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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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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 이름 <colbgcolor=#fff,#191919>조식(曺植)[1]
건중(楗仲)
남명(南冥)[2],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
시호 문정(文貞)
출생 1501년(연산군 7년) 7월 10일 (음력 6월 26일)
조선 경상도 삼가현 토동[3]
사망 1572년(선조 5년) 2월 21일 (음력 2월 8일) (향년 71세)
조선 경상도 산음현 사륜동 산천재[4]
본관 창녕 조씨[5]
부모 부친 - 조언형(1469 ~ 1526)
모친 - 인천 이씨(1476 ~ 1545) - 이국(李菊)의 딸
부인 본처 - 남평 조씨(1500 ~ 1568) - 조수(曺琇)의 딸
측실 - 은진 송씨(1532 ~ 1610) - 송린(宋璘)의 딸
자녀 장남 - 조차산(曺次山, 요절) 남평 조씨 소생
장녀 - 상산 김씨 김행(金行)의 처 남평 조씨 소생
차남(서자) - 조차석(曺次石) 은진 송씨 소생
3남(서자) - 조차마(曺次磨) 은진 송씨 소생
4남(서자) - 조차정(曺次矴) 은진 송씨 소생
차녀(서녀) - 함안 조씨 조신도(趙信道)의 처 은진 송씨 소생
1. 개요2. 생애3. 남명학파의 흥망성쇠4. 퇴계 이황과의 관계5. 여담6. 야사 및 야담7. 대중매체에서8. 관련 자료
8.1. 사이트8.2. 비문8.3. 동영상
9. 관련 문서

1. 개요

[ruby(內明者敬 外斷者義, ruby=내 명 자 경 외 단 자 의)]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
조식이 경의검(敬義劍)에 새긴 검명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산해선생(山海先生)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사림의 계보와 붕당을 설명할 때 서경덕과 함께 북인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의(義)를 철저히 중시하고 현실정치를 강하게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대에는 퇴계 이황율곡 이이에 비견되는 명성을 떨쳤으며, 현대에도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이들에게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6]

2. 생애

연산군 7년(1501) 음력 6월 26일 진시[7] 삼가현 토동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언형이고 모친은 인천 이씨이다.

어릴 때에는 벼슬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한양단천 등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이 시기 유교 경서 이외에도 스스로 제자백가, 불교, 노장사상, 천문, 지리, 의학, 병법,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그러다 25세 때 『성리대전』에 인용된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 허형의 글을 읽게 된다.
[ruby(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 ruby=지 이 윤 지 소 지 학 안 자 지 소 학)]
이윤의 취지를 뜻으로 삼고 안연의 학문을 배움으로 삼아야 한다.

[ruby(出則有爲 處則有守 丈夫當如此, ruby=출 즉 유 위 처 즉 유 수 장 부 당 여 차)]
대장부는 마땅히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퇴처하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

[ruby(出無所爲 處無所守 所志所學將何爲, ruby=출 무 소 위 처 무 소 수 소 지 소 학 장 하 위)]
출사해서 한 것도 없고 퇴처하면서 지조가 없으면 뜻하고 배운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노재유서(魯齋遺書)』 권1, 「어록(語錄) 上」
이 글을 통해 크게 깨달은 이후로 남명은 학문의 방향과 출처[8]을 정하면서 성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남명은 훗날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의 문장이 정자(程子)의 (글쓰는) 방식에 맞지 않음을 염려하여, 평이하고 간결하면서 내실이 있는 책들을 구하다가 비로소 『성리대전』을 읽게 되었다. 어느 날 노재 허형의 말에 이르렀는데 …… 그 글을 읽자 문득 모골이 송연해져서 스스로 성찰하였고 부끄러움에 자신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남명집』 권 2, 「규암 송인수가 준 『대학』의 표지 아래에 쓰다(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
그러면서 일상에서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1쌍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였다. 이러한 내외의 공부를 통해 그는 내면의 수양(敬)과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함께 중시하는 학풍을 함양해 나갔다.

1526년에 부친 조언형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후, 의령자굴산에 머무르다가[9]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의 탄동(炭洞)으로 거처를 옮겼다.[10] 이 시기인 37세 때 낙방한 것을 마지막으로 과거시험을 완전히 단념하여 스스로의 학문에 힘쓰기로 결심하였고[11] 정지린을 시작으로 제자를 기르며 교육 활동에 나섰다. 다음해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서지 않았고, 이후에도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한 번도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현실정치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45세 때 모친 인천 이씨가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후 48세 때 고향인 합천으로 거처를 옮겨 61세 때까지 머물렀다.[12] 이 시기인 1555년 명종이 내린 단성현감 벼슬을 거절하면서 올린 상소문인 「단성소[13]가 조선에 파장을 일으키며 조식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
자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가지 하늘의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
근래 변방에 변이 있어 여러 대부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20년 전에 터졌을 일이 전하의 신무하심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지 하루 아침에 생긴 사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에 재물이 쌓여도 민심은 흩어지고, 끝내는 장수로서 적합한 사람과 성을 지킬 군졸이 없어집니다. 그러니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이 어찌 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일 또한 대마도의 왜놈들이 적과 몰래 결탁하고 앞잡이가 되어 만고의 무궁한 치욕을 끼친 것이고, 왕령(王靈)을 떨치지 못해서 담이 무너지듯 패한 것입니다.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이 주나라의 법보다 엄격하고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송나라보다 더해서야 되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정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의 어느 것이 지금의 일과 같았습니까? ……
전하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 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어느 날 진실로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을 수 있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만 가지 착함이 갖추어지고 백 가지 덕화도 이로 말미암아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균평(均平)하게 할 수 있고 백성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해야 합니다 ……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지극한 이치를 세우도록 하소서. 지극한 이치가 지극한 이치로서의 구실을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살피어 주시옵소서.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 『남명집』 권 2,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당시 서슬시퍼런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한 것을 넘어 "죽여달라" 는 말을 한거나 다름없었다.[14] 친구인 성수침조차 아직 조식의 학문이 원숙하지 못해 이런 과격한 글을 올렸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15] 분개한 명종이 조식을 죽이려 들었지만, "시골무식한 선비를 함부로 죽이면 언로가 막힌다" 하여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명종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단성소」가 올라갔을 때 사관은 조식을 높이며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당시 유일(遺逸: 재야에 은거하면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란 명성에 기대면서 공로와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가 많았다.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절개를 지키면서 초야에 묻혀 있었으나, 난초의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이미 참봉에 임명되고[16]주부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17]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오마(五馬)의 직위[18]에 임명된 것은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수한 (임금의) 은혜가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데도 안빈함을 스스로 즐기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럼에도 조식은 과감하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기에 상소문을 올려 절개를 가지고 항의하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 논하였다. 글이 매우 간절하면서도 뜻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고[19], 풍속과 교화가 왕도정치에 이르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다.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
이같은 조식의 대범한 행동은 할 말 못하고 숨죽이던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다. 그리하여 재야에 있던 그에게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고, 마침내 경상우도 일대에는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의 학풍을 양분한 남명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환갑이 되던 해에 조식은 덕산의 사륜동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10년 동안 강학에 힘썼다.[20] 이 기간 중인 명종 21년(1566), 문정왕후윤원형이 죽은 후 친정을 하던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임훈, 이항, 남언경, 한수(韓修) 등과 함께 상경하여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였으나[21],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사양하고 7일 만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도 즉위 직후부터 조식을 초빙하였으나[22], 그는 그때마다 벼슬을 거절하고 상소로 일관하였다. 이 시기에 적은 상소문 중 선조 1년(1568)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들의 폐해를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도필리(刀筆吏)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밖으로는 백성들을 흩뜨려 열에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가 아닌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니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

조종(祖宗)의 주현 백성들이 바치는 공납을 날다람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누리시는 온 나라의 부(富)가 이들방납한 물자에 의지한 것일 줄 어찌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왕망이나 동탁처럼 간악한 놈들도 이러지는 않았고, 망할 나라의 세상이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러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국고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니 비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도성에는 도적들이 가득합니다.

나라가 한갓 텅 빈 그릇처럼 앙상하게 서 있습니다. 온 조정의 사람들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이들을 쳐야 할 것이며, 힘이 모자라다면 사방에 명령을 내리시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침식의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임금님을 돕게 하시옵소서.
『선조실록』 2권, 선조 1년(1568) 5월 26일자 기사, 『남명집』 권 2, 「무진봉사(戊辰封事)」
「무진봉사」를 올린 해에 남명은 진주에서 일어난 옥사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23] 이 사건은 이정이 죽은 친구 이희안의 첩을 음행죄로 고발한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남명은 사건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휘말렸고[24] 친구였던 이정과 절교하였다.[25] 이 일은 이후 1569년 남명의 제자 각재 하항 등이 사건과 관계된 함안 이씨의 집을 헐어 그들을 쫓아내는 훼가출향을 저지르면서 전국적으로 공론화되었다. 남명 또한 사람들의 구설에 올랐고[26] 자신을 옥사의 배후라 여기는 사건 관련자들로부터의 흉사를 피하기 위해 덕산과 김해를 오가며 지냈다. 이 사건은 남명의 사후 그의 학파가 분열하는 동시에 퇴계학파와의 갈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고[27] 훗날 허목이 쓴 남명의 신도비덕산비의 철거 문제와도 연관되는 등 오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28]

선조 5년(1572) 음력 2월 8일, 덕산의 산천재에서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으로부터 약 2개월 전에 발병한 등창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산 선비라는 뜻의 처사(處士)라고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29], 방의 벽에 붙여두었던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가리키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30] 사망으로부터 두달 뒤인 음력 4월 6일 산천재 뒷산에 장사지냈다.

