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09 20:03:54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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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사대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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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숙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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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묘호 순종(純宗)[1]순조(純祖)[2]
시호 조선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3]
(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4]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선각(宣恪)[5]
본관 전주(全州)
공(玜)
공보(公寶)
순재(純齋)
출생 한성 창경궁 집복헌
사망 한성 경희궁 회상전
능묘 인릉(仁陵)
황후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부황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어머니 현목유비 박씨(顯穆綏妃 朴氏)
생몰
기간
양력 1790년 7월 29일 ~ 1834년 12월 13일
(44년 4개월 15일, 1만 6,207일.)
음력 1790년 6월 18일[6] ~ 1834년 11월 13일
재위
기간
양력 1800년 8월 23일 ~ 1834년 12월 13일
(34년 3개월 21일, 1만 2,530일.)
음력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1. 개요2. 생애
2.1. 갑작스러운 즉위2.2. 무기력했던 임금2.3. 세자 대리청정과 그 후2.4. 사후
2.4.1. 묘호와 시호2.4.2. 묘호 개정2.4.3. 능묘
3. 외모4. 평가 - 골든타임을 놓아버린 무기력한 군주5. 개인적인 면6. 기타7. 가계
7.1. 순조가 등장한 작품
8. 관련 항목9.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순조(純祖), 시호는 숙황제(肅皇帝). 휘는 공(玜). 자는 공보(公寶).

정조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정조의 마지막 간택후궁현목유빈 박씨(수빈 박씨)이다. 고종 태황제 때 2대조인 양할아버지로서 황제로 추존됐다.

2. 생애

2.1. 갑작스러운 즉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11살에 즉위하는 바람에 조선 역사상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7][8] 당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을 했다. 정순 왕후는 1805년 사망 시까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신유박해천주교 박해를 일으키기도 하여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까지 천주교로 통해 역모를 몰아서 죽이기도 한 사람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다. 이후 순조의 장인이자 한때 정조의 충신이었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이들을 몰아내고 60년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연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이후 세도 정치는 무너져가던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이는 순조가 선왕들과 달리 신하들을 단속하는 데 신경 쓰지 않았던 점도 크다. 영조 시절엔 초기에는 과열된 붕당(노론VS소론/남인)으로 조정이 거의 피바다가 되었고 후기에는 척신 정치로 귀결되었지만 영조는 초기에는 완론 탕평책, 후기에는 압도적인 왕권을 바탕으로 제어했고 정조 시절엔 준론 탕평으로 남인과 벽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이어졌지만 정조가 채제공과 김종수 등을 동시에 우대하면서 지속적 관리를 하여 조정의 균형이 무너지진 않았다.

2.2. 무기력했던 임금

순조의 시대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32년에는 영국[9]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10] 물론 그 이전에도 다른 이양선은 왔지만 교역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11]

순조는 뒤에 즉위하는 헌종철종과는 달리 나이나 혈통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12] 순조 본인의 권한은 강한 편[13]이었고 정치적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죽음으로써 수렴청정이 끝나자, 끝난 후에도 재위 기간 내내 병을 달고 살게 되었는 데다가, 홍경래의 난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지독할 정도의 무기력함을 보인다.,

순조는 즉위 초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이었고 순조 11년에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진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14]

홍경래의 난까지 터진 다음엔 김재찬, 남공철, 심학규, 이시수 등 노회한 신료들이 가득 차 있는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기면서 세도 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엔 김재찬 등 안동 김씨의 입김이 닿는 대신들을 통한 간접적 막후 통치를 했으나 순조 32년 김조순 사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안동 김씨가 아예 모든 것을 다 먹어버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 정치가 된다.[15]

남인, 벽파 숙청은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의 업무 거부가 겹치면서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참사로 이어졌다.[16]

숙종 ~ 영조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당파 정치의 붕괴[17]는 왕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몰아주다 보니 왕이 조금이라도 관리를 안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영조와 정조는 이런 점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권세가 강한 신하들이 나오기는 했어도 왕이 신하들을 제어해 사고가 나는 것을 막아 왔지만, 순조가 관리에 손을 놓자 그 붕 뜬 통제가 세도 가문들에 넘어가면서 조선 정계는 가문간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개 막장으로 변해가게 된다.

