러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는데, 그 중 마지막으로 물었던 유자광이 이 이야기를 듣자, "아니,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라고 반문하며,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과 같은 대신들에게 "우리들은 세조대왕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를 두고 볼 수는 없다."면서 이 찌라시를 알려야 한다고 설득했고, 결국 이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1498년 7월 11일, 김일손의 스캔들 기사는 결국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 연산군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이에 연산군은 바로 김일손이 쓴 사초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원칙적으로 임금이 사초를 직접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극돈은 처음에는 극렬 반대하였으나, 앞서 말했듯이 근거 없는 찌라시를 사초에 집어넣어서 왕조를 능멸한, 거의 역모에 준하는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하여 이극돈 등등의 대신들이 김일손의 사초에서 문제되는 부분을 직접 선별하여 연산군이 이를 보는 것으로 절충되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결국 무오사화라는 헬게이트가 열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7월 12일, 연산군은 고향으로 낙향해 있던 김일손과 허반을 잡아와서 직접 국문(鞫問)했는데, 의경세자의 후궁 기사를 시작으로 김일손에게 문제의 기사의 출처를 묻기 시작했다. 김일손이 출처를 밝히면서 연루자들이 하나하나 체포되었고, 왕에게까지 깡다구를 부리던 대간들조차도 단체로 버로우를 탄 채로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49] 이 당시까지만 해도 문제의 초점은 그 스캔들 기사의 출처였다. 그런데 사초에 적혀있던 김일손의 다른 기사 부분이 추가로 적발되면서,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게 된다.

7. 핵폭탄 《조의제문(弔義帝文)》, 《화술주시(和述酒詩)》

바로 이 과정에서 《조의제문》과 《화술주시》까지 걸려들게 된 것이다.

7월 13일에 김일손을 심문하던 도중에 단종의 시신에 대한 기사를 추궁하자, '김종직이 단종의 일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분개했고, 때문에 자신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었다'면서 김일손 본인이 직접 증언했다.

사실 《조의제문》은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한 글이 아니었다. 워낙 내용도 어렵고 은유가 많았는지라 도대체 김종직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딴 알아먹지도 못할 잡글을 국가 기록인 사초에다 끼워 넣었다는 일 자체로서 김일손의 관료 부적격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일손의 증언을 계기로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해석하기 시작했고, 이틀 만인 7월 15일, 연산군에게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해석해서, 《조의제문》이 계유정난을 비난하는 글[50]이라고 보고했다. 유자광의 보고를 들은 연산군은 이에 분노하면서, 7월 17일에는 대신들에게 《조의제문》과 그 뜻을 알려주면서 "이 새끼들 봐라!? 이 따위 생각을 품고 있던 주제에 그걸 숨기고 내리 세 조정을 섬겼단 말이냐? 무서워서 내 몸이 다 떨린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신하들도 동조했는데, 영의정 윤필상이 즉각 "글이 너무 사악해서 감히 입으로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두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대역죄를 적용하시어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소서" 라고 요청했는데다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신하들이 이 의견을 따라서 그들을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김일손과 마찬가지로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과 홍한까지도 앞을 다퉈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라고 청했다. 표연말과 홍한은 연산군 초기에 연산군에게 사사건건 트집 다 잡았던 양반들인데도, 막상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자기들 스승의 시신을 찢어발겨야 한다고 스스로 고할 정도로 깨갱한 것이다.[51] 심지어 가장 온건한 의견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는 않은데 이미 죽은 애를 또 찢을 거나 있습니까? 작호만 거둡시다"[52]였을 정도였다. 물론 이 인간들은 '왕실을 모독한 반역자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곧장 국문장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김종직의 제자들이 조의제문의 내용 때문에 역모죄로 잡혀 들어오면서 무오사화는 절정에 이른다.