남명이 죽은 직후 선조는 그에게 제문을 내리면서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에 남명을 영의정에 추증하면서 시호인 문정(文貞)을 내렸다. 후학들은 덕천서원[31], 회산서원[32], 신산서원[33], 백운서원[34]을 세워 스승의 업적을 기렸다. 이후 남명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건의도 몇차례 올라왔지만[35]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다수 참여한 북인의 주도로 지은 『선조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으로, 승문원판교 조언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여 어른처럼 정중하였고 장성하여서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특히 『좌전』과 유종원의 글을 더욱 좋아하였다. 저술에서는 기발하면서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국학에서 선비들에게 시무책을 주문하였을 때 담당 관리에게 올린 글이 여러 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명성이 사림들 간에 크게 알려졌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노재 허형의 '이윤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를 밝히며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귀납되는 취지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라 말하였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학문을 함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리의 오묘함을 궁리하려 한다면, 이는 사람의 일에서 하늘의 이치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마음에는 아무런 실지 소득이 없을 것이니 깊이 경계하여야 한다'라 하였다. 천성이 효도함과 우애에 돈독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우 조환(曺桓)과 숙식을 같이하며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지식이 고명하고 출처진퇴의 도리에 밝아서, 세상의 도의가 쇠퇴하여 현자의 행로가 기구해지자 도를 만회해 보려는 뜻을 두었으나 끝내 때를 못 만났음을 알고 시골로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만년에는 두류산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를 지어 산천재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중종 임금 때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 임금 때 초야에서 은거하는 선비들을 등용하고자 할 때 천거되어 여러 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상서원판관으로 불러들여져 대전에서 임금을 대하였는데, 임금이 치란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묻자 '군신 간의 인정과 의리가 서로 믿게 된 연후라야 잘 다스릴 수 있고, 임금의 학문은 반드시 자득해야 하는 것이므로 남의 말만 들으면 무익합니다' 말하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임금께서 보위를 이으신 후 교서로 불렀으나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상소문을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전첨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신미년에 흉년이 크게 들어 임금께서 곡식을 하사하자 사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였다.

임신년에 병이 심해지자 임금께서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제사를 내려주고 곡식을 내려 부의하였으며, 사간원 대사간으로 추증하였다. 친구들과 제자 수백 명이 사방에서 찾아와 조상하고 우리 학문을 위하여 애통해 하였다.

조식은 도량이 맑고 고결했으며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말과 글은 재기가 번뜩여 마치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이들이 남명선생이라 불렀고,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북인 세력이 몰락한 후, 서인남인이 주축이 되어 지은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이며, 그 선대는 창녕 사람으로 합천의 삼가현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호방하고 용감하여 잗단 예법에 구애받지 않아 스스로 그 재주를 과시하는가 하면 문장은 기이하면서도 예스럽고 고아함을 지향했는데, 내심 과거 급제나 공명(功名)은 손쉽게 이룰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중 일찍이 친구와 『성리대전』을 읽다가 노재 허형이 말한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며, 세상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들어앉으면 절조를 지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겨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 실학에 뜻을 독실히 하였으며 아울러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그만두었다.

일찍이 서울에 갔다가 성수침을 방문했는데 그가 백악산 밑에 집을 짓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은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와 벗이 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다. 취사(取捨)를 함부로 하지 않아 남을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고,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자 사욕과 잡념이 깨끗이 씻겨져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여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치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봤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는데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명종 때 이항과 함께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매우 소략하게 대답하였다. 물러나 이항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그대는 가장 우두머리 도적이고 나는 다음가는 도적이다. 우리같은 도적은 남의 집 담장을 뚫는 부류가 아니겠는가"라 농담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하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청백한 이름이 더 한층 소문이 났다.

임금께서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나자 임금께서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졸하였다. 나이는 72세였다. 조정 대신이 시호를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은 대신, 대사헌에 추증하고 부의로 쓸 물품들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준 것은 없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이들의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참동계』를 자못 즐겨 보면서 좋은 곳이 매우 많아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있다고 했고, 또 석씨의 최고 경지는 우리 유가와 일반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두고 학인들에게 보였는데, 임종할 때 문인에게 "이 두 글자는 해와 달처럼 폐할 수 없다"라 하였다. 조식의 저서는 없고 약간의 시와 글들만 세상에 나돌 뿐인데, 학자들이 남명선생이라 불렀다.

3. 남명학파의 흥망성쇠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남명학파는 경상좌도의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의 학풍을 양분하였다.[36]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던 퇴계학파와 달리, 남명학파는 성리학의 실천과 의(義)를 중시하는 학풍으로 유명했다. 그런 남명학파의 주요 인물로는 오건[37], 정인홍, 최영경[38], 김우옹[39], 곽재우[40], 정구[41], 김우굉[42], 정탁[43], 김면, 이산해, 김효원 등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수제자인 '남명오현(南冥五賢)'으로는 오건, 정인홍, 김우옹, 최영경, 정구가 꼽힌다.

한편 영남지역에서는 남명과 퇴계를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성은 판이했지만 두 사람이 학자로서 워낙 이름이 높다보니 생겨난 현상이었다. 남명과 퇴계는 서로를 비판하면서 생전에 만나본 일도 없었지만 상호 간에 문하생이 오가는 것에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렇듯 두 사람에게서 공동으로 수학한 사람들로는 오건, 정구, 김우옹, 김우굉, 정탁, 김면, 이산해, 김효원, 이광우[44], 오운[45], 문익성 등이 있었다.

조식이 죽고 3년 후 동서 분당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들은 서경덕, 이황의 학맥과 함께 동인으로 모여 서인과 대립했다. 하지만 조식 학맥과 이황 학맥 간에는 스승들의 라이벌 관계로 인한 잠재적인 갈등 요소들이 몇 있는 상태였다. 이후 동인들은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피해를 많이 입은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46]은 옥사 당시 서인의 공세를 막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황의 문인들에게 불만이 높았다. 이러한 갈등들이 누적된 상태에서 2년이 흐르고, 옥사를 지휘한 정철건저문제로 실각하자 동인 세력은 그의 처리 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이때 정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던 조식의 문인들과 서경덕의 일부 문인들은 북인, 온건한 처벌을 주장했던 이황의 문인들은 남인에 다수 참여했다.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47], 곽재우, 김면[48] 등 남명의 제자 50여명과 손제자들, 그리고 남명의 영향을 받아 그를 사숙하던 사람들은 근거지인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을 크게 일으켜 명성을 떨쳤다.[49] 이는 생전에 일본을 매우 경계하였던 스승 남명의 영향이 컸다. 남명학파가 주축을 이룬 경상우도의 의병들은 보급로의 차단 및 후방 교란 등의 활동으로 일본군의 전략에 차질을 주었고, 진주대첩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며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는 등 나라를 구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남명의 제자들이 많이 소속된 북인 세력은 조정에서 세력을 넓혀갔고 마침내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류성룡을 실각시키면서 집권당이 되었다. 그리고 북인이 영창대군의 계승 문제를 놓고 대북소북으로 분열하였을 때 정인홍은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그럴 때 『퇴계집』의 초간이 간행되었고, 그 문집 속에 실린 퇴계가 남명을 비판한 글들이 알려졌다. 이에 정인홍은 스승을 추존하는 동시에 스승의 학문을 비판하고 이단시한 퇴계학파에 맞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이 간행되었고[50] 정인홍은 「발남명집설」[51]과 「정맥고풍변」[52] 및 「변척소」[53] 등의 글을 지어 이황을 맹비난하였다. 이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 간의 인식 차이와 라이벌 의식, 퇴계가 스승 남명을 학문적으로 이단시하고 비판한 것에 대한 분노, 그런 내용이 실린 퇴계의 문집과 퇴계학파의 인식에 대응하여 스승과 학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태도 등이 복합된 결과였다.