2.3. 세자 대리청정과 그 후

아들 효명세자가 매우 영특해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신하들 앞에서 스스로 무능한 임금임을 자처하며 양위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대개 양위니 대리청정이니 소리가 나오면 온 나라가 뒤집혀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는 반대를 하지만,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온 신하들의 종사의 무궁무진한 복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리청정를 극력 반대하다 죽은 홍인한을 의식해서인 듯.

효명세자는 똑부러진 일 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으며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몸에 샀지만 불과 2년 좀 넘어서 병에 걸려 일찍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도 사망했는데, 이로 인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순조도 얼마 후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8살 헌종이 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병으로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의학자들은 순조의 증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홧병이라고 본다. 이때 재야에 있던 정약용을 불러다가 치료를 하려 했으나 정약용이 미처 오기도 전에 사망했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에도 너무 늦어서 정약용이 오기 전에 사망한 적이 있었다.

순조 말년엔 안동 김씨에 거슬리는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추사 김정희아버지인 김노경 등이다. 이에 순조는 "우리가 백성들 먹여살리려고 정치하는데 오늘 나는 어찌 죽이거나 탄핵하는 말 말곤 한마디도 들은 게 없냐?"라고 탄식하기도 했고 막판에 왕권을 휘둘러 김노경 등을 석방하고 안동 김씨 반대파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조가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조 32년 이후의 실록은 김조순의 장남 김홍근이 군국의 사무를 맡았다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으며, 다음 해 음력 11월 28일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포함한 궁 전체가 인조반정 이래 최초로 깡그리 불타버렸다. 1803년 이미 인정전이 소실되어 다음 해 복구한 상황이었다. 1820년에 그려진 동궐도는 이 불타기 전의 창덕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순조 개인은 국정을 위한 연감인 <만기요람>을 편찬하는 등 그다지 무능한 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물려받은 재능에도 불구, 무엇보다 세도 가문에 적극적인 견제를 할 의지가 없었다.

또 그동안 축적되었던 삼정의 문란과 같은 제도적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곡산 민란, 홍경래의 난, 쌀 폭동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물론 제대로 폭발한 것은 철종 말이었지만. 여러모로 순조 시기는 조선의 쇠퇴가 명확해지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쌀 폭동은 순조 말년에 한양의 쌀 상인들이 쌀을 가져다놓고도 없다면서 팔지 않으며 쌀값으로 농간을 부리다가 분노한 한양 주민들이 쌀 폭동을 일으켜 싸전(쌀가게)들을 약탈한 사건이다. 이에 순조는 분위기가 하도 흉흉해서 폭동 주모자 7인과 함께폭동의 원인제공을 한 여각 상인 2명도 처형하여 민심을 달래야 했다.[18]

국사 교과서에서는 세도 정치기의 3왕(헌종, 철종)과 묶여 굉장히 안습한 취급을 받지만, 헌종과 철종의 재위 기간을 합쳐도 순조보다 짧다. 헌종 15년, 철종 14년인데 반해 순조는 장장 34년을 재위했다. 자세한 사항은 세도정치 문서 참조.

2.4. 사후

2.4.1. 묘호와 시호

  • 조선왕조
    • 묘호: 순종(純宗) -> 순조(純祖)
    • 시호: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 대한제국
    • 시호: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첫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성효대왕. 이후 철종 때 묘호가 순조(純祖)로 개정되었고, 대한제국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시호가 개정되어 최종적으로 '순조 숙황제'가 되었다.

2.4.2. 묘호 개정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서학(가톨릭)을 탄압해 이단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철종 8년(1857)에 순조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묘호도 원래는 영종·정종으로, 영조는 고종 때 여러 공이 많다는 이유로, 정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자신의 3대조라는 이유로 묘호를 바꾸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이지만 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통을 이었으므로, 양아버지를 높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 역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들어갔기에, 순조는 여러모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 영조, 정조의 유일한 직계 계승자로서 대접받을 수밖에 없었다.

2.4.3. 능묘

순조의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으로 근처에 태종의 능인 헌릉이 있어서 헌인릉이라고 불린다. 헌인릉 묘역을 나오면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 어떤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표지도 없고 안내 표석 같은 것도 없다. 그 건물이 다름 아닌 국정원. 처음에 순조는 죽은 후 파주에 묻혔지만 철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천장 이듬해 순원 왕후가 죽자 합장되었다.

