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8 14:41:23

원천석

元天錫
1330년(충숙왕 17년) ~ ?

1. 개요2. 일생3. 학문 업적
3.1. 시문3.2. 《야사》
4. 등장 매체5. 여담

1. 개요

고려조선초의 학자.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2. 일생

고려 말에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낸 원열(元悅)의 손자,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원윤적(元允迪)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부터 학문에 밝았으며 1360년(공민왕 9)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목은 이색과 교류하며 유학의 발전에 힘썼다.

조선 태종 이방원을 어린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이방원이 즉위하자 원천석을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원천석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백의(白衣)를 입고 서울로 와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주고 돌아갔으며,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후세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곁에 있다.

원주시 행구동에 묘소가 있으며 호저면 산현리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3. 학문 업적

3.1. 시문

원천석의 시문들을 모은 문집으로 《운곡시사 耘谷詩史》가 있다.
[ruby(興亡,ruby=흥망)]이 [ruby(有數,ruby=유수)]ᄒᆞ니 [ruby(滿月臺,ruby=만월대)]도 [ruby(秋草,ruby=추초)]ㅣ로다
[ruby(五百年,ruby=오백년)] [ruby(王業,ruby=왕업)]이 [ruby(牧笛,ruby=목적)]에 부쳐시니
[ruby(夕陽,ruby=석양)]에 지나ᄂᆞᆫ [ruby(客,ruby=객)]이 눈물 계워 ᄒᆞᄃᆞ라
고려의 멸망을 탄식하는 회고가(懷古歌)가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 등등의 시조집에 실려 유명하며 가곡으로는 이삭대엽(二數大葉)으로 불렸다. 최영을 기리는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冢宰六道都統使崔瑩〉이라는 시와 우왕창왕신돈의 자식이라 속여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만든 것을 한탄하는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라는 시가 있다. 후자는 만일 왕씨의 혈통이 문제가 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는지 힐문하며 하늘의 감계가 밝게 비출 것이라고 말했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려 있는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리어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冢宰六道都統使崔瑩〉이라는 시와 우왕과 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한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라는 시를 읊어, 만일 왕씨(王氏)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던가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3.2. 《야사》

말년에 《야사》(野史) 6권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동락패송》에 따르면, 원천석은 《야사》 6권을 저술한 다음 궤 속에 넣어서 남에게 보이지 않고 가묘(家廟)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유언했으나, 증손자의 대에 이르러 사당에서 시사(時祀)를 지낸 뒤 의논하여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이제 괜찮겠거니' 하고 파서 내용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책들에는 조선 왕조가 기록한 역사와 전혀 다른 멸족(滅族)의 화를 불러올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이에 역적의 후손이 되어 몰살당할 것을 두려워한 후손들은 《야사》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고우영 화백은 오백년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500년 뒤에 조선 왕조가 멸망한 뒤에야 발굴해야 했다고 탄식했다.[1][2]

많은 역덕후들 또한 이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는데,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기록이 워낙 승자의 역사로서 왜곡되었다는 의혹이 많기 때문이다. 고려의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조선의 태조, 정종, 태종 시기의 기록은 현재도 학자들의 의심을 많이 받고 있지만, 《승정원일기》 같은 여말선초의 공문서들이 임진왜란 때 죄다 소실되어 남지 못했기 때문에 명쾌하게 이를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사'와 전혀 다른, 그것도 6권에 달하는 사서가 있었다면, 조선 초기 역사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전해지지 않는 야사를 썼다는 떡밥 때문인지 환단고기의 저자들 중 한 사람 '원동중'이 원천석을 말한다는 식으로 소환되기도 하는데, 환단고기 자체가 위서이므로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환단고기/서지적 비판 참조.

제자인 태종이 손자들을 소개하자 세조에게 ''조부를 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 라는 충고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4. 등장 매체

1997 KBS 용의 눈물에선 장인한이 분했다. 고려 멸망 이후 세속을 떠나 산 속에 은거하며 나무 하는 촌로의 모습으로 딱 한 번 등장. 정안군(유동근 분)은 옛 스승을 찾아 나서나 끝내 만나지 못한다. 정확히는 정안군 일행이 길을 지나다가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발견해 길을 묻고자 운곡 선생 어딨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지만 아무 대답없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단순히 귀가 먼 노인이다 생각하고 지나가려는데, 군수가 방금 원천석 선생이 떠나셨다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탄식하며, 스승님도 자신의 곁을 떠나신 거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조, 정종실록에 등장한다. 이때 태종 이방원은 원천석에게 벼슬을 주려고 그를 부르려 했으나 원천석은 “일 없다!”라고 말한다. 이후 후손들에게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절대로 상자를 열지마라.”고 했는데 증손들이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 열어봅시다.”라고 말하고는 상자를 열어 책을 읽어보는데 이때 정부의 역사랑은 너무달라서 증손들은 “우리 집안을 끝장낼 책 입니다.”라고 말하고는 결국 그 책들을 다 태워버렸다.

5. 여담

태종이 유독 그리워 했던 스승으로, 조선 건국 후 등용하려 했으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산 속에 절을 했다 하여 배향산, 한 고개를 넘고 또 다른 고개를 넘어 곤룡포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스승을 생각했다는 원통재라 이름을 붙이는 등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이방원의 여러 스승들 중 이색의 수제자였던 이숭인이나, 이색과 더불어 고려 수호파 중 한 명이던 우현보와는 달리,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찍이 고려 정치에 환멸을 느껴 산에 은거함으로써 동란을 피할 수 있었다. 또, 태종의 자신을 기용할 것을 눈치채고 은거함으로 민제와 같은 화 또한 피할 수 있었으며, 어찌보면 태종의 여러 스승들 중 어떤 불상사도 없이 생을 살다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1] 한편 이 책들을 보관한 석궤는 그대로 집안에 대대손손 전해졌다가 한국전쟁 때 사라졌다고 한다.[2] 당시 태우자 마음 먹은 이유가 후손들이 다 모여 석궤를 보자 했지만, 당시 한 명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오지 않은 사람이 우리 말을 믿고 이 석궤를 안 열어볼 리도 없으며, 우리들 모두 중 하나가 만에 하나라도 이 이야기를 안 한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라고 말하자 후손들이 한숨 쉬며 태우자는 의견으로 모이게 된다. 그냥 헛소리에 불과하게 만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