스승을 추존하고 학파의 명예를 지키려 한 정인홍의 의도는 좋았지만 이황을 비판한 글의 내용이 과격했던 탓에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발남명집설」로 인해 동문이었던 정인홍과 정구가 절교하면서 남명학파에 분열이 일어났다. 애초에 남명학파는 실천을 중시하고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는 학풍으로 인해 퇴계학파나 율곡학파에 비해 학술적인 구심점이 미약했고, 정구와 같이 남명학파이면서 퇴계학파인 사람들도 꽤 많았기에 이러한 분열은 남명학파에 뼈아픈 일이었다. 뒤이어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에 종사된 이듬해에 올라간 「회퇴변척소」는 정인홍의 이름이 『청금록』에서 삭제되고 대북 세력이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북 세력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문제를 놓고 다시 골북, 중북, 육북으로 분열되는 사태까지 맞이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남명학파는 대북세력의 사상적 기반이라는 이유로 정인홍이 참수되는 등 큰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경상우도 지역에 대한 영향력 또한 크게 축소되었다. 이후 낙동강 하류 지역의 남명학파는 중북정온, 박인, 임진부, 하홍도, 조임도 등을 중심으로 그나마 학맥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식의 영향으로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던 경향성이 정인홍의 처형 이후 더욱 강해졌고, 집권 세력의 정치적 탄압 등을 방지하기 위해 조상의 문집에서 정인홍과 관련된 기록과 흔적을 없애거나 왜곡하는 등 그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기에 이르렀다.

정구 계열의 남명학파는 죽은 스승이 오래 전에 정인홍과 절교한 후였기에 정치적 박해는 피했으나 학문적으로는 퇴계학과 타협하였다. 그 결과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는 정구의 한강학파와 장현광의 여헌학파가 득세하더니[54] 점차 자신들의 사승연원에서 남명을 배제하고 퇴계만을 강조하였다.[55] 그래도 정구 계열을 통해 전승된 남명의 박람한 학풍은 훗날 성호 이익 등과 같은 근기남인의 사상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남명의 종친들과 일부 남명학파가 서인-노론화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이는 서인에게 접근하여 남명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와 남명의 학문을 이단시했던 퇴계에 대한 반발심리가 결합한 결과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집권 서인들도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우암 송시열이 남명의 신도비문을 짓는 등 많은 공을 들였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상우도 지역에는 노론 계열의 가문들도 상당히 많아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남명학파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경상우도에는 다른 지역의 여러 학맥들이 들어와 남명학파의 공백을 채우게 된다. 19세기를 기준으로 영남남인한주 이진상[56]한주학파전라도노사 기정진을 중심으로 한 노사학파, 근기남인성재 허전[57]의 학파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경상우도 지역에 잔존한 남명학파의 명맥은 면면히 이어졌다. 17~18세기에는 서계 박태무가 남명학파를 계승하여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19세기에는 조식-하항-하수일-하홍도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한 월촌 하달홍기정진 등과 학문을 주고받으며 남명학파를 이어갔다. 하지만 다른 학파들과는 달리 이것이 지속되지 못하고 남명학파는 사실상 명맥만 이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남는다.

이러한 풍파를 겪으며, 민중들에게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퇴계나 율곡과는 달리 남명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도는 학자들과 현재의 경상남도 일대를 제외하면 크게 낮아졌다. 그러다 1970년대에 동양철학자 김충렬을 통해 남명과 그의 사상이 재조명되었고, 이후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퇴계 이황과의 관계

남명과 퇴계는 동갑내기에 같은 경상도 출신으로, 사망한 시기도 1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둘을 두고 동도동경(同道同庚)의 인연이라 불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생전에 서로 한 번도 만나는 일 없이[58] 서신만 주고받으면서 일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기질과 문체, 출처관, 학문관 등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기질 면에서 퇴계가 온후한 문사였다면, 별명이 '선비'였던 남명은 상무적인 호걸풍이었다. 그래서 퇴계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거나 신중한 경우가 많은데 비해 남명의 행동은 분명하고 단호하였다.[59] 이는 문체에서도 반영되었다. 퇴계가 이후의 순후한 문체를 즐겨 쓴 데 비해, 남명은 『춘추좌씨전』이나 유종원의 글과 같은 남성적 문체인 고문을 좋아하였다.[60]

이러한 기질의 차이는 대외 관계를 보는 시각과 대처에도 반영되었는데, 특히 일본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컸다. 사량진 왜변 이후 대마도 측에서 다시 교류를 요청해왔을 때 퇴계는 이에 찬성하는 상소[61]를 올렸고, 조정의 명으로 무로마치 막부쇼군과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답서들[62]을 쓰기도 하였다. 반면 대일강경론자였던 남명은 「단성소」에서 일본에 단호히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고, 군대군량을 넉넉히 하여 국방을 강화할 것을 역설[63]했으며, 제자들을 교육하면서 왜구를 방비할 대책을 내는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출처관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었다. 퇴계가 벼슬을 여럿 지냈음에도 학문 이론을 중시하고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면, 남명은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벼슬은 멀리 해도 현실정치의 비판에는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출처관의 차이를 드러내는 서신들[64]이 오고간 적이 있었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기도 하였다.[65]

학문 면에서는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난다. 퇴계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했다면, 남명은 성리학의 이론이 이미 염락제현(濂洛諸賢)[66]을 통해 다 갖추어졌으므로 남은 것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67]을 통한 학문적 실천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격이나 현실인식 외에도 서로가 계승한 학풍의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명이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의 학풍을 계승한 반면 퇴계는 이들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이언적의 학풍을 계승하였기 때문이었다.[68]

두 사람의 이러한 인식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퇴계와 기대승 간에 벌어진 사단칠정논변이었다. 사람들이 이 논쟁의 내용에 주목했다면 남명은 이 논쟁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1561년에 퇴계의 제자 성재 금난수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퇴계에게 자신의 당부를 대신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퇴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그대는 호남의 여러 유생들퇴계성리를 논변한 내용을 보았는가. 옛 현인들이 (성리를) 논하여 분석하신 것들이 지극하고 뒷사람들은 그에 훨씬 못 미쳐서, 그 분들의 말씀을 깊이 탐구할지라도 그 말씀을 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네. 옛 현인들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성리의 학문을 고담준론하며 탐구하는 것이 나는 옳은 것인지 모르겠네.
비록 사람들이 (성리학의 이론을) 묻더라도 퇴계가 제지하는 것이 옳네. 퇴계가 그리 한다고 해도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네. 누군가는 나에게도 (퇴계처럼) 그리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옛 현인의 말씀에 착수하지도 못했거늘 어느 겨를에 성리를 논하겠는가. 그대는 이 말을 퇴계에게 고하게.[69]
『성재일기』, 「신유년」 4월 18일
하지만 사단칠정논변이 그 이후에도 몇 년에 걸쳐 계속되자, 1564년 남명은 퇴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니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 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
『남명집』 권 4,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與退溪書)」
기본도 서있지 않은 당시 유생들이 사단칠정논쟁으로 아는 척만 하며 헛바람이 든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퇴계의 책임을 거론하는 편지를 제자 오건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요즘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을 자세히 보니,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 씌운 것 같은 모습이 고질이 되었네. 온 세상이 그러하여서 혹세무민하는데 급급하니 비록 큰 현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구제할 수 없을 지경일세. 이는 실로 우리 학문종장인 분이 상달(上達)만을 주장하고 하학(下學)을 궁구하지 않아서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이 되었기 때문이네. 내 일찍이 서신을 통해 논란을 주고받았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네. 공은 지금 이 폐단이 수습하기 어려운 것임을 몰라서는 아니되네.
『남명집』 권 2, 「오건에게 보내는 편지(與吳子强書)」
남명이 성리학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퇴계를 비판하였다면, 퇴계는 주로 성리학의 순수성이라는 입장에서 남명을 비판하였다. 퇴계가 이단이라 생각되는 을 배척한 반면 남명은 노장사상을 비롯한 제자백가와 불교, 도교의 내단학, 병법 등 여러 학문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주로 그가 노장사상을 좋아했던 것에 집중되었다. "우리 학문에 의리가 투철하지 못하고 의 빌미(老莊爲祟)가 있다"[70], "그 논설의 광탕현막(曠蕩玄邈)함은 노장의 책에서도 보지 못했다"[71], "장주의 견해에서 한층 더 나아갔다, 남화의 학문을 주창한다"[72]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퇴계는 남명의 성정이나 호방한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남명의 사람됨을 두고 "고상하고 뻣뻣한 사람(高抗之士)"[73]이라고 평한 일, 조식이 쓴 글에 대한 독후감에서 다른 사람의 조식에 대한 평을 빌려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여 중도를 지키기 어렵다"[74]라고 쓴 일, 남명이 자신의 출사 권유를 거절하자 "학문에 공을 들인 것이 아니므로 일에서 진취한 것이 없다"[75]라고 폄하하며 뒤끝을 부린 일, 「단성소」를 두고 "남명이 비록 스스로 성리학으로 자부하지만 사실은 기이한 선비일 뿐이라. 그 논의와 식견은 매양 새롭고 기이한 것을 높이 여기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논의에만 힘쓰니 이 어찌 도리를 아는 사람이겠는가?"[76]라고 논한 일, 진주에서 옥사가 일어나자 이정에게 "친구 사이에 그만한 일을 가지고 절교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77]를 보내며 남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던 일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78]

