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순수비 眞興王巡狩碑 |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 창녕 진흥왕 척경비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 파주 감악산비는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음. |
순수비의 분포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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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의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반도 각지에 세운 순수척경비 4기를 가리킨다.2. 역사
6세기 중반, 신라 24대 국왕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였다. 진흥왕은 정복전쟁을 벌여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 동부, 충청북도 남부 정도의 영역에 한정된 기존 신라 영토를 가야 전역과 한강 유역, 그리고 지금의 함경도까지 한반도 각지로 확장했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땅 이곳저곳에 직접 행차하여 구구절절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는 비석을 여럿 세웠다.[2]순수비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삼국사기》 기록상 551년에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인 '낭성'에 순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진흥왕은 더 많은 곳을 순수했다. 어쩌면 순수비가 더 있는데 깊은 산 속에 있거나 오랜 세월에 넘어지고 파편으로 남아서 아직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21세기에 새로 발견된 것처럼, 오늘날에도 잊혀진 금석문 발견이 가끔씩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동래부사 이원진의 시에 따르면 신라 왕들이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갔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신라시대의 비석이 조선시대까지 동래온천에 남아있었고 비문을 이원진이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와 오늘날 사이에도 수백년의 시차가 있으니 그 사이 기간에 사라진 것이다. 혹은 문서 아래에 있는 감악산비처럼 풍화되어 육안으로는 비문 내용이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있기 때문에, 거기다 황초령비처럼 조각조각나 있는 상태라면 등산객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순수비의 건립 목적은 단순히 정복 활동 과시에만 그친 것은 아니고, 새로 신라에 편입된 현지 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명망 높은 승려를 대동하며 문화적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등 활동도 있었다고 본다. 고대 한국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 순수비에 새겨진 많은 정보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고, 훗날 다시 발견하고 그 유래를 분석하는 과정은 한국 금석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3. 목록
현재까지 발견된 진흥왕 시기 비석 가운데 영토순수의 성격이 있는 비석은 총 4개로, 북한산 순수비, 창녕 척경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가 이에 해당한다. 이 밖에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성류굴 벽의 신라 시대 명문 중에도 진흥왕이 행차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한편, 단양 신라 적성비는 진흥왕 시기에 건립되었으나 순수비는 아니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은 고구려 영토인 적성 지역을 신라가 차지한 후 신라에 협력한 '야이차'라는 적성 사람이 사고로 죽었으므로 남은 야이차의 가족에게 상을 내리고, 앞으로도 적성 사람들을 우대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3]
3.1.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자세한 내용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문서 참고하십시오.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3호. 문서 참조.
3.2. 창녕 진흥왕 척경비
자세한 내용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문서 참고하십시오.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33호. 문서 참조.
3.3.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자세한 내용은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문서 참고하십시오.광복 직후 주소를 기준으로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眞興里) 황초령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북한의 국보 제110호. 문서 참조.
3.4.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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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 천리장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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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현재의 북한 함경남도 해안 지역을 정복하고 568년에 이원군 동면 용산리 사동(寺洞) 만덕산[5] 봉우리 아래에 세운 순수비. 진흥왕 시기 신라의 북방 경계를 알려주는 귀한 사료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먼 곳에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비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북한에 있으며 북한의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경도 오지에 있어 신라 멸망 후 오랜 세월 잊혀져 있던 비석을 조선 시대의 지리학자 한백겸이 확인했지만 이후 조선 후기에는 다시 위치가 잊혀져 김정희 시대에도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워낙 먼 곳이라 직접 답사하기도 힘들다 보니 존재를 의심받았다. 현지 백성들은 비석 자체는 알았지만 한문으로 쓰여있는 비문을 읽지 못해 남이 장군의 비석으로 막연하게 잘못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1929년 역사학자 최남선이 현지조사를 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황초령비와 내용은 물론 왕을 옆에서 수행한 인물 명단도 거의 비슷해 거의 비슷한 시점에 같이 세웠다고 추정한다.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보존 상태가 다른 순수비보다 좋은 편이다. 그래서 훼손이 심한 황초령비의 내용에서 지워진 부분을 마운령비의 내용으로 대신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
비양면(碑陽面; 전면)
태창 원년(太昌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흥대왕(興大王)이 ○○를 순수(巡狩)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하도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짐(朕)은 역수(曆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헤아려 신구민(新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 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비음면(碑陰面; 후면)
이때 수레를 따른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대등(大等)은 훼부(喙部) 거칠부지(居朼夫智) 이간(伊干),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 사훼부(沙喙部) 모력지(另力智) 잡간(迊干), 훼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대나말(大奈末), 급진부지(及珎夫知) 나마(奈麻)이다.
집가인(執駕人)은 훼부(喙部) 만혜(万兮)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모지(另知) 대사(大舍)이다.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 급혜차(汲兮次)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비시지(非尸知) 대사(大舍)이다.
약인(○人)은 사훼부(沙喙部) 위충지(爲忠知) 대사(大舍)이고, 점인(占人)은 훼부(喙部) 여난(与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독지차(篤支次) 대사(大舍)이다.