7.1. 김일손 저술의 문제점

일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서 저러는 거냐?’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일손 일파의 문제점은 매우 심각했는데, 바로 자신들이 못마땅해하는 세조와 그 후손들인 국왕들에게서 봉록을 받아먹는 관료 생활을 했으면서, 정작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글을, 그것도 국가의 공식 공문서이자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에다가 넣을 자료인 사초에다가 끼워 넣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진정한 문제는 후자의 사초. 물론 전자도 확실히 지탄받아 마땅한 짓거리였지만, 후자는 더한 짓인 게 아예 미래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일손 일파는 속으로는 "세조는 모리배들이 세워준 우상에 불과하니, 그런 자는 왕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그 왕이 주는 벼슬을 받고 국가의 녹을 먹어온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벼슬살이를 하면서 그 관직을 이용해서 몰래 몰래 비난을 일삼아온 셈이다. 이것은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농락함.)의 죄로, 당연하게도 전근대 시대엔 대역죄나 다름없었다. 당장에 김종직의 제자라던 표연말과 홍한이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이 극치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세조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생각을 품었거나 그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내용의 의견을 표출했다고 했었을지라도 그 방식이 '관료'로서가 아닌 '선비', 즉 지식인 개인으로서의 모습이었다면 문제의 성격이 다소나마라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 역시도 결국 국왕과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으니 발각되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또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나라고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신 왕조의 개창에 참여하지 않고 은둔한 선비들이 그 나름대로의 추앙을 받았던 것처럼, 비록 현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의 절개라고 해도 그 절개 자체는 아름답게 여기는 인식이 유교 전통 내에서는 확실히 있었다. 조선의 국왕인 태종이 새로운 왕조 조선을 위해 일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논지로 조선왕조 자체를 부인하면서 낙향한 길재를 직접 높이 평가해줬던 일 등등을 생각해보면, 조선 왕조에서도 관료가 아닌 사람들의 사상은 반란 수준이 아니라면 상당 부분을 보장해주는 측면이 있기는 했었다.

문제는 세조 비판 세력의 경우 대체로 세조 정권기(+그 이후대의 정권기)에 벼슬에 올라 녹봉을 받으며 일을 했다는 점이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논쟁이 사육신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소개되어 있어서, 이들에 대한 복권이 꽤나 나중인 조선 후기에나 들어서 이루어지게 된 배경 겸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선조 때 사육신을 재평가해서 복권시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헐 세조 밑에서 벼슬하며 봉록 먹어놓고 이짓 했는데 뭔 헛소리?"라면서 씹기도 했었다. 또한 이황조식에게 비난받았던 이유도 "처사라는 것이 벼슬할 거 다 했는데 뭔놈의 처사?"였던데, 이처럼 처사가 절개를 얻었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벼슬을 안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근데 이런 것들은 둘 다 얻으려고 했으니까 문제다.

그리고 더 이야기하는데, 아무리 세조가 가장 정당성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해도 왕실 입장에서는 이를 그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이고, 세조는 당시 중흥의 선조로 취급 받았으며, 단종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그 시점에도 살아있는 등 끽해야 2 대 정도안의 사건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으며, 노산군에 대한 첫 제사를 국가에서 지내 준 것이 중종 대이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왕실 명부 선원록에서 노산군의 이름을 빼버린 것도 중종대이다.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된 것은 수백 년 후인 숙종 시대의 일이었고, 그 무덤이 폐허가 된 것은 임진왜란을 거쳤음에도 아무도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세조 이후대의 국왕들 역시 모두 세조의 자손들이자 그 혈통을 계승한 세조의 후예들이라는 사실 또한 알아둬야 한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을 능멸한 행위였다. 한 마디로 왕실에게 있어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 전부가 반란의 무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연산군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감히 증조부를 모욕한 역적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해석 여지에 따라서는, 아예 세조의 뒤를 이은 왕통까지도 부정한다는 혐의까지 받을 수 있다.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에서 핵폭탄 급의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더불어서 마찬가지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과 유사한 내용의 시인 화술주시까지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연달아 사림 세력들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은 사림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대간들이 터져나가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때문에 연산군이 흉폭하거나 옹졸한 인물이라서 김종직을 부관참시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평가도 무리수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만약 연산군이 아닌 다른 국왕들(성군들도 포함)도 왕실을 능멸한 자에게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전근대시대 어디에서나 반역자에겐 가혹했으니 말이다. 특히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입장에서는 김종직이나 김일손을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데, 세조한테 개소리하면서 대들다가 개털린 김종직[53]을 아버지가 성은을 베풀어서 중용해 줬는데, 이따위 글이나 쓰며 그 선왕의 조부를 모독하고 있었으니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치를 떨 만도 했다. 김일손의 동기인 표연말과 홍한이 스승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라고 다른 대신들처럼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과 가장 온건한 의견을 낸 사람들이 김종직에게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려줘도 마땅찮다는 이야기를 한 게 괜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도 갑자사화의 피해자들은 반정 후 3일 만에 무죄로 인정해 주고 갑자사화의 장본인으로 여겨졌던 임사홍[54]은 바로 연좌제를 적용해서 그 가족들을 처벌했지만, 무오사화에 일조했던 유자광은 중종반정에 가담한 반정 공신으로서 그 뒤 수 년간 자리를 보존했었고, 김종직과 김일손의 경우 반정 공신들 또한 '왕실을 능멸한 그 죄는 당연히 죽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연좌는 너무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죄를 확실하게 인정하는 상황인지라, 결국 반정 후 1년 가까이 지나서야 신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55] 무오사화에 연루되어서 처벌받은 다른 사림파 인물들도 이 점 때문에 신원이 비교적 더뎌지게 된 것으로 보이며, 그 둘을 신원해 줄 때에도 사림파 인사들은 '조의제문은 성종이 조의제문을 알고서도 인정했던 것이다'라는, 가히 왕실 모독급의 거짓말를 해야만 했다. 근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의제문의 본 뜻[56]이 알려지게 된 것은 김일손의 증언 이후였다. 그리고 만약 성종이 알았더라면 후술한대로 피바람이 진작에 났을 것이다.

