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09:51

고성행궁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한성부
경모궁 계동궁 남별궁 누동궁 도정궁
명례궁 사동궁 선희궁 수진궁 순화궁
안동별궁 어의궁 연희궁 영수궁 영희전
용동궁 운현궁 이현궁 인경궁 인덕궁
자수궁 죽동궁 창성궁 창의궁 칠궁
태화궁
경기도
강화행궁 개성행궁 경덕궁 남한산성 행궁 낙생행궁
낙천이궁 노량행궁 목청전 수원행궁 수창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안양행궁 양주행궁 용흥궁
월미행궁 이천행궁 이태조 행궁 진위행궁 파주행궁
풍덕행궁 풍양궁 포천이궁 화성행궁
충청도
노은리 행궁 목천행궁 보은행궁 신도안 대궐 온양행궁
전의행궁 직산행궁 초정행궁 천안행궁
전라도
격포행궁 경기전 무풍 명례궁 전주행궁
경상도
집경전
평안도
영변행궁 영숭전 영유행궁 의주행궁 평양행궁
풍경궁
황해도
배천행궁 평산행궁 해주행궁
강원도
고성행궁 분수령 행궁 상원사 행궁 춘천이궁
함경도
영흥본궁 함흥본궁
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wiki style="color:black,white;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777777,#555555> 평양시 평양성 (대동문 / 보통문 / 연광정 / 전금문) · 숭령전
고구려 고분군 (호남리 사신총) · 광법사 · 안학궁 · 대성산성 · 청암리 사지 & 청암리 토성
고구려 고분군 (동명왕릉 / 진파리 고분군) · 정릉사
법운암
룡화사 · 평양성 (부벽루 / 을밀대 / 최승대 / 칠성문 / 현무문)
단군릉
개성시 개성역사유적지구 (개성 성균관 / 개성 남대문 & 개성성 / 숭양서원 / 선죽교 / 만월대 / 현릉 / 현정릉) · 해선리 고려왕릉 · 관음사 · 영통사 · 흥국사 · 목청전
남포시 고구려 고분군 (강서삼묘 (강서대묘) / 덕흥리 벽화분 / 룡강대총 / 수산리 벽화분 / 쌍영총 / 약수리 벽화분)
강원도 보덕암 · 총석정 · 표훈사 · 신계사 · 장안사 · 유점사 · 석왕사 · 정양사 · 고성행궁
자강도 인풍루 · 보현사 · 상원암
평안남도 강선루 · 고구려 고분군 (덕화리 고분군) · 백상루 · 법흥사
평안북도 약산동대 · 영변행궁 · 통군정 · 귀주성 · 의주 남문
함경남도 함흥본궁 · 황초령비 · 마운령비 · 귀주사 · 함흥읍성
함경북도 개심사 · 북관대첩비
황해남도 고구려 고분군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패엽사
황해북도 성불사
공통 천리장성
}}}}}}}}}


1. 개요2. 상세3. 역사4. 위치

[clearfix]

1. 개요

조선 초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사용했던 강원도 고성군의 초수행궁이자 온궁이다.

2. 상세

조선시대에는 왕이 온천욕과 휴양을 하기 위한 행궁을 전국적으로 설치했다. 이 중에서 강원도 고성에 건설했던 행궁고성행궁이다. 조선 세종 때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시기는 모른다. 이 행궁의 규모 역시도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기록을 보면 세조(조선)가 이곳에 수리를 명하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순조실록》에도 행궁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순조때 까지는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상당히 수리와 중축기록이 많이 보인다. 《세조실록》부터 《순조실록》까지 총 다섯 차례 등장한다.

3. 역사

세종 때에 이곳에 온천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행궁을 세웠다. 또한 이후 세조가 이곳을 수리하고 묵었다. 하지만 이후로는 잘 쓰이지 않다가 《순조실록》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이후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4. 위치

북한 장전읍에 있는 온정리 온천이 있던 자리가 고성행궁이 위치하였던 자리이며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행궁의 기단과 추초석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