참고로 장소가 장소인지라 순조의 인릉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는다. 능침이나 정자각 등은 찍어도 상관없는데 '국정원'이 있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돌리지 말 것. 까딱하다간 국정원 직원들에게 트집잡혀 코렁탕찰지게 먹을 수 있다. 그래도 인터넷상에는 그걸 찍어 올린 용자들도 있긴 하다. 그런데 같은 능역으로 묶은 태종의 헌릉에서는 국정원과 좀 떨어져 있어서인지. 인릉처럼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헌릉은 자유롭게 촬영해도 되고, 인릉에서만 주의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헌릉과 함께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기는 한데, 위치가 위치라서 그런지 헌릉처럼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약간 멀리 떨어져서 능을 볼 수 있는 수준.

3. 외모

파일:attachment/junjourjin123.jpg
반소된 순조의 어진

순조의 어진. 이후에 그려진 고종 황제의 어진과 유사하게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형태다. 문제는 얼굴을 포함해서 절반이 타버리는 바람에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불운은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들에게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파일:c87fnvr.jpg 파일:eMR3wAd.png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서 실린 초상화가 있어 순조의 용모를 대략 추측을 할 수 있다.

실록에서 순조의 용모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왕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게 덕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 순조실록,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순조는 일반적인 미남상은 아니지만 나이 들수록 멋들어지고 푸근해지는 그런 외모인 것 같다. 또한 기록을 보면 정조와 닮은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19]

4. 평가 - 골든타임을 놓아버린 무기력한 군주

순조의 통치는 두드러지는 붕괴가 아닌 장장 34년간 진행된 평화로운, 그러나 서서히 조선의 몰락이라는 늪으로 빠져드는 침체기였다.

정조의 무력한 어린 아들 이미지와 병약했다는 이유로 존재감이 매우 옅지만, 연구가 계속 되면서 박약한 의지로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암군으로 평가된다. 치세 중반부터 정무에 손을 놨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만력제는 차원이 다른 파업 황제라... 구휼에만 성실했던 만력제

순조는 중흥군주 뒤의 수성군주의 입장에 있었단 점에서도 그의 무기력함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커진다. 사실 그의 시대는 조선을 살릴 마지막 시대였다. 선대로부터 (심지어 증조할머니에게도)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 우수한 두뇌와 늠름한 체구, 하지만 청년기를 넘기면서부터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피를 보기를 싫어했다.

순조가 권력투쟁을 싫어했다는 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권력투쟁을 지양한 군주로는 세종대왕(!)이라는 선례도 있다. 실제로 세종도 옥사를 벌이거나 기존의 옥사를 새로 뒤집지 않았다.[20] 두 왕 모두 신뢰받는 대신들을 (비리가 있어도) 중용하였고, 말년에는 똑똑한 세자와 대신들[21]에게 나라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 똑똑한 세자(문종/효명세자)는 요절하면서 왕실은 어린 계승자(단종/헌종)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단명하는 바람에 방계의 인물이 즉위하게 되고 나라는 훈신, 척신에 의해 기강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평행이론?

정조와 순조가 태종과 세종의 사례와 결정적으로 달랐넌 점은 창업 초기와 중흥기의 차이가 아니었다. 바로 외척에 안일했던 것이었다.세종은 아빠가 다 정리해줬거든 영조 시대, 아니 어쩌면 선조 말년 ~ 효종 때부터 느슨해진 외척에 대한 경계는 기어이 세도정치의 파탄으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순조의 의지 부족도 한 몫하겠지만.

인터넷상에서 순조와 세종의 공통점이 '하위호환'이란 표현으로 돌아 다닌 바 있으나, 세종대왕에게 비기기엔 순조는 하위호환이란 말은 매우 부족하다. 실패한 리메이크라면 모를까.

