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05:17:45

현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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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uments et sites historiques de Kae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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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278
등재연도 2013년
등재기준 (ii)[1], (iii)[2]
파일:external/senka36.iptime.org/z202.jpg
<colbgcolor=#fedc89> 현정릉 전경
파일:현정릉.jpg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20년대의 모습[3]

1. 개요2. 역사3. 형식4. 벽화와 통로5. 여담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1. 개요

고려왕릉. 북한행정구역개성시 해선리 소재(남한 행정구역은 경기도 개풍군 토성면 여릉리 소재). 개성 시가지의 서쪽에 있으며 태조 왕건이 묻힌 현릉(顯陵)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공민왕의 능은 서쪽(왼쪽) 현릉(玄陵),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은 바로 옆 동쪽(오른쪽)의 정릉(正陵)으로, 묶어서 현정릉(玄正陵)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국보 제123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되기도 했다. 구글 스트리트 뷰 보기.

2. 역사

노국대장공주가 1365년 2월 15일에 승하하고,고려사 기사 1365년 4월 4일에 정릉(正陵)에 장사지냈으며,고려사기사, 이후인 1366년 5월에는 덕릉(德陵)[4]의 나무를 거의다 베어다가 정릉의 재실을 만들었다. 고려사 기사

9년 후인 1374년에 공민왕이 승하하자, 1374년 10월 28일에 공민왕을 정릉의 서쪽에 장사 지내고 현릉(玄陵)이라고 하였다. 고려사 기사 1 고려사 기사2

3. 형식

현정릉의 구조는 조선왕릉과 매우 흡사한데, 일반적으로는 현정릉이 조선왕릉 양식의 모범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현정릉은 봉분에 병풍석(또는 호석)과 난간석을 각각 둘렀고, 봉분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를 각각 4쌍씩(석양 8기, 석호 8기)과 망주석 1쌍, 혼유석 1쌍, 장명등 1쌍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부분에는 문인석을 2쌍, 무인석을 2쌍씩 배치하였는데, 조선왕릉의 형식과 비교하면 조선왕릉이 문인석과 무인석 곁에 석마를 배치하였음이 다를 뿐 거의 동일하다. 현정릉 양식은 태종원경왕후가 함께 안장된 헌릉과 비교하면 더욱 유사하다.

다만, 정자각부터 봉분에 이르기까지 계단을 배치하여 권위적인 분위기를 내었음은 조선왕릉과 사뭇 다르다.[5]

또한, 현정릉은 왕릉 두 기를 붙여서 배치하고서도 각 봉분에 능호를 따로 부여하였다. 마찬가지로 조선왕릉 초기의 왕릉[6]에도 따로 능호를 지었으나 점차 사라졌다.

4. 벽화와 통로

공민왕릉 내부에서 중요한 시설들이 더 있는데 하나는 작은 구멍으로 이어진 통로와 벽화들이다.

벽화들은 12지신들을 의인화한 형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무덤들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다.

또 다른 특징은 두 무덤들을 이어주는 통로들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혼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라고 한다.

5. 여담

북한에 있는 고려 왕릉들의 관리 상태가 심히 열악한 가운데서도 넷상에 퍼진 사진들로 보나 위성지도로 보나 상당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인 것 같다. 여러 개성 고려왕릉들은 사진을 확인해 보면 황량한 민둥산 산중턱에 외롭게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유독 여기와 현릉은 왕릉 주변 정도긴 하지만 근처에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런걸 보면 북한 정권이 그나마 신경쓰는 문화재 중 하나인 듯 하다.

다만 북한이 막장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고려왕릉의 보존 상태가 불량한 것은 단순히 북한만의 잘못은 아니다. 이미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에서도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으며 많은 무덤의 위치는 이미 20세기 이전에 실전된 상태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특히 도굴꾼이 들끓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훼손 이전에 고려왕릉의 원형이 심히 조악한 것은 전대의 신라왕릉, 후대의 조선왕릉과 비교해보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왕건왕릉과 공민왕릉의 인물석을 제외하면 장인이 만든게 맞는지 싶을 정도로 인물석이 굉장히 조악하며 고려 국왕의 약한 실권 탓인지 무덤의 봉분 역시 많이 낮다. 도굴, 침략, 훼손, 보존의 문제 이전에 그냥 왕건왕릉과 공민왕릉을 제외한 고려왕릉의 원형 자체부터가 신라왕릉과 조선왕릉에 비하면 불량한 문화재인 것이다. 참고로 신라에서 고려로 흐르면서 나타난 불상의 변화처럼 인물석도 그러한 영향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있기는 한데 문제는 앞에서 계속 언급되는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의 인물석상은 단순히 투박한 정도가 아니라 그 형태가 인물석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극히 조악하고 실력이 형편없기에 단순히 시대상의 반영인지는 물음표가 많이 남는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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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봉분이 많이 깎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4] 고려 26대 왕 충선왕의 왕릉.[5] 이렇게 계단을 배치하여 권위적인 분위기를 낸 왕릉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건립된 왕릉들이 있다.[6] 태조 이성계의 선조이자 추존왕, 추존왕후들이 묻혀 있는 왕릉들은 쌍릉으로 조성하였음에도 능호를 각각 부여하였는데, 목조가 묻힌 덕릉(德陵), 그의 부인이니 효공왕후가 묻힌 안릉(安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