중종 본인도 확실히 이런 결정이 떨떠름하긴 했는지, 그 둘을 신원할 때에도 두 사람은 성종한테 죄를 지었다고 밝혔고, 나중에는 위 소문의 제공자였던 허반의 딸에게 노비를 주는 건의를 거부하거나 유자광을 다시 공신으로 복권시키기도 했으며, 그 이후엔 무오사화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이극돈도 신원해주려다 실패하는 등등[57] 중종 본인도 무오사화를 불편하게 본 행동들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종 또한 세조의 손자인 성종의 아들이었던만큼 조상을 모욕한 사건을 그냥 봐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 중종 때 구라와 달리 성종이 자기 생전에 이 일을 알게 되었다면, 평소 신하, 특히 터무니없는 것조차도 꼬투리 잡아 괴롭히던 대간들에게 마지못해 져주던 모습과 달리, 그냥 조용히 넘어갈 가능성은 극히 낮았을 것이다. 특히 성종은 정통성 문제로 평생을 골머리를 썩였던 인물로, 할아버지의 정변은 둘째치더라도 왕위 계승 3순위였던 처지에 왕이 되어서 더 그랬다. 이런 와중에 자기 일족의 역린을 잡아뜯어버리는 이런 글을 알았다면 분노는 둘째 치고 왕권의 강화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또는 이 기회에 대간들 눈치 안 보고 왕 노릇 좀 해보자는 생각으로 라도 무오사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대숙청을 벌였을 지도 모른다.

특히 말년의 성종은 사림의 악다구니와 30대 후반이라는 원숙한 나이 덕에 대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늘어나는 등 대간들이 "우리 임금님이 변했어요." 라고 할 만큼 변한 모습을 보였다. 더군다나 성종이 자기에게 별 것도 아닌 일들로 억지를 부리며 대드는 대간들에 대해 그냥 넘어간 건 그들이 성종이 중요시 하는 유교적인 도덕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다리가 세 개 달린 닭이 태어난 일에 대해 왕의 탓이라고 대간들이 따지자 미신을 가지고 그런다며 불쾌해 했으며, 반대로 유교적 도리를 어겼다고 판단된 폐비 윤씨, 어우동에 대해 법을 무시하면서 극형을 내렸다. 성종의 이런 행적을 보면 무오사화와 같이 유교적 군신 관계를 엿바꿔 먹어버린 사건 + 자신의 정통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사건에 성종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어쩜 차라리 사림으로서는 연산군이 먼저 왕이 된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연산군이 아닌 중종이 성종의 뒤를 이었다면... 게다가 1519년에 일어났다면.... 아마 기묘사화 따위는 비교가 안 되는 사림 대숙청이 벌어졌으며 조광조사약이 아니라 운 좋으면 참수, 재수 없으면 거열형으로 끝났을 지 모른다. 애당초 기묘사화가 왕과 대신들이 작정하고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적은 사초가 발견되었다면...

8. 결과

이후 줄줄이 사초들이 공개되었다. 김일손의 동료였던 다른 사관들의 사초에도, 김일손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악의적인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은 걸 역사랍시고 기록해놓은 세조를 까는 기사들이 기록되었음이 밝혀진다. 물 만난 유자광은 사태를 확산시켰고, 사초에 불순한 말을 쓴 사관들이 차곡차곡 걸려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가 걸려든 사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태가 역모급으로 확장된 이상 용서는 없었다. 사실 아무 생각없이 썼다는거 자체도 큰 문제인데 감히 왕실 능욕급을 생각없이 썼다는게 그 당시엔 봐줄만한 일도 아닐뿐더러 애당초 관직생활에 있는 이들은 죄다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 나름 배울대로 배웠다고 할만한 이들인데 이정도면(...)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거열형. 이목, 허반은 참수형, 강겸[58], 표연말, 홍한 등은 곤장 100대의 유배형에 처해졌고, 이들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다. 또 사관이었지만 무오사화 이전에 죽은 신종호는 관작 삭제를 당했다. 이 밖에 사림파의 무수한 사람들이 대부분 유배를 당했고, 김일손에게 소재를 제공해준 사람들도 유배를 당했다.

