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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士林派조선 초기 훈구파와 대립했던 정치 세력.
2. 역사
주의: 본 문단에 쓰여 있는 내용은 현재는 모두 논박된 옛 학설들에 기반한 평가이며, 하단의 2000년대 이후 학설 문단에서 설명하는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다.2.1. 사림 등장 전
한족에 유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중국의 문물을 들여 올 때, 불교, 도교와 함께 함께 수용했다. 다만 삼국시대에는 유교는 오직 지배층만의 학문이었고, 유불선 중에 한민족 내에서 가장 먼저 수용되고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불교였기에 불교에 밀려서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래도 삼국 중에서는 신라가 유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1]이후,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자, 신라의 한반도에서 유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왕실은 진골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하여 독서삼품과을 시행하려고 하는 등, 왕권을 키우는데 유교를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6두품들은 진골귀족들에 의한 차별을 자신들의 학식수준을 높여서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신라에게 강대국 당나라의 선진제도인 과거제라는 좋은 본보기가 있었음으로 그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전역에서는 아직도 불교의 세가 강했고, 신라불교의 중심축이었던 교종이 신라귀족들 편을 들었으므로 왕실과 6두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라말에 6두품도 유교가 아닌 불교의 선종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를 불렸으며, 유교는 자신을 수양하는 도구로 쓰였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6두품과 호족들에 의하여 유교가 한반도에 널리 퍼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선종 불교를 중심으로 세를 키운 호족들 중에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하고 고려를 세웠다. 고려가 세워진 이후, 고려의 왕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를 계속 들여오려고 했다. 고려 초중기에 유교를 들여와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대표적인 왕에는 광종과 성종이 있는데, 특히 광종은 쌍기를 받아들여서 우리민족사에 과거제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문제는 고려의 유학자들이 상당히 사대주의적이고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이고, 유교로 인하여 왕권은 안정화되었지만 유교가 강해질수록 고려의 상무정신은 파괴되어 갔다. 삼국 중에 유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신라의 영향으로, 고려 초중기 유학자들 다수가 옛 신라의 지역[2]에서 유래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유학자들이 강해질수록 신라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한반도에서 유학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신정권시기다. 무신정권의 원인이 되었던 문벌귀족들은 국교인 교종 불교를 믿으면서 대토지와 음서로 권력을 유지했는데, 문벌귀족을 박살내고 집권한 무신들 입장에서는 이게 참으로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무신정권은 문벌귀족의 힘을 줄이기 위하여, 교종을 탄압하고 선종을 우대하는 한편,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유학자들을 등용한다.
그리고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생기고 이 성리학을 고려의 유학자들이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사림이 생겨날 토대가 분명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대몽항쟁기에서 고려가 지고 무신정권 또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붕괴했지만, 무신정권기에 급속히 성장한 불교의 선종과 유교의 성리학자들은 고려말, 공민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함께 계속 발전했다.
2.2. 고려 말
고려말, 원간섭기에 권문세족이 고려인들을 착취하듯, 고려의 불교 또한 부패하여 국민들을 착취했다. 원나라의 국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원나라와 다루가치도 고려의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고, 오히려 원나라의 불교가 고려의 불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3] 그리고 불교는 대몽항쟁기에 원나라에 저항했던 것들을 잊은 듯이 권문세족들과 함께 백성들을 착취했다.불교를 믿을 수 없게 된 고려 왕실은 성리학자들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충선왕은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격상시켜 유학을 중시하겠다는 의중을 대놓고 드러냈으며, 공민왕은 유학을 국시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시도했다. 고려말의 성리학자인 이색과 정몽주는 훗날 조선 유교의 기틀이 될 성리학 공교육제도를 완비해 나갔다.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시해로 난항을 겪기도 했지만, 권문세족이 애국자들과 겨레의 공적이 된 이상 정권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고, 권문세족과 불교가 함께 그 위상을 잃으면서 자연히 유교세력이 강해졌다.