학문에서의 차이는 독서와 저술의 차이로도 연결된다. 퇴계는 독서를 할 때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데 신경을 썼지만, 남명은 경전의 큰 줄기를 파악하면서 자신에게 절실한 부분을 받아들일 뿐 난해하거나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강 지나가는 타입이었다.[79]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 중점을 둔 퇴계가 경전에 자세한 주석을 달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였다면,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에 중점을 둔 남명은 경전에서 긴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뽑아 독서노트인 『학기유편(學記類篇)』을 만들었고, 굳이 저술을 하더라도 퇴계의 『성학십도』에 비해 간결하고 전투적인 수양방식을 제시한 『신명사도(神明舍圖)』를 짓는 정도에 그칠 뿐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제자들을 교육하는 방법도 서로 달랐다. 퇴계가 제자들에게 경전의 세세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강론하는데 힘쓴 반면 남명은 제자들이 경전의 내용을 스스로 체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80] 그랬기에 남명과 퇴계를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던 정구는 선조의 앞에서 두 사람의 학문하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비교하였다.
이황은 도량이 너그럽고 실천에 독실하며, 공부는 순수하면서 깊이가 있고 순서가 분명하니 배우는 사람이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조식은 도량이 엄정하고 재기는 호매하며 초연히 자득하여 우뚝 서 자기 갈 길을 가니, 배우는 사람이 요령을 잡기 어렵습니다.
『여헌집』 권 13, 「한강선생행장」, 『공백당집』 권 5, 「성현기상집설」
훗날 퇴계가 죽었을 때, 남명은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겠구나!"[81]라고 하면서도, 퇴계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대신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82]라 쓰게 했다는 말을 듣자, "퇴계는 이 묘호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평생동안 벼슬하지 않은 우리같은 사람도 은자라고 하기에 부끄럽거늘"이라 하였다고.[83] 어찌보면 대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랄까.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세 이후 퇴계가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나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모두 영남 땅으로, 상도(上道: 경상좌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 경상우도)에서는 의(義)를 주장하여 유학의 교화와 기개 그리고 절조가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다. 우리 문화의 빛은 여기서 극에 달하였다.
『성호사설』 권 1, 「천지문(天地門)」
이성무 前 국사편찬위원장이 남명과 퇴계의 관계를 정리한 논문도 있으니 참고해보자.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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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야사 및 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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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중매체에서

7.1.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개정 이후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는 그의 일대기가 소개되기도 했으며 첫 머리부터 그가 지은 「단성소」가 나온다.
  • 그가 지은 시조로 알려진 두류산 양단수를이 간혹 국어 교과서 고전문학 단원이나 문제지에 수록되기도 한다.

7.2. 소설

  •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단역으로 잠시 등장한다. 조식이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의 차지(윤원형의 하인을 부르는 이름)가 무리한 대우를 요구하며 시비를 걸자 조식이 아랫사람을 시켜서 차지를 혼쭐낸다. 이후 차지가 윤원형에게 이 일을 고하며 '자신을 영남 조 판관이라 한 자에게 당했다'라고 말하자 윤원형은 '조식이구나. 그 자는 나도 꺼리는데 네가 잘못 걸렸다.'라고 달래준다. 이는 야사 및 야담 문서에 언급된 『백야기문』의 야담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7.3. 만화

  • 홍명희의 소설을 만화화한 이두호의 『임꺽정』에서는 조식에 대한 묘사가 추가된다. 조식이 '어디 백주 대낮에 윤원형의 개가 사람을 무느냐!'라고 호통을 치자 차지가 막 주먹질을 하려는 찰나, 임꺽정이 나타나서 차지를 제압하고 조식을 구해준다. 그런데 그 차지는 과거 임꺽정의 친구인 마빡 김달평이었고 서로의 정체를 안 뒤 술을 마시며 오해를 푼다. 이후 김달평이 이 일을 윤원형에게 고하고 조식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은 소설과 동일하다.
  • 팬텀 하록웹툰 포천에서는 이시경의 도움으로 정도령 일파의 습격에서 벗어난다. 이때 자신의 남은 수명을 이시경에게 물었고, 그로부터 고희, 망팔(71세)은 살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외에 위에서 언급된 퇴계 이황과의 관계가 간단명료하게 묘사되었다. 또한 같은 작가가 그린 조식의 일대기를 다룬 브랜드 웹툰인 칼과 방울이 연재되었다.

8. 관련 자료

8.1. 사이트

8.2. 비문

  • 면우 곽종석이 지은 묘비문 - 원문, 관련 논문
    이진상의 문인인 곽종석이 지은 묘비문으로, 1912년에 완성되었다. 남명과 관련된 비문 중 그 내용이 가장 상세하나, 일부 내용을 두고 면우와 남명의 후손 간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묘비가 세워지지는 못했다.
  • 용주 조경이 지은 신도비문 - 원문, 해석, 관련 논문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후손들은 정인홍이 비문을 지은 남명의 신도비를 철거하면서 이를 대신하기 위한 신도비문을 조경, 허목, 송시열, 김상헌 등에게 의뢰하였다. 조경이 지은 신도비문에서는 남명과 퇴계 사이의 갈등을 최대한 무마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신도비가 세워진 적은 없다.
  •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문 - 원문, 해석
    용주 조경과 마찬가지로 인조반정 이후 남명 후손들의 의뢰로 지어졌다.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신도비가 덕산에 세워져 '덕산비'라고도 하였으나, 앞서 이야기한 논란으로 인해 1926년에 헐려서 묻혔다.
  •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문 - 원문, 해석, 관련 논문
    조경, 허목과 마찬가지로 인조반정 이후 남명 후손들의 의뢰로 지어졌다. 전체적으로 허목의 신도비문보다 그 내용이 자세하다. 이 비문을 바탕으로 한 신도비는 남명의 고향인 합천에 세워졌는데, 덕산에는 이미 허목의 비문을 바탕으로 세워진 신도비(덕산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덕산비가 1926년에 헐리면서 합천에 있는 신도비와는 별개로 이 비문을 새긴 새로운 신도비가 덕산에 세워진다.

8.3. 동영상

  • 조선 성리학의 라이벌: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KBS 역사의 라이벌 1995. 9. 2
  • 조식이 지리산에 열두번 오른 까닭은, KBS 역사스페셜 2000. 7. 22
  • 조선 선비 갈림길에 서다, KTV 국민방송 2010. 2. 23.[84]
  • 선비 칼을 차다: 남명 조식, KBS 학자의 고향 2011. 1. 16
  • 책을 뚫고 현실로 나아가라 - 남명 조식, KBS 역사스페셜 2012. 7. 5
  • 남명 조식의 신명사도 강의, 홍익학당 2012. 11. 17
  • 선비의 발자취 '남명 조식', 천지매거진 2013. 2. 7
  • 국회 인문학 아카데미 5회 남명 조식, 대한민국 국회 2014. 12. 1
  • 남명의 생애와 삶의 방식,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2014. 12. 18
  • 청비이공 선비열전 21강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 청년선비포럼 20 2017. 9. 4
  • 남명 조식, 대전방송 추석특선다큐 01 02 2017. 10
  • 남명 조식과 남명학, 상생방송 도심과 인심 01 02 2018. 4. 18 ~ 4. 27
  •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도올 TV 01 02 2019. 9. 4 ~ 9. 5
  • 남명 조식의 남명집과 현대인의 삶, 범어도서관 01 02 2020. 12. 6
  •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과 남명의 후학, 성천문화재단 2022. 10. 28