연산군은 이들이 형을 당하는 과정을 모든 관리가 지켜보게 했고, 이 과정에서 낯을 가리거나 참석하지 않았던 관리들도 처벌받았다. 실록청 관리들 중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당했고,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은 좌천되었으며, 조위는 유배당했다. 이후 유자광은 8월에 다시 이 일을 끄집어내, 남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유배시켰다.

사실 이때 사림파는 역모 혐의 등으로 가루가 될 뻔했다. 이때 유자광은, "이자들의 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간당들 일체를 뿌리 뽑아 버려야 조정도 깨끗해지고 뒤탈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림을 초토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훈구파이며 사림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사림으로부터 소인배 소리를 듣던 노사신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최대한 죽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앞에 했던 유자광의 말에는, "무령군은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청론(淸論)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지 없는 게 나라의 복은 아닙니다" 라고 답했다. 진정한 대인이랄 수 있는 이런 사람 덕분에 사형이 확실시되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유배형으로 끝났다. 사림파도 그의 은혜를 생각해서, 나중에 《연산군일기》 등에서 유자광 등 다른 훈구파는 죽어라 욕하고 비판하지만, 노사신은 잘 비판하지 않는다.[59]

노사신은 김일손의 사초 파문이 대형 옥사로 번질 듯하자 사안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다음과 같은 말들로 사림을 옹호했다. "연루자를 국문해야 하겠지만, 제자라고 모조리 국문하면 소요가 일까 걱정이 되옵니다", "종직은 대역죄로 논하는 게 당연하지만, 김일손 등은 사문만을 찬양했으니 종직과 죄를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60]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노사신이 자신을 공격하던 사림을 이렇게 적극 옹호한 이유는 대간이 약해지면 신권 자체가 약해지고, 지나치게 강화된 왕권은 유교 정치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대승론(大乘論)적 시각에 근거한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노사신은 무오사화가 마무리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는데, "신의 소원은 상벌이 적절히 행해지게 되는 것과 전하께오서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는 것뿐이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다만 이 기사는 후대에 유자광의 무오사화 행적을 정리한다면서 넣은 기사로(연산 4년 7월 29일 기사) 해당 날짜의 기록은 크게 다르다. 우선 해당 기사의 출처로 예상되는 연산 4년 7월 26일의 사초 관련자 처벌 내용 기사를 살펴보면 노사신의 경우 "청론(淸論)하는 선비 등을 언급한 내용은 해당 기사는 물론 전후로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범 김일손을 역모죄 주범이 아니라 단순히 따른 종범으로 주장해서 능지처사가 아니라 참수형으로 낮추자고 주장했고 이걸 보면 정리 기사는 어느 정도 앞뒤가 맞다.

그러나 문제는 유자광의 경우로 정리 기사에는 유자광이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26일 기사에서 유자광은 처벌을 막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처음에 참수형으로 정해졌던 강겸(姜謙)을 정상 참작 여지가 있다고 주장해서 감형을 요청했고, 오히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저서 강겸(姜謙)은 참수형에서 곤장 100대에 강계 지역으로 유배형으로 감형받는다.[61] 이 내용을 정리해보면 정리 기사에서 유자광이 강력 처벌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다.

여담으로 이극돈은 당대 최고 명문 광주 이씨로서, 무오사화 당시 그의 벼슬은 좌찬성이었다. 다시 말해 정승 1순위 자리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 때문에 다시는 정승직에 못 오르고 판서로 관직을 마치게 된다. 거기다가 어찌 보면 아무 잘못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후세에는 무오사화의 원흉, 주모자로 낙인찍히게 되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 버리고 만 셈이다. 더군다나 그 5대손인 이이첨도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까였다.

1년 뒤 무오사화의 후속극(?)이 나오는데 충청도 천안의 유분 등 유생 몇 명이서 이것을 꼬투리 삼아 지들끼리 "바야흐로 걸주의 세상이네. 윤필상과 유자광은 남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어진 선비들을 죽여 재산을 타는구만","금년에 바람 불고 천둥친 것도 다 그 때문이지","김종직이야 말로 진정한 충신이지" 그놈(유자광)을 쏘아 죽여버리겠다라는 말을 했다가 박원성의 고변으로 들통나 목이 달아나거나 유배되었다.[62] 목이 달아날만 했네

9. 사화(士禍)냐, 사화(史禍)냐?