세종이 임질로 사망한 것에 결부해, 순조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글들이 사실인 것마냥 돌아다니는데 매독 썰은 그냥 카더라 수준의 이야기지 정확한 근거가 있는 글이 절대 아니다. 아예 이런 식으로 인터넷 카더라 글들을 복붙한 수준 낮은 기사인터넷에 떠도는 조선 왕들 사인 카더라 통신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까지 버젓이 실리지만, 위키러들은 이런데 현혹되지 말자. 당뇨병(임질) 가지고 매독이라는 이야기 나오는 세종대왕이랑 이것도 닮았네

5. 개인적인 면

파일:이공(육필).jpg
순조임금의 어릴적 글씨
  • 담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왕으로 우리나라 애들은 젖만 떼면 담배를 찾아서 문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조선왕조실록 1808년 11월 19일자에도 담배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순조는 "담배가 소화를 돕는다, 담 치료에 좋다 하는데 확실히 모르겠다. 다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고질병이 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고, 젖먹이를 면한 어린 아이들까지 담배를 배워 황죽으로 피운다."며 개탄을 했다. 아버지인 정조와는 많이 다른 면모. 또한 의외로 담배의 중독성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그런데 애연가였던 부왕 정조보다도 오래 못 살았다는게 함정(...) 그래도 4년차잖아
  • 의외로 평등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건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아무리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라는[22] 논리로 1801년 나라에 속한 6만 5천명의 공노비를 해방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는데, 노비 신분이 없어진 갑오개혁(1894) 때와 비교하면 무려 1세기 이른 정책이다. 근데 이건 정순왕후의 수렴 시기에 내려진 것이니 사실상 정순왕후의 정책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지어 정순왕후 김씨를 반동으로 폄하하는 이덕일 계열에서도 "정조의 개혁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반동정치를 했으니 민심을 무마하려면 이 정도는 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공노비를 풀어준다고 사대부 민심이 무마될까?[23]
  •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는 아들의 즉위를 살아서 본 유일한 조선 후궁이었다. 순조가 즉위하고도 20년도 넘게 지켜봤다. 순조는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하진 못했지만, 사당을 높이고 상복을 오래 입는 등 최대한의 예의를 지켰다. 순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24]
  • 조선의 마지막 공주덕온공주(德溫公主, 1822년 ~ 1844년, 순조의 3녀)가 순조의 딸이다. 그 뒤로는 왕의 적녀(嫡女)가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더라도 공주로 봉해지기 전에 죽었다. 서녀까지 포함하더라도 이 뒤에 옹주로 봉해진 이는 철종의 유일한 자녀였던 영혜옹주와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뿐이다.
  • 후손들이 죄다 요절하는 비극을 겪은 왕이기도 하다. 상기한 효명세자(22세)를 비롯해서 명온공주(23세), 복온공주(15세), 덕온공주(23세), 영온옹주(13세) 등이 모조리 요절한 데다가 손자였던 헌종까지 23세로 요절했다[25]. 순조의 자녀 가운데 순조보다 늦게 세상을 떠난 이는 덕온공주뿐이었는데, 그나마도 23세로 임신 중에 급체로 요절했다.