9. 관련 문서


사림파
士林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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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사대부(온건파)
고려말
( ~ 1392)
길재 김진양 김충한 민안부 신덕린
우현보 원천석 이색 이숭인 정몽주
성종 - 중종
(1469 ~ 1544)
기준 김굉필 김식 김일손 김정
김종직 정여창 조광조 권경유 안당
인종 - 명종
(1544 ~ 1567)
신광한 서경덕 이언적 이황 조식
성세창 성수침 류희춘 이언침 김인후
대윤 소윤
유관 윤임 권벌 류인숙 정순붕
선조
(1544 ~ 1575)
기대승 노수신 성혼 이이 백인걸
온건파 강경파
박순 심의겸 김성일 김효원 류성룡
윤두수 정철 이산해 정인홍 허엽
서인 동인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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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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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파
선조
(1575 ~ 1591)
서경덕 조식 이황 허엽 신중엄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김우옹 김효원
정여립 허봉
온건파 강경파
김성일 류성룡 정인홍 이산해 이발
우성전 이원익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허성 이덕형
남인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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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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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
선조
(1591 ~ 1608)
서경덕 조식 최영경 정인홍 이산해
김면 이발 홍여순 곽재우 이이첨
대북 (광해군파) 소북 (영창대군파)
정인홍 이산해 정구 류영경 박승종
홍여순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남이공
광해군
(1608 ~ 1623)
대북
육북 중북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정구 곽재우
허균 기준격 정창연 류몽인 정온
대북 소북
골북 청북 (남당) 탁북 (유당)
홍여순 류희분 남이공 김신국 류영경
인조
(1623 ~ 1649)
남이공 김신국 정온 정창연 김세렴
남인 서인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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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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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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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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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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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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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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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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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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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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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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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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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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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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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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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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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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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성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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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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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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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중국 삼국시대조식(曹植)과 성씨의 획 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의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됐었다. 사실 과거 문헌에도 두 글자는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2] 기록에 따라서는 남명(南溟)이라 적혀있기도 하다. 여러 호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 명칭의 출처는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으로, 대붕이 날아가는 곳이다. 조식은 젊어서부터 노장사상의 글을 좋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의 이름을 『장자』에서 따오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에 퇴계 이황으로부터 "노장의 빌미가 있다"라는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된다.[3]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487. 외조부 이국(李菊)의 고향으로, 남명조식선생생가지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어 있다. 이 마을은 지금도 인천 이씨 집성촌이다.[4]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394. 그의 묘소도 이곳 뒷산에 있다. 이 마을은 지금도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5] 문정공파 파조다.[6] 진주를 비롯한 서부 경남지역에서 이런 경향이 더 짙다. 진주에 자리잡은 경상국립대학교는 주기적으로 학회도 열고 남명학관이라는 건물도 지어놓는 등 남명 사상의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경상남도에서도 2020년 『경상남도사』를 편찬할 때 문화사를 다룬 제 8권에서 경남의 시대별 선비문화와는 별도로 남명과 그의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거나 『남명집』의 정본화 작업에 예산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7] 육십갑자로 환산하면 신유을미임인갑진시(辛酉年 乙未月 壬寅日 甲辰時)이다. 그가 태어난 날이 임인일임은 제자 정인홍이 쓴 남명의 행장신도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태어난 날의 『조선왕조실록』 기사한국천문연구원천문우주지식정보 음양력변환계산을 통해서도 교차검증된다. 또한 그가 태어난 시간은 제자 김우옹이 쓴 남명의 행장에 나온 "선생은 홍치 신유년 6월 26일 진시생(先生以弘治辛酉六月二十六日辰時生)"이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8] 여기서의 출처란, 벼슬에 나아가는 출(出)과 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퇴처하는 처(處)를 합친 것으로, 달리 출처진퇴(出處進退)라고도 한다. 남명의 출처관은 앞서 인용한 노재 허형의 글 중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出則有爲 處則有守)"로 요약된다. 남명은 허형의 글에서 깨달음을 얻어 학문관과 출처관을 확립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허형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말한 출처관에서 벗어났다 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다.[9] 자굴산의 명경대에 있는 절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남명은 명경대를 예찬한 를 남긴 적도 있다. 하지만 현재는 명경대의 위치가 잊혀졌기 때문에 남명이 머무른 곳도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가 자굴산에 머물렀던 것 자체는 확실하므로, 현재 의령군에서는 이곳에 남명숨길을 지정하였다.[10] 관련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위치한 산해정(山海亭)이 있다. 이외에 유적은 아니지만 같은 도시의 삼정동에는 2008년에 설치한 조식의 동상이 있다.[11] 『남명집』 권 4, 「행장(行狀)」, "가정 정유년, 선생의 나이 37세 때 비로소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버리고 우리 학문에 한 뜻을 두었다(嘉靖丁酉。先生年三十七。始斷棄擧業。一意吾學。)"[12] 관련 유적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쳤던 뇌룡정(雷龍亭)이 있는데, 이름의 유래는 『장자』에 나오는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친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라는 구절이다. 인근에 계부당(鷄伏堂)이란 거처용 건물도 지었지만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이곳 외에도 합천군에서는 삼가면에 남명 조식과 연고가 있는 장소들을 중심으로 '남명 조식 선비길'을 조성해놓았는데, 관련된 곳들은 해당 동영상 참고.[13] 본래 이름은 '단성 현감의 벼슬을 거절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란 뜻인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인데, 이 상소문을 쓴 해가 을묘년(1555)이었으므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도 부른다. 상소 자체는 대단한 명문으로 그 날선 비판은 요즘 정치판에 대입해도 싱크로율이 잘 맞아서 선거철이 되면 회자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14] 요즘으로 치면 명예훼손죄, 모욕죄, 정통법 위반에 해당된다. 즉 걸고 넘어지면 처벌을 피할 수가 없다.[15] 『연려실기술』 권 11, 「명종조고사본말」, 성수침 또한 과 뜻이 같아 서로 사이가 좋았다. 청강 이제신이 두 선생께서 서로 존중하는 뜻을 (성수침의 아들인) 우계 성혼에게 물으니, 성혼은 "아버지께서 「단성소」를 보시고는 '(글의) 날카로움이 크게 드러났다' 하시며 '오래도록 건중과 떨어져 사는 동안 (사람들이) 그가 크게 진보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고 이야기하던데, 의 기세가 이와 같다면 (학문이) 오히려 미진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 하였다(成守琛亦與公同志相善。李濟臣問兩先生相推重之意於成渾。渾曰。家公見南溟丹城疏則。鋒銳太發露。乃曰久與楗中違離。謂其大進已混成果。如此辭氣則猶未盡耶。)[16] 중종 33년(1538)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던 일을 말한다.[17] 명종 3년(1548)과 명종 6년(1551), 명종 8년(1553)에 각각 전생서 주부와 종부시 주부, 사도시와 예빈시의 주부에 임명된 일을 말한다.[18] 태수의 이칭으로, 태수의 수레에는 사두마차(駟馬)에 말 1필을 더하였기에 오마(五馬)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서는 수령의 이칭으로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조식이 「단성소」를 쓴 계기가 된 단성현감의 직위가 내려진 것을 뜻한다.[19] 원문에서는 明新之地라 하였는데, 이는 『대학』 첫 머리에 나오는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는 구절을 이야기한 것이다.[20]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61세부터 남명이 별세하는 72세까지 머물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사리의 산천재(山天齋)와 남명의 무덤 등이 있고, 인근의 원리에는 덕천서원(德川書院) 등이 있다. 이 시천면 일대에 있는 조식 관련 유적지들은 통칭 산청 조식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21]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22] 즉위한 1567년만 해도 11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그를 부르는 교서를 내렸고, 그 후 1570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벼슬을 내렸다.[23] 이 옥사를 다룬 논문 01, 02, 03, 04[24]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은 이 사건을 김해 부사 양희에게 인계하였고, 양희는 사위 정인홍을 통해 남명에게 자문을 얻고자 했다. 남명은 이정과 이희안 두 사람 모두와 친구였으므로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때 남명은 "이정이 이희안 집안의 일을 고발한 것은 하종악의 후처이자 자신의 인척인 함안 이씨의 음행을 감추기 위함이다"라고 증언하였다(여담으로 하종악의 전처는 남명의 형의 딸이었는데, 이를 두고 남명이 조카를 위해 의도적으로 함안 이씨를 모함한 것이 아니냐는 풍설도 함께 떠돌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록된 저술이 유희춘의 『미암일기초』이다. 참고로 유희춘의 부인은 하종악의 후처 함안 이씨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이로 인해 수사는 이희안의 첩에서 함안 이씨에게로 전환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혐의로 끝났다.[25] 제자 정탁과 오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명은 "이정이 이 문제에 대해 3차례나 말을 번복하였다"는 취지로 주장하였고, 이정 측은 이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이 갈등은 두 사람의 자손 간에도 계속되어, 이정의 손자 이곤변이 『졸변(拙辨)』이란 글을 지어 남명을 비판하고 남명의 손자 조준명이 『반변(反辨)』이란 글을 지어 반박하였다. 다만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졸변』과 『반변』 원문[26] 퇴계의 제자인 기대승이 "함안 이씨 사건과 훼가출향 사건 모두 조식이 떠들어서 생긴 일"이라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27] 진주에서의 옥사와 관련하여 퇴계가 이정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 편지에는 이황이 조식을 폄하하는 내용이 실렸고, 이러한 이황의 조식에 대한 인식은 퇴계학파를 통해 사림의 여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1600년에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자, 정인홍은 1604년 『남명집』을 간행할 때 이황을 비난하는 「발남명집설」이라는 글을 짓고 이를 『남명집』의 발문으로 삼으며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인홍은 동문인 정구와 갈등을 빚는다. 남명과 퇴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수학한 정구가 「발남명집설」을 『남명집』의 발문으로 삼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감정싸움 끝에 절교하면서 남명학파는 분열에 이른다.[28]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후손들은 정인홍이 비문을 쓴 남명의 신도비를 철거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명망가들에게 새로 세울 신도비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이때 남인 측에서 비문을 부탁받은 사람 중 하나가 남명의 제자 한강 정구의 학맥을 이은 미수 허목이었다.
그러나 허목은 남명보다는 이정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생 허의가 이정의 손자 이곤변의 손녀사위라는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었고 허목 그 자신도 구암의 문집을 편집하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허목은 위 사건과 관련하여 남명과 이정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논쟁에서도 이정의 편을 들었고, 이런 심리가 반영된 탓에 그가 쓴 조식의 신도비문도 송시열이 쓴 조식의 신도비문에 비해 그 내용이 조금 상세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남명의 후손들은 내심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목의 문집인 『미수기언(眉叟記言)』이 간행될 때 그 안에 수록된 「답학자서(答學者書)」라는 글에서 허목이 남명과 정인홍을 비판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에 19세기 말부터 남명의 후손들과 노론계 학자들이 덕산비의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1926년에 이르러 남명의 후손들은 덕산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었다. 남인계열의 후손들은 조식의 후손들을 성토하면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3심에서 법원이 조식 후손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덕산비는 다시 서지 못했다. 현재 남명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비문을 쓴 것만 세워져있고, 덕산비는 행방이 묘연한 채 비석받침인 귀부만 남아있다. 관련된 내용을 다룬 논문