사화(士禍)란 말 그대로 선비[士]가 불행[禍]을 당한 것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무오사화는 무오년(戊午年)에 일어난 사화(士禍)라 하여 무오사화란 이름이 붙은 것이고. 그러나 상술(上述)되어 있듯, 이는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내 입맛에 맞으면 사실로 기록하겠단 식의 무개념 태도로 서술된 사초(史草)가 방아쇠가 된 면이 크다. 그래서 무오사화만은 사화(士禍)라고도 하지만, 사서(史書)에 관련된 필화(筆禍), 혹은 사필(史筆)로 인해 비롯된 옥사(獄事)라 하여, 무오史禍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결과론적이긴 하나, 이 사건으로 인해[63]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역대 임금들이 함부로 실록을 읽거나[64] 집필에 간섭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오사화가 '폭군 연산군과 간신 유자광의 악행'이란 평가를 받게 되면서[65], 연산군 이후의 임금들이 만약 실록에 손이라도 대려 하다간, "아니 되옵니다! 그건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란 아주 훌륭한 방패막이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의 사관들은 보통은 김일손처럼 막나가지도 않고 적당한 선에서 행동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다분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 무오사화 자체는 다른 사화에 비해 처벌의 명분이 충분했기에, 만약 연산군이 무오사화 이후 무난히 왕 노릇 하다가 임종했으면, 역으로 후대 왕들이 김일손 같은 일을 안저질렀는지 확인하려고 왕이나 권력자가 주기적으로 사초를 들춰 보는 선례가 될 뻔했다.

그리고 역사의 인식을 수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연산군과 훈구파가 죄없는 사림들을 모함했다는 편견과 달리, 이 사건은 김종직과 김일손 일파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국왕으로서 연산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폭군이 아니라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되는 왕이었다. 사실 어떻게보면 연산이 대간을 넘어서 관료집단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는데 이 사건이 한 몫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왕위 찬탈하고 단종을 죽인 건 그 시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나쁜 짓인거 다 아는데 뭔 사림들이 자초한거냐, 걔네가 바보냐?" 하는 의견이 있는데, 사건의 시작은 세조에 대한 찌라시 기사를 실록에 실은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설령 조의제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조에 대한 찌라시 기록을 실어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역죄에 해당하며, 아무리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해도 엄연히 그 후손이 왕위에 앉아 있는데 다른 것도 아닌 실록에다 기록해 놓았기에 이는 충분히 죽음을 부르는 행동이었다. 요즘시대에도 자기 조상의 나쁜점을 부각시키거나 터무니없는 내용을 기록하면 고소나 항의들어와도 할 말이 없을 텐데 하물며 전제군주제인 조선에서 그것도 왕실에 역린을 뜯어버리는 짓을 하면 그야말로 대역죄로 일가친척이 멸문지화를 당할 판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이 나쁘다는 것을 명백히 잘 안다고 해도 이런 짓거리를 봐줄 수가 없는 판이고 그렇게 비난하고 있으면서 그 왕과 이후대의 후손들인 왕들 밑에서 관료 생활을 했으니 피의 숙청을 하게 된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과 홍한이 동기인 김일손과 스승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라고 앞다퉈서 요청한 것도 연산군에게 대들던 대간들도 입다물고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것도 이를 반증한다.

10. 창작물에서

연산군 시대의 두 사화 중 하나이지만, 연산군 시대를 다루는 창작물에서는 갑자사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 일단 무오사화는 실록의 사초와 왕실의 정통성 문제라는 다소 딱딱한 소재이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 패륜 행위 등 각종 막장 드라마급 클리셰가 풍부한 갑자사화의 임팩트가 훨씬 크다. 따라서 갑자사화의 내용을 부각시키고 정작 무오사화는 상대적으로 축소하거나 아예 삭제하는 사례도 많다.

그나마 사극왕과 비》 후반부가 무오사화의 과정을 큰 생략 없이 잘 그리고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다. 드라마 자체가 실록에 대단히(왜곡된 기록까지도) 충실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김일손 및 관계자들의 발언이 정사에 실린대로 큰 각색 없이 묘사되고 있으며, 노사신이 유자광을 자제시키려는 모습 등의 세부적인 고증도 잘 살렸다. 거열형과 참수형 등 고어한 처형 장면도 묘사되었다. 이후 《왕과 나》에서도 무오사화가 묘사된 바 있다. 임권택 감독의 1980년대 영화인 <연산일기>에도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기존의 연산군 관련 사극보다 정사에 더 기초를 둔 작품이라, 즉위 초기 수륙재를 둘러싼 대간들과의 갈등에서 무오사화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사료에 충실하게 묘사된 편이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조용히 넘어간 갑자사화와는 달리, 무종조에 개혁을 반대하며(조총 개발 반대, 저화 유통 반대 등) 어그로를 끌며 깝치던 대간들을 조지기 위한 명분으로 크게 키워서 대숙청을 했지만, 노사신과 유자광 등이 목숨을 걸고 상소한 탓에 김일손 등 2명을 능지처참 김종직 부관참시, 2명은 참수형으로 타협했고, 다른 관련자는 모조리 울릉도로 귀양보내는 걸로 끝났다, 피는 좀 덜 흘렸지만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은 원 역사보다 심하게 박살났다고....