6. 기타

  • 조선왕조실록에서 마지막으로 거북선이 언급된 것이 이 때이다.(순조 11권, 8년(1808년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월 10일(정미) 2번째 기사) 고종 실록에서 거북선이 다시 언급되긴 하지만, 고종 및 순종 실록은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 이 왕의 재위 기간이던 1832년(순조 32년)에 통상을 요구한 이양선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영국 상선 암허스트 호에 관한 기록이 바로 그것. 당시 영국의 왕은 윌리엄 4세였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꽤 부정적인 평을 받는 왕이기도 한데, 가장 큰 문제로 정치적 무관심이 심했다는 점을 깐다. 민생에 관심을 가진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긴 하나 정작 그것을 실행할 신하들을 관리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며 부지런했지만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처신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순조의 손자인 헌종도 세도 정치로 왕권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20세가 되자 한때 안동 김씨에게 위협감을 줄 정도로 과감한 공세를 취했던 걸 보면, 순조가 세도 정치에 왕권이 위축돼서 못했다기보다는 그냥 하기 싫었다는 느낌을 준다. 순조의 이러한 태도가 되려 안동 김씨의 세력이 더 확장되었고, 세도 정치 기간을 늘린 꼴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본인의 무기력함과 더불어 신하들 관리도 제대로 못한 암군에 가깝다.
  • 박시백 화백은 아버지 정조와 마찬가지로 열성어진의 초상화와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순조의 얼굴을 묘사했는데, 초상화보다 비교적 젊고, 살집이 더 오른 후덕한 이미지로 그렸다. 그런데 시종일관 입을 벌리고 있어서 왠지 좀 멍청해 보인다. 실록에 적힌 '네모난 입'을 묘사하려 그런 듯? 그리고 나이가 먹을수록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진해져서 기운이 빠져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병환에 시달리고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모습을 표현하려는 듯.
  • 상당히 인생이 안습한 왕이다.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에의해 뒤주에 갇혀 사망했고 아버지는 먼치킨인 탓에 늘 비교되었고, 재위 중 홍경래의 난이 터지거나 정조 말기부터 내재되어 있던 국가적인 문제들이 계속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등 재위 기간을 안습으로 보냈다. 또 자식들을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내는 등 가족사에서도 안습하기 그지없다. 총명하고 혁신적이던 아들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손자인 헌종도 23세에 요절했는데, 그 이유가 이 양반이 벌여 놓은 일들을 수습하거나 이 사람이 남긴 세도 가문을 조지던 와중에 생긴 과로 때문이었다.
  • 어렸을 적 일화 중에 냉면과 관련한 사연이 있다. 어려서 즉위한 순조는 종종 야밤에 달구경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에는 갑자기 냉면을 먹고자 했다. 한밤중이라 수라간에 연락을 넣기 보다는 그 당시 이미 성행하고 있는 저자거리의 냉면 가게에서 냉면을 사오도록 시켰다. 이에 시위 무관들이 궁 밖으로 나가 냉면을 사왔는데 이때 순조의 배려로 왕은 물론 모시고 있는 내관, 궁녀, 무관들의 몫까지 모두 사왔다. 그런데 무관 중 한 명이 냉면에 곁들여 먹을 목적으로 돼지고기 수육을 따로 사서 복귀했는데 이를 본 순조는 '저 자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주지 마라.'라고 명하며 냉면을 먹지 못하게 했다. 아무래도 혼자만 더 맛있게 먹을 궁리를 한 무관이 어린 왕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일화는 헌종대에서 고종대까지 관직생활을 했던 이유원(李裕元)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미 이때부터 냉면과 수육을 왕실은 물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밤에도 야식으로 사먹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테이크 아웃으로 포장해서 가져 가는것도 가능했음을 알려주는 꽤 의미가 있는 사례다. 출처 1. 출처 2.

7. 가계

  • 할아버지: 사도세자
  • 할머니: 혜경궁 홍씨
  • 왕후: 순원왕후 안동 김씨(1789년 ~ 1857년)
    • 장자(적장자): 효명세자(1809년 ~ 1830년) - 조졸
    • 장녀(적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년 ~ 1832년). 안동 김씨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
    • 3녀(적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년 ~ 1832년). 안동 김씨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
    • 차자(적차자): 왕자(1820년 2월 23일 ~ 1820년 5월 26일) - 조졸
    • 4녀(적3녀): 덕온공주(1822년 ~ 1844년). 해평 윤씨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
  • 후궁: 숙의 밀양 박씨
    • 차녀(서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년 ~ 1829년). 순조가 후궁에게서 낳은 유일한 자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고 말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복 오빠인 효명세자는 옹주를 가엾이 여겨 잘 돌봐주었으나, 옹주는 겨우 12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효명세자는 이 이복 여동생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자식복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처참하다. 순조가 1834년에 죽었는데, 아들은 물론이고 딸까지 5명이나 순조 생전에 죽었다. 심지어 막내 덕온공주도 순조 생전에 죽지 않았을 뿐,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자식 한명만 죽어도 부모된 입장으로서 피가 말리는 기분인데, 순조 입장에서는 그걸 5번이나 겪어야 했으니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832년에 애지중지하던 두 딸마저 요절해버리자 '왕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마저도 세상을 등진 데에는 자식들의 연속된 요절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7.1. 순조가 등장한 작품