[29]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김우옹이 "만약에 돌아가신다면 스승님을 무엇이라 칭해야 마땅할까요?"라고 묻자, 남명이 말했다. "처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나의 평생 뜻이다. 만약 처사라고 하지 않고 관직으로 나를 칭한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宇顒請曰。萬一不諱。當以何號稱先生乎。曰。用處士。可也。此吾平生之志。若不用此而稱爵。是棄我也。)"[30]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벽에 써놓은 경의(敬義) 두 글자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여기에 숙달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 되면 마음 속에 무엇 하나 걸림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書壁敬義二字。極切要云云。學者要在用工熟。熟則無一物在胸中。吾未到這境界以死矣。)"[31] 조식이 말년에 은거한 산청군 시천면에 있으며, 1576년에 세워지고 1609년에 사액되었다. 정조 때에는 번암 채제공이 이곳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32] 본래는 1576년 조식의 고향인 합천군 삼가현에 세워진 서원으로, 회현(晦峴) 아래 세워져서 회현서원이라고도 하였다. 회산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서 1601년에 인근의 황강에 있는 향천서원으로 옮겨졌고, 이곳이 1609년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용암서원도 덕천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서원이 있던 터가 1987년 합천댐 공사로 수몰되자 2007년 뇌룡정 옆의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33]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소재. 본래 이곳은 산해정이라 하였는데, 조식은 김해에 머무르던 48세 때까지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8년 산해정의 동쪽에 서원을 짓다가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던 것을 1609년 완공하면서 신산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덕천서원, 용암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이후 일부가 복원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 전체가 복원되었다.[34] 북한산 백운봉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1616년에 건립되어 같은 해에 사액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35] 1616년 진주의 생원 하인상을 시작으로 영남에서 7번, 충청에서 8번, 호남에서 4번, 성균관의 사부학당에서 12번, 개성홍문관, 사간원사헌부에서 각각 한 번씩 조식의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36] 그래서 남명학파를 달리 일컬을 때에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쪽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여 강우학파(江右學派)라고도 했고, 퇴계학파는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하여 강좌학파(江左學派)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좌우의 기준은 한양에 있는 국왕의 시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37] 조식 이외에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오건이 쓴 남명의 제문[38] 1589년에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정여립과 친밀하다고 알려진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옥사하였다.[39] 호는 동강(東岡)으로, 한강 정구와 더불어 남명 문하에서 양강(兩岡)이라 부른 인물이다. 본래 조식의 수제자인 덕계 오건의 제자로 24세 때 조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고, 이후 그로부터 방울인 성성자를 물려받았다. 27세 때 이황에게 나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지만, 조식의 문하에 출입한 세월이 더 길었기에 그 자신도 임금 앞에서 조식의 문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는 조식의 큰외손녀 사위이기도 한데, 이 혼인은 그의 부친인 칠봉 김희삼과 친구였던 조식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40] 조식의 둘째 외손녀 사위이다. 즉 김우옹과는 동서지간. 16세(1567년) 때 남명의 제자가 되어 『논어』를 배웠다.[41] 13세(1555년) 때 종이모부인 덕계 오건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21세(1563년)에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24세(1566년) 때 남명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호가 한강(寒岡)이라서 동강 김우옹과 함께 남명 문하에서는 양강(兩岡)으로 알려졌다.[42] 동강 김우옹의 형으로 호는 개암(開巖)이다.[43] 17세(1542년) 때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고, 36세(1561년)에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했을 때 인근의 덕산으로 거처를 옮긴 남명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44] 호는 죽각(竹閣). 승려 성철의 10대조이다. 백부인 청향당 이원에게서 글을 배웠고, 이후 백부의 친구인 조식의 제자가 되었다. 참고로 이원의 아들, 즉 이광우에게는 사촌형이 되는 이광곤 또한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산청에는 이원과 이광우, 조식, 이황을 모시는 배산서원이 있는데, 이곳은 본디 이원과 이광우를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면우 곽종석의 제자 진암 이병헌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진다. 참고로 복설된 배산서원은 한때 캉유웨이가 주창한 공자교 운동의 지부였는데, 이는 이병헌이 공자교 운동을 공부하여 국내에 도입하려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현재 이곳에는 캉유웨이의 친필을 새긴 배산서당 현판이 걸려있다.[45] 19세에 남명의 제자가 되었고, 25세 때 퇴계의 문하로 들어갔다. 또한 오운은 퇴계와 인척지간인데, 조부 오언의의 아내가 퇴계의 사촌누이이고 장인 허사렴은 퇴계의 처남이기 때문이다.[46] 이 옥사의 희생자 중 이발은 서경덕의 학맥인 민순의 문인이었고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희생된 최영경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 중 1명이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 호남과 서부 영남의 인물들로 분류되는데 실제로 이 두 지역의 동인들이 기축옥사 당시 많이 희생되었다.[47] 동아일보 1986년 5월 17일 참고. 당시 정인홍의 나이는 60살이 넘은 상태였다. 환갑이면 묫자리 알아보러 다니던 그 시대에 그것도 왜군의 초입 루트였던 영남에서 의병을 지휘했으니 그 불같은 성품을 짐작할수 있다.[48] 임진왜란 시기 고령 지역의 의병운동과 의미, 임진왜란(디지털 고령 문화대전)[49] 상기된 정인홍, 곽재우, 김면 외에 남명의 제자 및 그 계열로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은 전치원, 이대기, 변옥희, 박경신, 오장, 문경호, 이로, 조종도, 여대로, 노순, 노흠, 문위, 하락, 이정, 오운, 전유룡, 배기수, 정대방, 강희, 배명원, 배형원, 박인량, 진극원, 박이현, 박이장, 정인함, 조의민, 하혼, 권제, 이승, 이현우, 최여설, 김신옥, 전팔급, 전팔고, 강렴, 이칭, 문덕수, 곽율, 정유명, 이욱, 김경근, 정경운, 박여량, 김대명, 유중룡, 박경인, 곽준, 유명개 등이 있다. 이들이 일으킨 의병의 숫자가 모두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병 활동이 조금 줄어든 1593년 1월 11일의 기록에 따르면 정인홍, 곽재우, 김면 세 사람이 이끄는 의병의 숫자는 각각 3000명, 2000명, 5000명으로 도합 1만에 이르렀다.[50] 참고로 『남명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1602년이었다. 하지만 해인사에서 만들어진 이 판본이 얼마 안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1604년에 재간행본이 나왔고, 재간행본의 오탈자를 수정한 판본이 1609년에 나왔다.[51] 원문해석. 1603~1604년 즈음에 쓰인 이 글은 달리 「남명선생과 구암 이정의 절교사(南冥先生與李龜巖絶交事)」라고도 한다. 진주에서 옥사가 일어났을 때 이황이 이정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지어진 글이다.[52] 원문 01, 원문 02, 번역 01, 번역 02, 관련 기사. 1606년에 쓰인 글이다.[53] 『광해군일기(정초본)』 39권, 광해 3년 3월 26일 병인 5번째 기사. 1611년에 쓰였다.[54] 정구 본인은 남명의 제자였고, 조카사위이자 제자인 장현광도 그 인연으로 남명학파의 문인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큰 타격을 입은 남명학파의 문인 중 이러한 학연을 통하여 한강학파와 여헌학파에 학맥을 옮긴 사람도 많았다.[55] 정구 본인은 정인홍과 절교한 후에도 자신이 남명의 제자임을 강조했으나 미수 허목 이후로부터 이러한 경향성을 보였다. 참조논문[56]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주리론을 연구하여 44세 때에 '심즉리설'을 주장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왕수인이 주장한 심즉리와는 다른 이발일로(理發一路)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허나 '심즉리설'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당시 퇴계 학맥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았고 사망 이후에 발행되어 각지에 보내진 그의 문집은 반환되거나 심지어 상주 지방처럼 문집이 태워진 일도 있었다.
그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8명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 불렀는데 이들 가운데 대계 이승희면우 곽종석이 유명하다.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는 고종의 강제 퇴위를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러시아중국을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병사했고, 곽종석은 스승의 심즉리설에 쏟아지는 비판을 반박하는 한편 제자인 심산 김창숙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국내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파리 장서 사건을 일으켰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두 사람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57] 다만 남명학파의 학문도 계승하기는 했고, 본인은 자신의 학문을 남명학파의 계승이라 보았다.[58] 다만 1569년 서울의 장의동에서 열린 박태수라는 사람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되어 수연첩(壽宴帖)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이때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59] 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퇴계가 학생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앞강에서는 진상품인 은어가 많이 잡혔다. 관에서 은어잡이를 하는 기간이 되면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상계(上溪)에 있는 자택으로 철수하곤 하였다. 혹여나 왕에게 진상할 물고기에 손을 댄다고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심하기 위한 태도였다. 퇴계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남명은 웃으며 "어찌 그리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는가?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관청에서 은어 잡는 통발을 놓았든 말든 무엇을 꺼리고 피한단 말인가?"라 이야기하였다고 전해진다. 출전은 『학봉선생문집속집』 권 5,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60] 이러한 문체의 차이에 대해 남명은 말년에 "퇴계의 문장은 오늘날의 문체이나 성취된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문체)는 비단을 짜다가 한 필을 다 못 짠 것이므로 세상에 쓰이기 곤란하고, 퇴계(의 문체)는 명주를 짜서 한 필을 이루었으므로 세상에 쓰일 만하다."라고 평했다.(출처: 『남명집』 권 4, 「행록(行錄)」)
퇴계 또한 남명의 문체를 성품과 연결지어 평가한 일이 있었다. 한번은 친구 구암 이정이 남명에게는 부친의 묘비문을 부탁하고 퇴계에게는 묘비에 새길 글자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때 묘비문의 글자를 쓰기 위해 남명이 쓴 비문을 읽은 퇴계는 '예스럽고 기개가 높으나 격식을 따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요지로 평하면서 이를 "산림이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즉 남명의 세상을 꺼리는 성품이 그의 고문 문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긴 것이다.(출처: 『퇴계집』 권 21, 「답이강이(答李剛而)」)
[61] 『퇴계집』 권 5,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조선이 여진족들과 틈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남북으로 적을 만들 수 없고, 왜구가 침공하는 동남 지방은 공물이 나오는 곳이니, 대마도와 강화하고 그들을 왕도 정치로 포용하면서 피해를 줄이자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62] 『퇴계집』 권 8, 「예조답대마도주종성장(禮曹答對馬島主宗盛長)」, 『퇴계집』 권 8, 「예조답일본국좌무위대장군원의청(禮曹答日本國左武衛將軍源義淸)」[63] 『남명집(정유본)』 권 3, 「오건과 정탁에게 답함(答吳子强鄭子精)」. "나라의 큰일은 군대와 군량을 넉넉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國之大事 不過兵食)"라는 대목이 그것이다.[64] 명종 3년(1548)과 명종 6년(1551), 명종 8년(1553)에 조식이 종부시와 전생서, 사도시와 예빈시의 주부(정 6품) 벼슬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성균관 대사성에 취임했던 이황은 명종 8년(1553) 조식에게 벼슬하러 나올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이 그대를 몰라주는 것도 아니요, 임금이 어진 인재를 기다리니 벼슬할 때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대의 출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식은 "나는 매우 몽매함에도 헛된 이름을 얻은 사람이라 벼슬에 나갈 수 없고, 눈병을 얻어 사물을 볼 수 없으니, 발운산(撥雲散: 안약의 일종)이 있으면 좀 보내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발운산이라는 비유법과 반어법으로 '지금이 벼슬을 할 시국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면서 퇴계의 처신과 시국을 보는 안목을 은근히 비판하는 뜻이었다.
그러자 퇴계는 "나도 당귀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그대에게 발운산을 구해 줄 수 있겠소"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황 자신도 지금은 벼슬을 할 시국이 아니라고 여겨서 향리로 물러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조식 당신의 처신을 어떻게 충고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참고자료
그러나 한편으로 남명에게 이런 답장을 받은 것이 기분이 나빴는지, 퇴계는 이후 홍인우에게 이 답장을 보여주고 "(남명은) 학문에서 공을 들인 것이 아니므로 일에서 진취한 것이 없다"며 뒷담화를 하는 뒤끝을 부리기도 했다.
[65] 남명이 주로 출처관으로 인물의 평을 하였다면, 퇴계는 출처관 외에도 다른 여러 종합적인 측면을 같이 봐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때문에 두 사람의 평이 갈린 대표적인 인물로 포은 정몽주점필재 김종직, 회재 이언적이 있었다.[66] 북송-남송 시대에 성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을 나타낼 때 쓰는 말로, 대개 북송시대의 주돈이, 정호(명도), 정이(이천), 장재(횡거), 소옹(강절)(이상의 5명을 '북송오자'라 칭함)과 남송의 주희가 여기에 포함된다. 염(濂)은 주돈이의 호가 염계(濂溪)인 동시에 말년의 거처가 여산 연화동의 염계서원(濂溪書院)이었던 데서 유래되었고, 락(洛)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를 지칭하는 말로 그들이 강학하던 곳이 낙양이었기에 그리 불렀다. 이들 염락제현은 달리 염락관민(濂洛關閩)이라고도 하는데, 관(關)은 관중지역에서 학맥을 형성하던 장횡거를, 민(閩)은 복건성에서 제자를 길러냈던 주희를 지칭한다.[67]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고도 한다. 출전은 『논어』 「헌문편」. 직역하면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일상생활의 일들로부터 배워나가면서 마침내는 궁극적인 이치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상생활로부터 학문을 시작하기 위해 조식이 중시한 책은 『소학』이었는데, 이는 조식만의 특징이 아니라 그의 선배학자들인 김굉필조광조 등의 학풍이기도 하였다.[68] 공교롭게도 이언적에 대한 남명과 퇴계 두 사람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남명이 출처관에 따라 이언적을 못마땅하게 여긴 반면 퇴계는 성리학의 학문적 심화라는 요인 때문에 그를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그들의 사후 생전의 소소한 갈등들과 함께 엮여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소」로까지 이어졌다.[69] 又曰有欲告退溪者矣。君見湖南諸生與退溪辨論性理之說乎。前賢論釋至矣盡矣。後生不及於前賢遠矣。尋究前賢之言。而行之力不足焉。不求行前賢之言。而尋高論性理之學。吾不知其可也。問者雖問。退溪則止之可也。退溪亦爲之。吾所不取。或請余亦爲之。吾於前賢之言。未得着手。何暇更論性理乎。君以是告退溪。[70] 『퇴계집』 권 19, 「답황중거(答黃仲擧)」 中, "조건중의 사람됨을 논하건대 그 또한 핵심으로 들어가면 의리에 투철하지 못하네. (성운과 조식과 같은) 이런 사람들은 노장의 빌미가 있기에 우리 학문에 힘을 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니 하물며 투철하지 못한 것이 어찌 괴이하겠는가. 요점은 그 장점을 취하면 될 뿐이네(其所論曹楗仲之爲人。亦正中其實矣。其於義理未透。此等人多是老莊爲祟。用工於吾學。例不深邃。何怪其未透耶。要當取所長耳。)"