[1] 무오사화에 한해 역사 史자를 넣어 史禍라고도 부른다. 왜 이렇게 부르는지는 본문 참고.[2] 이극돈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고, 성종 사망시 국상 중에도 기생이랑 놀아났으며,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기록.[3] 다만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는 있지만 전후관계를 비추어보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일화다[4] 관직 서열은 낮은 편이었지만, 대신들과 임금을 비판하는 일을 주로 하였던 삼사의 관리를 임명하고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다. 이후 사림세력이 명종 후반에 다시 중앙에 진출했을때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된다.[5] 사실 조광조도 학자로는 적격이었을지언정 정치가로는 낙제급으로 영 아니었다. 그런 걸 감안해보면 알 수 있는 셈.[6] 애초에 조의제문 같은 잡글을 역사 기록인 사초에 끼워 넣는 것 자체가 해선 안될 짓이다.[7] 정 3품 이상부터는 국왕이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이조정랑은 최고의 요직이였고, 훗날 동서붕당의 원인이 될 정도로 조선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이었다.[8] 다만 황희는 수정하기로 합의까지 한 기록도 실록에 있는데, 실록을 수정했다는 전례를 남길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결국 그대로 실렸다.[9] 예종1년 세조때 사관이던 민수가 사초에 훈구파를 비방하던 내용을 많이 실었는데, 이것이 세조실록을 만들면서 모이게되자, 훈구파 대신들들의 보복이 두려워 자신의 사초를 몰래 수정했다 걸려서 처벌받은 사건[10] 주동자인 민수는 사형 대신에 (예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라서 그랬다던지 본인이 외동이라서 선처를 받아 그랬다던지 하는 설들이 있지만) 처형되지는 않았고, 대신에 곤장 100대 맞고 제주의 관노가 되는 것으로 처결되었다.[1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여기에다가 자칫하면 자기만 망신당하기 쉬울 일이라고 서술했다. 이 짓을 했다가 민망한 사초들만 드러났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12] 한 집안의 형제 5명이 다 장관이나 총리직을 했다는 이야기다.[13] 성종실록 권261 성종 23년 1월 22일 계사 3번째 기사[14] 당시 둘째 형인 이극증과 셋째 형인 이극감은 죽고 없었지만, 제일 큰 형인 이극배가 살아있을 때였다![15] 특히 이조판서가 조선에서 제일 최고의 요직인 이유는, 이조판서를 거친 사람들이 주로 의정부의 삼정승을 많이 했기 때문인데, 이조판서는 삼정승으로 갈 수 있는 주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다.[16] 연산군도 국문하면서 "실록은 직필이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망령되어 허황된 것을 쓴단 말이냐?"라고 했다.[17] 사초를 내오지 않은 것도 보호보다는 이후 다른 사관들이 왕 눈치를 보아 직필을 어려워 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실제로 조선 시대 내내 왕들이 사초를 보고 싶어하면 "전하, 선왕께서는 보지 않았사옵니다."라고 신하들이 저지하기 일쑤였기에, 만일 이번 일로 연산군이 사초를 보면 후대 왕들도 걸핏하면 보려고 들것이 우려된 모양이다. 물론 폐위되었기에 신하들은 더 강력한 스킬을 쥐었겠지만[18] 근데 남이 옥사도 사실은 남이가 자초한 화였다.물론 남이나 구성군 등등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조에게 중용된 공신들(유자광도 여기 출신)을 견제(구성군 이준은 그냥 냅두려고 노력했다.)하려던 예종의 의사가 적용된 것도 맞지만.[19] 사실 유자광은 태생적으로 사림파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출신부터 양반가 자제이며 유학으로 무장한 사림파와, 서자 출신이며 왕 발바닥이나 핥아야만 하는 유자광은 맞을 수가 없었으니, 사이가 안 좋은 건 당연한 일.[20] 유자광은 사림들에게 임사홍과 함께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는데, 복귀에 자그마치 5년이나 걸렸다. 웃기면서도 이상한 건 정작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사림들이 더 목소리 높여서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사실. 그것도 유자광 탄핵시 붙였던 소인이란 호칭까지 붙여가면서 말이다.[21] 성종실록 175권, 성종 16년 2월 4일에 기재되었다.[22] 의금부에서 그의 가족까지 멸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이 그 무고자만 처형하도록 선처했다.[23]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대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단 4명의 군왕만이 1000건이 넘는 검색어가 나오는데, 성종, 연산군, 중종, 그리고 선조이다. 중종이 9천 건이 넘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2천 건이 넘는 성종, 1,500여건의 연산군, 1천 건을 간신히 넘긴 선조로 이어진다. 참고로 세조는 100여 건 정도이고, 태종이나 세종, 재위 기간이 길었던 영조 등은 600여 건 정도이다.