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03:37:25

건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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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왕릉 | 동구릉 내 1기
건원릉

健元陵
파일:구리_동구릉_건원릉_능침(항공) 문화재청.jpg
매장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태조 고황제 (1408년 6월 27일 사망)
조성시기 1408년 9월 28일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특징3. 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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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구릉의 9개 능묘 중 조선 초대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안장되어 있는 왕릉. 이성계의 인지도와 인기에 힘입어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영의정 하륜 등이 태조 사후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1408년[1] 6월 28일 지금의 위치로 결정하였고, 같은해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공사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9월 7일 태종이 빈전(장례 전까지 왕과 왕비의 관을 두던 전각)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공식적으로 발인하였다.

2. 특징

파일:5182.jpg
건원릉의 1930년대 모습. 봉분 뒤에서 지금의 구리시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출처 : 조선고적도보

다른 왕릉이 꽤 단정하게 벌초가 되어 있는데에 반해 건원릉은 특이하게 억새풀이 무성한 투박한 왕릉이다. 덕분에 다른 왕릉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벌초도 1년에 딱 한 번(한식)만 한다고. 이런 투박한 느낌 때문에, 조선의 왕으로서 살았던 인생보다는 고려의 장수로서 살았던 인생이 더 길었던 태조 이성계의 이미지와 잘 부합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왕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왕릉이라 볼 수 있다.[2] 평소에 동구릉에 가면, 이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는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지만, 이 때 즉, 건원릉에 자란 억새를 벌초하는 한식 때에 문화재청에서 특별관람을 추진해서 한시적으로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있다.

무덤의 밑부분이 십이각의 화강암 호석(무덤 둘레에 돌려 쌓은 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중심에는 태극 무늬가 있는 신령스러움을 상징하는 영탁영저문이 새겨져 있다. 각 면에는 와운문(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무늬) 중에 수관인신(獸冠人身)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고, 면석(面石)과 귓돌의 아래에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영지(靈芝)를 새겼다. 호석 밖으로는 돌난간을 돌리고, 그 밖으로 석호 네 마리, 석양 네 마리를 엇바꾸어 밖을 향해 배치하였으며, 능 앞면에는 혼유석(魂遊石)과 그 양쪽의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무덤 아랫단에는 석마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능의 관리를 위해 영 1인, 참봉 1인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후손 중 제사를 받들 수 있는 자에 한해 자유로이 임용하였다. 태조가 살아있을 당시에 신덕왕후의 정릉고려의 능묘 관리 제도를 따라 만들어졌지만, 이 능은 조선 왕조의 능제로 경영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이밖에도 고려 공민왕의 능인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으나, 나지막한 담으로 무덤 주위를 두르는 등 고려 왕릉과 차이점이 존재하며, 석호나 석양 등의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구리시 돌다리 사거리부터 도매시장 사거리까지의 길 이름을 여기서 따와 건원대로라 한다. 또한 이 도로는 도매시장 사거리에서 동구릉로(43번 국도)에 합류한다.

추존왕의 왕릉을 포함한 모든 조선 왕릉은 물론, 고려 왕릉을 포함해도 유일하게 능호가 2자(건원:健元)로 된 능이다. 고려 태조의 할머니 원창왕후의 능이 온혜릉(溫鞋陵)이나, 이 온혜릉이라는 이름은 시호법에 따라 지은 능호가 아니다.[3]

건원릉의 정자각과 비각 내에 신도비는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4]

3. 야사

능이 위처럼 억새풀이 무성하게 된 사연은 이성계가 죽으면서 고향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5] 이방원은 개국 시조인 부왕을 멀고 먼 함흥에 안장한다면 나라의 위신과 제사 지낼 때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곳에 모셔야만 자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으니 도성 근처에 모시려고 했다. 그래서 유언에도 부합하고자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건원릉을 단장하는 꼼수로 대신했다고 한다.

또, 이성계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에 같이 묻히길 원했으나 신덕왕후를 굉장히 싫어하던 이방원이 유언을 무시하고 새로 묏자리를 알아봐 묘를 썼고, 죄책감에 평소 고향을 그리워하던 이성계를 위해 그의 고향인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올 때, 그냥 파서 가져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억새가 다 말라죽으므로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짜낸 지혜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서 함흥에서 한양까지 억새를 릴레이 형식으로 운반해와서 심었다는 설화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건원릉에 불을 질렀는데 건원릉의 정자각에서 엄청난 바람이 나와서 불을 다 꺼버렸다고 한다. 왜군이 몇번을 불 질러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포기했다고. 이외에도 여러 야사가 많다.


[1] 태조가 숨을 거둔 해[2] 사실 조선왕릉대한제국 이전까지는 전체적으로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에 검소하다.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에는 왕의 무덤 크기와 왕의 권위는 비례한다고 여겨서 무덤의 크기가 컸지만 이런 경향은 갈수록 사라진다. 한반도에서는 6세기를 전후하여 이전처럼 큰 무덤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조선의 정원 양식에서도 알 수 있지만 조선의 건축 양식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면도 있다. 고려에서부터 이어진 풍수적인 면을 고려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임금들도 자신들의 거처로서 궁궐은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경복궁보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창덕궁을 더 선호했다.[3] "온혜(溫鞋)"는 상류층 여성들이 신던 신발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원창왕후가 서해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 하자 그 신발을 남긴 곳을 장지로 정하여 그 무덤을 온혜릉으로 칭한 것이다.[4] 참고로 같은 건원릉 내의 목릉(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과 숭릉(현종, 명성왕후)의 정자각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울 서초구 헌릉에 자리한 태종의 신도비와 현재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에 자리한 세종의 구 영릉 신도비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5] 참고로 왕으로 추존된 태조의 조상들의 왕릉은 함흥 주변에 있다. 부친을 비롯한 조상들 가까이에 묻히기를 염원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