1558년 퇴계가 금계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서 언급된 빌미 는 '귀신의 재앙을 입다'라는 뜻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퇴계가 남명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단이라 여긴다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 이에 남명과 퇴계 두 사람 모두의 제자였던 개암 김우굉은 퇴계에게 강한 항의성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러자 퇴계는 김우굉에게 "떠도는 말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기어코 이처럼 기력을 소비하며 이야기할 일이오? 보통 사람은 다른 이에게 감히 오만한 말을 하고나면 비록 음흉한 성품을 가졌을지라도 뽐낸 연후에는 반드시 그치게 되어 있소. 로 말하자면 텅 비고 남들보다 뒤떨어진 것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살펴보아도 가장 아래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매우 잘 아오. 그래서 평생을 감히 상대방을 억누르고 나를 드높이며 세상을 업신여기고 사람들을 능멸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거늘, 하물며 성인의 말을 빌려 스스로 뻣뻣해하며 감히 다른 사람을 배척했겠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지 않았거늘 하물며 남명에게 그랬겠소? 근래에 이런 말이 없었는데 좌우의 높은 의리로 또 어찌 말을 만들어서 남에게 알릴 까닭이 있겠소?"라는 장황한 내용의 답장을 써서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였다. 하지만 퇴계의 사후에 간행된 그의 문집에 황준량에게 보낸 위의 "노장의 빌미" 운운하는 서신이 실리면서 김우굉에게 적은 퇴계의 변명과 발뺌은 거짓말임이 증명되었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된 김우굉의 항의성 서신은 『성호사설』에 적혀있는데, 여기에는 '하유의 평(下惟之評)'과 '미순의 논(未醇之論)' 운운하는 위와는 전혀 다른 퇴계의 답장이 실려있다. 왜냐하면 『성호사설』에 적힌 퇴계의 그 답장은 애초에 김우굉이 아니라 황준량에게 보낸 또 다른 서신이었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을 쓰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인지, 아니면 퇴계의 거짓말과 그에 대한 논란을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서로 다른 글을 의도적으로 바꿔치기한 것인지는 불명이다.
[71] 『퇴계집』 권 20, 「답황중거(答黃仲擧)」 中, "「계부당명(雞伏堂銘)」을 기록하여 보여준 것은 매우 고맙네. 다만 그 내용이 끝없이 넓고 아득한 것은 노장의 책 중에서도 본 적이 없네. 배운 적이 없으니 어찌 감히 의논하겠는가. 그의 사람됨은 본래 평범하지 않은데 그 학문 또한 배우기가 어렵군(雞伏堂銘。深荷錄示。但其說曠蕩玄邈。雖於老莊書中。亦所未見。旣未嘗學。焉敢議及。其人固非尋常。而其學又難學也。)"