국가 중심의 관학파들이 훗날 훈구파가 되고 지방세력의 사학파들이 훗날 사림파가 된다. 이 관학파들의 근간은 기호지방이었고, 사학파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근간으로 했다.[4] 관학파들은 실리주의를 중심이었고 사학파는 원리주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원리주의자의 중심인 정몽주는 근왕적 성향이 강해서 고려를 존치하려는 성향이 강했고 관학파의 중심인 정도전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성리학국가를 새우는 것을 선호했다.
결국 이방원이 온건파 사대부로 분류되던 정몽주를 죽이고 급진파 사대부로 분류되던 정도전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것으로 관학파가 신생왕국 조선의 정권을 잡게 되었고, 고려 충성파 사대부는 지방으로 돌아가 사학에 힘쓰니, 집권자들은 훗날 훈구파가 되었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학파들은 사림파가 되었다.
2.3. 조선 전기
조선 초, 조선의 역사를 정치로 이해하려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공부하면 된다.고려 말의 정치투쟁에서 관학파가 승리한 뒤, 관학파는 새 나라를 성립시키는 것을 반대한 모두를 쫓아내고 조선을 성립했다. 고려가 멸망하는 것이 확정되던 무렵부터 관학파의 독주에 반감을 가지거나 고려왕조에 충성하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이 건국된 이후, 온건 관학파, 고려 충성파, 사학파 등 고려를 수호하는데 실패하고 정치권력을 모두 잃은 자들은 지방으로 퍼져 제자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들이 사림들이 된다.
조선 극 초기에 사림들 중에서는 아직도 고려왕조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조선정부에 협조하지 않고 제자를 육성하는데에 몰두했다. 지방으로 내려간 유학자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이었고, 지방의 학품은 성리학으로 경도되었다. 지방으로 내려가고서 제자를 양성할 여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중소지주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지원없이도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을 후학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사림들이 지방에서 제자양성에 몰두하고 있을 때, 관학파들은 국가개혁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과정에서 절대왕권과 재상중심 정치라는 분명한 견해 차이로 서로 충돌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관학파의 수장이었던 정도전을 이방원이 숙청함으로서 관학파들의 중심을 잃기도 했다. 세종대왕이라는 겨레사상 최고의 명군 아래서, 관학파는 모든 역량을 다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전성기는 문종시기까지 이어졌는데, 성리학만 중요시해서 훗날 조선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깎아먹은 사림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여러 지식을 실용적으로 썼기 때문에, 국가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계유정난으로 극렬한 왕실 충성파들이 세조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다른 관학파들을 절멸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차지한다. 이 충성파들을 훈구파라고 부르며, 이 훈구파의 행태로 인하여, 관학파는 상당수의 인재를 상실했고, 이 여파로 '관학파'라는 파벌의 존속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이 시기부터 관학파를 훈구파라고 부른다.)
관학파가 약해진 덕분에 사림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온다. 훈구파는 다른 관학파가 있을 때는 왕실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했고, 세조 또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이 필요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훈구대신들은 반정공신으로서 매우 부패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세조 이후의 왕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마침 세대교체가 계속되면서 이미 사라져버린 고려 왕실에 끝까지 충심을 버리지 않는 학자들은 후학을 양성한 채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어느새 완전히 한반도에 정착한 조선 왕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자 후대 사림들은 조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한양으로 올라와 출사하기 시작했다. 훈구입장에서는 이들이 권력적으로 위협을 한다고 느꼈고, 사화를 일으켜 사림들을 계속 박해했다. 하지만 관학파의 숫자는 계속 줄어드는 데 반해, 계속 쫓아내고 죽여도 지방에서 계속 제자를 양성해서 서울로 올려보내는 사림은 계속된 사화에도 물량을 유지했다.