[24] 실제로 재위 25년 시점에서는 짜증이 폭발했는지 대사헌이 "요즘 대간의 청을 물리치기만 하니 우려스럽습니다." 라는 불평을 했을 정도다. 성종이 30대 나이로 단명해서 그렇지 제외 말년에 기존과 다른 강경한 행보를 보여준 것을 보면 성종이 어느정도 장수 했으면 후반기에는 다른 행보를 보여줬을지도 모를 일이다[25] 전왕인 예종은 성종과 삼촌관계에 불과했는데 예종의 아들도 따로 있는데데가, 자기보다 연장자인 친형 월산대군도 있는 상황이었다[26] 비록 모후가 폐위되고 사사된 몸이었다고 하나 연산군이 태어났을때는 엄연한 국모였다. 그리고 성종도 이것이 연산군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27] 우선 2대 임금인 정종 이방과와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도 이성계의 적장자가 아니었고, 세종도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이유 역시 단종 이홍위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저 왕자 신분으로 살았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산군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임금이었던 문종은 세종이 사가에 있었을 때 태어났고, 문종의 외동아들이었던 단종은 연산군 즉위 시점에는 반역자로, 폐위 상태였다. 연산군이 태어난 날 임사홍은 "지금까지 세자 저하들이 모두 사저에서 태어나 이런 경사가 없었습니다" 라고 경하를 올렸다.[28] 사실인 것 같다. 연산 10년 이후의 행적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29] 성종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대간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주고 밀어준 게 성종 본인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30] 다리 셋 달린 닭 태어난 것도 왕 잘못이니 반성하라고 대간들은 성종에게 악다구니를 써댔다. 물론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뭐든지 왕탓을 하는 구조긴 했다. 그렇지만 사실 이쯤 되면 연산군이 특별히 까칠한 성격이었다기보다, 성종이 좀 이례적으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지도.[31] 水陸祭. 혹은 수륙재(水陸齋)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 의식이다.[32] 왜 인수대비가 의견을 냈냐면 결심이 서지 않았던 연산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비를 찾아가 의견을 구했기 때문이었다.[33] 물론 인수대비가 이전에도 강력하게 불교를 옹호했기에 잔뜩 긴장했을 수는 있겠다.[34] 연산군일기 권1 연산군 즉위년 12월 26일 신사 5번째 기사[35] 아닌 게 아니라 성종 대에는, 대놓고 요약해보면, 좋은 대간이란 왕이 분노하여 화를 내는데도 그에 굴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온갖 구실로, 엄청난 수위의 비판들이 왕에게 가해졌다. 성종 문서 참조.[36] 停擧. 유생에게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로, 대개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 행위를 하다가 걸릴 때 내리는 벌이었다. 심할 경우 평생 과거를 못 보게 하는 영영정거(永永停擧)가 있었다.[37] 避嫌. 탄핵을 받은 자가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것.[38]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25일 기미 2번째 기사[39]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2번째 기사[40] 반란과 내전은 물론 왕조가 복잡하게 얽힌 유럽에서는 국가간의 전쟁까지 벌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41]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5번째 기사[42]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3일 정미 3번째 기사[43] 관련 사건사고가 몇건 터진다.[44] 생육신으로 이름 높고 육신전을 쓴 남효온이 위에 언급된 소릉 복원 관련해서 중앙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세조효장대왕'이라는 공식 직함은 물론이고, 사육신의 난에 대해서는 '병자년에 여러 간신들이 난을 선동하다가 잇달아 복주(伏誅)되고' 라고 묘사하고 있다. 더구나 남효온은 이름 값은 있어서 여러번 언급이 되지만, 정식관직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유학'이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뒤로는 육신전을 써도 앞으로는 정식 명칭과 정식기록을 따라야 된다.[45]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5번째 기사[46] 연산군일기 권30 연산군 4년 7월 12일 병오 9번째 기사[47] 대명률 기준으로는 장 90대라는 상당한 중형이었다[48] 당연하지만, 이 사실은 안 알린다면 연산군에게 역적으로 찍혀서 일가족과 함께 사형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신세가 된다.