나부통전(奈夫通典)은 본피부(本彼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이고, ○○는 본피부(本彼部) 막사지(莫沙知) 길지(吉之)이고, 급벌참전(及伐斬典)은 훼부(喙部) 부법지(夫法知) 길지(吉之)이다.
이내(裏內)○○○○○○○명(名) 길지(吉之)이고, 당래객(堂來客) 이래객(裏來客)은 50이고, 외객(外客)은 ○○ ○○○○○○○○○○지(智) 사간(沙干)이다. 조인(助人)은 사훼부(沙喙部)의 순지(舜知) 나말(奈末)이다.
이종욱(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
태창 원년(太昌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흥대왕(興大王)이 ○○를 순수(巡狩)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하도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짐(朕)은 역수(曆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祗)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헤아려 신구민(新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 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비음면(碑陰面; 후면)
이때 수레를 따른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대등(大等)은 훼부(喙部) 거칠부지(居朼夫智) 이간(伊干),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 사훼부(沙喙部) 모력지(另力智) 잡간(迊干), 훼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대나말(大奈末), 급진부지(及珎夫知) 나마(奈麻)이다.
집가인(執駕人)은 훼부(喙部) 만혜(万兮)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모지(另知) 대사(大舍)이다.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 급혜차(汲兮次)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비시지(非尸知) 대사(大舍)이다.
약인(○人)은 사훼부(沙喙部) 위충지(爲忠知) 대사(大舍)이고, 점인(占人)은 훼부(喙部) 여난(与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독지차(篤支次) 대사(大舍)이다.
나부통전(奈夫通典)은 본피부(本彼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이고, ○○는 본피부(本彼部) 막사지(莫沙知) 길지(吉之)이고, 급벌참전(及伐斬典)은 훼부(喙部) 부법지(夫法知) 길지(吉之)이다.
이내(裏內)○○○○○○○명(名) 길지(吉之)이고, 당래객(堂來客) 이래객(裏來客)은 50이고, 외객(外客)은 ○○ ○○○○○○○○○○지(智) 사간(沙干)이다. 조인(助人)은 사훼부(沙喙部)의 순지(舜知) 나말(奈末)이다.
이종욱(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의 내용은 요약하면 태창 원년(진흥왕 29년, 서기 568년)에 진흥왕이 순수에 나서 영토를 살피고 새긴다는 내용, 순수의 의미와 이유로 왕도정치의 표방,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백성과 토지를 얻었다는 자부심, 아직 왕이 은혜가 미치지 못한 곳이 있어 영토를 순수하고 민심을 위로한다는 내용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 뒤에는 진흥왕을 곁에서 수행한 여러 신하들의 명단을 쭉 써놓은 수가인명이 등장하는데 비석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승려, 고위 관리, 점쟁이, 약사 등 자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까지 기록해 놓아 진흥왕을 따라나선 다양한 구성원들을 엿볼 수 있다.
4. 관련 금석학 연구
4.1. 감악산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감악산 정상에 위치한 비석이다. 삼국 시대 비석임은 분명한데 근처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나 입지가 비슷하므로 이 또한 진흥왕 순수비가 아닌가 하지만, 오랜 세월 비문이 비바람에 닳아 없어져 읽을 수 있는 글자가 고작 열두어 자 남짓인 몰자비로 확실하게 판단할 근거가 없다.# 진흥왕 대신 진평왕이 세운 순수비라는 설도 있다.
감악산은 신라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취급하였다. 고구려나 당나라와 벌인 칠중성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고, 통일기 이후에는 국가에서 감악산에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감악산비의 존재 역시 조선시대부터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허목(1595~1682)이 《기언》 <하·산천 상·감악산기>에서 "석단 위에 비석이 있지만 오래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이 비는 비교적 현대까지도 '빗돌대왕'이라고 불리는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대전대학교 서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손환일은 학술지 <한국사상과 문화>에서 감악산비 글자 몇 자를 350년 만에 더 판독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손환일은 "광(光), 벌(伐), 인(人) 등 글자들이 있었으므로 영토정벌 후 세운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벌 자는 '이벌찬'의 벌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글자일 수도 있다."라고 발표했다. 2022년에는 정밀 조사를 위해 새 탁본이 만들어졌는데, 박홍국 위덕대학교 연구교수가 "'전(典)'이라는 글자를 추가로 판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典)자는 기존에 알려진 당대 신라 비석에서 자주 나오는 글자이기 때문에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평했다. # 이들 주장은 상당히 적극적인 해석으로 학계에서 엄밀히 검증되지는 않았다.
현재 부분 판독한 감악산비 전문은 아래와 같으며, 몇 개 문자 외에 어떤 어구를 이룰 정도의 판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을 검증하는 논문 등은 발표된 바 없다.
光....伐....人....中....金...
典.....
典.....
광....벌....인....중....금....
전.....
전.....
4.2. 울진 성류굴 명문
자세한 내용은 성류굴 문서의 울진 성류굴 명문 부분을
참고하십시오.