드라마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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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자 / 왕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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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27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인 순종과 헷갈리면 안된다.[2] 홍경래의 난을 겪어(진압하여) 조로 격상.[3] 사후 조선 왕조에서 올린 시호[4] 1897년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5] 황제 추존과 동시에 청 시호 폐지[6] 친할머니 혜경궁 홍씨와 생일이 똑같은데, 당시 실록을 보면 이런 경우가 조선 왕조에서 유일했던 것 같다. 1791년 6월 18일에는 혜경궁의 생일과 순조의 첫 돌을 맞아 잔치도 크게 열고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7] 당대엔 가장 어린 나이다. 기록을 깬 사람은 순조의 손자인 헌종. 한마디로 순조는 어린 왕의 대명사인 단종보다도 더 어린나이에 즉위했다.[8] 또한 순조는 상왕(태종)이 있었던 세종을 제외한다면 가장 짧은 세자시절을 보낸 임금이기도 하다. 서장자였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조차도 정조의 건강 악화에 의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1800년 2월에 세자로 책봉되고 6월에 아버지인 정조가 죽자마자 왕위에 올랐으니... 4달동안만 세자시절을 보낸 셈이다. 참고로 세종은 2달간 세자 지위에 있었고 아버지인 정조는 세손임에도 13년동안 동궁생활을 하였다.[9] 이때 이들은 자신들을 '영길리국'(英吉里國)이라 칭했다.[10] 하지만 이때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핑계로 교역을 거부하고 그들이 요구한 물자와 식량을 제공하고 빨리 내보내는 데 급급했다.[11] 암허스트호의 선원들 중 1명이 한자를 잘 알아 글을 써서 대화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양선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해당 지역 수령들은 이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떠나라고 요구하였고, 그 이양선들 역시 교역 요구가 목적이 아닌 해양 탐사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마찰, 충돌없이 빨리 떠났다.[12] 헌종과 비교해보면 헌종은 혈통은 더 나았을지 모르나 나이는 헌종보다 나았고 철종은 혈통으로는 철종보다 훠~얼씬 앞섰다.[13] 자기 가족들과 종친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목소리를 크게 냈고 관철시킨 것도 많다.[14] 다만 벽파 숙청 이후 열심히 정사를 본 기간에도 국정 장악엔 별 관심이 없어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는 평가조차 있다.[15] 안동 김씨가 본격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는 것은 헌종 조부터다.[16] 물론 만력제처럼 일체 국정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병약하자 세자에게 사실상 전권을 대리청정으로 맡기고, 세자가 죽은 후에는 다시 정사에 나섰다.[17] 신하들에게 꼼짝 못하는 임금들로 묘사되는 사극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 후기 왕들은 후견 세력이 미미했던 철종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당파 싸움을 이용한 환국(정당교체)을 통해 왕권이 지속적으로 강해졌고, 영조 시절에는 아예 서슬 퍼런 태종 시절에도 왕에게 대들던 근성을 보이던 사관들이 임금에게 벌벌 기는 상황까지 연출된다.[18] 원래는 주모자 7인만 죽였는데 형조가 들끓어오르던 민심을 파악하고 "쟤네들이 주모자도 죽었으니 원인을 발생시킨 놈들도 죽여야 한다고 난리랍니다!"라고 아뢰고 남공철도 "나라 사람들이 다 죽여야 한다고 하면 법조문에 없더라도 죽여야 합니다."라고 해서 강상 상인 1명과 시전 상인 1명을 처형했다.[19] 실제로 정조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는 높은 코와 네모난 입에 겹진 턱을 가졌다고 한다.[20] 세종은 자기 때문에 숙청당한 장인 심온의 복권을 끝끝내 거부했으며, 순조는 벽파 경주 김씨들을 석방하긴 했으나 옥사를 뒤집어 새로운 옥사를 낳을 수 있는 김일주의 상소 등을 물리쳤다.[21] 조선 조 최고의 정승인 황희, 맹사성보다는 못하지만 김조순만 해도 스팩이나 평판으로서는 황희에 밀리지는 않았다. 처신이란 측면에서는 황희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2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보기에는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 아래에 모든 존재는 그냥 백성이라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제 시각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만큼 순조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시사한다.[23] 아마도 얘기하고 싶던 것은 정조가 노비제에 부정적이었고 이를 공노비 혁파라는 방식으로 계승하는 척을 했다는 식인 것으로 보인다. 사노비를 혁파하자니 사대부들을 비롯한 노비를 가진 자들이 반대할테니 꼼수로 공노비도 노비니까 공노비를 혁파하자는 식으로 어차피 공노비는 국가소유이니 그 국가를 이끌고 있는 자신이 결정하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문제다.[24] 심지어 반대하는 신하들을 줄줄이 유배 보내기도 했다.[25] 순조는 큰딸의 죽음에 직접 명온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