「계부당명」, 즉 남명이 그린 『신명사도』에 붙은 해설인 「신명사명(神明舍銘)」을 본 퇴계의 소감이다.
[72] 『퇴도선생언행록』 권 5, 「숭정학(崇正學)」 中[73] 『퇴계집』 권 7, 「걸퇴차자(乞退箚子)」 中, "이 보기에 조식은 고상하고 뻣뻣한 선비라 본디 세상의 어지러운 일에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고, 이항은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편벽되이 벼슬하지 않음을 높이 여기지는 않았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또한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왕 때 두 사람 다 명을 받고 (한양에) 왔지만, 조식은 잠시 입대하더니 달아나 산으로 돌아갔고, 이항은 명을 받아 벼슬에 나섰다가 수년 후에 돌아갔으니 두 사람의 같지 않음이 이와 같습니다(以臣觀之。曹植高抗之士。本不欲屈首風塵中。李恆。從事學問之人。非偏以不仕爲高。二人心跡。亦不同也。是以。在先王朝。雖皆嘗應命而至。植則纔入對。卽遁去還山。恆受命出守。數年而後歸。其不同如此。)"

1569년에 퇴계가 쓴 글이다. '고상하고 뻣뻣한 선비'라는 뜻의 高抗之士의 경우, 다른 기록들 중에는 高亢之士라고 표현된 경우도 있다.
[74] 『퇴계집』 권 43, 「서조남명유두류록(書曹南冥遊頭流錄後)」, 조남명의 『유두류록』을 보니 유람하며 탐구한 것 이외에도 일들마다 의미를 덧붙였고 분격하고 격앙하는 글이 많아서 사람들을 늠름하게 만드니 마치 그 사람됨을 생각하게 한다. "(곡식을 키우는데 열흘을 차게 하고) 하루만 따뜻이 해주면 아무 소용이 없다"거나 "위로 향하고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발 하나를 움직이는데 달려있다"는 말은 지극히 옳은 말이다. 이른바 명철한 사람이 다행하냐 불행하냐라는 말은 진실로 천고의 영웅도 탄식을 발하게 하고 으슥한 곳에 있는 귀신도 울게 만든다. 간혹 그가 기이함을 숭상하고 좋아하여 중도를 요구하기 어렵다고 의심하는 자도 있다. 아, 자고로 산림에 사는 선비는 이런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 않다면 (남명은) 남명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절박기미함이 온 바를 조금 알 수 없는 곳이 있지만 이는 후세 사람들이 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曹南冥遊頭流錄。觀其遊歷探討之外。隨事寓意。多感憤激昂之辭。使人凜凜猶可想見其爲人。其曰一曝之無益。曰向上趨下只在一擧足之間。皆至論也。而所謂明哲之幸不幸等語。眞可以發千古英雄之歎。而泣鬼神於冥冥中矣。或以其尙奇好異。難要以中道爲疑者。噫。自古山林之士。類多如此。不如此。不足以爲南冥矣。若其節拍氣味所從來。有些子不可知處。斯則後之人必有能辨之者。嘉靖庚申孟春。眞城後人景浩。書于溪上書舍。)[75] 『치재유고』 권 2, 「일록초(日錄鈔)」, 17일 경호 공을 만나뵈었는데 조건중이 답한 서신나(홍인우)에게 보여주셨다. 내가 "이 사람을 흠모한지 몇 년 되었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학문이 진보하여 덕을 이루었다더군요. 지금 이 답서를 보니 기분대로 말하는 것을 면치 못한 듯합니다"라 하자, 경호께서 "그러하다. 사람들은 남명을 절개있고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리 학문에서 공을 들인 것이 아니므로 일에서 진취한 것이 없다"라 하셨다(十七日。往拜景浩公。以曹楗仲答書示余。余曰。此人歆慕有年。已謂學就德成。今看此文字。恐不免有氣上語。公曰。然。人多謂狷介高尙底人。非問學上恁地做工夫。故無進就事業。)[76] 『퇴도선생언행록』 권 5, 「기선생논인물(記先生論人物)」 中[77] 『퇴계집』 권 22, 「답이강이 경오(答李剛而 庚午)」, "조군은 세상에 뛰어나 높은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그 사람됨이 필시 세상으로부터 우뚝하고 깨끗이 벗어나서 천하만물이 그의 마음을 얽맬 수 없다고 생각하였소. 고을의 한 아낙네가 도의에 벗어난 행동을 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는 한낱 조그만 티끌처럼 더러운 일이오. 이 사람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고 하여도 마땅히 귀를 씻고 듣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늘 이를 위해 스스로를 폄하하고 높은 절개를 손상시켜서 사람들과 시비를 다투며 심기를 소모하는 것이 몇 년이 되고도 그칠줄 모르니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소(曹君有高世重名。意謂其人必亭亭物表。皎皎霞外。天下萬物。無足以攖其心者。彼鄕里一婦失行與否。是何等一塵穢事。使斯人而遇說此事。宜若洗耳而不聞。乃爲之自貶損高節。與人爭是非。費盡心機。至於積年。而猶不知止。誠所未曉。)"[78] 전술했듯 남명에 대한 퇴계의 이러한 비판들은 훗날 정인홍이 「발남명집설」과 「정맥고풍변」, 「회퇴변척소」 등의 글을 통해 이황을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79] 이러한 남명의 독서 스타일과 비슷한 방식은 제갈량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남명은 출처관에 있어서는 제갈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80] 『내암집』 권 12, 「남명조선생행장(南冥曺先生行狀)」, 배움에서는 스스로 체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 "책과 문자에만 기대어 의리를 밝히고 강론하는 사람은 실제로 얻는 것이 없어서 끝내는 쓰일 수 없다. 마음으로 체득한 것은 비록 입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배우는 사람은 말 잘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 그리고 "도시의 큰 시장을 마음껏 노닐다보면 금은보배며 노리개까지 없는 것이 없는데, 종일토록 거리를 오르내리며 그 가격을 말해본들 (사지 않은 물건들은) 자기 물건이 아니다. (사지 않은 물건의 가격을 이야기해본들) 내가 쓰는 베 1필을 갖고 가서 이를 팔아다가 생선 한 마리 사는 것만 못하다.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이 성리를 고담준론하지만 스스로에게 얻는 것은 없는데, 이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말씀하셨다(學必以自得爲貴曰。徒靠冊字上講明義理而無實得者。終不見受用。得之於心。口苟難言。學者不以能言爲貴。…… 又曰遨遊於通都大市中。金銀珍玩。靡所不有。盡日上下街衢而談其價。終非自家家裏物。却不如用吾一匹布。買取一尾魚來也。今之學者。高談性理而無得於己。何以異此。)[81] 『성호사설』 권 9, 「인사문(人事門)」, 경오년에 남명이 퇴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기를 "같은 해에 나고 같은 지역에 살았지만 70년을 서로 보지 못했는데 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이 사람가고 없으니 하니 나도 갈 것이로다!"라 말하였다(庚午南冥聞退溪之卒。悲悼流涕曰。生同年居同道。七十年未相見。豈非命也。斯人云亾。吾其逝矣夫。).[82] 퇴도만은(退陶晩隱)이란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자'라는 의미이고, 진성은 이황의 본관이다. 즉 "도산으로 물러난 만년의 은자 이황의 묘"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83] 『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연려실기술』 권 18, 「선조조고사본말」[84] 해당 영상의 31:32~35:30 사이에 간략하게 남명과 퇴계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