결국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훈구파의 안하무인이 심해지자 중종대에서는 왕실에서 직접 나서서 사림들을 직접 등용하니, 조광조가 조정에 출사한 것도 이 때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숙청당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후퇴하지 않았고, 훈구파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었다.[5]
결국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에서는 숙청을 진행한 권신들 내에도 사림들이 섞여 있을 정도로[6] 훈구파의 세력이 줄어들어 있었다. 결국 훈구파는 자연스럽게 소멸[7]했으며, 선조시기부터는 사림들이 독주하게 되었다.
3. 2000년대 이후의 학설
국사교과서에서 사림이라는 개념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한 온건개혁파 사대부의 제자 혹은 그 후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리학 사상에 전념하며 향촌 자치를 추구하다가 성종 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이다. 그리고 조정에 진출한 지방 출신 사림들은 언론 삼사에 포진해 훈구세력과 대립하며 국왕권 강화에 일조했다고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이같이 명확한 개념 정의에 비해, 실록에서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는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 설명처럼 고려 말 온건개혁파의 후예로서 중앙정계에 등장한 일군의 개혁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이같이 명확한 개념 정의에 비해, 실록에서 등장하는 사림이라는 용어는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서 설명처럼 고려 말 온건개혁파의 후예로서 중앙정계에 등장한 일군의 개혁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에 어려울 때가 많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도학정치를 주장하는 관료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유교적 이상 못지않게, 지배층으로서의 현실적 존재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기존 연구에서 사림의 사회적 성격을 경제적, 혈통적 공통성을 이용해서 파악하고자 한 바 있으나, 사림을 단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도덕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집단’이나 학문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위의 기존의 학계 통설과 다른 시각을 내놓은 것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 및 한국학 교수 에드워드 윌렛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8]로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훈구와 사림의 사회 경제적 배경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림의 성격에서 훈구와 사림의 차이는 정치적 이념 정도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문화유씨가정보와 같은 족보 분석, 토지 소유 등을 연구한 결과 등을 통해 훈구와 사림으로 대표되던 기존 세력이 사실 혈족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경제적으로도 기반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며 기존의 훈구-사림 대립 논쟁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훈구파의 존재 자체가 학계에서 사림과 대비되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상황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사림의 등장은 세조의 계유정난 이후 불안정했던 왕위 교체로 인해 왕권의 위상과 정통성이 추락하면서 언론 역할을 담당하던 삼사 대간직의 위상이 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론이라는 이름으로 사대부들의 여론이 결집이 되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훈척 또한 이러한 불안정한 왕위 교체기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한 척신으로 대표되는 왕의 측근세력이었고[9] 사림은 이 과정에서 대간에게 집중되던 언론 기능이 지역 유생들까지도 상소를 올리며 언로가 확되되면서 정체성이 확장되었던 것이다.
4. 사림파 인물
| 사림파 士林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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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고구려는 연개소문시기에 불교를 견제하기 위하여 도교를 선택했었고, 백제는 불교신앙이 강해서 다른 신앙은 유지되지 못했다.[2] 대부분은 경상도지역[3] 고려말에 새워진 석탑 중 10층 석탑들은 원나라양식을 받아들인 것이다.[4] 그로 인하여 기호지방, 경상도는 조선시대 내내 유림들이 강세였던 지역이 된다. 그리고 구한말에 조선과 유림에 실망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나 기독교도가 되었고, 6.25 전쟁로 공산주의자가 일소되면서 개신교 강세지역이 된다. 다만 경상도 + 강원도는 불교 강세지역이다. 역사의 아이러니.[5] 개혁파라고 알려져있는 조광조의 성리학에 대한 집착은 과히 광적인 수준인데, 사림의 패악질은 이미 예고된 사항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겠다.[6] 정순붕은 조광조 계열 사림파 출신이고 임백령은 박상 계열 사림파 출신이다.[7] 대부분 서인에 흡수되었다고 한다.[8] 1924~2001,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시조격으로 불리며 자료 수집과 분석 등에서 한국사 연구 방법에 발전을 가져다 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9] 이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왕이 중종으로 측근세력이 반정공신->조광조->남곤->김안로->윤임과 윤원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듯 측근은 훈구와 사림을 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