[49]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까딱하면 반역죄가 적용될 법한 일인지라 아무리 기가 센 대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나섰다가는 목이 날아갈 우려를 크게 해야만 했다. 다르게 보면 그 대간들조차도 입닥치고 있어야 했을 정도로 일이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50] 실제로 김일손이 그럴 의도로 사용했다. 단종 일 때문에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서 분노를 표출했다는 증언만 봐도 객관적으로 진실을 보고한 셈.[51] 이렇게 노력을 했지만, 표연말과 홍한은 이미 단단히 찍힌 탓에 유배형에 처해져 유배지로 가던 도중 비참하게 객사했고, 사후 갑자사화에도 연루되어서 부관참시를 당한다. 안습.실제로는 안습하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52] 해석하자면, 살아 있을 때 극형에 처해줘도 마땅찮기는 한데 이미 사망한 자의 시신을 건드려봤자 무의미하니 가볍게 처리하자는 의견이다. 어찌됐건 죄를 확연히 인정하고 대차게 규탄하고 있었다.[53] 세조가 실무능력을 위해서 문관들에게 잡학 7학을 가르쳤는데, 이 것을 선비의 일이 아니라 부당한 일이라면서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실무에 대한 가초지식도 없이 어떻게 실무자들을 관리할 수 있을지 답이 안 나온다 꼭 배우기 싫으면 지만 안하면 되지[54] 실제로는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갑자사화 때 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여담이지만 유자광도 그 당시엔 사정이 비슷했다.[55] 중종실록 1507년 6월 11일 기사.[56] 위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김종직이 실제로는 계유정난을 비방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김일손이 그런 목적으로 사초에 올렸는데다가, 김일손의 자백을 감안해보면 객관적으로 진실을 정확하게 보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57] 중종실록 1511년 06월 16일 기사.[58] 이 강겸의 처벌과정이 좀 특이한게 원래 강겸은 참수형이었지만 유자광의 변호로 유배형으로 경감된다 강겸이 김종직의 제자인걸 생각해보면 실록의 유자광이 김종직에 대한 악감정으로 무오사화를 벌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잃게 된다[59] 이런 점들이 사림이 전가보도(傳家寶刀 : 대대로 전해진 귀한 칼)처럼 휘둘렀던, 소인배이니 군자답지 못하다느니 하는 비판이 반대를 위한 반대, 공격을 위한 공격임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런 사례는, 사림은 자신들과 대립하면 소인배라고 비난하며 끌어내리려 한 것이지, 사람됨이나 능력, 학문적 소양 등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옳기는 했다. 노사신의 경우 성종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학문적 소양이야 충분히 검증되었고 자신을 무자비하게 까대던 사림들을 옹호한걸 보면 사람됨도 좋은 편이다. 반면 유자광은 서자 신분에 이런저런 약점으로 인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수 없어서이긴 했지만 왕의 충견 역할에 더럽고 궂은 일 다 도맡아야 했다. 때문에 이런 인물에 대해 좋은 평 남아질 리 만무하다. 학문적으로도 노사신과 비교하면 부족하다. 무재가 있다는 특출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 동양에서 무재는 별 취급 안해주는건 평화로운 시대에선 다 똑같았다. 설령 사림파가 아닌 다른 이들이 평가해도 유자광은 호평을 듣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에도 나오듯이 사림파는 그 전에는 노사신도 간신이라고 비난하며 파직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니 자기네들부터가 내로남불이 심해서 현석규에 대해서 소인이라 비판했다가 임사홍,유자광을 몰아낼때는 현석규를 소인이라 했다고 몰아낸 이들이다.[60] 위에 김일손의 행적을 보면 이 말 꺼낸 거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까딱하면 (더군다나 평소 연산군에게 찍혔다면) "저 자식도 같은 놈입니다!" 라는 얘기가 돌아다녀 결국 김종직, 김일손 꼴이 나거나 정말 낮은 등급으로 처벌 받아도 다시는 벼슬 할 꿈도 못꾸게 되었을 테니. 노사신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평소 사림들에게 간신배란 말을 들을정도로 연산군을 옹호했던덕에 그때나 그 이후나 아무 벌도 받지 않았다는거[61] 다만 강겸은 몇년 뒤 갑자사화 때 능지처사를 당한다.[62]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1월 30일 임술 2번째기사[63] 정확히는 연산군이 폭군으로 전락하면서. 다른 왕의 시대에 벌어졌다면 왕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않았을 사건이다.[64] 국정 운영에 참고하기 위해 실록의 내용을 찾긴 했지만, 임금이 직접 실록을 읽어보는 게 아니라, 사관에게 지시하면 사관이 실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는 형태로 이루어졌다.[65] 이는 이후 사림이 다시 권력을 쥐고, 그것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